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予囚北庭 坐一土室(여수북정 좌일사실) - 내가 북정의 죄수가 되어 한 토굴에 갇혔다.
室廣八尺 深可四尋((실광팔척 심하사심) - 방의 넓이는 8자에 높이는 네 발쯤 되고
單扉低小 白間短窄(단비저소 백간단착) - 낮고 작은 쪽문과 짧고 좁은 창문이 있는데
汙下而幽暗(한하이유암) - 아래로 움푹 꺼져 어둡다.
當此夏日 諸氣萃然(당차하일 제기췌연) - 지금은 여름 온갖 기운이 모여든다
雨潦四集 浮動牀几(우료사집 부동상궤) - 빗물이 사방에서 모여들어 걸상 침상이 떠다닌다.
時則為水氣(시즉위수기) - 이것은 수기(水氣)이다.
塗泥半朝 蒸漚歴瀾(도니반조 증구력란) - 진흙이 좁은 방안에 반쯤 차 있어서 찌고 물컹거리면서 여기저기 들어붙어있다
時則為土氣(시즉취토기) - 이것은 토기이다
乍晴暴熱 風道四塞(사청폭열 풍도사색) - 갑자기 햇살이 쨍쨍 들어 폭염이 퍼붓는데 바람마저 사방이 막혀 있다
時則為日氣(시즉위일기) - 이것은 태양의 기(氣)이다
簷隂薪㸑 助長炎虐(첨음신찬 조장염학) - 처마 밑에는 땔나무를 때어서 폭염으로 푹푹 찌게 만든다
時則為火氣(시즉위화기) - 이것은 화기(火氣)이다
倉腐寄頓 陳陳逼人(창부기돈 진진핍인) - 창고에는 곡식이 썩도록 내버려 두어서 두고두고 사람의 약을 괴롭힌다
時則為米氣(시즉위미기) - 이것은 미기(米氣)이다
駢肩雜遝 淋漓汗垢(병견잡답 림이한구) - 어깨가 부딪치도록 혼잡하여 비린내, 노린내, 땀내, 때 냄새가 나는데
時則為人氣(시즉위인기) - 이것은 인기(人氣)이다
或圊溷 或毁屍(혹청혼 혹훼시) - 혹은 변소에서 혹은 썩어가는 시체에서
或腐䑕 惡氣雜出(혹부서 악기잡출) - 혹은 썩어가는 쥐에게서 여러 가지 악기가 섞여서 나온다
時則為穢氣(시즉위예기) - 이것은 더러운 기이다
壘是数氣 當之者鮮不為厲(루시수기 당지자선불위려) - 이런 여러 가지 기운이 뒤섞이니 병에 걸리지 않는 자가 드물다
而予以孱弱 俯仰其間(이여이잔약 부앙기간) - 나는 체질이 본래 약하고 못난 사람으로 그 사이에서 우러르고 엎드리며
于兹二年矣 幸而無恙 (우자이년의 행이무양) - 이런 속에서 2년이나 살았으나 다행히 아무런 탈이 없다
審如 是殆有養致然爾 (심여 시태유양치연이) - 지나온 2년을 자세히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나를 부양해 주는 것이 있는 듯하다
然亦安知所養何哉(연역안지소양하재) - 그렇다하더라도 나를 부양해 주는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알겠는가?
孟子曰 我善養吾浩然之氣(맹자왈 아선양오호연지기) - 맹자가 말하기를 ‘나는 호연지기를 잘 기른다’고 했다.
彼氣有七 吾氣有一(피기유칠 오기유일) - 저 기운이 일곱이면 내 기는 호연지기 하나다.
以一敵七 吾何患焉(이일적칠 오하환언) - 하나로 일곱을 대적할지라도 내가 어찌 걱정하겠는가?
况浩然者 乃天地之正氣也(항호여자 내천지지정기야) - 하물며 호연지기는 곧 하늘과 땅의 정기(正氣) 아니던가?.
作正氣歌一首(작정기일수) - 이에 <정기가> 한 수를 짓는다
天地有正氣(천지유정기) 하늘 땅에 정기 있어
雜然賦流形(잡연부유형) 온 가지 흐르는 꼴 지어냈으니
下則爲河嶽(하즉위하악) 땅에선 가람이며 뫼가 되었고,
上則爲日星(상즉위일성) 하늘에선 해와 별이 됐으며
於人曰浩然(어인왈호연) 사람에게서 호연이라 부르는 것이
沛乎塞蒼冥(패호색창명) 누리에 또한 가득 들어찼더라.
皇路當淸夷(황로당청이) 한길 맑고 번듯할 때는
含和吐明廷(함화토명정) 평화로운 기를 머금어 맑은 뜰에 뱉고
時窮節乃見(시궁절내견) 때 막히면 굳은 절개는 오히려 드러나
一一垂丹靑(일일수단청) 하나하나 단청(丹靑)1)에 드리웠더라.
在齊太史簡(재제태사간)2) 제나라에서는 태사가 되어 죽간에 목숨을 바치고
在晋董狐筆(재진동호필)3) 진(晉)나라에서는 동호가 되어 직필을 휘두르고
在秦张良椎(재진장양추)4) 진(秦)나라에서는 장량이 되어 철추를 내리쳤으며
在漢蘇武節(재한소무절)5) 한나라에서는 소무가 되어 목양(牧羊)으로 절개를 지키고
爲嚴將軍頭(위엄장군두)6) 촉나라에서는 단두장군(斷頭將軍) 엄안(嚴顔)이 되고
爲嵇侍中血(위혜시중혈)7) 진나라에서는 피를 뿌려 임금을 지킨 혜소(嵇紹)가 되고
爲張睢陽齒(위장수양치)8) 당나라에서는 이빨을 달아 없애며 수양성을 지킨 장순(張巡)과
爲顔常山舌(위안상산설)9) 상산을 지키느라 혀가 잘린 안고경(顔杲卿)이 되었다.
