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파랑길 41코스 2부 입니다
상주은모래해수욕장
너와 나의 약속
뒤돌아본 상주은모래해변
신라의 원효(元曉)가 이 산에 보광사(普光寺)라는 절을 세웠던 데서 보광산이라 하였는데,
고려 후기 이성계(李成桂)가 이 산에서 100일기도 끝에
조선왕조를 개국한 그 영험에 보답하는 뜻으로 산 전체를 비단으로 덮었다 해서 금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국립수산과학원 남해양식연구센터 앞을 지납니다
국립수산과학원 남해양식연구센터
천하몽돌해수욕장에서 조망되었던 망산과 앞산 그리고
덕야산 중턱에 설리스카이워크
위 이정표 표지판과 동일한 위치 입니다
위 이정표 위치와 동일 합니다
대량마을 뒷쪽 고갯길에서 노도가 조망되는 남파랑길 41코스~
남해군 상주면 양아리 벽련마을 앞에 있는 섬 노도는 예부터 배젖는 노(櫓)를 만드는데 쓰이던
목재를 많이 생산해서 노도(櫓島)라 유래되어서 노도(櫓島)라 부르고 있으며
또는 삿갓이 바다에 떠있는 것 같다 하여 삿갓섬이라 불리기도 합니다.
노도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구운몽> <사씨남정기>의 작가인
서포 김만중(金萬重 1637~1692)이 유배되었던 곳입니다
김만중은 1689년(숙종 15) 노도로 유배 와서 1692년(숙종 18년) 56세의 나이로 이곳에서 생을 마감했으며,
유배기간 3년 동안 사씨남정기와 서포만필을 집필하였습니다
김만중(金萬重, 1637년 3월 6일(음력 2월 10일 ~ 1692년 6월 14일(음력4월 30일)의 허묘는
1692년 4월(음력)부터 그해 9월까지 시신이 묻혀있었다 합니다
사씨남정기원에는 사씨남정기 소설에 등장하는 성진(양소유)와 팔선여 동상으로 꾸며진 공원 입니다
사씨남정기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
서포(西浦)는 누구인가
김만중(金萬重)의 아버지 김익겸은 1636 12월 병자호란이 일어나 청나라 군사들로부터 남한산성이 포위되자,
그는 강화도로 가서 강화산성을 사수하다가 강화산성이 청나라 군사들로부터 함락되기 직전에
남문으로 올라가 홀로 분신 자결하였습니다
그의 나이 23세였으며 충정공의 시호가 내려졌습니다
서포(西浦) 김만중(金萬重)은
본관은 광산. 자는 중숙, 호는 서포. 예학의 대가인 김장생(金長生)의 증손자이자 김집(金集)의 손자이다.
서포 김만중은 조선 19대왕 숙종(肅宗)의 정비 인경왕후 김씨의 아버지 김만기의 친동생이다.
숙종이 장희빈을 끔직히 총애할 때 숙종의 면전에다
조사석(소론계열)의 베갯머리 송사냐고 물었다가 바로 파직당한 김만중(서인 노론계열)은
의금부에 하옥 후, 평안북도 선천(군)으로 유배를 가게 된다
숙종은 어느 날 지경연사 김만중에게 조사석이 불안해하는 이유를 묻는다.
지경연사는 정2품 이상으로 학식이 풍부한 관리에게 내리는 벼슬이다.
김만중은 “후궁 장씨(張氏, 장희빈)의 어머니와 조사석은 친밀했습니다.
조사석이 우의정이 된 것은 여기에 연줄을 댄 것이라고 온 나라 사람들은 다 아는데,
전하만 모르고 있습니다”라고 대답을 했다.
숙종은 임금이 신하에게 이러한 말을 들으니 면목이 없다.
그 말의 근거를 대라. 가만 두지 않겠다”라고 펄펄 뛴다.
김만중도“전하의 질문에 답을 했는데 그 말의 근거를 물으신다면 죽음으로 달게 받겠습니다.
의금부로 가서 명을 기다리겠습니다”라고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다.
조사석의 권좌에서 승승장구한 내용을 살펴보니~
장희빈은 각종 인사권에도 개입한다.
장희빈의 오빠 장희재 주변에는 많은 무리가 모인다.
장희재는 낮은 직급이었으나 그에게 숙의 장의 힘이 있기 때문이다.
조사석은 이조판서에서 우의정이 되고, 좌의정이 된다.
영의정(정1품), 좌의정(정1품), 우의정(정1품)은 의정부의 삼정승이라 한다
숙종은 조사석을 책망하기도 하며 평소에 그렇게 신임이 두텁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숙종은 조사석을 국가를 위해서 정성을 다한다고 느닷없이 칭찬을 하고
정2품에서 정1품으로 2단계를 승격시켜서 정승에 오르게 한 것이다.
