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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성군(高城郡)
강원도 북동부에 위치한 군.
북쪽은 통천군, 서쪽은 회양군, 남쪽은 인제군, 동쪽은 동해에 면해 있다. 동경 128°04'∼ 128°22', 북위 38°23'∼ 38°48'에 위치하며, 면적 651.95㎢, 인구 5만 4819명(1944년 현재)이다. 2개 읍, 3개 면, 46개 이로 되어 있다.
군의 서부는 비로봉(毘盧峰, 1,638m)을 주봉으로 해 남북으로 선창산(仙蒼山, 1,224m)·오봉산(五峰山, 1,264m)·월출봉(月出峰, 1,580m)·차일봉(遮日峰, 1,529m) 등의 높은 산이 태백산맥의 일부를 형성하고 있다. 이 능선에서 동쪽으로 천불산(千佛山, 654m)·관음연봉(觀音連峰)·집선봉(集仙峰, 1,351m) 등의 산줄기가 계단상으로 낮아지며 뻗어내린다.
이들 산릉 사이를 천불천(千佛川)·신계천(神溪川) 등의 계류가 흐르면서 아름다운 협곡과 크고 작은 폭포와 못(淵) 등의 경승지를 이루고 있다. 산등성이에는 아직도 옛 평탄면(平坦面)의 흔적이 남아 있다. 차일봉을 수원으로 해 남강(南江)이 남류하다가 휴전선 부근에서 낚시바늘 모양으로 심한 곡류를 그리며 휴전선의 중앙분계선을 따라 북류하면서 금강산의 여러 계류의 물을 합해 동해로 흘러들어 간다.
동해안에는 고성평야(高城平野)가 전개되어 있다. 해안선의 길이는 89.9㎞ 가량으로 강원도의 군 중에서 가장 길다. 특히 장전만(長箭灣)·장아대끝(長峨臺端)·수원단(水源端) 사이는 해안선의 출입이 심하다.
연혁
삼국시대 이전에는 영동지방이 예(濊)의 강토였고, 고구려시대에는 간성(杆城)과 고성의 2개 지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즉 남부는 수성(城)이라 해 대체로 남한의 고성군에 해당하고, 현내면을 포함한 북한의 고성군은 달홀(達忽)이라 하였다.
568년(신라 진흥왕 29) 달홀은 주(州)로 승격되어 군주(軍主)를 두었다가 경덕왕 때 고성군으로 개칭하였다.
고려시대에는 995년(성종 14) 삭방도(朔方道)에 들었고, 얼마 뒤에 동계(東界)에 속했다가 고성현으로 바뀌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 간성군에 속했던 고성현은 세종 때 군으로 승격되었다가 1604년(선조 37) 북관(北關)에 가깝다 해 무관인 군수가 파견되었다.
-1629년(인조 7)에 현으로 강등된 때도 있었으나
-1638년에 고성군은 간성군과 나뉘었고, 곧 간성군으로 통합되었다.
-1914.5.15에 이름을 간성군에서 고성군으로 바꾸었다.
유적
선사시대의 유적·유물은 발견되지 않았으나 양양·강릉 등 인근지역에서 석기시대의 주거지와 유물이 발견되었고, 또 고성군의 자연환경이 이들 지역과 유사하므로 석기시대의 유적·유물이 발견될 것으로 보여진다. 특히 북방식인 탁자식 고인돌이 고성군에서 발견됨으로써 이의 동해안쪽 남방한계선으로 지목되고 있다.
이 군은 산성·건물·석탑·불상·공예품 등의 유물·유적이 많이 있었으나 임진왜란 등의 잦은 전화로 소멸되고 약탈되어, 눈여겨볼 만한 유물·유적으로는 신계사삼층석탑과 유점사종, 삼일포 부근의 고분군 등이 남아 있다. 천연기념물로는 고성 참대밭(竹林)·창터·소나무 군락 등이 있고, 해금강문(海金剛門)·상팔담(上八潭)·구룡폭포(九龍瀑布) 등이 명소로 이름나 있다.
관내에 고성읍, 장전읍(長箭邑), 서 면(西面), 수동면(水洞面), 외금강면(外金剛面)이 있다.
