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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반민특위 전국연대 ! 원문보기 글쓴이: ~반드시 응징하는 저팔계!
제암리 학살사건에 대한 재조명
성 주 현
(경기대학교 대학원)
제1장 머리말
1919년 3월 1일의 만세시위는 천도교․기독교․불교 등 종교계의 주도적 역할로 전개된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3월 1일부터 5월까지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던 만세시위는 일제의 강압적 탄압으로 비록 ‘독립’이라는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임시정부’가 각 지역에서 조직되었고, 그리고 이 임시정부의 통합으로 비록 국외이지만 중국 상해에 통합임시정부가 성립되었다. 그러나 이 임시정부가 수립되기 전까지 국내에서는 일제의 잔혹한 만세시위의 탄압에 수많은 희생을 치루어야만 했다. 수안․맹산․단천을 비롯하여 수원군 제암리 역시 30여명이라는 적지 않은 희생자를 내었다. 제암리를 포함하고 있는 수원의 3․1운동은 일본인 순사 2명의 처단과 우정면․장안면사무소와 화수리주재소 방화에 대해 일본군의 철저한 보복을 받을 만큼 전국에서 치열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던 곳이다. 이에 대해 이정은은 첫째 대표적 공세적 만세시위운동, 둘째 일제의 집중된 비인도적 탄압 만행, 셋째 일제의 국제적 여론을 호도하기 위한 사실왜곡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정은, 「화성군 장안면․우정면 3.1운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제9집,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5, 67면.
일찍이 우정면․장안면의 3․1운동은 학계의 주목을 받아 수원을 포함한 선행연구는 적지 않다. 조병창, 『수원지방을 중심으로 한 3.1운동 소고』, 단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71 ; 노천호, 『수원지방 3.1운동연구』, 단국대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78 ; 이정은, 「화성군 우정면․장안면 3.1운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9, 1995 ; 이덕주, 「3.1운동과 제암리사건」, 『한국기독교회사연구』6, 1900 ; 최홍규, 「수원지방 3.1운동의 역사적 배경」, 『3.1독립운동과 민족정기』, 1996 ; 조규태, 「천도교의 민족문화운동」, 『일제하 경기도지역 종교계의 민족문화운동』, 2001 ; 홍석창, 『수원지방 3.1운동사』, 왕도출판사, 1981 ; 홍석창, 『수원지방교회사자료집』, 감리교본부 교육국, 1987 ; 홍석창, 『감리교회와 독립운동』, 에이맨, 1988 ; 김선진, 『일제의 학살만행을 고발한다』, 미래출판사, 1983 ; 성주현, 「제암리의 3.1운동」, 『신인간』통권480호, 1990 ; 조성운, 「일제하 수원지역 천도교의 성장과 민족운동」, 『경기사론』4․5집, 2001.
그러나 이들의 연구는 대부분 3․1운동의 전개과정을 주로 다루고 있어 제암리학살사건을 심층적으로 이해하는데는 적지 않은 어려움을 주고 있다. 즉, 홍석창의 경우 기독교적인 시각에서 서술되어 지극히 단편적이고 전체적인 이해가 부족하며, 김선진과 성주현의 경우 천도교측의 시각에서 접근하고 있으나 역시 심층적인 분석이 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이정은의 경우 삼괴지역을 중심으로 한 장안면과 우정면의 3․1운동을 새로 발굴된 자료를 통해서 접근하고 있으나 역시 만세시위의 전개과정과 연행된 시위자의 분석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 역시 제암리사건을 심층적으로 이해하는데 한계가 없지 않다. 특히 이들 연구는 제암리의 희생자수를 23명으로 한정하고 있어 일제의 사실왜곡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
따라서 필자는 본고에서 우정면․장안면의 만세시위와 제암리학살사건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 다음의 사항을 고려하여 작성하고자 한다. 첫째 우정면과 장안면의 3․1운동이 여타 지역보다 조직적이고 계획적인 사회적 배경을 다루고자 한다. 이는 우정면․장안면의 3․1운동은 천도교와 기독교 지도자들에 의해 조직적으로 계획되고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우정면․장안면의 천도교와 기독교의 전래와 3․1운동이 일어나기 전까지의 상황을 살펴보고자 한다. 둘째, 우정면․장안면의 3․1만세시위 전개과정을 보다 세분화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이는 이들 지역에서 어떻게 3․1만세시위를 계획하고 있으며 어떠한 경로를 통하여 전개하였는가는 매우 중요하다. 즉, 우정면과 장안면의 만세시위는 일본인 순사 1명을 처단하고 양면사무소와 화수리주재소를 습격 방화하는 공세적 만세시위로 발전하였으며, 이로 곧 일제의 계획된 보복만행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셋째, 일제의 보복만행이 어떤 것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일제의 보복만행은 燒失家戶 80호, 사망 5명, 부상 5명, 검거인원 280여명과 제암리학살사건으로 이어진 어느 지역보다도 큰 피해를 입었다. 넷째, 제암리학살사건의 정확한 진상을 분석해 보고자 한다. 그동안 제암리학살사건은 23명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3․1운동 81주년을 맞아 건립된 제암리순국기념관 역시 이를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 이에 대해 필자는 일제측의 기록과 외국 선교사의 기록, 그리고 국내의 기록을 살펴본 결과 희생자가 23명이 훨씬 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 점을 본고에서는 중점적으로 고찰하고자 한다.