或爲遼東帽(혹위요동모)10) 어떤 때는 요동모를 쓴 관녕(管寧)이 되어
淸操厉氷雪(청조려빙설) 맑은 지조는 빙설보다 더 매섭웠으며
或爲出師表(혹위출사표)11) 어떤 때는 출사표를 쓴 촉나라의 제갈량이 되어
鬼神泣壯烈(귀신읍장렬) 그 장렬함으로 귀신을 울렸고
或爲渡江楫(혹위도강즙)12) 어떤 때는 장강을 건너다가 노를 두드려 맹세한 조적(祖逖)이 되어
慷慨呑胡羯(강개탄호갈) 강개한 마음으로 갈족1) 오랑캐를 삼켰으며
或爲擊賊笏(혹위격적홀)13) 어딴 때는 격적홀(擊賊笏)의 단수실(段秀實)이 되어
逆揷頭破裂(역수두파열) 역적 놈의 머리를 깨뜨렸다.
是氣所磅礡(시기소방박) 힘찬 이 기운을 온누리에 가득채워
凜熱萬古存(늠열만고존) 얼음인 듯 불인 듯 만고에 살았다.
當其貫日月(당기관일월) 해도 달도 꿰뚫는 마당에
生死安足論(생사안족론) 생사를 어찌 논하겠는가?
地維賴以立(지유뢰이립)2) 지유에 힘입어 설 수 있었고
天柱賴以尊(천주뢰이존) 천주에 힘입어 높임을 받았다.
三綱實係命(삼강실계명) 삼강은 실제로 정기에 힘입어 생명을 잇고
道義爲之根(도의위지근) 도의는 정기에 힘입어 만물의 근본이 되었다.
嗟予遘陽九(차여구양구)3) 오호라! 내가 양구(陽九)의 액운을 만났으나
隸也實不力(예야실불력) 부족한 재능으로 나라의 위난을 구하지 못했다.
楚囚纓其冠(초수영기관)14) 초나라 포로가 되어 매일 갓을 고쳐 메고
傳車送窮北(전거송궁북) 수레에 실려 북쪽 끝에 이르렀다.
鼎鑊甘如飴(정확감여이) 팽살형이야 단엿보다 달콤하지만
求之不可得(구지불가득) 찾아도 얻을 길이 없구나.
陰房闐鬼火(음방전귀화) 음침한 방에 귀신불만 껌벅거리는데
春院閟天黑(춘원비천흑) 봄 동산의 하늘 어둠으로 망망하다.
牛驥同一卓(우기동일탁)5) 소와 천리마가 한 수레를 같이 끌고
鷄栖鳳凰食(계서봉황식) 닭이 봉황의 둥지애서 같이 먹다가
一朝蒙霧露(일조몽무로) 하루아침 안개 이슬 맞고 보면
分作溝中瘠(분작구중척) 도랑 속의 뼈다귀 신세 돼버리니
如此再暑寒(여차재서한) 이렇듯 다시 더웠다 춥는 동안
百沴自酸易(백려자피역) 백 가지 해로운 병 저절로 물러갔다.
嗟哉沮洳場(차재저여장) 아아, 슬프다. 이 진흙탕 속이
爲我安樂國(위아안락국) 나의 즐거운 나라 됐구나.
豈有他繆巧(기유타무교) 어찌 무슨 잔재주 있어
陰陽不能賊(음양불능적) 사독도 내 몸을 망치지 못하게 했는가?
顧此耿耿在(고차경경재) 돌아보아 이 속에 깜박이는 빛
仰視浮雲白(앙시부운백) 우러러 저기 떠도는 흰 구름에
悠悠我心悲(유유아심비) 끝없는 내 마음의 슬픔
蒼天曷有極(창천갈유극) 푸른 하늘인들 다하랴만은
哲人日已遠(철인일이원) 어진 이들 가신 날은 이미 멀어도
典刑在宿昔(전형재숙석) 그 분들의 모범은 엊그제 일이라!
風檐展書讀(풍첨전서독) 처마 밑에 책 펴 다 읽고 나니
古道照顔色(고도조안색) 옛날의 도가 내 얼굴을 비쳐주는구나!
문천상(文天祥)은 송(宋)이 원(元)한테 망하는 시절에 활동했던 사람이다. 송나라가 망하자 의병을 일으켜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고 포로로 사로잡혀 북경으로 끌려갔다. 원나라 세조(世祖) 쿠빌라이는 의기가 높고 재능이 뛰어난 문천상을 보고 항복하기를 권했다. 그러나 문천상이 송나라에 지조를 지켜 항복하기를 거부하자 2년 동안 감옥에 갇혔다가 결국 사형을 당하고 말았다.
본 정기가는 그가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지은 우국충정의 심정을 담은 시가이다.
이 시가는 하나의 노래라기보다는 중국 수천 년 역사를 이어온 절의로 이루어진 등뼈라 해야 할 것이다.
문천상은 충절과 의기가 높은 선비였을 뿐만 아니라 위대한 사상이기도 하다. 그 자신의 말대로, 그는 신체가 건장하고 힘이 장사였던 장수도 아니었고, 군인으로 훈련을 받은 장군 출신도 아니다. 그는 적은 군사를 가지고 용감히 싸웠고 혹독한 고통 속에 있으면서도 그것을 안락국(安樂國)이라 하면서 나중에 태연히 죽음을 맞이했다. 그것은 그가 품은 정신과 믿음에 기인한 것이다.
