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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97 편
히브리인 사이에서 진화된 하나님 개념
. 네바돈의 한 멜기세덱
. 1935년
97:0.1 히브리인의 영적 지도자들은 그들 이전에 다른 어떤 사람들도 성공하지 못한 일을 해냈다―오직 철학자들만 이해할 수 있는 추상적 신(Deity) 개념으로 전환하지 않고, 그들의 하나님 개념을 변형시켰다. 일반인들 조차도 발달된 야웨의 개념이 개인에 대한 것이 아니라 최소한 민족의 아버지로 여길 수 있었다.
97:0.2 멜기세덱 시대에 살렘에서 뚜렷하게 가르쳤던 하나님의 personality(성격) 개념은 이집트에서 탈출하던 당시에 모호하고 흐릿했으며, 영적 지도자들의 가르침에 반응하여 대대로 히브리인의 mind에서 점차적으로 진화했을 뿐이다. 야웨의 personality 개념은 다른 많은 신(Deity)의 속성보다 훨씬 더 점진적으로 진화했다. 모세로부터 말라기에 이르기까지, 히브리인의 mind에서 하나님의 personality 개념은 거의 끊임없이 성장하였고, 이 개념은 결국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으로 더욱 고조되고 영화롭게 되었다.
1. 사무엘―처음 히브리 선지자
97:1.1 팔레스타인 주변 민족들의 적대적인 압박은, 곧 히브리인 족장들에게 그들이 부족 조직을 중앙집권적 정부로 통합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이런 행정 권한의 중앙집권화는 사무엘이 선생이자 개혁가로서 활동할 수 있는 더 좋은 기회를 제공했다.
97:1.2 사무엘은 멜기세덱의 진리를 예배 형태의 일부로 계속 유지해 온 오래된 살렘 선생들의 긴 계보에서 태어났다. 이 선생은 씩씩하고 단호한 사람이었다. 모세 시절에 믿었던 최고의 야웨를 예배하도록 그가 온 이스라엘을 돌이키기 시작했을 때 그는 거의 보편적 반대에 부딪쳤고, 특별한 각오와 함께, 오직 그의 위대한 헌신과 비범한 결단력으로 이 반대를 견딜 수 있게 했다. 그때에도 그는 부분적으로만 성공했다; 히브리인 중에서 절반인 지식층만 높은 야웨 개념으로 돌아왔다; 나머지 반은 그 나라의 부족 신들을 숭배하고 열등한 야웨 개념으로 계속 섬겼다.
97:1.3 사무엘은 거친 유형의 사람으로, 하루 만에 동료들과 함께 나가서 수많은 바알 유적지를 무너뜨릴 수 있는 실질적인 개혁가였다. 그가 이룬 진보는 순전히 강요에 의한 것이었다. 그는 설교도 거의 하지 않았고, 가르침도 거의 하지 않았지만, 그는 행동했다. 하루는 바알 제사장을 조롱하였다; 다음 날은 사로잡힌 왕을 찍어 죽였다. 그는 헌신적으로 유일신 하나님을 믿었고, 천지를 창조한 유일신 하나님에 대한 뚜렷한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땅의 기둥들은 주의 것이며, 그가 그것들 위에 세상을 놓으셨다.”(☞) ☞ 사무엘상 2장 8절.
97:1.4 그러나 사무엘이 신(Deity) 개념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것은, 야웨는 변하지 않는다는 그의 울림 있는 선언이었다. 이 시절에 야웨는 질투하며 변덕을 부리는 신으로 여겼다; 그러나 이제, 히브리인이 이집트를 뛰쳐나온 이래 처음으로, 그들은 이런 깜짝 놀랄 말씀을 들었다, “이스라엘의 힘은 거짓말을 하지 않으며 돌이키지도 않으니, 그가 사람처럼 뉘우치지 않기 때문이다.” 신과 가지는 거래에서 안정성이 선언되었다. 사무엘은 멜기세덱이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되풀이했고, 이스라엘의 주 하나님(Lord God)이 모든 진리ㆍ안정ㆍ불변의 근원이라고 선언했다. 히브리인은 항상 그들의 하나님을 사람, 초인간, 기원을 알 수 없는 고귀한 영으로 여겼다; 그러나 지금은 한때 호렙 산의 영(spirit)이 완전한 창조자 하나님으로 높아진 것을 들었다. 사무엘은 진화하는 하나님 개념이 변하는 인간의 mind와 필사 존재의 변덕스러움을 뛰어넘어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도록 돕고 있었다. 그의 가르침에 따라 히브리인의 하나님은 부족 신들(gods)의 서열 개념에서 전능하고 변함없는 창조자이자 모든 창조의 감독자라는 이상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97:1.5 그는 하나님이 성실하며, 계약을 지킬 만큼 믿을 만하다는 이야기를 새롭게 전파했다. 사무엘은 말했다: “주(Lord)는 그의 백성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 “그는 우리와 영원한 언약을 하셨고, 이 약속은 모든 것 위에 체계 있고 확실하다” 그래서 팔레스타인 전역에서는 최고의 야웨 숭배를 촉구하는 소리가 들렸다. 활기에 넘친 이 선생은 늘 외쳤다. “오 주 하나님(Lord God), 당신은 위대하시니, 하나님 같은 이가 하나도 없고, 당신 외에 어떤 하나님도 없습니다.”
97:1.6 그때까지 히브리인은 야웨의 은총을 주로 물질적 번영 면에서 보았다. 이렇게 감히 선포했을 때, 이는 이스라엘에게 큰 충격이었고, 사무엘은 목숨을 거의 잃을 뻔하였다: “주는 사람을 부요하게도 만들고 가난하게도 만드시며, 낮추기도 하고 높이기도 하신다. 그는 티끌 속에서 가난한 자를 높이시고, 가난한 자들을 들어올려 영광의 보좌를 물려받게 하려고 군주들 사이에 그들을 세우신다.” 모세 이후로, 겸손한 자와 복을 적게 받은 자에게 그렇게 마음을 위로하는 약속이 선포된 적이 없었고, 가난한 자들 가운데서 절망하는 수많은 이들은 영적 지위를 개선할 수 있다는 희망을 비로소 갖게 되었다.
