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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기 103년 7월22일 일요법회- 대종경 인도품 46장-보산 김제원교무님.hwp
◆원기 103년 7월22일 일요법회 대종경 인도품 46장
[원불교를 만나서 강연 : 주여안 교우님 ]
◆ 설법 : 보산 김제원교무님
오늘 더워서 쉬워야지 하는 생각 안했어요? 생각은 경계에 따라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행을 마음에 따라가지 않고 이렇게 오신게 바로 공부입니다.
1. 주여안 교우님과 소대용 예비교무님 , 설영우 예비교무님 공부담 후
주여안 교우님께서 원고를 아주 잘 쓰시고 꼼꼼하게 흐름에 맞게 강연도 잘 해주셔서 귀에 쏙쏙 들어오셨을 겁니다. 들으시면서 여러 생각을 많이 하셨을 겁니다. 주변 인연들도 생각이 나시고 처음 온 사람이 저렇게 생각할 수 있구나 하는 맘도 나셨을 겁니다.
두 분 예비교무님도 이야기 해주셨습니다. 자신들은 알려나 모르겠습니다. 제 마음속에 많이 각별히 아끼고 있는 교무들입니다. 설영우 예비교무는 정말 착합니다. 교당에 8년간 있으면서 일주일에 교당을 세 번 이상 왔습니다. 청년, 일반, 수요 공부방까지 세 번입니다. 중2때 저를 처음 봐서 이제 30살 넘었습니다. 제 설교를 제일 많이 들은 사람일겁니다. 제가 이 예비교무를 보며 가장 놀랐던 것이 일주일에 세 번 오는데 한 번도 상을 내는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기 싫다, 하는 말을 한 번도 한적이 없었습니다. 영우 교무를 보면서 상 없는 공부가 이렇게 큰 공부구나 싶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저 정도 봉사하면 상을 당연히 내는데 전혀 상없고 하기 싫은 맘 없이 당연하단 듯이 해오셨습니다.
머리가 좋고 나쁘고는 나중 일 입니다. 욕심이 많은 사람은 원불교에 처음 왔을 때, 맘과 귀를 안엽니다. 그런데 착한 사람들은 안그럽니다. 욕심이 많은 사람이 오면 저는 참 힘듭니다. 저는 욕심을 버리라고 하고 그 사람은 최대한 욕심을 내면서 달리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죽어라 노력해서 남들처럼 잘 살고 싶은데 교무님은 보이지 않는 마음만 이야기하고 몸과 마음이 아픈 때에는 달래주는게 아니라 되려 참회를 해야 한다고만 하니 얼마나 황당하겠습니까?
원불교의 인과를 잘 알고 인과를 이해하는 사람한테는 아프다고 하면 제가 참회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이야기 하면 화를 팍 냅니다. 저도 봐가면서 하긴 합니다. 만약에 아팠을 때 저한테 달램을 받으시는 분은 제가 아직 애기로 보고 있는 사람인겁니다. 달램을 받고 싶으십니까?
소대용 예비교무님도 칭찬하고 싶은 점이 있습니다. 우리 교당에서 제가 14년을 근무했습니다. 그중 가장 교당이 청결했던 때가 교혜경 교무하고 소대용 교무가 간사로 있을 때입니다. 전생에 이 사람들은 토를 때고 온 사람들인 것 같습니다. 소대용 교무에게 제가 놀란 것이 하나 있습니다. 소대용 교무는 마음공부 학사에서 살았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아침 선시간에 대용교무가 지각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한번도요 . 참 대단한 면이 있구나 싶었습니다. 저도 지각을 하는 적이 있는데 간사가 지각을 안합니다. 이것은 우연자연 되는 것이 아니라 본인 내부에 그렇게 하겠다는 굳은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한테 칭찬을 들은 사람들이 별로 없습니다. 제가 오랜만에 칭찬을 합니다. 저한테는 혼 안나는 것이 칭찬입니다. 이 두분은 앞으로 교단에 큰 역할을 할 것으로 생각을 합니다. 박수를 한번 부탁드립니다.