그는 스스로 '고차경경재 앙시부운백(顧此耿耿在 仰視浮雲白)이라 했다. 얼마나 좋은 자화상(自畵像)인가? 찾아봐도 아무 별것이 없고, 다만 있는 듯 없는 듯 깜빡거리는 빛 하나뿐이다. 그렇지만 그 빛 하나가 속에 있을 때 사람은 아무 두려운 것도 걱정도 없다. 그 지경을 말해서 하늘에 뜬 흰 구름 같다고 했다. 희다 할 때 그 마음의 맑은 것을 말한 것이요, 떴다고 할 때 자유자재 아무 걸릴 것이 없는 것을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노자는 ‘ 승입자(勝入者)는 유력하고 자승자(自勝者)는 강(强)이다’라고 했다. 남을 이기면 단순히 힘이 있는 사람에 불과할 뿐이고 자신을 이겨야만 진실로 강한 사람이라고 말한 것이다. 자승했기 때문에 하늘에서 하늘로 왕래하는 흰구름같이 자유로왔고, 그런 자유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모든 유혹도 물리칠 수 있었고, 모든 위협도 이길 수 있었다.
이것은 어떻게 해서 생긴 것인가? 그는 서문에서 스스로 기르는 것이 있노라 했다. 그러고 보면 그것은 일조일석에 된 것이 아니다. 그리고 맹자의 말을 끌어서 호연지기(浩然之氣)는 곧 자기의 평소 길러왔던 것이라 맹자를 문천상의 마음속에 품었다는 뜻이다. 고금의 모든 산들에게는 혼들이 다 있다. 이 우주를 꿰뚫는 정신이 인류를 낳았고, 문명을 낳았고, 모든 종교의 성현을 낳았다. 세상이 늘 악한 듯하지만 그것을 구원하는 힘은 이 정신의 화신(化身)으로 난 인물들이 희생으로 바치는 힘 때문이다. 문천상도 그 중의 한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태연히 옛 글을 펴 읽고 고도(古道)가 제 얼굴을 비쳐줌을 느꼈다. 영원히 진리와 얼굴을 맞댄 것이다. (함석헌 평론)
남송 단평(端平) 3년, 1236년 지금의 강서성 길안현(吉安縣)인 길주(吉州) 여릉(廬陵)에서 시서(詩書)를 업으로 하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1256년 21세의 나이로 남송의 국도 임안(臨安 : 항주)로 들어가 과거에 응시해 장원으로 합격했다.
1259년 부친의 3년 상을 마친 문천상은 정식으로 관직에 나아가기 위해 임안으로 향했으나 그때 남송은 이미 몽고의 대군에 의해 침략을 당해 위급한 처지에 있었다. 가슴에 불타오르는 우국충정의 마음으로 조정에 상소문을 올려 간신들이야 말로 나라의 멸망의 원인이라고 밝히고 더불어 전략적인 요충에 진지를 건설하여 각각의 방진(方鎭)에 의지하여 임안을 사수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그러나 문천상의 상서는 위로 올라가지 않고 중간에 폐기되고 말았다. 강직한 성격에 우국충정의 지사였던 문천상은 20여 년에 걸쳐 봉직했던 관료사회에서 항상 정적들의 압제와 배척을 받았다.
1271년 원세조 쿠빌라이가 원제국을 창건했다.
1274년 원세조는 승상 바얀<伯顔>에게 20만의 병력을 주어 송나라를 공격하게 했다. 그때 남송에는 70만의 병력이 있었지만 어린 황제는 간신들에게 휘둘려 원나라 군사들의 한 번 공격에 붕궤되고 말았다. 문천상이 가산을 정리하여 군자로 삼아 모집한 5만의 의병을 이끌고 임안으로 진군했으나 오히려 간신들에 의해 저지당하고 결국은 병권을 빼앗기고 말았다.
1276년 정월 18일, 바얀의 원군은 임안에서 30리 떨어진 고정산(皐亭山)까지 진군하자 우승상 진의중(陳宜中)이 두려움으로 달아나 숨어버리고 말았다. 정월 19일 송나라 조정은 당시 임안(臨安)의 지부(知府)였던 문천상을 우승상으로 삼아 고정산으로 들어가 항복을 논의하라고 시켰다. 당시 남송의 실질적인 통치자였던 태황태후(太皇太后) 사씨(謝氏)는 무천상에게 당부하기를 어린 황제는 원세조의 조카라는 조건으로 담판하되 만일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손자라고 조건으로 해도 좋다고 했다. 정월 20일 원군 총수 바얀을 만난 문천상은 자기가 온 것은 항복을 위한 것이 아니라 강화를 위해서라고 했다. 그는 원군이 먼저 군사를 물리쳐야만 담판을 하겠다고 했다. 바얀이 대노하여 문천상을 붙잡아 감옥에 가두었다. 정월 21일 태황태후 사씨가 어린 황제와 백관을 이끌고 나라를 들어 원나라에 항복을 하고 말았다.