97:1.7 그러나 사무엘은 부족 신(god) 개념을 넘어서 그다지 멀리 나아가지 못했다. 야웨가 모든 사람을 만들었지만, 그가 택한 민족, 주로 히브리인들에게 심취해 계신 야웨를 선포하였다. 그렇기는 해도, 모세의 시절처럼, 다시 한번 하나님 개념은 거룩하고 곧은 신(Deity)을 묘사했다. “주와 같은 거룩한 이가 하나도 없다. 누가 이 거룩한 주 하나님(Lord God)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97:1.8 세월이 흐르면서,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나이 든 지도자는 하나님을 이해하는 데 진보했고, 이렇게 선언하였다: “주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며, 행동을 저울로 잰다. 주는 땅끝까지 심판하시고, 자비로운 자에게 자비를 베푸시며, 또한 정직한 자에게는 바르게 대하실 것이다.” 자비로운 자에게 국한되지만, 여기서도 자비의 빛이 밝아온다.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들이 고난을 겪는 가운데서도, 그의 민족에게 다음과 같이 권했다: “이제 주(Lord)의 손에 안기자, 그의 자비가 위대하시다.” “많든 적든 주께서 구원하심에는 아무 제한이 없다.”
97:1.9 야웨의 성품에 대한 이러한 점진적 개념의 발전은 사무엘 후계자들의 섬김 아래 계속되었다. 그들은 야웨를 언약을 지키는 하나님으로 제시하려고 시도했지만, 사무엘의 걸음과 도저히 속도를 맞추지 못했고, 사무엘이 나중에 파악했던 하나님의 자비의 개념을 발전시키지 못했다. 야웨가 무엇보다도 우위에 있다는 것을 유지했음에도 다른 신들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꾸준히 되돌아 갔다. “오 주님, 당신의 나라는 당신의 것이니. 당신은 모든 것 위에 가장 높임을 받으십니다.”
97:1.10 이 시대의 기본 개념은 신성한 능력이었다; 이 시대의 선지자들은 히브리인의 왕좌에 앉을 왕을 육성하기 위해 고안된 종교를 전파했다. “오 주님, 당신은 위대하고, 능력 있고, 영광스럽고, 승리하신 장엄한 분이십니다. 주님의 손에는 힘과 권세가 있고, 우리를 위대하고 강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이것이 사무엘과 그 직계 후계자들의 시대에 하나님 개념의 상황이었다.
2. 엘리야와 엘리사
97:2.1 기원전 10세기에 히브리 민족은 두 왕국으로 분리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분열에서 많은 진리의 선생들은 영적 타락의 반동에 맞서려고 애썼으나, 분리 전쟁 이후 이 타락은 계속해서 재앙적으로 이어졌다. 히브리 종교를 발전시키려는 이러한 노력은 의롭고 두려움 없는 투사 엘리야가 가르침을 시작하기 전까지는 성공하지 못했다. 엘리야는 사무엘의 시대와 견줄만한 하나님 개념을 북쪽 왕국에서 회복시켰다. 엘리야는 진보된 하나님 개념을 제시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사무엘이 그랬던 것처럼 바알 제단들을 뒤엎고 거짓 신들의 우상을 파괴하는데 바빴다. 우상을 숭배하는 군주의 반대를 무릅쓰고 개혁을 실행했다; 그의 과제는 사무엘이 직면했던 것보다 더욱 크고 어려운 것이었다.
97:2.2 엘리야가 부름받아 떠났을 때, 충실한 동료 엘리사는 그의 일을 떠맡았고, 거의 알려지지 않은 미가야의 귀중한 도움으로, 팔레스타인에 진리의 빛을 살렸다.
97:2.3 그러나 이때는 신(Deity) 개념의 진보 시대가 아니었다. 히브리인들은 모세의 이상에조차 도달하지 못했다. 엘리야와 엘리사의 시대가 끝날무렵, 상류층은 최상 신 야웨 숭배로 돌아갔고, 우주의 창조자 개념은 사무엘이 남긴 정도로 회복된 것을 목격하였다.
3. 야웨와 바알
97:3.1 야웨 신자들과 바알 추종자들 사이의 오랜 논쟁은 종교적 믿음의 차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사회경제 이념의 충돌이었다.
97:3.2 팔레스타인 주민들은 토지의 사유 재산권에 대하여 태도가 달랐다. 남쪽 부족, 곧 유랑하는 아라비아 부족들(야웨파)은 땅을 양도할 수 없는 것―신(Deity)이 씨족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보았다. 그들은 땅을 팔거나 저당 잡힐 수 없다고 주장했다. “야웨가 ‘땅은 내 것이니 팔지 못할것이라’ 말씀하셨다.”
97:3.3 북쪽에 정착한 가나안 종족(바알파)은 자유롭게 땅을 사고팔고 저당 잡혔다. 바알이라는 말은 주인을 의미한다. 바알 종파는 두 가지 주요 교리에 기초를 두었다. 첫째는 재산의 교환, 계약, 약속―땅을 사고 파는 권리―를 정당화한 것이다. 둘째로, 바알이 비를 보낸다고 생각했다―그는 땅을 비옥하게 만드는 신이었다. 좋은 수확을 거두는 것은 바알의 은혜에 달려 있었다. 그 종파는 대체로 땅, 소유권, 비옥함에 관심을 가졌다.
97:3.4 일반적으로 바알파는 집, 땅, 노예를 소유했다. 그들은 귀족인 지주였고 도시에서 살았다. 각 바알은 신성한 장소와 사제, 그리고 “거룩한 여자,” 곧 의식에 쓰이는 매춘부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97:3.5 땅에 대한 이러한 기본적 차이에서 가나안인들과 히브리인들 사이에는 사회, 경제, 도덕, 종교적 태도에서 나타나는 치열한 적대감이 발전하게 되었다. 이 사회, 경제적 논쟁은 엘리야의 시대 전까지 명확한 종교적 쟁점이 되지 않았다. 이 공격적 선지자의 시대부터 이 문제는 보다 엄격한 종교적 차원에서 다루어졌다―야웨 대 바알의 대결로―결국 야웨의 승리로 끝이났고, 일신교를 향한 운동으로 이어졌다.
97:3.6 엘리야는 야웨와 바알의 논쟁을 토지 문제에서, 히브리인과 가나안인의 이념인 종교적 측면으로 전환시켰다. 아합이 나봇 일가의 땅을 차지하기 위해 그들을 살해했을 때, 엘리야는 옛 토지 관습으로부터 도덕적 쟁점을 만들었고, 바알 숭배자들에 대한 격렬한 투쟁을 시작했다. 이 싸움은 또한 농촌 사람들이 도시의 지배에 맞서는 싸움이었다. 엘리야 시대에 야웨는 엘로힘으로서 위상을 얻게 되었다. 선지자는 토지 개혁자로시작하여 신(Deity)을 높임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바알은 많고, 야웨는 하나였다―일신교가 다신교를 이겼다.
