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소년운동과 우리나라 어린이운동 발상지(2)
- 드디어 진주에 <우리나라 소년운동의 발상지 기념비>가 세워지다.
11월 15일 “진주는 우리나라 소년운동 발상지이다”라는 기념비가 진주시 교육청 내에 세워졌다. 기념비에도 밝혔듯이 이 기념비의 제막식은 내년 5월 5일 어린이날을 기해서 성대하게 열릴 예정이다.
기념비를 세운 단체는 [진주문화사랑모임]이며, 진주시에서 1천만원의 예산을 지원했고 진주시교육청은 기념비가 들어설 자리를 제공했다. 천도교와는 전혀 무관하게 기념비는 세워졌다.
기념비에는 ‘천도교’라는 문구가 두 번 사용되었다.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진주소년운동은 우리나라 소년운동의 시발점이고, 이 진주소년운동을 ‘진주 천도교소년회’에서 주도했다고 기념비에는 새겨졌다.
정면에서 기념비를 촬영하였다.
2010년 11월 15일 기념비는 완성되었고 내년 5월 5일 제막식이 예정되어 있다.
나는 기념비를 세운 진주문화사랑모임에는 전혀 관계하고 있지 않다.
직·간접적으로 이 단체의 분들을 알고 있기는 하나, 이 단체에 영향력을 행사할 처지가 아니다.
그래도 내심으로는 기왕에 진주에 소년운동 발상지 기념비를 세운다면 ‘천도교’라는 세 글자를 반드시 넣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기념비 전면에 새겨진 진주소년운동관련 기록. 소년운동가 강영호, 고경인의 이름이 새겨져 있고, 진주에서 천도교소년회가 300명의 회원으로 어린이날을 기념했다는 것도 새겨져 있다.
그래서 우촌 강영호 선생의 문학작품에 주목했고, 우연히도 천도교회 월보에서 우촌의 작품을 찾아, 지난해 5월 5일자 경남일보 1면에 강영호선생의 문학작품의 존재를 알릴 수 있었다.
2010년 11월 18일, 오늘 기념비를 확인하니 강영호선생의 문학작품 ‘彼-너에게’가 ‘천도교회월보’에 실려 있다고 새겨져 있었다.
기념비에 모두 두 번 ‘천도교’라는 문구가 사용된 것을 보고 나는 무척 기분이 좋았다.
진주소년운동가 강영호선생에 관한 기록을 기념비 뒷면에 새겨놓았다. 천도교회월보에 <彼-너에게>라는 시가 게재되었다고 새겨놓았다.
결과적으로 우리 천도교에서는 전혀 나서지 않았음에도, 우리나라 소년운동은 <진주 천도교 소년회>에서 주도하였다라는 사실을 기념비에 새기게 된 셈이다.
내년 어린이날, 기념비 제막식 때 천도교에서는 진주문화사랑모임에 감사패라도 전달했으면 한다. 이런 기념비를 천도교에서 나서서 세우겠다고 했다면 아마 특정 종교에 대한 특혜 운운하며 시비거리가 생겼을 수도 있다.
한편, 소년운동 기념비처럼 2천만원 정도의 소규모 사업도 추동할 역량마저 지금의 천도교에는 없는 것이 내심 안타까웠다. 동학혁명 유적지 관련하여 각 지자체에서 천도교와는 전혀 무관하게 행사도 하고 각종 기념관을 세우기도 한다. 굳이 천도교가 나서지 않아도 이제 ‘동학·천도교’하면 나라에서, 각 지방정부에서 알아서 다투어 기념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동학·천도교 관련 사업에 따른 역사적 고증이나 학술적 용역이다.
천도교가 소규모 사업을 추동할 역량이 없다보니 이러한 역사적 고증마저도 굳이 천도교에 맡기지 않는다. 천도교단내에서도 스스로 인정하듯 전문가가 없는 것도 원인이다. 그럼에도 천도교단 내에서는 ‘어린이운동’을 ‘소파 방정환’을 독점(?)하려 하기도 하고, 천도교 이전이 ‘동학’이었다고 해서 ‘동학’을 배타적으로 해석하려 하기도 한다.
지난해 신인간사에서 ‘진주의 소년운동’에 대해 제대로 검토하지 않는 것을 보고 개인적으로는 서운하기도 했고, 생각하면 할수록 분노가 치밀었다. 소파의 업적을 전혀 계승도 못하면서 알량하게 방정환을 지킨다고! 당장 소파 방정환 관련하여 인터넷만 검색 해보면 소파 방정환을 내건 어린이 관련 사업이 얼마나 많은가. 이 어디에도 천도교는 없다.
밀실에 소파 방정환을 가두어 놓고 어린이 운동의 ‘선구자’라고 치켜세운다 해서, 소파선생께서 아니 전암(荃菴) 동덕의 성령은 전혀 기뻐하시지 않을 것이다.
