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산.영월 신씨(靈山.寧越 辛氏)
신씨의 본관은 영산, 영월 2본이지만 모두 같은 혈족으로서 靈山辛氏가 큰집이다.
시조는 고려 인종 때 송나라 사신으로 우리나라에 와서 귀화, 문하시랑 평장사를 지낸 신 경(辛 鏡, 호:巖谷(암곡), 시호는 정의(貞懿)이다.
그의 선대는 당나라 사람으로 현종 천보 연간, 즉 신라 경덕왕대 귀화하였다고 하나 상고할 수 없고, 그 후 신 경이 다시 와서 신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전한다.
신씨의 세계는 시조의 8대손에서 상장군공파, 덕재공파, 초당공파, 부원군파, 판서공파의 5파로 갈리는데, 앞의 3파는 영산 신씨, 뒤의 2파는 영월 신씨로 분관된다
영산 신씨(靈山 辛氏)에 대(對)하여
1. 시조(始祖) : 신경(辛鏡)
2. 유래(由來) :
신씨(辛氏)의 선계는 중국(中國) 농서(隴西: 寧州의 속현) 출신(出身)으로 중국(中國)의 북송(北宋) 때 8성(張·洪·嚴·郭·慶·李·辛·池)이 의형제(義兄弟)를 맺고
이름을 모두 “경(鏡)”으로 정하고 고려(高麗)에 건너왔다는 8학사(學士)의 한 사람인 신경(辛鏡)이다.
신경의 선대 또한 당나라 현종(玄宗) 천보(天寶) 연간에 엄시랑(嚴侍郞)과 함께 신라에 왔다고 하나, 그 뒤의 세계가 분명하지 않다.
한편 《신씨성관고(辛氏姓貫考)》에 따르면 영주(寧州)는 중국에 없고, 우리나라 영변(寧邊)의 옛 지명이라 하며 신씨가 귀화한 성씨가 아니라고 하였다.
신경은 1138년(인종 16)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고 금자광록대부(金紫光錄大夫)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이르렀고, 정의(貞懿)라는 시호(諡號)를 받았다.
그는 자신이 살던 중국 감숙성(甘肅省)에 있는 천축산(天竺山)과 산세가 비슷한 지금의 창녕 영취산(靈鷲山) 아래에 뿌리를 내려 우리나라 신씨의 시조가 되었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시조 신경이 처음 정착한 영산(靈山)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잇게 되었으며, 9세손에 와서 영월(寧越)로 분관하였다고 한다.
즉 영산신씨는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를 지낸 신천(辛蕆: 신지화(辛至和)의 장자)을 파조로 하는 덕재공파(德齋公派)와 좌찬성(左贊成)을 지내고
영산부원군(靈山府院君)에 봉해진 신혁(辛革: 신지화의 차자)을 파조로 하는 초당공파(草堂公派), 중정대부(中正大夫) 신성렬(辛成烈: 신공근(辛恭近)의 아들)을 파조로 하는
상장군공파(上將軍公派)로 갈라졌고, 영월부원군(寧越府院君)에 봉해진 신온(辛蘊: 신지화의 3자)을 파조로 하는 부원군파(府院君派)와 이부판서(吏部判書)를 지낸
신한(辛: 신지화의 4자)을 파조로 하는 판서공파(判書公派)의 후손들은 영월로 분관하여 세계를 이어왔다.
3. 본관연혁
영산(靈山)은 경상남도(慶尙南道) 창녕군(昌寧郡) 영산면 일대의 옛 지명으로, 신라 때에는 서화현(西火縣)이라 불렸다가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상약(尙藥)으로 바뀌어 밀성군(密城郡: 密陽)의 영현이 되었다.
940년(고려 태조 23)에 영산현으로 개칭하고, 밀성군으로 병합하였다가 1274년(원종 15)에 감무를 두면서 독립하였다.
1394년(태조 3)에는 계성현(桂城縣)을 병합하였고, 조선시대까지 명맥이 이어졌다. 취산(鷲山)·취성(鷲城) 등의 별호가 있었다.