4. 아모스와 호세아
97:4.1 오랜 동안 제사와 의식으로 섬겨졌던―부족의 신(god), 초기 히브리인들의 야웨가 범죄와 부도덕을 처벌하는 하나님으로―전환하는 중요한 단계가 있었다. 이 과정에서 아모스가 남쪽 산지에서 나타나 북쪽 부족들의 범죄, 술취함, 압제, 부도덕을 꾸짖었다. 모세 시대 이후로 팔레스타인에서 이렇게 강력한 진리가 선포된 적은 없었다.
97:4.2 아모스는 단지 회복자나 개혁자가 아니다; 그는 신(Deity)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발견한 인물이었다. 그는 선조들이 전했던 하나님에 대해 많은 것을 선포하며, 스스로 선택된 백성들 사이에서 죄를 용인하는 신성한 존재에 대한 믿음을 용감하게 공격했다. 멜기세덱 시대 이후로 처음으로 인간의 귀는 국가 정의와 도덕에 대한 이중 기준의 비난을 들었다. 히브리인들은 역사상 처음으로 그들의 신 야웨가 다른 민족들처럼 자신의 백성들 사이에서도 범죄와 죄를 더 이상 용납하지 않으실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아모스는 사무엘과 엘리야의 엄격하고 공의로운 하나님을 상상했지만, 잘못을 처벌하는 데 있어 히브리인들을 다른 민족들과 다르게 보지 않는 하나님도 보았다. 이것은 '선민'이라는 이기적인 교리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이었으며, 당시 많은 히브리인들은 이에 격렬히 반발했다.
97:4.3 아모스가 말하였다: “산을 이루고 바람을 일으키시는 이, 일곱별과 오리온을 형성한 이를 찾으라, 그는 죽음의 그림자를 아침으로 바꾸고 낮도 밤처럼 어둡게 만드신다.” 건성으로 종교를 믿는 기회주의자와 때때로 부도덕한 동료들을 비난하면서, 변치 않는 야웨의 어김없는 공정을 나타내려고 애쓰면서 그는 행악자들에게 말했다: “비록 그들이 지옥으로 파고 들어가도 거기서 그들을 잡아 내리라, 비록 그들이 하늘로 기어오르더라도, 거기서 그들을 끌어내리리라.” “그리고 적들 앞에 포로가 되어 끌려가도, 거기서 나는 공정의 칼을 겨누며, 그 칼이 저희를 죽일 것이다.” 아모스는 또 그들을 꾸짖고 비난하는 손가락으로 그들을 가리키면서 야웨의 이름으로 책망하고 고발하였다. “분명컨대, 너희가 한 일을 하나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밀을 체질하는 것 같이, 나는 이스라엘의 집을 모든 나라 사이에 체질하리라”하고 야웨의 이름으로 선언했을 때, 아모스는 청중을 더욱 놀라게 했다.
97:4.4 아모스는 야웨가 “모든 나라의 하나님”이라고 선포하고, 의식 행위로 의(義)를 대신해서는 안 된다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경고했다. 이 용감한 선생은 돌로 쳐죽임을 당하기 전에, 최상의 야웨 교리를 살리기에 넉넉한 진리의 누룩을 퍼뜨렸다. 그는 멜기세덱의 계시가 더욱 진전되는 것을 보장했다.
97:4.5 호세아는 모세가 가르친 사랑의 하나님 개념을 부활시킴으로, 보편적 공정의 하나님이라는 아모스의 교리를 따랐다. 호세아는 희생물이 아니라 뉘우침을 통해서 용서받기를 외쳤다. 그는 하나님이 인자하고 자비롭다는 복음을 선포하며 말했다, “내가 너와 언제까지나 약혼할 것이다; 옳다, 나는 의(義)와 심판 가운데, 인자하고 자비롭게 너희와 약혼할 것이다. 나는 충실하게 너희와 약혼까지 하리라,” “나는 나의 분노를 풀기 위해, 너희를 아낌없이 사랑할 것이다.”
97:4.6 호세아는 충실하게 아모스의 도덕적 경고를 계속했고, 하나님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저희를 꾸짖는 것이 내가 바라는 바이다.” 그러나 “내 백성이 아닌 자들에게 ‘너희는 내 백성이다’ 말할 것이다. 그들은 ‘주는 우리의 하나님이다’라고 말할 것이다,” 이렇게 말했을 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를 반역죄에 가깝게 잔인한 것으로 여겼다. 그는 계속 회개와 용서를 설교하며 말했다, “나는 그들의 타락을 고칠 것이다; 나는 나의 분노를 풀기 위해, 그들을 아낌없이 사랑할 것이다.” 호세아는 늘 희망과 용서를 선포했다. 그의 말씀의 요점은 늘 이것이었다: “나는 나의 백성에게 자비를 베풀 것이다. 저희는 나 외의 하나님을 알지 못하리니, 나 외에는 구원자가 없다.”
97:4.7 아모스는 히브리인들의 민족 양심을 일깨워 야웨가 그들이 선택된 백성이라고 해서 범죄와 죄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는 인식을 심어주었고, 호세아는 나중에 이사야와 그의 동료들이 절묘하게 노래한 신성한 자비와 사랑의 친절의 화음에서 첫음을 울려주었다.
5. 첫 이사야
97:5.1 이때는 북부 씨족들 사이에서 더러가 개인의 죄와 민족의 죄를 징계한다는 위협을 선언하고, 한편 남쪽 왕국의 죄악에 대한 징벌로 재앙을 예언하던 시절이었다. 히브리 민족에서 양심과 제사의식에 대한 각성이 깨어나면서 첫 이사야가 등장했다.
97:5.2 이사야는 계속하여 하나님의 영원한 본성, 곧 무한한 지혜, 변함없는 완전한 신뢰를 설파하였다. 그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대표한다고 말하였다: “내가 놓은 선을 따라 심판하고 다림추 대로 의(義)를 펼칠 것이다.” “너희의 슬픔과 두려움에서, 너희가 수고하는 고된 속박의 처지에서 벗어나도록 주가 너희에게 휴식을 줄 것이다.” “그리고 너희의 귀는 ‘이것이 길이라, 그 길로 가라’ 하는 말씀을 너희 뒤에서 듣게 될 것이다.”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다; 나는 믿고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가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이기 때문이다.” “‘이제 와서 함께 의논하자’ ‘너희의 죄가 진홍 같을지라도, 눈처럼 하얗게 될 것이다; 진홍색처럼 붉어도 양털 같이 될 것이다’ 주가 말씀하신다.”
