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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10:1-12
찬송가 337장 ‘내 모든 시험 무거운 짐을’
하나님께 질문하는 욥(10:1-7절)
위로자로 찾아온 줄 알았던 세 친구는 욥을 가장 힘들게 하는 마지막 시련이었습니다. 불난 집에 부채질하듯 세 친구가 늘어놓는 욥을 위한 충고의 말은 명절 친척 어르신들의 잔소리처럼 욥의 마음을 후벼파고 있습니다. 차라리 혼자 있었더라면 조용히 기도라도 할 수 있었겠지만 욥에게는 조용한 묵상기도의 시간도 사치였습니다. 이미 육신이 피폐 해져버린 욥은 세 친구들로 인해 확인사살을 당하듯 정신까지 너덜너덜 해지고 있습니다. 그 상황에서 욥은 내면의 고통을 하나님께 토로합니다.
(1-2) 내 영혼이 살기에 곤비하니 내 불평을 토로하고 내 마음이 괴로운 대로 말하리라 내가 하나님께 아뢰오리니 나를 정죄하지 마시옵고 무슨 까닭으로 나와 더불어 변론하시는지 내게 알게 하옵소서
‘내 영혼이 살기에 곤비하니’라는 말은 ‘죽고 싶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살 소망이 없을 때, 기쁨이 없을 때, 내 삶에 고통이 가득할 때 ‘죽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고통을 만난 이에게 죽음이란 더 이상 고통을 직면하지 않아도 되는 도피처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사랑하는 이와 이별의 아픔으로, 입시와 고시에 실패한 학생들이, 생활고에 시달린 이들이, 육체적 고통의 끝자락에서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합니다. 그때 우리는 덩그러니 세상에 혼자 남겨진 것 같은 외로움을 느끼게 됩니다. 나 혼자 실패한 것 같고, 나 혼자 아픈 것 같습니다. 아무도 나의 아픔과 상실감, 고통에 관심이 없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는 다른 선택이 있습니다. 바로 그 고통과 상실의 아픔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마치 홍해 앞에 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경험했던 것처럼, 우리 인생의 아픔과 고통의 한계에 다다랐다고 생각이 들 때, 더 이상 하루를 버티기도 어렵다는 생각이 들 때, 세상에 혼자 버려진 것 같이 느껴지는 순간이 올 때, 혼자 그 무게를 견디다 못해 생명의 끈을 놓지 말고, 하나님께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침묵하시는 것 같지만 여전히 우리 곁에 우리와 함께 동행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욥은 죽고 싶은 고통의 순간에도 하나님과의 끈을 놓지 않고 나아갑니다. 비록 그의 말이 불평과 괴로운 신음이라 할지라도 그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궁금했던 사실은 바로 ‘무슨 까닭으로 나와 더불어 변론하시는지 내게 알게 하옵소서’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이 질문이 욥을 가장 힘들게 했습니다. 어떤 병에 걸렸을 때 두 가지가 환자를 가장 힘들게 만들 수 있는데 한 가지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에 걸렸을 때와 ‘치료를 할 수 없는 병’에 걸렸을 때입니다. 극심한 고통과 힘든 치료 과정이 있더라도 원인과 치료법을 알면 그래도 사람이 희망을 가지고 치료에 임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원인을 알 수 없는 것은 오히려 치료법을 알지 못할 때 보다 더 절망에 빠지기 쉽습니다. 오늘 욥의 고통이 그러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묻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무슨 까닭으로 나에게 이런 일을 허락하신 것입니까?’ 욥은 당시에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욥의 고난을 통해 수 많은 사람들은 자신과 타인의 고통에 대하여 쉽게 정죄하거나 판단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욥의 고난은 무의미한 고통이 아니었습니다. 고통이 찾아올 때 빠지는 정죄의 늪에서 수 많은 사람들을 건져주었습니다. 욥의 고난이 아니었다면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고난의 다양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의 잣대로 자신과 타인을 정죄하는 세 친구의 모습에서 더 성숙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욥에게는 이유 없는 고난이었지만 하나님 안에서 욥의 고난은 의미 없는 고난은 아니었습니다.
우리에게도 그러합니다. 때로는 내 삶에 벌어지는 부조리함, 의미 없어 보이는 고통, 맥락 없이 찾아오는 것 같은 인생의 아픔이 허무하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욥처럼 질문하게 됩니다. ‘하나님, 내 인생에 찾아온 이 고통의 이유를 알게 하옵소서’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기에 그 뜻과 계획을 알지 못합니다. 다만 하나님 안에서 의미 없이 찾아오는 인생의 순간은 단 하나도 없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하고 오늘의 삶을 살아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모두 알기 때문이 아니라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욥은 하나님께 역설적인 질문들을 함으로 자신이 당한 상황의 부당성을 살펴보아 달라고 간구하고 있습니다.
