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운수사 주지 범일 스님
“서로의 소원 이뤄주려 만난 우리…작은 욕심에 헤어져선 안 돼!”
‘별’보며 자유 꿈꾸던 청년, 심장병 수술 후 출가 단행
‘첫 철 못나면 영원히 못해’ 해인사 선원서 용맹정진
화야산 기슭 서종사 창건, 인터넷 도량 일구며 포교
깊은 사유서 길어올린 ‘글’ 해학·지혜 배어 있어 감동
내 앞에 닥친 큰 시련은, ‘조아질라고’ 찾아온 것
‘나’만 행복하다면 불안, 이 시대의 화두는 ‘상생’
우리는 모두 ‘모난 돌’ 정진하며 인격 높여가야
운수사 주지 범일 스님은 “저를 만난 사람, 우리 절에 닿은 사람,
부처님 친견한 사람은 모두 다 행복하시기를 늘 기도 드린다.”고 전했다.
‘모난 돌이 바다로 가려면
모난 곳이 다 닳아서
둥글어져야 한답니다.
누군가의 흉허물이 보이십니까?
아직 바다는 멀었습니다.’
2017년 12월 부산 지하철에 게시된 글 판 ‘풍경소리’에 실린
범일 스님의 ‘모난 돌’이다. 김형중 전 동대부여중 교장(문학박사)은
법보신문에 연재한 ‘내가 사랑한 불교 시’에서 선적 품격을 유감없이 드러냈다며
이 글을 ‘시’로 채택하고 감상평을 내놓았다.
‘처음부터 성자는 없다. 누구나 흉허물이 있다.
자신의 부족함을 채우려고 노력하는 사람, 고질적인 자신의 허물을
수행으로 극복하는 수행자는 언젠가 청정한 마하보살의 완성체가 된다.’
양평 산골짜기에 시린 달빛이 내려앉았다. 지인의 소개로 들어앉은
판넬집을 여여원(如如院)이라 이름하고 ‘이뭣고’ 든 지 벌써 1년이다.
경기도 양평 화야산 기슭의 서종사 전경.
돌이켜보면 서울 봉은사에서 10년 동안 총무국장 등의 소임을 보며 해낸 일이 꽤 많았다.
20명에 불과했던 청년회를 100여명에 이르는 신행단체로 키워냈고,
해학 넘치는 강의로 ‘불교대학 붐’도 일으켰다.
강력한 요청으로 구성한 108명 규모의 합창단이 KBS2를 통해
부처님오신날 특집 기념공연을 펼칠 때는 은근 어깨가 올라갔더랬다.
서울 강남의 핵심 사찰로 자리매김 할 즈음 길을 떠났다.(1997)
절일 살피느라 여념 없어 보이지만 수행자는 안다. 떠나야 할 때와 혼자 있어야 할 때를 말이다.
부산 해운정사 선원 등 인연 닿는 곳에서 정진하다 1999년 겨울 경기도 양평에 들어왔다.
적적만 흐르는 여여원이지만 좌복에서 일어나 창문 열고 내다 본 달과 별은 늘 좋았다.
별은 이따금씩 출가 전 고교시절로 안내하곤 했다.
고창 방장산(方丈山) 아래 고향집은 ‘동산집’이라 불렸다.
마을에서 가장 높은 언덕에 자리해서다.
밤이면 홀로 마당에 서서 총총히 박힌 별과 밤하늘 한복판을 흐르는 은하수에 흠뻑 빠지곤 했다.
‘북극성은 지구에서 400광년 떨어져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나는 400년 전에 떠난 빛을 지금 보고 있는 거 아닌가. 별의 과거를 지금 보고 있다니!’
광활한 우주에 ‘나’도 존재한다는 사실이 놀랍고 경이로웠다.
동산집에 머물던 시야가 방장산을 넘어 우주로 뻗어나가는 사이
대학, 월급, 결혼, 성공은 ‘구속’이라는 단어로 수렴됐다.
몸이 허락한다면 언제 어디로든 떠날 수 있을 것만 같은 스님이 되고 싶었다.
오래 전부터 아팠다.
심실중격결손(VSD)과 대동맥근부파열(SVR)이라는 심장 질환을 앓고 있었는데
국내에서는 별달리 손 쓸 수 없었다. 매 순간 터져 나오는 두통은 허약한 몸마저 짓눌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도 한참 후인 1980년 서울대병원에서 수술이 가능하다는 희소식이 날아들었다.
국내 첫 수술이어서 걱정이 태산이었지만 성공이었다.
2년 동안의 회복 기간을 거친 후 범어사로 향했다. 은사 인연은 성오 스님과 맺어졌다.(1982)
여여원에서 정진하며 ‘생활의 지혜’ 하나를 터득했다.
라면 5박스, 쌀 한 가마, 그리고 김치 좀 있으면 1년은 ‘버틴다’는 사실이다.
불사에 뛰어들 때임을 직감한 것이다. 평소 눈여겨 본 여여원 인근의 땅을 2001년 3월 매입했다.
황토를 사와 직사각형 틀에 꾹꾹 채워 넣었다.