97:5.3 이 예언자는 두려움에 떨고 혼이 갈급한 히브리인에게 말했다. “일어나 빛을 발하라. 너희의 빛이 다가왔고, 주의 영광이 너희에게 임하였다.” “주의 영이 내게 임하였으니, 복된 소식을 온유한 자에게 전파하라고 그가 내게 기름을 부으셨다; 그는 나를 보내셔서 마음이 상한 자를 동여매고,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문이 열렸음을 선포하게 하셨다.” “나는 주(Lord) 안에서 크게 기뻐할 것이며, 내 혼이 내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 하는 것은, 주께서 나에게 구원의 옷을 입혀 주시고, 그의 의로운 옷으로 나를 감싸 주셨기 때문이다.” “그들의 모든 고난 가운데서도 그는 고난을 당하였고, 그의 앞에 있던 천사가 그들을 구원하였다. 그의 사랑과 동정심으로 그들을 구속하였다.”
97:5.4 이사야의 뒤를 이어 미가와 오바댜가 혼을 만족시키는 복음을 확증하고 장식했다. 그리고 용감한 이 두 메신저들은 히브리인들의 제사장 중심의 의식을 대담하게 비난하고, 희생 제사 제도 전체를 두려움 없이 공격했다.
97:5.5 미가는 “보상을 받고 재판하는 통치자, 보수를 받고 가르치는 사제, 돈을 받고 신탁하는 선지자들”을 비난했다. 그는 미신과 제사장직에서 해방되는 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 “그러나 각 사람이 자기 포도나무 아래에 앉을 것이요 아무도 그를 두려워하게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모든 사람이 각기 하나님을 아는 지식대로 살 것이기 때문이다.”
97:5.6 미가가 전한 메시지는 다음과 같다: “내가 번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올까? 주가 숫양 1천 마리나 1만 강에 가득 찬 기름으로 기뻐하실까? 내가 지은 죄 때문에 내 첫 아이를, 내 혼이 지은 죄 때문에 내 몸의 열매를 바칠까? 아, 사람아, 그는 나에게 무엇이 좋은지 보여주셨다; 공정하게 행하고 자비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너희 하나님과 함께 걷는 것 말고 주가 너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겠느냐?” 이때는 위대한 시대였다; 이때는 정말 풍운의 시절이었으니, 실제로 필사 인간은 2천 5백년 전에 그러한 해방하는 말씀을 들었고, 심지어 이를 믿기도 하였다. 사제들의 끈질긴 저항이 없었다면, 이 선생들은 히브리인의 예배 의식에서 피비린내 나는 예식을 통채로 폐지했을 것이다.
6. 두려움 없는 예레미야
97:6.1 몇몇 선생이 이사야의 복음을 계속해서 설명하는 동안 예레미야는 히브리인의 하나님 야웨의 세계화를 위해 대담한 다음 단계를 밟았다.
97:6.2 예레미야는 다른 나라들과의 군사적 투쟁에서 야웨는 히브리인들의 편이 아니라고 두려움 없이 선언했다. 그는 야웨가 온 땅과 모든 나라, 모든 민족의 하나님이라고 주장했다. 예레미야의 가르침은 이스라엘 하나님의 세계화 물결의 정점으로서, 이 용감한 설교자는 마침내 영원히 야웨는 모든 민족의 하나님이며 이집트인에게는 오시리스, 바빌로니아에게는 벨, 아시리아에게는 아슈르, 블레셋인에게는 다곤이 없음을 선포했다. 이 무렵과 그 이후에 히브리인들의 종교는 전 세계적으로 일신교의 르네상스를 맞이했다; 마침내 야웨의 개념은 행성, 심지어 우주적인 존엄성을 지닌 신(Deity) 수준으로 올라섰다. 그러나 예레미야의 많은 동료들은 히브리 민족을 떠나서 야웨를 생각하기 어려웠다.
97:6.3 예레미야는 또한 이사야가 묘사한 정의롭고 사랑하는 하나님을 전파하면서 이렇게 선언했다: “옳다, 나는 영원한 사랑으로 너희를 사랑하였다; 그러므로 인자함으로 내가 너희를 이끌었다.” “이는 그가 기꺼이 사람의 자녀에게 고통 주기를 기뻐하지 않기 때문이다.”
97:6.4 두려움 없는 이 선지자는 말했다: “우리의 주는 의로우시고, 말씀은 위대하시며, 일하시는 능력이 크시다. 그분의 눈은 모든 사람의 길을 주의 깊게 살펴보시며, 각 사람에게 그 길과 행위의 열매를 따라 보상하신다.” 그러나 예루살렘이 포위된 동안, 그가 “지금 내가 이 땅들을 바빌론의 왕 느부갓네살, 나의 종의 손에 넘기었다”고 말했을 때, 이는 신성모독적인 반역으로 여겨졌다. 그리고 예레미야가 도시의 항복을 조언했을 때, 제사장들과 국가 통치자들은 그를 음침한 지하 감옥의 진흙 구덩이에 던졌다.
8. 신성한 역사와 세속적인 역사
97:8.1 히브리인의 체험 기록을 신성한 역사로 간주하고 나머지 세계의 사건들을 세속적인 역사로 여기는 관습은 역사 해석에 있어 많은 혼란을 초래했다. 이러한 어려움은 유대인의 세속 역사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발생한다. 바빌론 포로 시대의 제사장들이 히브리인들과 하나님의 기적적인 거래를 기록한 새로운 역사를 준비한 후, 즉 구약 성경에 묘사된 이스라엘의 신성한 역사 이후, 그들은 기존의 히브리 관련 기록―예를 들어 “이스라엘 왕들의 행적”과 “유다 왕들의 행적”과 같은 책들―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비교적 정확한 히브리 역사 기록들을 철저하게 없애버렸기 때문이다.