1276년 2월 9일, 죽음을 각오하고 항복하지 않은 문천상은 원군에 의해 대도(大都)로 압송되었다. 도중 진강정(鎭江亭)에 당도하여 머물다가 29일 밤 경계가 허술한 틈을 타고 같이 압송되는 12 명의 동료들과 함께 탈주하여 양자강을 도강한 후에 의정(儀征), 양주(揚州), 통주(通州 : 南通) 등을 우회한 다음 배를 이용하여 임안으로 돌아갔다. 장강을 건너 북쪽으로 돌아 다시 배를 이용하여 남쪽으로 향할 때 문천상은 선상에서 우국충정의 강개한 마음으로 <양자강(揚子江)>이라는 제목의 시를 읊었다. “ 바람부는 대로 따라가 북해를 유랑하던 때가 언젠 데, 다시 돌아 양주 대강(大江)의 머리를 따라 돌아가누나! 내 마음은 나침반에 붙어 있는 한 조각의 자석 바늘이건데, 남쪽을 가리키지 않는다고 어찌 내가 쉬려는 마음을 갖겠는가? (几日随风北海游,回从扬子大江头。臣心一片磁针石,不指南方不肯休。) ”
인생은 자고로 죽지 않은 사람이 없으나(人生自古誰無死), 가슴 속에 품은 일편단심(一片丹心)은 한청(汗靑)에 빛을 발하리라!(留取丹心照汗靑). 2개여 월에 걸친 분주했던 시간을 보낸 문천상은 다시 남쪽으로 발길을 돌려 절강 온주(溫州)로 돌아왔다. 그는 원나라에 투항하기를 거부한 남송의 관리들과 함께 원나라에 이미 항복한 공제(恭帝)의 어린 동생을 황제로 옹립하여 망명정부를 건립하여 남송의 명맥을 유지하려고 했다. 문천상은 남송의 명맥을 어떻게 해서든지 유지하려고 했으나 결국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의 한계로 1279년 12월 20일 광동(廣東) 해풍(海豊) 오파령(五坡嶺)의 싸움에서 패하고 또다시 원군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문천상을 사로잡은 원군은 해풍에서 바다로 나아가 주강구의 앞에 있던 영정양(零丁洋)을 지나 남송정권의 마지막 거점인 애산(崖山) : 지금의 廣東新會縣海城) 으로 진군했다. 주강구로 항해하던 배 위에서 문천상은 <과영정양(過零丁洋)>이라는 제목의 시를 지어 人生自古誰無死, 留取丹心照汗靑‘ 이라는 천추에 빛나는 시구를 남겼다.
잡다한 부의 형식으로 씌여진 “天地有正氣”
1279년 음력 10월 1일 대도로 압송된 문천상은 역관에 안치되었다. 원세조 홀필열은 문천상의 재능을 매우 높이사 그에게 이미 항복한 황제 恭帝와 남송의 신료들을 보내 투항을 권유하도록 했다. 그러나 문천상은 동요하지 않고 한마디로 거절했다. 이에 10월 5일 문천상은 관진병마사(關進兵馬司)의 뢰옥(牢獄)에 갇혔다.
문천상은 감옥에 갇혀 지낸 3년 동안 수백 편의 시(詩)와 사(詞) 및 문장으로 애국충정의 마음을 표현했다.
1281년 여름 서기(暑氣), 부기(腐氣), 예기(穢氣) 등의 일곱 가지 기가 기승을 부릴 때 문천상은 비분강개한 마음으로 일필휘지로 옥중에서 천고의 명문인 정기가를 써서 곱고 낭랑한 소리를 대지에 울려퍼지게 했다.
1283년 원나라 조정은 남송의 잔존세력 수천 명이 연락을 취하고 기병하여 원나라에 반기를 들고 문천상을 구원할 것이라는 정보를 얻어 1월 8일 원세조 홀필열은 친히 문천상에 대해 심사하고 마지막으로 승상의 자리에 제수한다는 제안과 함께 투항을 권유했다. 문천상은 원세조에게 “ 죽음 이외는 다른 방법이 없다.”라는 말로 단호하게 거부했다.
다음은 문천상이 1283년 1월 9일 북경의 시시(柴市)에서 48세의 나이로 처형되기 직전에 쓴 절필시(絶笔诗)다.
昔年单舸走维扬(석면단가주유양)6) 옛날 일엽편주로 유양에서 달아나
万死逃生辅宋皇(만년도생보송황)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구해 황제 곁으로 달려갔으나
天地不容兴社稷(천지불용흥사직) 하늘과 땅이 사직을 허락지 않아
邦家无主失忠良(방가무주실충량) 나라의 임금은 없어지고 충성스러운 신하들은 잃었다.
神归嵩岳风雷变(신귀숭악풍뢰변) 숭악의 귀신은 뇌성과 폭풍으로 변하여
气哇烟云草树荒(기왜연운초수황) 연기와 구름을 토해 초목을 말렸으니
南望九原何处是(남망구원하처시) 머나먼 구원(九原)은 어디로 가는가?
尘沙黯澹路茫茫(진사암담로망망) 자욱한 먼지가 길을 가려 망망하구나!
衣冠七载混毡裘(의관칠재혼전구) 칠 년 동안 입어 누더기가 된 갖옷을 걸치고
憔悴形容似楚囚(초췌형용사초수) 초췌한 몰골의 초나라의 죄수의 몸으로
龍馭兩宮崖岭月(용어양궁애령월) 용이 끄는 수레를 몰아 애령궁과 월궁 사이를 날아다니다가
貔貅万灶海门秋(비휴만조해문추) 수만 명의 흉맹한 용사들과 함께 해문에서 스러졌다.
天荒地老英雄丧(천황지로영웅상) 하늘과 땅은 무너지고 영웅은 죽었으니
国破家亡事业休(국파가망사업휴) 나라는 망하고 집은 파탄나서 만사가 휴의로다.
惟有一腔忠烈气(유일일강충열기) 단지 내 한 목구멍에서 뿜어져 나온 충열의 기운만은
碧空常共暮雲愁(벽공상공모운수) 푸른 하늘의 저녁노을에 실린 시름이 되어 머물러 있으리라!
1)갈족(羯族)/ 오호16국 중의 하나인 후조(後趙)를 세운 석륵은 갈족(羯族) 출신이다.