2. 주여안 교우님 강연내용에 대한 설법
주여안 교우님은 현도 교우가 결혼을 하겠다고 인사시키러 왔을 때 제가 처음 보았습니다. 제 방에 들어오는 기운을 보면 저도 사람 딱 압니다. 이 여자가 기가 셀 것인가, 원불교를 등질 여자인가, 남편까지 데리고 나갈 여자인가, 딱 보입니다. 눈빛만 봐도 딱 압니다. 그런데 여안 교우는 처음에는 버팅길 듯 했지만 결국 잘 따라와 줄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현도교우도 믿었습니다. 현도교우가 분명히 불공을 잘 할거라고 믿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제가 예상한 것 보다도 더 불공을 잘했습니다. 어찌보면 여안 교우는 원불교 법이 좋아서 이 공부를 하는 것도 있지만 아마 더 큰 이유는 자신의 남편인 현도교우가 원불교 공부를 잘 해서 그것을 잘 실천을 하기 때문에 이 공부를 같이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까 원고 내용에서 저와 같은 생각이 들으셨죠?
실천을 안하면 사람들이 [너나 잘해] 그럽니다. 가까운 인연에게 실천을 해서 감동을 준다? 그래서 그 사람이 나 때문에 원불교를 떠나는 게 아니라 온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지간히 잘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속적으로 내가 실천적 행동을 해야합니다. 말 하나 심법하나 모두 정성으로 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 사회 보신분의 짝도 여기 와계십니다. 원불교 실천을 잘 했으니 여기 같이 와 계신 거겠지요?
저는 딸만 둘입니다. 제가 키우지 못하고 정토가 다 키웠지요. 아들 둘을 키운다니 우리 여안 교우가 얼마나 애쓸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정남을 했으면 공감이 약했을 수도 있습니다.
결혼한 지 5년 만에 이곳 강연대에 섰다고 하지요. 처음에는 거절을 했습니다. 여러분들도 집에서 두 부부가 사는데 교당에 같이 가자고 했을 때 교당을 잘 모르는 쪽이 잘 따라 나섭니까? 잘 안됩니다. 보통 여자분이 먼저 교당에 다니고 남편을 데리고 오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남자들은 잘 못 데리고 옵니다. 물론 반대도 있습니다만 여자분이 남편을 교당에 더 많이 데리고 오는 편입니다. 현도교우는 남자가 아내를 데리고 온 경우니 얼마나 애썼을까 싶습니다. 본인은 아마 자신이 얼마나 애를 썼는지 아직 잘 모르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신심이 없던 사람이 결혼을 통해서 교당에 온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더구나 여안 교우는 집안이 경제적으로 풍부하게 살았던 듯 합니다. 경제적 어려움 없이 살았다는 것은 장점이자 단점입니다. 아쉬움이 없이 살았고 적당히만 하면 삶의 무난히 다 돌아가니까 정신적 자력이 약할 수 있었음을 본인이 아마 느낄겁니다. 본인이 주도해서 하는 것을 잘 못했을 수 있습니다. 여성 호르몬은 수동적이고 남성 호르몬은 공격적인 성향을 갖게 합니다. 여성이 여성 호르몬을 가지고 있으면서 거기에 지배당하지 않으면 상황에 따라서 얼마든지 능소능란 할 수 있습니다. 적극적일 자리에 적극적이고 소극적일 자리에 소극적이면서 진퇴의 도가 맞아집니다. 그런데 마음이 여성 호르몬의 영향을 초월하지 못하면 대체적으로 여자분들은 수동적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은 그게 아닙니다. 시대가 개벽이 되어서 이제 여자가 훨씬 유리합니다. 제가 여자교무였으면 이거보다 훨씬 잘 됐을 겁니다. 종교가는 어머니의 성품과 같은 측면이 있기 때문에 여자교무님들이 훨씬 유리합니다. 제 안에도 어머니 마음이 있는데 사람들이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여안 교우가 현도 교우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종교에 대해서 내게 강요하지 말아달라. 법회 마치고 집에서 밥 먹고 종교 행사 때문에 집안 행사를 미루고 하지 말아달라] 라고 했다고 합니다. 현도 교우가 결혼 초기에 그래서 조금 달라졌었습니다. 그러다가 정아교우가 여안교우에게 현도교우의 청년시절 이야기를 해준 모양입니다.