틀에서 떨어져 나온 벽돌을 이리 쌓고 저리 쌓으니 집이 되어 갔다.
부산 운수사의 늦가을 풍광이 일품이다.
2001년 4월22일, 66㎡(20평)의 임시법당을 열었다.
대웅전은 그로부터 11년 후인 2012년 들어섰다.
화야산 아래 자리한 이 절을 서종사(西宗寺)라 했다.
서쪽에서 전해온 부처님의 종지를 품은 절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1999년 개설한 인터넷 홈페이지 ‘조아질라고(http://joajilrago.org)’에 더 정성을 쏟았다.
1999년이면 이제 막 이메일 주소를 만들어 쓸 때다.
다음과 네이버가 서비스를 시작한 게 1997·1999년임을 감안하면
범일 스님의 ‘디지털 마인드’는 첨단을 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까지 사진과 함께 올린 글만도 5000편이 넘는다. 이 뿐만이 아니다.
서종사에 머물며 인연 맺은 2000여명의 사람들에게 그날의 단상을 문자로도 전하고 있다.
범일 스님의 포교 원력을 사중으로부터 인정받았던 것일까.
2017년 부산의 유수 사찰로 손꼽히는 운수사 주지를 맡았다.
서종사와 운수사를 오가면서도 절의 내실을 단단히 다져가고 있다.
일례로 취임 직후 연 운수사 43기 불교대학(2018)에는 250명이 등록했다.
아마도 그 당시 부산 지역 최다 등록 기록일 것이다.
범일 스님 특유의 포교역량이 운수사에서도 빛을 발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제1회 천년의 향기 그대사랑’ 주제의 국화축제가 펼쳐지는 운수사는 국화향으로 가득했다.
범일 스님은 이례적으로 사미 신분으로 해인사 동안거 선방에 들었다.
회복시간을 충분히 가졌다고 하지만 큰 수술을 한 몸이었다.
“해인사 신장경각에서 정진했습니다.
법전 스님과 전 종정 혜암 스님도 함께 정진하셨습니다.
성철 스님도 포행 삼아 내려오셔서 ‘말없는 점검’을 해주셨습니다.
그때도 저는 몸이 허약했고 두통은 여전히 심했습니다.
어느날, 법전 큰 스님께서 밤꿀 열 말 정도를 선원에 들여 놓으셨습니다.
수좌들이 더 힘을 내 공부하는 뜻입니다. 그때 선배 스님들이 전해준 말이 생각났습니다.
‘첫 철을 못 나면 영원히 못 난다.’
논두렁 베고 죽는 게 스님의 일상이라는데 수행하다 죽으면 영광 아니겠습니까!”
운수사 글판이 주는 메시지는 강렬하다.
은사인 성오 스님에 대한 기억이 궁금했다.
범어사 주지와 동국대 이사 등을 역임했던 성오 스님은 대흥사, 동화사, 송광사 등
제방선원에서 17안거를 성만한 수좌였다.
“은사스님과는 순례길을 자주 떠났습니다.
동남아 5개 불교국가는 물론 네팔과 일본에 가실 때도 동행했습니다.
이것 하나만은 분명하게 제 뇌리에 박혀 있습니다.
은사스님은 순례 중에도 새벽에 일어나 가부좌 틀고 화두를 드셨습니다.
정진하는 모습 하나만으로도 감동을 줄 수 있다는 이치를 은사스님을 통해 알았습니다.”
췌장암 말기로 접어든 성오 스님 곁을 끝까지 지키며 시봉한 것도 범일 스님이다.
서종사에 머물 때 간곡히 청했다.
“큰 병원으로 모시겠습니다.”
“아니다. 내가 가야할 자리가 생겼다.”
어느날 유독 연이어 피를 토하셨다. 심한 각혈로 고통이 극에 달했을 것임에도
허리를 곧추 세운 성오 스님은 글을 써 내려갔다.
方山一虎禾也住(방산일호화야주)
草木失色萬人仰(초목실색만인앙)
禾也靈峰雲外住(화야영봉운외주)
西宗洞水萬古流(서종동수만고류)
방장산 한 호랑이 화야산에 머무니
초목이 빛을 잃고 만인이 우러른다.
화야산 신령스런 봉우리 구름 밖에 머물고
서종사 동천계곡 물은 천년만년 흐른다.
상좌 범일 스님에게 내린 ‘전법게’일 것이다. 성오 스님은 다음날 좌탈입망했다.(2006)
범일 스님이 직접 개설한 ‘조아질라고’는 지금도 불자들에게 인기가 높다.
사유 끝에 길어 올린 글과 카메라 렌즈를 통해 포착한 찰나의 풍경이
큰 공감대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조아질라고’일까!
“부산 해운정사 선원에서 정진할 때입니다.
비장한 각오를 세웠던 터라 ‘하루 1종식, 수면 4시간’으로 밀어 붙였습니다.
두통, 치통, 등짝 결림에 무릎 통증까지 발생했습니다.
‘이 자리서 죽어버릴지언정 다음으로 미룰 수는 없다’는 생각에 그대로 밀고 나갔습니다.”