말 그대로 활동가 중의 활동가였던 소파선생은 갑갑해 쓰러지기 직전일 게다. 점점 소파 방정환이 쪼그라 들고, 왜소하게 된 것에는 천도교의 책임이 가장 크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이것은 참으로 미련한 일이기도 하고, 우스운 일이기도 하다. 전혀 비개벽적이고 반개벽적이다.
개벽이 무엇인가? 열 개, 열 벽. 열고 또 여는 것이다. 닫힌 것을 열고, 막힌 것을 뚫는 게 개벽이다.
이런 기막힌 일이 소파 선생 관련한 것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니 문제는 매우 심각하다해야 할 게다.
어쨌든 먼저 소파에 대한, 어린이 운동에 대한, 소년운동에 대한 생각부터 열어보자. 이번에 세워진 “진주는 우리나라 소년운동의 발상지이다” 라는 기념비에 따른 사실 관계부터 따져본다.
①『천도교회월보』1921년 7월호 천도교소년회의 설립과 그 파문 / 묘향산인
“...작년 경남 진주에서 진주소년회란 것이 우담화와 같이 잠시 나타난 일이 없지 아니하였으나 그것은 혹 종 행위를 하기 위하여 일시적으로 설립함에 불과함이오 신문지의 보도에 의하면 회원 각자가 그회의 본래 사명을 자각하고 상당한 조직과 의의있는 규모 밑에서 그리한 것이라 하기는 어려웠습니다. 고로 엄격히 말하면 우리 조선에서는 아직도 진정한 소년의 모듬이라고는 없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②『개벽』1921년
“벌써 연전의 일로 기억된다. 경상남도 진주 시내 소년들이 소년회를 조직하야…… 그 사실은 조선 소년으로서 자각의 첫소리가 되었다.”
③『천도교회월보』 1922년 5월호
朝鮮에서 처음 듣는 어린이의 날 5月 1日의 天道敎少年會 創立記念日을 그대로 引用하여
“...금일의 소년문제는 실로 천하의 문제이며 소년문제를 완전히 해결하는데 의하여 비로소 천지운절(天地隕絶)의 기를 보할 수 있다하는 것이 금일 식자배(識者輩)의 공통으로 떠드는 소리이외다....춘만건곤(春滿乾坤)에 복만가(福滿家)라. 우내(宇內)의 태운(泰運)이 청제(靑帝)의 수레를 타고 동출(東出)의 고국(故國)을 두루 찾을 때 그 태화(泰和)의 일지운(一技運)이 어리고 고운 소년의 사회에까지 핑돌게 되었습니다. 경남 진주의 소년들이 제일착으로 그의 대운에 참여하였으며, 천도교의 소년 남녀들이 연(連)하여서 새빨간 횃불을 들었습니다....”
④ 『어린이』 1923년 3월(창간호)
“글방이나 강습소나 주일학교가 아니라 사회적 회합의 성질을 띄인 소년회가 우리 조선에 생기기는 경상남도 진주에서 조직된 진주소년회가 맨 처음이었습니다”
⑤ <동아일보> 1923년 5월 1일자
“진주지방은 조선에서 맨 처음으로 소년운동의 깃발을 든 곳인데, 오늘은 300명의 회원을 가진 천도교 소년회 주최로 오후 3시에 선언문을 돌리고 밤에는 기념강연을 한다더라”
⑥ 국가기록원 나라기록
http://contents.archives.go.kr/next/content/listSubjectDescription.do?id=008113
“소년운동은 3·1운동 이후 민족 실력양성운동의 일환으로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소년단체의 조직은 서울보다 지방인 안변, 진주, 광주, 왜관 등에서 먼저 결성되었다. 그러나 소년운동의 전개는 1921년 천도교 청년회가 소년의 지덕체를 발육시킬 목적으로 청년회 내에 소년부를 두었을 때부터로 천도교 소년회가 결성되면서 본격화되었다.”
③천도교회월보 1922년 5월호와 소파가 주도한 창간한 ④『어린이』창간호(1923.3)에서는 진주소년회를 본격적인 소년운동의 처음으로 인정하고 있다. 그리고 ⑤ 1923년 5월의 동아일보기사도 진주소년회를 소년운동의 첫 깃발로 인정한다. 진주문화사랑모임에서는 이러한 것을 근거로 진주에다 소년운동 발상지 기념비를 세운 것이다.
그러나 ①번의 필자인 묘향산인은 소춘 김기전선생이다. 소파 방정환이 어린이운동의 활동가라면, 소춘은 어린이운동의 이론가라 불리는 분. 소춘은 천도교소년회를 강조하며 진주소년회를 일시적인 현상으로 보았다.
그리고 진주 외에도 안변, 왜관 등지에서도 소년회가 세워지기도 했다는 기록은 국가기록원 나라기록에서 볼 수 있다. 심지어 안변, 왜관의 소년회는 진주보다 앞서기도 한다.
이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진주를 우리나라 소년운동의 발상지로 보는 것은 진주문화사랑모임의 지나친 애향심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이어지는 글에서는 진주소년회의 구체적인 활동상을 통해, 진주가 우리나라 소년운동의 발상지라 불릴 수 있는 근거를 살펴본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