현도교우가 청년시절에 회장도 하고 정말 열심이었다고 이야기 했더니 여안 교우는 현도교우가 본인 때문에 변한거라고 생각이 든 모양입니다. 그래도 본인의 주견이 강하면 그러던지 말던지 자신에게 맞추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안교우는 현도교우가 태도가 흐트러지고 신심이 약해져서 그런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맞추어 주는 불공을 하느라고 교당에 소홀한 것을 알고 자신을 위해준 현도 교우의 마음에 고마움을 느꼈습니다.
우리 교당에 저기 보이는 유아실이 강급의 방입니다. 저기도 영상으로 법회를 보고 들을 수 있지만 아이들 소리에 잘 안들리니까 그냥 자신들끼리 모여서 떠듭니다. 몇 번 그러다보면 내가 교당에 왜 가지 싶고 강급을 하게 됩니다. 제가 원불교학과 회장을 할 때 독방을 썼습니다. 회장을 하다보면 방에 사람들이 많이 드나들고 할 일이 많아서 독방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때 사람들이 걱정을 했습니다. 혼자 지내면 강급하기 쉬워지기 때문입니다. 자력이 없으면 강한 타력을 찾아야 합니다. 자력도 없는데 혼자 해보겠다고 하는 사람은 나는 강급을 하겠다 하는 말과 똑같습니다.
여안 교우는 아들이 둘입니다. 우리 교당에서는 어린이 법회도 보고 일반법회도 보고 청년법회 고원회 법회등 열심히 법회를 유지해나가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서로 시너지 효과를 냅니다. 교화가 꼭 위에서부터 내려오며 진행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부모가 다니고 자녀들이 교당에 다니는 것보다도 오히려 자녀들 때문에 부모가 오는 경우도 저는 많이 봤습니다.
요즘은 딸을 낳아야 점수를 더 받습니다. 여안교우는 아들이 둘이지요. 개인적으로는 섭섭할 수 있어도 국가적으로는 이익입니다.
우리 교당에 미인회라는 모임이 있습니다. 오늘도 법회 마치고 저랑 2시간 동안 일기기재 검사도 받고 문답감정도 하는 모임을 갖습니다. 한 달에 한 번씩 합니다. 이들이 이 모임을 만든 이유는 스스로 강급하기 싫어서일 겁니다. 여기 지금 항마위정도 되시는 분들은 대게 젊은 시절에 직업이 없으셨을 겁니다. 그 시절에는 한 사람만 벌어도 괜찮았습니다. 그래서 그 때는 봉공회도 잘 되고 그랬을 겁니다. 물론 지금도 젊은 교도들을 따뜻하게 잘 대해주고 계십니다만 더 잘해주셨으면 합니다. 저 친구들은 직업을 가지고 애도 키우고 하면서 애씁니다. 저 나이때가 딱 강급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것을 미리 감지하고 청년회 때 공부를 열심히 시켰습니다. 가치관, 인생관, 행복관 잘 챙긴 다음에 그런 다음에 결혼을 하라고 청년들에게 강조합니다. 그렇게 강하게 배우고 결혼을 해도 지금 여러 경계 앞에서 정신을 잘 못차립니다.
그래서 타력을 입을 기회를 많이 만들어서라도 강급을 하지 않으려고 공부심을 냅니다. 여안교우를 칭찬해 주고 싶은 점이 바로 이런 타력들을 잘 챙기면서 진급해가고 공부심을 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3. 삶의 경계에서 서원을 챙기며 진급하려면
서원이 있으면 좀 다르기도 합니다. 직업이나 가정상황의 여건에 따라서 자신이 서원 세운건 꼭 가져가겠다 하는 사람은 그래도 강급은 안합니다. 만약 이렇게 힘든 시기인 30-40대 초반에 진급을 하게 되면 정말 출가위까지 갈 수 있습니다. 이때 그냥 버티기만 하면 잘 하면 항마위 가던가 그렇지 않으면 못갑니다. 강급을 했다, 그러면 그냥 법호 받고 끝납니다. 제 말에 동의 하십니까 ?