97:8.2 세속 역사의 엄청난 압력과 피할 수 없는 강압이 어떻게 포로가 되고 이방인의 지배를 받던 유대인들을 공포에 떨게 하여 역사를 완전히 다시 쓰고 재구성하려 했는지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그들의 혼란스러운 민족 체험에 대한 기록을 간략히 살펴봐야 한다. 유대인들은 신학적이 아닌 적절한 삶의 철학을 발전시키지 못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들은 죄에 대한 무서운 형벌과 결합된 의에 대한 신성한 보상이라는 원래의 이집트 개념과 싸름했다. 욥기의 드라마는 이러한 잘못된 철학에 맞선 일종의 항의였다. 전도서에 담긴 솔직한 비관주의는 신의 섭리를 믿는 지나친 이 낙관적 믿음에 대한 현명한 시대적 반응이었다.
97:8.3 그러나 외래 통치자의 압제 밑에서 지낸 5백 년은 참을성 있고 오래 견디는 유대인에게도 너무 지나쳤다. 선지자와 사제들은 외치기 시작했다: “언제까지, 아 주여, 언제까지입니까?” 성서를 탐구하는 동안에, 정직한 유대인의 혼란은 더욱 심해졌다. 어느 옛 예언자는 하나님이 그가 “택한 백성”을 보호하고 구원하리라고 약속했다. 아모스는 그들이 민족의 의로운 기준을 다시 세우지 않으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버릴 것이라 전에 위협했다. 신명기의 서기관은―선과 악, 축복과 저주와 같이―큰 선택이 있음을 묘사하였다. 첫 이사야는 인자한 왕이자 구원자에 대하여 설파하였다. 예레미야는 의로운 마음을 가지는―가슴 속 서판에 약속을 적는―시대를 선포하였다. 둘째 이사야는 희생물을 바치고 대속함으로 사람이 구원받는 것을 말했다. 에스겔은 헌신적 봉사를 통하여 구원받음을 선포했고, 에즈라는 율법을 지킴으로 번영할 것을 약속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속박 속에 머물러 있었고, 구원은 뒤로 미루어졌다. 그런 다음 다니엘은 다가오는 “위기”―큰 상상을 부숴버리고 즉시 영원한 의의 통치, 즉 메시아의 왕국이 즉각적으로 세워지는― 각본을 제시했다.
97:8.4 이 모든 잘못된 희망은 인종적 실망과 좌절로 이어졌고, 유대인 지도자들은 너무나 혼란스러워서 그가 필사 육체의 모습을 입고―사람의 아들(Son of Man)로 육신화되어―머지않아 그들에게 왔을 때, 신성한 파라다이스 아들의 사명과 봉사를 받아들이는데 실패했다.
97:8.5 모든 현대 종교는 인간 역사의 어떤 시대를 기적으로 해석하려고 애씀으로 심각한 실수를 저질러 왔다. 하나님이 섭리로서 아버지의 간섭하는 손을 여러 번 인간사의 흐름 속에 밀어넣은 것이 참말이지만, 신학의 독단과 종교적 미신을 이 인간의 역사의 흐름 속에서 기적 행위로 인하여 나타나는 초자연적 침전물로 간주하는 것은 잘못이다. “최고자들이 사람의 나라에서 다스린다”는 사실은 세속의 역사를 이른바 신성한 역사로 바꾸지 않는다.
97:8.6 신약의 저자와 후일에 기독교 작가들은 유대인 선지자들을 초월적 존재로 만들려는 시도로, 뜻은 좋았지만 히브리인 역사의 왜곡으로 더욱 복잡하게 되었다. 이처럼 히브리인의 역사는 유대인 저자와 기독교 저자들에게 비참하게 이용되었다. 현세의 히브리인 역사는 철저히 교리화 되었다. 허구적인 신성한 역사로 바뀌었고, 이른바 기독교 국가들의 도덕 개념과 종교적 가르침과 헤어날 수 없이 함께 묶이게 되었다.
97:8.7 히브리인의 역사에서 중대한 시점을 간단히 되새기는 것은 그 민족의 일상적인 시대적 역사를 허구적이고 신성한 역사로 바꾸기 위해 유대인 사제들이 기록된 사실을 바빌론에서 어떻게 변질시켰는지를 보여줄 것이다.
9. 히브리인의 역사
97:9.1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결코 12 부족이 없었다―겨우 서너 부족이 팔레스타인에서 정착했다. 히브리인의 국가는 이른바 이스라엘 사람들과 가나안 사람들이 연합한 결과로 존재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아들딸은 가나안 사람들 사이에서 살았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저희의 딸들을 아내로 삼고, 자기 딸들을 가나안 사람의 아들들에게 주었다.” 사제들의 기록에서 히브리인이 가나안 사람들을 팔레스타인에서 몰아냈다고 서슴지 않고 선포했지만, 그들을 결코 몰아낸 적이 없었다.
97:9.2 이스라엘 사람들의 의식은 에브라임의 산지에서 시작되었고, 후일의 유대인 의식은 남쪽 유다의 씨족에서 시작되었다. 유대인(유다 사람)은 언제나 북쪽 이스라엘 (에브라임) 민족의 기록을 더럽히고 그 기록에 먹칠하려고 애썼다.
97:9.3 과장된 히브리인의 역사는 암몬 족속이 요단 강 동쪽에 사는 동포 부족 사람들―길르앗 사람들―을 공격하는 데 저항하려고 사울이 북부의 씨족들을 불러 모음으로 비롯된다. 그는 3천 명 남짓한 군대로 적을 무찔렀고, 이 공훈이 산지의 부족들에게 그를 왕으로 만들도록 이끌었다. 추방된 사제들이 이 이야기를 다시 썼을 때, 그들은 사울의 군대를 330,000명으로 늘리고, 그 싸움에 참여한 지파 명단에 “유다”를 추가시켰다.
97:9.4 암몬 족속을 무찌른 직후에, 사울은 그 군대의 인기를 얻어서 왕이 되었다. 이 사건에 어떤 사제나 선지자가 끼지 않았다. 그러나 나중에 사제들은 신성한 지시에 따라서 사무엘 선지가 사울을 임금으로 세웠다고 기록을 넣었다. 그들은 다윗의 유다 왕권을 위하여 “신성한 후계 구도”를 세우기 위해서 이렇게 했다.