신기하게도 통증은 점차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런데 유독 왼쪽 손목의 통증만은 차도를 보이지 않고 더 심해졌다.
‘왜 아플까?’ ‘내일은 더 아플까?’라는 상념이 정진 중에도 떠나지 않았다.
그러다 한 생각에 이르렀다.
“설악산 봉정암 오르는 길에 깔딱고개가 있는데, 그곳을 넘어서야 암자에 닿을 수 있습니다.
‘어제보다 오늘 더 아픈 것은 아픔의 꼭짓점에 와 있기 때문이다.
시작된 아픔이 정점에 도달하고나면 아픔이 끝나는 지점에 닿을 것이다.’
묘하게도 그 생각을 한 다음날 통증이 사라졌습니다. 그때 생각했습니다.
‘나에게 생기는 아픔과 마음의 괴로움들은 나를 더욱 좋아지게 하려 나타난 증상이다.’
그때부터 난관에 부딪치면 ‘나를 더욱 좋아지게 하려는구나?’라고 믿으며
‘조아질려구!’를 생각하고 말하게 되었습니다.
닥쳐온 큰 시련을 외면하거나 시련으로부터 도피하려 마세요. ‘조아질려’는 전조입니다.”
서종사와 운수사가 쓰는 달력 속 사진들은 모두 범일 스님 작품이다. 사연이 있다.
외국에 다녀온 형이 카메라 한 대를 사왔는데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범일 스님만이 꽃과 들, 산을 담곤했다.
출가 후 속가의 어머니가 그 카메라를 보시며 자주 우신다는 이야기를 도반으로부터 전해 들었다.
하여 어머니를 찾아뵈었다.
“관세음보살님께서는 소원을 들어주신다고 합니다.
제가 스님 생활 그만두고 세상에 나와 살기를 원하신다면 정성껏 기도하세요.
그런데 어머니, 세상의 모든 어머니는 자식이 행복하게 살기를 바란다고 합니다.
저는 운수납자의 삶이 정말 행복합니다!”
카메라를 들고 절로 돌아왔다.
수좌스님들이 벗어 놓은 신발, 아침 햇살 내려앉은 선원 뜨락, 넝쿨 올라가는 산사 담장을 담았다.
범일 스님의 촬영 솜씨에 감탄한 지인이 카메라 한 대를 선물했다.
어느날, 카메라 두 대를 목과 어깨에 맨 채 내설악 오색에서 대청봉을 향해 올랐다.
산길도 험한데 카메라까지 걸고 있으니 힘에 겨웠다. 바위에 기댄 채 서서 자문했다.
‘이봐 범일! 부모, 형제, 친구, 고향 모두를 떠나왔으면서 왜 카메라는 놓지 못하는가?’
그때는 답을 찾지 못했다.
“이유 없는 끌림에 의해 하는 일은 훗날 알차게 쓰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깊은 뜻을 아직 알 수 없습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지속해도 좋습니다.”
범일 스님의 렌지에 잡힌 사진은 불교잡지, 자신의 저서, 달력 등에 요긴하게 쓰이고 있다.
운수사를 어떻게 일궈가고 싶은지를 여쭈었다.
“돈이 없어도 언제든 들어설 수 있는 도량이고 싶습니다.
기쁘거나 슬플 때 언제든 찾아와 쉬어갈 수 있는 도량이고 싶습니다.
처음 본 절이지만 ‘그 절 다시 가 보고 싶다’고 떠올려지는 절이고 싶습니다.”
서종사를 처음 일궈갈 때도 저 마음이었다.
도량에 든 사람이면 ‘차 한 잔 하실래요?’하고 물었더랬다.
“저를 만난 사람, 우리 절에 닿은 사람,
부처님 친견한 사람은 모두 다 행복하시기를 늘 기도드립니다.
우리는 서로의 소원을 이뤄주기 위해 만났습니다.
작은 욕심 때문에 소원을 이뤄주기도 전에 서로 헤어지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됩니다.
이 시대의 화두는 ‘상생’입니다.”
운수사를 내려오는 산길에서 글판 하나를 만났다. 범일 스님의 책에 나온 글귀다.
‘한 사람과의 인연시작, 새로운 우주의 입구입니다.’
김형중 전 교장이 전한 ‘모난 돌’ 평이 다시 떠올랐다.
‘범일 스님의 모난 돌은 투철한 수행 끝에 목구멍 속에서 흘러나온 깨달음의 소리이다.
세공하지 않은 원석의 투박한 선시이다. 문자반야(文字般若)이다.’
채문기 상임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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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일 스님은
범어사에서 성오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해인사, 범어사, 해운정사, 태안사 등 제방선원에서 정진했다.
2001년부터 경기도 양평 화야산 기슭 서종사에 머물며
‘온라인 도량 조아질라고(joajilrago.org)’
‘유튜브 도량 조아질라고(조아질라고 - YouTube)’를 가꾸고 있다.
에세이집으로 ‘조아질라고’와 ‘통과 통과’가 있다.
현재 서종사와 운수사 주지 소임을 보고 있다.
2020년 12월 9일
법보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