나 애키우기도 바쁜데 교무님도 참.. 하는 맘이 납니다. 그런데 현실경계에서 공부심, 신심, 공심을 잘 챙겨서 서원과 함께 꼭 챙기고 가지고 가야 합니다. 물론 힘들면 그 크기를 줄여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놓고 가면 절대 안됩니다. 챙기고 꼭 가져가야 합니다. 내가 아무리 힘든 상황이라도 이것만큼은 꼭 해야겠다 하는 마지노선이 있어야 합니다.
처음에 결혼하면 순경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공부심이 까라지게 되있습니다. 거의 그렇습니다. 결혼 초에 공부심이 살아난다? 이 사람은 약간 비정상입니다. 정말입니다. 마음과 몸이 같이 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때에도 어느 선을 지키면서 공부심을 챙기면 나중에 내 부모를 희사위에 올리는 효자가 됩니다. <나는 마음좀 안정하러 왔다.> 초입자때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특신정도가 되면 <내가 이 생에 항마, 출가, 여래위는 가보겠다> 하는 생각이 납니다. 아니면 <이 생에 나는 불보살의 대열에 들어야 겠다. 이 생에 내가 수많은 생에 살아온 업력을 다 녹여버리고 한번 수행으로 인한 기쁨의 세계에 들어야 겠다. 나도 내가 존경하는 성자들과 파수공행 해 보겠다> 하는 그런 용기, 용맹 정진심이 특신급때 팍 서야 합니다. 그런데 특신급때 이런 맘 없이 어영부영 넘어가면 30-40대 경계에서 그냥 서시히 마음이 까라지고 없어집니다.
4. 부부의 도를 공부하며 사는 부부
부부의 도를 결혼선물로 받고 여안 교우님은 그것을 잘 기억하고 계신 듯 합니다. 부부의 도가 정산종사님 것은 4가지 이고 , 대산 종사님것은 3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가 신용, 둘째는 공경, 셋째는 자력입니다.
부부간에 신용을 지키기가 쉽지 않습니다. 공경도 마찬가지이지요. 공경을 받을 때는 쉬워 보이지요. 하지만 공경을 하는 것이 그리 쉽지 않습니다. 남편에 대한 공경 뿐 아니라 가족에 대한 공경도 들어갑니다. 내 가족 뿐 아니라 남편의 가족에게도 공경을 다해야 합니다.
자력, 이 자력이 매우 중요합니다. 자신이 자력을 갖추어야 나의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잘 해줄수 있습니다. 자기 불공으로 자력을 갖추고 자신이 행복해져야 가족도 행복하고 부모에게도 저절로 효도하는 길이 됩니다.
5. 인과의 신앙과 처처불상의 신앙
처처불상 이야기를 해줬습니다. 원불교에 다니는 사람이 가장 기본으로 해야 할 것이 인과신앙, 처처불상 신앙입니다. 인과신앙은 먼저 상황을 수용을 하는 것입니다. 순응한다는 것이 따르기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아까 우리 기도문에 사회자가 날씨에 순응하자고 했죠? 그런데 순응만 하면 안됩니다. 더우면 선풍기를 켜야죠, 덥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만 말고 에어컨을 켜고 시원하게도 있고 샤워도 하고 해야지요.
인과를 받아들이되 인과를 활용해야 합니다. 받아만 들이면 인과 신앙을 반만 하는게 됩니다. 수용도 하지만 개척도 하는 창조적 인과신앙을 해야 합니다.