97:9.5 유대인 역사에서 가장 큰 왜곡은 다윗과 관련이 있었다. 사울이 암몬 족속을 무찌른 뒤에 (이 공을 그는 야웨에게 돌렸지만), 블레셋 족속이 놀라서 북쪽 씨족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다윗과 사울은 결코 뜻을 한데 모을 수 없었다. 6백 명을 거느린 다윗은 블레셋 연맹에 들어갔고, 바닷가를 따라서 에스드랠론까지 행진했다. 가스에서 블레셋 족속이 다윗에게 들을 떠나라고 명령했다; 그들은 그가 사울에게로 넘어갈까 두려워했다. 다윗은 물러났고, 블레셋 족속은 사울을 공격해서 물리쳤다. 다윗이 이스라엘에 충성했더라면, 그들은 이런 짓을 할 수 없었다. 다윗의 군대는 여러 나라 말을 하는 불평꾼의 집합이었고, 대체로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자와 법을 피한 자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97:9.6 길보아에서 블레셋인들에게 패배한 사울의 비극적인 패배는 주변 가나안인들 사이에서 야웨의 신성도를 크게 떨어뜨렸다. 보통 사울의 패배는 야웨에 대한 배교로 간주되었겠지만, 이번에는 유다의 편집자들이 이를 의식행위의 잘못으로 돌렸다. 그들은 다윗의 왕권을 위한 배경으로 사울과 사무엘의 전통이 필요했다.
97:9.7 다윗은 그의 작은 군대와 함께 히브리인의 도시가 아닌 헤브론에서 본부를 차렸다. 이내 그의 동료들은 그를 새로운 유다 왕국의 왕으로 선포했다. 유다는 대체로 히브리인이 아닌 요소―켄ㆍ갈렙ㆍ예부스 및 기타 가나안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유목민―양 치는 사람들―이었고, 그래서 히브리인의 토지 소유 개념에 충실했다. 그들은 사막에 사는 씨족들의 이념을 지니고 있었다.
97:9.8 신성한 역사와 세속적 역사의 차이점은 다윗 왕을 만드는 것에 관하여 구약에서 발견되는 두 가지 다른 이야기가 잘 설명해 준다. 그의 직계 추종자들이 (그의 군대가) 어떻게 그를 왕으로 만들었는지 하는 당시 이야기의 일부가 사제들이 만든 기록에 뜻하지 않게 남게 되었다. 이들은 나중에 신성한 역사에 관하여 길고도 지루한 설명을 준비했고, 거기에는 사무엘 선지가 신성한 지시로 어떻게 다윗을 그의 형제들 사이에서 골랐는지, 공식으로 진행하여 정교하고 엄숙한 예식에 따라서 히브리인의 왕이 되도록 그에게 기름을 부었고, 그런 다음 그를 사울의 후계자로 선포했는지 그려져 있다.
97:9.9 그렇게 사제들은 많은 시대들에 대해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기적적으로 거래한 것에 대한 허구적인 이야기를 준비한 후, 이미 기록에 남아 있는 평범하고 사실적인 진술을 완전히 삭제하는 데 실패하는 경우가 많았다.
97:9.10 다윗은 처음에 사울의 딸, 다음에는 부유한 에돔 사람 나발의 과부, 그 다음에는 게수르의 왕 탈마이의 딸과 결혼함으로, 정치적으로 자신을 키우려고 애썼다. 그는 힛 족속의 아내 밧세바는 말할 것도 없고, 예부스의 여인들로부터 여섯 아내를 골랐다.
97:9.11 그런 방법으로 그런 민족으로부터, 다윗은 에브라임 족속의 이스라엘 왕국, 사라지는 북쪽 왕국의 유산과 전통을 이어받은 신성한 유다 왕국이라는 허구를 만들었다. 다윗이 거느린 유다의 국제적 부족은 유대인이기보다 오히려 이방인이었다. 그런데도 에브라임의 억압받은 장로들이 내려와서 “그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을 만들었다.” 군사적 위협이 있은 후에, 다윗은 그때 예부스 족속과 조약을 맺었고, 연합 왕국의 수도를 예부스(예루살렘)에 세웠는데, 이곳은 유다와 이스라엘의 중간 지점에 튼튼히 담을 쌓은 도시였다. 블레셋 족속이 흥분했고 곧 다윗을 공격했다. 치열한 전투가 있은 후에 그들을 물리쳤고, 다시 한번 야웨는 “만군의 주 하나님”으로 자리를 잡았다.
97:9.12 그러나 야웨는 어쩔 수 없이 가나안의 신들과 이 영광을 얼마큼 나누어야 했는데, 다윗 군대의 대부분이 히브리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너희 기록에 (유다의 편집자들이 놓쳐서) 내막을 드러내는 이 말이 나타난다: “야웨가 내 앞에서 내 적들을 부수었도다. 그런즉 그는 그곳의 이름을 바알 페라짐이라 불렀더라.”(☞) 다윗의 병사들 가운데 80%가 바알의 신도였기 때문에 그들은 이렇게 했던 것이다. ☞ 주(야웨)가 아니라 “바알이 돌파”했다는 뜻.
97:9.13 기브온 족속은 에브라임 족속과 평화 조약을 맺었는데, 사울은 가나안 도시 기브온을 쳤다, 이 때문에 야웨가 그를 버렸다고 지적함으로 사울이 길보아에서 졌다고 다윗은 설명했다. 사울의 시절에도 다윗은 블레셋 족속에 대항하여 가나안 도시 케일라를 방어했고, 다음에 자기 수도를 한 가나안 도시에 정했다. 가나안 족속과 화해하는 정책과 걸음을 맞추어, 다윗은 사울의 후손 일곱 명을 교수대에 달리도록 기브온 족속에게 넘겨주었다.
97:9.14 블레셋 족속을 물리친 후에 다윗은 “야웨의 상자”를 손에 넣었고, 예루살렘으로 가져와서, 그의 왕국에서 공식으로 야웨를 숭배하게 하였다. 다음에 그는 이웃 부족들―에돔 족속, 모압 족속, 암몬 족속, 시리아인―에게 무거운 조공을 바치게 하였다.
97:9.15 다윗의 부패한 정치 조직은, 히브리인의 도덕 관습에 어긋나게, 북쪽에서 땅의 개인 소유를 시작했고, 블레셋 족속이 이전에 거두었던 카라반 관세를 대번에 장악했다. 그리고 나서 우리아를 결국 죽인 일련의 끔찍한 일들이 생겼다. 모든 사법 상소는 예루살렘에서 판결되었고, “장로”들은 이제 더 판결을 내릴 수 없었다. 반란이 터진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오늘날 압살롬을 선동자로 부를지 모른다. 그의 어머니는 가나안 사람이었다. 밧세바의 아들―솔로몬―외에도 왕좌를 얻으려고 다투는 자가 여섯이나 있었다.