2) 지유(地維)/ 지기(地紀)라고도 하며 땅을 지탱하는 밧줄. 이것이 끊어지면 땅이 기울어 뒤집이 진다는 중국의 옛 신화로 하늘을 받드는 기둥과 땅을 지탱하는 밧줄 즉 天柱地維(천주지유)가 있어 세상이 보전된다고 보았다.
3) 양구(陽九)와 백육(百六)은 액운(厄運)을 의미한다. 옛날 역서에 106년이 경과할 때마다 재앙을 닥쳐온다고 생각하여 양구의 액(厄)이라고 칭했다.
4)범문자(范文子)/ 사섭(士燮)의 시호로 범무자(范武子) 사회(士會)의 아들이다. 경공 11년 기원전 589년 제나라가 노(魯)와 위(衛) 두 나라를 침략하자 그는 구원군의 상군원수가 되어 두 나라를 구했다. 진려공(晉厲公) 6년 기원전 575년 정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출전한 려공(厲公)을 따라 중군부장으로 종군했다. 려공 7년 언릉(鄢陵)의 싸움에 이기고 개선했으나 그 일로 인해 려공이 교만에 빠져 폭정을 행하자 장차 당진국(唐晉國)에 내란이 일어날 것을 걱정한 나머지 병을 얻어 죽었다.
5) 우기(牛驥) : 소는 둔한 짐승, 기(驥)는 천리마로 잘나고 못난 사람이 같이 섞여 있다는 말이다. 문천상은 자기를 기에 비하고 아무 생각 없이 죄짓다 잡혀온 잡범(雜犯)들을 소로 비했다.
6)유양(維揚)/ 지금은 강소성의 양주시(揚州市)에 관할의 구 이름이나 옛날에는 양주시의 별칭이었다.
1)단청(丹靑)/ 한청(汗靑)을 잘못이라 여겨짐. 단청 물감, 그림을 말하고 한청은 옛날 종이가 없던 시절에는 대나무를 쪼개 불에 구워 기름을 뺀 다음에 그 위에 글을 써서 기록했다. 그런 연유로 역사라는 뜻으로 쓰인다.
2) 태사간(太史簡)/ 태사(太史)는 역사를 기록하는 관리다. 간(簡)은 종이가 나오기 전에 대나무나 나무를 잘라 얇게 만들어 그 위에 글을 썼다. 대나무의 것을 죽간(竹簡), 나무의 것을 목간(木簡)이라 했다. 제나라의 대부 최저(崔杼)가 제장공(齊莊公 : 재위 전 554-548년)을 시해하고 제경공(齊景公)을 세우고 스스로 우상(右相)의 자리에 올라 제나라 국정을 전단했다. 최저가 사서를 보고 태사를 죽였다. 그 동생이 태사의 직을 이었으나 그 형이 쓴 것과 똑 같이 기록했다. 최저가 다시 그 동생을 죽였다. 그 막내 동생이 태사의 직을 물려받아 두 형과 똑같이 사서에 기록했다. 최저가 결국은 태사들의 기록을 고치지 못하고 그 막내동생을 용서할 수 밖에 없었다.
3)동호필(董狐筆)/ 동호직필(董狐直筆)의 줄인말로 동호는 춘추시대 진(晋)나라의 사관이다. 당시 조돈(趙盾)은 상경(上卿)으로 진나라의 국정을 담당하고 있었다. 폭정을 행하던 진영공(晉靈公 : 재위 기원전 620-607년)이 직간을 올리는 조돈을 살해하려고 하자 조돈은 도망쳐 진나라 국경에 머물며 정세를 관망하던 사이에 그의 조카 조천(趙穿)이 진여공을 시해하자 그는 도성으로 돌아와 주나라에 옮겨 살고 있던 흑둔을 모셔와 군주로 세웠다. 이가 진성공(晉成公 : 재위 전 607-600)이다. 이에 진나라의 태사(太史) 직에 있었던 동호(董狐)가 ‘ 조돈이 그 군주를 시해했다.’라고 사서에 기록했다. 조돈이 보고 ‘ 군주를 시해한 것은 조카 조천이 한 짓인데 왜 자기의 이름을 올린 것이오?’라고 책망하자 동호는 ‘상경의 신분으로 국정을 담당했던 당사자가 국내에 거주하는 동안 시군의 란이 일어났음에도 그 일을 밝혀 시역자를 벌하지 않았으니 상경이 한 일과 같다.’라고 대답하고 그 문구를 고치지 않았다는 고사다.
4)장량추(張良椎)/ 한왕조의 개국공신 장량(張良)이 황석공을 만나 삼략(三略)이라는 병서를 얻기 전에 조국 한나라를 멸망시킨 진시황을 암살하여 그 원수를 갚으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천하를 돌아다니며 명사들과 교우관계를 맺었는데 마침내 창해(滄海)에서 한 장사를 만날 수 있었다. 창해력사(滄海力士)는 의기가 높고 힘이 장사에 120근이나 되는 철추를 사용했다. 진시황이 동쪽으로 순수 나왔을 때 장량과 창해역사는 진시황을 박랑사(博浪沙)에서 저격했으나, 뒤따르던 부거(副車)를 잘못 맞추었다. 본래 시황이 그런 위험을 짐작하고 어디 나갈 때마다 앞에 빈 수레를 세우고 자기는 뒤에 숨어 있곤 하는 것을 몰랐었다. 장량(張良)은 잡히지 않고 도망칠 수 있었으나 창해력사는 잡혔다. 그는 온갖 고문을 견디며 장량의 존재를 말하지 않고 ‘대장부가 세상에 났다가 천하에 옳지 않은 일이 있으면 그것을 한번 시원히 풀고자 한 것 뿐이지 어찌 누구의 시킴을 받겠아서 했겠는가? 라고 심문관을 책망하다가 죽었다.