1896년(고종 33) 경상남도(慶尙南道) 영산군이 되었다가 1914년에 군면 폐합으로 영산군이 폐지되고 일부 면은 함안군에 편입되었고,
읍내면이 영산면으로 개칭되어 나머지 6개 면과 함께 창녕군에 통합되었다.
4. 계파 및 분파
영산계(靈山系) : 덕재공파(德齋公派)·초당공파(草堂公派)·상장군공파(上將軍公派)
영월계(寧越系) : 부원군파(府院君派)·판서공파(判書公派)
5. 세거지
-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송학리
- 경기도 여주군 대신면 후포리
- 충청북도 괴산군 화평읍 남차리
- 충청남도 금산군 제원면 수당리
-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동중리
- 경상북도 월성군 강동면 모서리
- 경상북도 금릉군 아포면 사대동
- 함경남도 이원군 차호읍 포항리
- 경상남도 울산시 울주군 삼동면
6. 영산신씨 본관유래
본관은 영산 (靈山) · 영월 (寧越)의 2본이며, 양쪽이 같은 연원의 분파로서 영산신씨가 큰 집으로 알려져 있다.
도시조는 고려 고종 때 문하시랑평장사를 지낸 경(鏡)이며, 그의 선대는 당(唐)나라 사람으로 현종(玄宗) 천보연간, 즉 신라 경덕왕 때 신라에 귀화하였는데,
그 뒤 경이 다시 와서 신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7. 가문의 번영
신씨는 고려 후기에 가장 번창했으나 신돈 (辛旽) 사건 이후 급격히 쇠퇴하였다.
돈은 본래 영산(靈山 :경남 창녕군에 속하며) 옥천사(玉川寺)의 승려로서 고려 공민왕의 총애를 받아 한때 정권을 장악하였다.
그는 토지개혁 · 노예해방 등 혁신정책을 폈으나 , 귀족사회와 지주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권력의 지나친 전횡으로 왕의 신임을 잃었으며,
공민왕(恭愍王)을 시해하려던 음모가 발각되어 죽음을 당했다.
뒷날 이성계(李成桂)는 우왕(禑王)과 창왕(昌王)을 돈의 자손이라는 구실로 ‘ 폐가입진 (廢假立眞) ' 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 우왕과 창왕을 폐하고
왕통인 정창군(定昌君:제20대 신왕의 7대손)을 세웠는데, 이 사람이 고려 최후의 왕인 공양왕이다. 그러나 우왕과 창왕의 신성설(辛姓說)은 이성계의 조작이라는 것이 사학계의 통설이다.
신씨는 조선시대에 53명의 문과 급제자와 7명의 공신을 배출하였다. 영산신씨 초당공파는 신씨 중에서 가장 많은 인물을 냈는데, 그 중 유정(有定)과 그 후손이 두드러진다.
유정은 태종 때의 무관으로서 충청도 병마도절제사(兵馬都節制使)와 평안도 도안무사(都按撫使)를 역임하면서 전후 25회나 왜구를 격퇴하였다.
그의 아들 인손(仁孫)은 세종 때 경상도관찰사 · 병조참판 · 형조판서 등을 거쳐 예문관대제학에 이르렀고 , 인손의 아들 석조(碩祖)는 세종 때 최초로 사가독서(賜暇讀書)하여
호당(湖堂)의 효시가 되었으며, 세조 때 이조참판 · 대사헌에 이르렀다 .
석조의 손자 영희(永禧)는 문명을 떨쳤고, 계영(啓榮)은 1624년(인조 2) 일본에 가서 임진왜란 때 잡혀갔던 조선인 146명을 데리고 왔다.
이 밖에도 광주목사(光州牧使)로 있을 때 노모의 봉양을 위해 사임한 윤(崙),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우고, 민폐를 끼치는 변절자 공호겸(孔好謙)을 생포하고
보성군수(寶城郡守)를 지낸 초(礎), 노모의 봉양을 위해 외직(外職)을 자청하여 흥양(興陽) · 함평 (咸平)의 현감, 파주목사(坡州牧使)를 지낸 응망(應望) 등이 있다.