-고성읍(高城邑)
군의 중앙부 동쪽에 있는 읍. 면적 55.84㎢, 인구 1만4936명(1944년 현재).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고성군 안창면(安昌面)과 동면(東面)을 합해 고성면이 되어 신설된 간성군(杆城郡)에 속하였다. 1919년 고성군으로 개칭되었고, 1940년에 읍으로 승격되었다.
8·15 후 38도선 이북의 고성읍은 미수복지역으로 남았다가 1953년 7월 휴전협정으로 북한에 남게 되었다. 서쪽은 남강을 경계로 수동면과 접하고, 남쪽은 휴전선에 막혀 있다. 북쪽은 외금강면에 접하며, 동쪽은 동해에 임해 있다.
읍의 북쪽 반 가량에는 남강 하류 연안에 발달한 고성평야가 있고 남쪽에는 산지와 좁은 해안평야가 있다. 해안은 사빈으로 된 곳이 많으나 수원단과 해금강과 같은 암석으로 된 해식지형이 발달해 경승지를 이루고 있다.
고성평야를 중심으로 벼농사가 잘 되는 편이고, 보리·조·수수·옥수수·감자 등의 생산량이 많다. 또 양잠·축우도 활발하다. 광복 전에 동해북부선이 개통되었으나 지금은 철거되었다. 부산과 원산을 연결하는 7호국도가 종관한다.
고성은 해금강 관광의 기지 구실을 한다. 동(東)·서(西)·말무(末茂)·입석(立石)·봉수(烽燧)·보호(寶湖)·고봉(高峰)·포외진(浦外津)·감월(鑑月)·송도진(松島津)·명호(明湖)·송현(松峴)·대강(大康) 등 13개 이가 있다.
2. 고성군(북한, 高城郡)
강원도(북한) 남동부 동해안 연안에 있는 군.
북부는 통천군, 서부는 금강군, 남부는 강원도(남한) 고성군, 동부는 동해에 면하여 있다. 동경 127°54′∼128°22′, 북위 38°23′∼38°53′에 위치하며, 면적은 859㎢이다.
이 군은 8·15 광복으로 북위38도선에 막혀 북한에 남았다. 1953.7.27 휴전협정으로 군이 거의 비슷한 면적으로 남북으로 분단되었다. 1952년 12월에 행정구역 개편으로 통천군 임남면(臨南面)을 편입하는 한편, 2개 읍 3개 면을 1개 읍 23개 이로 개편하였다. 1953년 12월에 고성을 구읍리(舊邑里)로, 장전리를 고성읍으로 개칭하였다.
행정구역은 고성읍과 온정(溫井)·금천(金川)·주둔(駐屯)·월비산(月飛山)·순학(順鶴)·봉화(烽火)·구읍(舊邑)·삼일포(三日浦)·장포(長浦)·해방(解放)·운곡(雲谷)·종곡(宗谷)·성북(城北)·신봉(新峰)·두포(荳浦)·복송(福松)·능동(陵洞)·남애(南涯)·운전(雲田)·염성(溓城)·초구(草邱)·해금강(海金剛)·고봉(高峰) 등 23개 이로 구성되어 있다.
자연환경
지세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가면서 급격히 낮아져 바닷가에 이르러서는 남강벌이 넓게 펼쳐져 있다. 서부지역에는 태백산맥이 뻗어 있어 높고 험한 산지가 이루어져 있다. 금강산이 이곳이다. 여기에 비로봉(1,638m)·차일봉(1,528m)을 비롯한 금강산의 웅장한 산봉우리들이 솟아 있다. 바닷가에는 삼일포를 비롯하여 영랑호·감호 등 자연호수들이 있다.
이 군의 하천들은 서쪽 태백산맥의 비탈면에서 시작하여 동해에 흘러들며, 길이가 짧고 물살이 급하다. 주요 암석은 화강편마암과 화강암이며, 토양의 대부분은 산림갈색토양과 산림적갈색토양이다.
기후는 연평균기온 11.3℃, 1월 평균기온 -2.1℃, 8월 평균기온 23.6℃이며, 연평균강수량은 1,580㎜로서 우리 나라에서 비가 많이 내리는 지역에 속한다. 첫서리는 10월 25일경, 마감서리는 3월 31일경에 내린다.