행복하고 싶으시죠? 불행하고 싶으신 사람 있습니까? 만약 그러면 제가 바로 불행하게 해드리겠습니다. 불행하고 싶으신 분은 이렇게 하시면 쉽습니다. 다른 사람을 막 괴롭히세요. 다른 사람을 힘들게 하면 확실히 내가 불행해집니다. 정말 내가 행복하고 싶으면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해 주시고 다른 사람을 진급하게 도와주고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 주시면 됩니다. 자력생활을 하면서 대타관계에서는 보은 불공이 있어져야 합니다. 짧게 보면 내가 에너지를 쓰니까 손해인 듯 하지만 조금만 지나면 더 기분 좋게 돌아옵니다. 폭풍처럼 이것도 오고 저것도 옵니다.
갑 집과 을 집이 있습니다. 갑 집의 아주머니가 어느 날 시골에서 가져왔다고 나누어 먹자고 하면서 고구마를 가지고 옵니다. 그랬더니 을 집의 아주머니가 우리 집에도 강원도에서 가지고 온 옥수수가 있다면서 나누어 줍니다. 그러면 나는 고구마도 먹고 옥수수도 먹습니다. 나중에 엘리베이터에서 만났을 때도 기분 좋게 서로 인사할 수 있겠지요. 내 것만 내가 충실하게 먹으면 옥수수도 못 먹고 엘리베이터에서 서로 노려만 봅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잘 해줄때의 마음을 깊게 들어가보면 잘해야 겠다는 마음을 넘어서 평등하다라는 이치가 있습니다.
제가 가는 종교인 모임에서 어떤 분이 자신이 잘 아는 사람에게 이런 충고를 했다고 합니다. [ 첫째, 교언영색하는 자를 가까이 하지 마시고 둘째, 충성맹세하는 자를 가까이 하지 마십시오.] 충성맹세는 왜 하는 걸까요? 보통 권력자에게 합니다. 정말 그가 충성스러운 사람이라면 어디서든 예를 들자면 제주도에 있는 예멘 난민에게도 더 충성스럽게 대할 수 있는데 왜 권력자에게만 충성을 하려는 것일까요?
사람을 대할 때 높은 사람에게도 잘 해야 함이 맞지만 두루두루 모든 사람에게 잘하는 것이 원만 구족한 신앙입니다. 저는 어디에 잘 하는 사람 같습니까? 위에 잘하는 것 같습니까 아니면 옆이나 아래에 잘하는 사람 같습니까?
6. 정화신불과 편화신불 (처처불상이 안되는 이유, 잘하는 방법)
왜 우리는 처처불상으로써, 평등으로써 신앙을 해야 하는데 그게 잘 안되는 걸까요?
아부를 하더라도 위에 힘이 있는 사람한테는 잘 됩니다. 고개도 숙여지고 선물도 갖다주고 그럽니다. 약한 대학보다 하버드 스탠포드에 장학금이 더 몰립니다. 같은 이치이죠.
정화신불과 편화신불이 있습니다. 정화신불한테는 누구나 잘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편화신불, 약자, 내 맘에 안든 사람 이런 사람들에게 어떻게 내가 잘 할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걸 잘하는 것이 원불교 신앙의 정말 핵심 포인트입니다. 마음에 안 드는 며느리가 부처로 보이십니까? 자기 일만 아는 직원이 부처로 보이십니까? 좋은 것만 쏙쏙 뺴먹는 상사가 부처로 보이십니까? 잘 안보입니다. 그런데 저는 보입니다. 그들의 현상의 행동은 전혀 부처가 아닙니다. 그러나 가능성의 부처님입니다. 근원의 부처님이신겁니다. 이 두 가지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근원이 뭐죠 ? 일체 중생의 본성입니다. 저 일원상 즉, 내 안의 참 마음이 일원상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못난 사람도 마음에 일원상을 가진 사람입니다. 근원의 일원상이고 변화 가능성의 일원상입니다.