부원군파에서도 많은 인물이 나왔다. 응시(應時)는 선조 때 전라도관찰사 · 예조판서 · 대사간 · 부제학 등을 역임하였고 ,
그의 아들 경진(慶晉)은 인조 때 대사헌을 지내고 청백리에 녹선 되었는데, 이 부자는 특히 학자로 이름났다.
경진의 4촌 경영(慶英)은 인조 때 이인거(李仁居)의 난을 평정하여 소무공신(昭武功臣)에 올랐다. 또 윤무(允武)는 중종반정 때 정국공신에 오른 뒤 여러 요직을 지냈으나 1513년(중종 8) 죽음을 당하였다. 그의 4촌 윤문(允文)도 정국공신에 올랐다.
이 밖에도 고려 충숙왕 때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낸 영산신씨 덕재공파의 파조 천( ), 그의 후손으로 공조판서 경운(慶雲), 직제학 재(齋), 호조판서 종선(從善),
중종반정 때 정국공신에 오른 은윤(殷尹), 선조 때 이몽학(李夢鶴)의 난을 평정하여 정난공신(靖難功臣)에 오른 경행(景行) 등이 있다.
8. 대표적인 인물
계통별로 살펴보면 덕재공파 천의 아들 인거가 판통례문사와 경주판관을 거쳐 충묵왕조에서 정당문학을 역임했다.
천의 8세손으로 습독을 지낸 질의 아들 경행(景行)은 병조좌랑을 거쳐 한산 군수로 나갔다가 이몽학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세워 청난삼등공신으로 영성군에 봉해졌다.
초당공 혁(革)의 후손에서는 그의 손자 예(裔)가 좌정언과 지신사, 첨의평리 등을 지내고 총목왕때 취성부원군에 봉해졌으며,
예의 아우 부(富)는 홍건적의난때 함종전투에 출정하여 장군 이견과 함께 장렬하게 전사했다.
한편 조선 태조때 개국원종공신에 책록된 유정(有定)은 성품이 곧고 급하여 옳지 못한 일을 보면 남의 일이라도 꾸짖거나 손을 대지 않고 못배기는 무인기질이 있어 남에게 미움도 많이 샀다.
그가 왜적에게 포로가 되었을 때 적은 그를 꿇어앉히고 칼로 위협하였으나 완강하게 저항하여 굴하지 않자 왜적은 차마 목을 베지는 못하고 다리 사이의 신낭을 베었다고 한다.
유정의 아들 인손(引孫)은 도승지와 판한성부사, 형조 판서 등을 지낸후 예문관 대제학에 이르렀으며 글씨에도 뛰어났다.
그의 아들 석조(碩祖)는 집현전 학사에 등용되어 저작랑, 직제학, 우사간 등을 지내고 세조때 공조와 이조의 참판을 거쳐 대사헌과 개성부 유수를 역임(歷任)했으며
문장에 능하여[세종실록]과 [의방유위],[경국대전]등의 편찬에 참여했다.
영성부원군 온(蘊)의 후손에서는 광정대부로 문하시중에 오른 중석(仲碩)과 홍주 목사로 홍건적의 난에 공을세워 익찬공신에 책록된 염(廉)의 부자가 유명했으며,
영원군 숙거(叔据)의 아들 윤문(允文)과 윤무(允武) 형제가 뛰어났다
이들 형제는 중종반정때 박원종과 더불어 반정 행동대로 공을세워, 형인 윤문은 정국공신으로 영월군 봉해지고 아우 윤무는 정국공신으로 병조판서와 좌찬성을 거쳐
영천군에 봉해졌으나 천인 정막개의 무고로 억울하게 대역죄를 뒤집어쓰고 죽음을 당했다.
상장군파에서는 성렬의 손자 사천(斯薦)이 고려 말에 전공판서를 지내고 고려의 국운이 기울자 곡강으로 낙향하여 절의를 지켰으며,
희수(希壽)의 아들로 재종숙인 원에게 출계한 초(礎)는 임진왜란(壬辰倭亂)때 창녕의 화왕산성에 주둔한 곽재우의 막하로 들어가 전공을 세우고,
현풍 현감으로 나가 선정을 베풀고 방비를 굳게 하여 크게 명성을 떨쳤다.