97:9.16 다윗이 죽은 뒤에 솔로몬은 모든 북쪽 세력의 정치 조직을 없애버렸지만, 아버지의 체제에 있던 모든 폭정과 세금을 계속하였다. 솔로몬은 사치스런 왕궁과 공들인 건축 사업으로 나라를 파산시켰는데, 레바논의 집, 파라오 딸의 궁전, 야웨의 성전, 임금의 궁전, 그리고 많은 도시의 담을 개축하는 공사가 있었다. 시리아 선원들에 의해 운용되고 전 세계와 교역하는 방대한 히브리 해군을 만들었다. 그의 후궁들은 거의 1천 명에 이르렀다.
97:9.17 이때가 되자 실로에 있던 야웨의 성전은 신용을 잃었고, 나라의 모든 숭배는 예부스에, 화려한 왕실 예배당에 집중되었다. 북쪽 왕국은 엘로힘을 숭배하는 쪽으로 돌아갔다. 그들은 파라오의 은혜를 누렸고, 파라오들은 나중에 유다를 노예로 만들고 남쪽 왕국이 조공을 바치게 했다.
97:9.18 이스라엘과 유다 사이에는 풍파가―여러 번 전쟁이―있었다. 4년 동안 내란이 있고 세 왕조가 지난 후에, 이스라엘은 땅을 사고 팔기 시작한, 도시의 전제 군주의 통치를 받았다. 오므리 왕조차 세메르의 토지를 사려고 했다. 그러나 샬마니저 3세가 지중해 바닷가를 장악하려고 작정했을 때, 종말이 다가왔다. 에브라임의 아합 임금은 다른 열 집단을 모아서 카르카르에서 저항했고, 그 싸움은 무승부였다. 앗시리아인은 제지되었지만, 연합군은 많은 사람을 잃었다. 이 큰 싸움은 구약에 언급되지도 않았다.
97:9.19 아합 임금이 나봇에게서 땅을 사려고 했을 때 새로이 문제가 터졌다. 그의 페니키아인 아내는 나봇이 “엘로힘과 왕”의 이름을 모독했다는 죄명으로 나봇의 땅을 몰수할 것을 지시하는 서류에, 아합의 이름을 위조했다. 나봇과 그의 아들들은 재빨리 처형되었다. 격렬한 엘리야가 등장하여 아합이 나봇 가족을 죽인 것을 강력히 비난하였다. 따라서, 가장 위대한 예언자 중 하나인 엘리야는 바알 신당의 토지 매각 태도와 도시가 국가를 지배하려는 시도에 맞서 옛시대 땅의 도덕을 지키는 수호자로서 그의 가르침을 시작했다. 그러나 개혁은 나라의 지주인 예후와 집시 족장인 여호나답이 힘을 합쳐 사마리아에 있던 바알 선지자(부동산 중개인)들을 제거할 때까지 성공하지 못했다.
97:9.20 새로운 생명이 나타났고 여호아스와 그의 아들 여로보암이 이스라엘을 적들로부터 구해냈다. 그러나 이 시기에 사마리아에는 폭력배 귀족이 지배하고 있었고, 그들의 약탈은 고대 다윗 왕조의 것과 견줄 만했다. 국가와 교회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자유로운 언론의 억압 시도는 엘리야, 아모스, 호세아가 비밀 기록을 시작하게 만들었고, 이것은 유대교와 기독교 성경의 실제 시작이었다.
97:9.21 그러나 북왕국은 이스라엘 왕이 이집트 왕과 공모하여 아시리아에 대한 조공을 계속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을 때까지 역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때부터 삼 년간의 포위가 시작되었고, 북왕국은 완전히 흩어지게 되었다. 에브라임(이스라엘)은 이렇게 사라졌다. 유다―유대인들, 즉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은 이사야가 말한 대로 "집을 집에, 밭을 밭에 더하며" 소수의 손에 토지가 집중되기 시작했다. 예루살렘에는 야웨의 성전과 함께 바알의 성전이 세워졌다. 이 공포의 통치는 야웨를 위해 35년 동안 투쟁을 벌인 소년 왕 요아스의 유일신 혁명으로 끝이 났다.
97:9.22 다음 임금 아마시아는 세금을 내고 항거하는 에돔 족속 및 그 이웃들과 문제가 있었다. 큰 승리를 거둔 뒤에 그는 북쪽에 있는 이웃들을 치려고 등을 돌렸고, 똑같이 큰 패배를 맛보았다. 그리고 나서 시골 사람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그들은 왕을 살해하고 그의 열여섯 살 난 아들을 왕좌에 앉혔다. 이 사람이 아자리아였고, 이사야는 그를 웃시야라 불렀다. 웃시야 이후에, 형편은 더욱 나빠졌고, 유다는 앗시리아 임금들에게 조공을 바침으로 1백 년 동안 존재했다. 첫 이사야는 예루살렘이 야웨의 도시이니까, 결코 무너지지 않으리라고 그들에게 말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서슴지 않고 예루살렘이 망하리라고 선포했다.
97:9.23 유다의 진정한 실패는 소년 왕 므낫세의 통치하에서 활동하던 부패하고 부유한 정치인들의 집단에 의해 영향을 받았다. 변화하는 경제는 바알 숭배가 돌아오는 것을 유리하게 만들었고, 바알의 개인 토지 거래는 야웨의 이념에 어긋났다. 앗시리아의 멸망과 이집트의 우세는 한동안 유다에게 구원을 가져왔고, 시골 사람들이 주도권을 잡았다. 요시야 왕 시대에 그들은 예루살렘의 부패한 정치 세력을 제거했다.
97:9.24 하지만 요시야가 이집트에서 아시리아를 지원하기 위해 바빌론에 맞서 북상하던 네코의 대군을 막으려다 이 시대는 비극으로 끝났다. 요시야는 전사했고, 유다는 이집트에 조공을 바치게 되었다. 바알 정치 세력이 예루살렘에서 권력을 되찾았고, 진정한 이집트의 속박이 시작되었다. 이후 바알 신당의 정치인들이 법정과 제사장을 모두 통제하는 시기가 이어졌다. 바알 숭배는 토지 비옥도와 재산권을 다루는 경제 및 사회 제도였다.
97:9.25 느부갓네살에 의해 네코가 축출되면서, 유다는 바빌론의 통치를 받게 되었고, 10년의 유예 기간을 부여받았으나 곧 반란을 일으켰다. 느부갓네살이 그들을 치려고 왔을 때, 유다 족속은 야웨의 영향을 받으려는 시도로 노예 해방 등의 사회 개혁을 시작했다. 바빌로니아 군대가 일시적으로 철수했을 때, 히브리인들은 개혁의 마법이 그들을 구원했다고 기뻐했다. 이 시기에 예레미야는 그들에게 임박한 파멸에 대해 경고했으며, 곧 느부갓네살은 돌아왔다.