그 배경에는 장희빈의 어머니가 있었다. 장희빈의 어머니는 조사석 처갓집의 종이었다.
조사석은 젊었을 때 그 어머니와 사사로이 정을 통했다.
장 씨에게 시집을 간 후에도 어머니는 조사석의 집을 자주 왕래했다.
인망이 없는 조사석이 정승이 된 것은 궁중 깊숙이 후궁의 지원에 의한 것이라고 사관은 기록하고 있다
조선 제19대 숙종의 첫 왕비인 인경왕후(仁敬王后)의 아버지는 김익겸의 첫째 아들 김만기(金萬基) 입니다
김만기(金萬基)는 서포 김만중의 친형이죠
숙종의 어머니인 명성왕후(현종의 비),
인경왕후(숙종의 정비),
인현왕후(숙종의 계비),
서포(西浦) 김만중(金萬重), 김만기(金萬基) 모두 서인 가문이며,
장희빈(남인 계열)과 인현왕후(서인)의 당파 싸움은
경신환국(庚申換局) : 1680년(숙종 6년) 3월 ~ 4월 조정에서 남인 일파가 정치적으로 대거 실각당한 일이다.
당시 재상 허적이 조부 허잠의 시호를 받는 기념식 할 때, 궁궐의 허락을 받지 않고
유악(천막)을 빌린 일에서 숙종의 노여움으로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이 권력을 잡은 사건.
기사환국 : 1689년(숙종 15) 2월 2일 소의 장씨(장희빈) 소생의 아들 윤을 세자로 삼으려는
숙종에 반대한 송시열 등 서인이 축출되고, 남인이 장악한 사건.
갑술환국 : 1694년(숙종 20년) 4월 1일 발생한 숙종 시대의 3차 환국으로
서인들이 전개하던 폐비 민씨(인현 왕후) 복위 운동을 반대하던
남인이 화를 입어 권력에서 물러나고 서인이 집권한 사건으로
죽이고 죽는 세력 싸움이~
김만중은 1685년 홍문관, 대제학, 예조판서, 병조판서 역임하고, 1686년 좌참찬, 지경연사로 있을 때
1687년(숙종 13) 경연에서 장숙의 일가를 둘러싼 언사의 사건으로 인해
의금부 추국을 받고 평안북도 선천(군)에 유배되었다가,
1688년(숙종 14년) 숙원(淑媛, 후궁에게 내리던 종4품) 장희빈의 왕자(후에 경종)를 낳자
11월 유배에서 풀려났으나,
3개월 뒤인 1689년(숙종 15) 2월 기사환국(1689년)이 일어나 서인이 몰락하게 되자
남해의 노도에 유배를 받게 된다
(장숙의( 張淑儀)의 뜻은 : 장은 장희빈을 뜻하고, 숙의(淑儀)는 내명부 품계로서 후궁에게 내리는 종2품 )
평안북도 선천( 유배지 이곳에서 홀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 지은 소설로 여덟 명의 선녀와 함께 온갖
부귀영화를 누렸으나 그것은 결국은 덧없는 하룻밤 꿈임을 깨닫고 수도하여 마침내
극락으로 가게 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구운몽을 지었다
가천다랑이논이 조망되는 곳은 남파랑길 42코스 종점 입니다
서포 김만중이 유배왔던 노도가 조망되던 위치 입니다
걸어왔던길 아쉬움도 없는데, 뒤돌아 보고~
대량마을 주변에도 파릇파릇 색싹들이 돋아나는 봄이 찾아 오고 있군요
남파랑길이 지나는 대량마을 중앙엔 한여름 무더위를 피할 수 있는 쉼터가 있습니다
무더위 쉼터 곁에는
마을의 안녕과 번영을 위하여 마을을 지켜주는 신에게 당산제(堂山祭)를 지내는 곳입니다
대량마을회관을 지납니다
조개껍질에 굴 유충을 부착시켜 굴 양식을 한다지요
대량마을 앞 대량포구
남파랑길 42코스 종좀인 가천다량이논과 남해 노도~
소량마을 입니다
소량마을 수호와 마을 주민의 질병 예방을 위해 당산제를 지내는 당산나무
우리나라 시조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개국하고 즉위한 BC 2333년을 원년으로
4286년 ㅡ 2333년 = 1953년 7월 10일 이동면 소량리로 제정 되었다
소량마을 포구와 당산나무
소량마을의 당산나무
오지방고개를 넘어면 두모마을이죠
금산 부소암
두모마을체험 안내문
남파랑길 41코스 3부로 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