인문환경
동해안의 주요 수산기지의 하나이며, 농업에서는 과일이 많이 생산되는 편이다. 교통망은 원산, 금강 방면의 도로가 있으며, 장전항 등 항구가 있다.
군내에 세계적 명승지인 금강산이 있으며, 온정리에는 금강산휴양소가 있고, 유적으로는 신계사가 남아 있다.
3. 固城郡
경상남도(慶尙南道) 중남부에 위치한 군.
동북쪽은 창원시, 북쪽은 진주시, 서쪽은 사천시, 동남쪽은 통영시, 남쪽은 남해의 한려수도와 접하고 있다. 동경 128°06′∼128°30′, 북위 34°53′∼35°07′에 위치한다. 면적은 517.14㎢이고, 인구는 5만 5,950명(2008년 현재)이다. 행정구역으로는 1개 읍, 13개 면, 262개 리가 있다. 군청은 경상남도 고성군 고성읍 성내리에 있다.
남해에 접경한 입지적 성격으로 인해 지세상의 고도는 낮은 편이나 군의 동서를 가로지르는 병영산맥(兵營山脈)의 존재 때문에 저산성 산지들이 군의 서부와 동부에 상당수 분포되어 있다. 대체로 군의 지형은 서부산지·중앙저지·고성반도 등으로 구분된다. 고성만과 배둔만은 남쪽과 북쪽에서 중앙저지로 깊숙히 만입해 있으나, 수심이 얕아 항만기능이 결여된 편이다. 고성반도에도 거류산(巨流山, 571m)·벽방산(碧芳山, 650m) 등의 산지가 산재하나 당동만(塘洞灣)의 변두리에는 작은 평야가 있다.
깃대봉(棋台峰, 521m)·용암산(龍巖山, 399m)·연화산(蓮花山, 527m)·학남산(鶴南山, 549m)·무량산(無量山, 581m)·대곡산(大谷山, 543m)·수태산(571m)·향로봉(香虜峰, 579m) 등의 산지가 북동쪽에서 서남쪽으로 주향하고 있다.
여기서 발원한 영오천(永吾川)·마안천(麻安川)·개천천(介川川)·구만천(九萬川) 등의 하천이 산지를 개석해 동서방향의 지맥과 하곡을 형성하고 있다. 해안선은 비교적 단조롭고 서부산지와 고성반도 사이에는 이들의 토사가 바다에 퇴적되어 형성된 고성평야가 있다.
연혁
삼한시대에는 변진12국(弁辰十二國) 중의 고자미동국(古資彌凍國)이나 포상팔국(浦上八國) 중에 고자국(古自國)을 고성지방으로 비정하는 설이 유력하다. 이러한 군소국가가 차차 성장해 삼국시대에는 6가야의 하나인 소가야로 발전했을 것이다. 소가야의 역사는 문헌에 전하는 것이 없으나, 고성읍의 송학동고분군과 동해면의 내산리고분군은 그 시대의 유적으로 추정되고 있다.
512(지증왕 13년)년에는 소가야국을 신라에 병합하였다.
737(효성왕 1)년에 고자군으로 개칭하였다가,
757년(경덕왕 16)고성군으로 개칭하고 문화량현(蚊化良縣)·사수현(泗水縣)·상선현(尙善縣)을 영현으로 두었다. 문화량현은 지금 어느 곳인지 알 수 없고 사수현은 지금의 사천으로 원래 사물현(史勿縣)을 이때 개칭했으며, 상선현은 원래 일선현(一善縣)을 이때 개칭한 것이다.
사수현은 고려 초 진주목의 속현이 되었다.
995년(성종 14) 고주자사를 두었다가 뒤에 현으로 환원하였다.
1018년(현종 9)거제현의 속현이 되었다가 뒤에 현으로 환원해 현령을 두었다.
상선현은 고려 초에 영선현(永善縣)으로 개칭되고 진주목의 속현으로 이속되었다가 1266년(원종 7) 주로 승격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과 '고성현읍지'에는 다같이 “충렬왕 때 남해현에 합쳤다가 곧 복구하였다.”라고 되어 있는데, '경상도지리지'에는 이러한 사실이 보이지 않아 어느 쪽이 옳은지 알 수 없다. 1377년(우왕 3)과 1382년 왜구가 고성에 침입해 민가 다수를 불살랐다.