5)소무절(蘇武節)/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60년에 죽은 서한왕조의 대신으로 자는 자경(子卿)이다. 지금의 섬서성 서안 부근의 두릉(杜陵) 출신으로 흉노 정벌 때 군공을 세운 소건(蘇建)의 둘째 아들이다. 소무는 부친덕분에 랑(郞)이 되었다가 곧이어 황실의 마굿간을 관장하는 부서의 책임자인 중구감(中廐監)이 되었다. 천한(天漢) 원년 기원전 100년, 황제의 명을 받들어 중랑장(中郞長)의 신분으로 지절(持節)을 들고 흉노에 사자로 갔다. 흉노의 내란 사건에 연루 된 부사(副使) 장승(張勝)으로 인하여 흉노에 억류되어 자살을 시도했으나 미수에 그치고 계속된 흉노의 투항권유에 지조를 지켜 항복하지 않았다. 이에 흉노의 선우는 지금의 바이칼 호수로 보내 양을 치게 하고 암양이 뿔이 나면 방면해 주겠다고 했다. 소무는 북해에서 19년 동안 양을 치다가 한소제(漢昭帝) 시원(始元) 6년 기원전 81년 흉노와 한나라가 강화을 맺고서야 비로소 한나라에 돌아올 수 있었는데 그의 수염과 머리는 모두 새하얗게 변해 있었다. 전속국(典属国)에 임명되었으나 다음 해 상관걸(上官桀)의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관직에 면직되었다. 한선제(漢宣帝)를 옹립하는데 참여해서 관내후(關內侯)에 봉해지고 얼마 후에 우조(右曹) 전속국(典屬國)에 복위되고 더하여 그가 지킨 지조에 대해 칭송하기 위해 그에게 제주(祭酒)라는 호칭을 하사받았다. 소무가 맡았던 전속국은 제후국이나 이민족에 관련된 일을 관장했던 2천 석의 관리로 지금으로 말하면 외무장관에 해당한다. 그가 죽자 선제는 그의 상(像)을 만들어 기린각(麒麟阁)의 충신들 대열에 세우게 했다. 기린각은 한무제가 공신들의 공을 기리기 미앙궁(未央宮) 내에 세운 비각이다.
6) 엄장군두(嚴將軍頭) : 삼국시대 촉나라 장군 엄안(嚴顔)의 이야기다. 싸움에 패하여 잡힌 엄안에게 항복하라고 장비가 권하자 "나는 단두장군(斷頭將軍)은 있다는 말은 들었으나 항장군(降將軍)이 있다는 말은 못들었다" 했다. 머리가 잘려 단두장군이 될지언정 항복하지 않겠다고 말한 것이다.
7) 嵇侍中血(혜시중혈)/ 서진(西晉)의 혜제(惠帝) 때 시중(侍中)벼슬 하던 혜소(嵇紹)가 흘린 피를 말한다. <진서(晉書) 충의전(忠義傳) 혜소(嵇紹)>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영안(永安) 원년(304) 동해왕 사마월(司馬越)이 혜제를 끼고 성도왕(成都王) 사마영(司馬潁)을 토벌하기 위해 출전했으나 탕음(蕩陰)에서 황제의 군사가 패하고 말았다. 이에 관리들과 호위군사들이 모두 흩어져 달아났으나 오지직 시중 혜소 혼자 의관을 단정하게 하고 황제를 곁에서 부축했다. 군사들이 달려와 혜소를 해치려고 하자 혜제가 ‘ 이 사람은 나를 수발하는 관리이니 해치지 말라.“라고 하자 군사들이 ” 저희는 황태제로부터 명을 받들기를 황제 외는 아무도 살리지 말라는 명을 받았습니다.”라고 말하고 혜소를 살해했다. 그때 혜소의 피가 튀어 황제의 옷 소메를 적셨다. 위급한 상황이 지나자 황제의 좌우에 있던 사람이 황제의 옷에 튀긴 피를 빨려고 하자 황제가 “ 이는 혜시중의 충성스러운 피니 빨지 말라!”라고 했다. 이로 인해 혜시중혈은 목숨을 바쳐 충성하는 의기를 의미하게 되었다. 혜소는 종회(鐘會)의 모함을 받아 사마염에게 살해당한 죽림칠현 중의 한 명인 혜강(嵇康)의 아들이다.