(3) 주께서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학대하시며 멸시하시고 악인의 꾀에 빛을 비추시기를 선히 여기시나이까
욥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창조물을 학대하시고 멸시하시는지를 질문하고 있으며, 또한 어찌 악인의 꾀에 빛을 비추시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이 질문을 요약하면 ‘하나님은 선한 분이지 않습니까?’라는 질문입니다. 욥이 믿고 신뢰하고 있던 하나님은 ‘선한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자신에게 찾아온 상황은 선하신 하나님이 자신의 피조물에게 행하시지 않을 법한 악한 상황이라고 여겨지기에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이런 순간을 겪은 분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명령하실 때 아브라함은 모리아 산을 향해 걷는 삼 일길 동안 스스로 질문에 답해야 했습니다. ‘나에게 아들을 번제로 바치라고 하시는 하나님이 정말 선한 분이 맞으실까?’ 아브라함은 그동안 자신의 삶에 역사하신 하나님을 묵상해 보았을 것입니다. 자신이 거짓말로 아내를 누이라 속인 적이 있었고, 또 아들을 주실 것이라는 약속을 신뢰하지 못하고 하갈을 첩으로 삼아 이스마엘을 얻어 가정에 불화를 가져온 적도 있었지만 하나님은 그 모든 상황에서 자신을 보호하여 주실 뿐 아니라 약자인 하갈과 이스마엘까지 긍휼히 여기신 선한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믿음은 삶의 모순과 하나님의 선하심을 연결하는 다리가 됩니다. 때로는 인생에 벌어지는 많은 사건, 사고가 신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한계의 낭떠러지에서 저는 신학이 아닌 신앙의 다리를 건너게 됩니다. 바로 제가 성경을 통해 그리고 짧은 인생을 통해 경험한 하나님은 ‘선한 분’이시라는 사실을 믿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도 그 모순적인 순종의 명령 앞에서 순종할 수 있었던 것은 ‘선하신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있었기 때문이며, 결국 하나님께서 이삭을 살리시고 그에게 언약의 계보를 잇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건은 단순한 믿음의 테스트뿐만이 아니라 십자가에 우리를 위해 아들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예표하는 사건이 됩니다. 그러므로 지금 당장 내 삶에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 찾아왔다면 또 그 이유를 알고자 애썼지만 알 수 없었다면 때론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하며 그 질문의 구렁텅이에서 빠져 나오시기 바랍니다.
(4-7) 주께도 육신의 눈이 있나이까 주께서 사람처럼 보시나이까 주의 날이 어찌 사람의 날과 같으며 주의 해가 어찌 인생의 해와 같기로 나의 허물을 찾으시며 나의 죄를 들추어내시나이까 주께서는 내가 악하지 않은 줄을 아시나이다 주의 손에서 나를 벗어나게 할 자도 없나이다
욥은 사람의 눈처럼, 또한 인생의 길이처럼 한계가 없으신 하나님께서 어찌하여 사람처럼 살펴보시냐고 질문하고 있습니다. 이 질문은 다시 하면 ‘선하신 주님의 능력에는 인간처럼 한계가 없지 않으십니까? 그런데 왜 이 상황을 관망하고만 계십니까?’라는 질문입니다. 욥은 삶에 찾아온 고통의 문제를 하나님께 가져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상황을 세 친구가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생각해보면 육신의 눈, 사람의 보는 시각은 잘못될 수 있으며, 짧은 인생을 사는 사람의 식견에는 옳지 않은 판단을 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축구 경기를 하면 심판이라고 해도 잘못된 오심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럴 때 요즘에는 기술이 발전해서 비디오 판독을 통해 오심을 바로잡는 일들이 발생하곤 합니다. 지금 욥은 인생의 반칙을 당해 부상을 당했는데 심판이신 하나님께서 오심을 하시고 계신 것 같으니까 다시 제대로 살펴서 비디오 판독을 해달라고 요청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왜냐하면 비디오 판독을 요청할 수 있는 사람은 심판이기 때문입니다. 반칙을 당한 선수가 다른 선수들에게 억울함을 호소하거나 상대 선수와 몸싸움을 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심판에게 호소해야 합니다. 우리 인생에도 때론 억울한 일을 겪고 힘든 순간을 겪을 때 사람들이 이해해주지 못하고 때론 아무리 애써도 해결되지 않는 상황에 놓이게 될 때도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좌절하고 낙심하지만 말고 욥처럼 그 문제를 하나님 앞에 토로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1절에 욥이 하나님께 내 불평을 토로하겠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 ‘불평’이라는 단어는 ‘시아흐’ 곧 ‘탄식, 근심, 고통’을 의미하며 ‘토로하다’라는 단어는 ‘아자브’라는 단어로 여기서는 ‘방출하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곧 자신의 탄식과 고통과 근심을 하나님께 내어놓겠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왜 중요합니까?