1391년(공양왕 3) 현으로 내려 현령을 두었다.
조선 전기까지는 고성현의 연혁에 변동이 없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세종 때의 고성현 호구수는 531호, 5,718인이었다. 임진왜란 때는 전후 2차의 당항포해전에서 이순신(李舜臣) 휘하의 수군이 적함대를 공격해 57척을 격침하는 대전과를 올렸다. 1604년(선조 37) 거제현 오아포(烏兒浦)에 있던 삼도수군통제영을 거제현 두룡포(頭龍浦 : 지금의 통영시)로 옮겼는데, 두룡포는 1617년(광해군 9) 고성현으로 이관되었다. 1759년(영조 35) 고성현의 호구수는 9,435호, 4만 34인이었다.
1870년(고종 7) 고성이 부로 승격해 치소를 통제영 안으로 옮겼다가 1872년 읍이 고성으로 복귀하는 변동이 있었다. 이와 같이 읍의 이동과 승격 문제로 통제영과 약간의 행정상 분규가 있었던 것 같다.
-1895년 지방관제 개정으로 진주부 고성군으로 되었으며, 수군통제영을 폐지하면서 군의 남부 통영반도 지역을 분할해 진남군(鎭南郡)을 신설하였다.
-1900년에 도선, 광이, 광삼면을 진남군에 편입하고
-1906년 진주군에 편입되었던 남양면(南陽面 : 삼천포)을 1912년 사천군으로 이관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진주군의 영현(永縣)·영오(永吾)·개천(介川)의 3면을 편입시켜 14개 면이 되었다. 1919년 3.1운동 때, 3월 22일에서 4월 3일에 걸쳐 시위를 벌였으며, 주동인물은 김진만(金鎭萬)·문상범(文祥範)·허재기(許在其) 등이 있다.
-1938.10.1 고성면이 읍으로 승격되어 고성읍, 삼산면, 하일면, 하이면, 상리면, 대가면, 영현면, 영오면, 개천면, 구만면, 회화면, 마암면, 동해면, 거류면을 관할하게 되었다.
1945년 광복 이후에도 별 변동은 없었으나,
-1973.7.1 마암면 좌련리가 개천면에, 동해면 감서리가 거류면에 편입되었고,
-1983.2.15 삼산면 이당리·대독리가 고성읍에, 개천면 나선리 일부가 구산면 화림리로 편입되는 등 행정구역 조정이 있었다. 1984년 고성군 리 동 명칭 및 구역확정에 따라 고성군의 행정리 동은 260개로 되었다.
1986년 하일면 용태리에 가룡을, 춘암리에 맥전포를, 영오면 영산리에 낙안을 증설하여 고성군의 행정리 동은 263개로 되었다.
1987년 삼산면 두포리에 와도를, 하일면 학림리에 임포, 송천리에 자란을 증설하여 3개 행정동이 추가되었다.
1988년 동이 리(里)로 개칭되었다.
1997년 고성군의 이장 정수가 조정되고 행정리가 262개 리로 되었다.
관내에 고성읍, 개천면(介川面), 거류면(巨流面,. 구만면(九萬面), 대가면(大可面), 동해면(東海面), 마암면(馬巖面), 삼산면(三山面), 상리면(上里面), 영오면(永五面), 영현면(永縣面), 하이면(下二面), 하일면(下一面), 회화면(會華面)이 있다.
유적
고성평야와 당항만·고성만의 해안지대에는 청동기시대에서 초기철기시대에 이르는 각종 유적들이 밀집되어 있어, 이 지방이 일찍이 선사시대부터 농경문화가 발달한 곳임을 증명하고 있다.
불교문화재
하이면 와룡리의 운흥사 경내에 운흥사대웅전(雲興寺大雄殿,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82호)·운흥사괘불(雲興寺掛佛,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61호)·운흥사영산전(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47호)·운흥사소장경판(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84호)가 있다.
또 개천면 북평리의 옥천사 경내에는 옥천사임자명반자(玉泉寺壬子銘飯子, 보물 제495호)·옥천사반종(玉泉寺飯鐘,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60호)·옥천사향로(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59호)·옥천사자방루(玉泉寺慈芳樓,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53호)·옥천사대웅전(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32호)·옥천사명부전(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46호)·고성옥천사소장품(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99호)이 있다.