8)張睢陽齒(장수양치)/ 당나라 현종 때 반란을 일으킨 안록산의 군대에 수 양성에 의지해서 대항한 ‘장순(張巡)의 이빨’을 말한다. 장순이 반란군과 싸울 때 분을 참지 못하고 이를 이를 부득부득 갈아서 이가 다 부스러졌다. 중과부적으로 반란군에게 싸움에 패해서 사로잡혀 투항을 권유받았으나 오히려 반란군을 꾸짖고 듣지 않았다. 안록산이 노해서 “ "네가 싸울 때 이를 너무 갈아 이가 없다는데 어디 보자" 하고 칼로 입을 도려내고 보니 정말 이빨이 몇 개 밖에 없었다고 했다. 장순은 당나라 포주(蒲州) 관할의 하동(河東) 출신이다. 수많은 서적을 읽고 또한 군사의 일에 정통했다. 개원(開元) 연간에 진사(進士)가 되었고 천보(天寶) 연간에 청하(淸河)의 현령(縣令)이 되었는데 정령이 매우 엄숙했다. 후에 진원(眞源)의 현령으로 옮겼다. 안록산이 반하자 그는 진원의 현원황제(玄元皇帝 : 즉 노자(老子)를 말한다. 당나라를 세운 이세연이 이씨의 시조를 노자로 정하고 시호를 현원황제로 받들고 각 고을마다 묘를 설치하여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의 묘를 지키던 관리들과 백성들을 이끌고 기병하여 옹구(雍丘 : 하남성 杞縣)으로 들어가 영호조(令狐潮)가 이끄는 4만에 달하는 반군의 진격을 부족한 군량과 장비 및 절대적으로 열세인 병력으로 막았다. 후에 다시 수양성으로 들어가 태수 허원(許遠)이 이끌던 그곳의 수비병과 합친 6천여 명의 군사로 성에 의지하여 반군의 남하를 저지했다. 이윽고 시간이 지나자 성중의 양식이 떨어지고 외부의 원군도 역시 끊어져 차와 종이를 끓여 먹고 심지어는 자식들을 서로 바꾸어 먹으며 결사적으로 반군에 저항했다. 모두 400여 회에 달하는 크고 작은 전투를 치르며 살해한 반군의 수효는 12만에 달했다. 임회(臨淮 : 강서성 우대시 북)의 하남절도사 하란진명(賀蘭進明)은 장순의 구원요청을 받고도 출동을 하지 않아 수양성은 결국 함락되고 장순은 사로잡혀 살해되었다.
9)안상산설(顔常山舌)/ 당나라 천보연간에 일어난 안록산의 란 때 상산(常山)의 태수였던 안고경(顔杲卿)의 일을 말한다. 안고경은 서법으로 유명한 안진경의 사촌형이다. 과거를 거치지 않고 관리로 발탁되었다가 개원(開元) 년간에 범양(范陽)절도사의 호조참군에 임명되었다. 안록산(安祿山)이 그의 명성을 듣고 조정에 표를 올려 영전판관(營田判官)이 된 그를 상산의 태수 대리로 삼았다. 천보 14년 (755) 안록산이 반란을 일으키자 그는 사촌동생으로 평원(平原)의 태수로 있던 안진경과 호응하여 휘하의 군사를 모아 안록산의 반군에 반격을 가해 안록산의 부하 장수 여러 명을 붙잡아 처형했다. 당현종이 그를 위위경(衛尉卿) 겸 어사중승(御史中丞)으로 삼았다. 안고경이 하북의 제현에 격문을 전하자 17개 군이 분연이 기병하여 호응하였고 6개 군만이 반란군에 가담했다. 이윽고 상산을 급공한 사사명(史思明)의 군대에 대항하여 6일 동안 격전을 치른 끝에 결국은 중과부적에 구원군도 오지 않아 성은 마침내 함락되고 그는 포로가 되어 안록산의 본영이 있는 낙양으로 압송되었다. 항복하라는 안록산의 위협에 굴복하지 않고 오히려 그를 크게 꾸짖자 안록산은 안고경의 혀를 자른 후에 죽였다.
10)요동모(遼東帽)/ 동한 말의 저명한 학자 관녕은 환관들은 조정을 죄고 흔들며 전횡을 일삼고 제후들은 중원에 할거하여 영웅을 칭하고 있는 것에 불만을 품고 바다를 건너 요동의 해성(海城)으로 들어가 학문을 강연했다. 해성은 지금의 요녕성 해성시 신대자진(新臺子鎭)으로 그것에 강당과 숙소를 짓고 전국각지에서 학생들을 모아 사서오경을 가르쳐 인재를 배양했다. 사서에는 관녕이 머문 곳은 그에게 학문을 배우려고 몰려든 사람으로 인하여 시가를 이루었다고 했다. 그는 50여 년을 그곳에 살면서 백성들에게 수많은 선행을 행하여 깊은 존경을 받았다고 했다. 관녕은 학문이 깊고 인품과 덕성이 고상하여 조정에서는 여러 번 그를 청하여 관리로 삼으려고 했으나 모두 거절했다. 그는 탐관오리들과 어울려 자기의 품성이 더렵혀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의연하게 해성에 은거하며 청백하고 고아한 절조를 분명히 했다. 그는 항상 길이가 높은 하얀 모자를 머리에 쓰고 다녔기 때문에 요동백모(遼東白帽), 혹은 요동모(遼東帽)라는 고사가 생긴 것이다.
11) 출사표(出師表)/ 동한말 천하가 어지러지자 제갈량은 남양(南陽)의 융중(隆中)에 은거히여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었다. 그때 군웅 중의 한 명인 유비(劉備)가 삼고초려의 예로써 그의 초막을 찾아온 성의에 감격해 출사했다. 제갈량은 유비을 위해 천하삼분지계를 성공시켜 촉한을 건립했으나 대업을 이루기 전에 유비가 죽고 그 뒤를 아들 유선(劉禪)이 이었으나 아둔하고 어리석었다. 그러나 제갈공명은 유선을 모시고 천하통일의 대업을 성취하고자 하는 자기의 충성심을 글로 써서 바친 글이 출사표다. 출사표는 전후로 두 편이 있는데 구절구절이 나라 일을 생각하는 우국충정의 마음은 보는 사람을 감동시켜 눈물짓게 만든다고 했다. 출사표(出師表)를 읽고 울지 않는 자는 사람이 아니라 했다.
12)도강즙(渡江楫)/ 중국 동진(東晋)의 장군 조적(祖逖)이 북방의 중원을 어지럽히는 오랑캐를 정벌하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장강을 건너다 중류에 이르자 노로 뱃머리를 치며 중원을 회복하겠다는 결의를 다진 후 석륵(石勒)의 군사들과 싸워 승리를 쟁취했다는 고사다.