97:9.26 그래서 유다의 종말이 갑자기 찾아왔다. 도시는 파괴되었고, 사람들은 바빌론으로 끌려갔다. 야웨와 바알의 싸움에서 포로 생활로 끝이 났다. 포로 생활은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에게 충격을 주었고 일신교로 내몰렸다.
97:9.27 바빌론에서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팔레스타인에서 작은 집단으로 존재하면서 독특한 사회적, 경제적 관습을 유지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들의 이념이 성공하려면 이방인들을 개종시켜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로 인해 그들은 새로운 운명 개념을 형성하게 되었고―유대인들이 야웨의 선택된 종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싹텄다. 구약의 유대교는 실제로 바빌론 포로 시기에 발전하였다.
97:9.28 불멸의 교리 또한 바빌론에서 형성되었다. 유대인들은 미래의 삶에 대한 개념이 사회 정의라는 그들 복음의 중요성을 떨어뜨린다고 생각했다. 이제 처음으로 신학이 사회학과 경제학을 대체하게 되었다. 종교는 인간의 사상과 행동의 체계로서 점점 더 정치, 사회학, 경제학과 분리되어 형성되고 있었다.
97:9.29 그래서 유대 민족에 관한 진실은 신성한 역사로 여겨 왔던 많은 것이 평범한 시대적 역사를 적은 연대기에 지나지 않음을 드러낸다. 유대교의 토양으로부터 기독교가 자라났지만, 유대인은 기적의 민족이 아니었다.
10. 히브리인의 종교
97:10.1 그들의 지도자들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들이 선택된 민족이라는 것을 가르쳤다. 그러나 이는 특별한 신성한 은총을 독점하거나 특혜를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민족에게 유일신에 대한 진리를 전하는 특별한 사명을 맡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유대인들에게 이 운명을 이행하면 모든 민족의 영적 지도자가 될 것이며, 다가오는 메시아가 평화의 왕으로서 그들과 전 세계를 다스릴 것이라고 약속했다.
97:10.2 페르시아에 의해 자유를 얻은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왔으나, 자신들의 제사장에 의해 지배되는 법규, 제사, 의식에 다시 묶이게 되었다. 히브리 부족들이 모세의 작별 연설에서 제시된 하나님의 놀라운 이야기를 제사와 참회의 의식으로 대체했듯이, 이 히브리 민족의 유산들은 성장하는 제사장 집단의 규칙, 규정, 의식을 지지하며 둘째 이사야의 장대한 개념을 거부했다.
97:10.3 국가적 자아도취, 오해된 약속의 메시아에 대한 잘못된 신앙, 그리고 제사장들에 의한 점점 더 심해지는 속박과 폭압은 영적 지도자들의 목소리를 영원히 잠재웠다(다니엘, 에스겔, 학개, 말라기를 제외하고). 그날부터 세례 요한 시대까지 이스라엘은 지속적인 영적 퇴보를 체험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우주 아버지의 개념을 결코 잃지 않았다. 그들은 기독교 이후 20세기까지 이 신(Deity) 개념을 계속해서 따랐다.
97:10.4 모세에서 세례 요한에 이르기까지, 충실한 선생들이 끊임없이 이어져 오며 일신교의 빛을 다음 세대로 전했다. 그들은 부도덕한 통치자들을 끊임없이 질책하고, 상업화된 제사장들을 비난하며, 항상 사람들에게 이스라엘의 주 하나님인 야웨에 대한 숭배를 고수할 것을 권장했다.
97:10.5 한 국가로서, 결국 유대인은 정치적 신분을 잃었지만, 한 분 우주의 하나님을 성실하게 믿는 히브리 종교는 흩어진 유랑자들의 가슴 속에 줄곧 살아 있다. 이 종교가 살아남은 것은 그것이 추종자들의 가장 높은 가치 기준을 보존하도록 효과 있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유대 종교는 한 민족의 이상을 보존했지만, 진리의 영역에서 진보를 육성하고 철학으로 창조적 발견을 북돋지는 못했다. 유대 종교는 많은 결함이 있었다―철학이 모자랐고 미학적 성질이 거의 빠져 있었다―하지만 도덕적 가치를 보존했다; 그래서 지속되었다. 다른 신(Deity) 개념들과 비교해서, 최상의 야웨는 뚜렷하고, 선명하고, 개인적이고 도덕적이었다.
97:10.6 유대인은 거의 아무 민족도 따른 적이 없을 정도로, 공정, 지혜, 진리, 의(義)를 사랑했지만, 이러한 신성한 자질에 대한 영적인 이해에서 모든 민족 중 가장 적게 기여하였다. 히브리 신학은 성장을 거부했지만, 다른 두 세계 종교, 기독교와 모하메드교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97:10.7 유대교가 계속된 이유 중 하나는 그 제도들 덕분이었다. 종교가 고립된 개인들의 사적인 관행으로만 존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이는 종교 지도자들이 자주 범하는 오류이다: 제도화된 종교의 악을 보면서, 그룹 기능의 기법을 파괴하려고 한다. 모든 의식을 제거하기보다는 그것을 개혁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이 점에서 에스겔은 그의 동시대인들보다 더 지혜로웠다. 그는 개인의 도덕적 책임을 강조하면서도, 우수하고 정화된 의식을 충실히 지키는 제도를 세우려 했다.
97:10.8 그리고 이스라엘의 연속적인 선생들은 유란시아의 종교 진화에 있어 가장 위대한 업적을 이루었다; 폭발하는 시나이 화산의 시샘하는 잔인한 영(spirit), 야만적인 악마 야웨의 미개한 개념으로부터, 나중에 고상하고 하늘 같은 최상의 야웨 개념, 만물의 창조자요, 사랑이 가득하고 자비로운, 온 인류의 아버지 개념이 되기까지 점진적이지만 계속된 변화가 있었다. 히브리인의 이 하나님 개념은 그의 아들, 네바돈 미가엘이 친히 주신 가르침과 삶의 본보기로 인하여 더욱 커지고 아주 아름답게 확대될 때까지, 우주의 아버지를 인간이 가장 높게 상상한 것이었다.
97:10.9 [네바돈의 한 멜기세덱이 발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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