한편 고성읍의 교사리삼존석불(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22호), 대가면의 양화리석조여래좌상(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21호) 등이 있으며, 내원사지부도군(內院寺址浮屠群), 우방사지석조불상(牛房寺址石造佛像)과 문수암지(文殊庵址)·대둔사지(大屯寺址)·장의사지(藏義寺址) 등의 사지가 있다.
선사시대 유적
하일면의 오방리지석묘(경상남도 기념물 제36호)·학림리지석묘(경상남도 기념물 제37호), 하이면의 석지리지석묘(경상남도 기념물 제38호)·봉현리지석묘를 비롯해, 고성읍 수남리, 거류면 거산리·가려리, 동해면 양촌리, 마암면 석마리, 대가면 암전리, 회화면 봉동리 등 거의 군 전체에 고인돌과 선사유적지가 분포되어 있다.
고성읍의 고성동외동패총(경상남도 기념물 제26호)은 초기철기시대의 유적이며, 소가야의 유적인 고성읍의 고성송학동고분군(사적 제119호)과 송학동의 제2의고분군(경상남도 기념물 제40호), 기월리고분군, 율대리고분군, 무량리고분군, 동해면의 고성내산리고분군(사적 제120호), 대가면의 송계리고분군, 거류면의 거산리고분군 등 고분도 각처에 산재해 있다.
유교문화재
고성읍 교사리에 고성향교(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19호)를 비롯해 마암면 도전리에 도연서원(道淵書院,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37호), 화산리에 수림서원(繡林書院,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34호), 석마리에 위계서원(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38호), 하일면 학림리에 육영재(育英齋,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08호), 대가면 갈천리에 갈천서원(葛川書院,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36호), 구만면 화림리에 도산서원(道山書院,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35호), 동해면 장좌리에 호암사(虎嵒祠,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39호) 등이 있고, 구만면 효락리에는 소천정이 있다.
고성읍 동외리·서외리와 마암면 도전리에는 고성오광대(固城五廣大,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7호)가, 고성읍 동외리·우산리에는 고성농요(固城農謠,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84호)가 전승되고 있으며, 마암면 석마리의 마암면석마(馬巖面石馬, 경상남도 민속자료 제1호)는 마을의 수호신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국방관련 유적
가야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전하는 고성읍 수남리 일대의 고성성지(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89호)를 비롯해, 하일면 동화리에 고성소을비포성지(경상남도 기념물 제139호), 동해면 양촌리에 철마산성(鐵馬山城,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91호 ), 보령산성(寶嶺山城), 거류면 거산리에 거류산성(巨流山城,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90호), 남산성지(南山城址) 등 성터가 있다. 영현면 연화리, 영오면 영산리, 고성읍 대독리, 하이면 사곡리, 거류면 거산리, 동해면 내곡리·양촌리·봉암리, 회화면 배둔리, 마암면 화산리·성전리 등지에도 성터의 흔적이 남아 있다.
또한 하일면 동화리의 고성군좌이산봉수대(固城郡左耳山烽燧臺, 경상남도 기념물 제138호)를 비롯해, 하일면 송천리, 고성읍 우산리, 삼산면 두포리, 하이면 덕명리 등지에 봉수지가 있다. 고성읍내에는 읍성의 남문루(南門樓)로서 1448년(세종 30)에 건립된 것으로 보이는 안청루(晏淸樓)가 있다. 당항포는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의 전승지로 유명하다.
기타
회화면의 봉동리에는 고성봉동리배씨(裵氏)고가(경상남도 민속자료 제16호), 삼덕리에는 정씨동생화회문기(鄭氏同生和會文記,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95호), 마암면에 고성장산리허씨고가(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15호), 하일면 학림리에 고성학림최영덕씨고가(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78호), 대가면 송계리에 이씨고가(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62호)가 보존되어 있다.
