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17.
명언
여유가 생겼다. 하루가 널널하여 시간이 널브러져 있고 어디를 가서 하루 두 끼 정도는 식당 밥 먹으면서 여행을 다닐만하다. 좋은 둘레길 따라 걷는 데 전혀 무리 없는 무릎 관절과 허리가 아직은 쓸만하다. 이 나이에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나 해서 명산을 피하지는 않지만 욕심내지 않기로 했다. 아니, 이제 등산은 별로다.
하루를 설계한다는 게 만만치는 않다. 그러나 일주일을 계획하는 일은 사람마다 정해진 원칙이 있다. 3일간의 답사 여행을 위해 이틀은 글을 쓰거나 읽고 이틀은 휴식과 함께 여행 계획을 짜고 있다. 내가 가진 패턴이다. 이미 공감할 만한 틀을 가지고 있지만 그래도 매번 쉽지 않다.
젊은 날에는 몰랐다. 아버지는 “제발, 깊이 생각하라.”고 충고했다. 심사숙고한다고 뾰족한 수가 나오지도 않았지만, 생각하는 방법을 몰라서 늘 장고 끝에 악수였다. 전설의 복서 무하마드알리의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쏜다.’가 더 마음에 다가왔다. 생각보다 과감한 행동이 우선이었다. 의도한 바와 다르거나 실수의 연속일 때는 사과하면 되고 젊음은 용서받을 수 있는 대상이니까.
중년이 되어서는 미래가 두려웠다. 그래서 미래를 위한 밑거름에 충실히 하려고 노력했다. 오늘은 이리 살겠지만 희끗희끗한 흰머리 날릴 때면 낯빛이 부드럽고 온후하기를 원했다. 넘쳐흐르는 덕(德)으로 포장되면 좋겠는데. “얼굴에서 그 사람이 살아온 삶을 알 수 있다.” 내 얼굴에는 남들에게서 찾을 수 없는 아름다운 여유가 덕지덕지 묻어 있기를 소망했었다. 불가능한 답을 정해 놓고 낭비한 시간이 아깝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무의미한 시간은 아니었다.
쉰이 넘어서는 다시 시작했다. ‘우리’는 ‘나’로 바꾸고 ‘해야 한다.(must)’를 ‘하고 싶다.(want)’로 바꿔버렸다. ‘다음’은 ‘지금’이나 ‘당장’으로 교체해 버렸다. 내일은 없을 것처럼 살아야겠다고 마음을 굳혔다. “여행은 다리 떨릴 때 가는 게 아니라 심장이 떨릴 때 가야 한다.” 이 말보다 더 마음에 와닿는 격언이나 속담은 없었다.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모르는 판에….” 그렇다. 사람 사는 일이 정해진 끝이 없으니 다음으로 미루기에는 기약이 없을 뿐이다.
내가 품고 사는 명언이 몇 개 된다.
“얼마나 오래 사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재미있게 사느냐가 문제다.”
“인생이 소풍이라면, 소풍처럼 살면 된다.”
“죽음은 삶의 끝자리에서 기다리는 게 아니라 사는 도중에 여러 번 왔다 갔다 한다.”
"잘 죽고 싶은가 그러면 잘 살아라."
첫댓글 명산을 피지는 않지만???
피하지는 않지만... 오타였음
나는 언제 want 로 살꼬
want 또는 wish 로 살면 ...
그렇게 노력하는거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