13)격적홀(擊賊笏)/ 당덕종(唐德宗 : 780-805년) 때 단수실(段秀實)의 일이다. 덕종 4년, 783년 경원(涇原)의 군사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덕종은 봉천(奉天)으로 몽진했다. 봉천은 지금의 섬서성 건현(乾縣)이다. 장안의 수비를 맡은 주차를 절도사 요령(姚令) 등이 대진(大秦) 황제로 옹립하고 연호를 응천(應天)이라 하고 장안에 남아있던 당조의 신하들을 위협하며 자기의 반란행위에 합류하도록 했다. 단수실이 분개해서 주차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 미친 도둑아. 네 놈을 죽여 만 조각을 내지 못하는 것이 한이다"라고 말하고는 손에 쥐고 있었던 홀(笏)을 들어 주차의 머리를 가격하자 주차의 머리에서 피가 나서 땅에 흘렀다. 단수실은 결국 주차의 부하들에게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다음해 주차는 국호를 한(漢)이라 고치고 자신을 한원천황(漢元天皇)이라 칭했다. 이 해에 주차는 당나라 관군에게 토벌되어 영주(寧州) 팽원(彭原)으로 도망쳤다가 그의 부하에게 살해되었다.
14) 초수(楚囚)/ 초공왕(楚共王) 7년 기원전 584년, 초나라가 영윤 자중(子重)을 대장으로 삼아 정나라 정벌군을 일으켰다. 초나라를 배반하고 당진국에 붙은 정나라의 배신행위를 묻기 위해서였다. 영윤(令尹) 자중은 초장왕(楚莊王)의 동생에 공왕에게는 숙부가 되며 이름은 영제(嬰齊)다. 운공(鄖公) 종의(鐘仪)가 자중의 정벌군에 종군했다가 초군이 싸움에서 패하는 바람에 종의는 정나라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정나라는 그를 억류하고 있다가 얼마 후에 당시의 패권국 당진국으로 보내 ‘ 초나라의 포로 즉 초수(楚囚)’ 가 되었다. 그러나 운공은 머리를 빳빳이 들고 의연(毅然)한 자세로 일관하면서 벼룩에게 몸을 맡기고 냄새나는 벌레나 쥐들이 축축한 감옥을 아무 거리낌 없이 어리저리 돌아다니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매일 깨끗한 얼굴로 모자는 단정하게 쓰고 남쪽을 향해 좌정하고 초나라가 있는 곳을 바라보며 고향을 그리워했다. 초공왕(楚共王) 9년 기원전 582년 종의는 죄수 생활 2년 만에 진경공(晉景公)의 접견할 수 있게 되었다. 진경공이 감방에서 기이한 자세로 포로생활을 하고 있던 종의를 보고 돌아와 시종에게 물었다.
“ 병기고 안에 남방식 모자를 쓴 사람이 있던데 누구인가? ”
시종이 대답했다.
“ 그 사람은 정나라가 보내온 초나라 포로입니다. ”
경공은 종의가 2년 동안이나 감옥생활을 하면서 자기나라의 모자를 계속 써 왔다는 사실을 알고 매우 감동을 받았다. (초나라는 진나라의 남쪽에 있었기 때문에 초나라 사람이 쓰고 다니던 모자를 남관(南冠)이라고 불렀다.) 진경공은 그렇게 오랫동안 초나라의 모자를 고집스럽게 쓰고 생활한 종의를 매우 괴이하다고 여겼다. 그래서 그는 령을 내려 불러서 접견하고 위로했다. 경공은 종의에게 그의 집안 내력을 물었다. 종의가 자기 집안은 대대로 초나라의 악사(樂師)를 지내왔다고 대답했다. 경공이 거문고를 타보도록 명하자 종의는 초나라의 노래를 연주했다. 경공이 다시 초공왕에 대해 물었다. 종의는 단지 공왕의 어렸을 때 일과 대신들의 이름만을 말할 뿐 공왕의 사람됨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거절했다. 접견을 끝낸 경공이 범문자(范文子)4)에게 종의의 일을 고하자 문자도 역시 감동하며 말했다.
“ 그 초나라 포로는 진실로 학문이 깊고 스스로를 수양하며 또한 연주한 음악은 고향의 노래에 쓰고 있는 모자는 남관으로 자기의 군왕인 초왕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성심과 신의를 갖고 근본을 잊지 않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와 같은 사람은 마땅히 방면하여 자기 나라로 돌려보내 그로 하여금 진과 초 두 나라가 수호를 맺는 데 기여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
범문자가 계속해서 말했다.
“ 종의와 같은 사람은 자기의 근본을 배신하지 않고 옛날 친구를 잊지 않으며 사심 없이 자기 군왕에 대해 존경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이야 말로 인(仁), 신(信), 충(忠), 민(敏)을 갖춘 인사라고 할 만합니다. 인으로써 사물을 사랑하고, 신실(信實)로써 법도를 지키며, 처음부터 끝까지 충성으로 일관하고, 밝은 지혜에 의지하여 일의 전말을 밝힐 수 있으니 그 사람이야 말로 중대한 일을 맡아 완성 시킬 수 있습니다. ”
범문자의 건의를 받아들인 경공은 종의를 석방하여 초나라로 귀국시켜 진과 초 두 나라가 수호조약을 맺는데 중재하는 역할을 맡도록 했다. 원래 종의에게 좋은 인상을 받고 있었던 경공은 범문자의 건의를 받아들여 석방한 것이다. 초나라로 돌아간 종의는 실제로 진나라의 군주가 초나라와 전쟁을 중지하고 수호조약을 맺고 싶다는 뜻을 초공왕에게 전달했다. 공왕은 종의의 건의를 받아들여 종의를 다시 진나라로 보내 수호조약을 맺도록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