마암면 장산리 의 고성장산숲(固城章山―, 경상남도 기념물 제86호), 하이면의 고성덕명리의 공룡 및 새발자국화석산출지(천연기념물 제411호), 개천면의 고성북평리찰피나무(경상남도 기념물 제82호)·고성옥천사일원(경상남도 기념물 제140호) 등도 기념물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설화
남해안에 위치하여 왜구의 침입이 잦았으므로 예로부터 마을의 안녕을 비는 호국설화유형이 많이 발견되고 있다. '무기정 기생 월이전설'이 대표적 예이다. 무학동(舞鶴洞)의 무기정 기생 월이가 임진왜란 직전에 조선의 지리를 정탐하러 온 첩자를 술에 취하게 만든 뒤, 그가 그린 지도를 변개시켜 이순신으로 하여금 승첩의 계기를 만들어주었다는 내용이다. 그 뒤 승첩을 거둔 당항포 앞바다를 왜군이 속았다 해 속싯개라 불러오고 있다.
개천면 북평리 의 '황소바위전설'도 호국설화에 속하나 혈맥지르기유형을 가미시킨 것이며, 영현면 봉발리 금릉마을의 '황소바위전설'은 천리준마 같은 황소가 의병장을 태우고 전승을 거둔 뒤 죽은 자리가 바로 쇳등이라고 하는 지명유래형의 호국설화에 속한다. 이러한 호국설화 외에도 경상남도 지역에 널리 퍼져 있는 '방정맞은 여인 때문에 산이 서버린 이야기'가 거류산의 지명유래로 되어 있다. 또 남녀의 이루지 못한 사랑을 전설화한 것으로 개천면 좌련리의 '용비천전설(龍飛川傳說)'과 삼산면 장치리의 '달막이고개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또한 '형제바위전설'도 두 가지가 있다. 상리면 자은리의 것은 혈맥지르기유형으로 문수암 승려가 절을 빨리 흥하게 하려고 일곱 바위를 깨뜨리다가 다섯 개만 깨뜨리고 나머지 두 개에서는 피가 쏟아져 암자가 망했다는 이야기이다. 하일면 용태리의 것은 아버지를 위해 목숨을 버린 두 형제의 우애를 설화화한 것이다. 암행어사 박문수(朴文秀)에 관한 것도 몇 가지 채록되어 있는데, 상리면 무선리의 문수암과 박문수를 연결시킨 것은 명칭의 유사성에서 나온 듯하며, 거류면 가려리의 것은 설소사(薛召史)의 정려문을 세워준 덕치를 기리는 것이다. 이 밖의 인물설화로는 의병장 최균(崔均)·최강(崔堈) 형제, 판서 백봉래(白鳳來), 유학 정석유 등에 관한 것들이 있다.
이 고장의 대표적인 민요는 '모내기소리'인데, 일명 '등지' 혹은 '정자소리'라고도 한다. “외우자 외우자 이 못자리도 외우자/어서 속히 들어내고 건너 둥천에 쉬러 가자/조리자 조리자 이 못자리로 조리자/영천초목에 호미야 손들 놀리소……” 이렇게 '모찌기등지'를 부르고 이어 '모심기등지'를 부른다. '모찌기등지'는 긴 등지와 짧은 등지로 나누어지는데, 긴 등지는 느린 세마치 또는 진양장단에 맞으며, 짧은 등지는 자진모리장단에 맞는다. 선율은 다른 경상도지방의 메나리토리로 된 정자소리 선율이지만, 선법은 이웃 거제·통영과 같이 전라도의 육자배기토리로 된 점이 특색이다. '모심기등지'에는 긴 등지와 짧은 등지가 있고, 점심등지·해거름등지·두모리등지·세모리등지 등 다양한 종류가 있다. 그 중 두모리등지는 ‘헤이’와 ‘에헤이’를 삽입해 가며 “다풀다풀 다박머리 에헤이/해 다 진데 에헤이 어디 가노/울어마니 헤이 산소등에 에헤이/묵으로 헤이 나는 가네…….”와 같이 부른다. '모심기등지'의 가사는 전형적인 형식으로서 4구 4음보가 전후 대립해 1장을 이루면서 얼마든지 연속할 수 있다. 이는 소박한 농민의 생활상을 적나라하게 반영했으며, 고성지방의 역사와 풍물을 노래한 향토색이 짙은 민요로 문학적인 가치도 뛰어나다. '모심기등지'의 선율과 박자는 '모찌기등지'의 긴 등지(긴 정자소리), 짧은 등지(짧은 정자소리)와 같다. '도리깨타작소리'는 “어화어화 때리라/보리를 보고 때리라/이삭을 보고 때리라/어화어화 때리라/이색이 어화 안불거로/야무치기 볼바라…….”와 같은 1음보격의 빠른 속도의 가락이다. 김매기소리는 주로 '상사소리'와 '방아타령'을 부른다. 상사소리는 3분박 4박자로 중모리장단에 맞는 한 장단의 선소리에 맞추어 일꾼들이 같은 장단의 ‘상사디여’라는 후렴으로 합창하며, 주로 한자투로서 개화기의 교육·부국사상을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단락마다 “……이 대장부의 할 일이라.”로 마쳤다. '상사소리'의 선율은 전라도의 육자배기토리로 이루어져 있다. '방아타령'도 '상사소리'와 함께 김매기작업중에 부르는 것으로, 마치 잡초가 저절로 무너지듯이 땅이 꺼질 듯이 우악스럽게 부른다. 선소리로 “오오오 방애”라고 부르고 모두 다시 후렴을 붙인다.