신천?~1339년(충숙왕 복위8년)
고려의 문신. 호는 덕재 문과에 급제,1314년(충숙왕1년)선부 직랑이 되고, 판밀직사사에 올랐다. 안향의 문인으로 스승을 문묘에 종사케 했으며, 시호는 응청이다.
신부(辛富)
1355년(공민왕4년)취산군으로 판개성부사가 되었다.1359년 홍건적의 난 때 출전하여, 이듬해 함종 전투에서 전사했다.
신예(辛裔)
고려(충혜왕)때 좌정언. 지신사. 첨의 평리를 역임하였고(충목왕)때 취성부원군에 봉해졌다.
신순(辛珣)
고려의 무신. 취성부원군 예 의 동생.(충묵왕)때 대호군을 지냈고.1356년(공민왕5년) 사윤으로 압록강 서쪽의 8참(병마부사)의가 되어 참전했었다.
이 때 원나라의 직성사인이 태사도 기철이 이미 포살된 줄도 모르고 기철에게 전할 선명과 도장을 가져오는 것을 발견, 그들 일행을 살해하고 그 선명과 도장을 탈취했다.
또한 판도판서를 거쳐 1363년 홍건적을 물리친 공으로 1등 공신이 되어 신돈 일당에 가담하여 권세를 부리다가 신돈의 복주와 함께 무릉도에 유배되었다.
신돈(辛旽)?~1371년(공민왕20년)
고려의 중. 호는 청한거사, 법명은 편조, 자는 요공, 어려서 중이 되어 각지를 방랑하다가 김원명의 추천으로 공민왕을 만나고 나서부터 신임을 얻어 정치.종교의 대권을 장악한 인물이다.
그 후에 1365년(공민왕14년)진평후에 오르고 수정리순론도섭리보세 공신.벽상삼한삼중대광.영도첨의사사.판감찰사사.취성부원군.제조승록사사 겸판서운 관사가 되었다.
이듬해에 전민변정도감을 설치케 하여 자신이 판서에 취임, 문란한 토지제도의 개혁을 단행, 농민의 권익 옹호와 구가 재정의 충실을 꾀했고, 급진적인 개혁으로 상층 계급의 반감을 샀으나,
왕의 신임이 두터운 것을 기화로 권력을 남용하여 인망을 잃었다.
그 후인 1367년 영록대부. 집현전 대학사에 올라 귀족 세력의 기반을 무너뜨리고자 천도를 건의하였으나 왕과 대신들의 반대로 실패하고 말았다.
신유정(辛有定)
1347년(충목왕3년)~1426년(세종8년)
고려. 조선의 무신. 판개성부사 부의 아들. 음보로 산원이 되고,1386년(우왕12년)정용 호군으로 척형 충청도 도원수 이승원을 따라 25차례나 왜구를 물리친 인물이다.
태조가 즉위하자 전에 그를 시종했던 일로 총애를 받아1397년(태조6년)에 이산진 첨절제사가 되고,1400년(정종왕2년)왕세자가 된 방원(태종)의 천거로
봉상시 판관,이어, 공조, 예조, 형조의 전서를 거쳐1403년(태종3년)강원도에 침입한 왜구를 격퇴하고 판강릉대도호사부사. 좌군 동지총재가 되었다.
또한 1407년 의주도 병마사를 거쳐, 1410년 경원에 침입한 야인 우디거의 정벌에 좌군 도총제로 부원수가 되어 도원수 조연과 함께 출정하고,
돌아와 충청도 병마도절제사를 거쳐 평안도 도안무사가 되어 1415년 (태종15년)병으로 사직을 하였다. 신유정의 시호는 무절이다.
신인손(辛引孫)1384(우왕10년)~1445년(세종27년)
조선의 문신, 초명은 안주, 자는 조윤, 호는 석천, 병마절도사 유정의 아들,1408년(태종 8년)생원으로 문과에 급제, 사관이 되었다가 이어 주서에 전임하여
여러 대군들과 서 사를 강론, 특히 세종의 총애를 많이 받았다.