창세기 16장에 임신한 하갈이 사래의 학대를 피해 도망가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때 여호와의 사자가 그녀에게 임하여 아이의 이름을 지어주며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전해주었습니다. 그때 하갈은 여호와의 사자를 만난 그 샘의 이름을 ‘브엘라해로이’ 곧 ‘나를 살피시는 살아 계신 이의 우물이라’고 짓습니다. 욥이 세 친구에게 자신의 고통을 토로했다면 허무한 연기같이 사라졌겠지만 하나님 앞에 토로한 욥의 기도는 헛되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살피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탄원하는 욥(10:8-12절)
(8-12) 주의 손으로 나를 빚으셨으며 만드셨는데 이제 나를 멸하시나이다 기억하옵소서 주께서 내 몸 지으시기를 흙을 뭉치듯 하셨거늘 다시 나를 티끌로 돌려보내려 하시나이까 주께서 나를 젖과 같이 쏟으셨으며 엉긴 젖처럼 엉기게 하지 아니하셨나이까 피부와 살을 내게 입히시며 뼈와 힘줄로 나를 엮으시고 생명과 은혜를 내게 주시고 나를 보살피심으로 내 영을 지키셨나이다
욥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창조하셨는데, 어찌하여 다시 티끌로 돌려보내려 하시냐고 피조물의 입장에서 창조주 하나님께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그 묘사에 있어 어머니의 뱃속에서 생명이 자라는 신비한 과정을 설명하며 그 모든 과정에 생명과 은혜를 베푸사 자신이 살아 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질문에는 두 가지 질문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 저를 잊으셨나요? 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욥이예요, 이대로 저를 죽음에 내모실 건가요?’라는 질문과 사춘기 학생들이 흔히 부모님께 던지는 말로 ‘이럴 거면 왜 나를 낳았어요?’라는 질문입니다. 그리고 이 질문들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은 ‘하나님, 저를 사랑하시나요?’라는 질문으로 귀결됩니다. 우리도 고난이 다가오고, 또한 그 고난이 쉽게 지나가지 않고, 그 속에서 아픔과 고통을 겪으며 ‘하나님이 나를 사랑 하시는 게 맞을까?’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최선을 다해 준비했던 사업이 망하고, 사랑하는 이가 할 수 있는 모든 치료를 동원했음에도 곁을 떠날 때가 있고, 수 년간 준비했던 시험에 낙방을 하고, 아무리 몸부림쳐도 남에게는 쉽게 주어진 것들이 내게는 너무나 힘들게만 느껴질 때 인생을 향한 증오와 분노의 화살이 인생을 넘어 하나님을 향하게 됩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지 않으시는 것으로 느껴집니다. 머리론 ‘아니라고 아니라고’ 몇 번이나 되뇌지만 분노의 감정과 어려운 상황에서 흔들리는 우리의 마음을 추스르기가 너무 힘이 듭니다.
그 순간 우리는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를 외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버리신 것이 아님을 압니다. 수술실에 들어간 아이가 부모를 애타게 불러도 부모가 대답할 수 없는 상황이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가 그 아이를 버린 것이 아닙니다. 때론 내가 원하는 답을 주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내가 원하는 타이밍에 하나님께서 나타나 도우시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나를 버리신 것이 아님을 기억 하십시다. 하나님은 그 자녀를 결코 잊지 않으십니다. 내 상황을 결코 모르지 않으십니다.
오늘 우리는 욥이 던진 질문을 나누었습니다. ‘왜 내 삶에 이런 고난이 찾아왔습니까?’, ‘하나님은 선한 분이 맞습니까?’, ‘왜 나타나 도우시지 않습니까?’, ‘정말 저를 사랑 하시는게 맞습니까?’ 욥이 그 질문들에 답을 바로 찾지 못했을지라도 욥에게 희망이 있었던 이유는 바로 그 고통의 비명과 탄식 같은 질문들을 하나님께 토로했다는 사실입니다. 욥은 비록 고통과 비루해 보이는 삶의 끝자락에서도 스스로 삶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아파도 하나님 앞에서 아파했고, 불평해도 하나님께 기도하며 불평했습니다. 현재 말 못할 고통과 아픔이 내 삶을 짓누르고 있습니까? 쉽게 해결되지 않는 삶의 무게로 인해 하루가 버겁게만 느껴지십니까? 아파도 하나님 앞에서 아파하고, 불평해도 하나님께 기도하며 나아 가십시다. 욥의 탄식을 외면하지 않으신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탄식과 아픔에도 반드시 응답하여 주실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지혜로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계획을 다 알 수 없기에 우리는 주어진 일상에서 때론 좌절과 아픔을 경험하고 무너집니다. 그럴 때 마치 하나님께서 나를 잊으신 것처럼,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이 시간 우리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사 하나님 사랑의 풍성함과 부요함을 알게 하시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게 하옵소서. 상황과 감정에 짓눌리지 않고 선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며 우리의 일상을 뚜벅뚜벅 걸어갈 수 있는 믿음의 용기를 갖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나는 고통스러운 순간이 찾아올 때 누구에게 고통을 토로하고 있는지 그 결과는 어떠했는지 묵상해 봅시다.
2. 인생의 고난에 이유를 찾을 수 없는 순간에도 쉽게 절망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묵상해 봅시다.
3. 성경에 기록된 사건들을 떠올려보며 하나님의 선하심을 묵상해 봅시다.
4. 욥은 죽고 싶은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나아가 토로하는 편을 선택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욥에게 어떻게 응답하셨는지 묵상해 봅시다.
(작성: 강요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