가사는 “방애 소리 한번 하자/이 방애가 누 방앤가/강태공의 조작 방애/강태공은 어디가고/빈 방애만 걸려 있네/높은 데는 밭을 지어/낮은 데는 논을 지어/백과 종자 씨를 뿌려/만사 풍년 이뤄보자.” 따위이다. 이 밖에 '삼삼기노래'와 '물레질노래' 등도 전승되고 있다. 이 군의 민요는 지리적 환경이 바다를 끼고 있으면서도 어요가 없다는 것이 특징이며, 이웃 거제군이나 통영군과 함께 경상남도에 속하면서도 민요의 선율은 전라도의 육자배기토리로 된 것이 많다는 것이 또 다른 특징이다.
- 고성읍(固城邑)
군의 남동부에 위치한 읍. 면적 44.13㎢, 인구 2만 3,677명(2008년 현재). 읍 소재지는 성내리이다. 본래 고성군 지역으로 군청이 있는 곳이므로 동읍면(東邑面)이라 죽동(竹洞)·평계(坪溪)·동내(東內)·동외(東外) 등 15개 리를 관할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서읍면과 가동면의 일부를 병합 고성의 옛 이름인 철성의 이름을 따서 철성면이라 해 교사·덕신 등 15개 리로 개편, 관할하였다.
1918년에 고성면으로 되었다가
1938년 고성면이 읍으로 승격되어 현재에 이른다.
관내에 성내(城內)·서외(西外)·동외(東外)·수남(水南)·송학(松鶴)·기월(基月)·교사(校社)·덕선(德仙)·무량(武良)·대평(大坪)·우산(牛山)·죽계(竹溪)·율대(栗垈)·월평(月坪)·신월(新月)·이당(梨堂)·대독(大篤) 등 17개 리가 있다.
지세는 대개 서북쪽이 높고 동남쪽으로 기울어 하천이 사방으로 흘러내리고 있으며, 읍내 대평리·죽계리·송학리·동외리·율대리 일대에는 구획정리가 잘 된 농경지가 넓게 분포한다.
각종 농업생산이 활발하며 땅이 비옥한 데다 수리시설이 잘 되어 있어 이 곳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은 질이 좋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고구마·콩·감자 등이며 특용작물로 참깨·감·포도 등이 생산된다. 특히 군내 유일한 양송이재배지로서 많은 양을 생산하고 있다. 한편 읍의 남부가 바다에 접해 있어 굴·홍합의 양식업이 활발하다. 제조업으로는 수남리에 동성수출업체가 굴·홍합 통조림을 만들어내고, 교사리의 고성물산 등 2개 업체에서 양송이 생산 및 가공을 하고 있다. 도로는 읍의 중앙부를 포장국도가 남북으로 가로질러 인접한 각 군과 통하여 마산·진해·통영·사천·진주 등으로 연결된다.
문화유적은 송학리에 고분군, 동외리에 패총 등을 비롯해 고성성터·이정유허비(李禎遺墟碑), 교사리삼존석불·고성향교·우방사지마애불 등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4개 교, 중학교 3개 교, 고등학교 3개 교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