어떻게 변화하죠 ? 계속 강급할 수도 있겠지만 언제 그 사람이 어떻게 변화할지 모릅니다. 역사 속에도 그런 사람 많습니다. 위대한 성자라고 하는 사람 중에도 4차원인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수 십 명을 죽인 사람도 있고, 살인을 몇 백 명씩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천하에 나쁜놈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한 마음 대 참회의 길로 들어서면 대 성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가능성의 부처님이더라 이겁니다. 가능성의 부처입니다. 부처가 아닌 행동을 하면 그 순간은 부처가 아닙니다. 그 행동과 그것과 별개의 근원적인 면, 이 두가지를 구분할 줄 알아야 원불교 처처불상의 평등신앙을 잘 할 수 있습니다.
구별은 하되 차별이나, 계산 ,계교 ,무시하지 않는 것이 원불교 신앙입니다. 대종사님께서 그러셨습니다. [좋은 사람한테는 누가 좋게 못대하는가? 진짜 공부를 한다는 것은 마음에 안드는 사람, 약자에게 자비의 손을 내어주자는 것이다. ]
자비는 따뜻하게 해주는 것도 자비이지만 때로는 혼내는 것도 자비입니다. 그 사람을 결국은 살려내는 것, 진급하게 해 주는 것이 자비입니다. 그놈 나쁜놈이라고 말하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내 힘이 닿는데 까지 최대한 하는 것이 자비입니다.
얼마전 어린이집에서 사고가 나서 아이가 죽었습니다. 그 사건에 대해서 한교도에게 질문을 받았습니다. [제가 마음 공부하는 사람이고 나도 자식이 있는데 어머니의 마음이 살짝 들다 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 하고 물었습니다.
대종사님 시절에도 이 비슷한 돌발 문답감정이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세계가 한 기운이라고 말했습니다. 다들 맞는 말이고 좋은 말이다고 공감하는 가운데 대종사님께서 돌발 질문을 하십니다. [그래 ? 그렇다면 포수가 새를 쏘아 명중시켰을 때, 포수는 기분이 좋지만 새는 죽어가고 있다. 이것은 어떻게 한 기운이라 해석되겠는가? ] 하고 말입니다 .
만약 세계가 한 기운이면 우리도 예멘 난민을 당연히 도와야지요, 우리나라도 북간도나 일본에 난민에 되어 가기도 했었습니다. 그때 거기에서 정착을 못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막연하게 전체가 하나라고 알고만 있는것도 곤란합니다.
7. 진공묘유의 이치
민법과 형법에 큰 차이가 있다고 합니다. 민법은 사실이 중요한 관건이 된다고 합니다. 진실이 중요하지요. 형법은 절차적 내용과 형식이 더 중요하다고 합니다. 우리로 치면 진공묘유입니다. 종교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진실에 너무 매입니다. 진실만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현실에서는 절차와 형식이 더 중요할 때가 많습니다. 진실적인 면과 현상의 세계에 대한 고려, 이 두 가지가 맞물려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진공만 있지도 않고 묘유만 있지도 않습니다. 더 들어가면 진공이 묘유이고 모유가 진공이지만 또 그걸 나누는 입장이다 보면 진공과 묘유가 분명히 다릅니다.
원불교 공부를 하실 때 , 막연하게 하나다 이렇게 생각하면 안됩니다. 만법이 귀일이다면서 일귀하처 라 합니다. 그 하나가 다시 어디로 돌아갔나 이겁니다. 하나가 어떤 하나일까요? 뭉뚱그려진 하니일까요? 숫자적 하나일까요, 만법의 하나일까요 ?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
8. 여안교우님을 응원하며
오늘 여안교우에게 자녀교육에 대한 이야기를 더 해주고 싶었는데 시간이 벌써 흘러서 여기까지 할까 합니다.
우리 여안교우가 결혼하면서 그냥 교당에 다니는 것이 아니라, 진짜 원불교의 주인이 되어서 현도교우보다 원불교 공부의 재미를 더 느끼고 대진급을 하여 영생의 행복을 느낄 수 있도록 따뜻한 격려의 박수를 한번 보내주시면 좋겠습니다. (박수) 감사합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