그의 관직은 예조정랑에 있을 때 도총제 권희달을 따라 명나라에 다녀와 내섬시 소 윤.사인.집의.선공감정.지형조사.경상도관찰사.도승지.병조참판.판한성부사.
형조판서. 예문관 대제학등을 역임 하였으며, 글씨에도 타고난 제질이 있었다고 한다. 시호는 공숙이다.
신균(辛均)1395(태조4년)~1473년(성종4년)
조선의 문신 자는 경화증 호조판서 중선의 나들,1418년(태종18년)음보로 동부녹사에 시보, 뒤에 지안성군사. 순흥 도호부사. 예빈시윤. 판제용감사를 거쳐 검교한성부윤 이 되고
이어 첨지중추원사. 겸교호도참판. 행호군을 역임하고,1473년(성종4년)지중추부사로 취임한 지 몇달만에 대관의 논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그 후에 호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호이 다.
신석조(辛碩祖)1407년(태종7년)~1459년(세조5년)
조선의 문신, 초명은 석견, 자는 찬지, 호는 연빈당, 판서 인손의 아들,1426년(세종8년) 식년문과에 급제, 세종의 총애를 받아 집현전학사에 등용 되었고,
집현전저작랑.직제학,우사간,집현전부제학,을 역임하였다.
1456년(세조2년)공조참판 때 정조사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이조참판, 대사헌, 개성부유수를 지냈으며, 학문이 뛰어나고 문장이 능했으며,세종실록.의방유취,
경국대전,편찬에도 참여한 인물이다. 시호는 문희다.
신영희(辛永憘)
조선 중기의 학자, 자는 덕우, 호는 안정, 참판 석조의 손자이다.
현감 수담의 아들, 김종직의 문인. 사마시에 합격을 했으나 불원간에 화 가 있으리라는 동문 김굉필의 충 고로 벼슬을 단념하고 직산에 가서 남효온. 홍유순등과
죽림의 벗이 되어 학문에 정 진하여,크게 문명을 떨친 인물이다.
신윤(辛崙)1504년(연산군10년)~1565년(명종20년)
조선의 문신, 자는 경립, 참의 필주의 아들,1518년(중종13년)15세에 진사가 되고 1546 년(명종1년)증광문과에 올라 을과로 급제,성균관학정.박사.전적.형조좌랑.등을 거쳐
1550년(명종5년)경상도 도사겸 춘추관 기주관을 역임하였다.
또한 1552년 함경도 도사로 임명되었다가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 사임하였으며, 훗날 뒤에 예조. 공조. 형조 의 정랑을 지냈고 1563년(명종18년)광주목사에서
다시 모친의 봉양을 위해 사임했다. 그의 사는 향양사에 현제 제향을 지내고 있다.
신응시(辛應時)1532년(중종37년)~1585년(선조18년)
조선의 문신, 자는 군망,호는 백록, 부사 보상의 아들, 백인걸의 문인,1552년(명종7년)
진사가 되고,1559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설서. 정언을 지낸 뒤 사가독서를 했다.
1566년 문과중시에 병과로 급제, 예조. 병조의좌랑. 교리등을 거쳐 선조즉위 초에 경연관이 되었다.
그 뒤에 모친상을 입고 있을 때 주자대전 중에서 예에 관한 부분 을 발췌, 주문문례 를 간행했다. 그 후의 벼슬을 보노라면 전라도 관찰사. 예조참의. 병 조참지를 거쳐 대사간. 홍문관부제학에 이르렀다 배천의 문희서원에 제향을 지내고 있으며, 시호는 문장이다.
9세손에 와서 판밀직사사를 지낸 천을 파조로 하는 덕재공파와 좌찬성을 지내고 영산부원군에 봉해진 혁(革)을 파조로 하는 초당공파, 중정대부 성렬(成烈)을 파조로 하는 중정공파로 갈라졌고,
지화의 세째 아들로 영월부원군에 봉해진 온(蘊)을 파조로 하는 부원군파와 이부판서를 지낸 한을 파조로 하는 판서공파의 후손들은 영월로 분관하여 세계를 이어왔다.
9. 영산 신씨 항렬표
[영산 : 영월신씨 항렬표]
영산신씨(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