제2장 만세운동의 사회적 배경 ; 천도교와 기독교를 중심으로
우정면과 장안면의 3․1운동과 제암리학살사건(이하 제암리사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지역의 사회적 배경, 즉 종교적 상황을 살펴보아야 한다. 이는 3․1운동의 주도적 역할과 제암리사건에서 희생된 사람들이 모두 종교적 배경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대부분이 천도교와 기독교를 신앙하고 있는데 이는 여타 지역과의 다른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우정면과 장안면은 옛부터 三槐로 불리웠는데 수원에서 서남쪽으로 20여Km 떨어진 아산만과 남양만에 돌출한 화수반도지역을 차지하고 있으며, 3․1운동 당시에는 수원군에 속해 있었다. 이 지역에는 일찍부터 동학이 포교된 것은 동학혁명 이전이었으나 어느 때 전래되었는지 명확하지는 않다. 동학이 처음 포교된 것은 1861년 후반으로, 水雲 崔濟愚는 1860년 4월 5일 동학을 창도하였으나 포교는 이보다 1년 뒤인 1861년 경주를 중심으로 포교하였다. 이후 1862년 교세가 크게 일어나 1862년 12월 흥해에서 接을 조직하고 接主를 임명한 바 있는데, 金周瑞를 대구․청도와 경기도 일대의 접주로 임명한 것으로 보아 姜洙,『崔先生文集道源記書』, 1879(『東學思想資料集』壹, 亞細亞文化史, 1979, 179-180면) ; 李敦化, 『天道敎創建史』제1편, 천도교중앙종리원, 1933, 42면.
이 무렵 경기도 지역에까지 동학이 포교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이 시기는 대체로 경기 남부지역으로 추정된다. 수원지역에 동학이 본격적으로 전래된 것은 이보다 20여년 후인 1880년경이었다. 趙成雲,「일제하 수원지역 천도교의 성장과 민족운동」, 『경기사론』4, 2001, 183-184면.
이 시기는 국내외의 정세가 급박하게 전개되었다. 내적으로는 동학의 중심지가 영남지역을 벗어나 강원도 영서지역으로 옮겨졌으며, 특히 1880년과 1881년 동학의 경전인 『東經大全』과 『龍潭諭詞』가 간행될 정도로 교단의 조직이 안정되었다. 姜洙, 앞의 책, 278면 ; 이돈화, 앞의 책, 30-31면;오지영, 『東學史』, 영창서관, 1940, 59-60면.
그리고 외적으로는 1880년 고종이 개화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면서 개화파인사들이 중앙정계에 진출하기 시작하였으며, 1882년 미국과 수교를 함으로써 이후 서양 열국과의 외교수립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내외적 상황은 동학이 그 동안 영남과 충청을 벗어나 경기도와 호남지역까지 포교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수원지역에 동학을 전래한 주요인물은 徐仁周와 安敎善 안교선은 호남인으로 1870년대 후반에 입교한 것으로 보인다. 1879년 최시형이 강원도 인제 방시학의 집에 修單所를 설치할 때 安敎常이 書有司, 安敎一이 監有司, 安敎伯이 冊子有司, 安敎綱이 輪通有司로 각각 참여한 바 있다. 안교선은 이들과 형제 또는 친인척으로 보인다.(강수, 앞의 책, 275-276면)
이다. 서인주는 수원출신으로 1883년 3월 김연국․손병희․손천민․박인호 등과 함께 최시형을 방문할 정도로 교단의 핵심인물이었다. 오지영, 앞의 책, 60면 ; 이돈화, 앞의 책, 31면.
그는 원래 승려 출신으로 30여년간 불도를 닦았으나 동학의 ‘布德天下 廣濟蒼生’의 이념에 공감하여 동학에 입도하였으며, 서병학과 함께 동학의 의식과 제도를 마련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또한 그는 신체와 용모가 매우 작고 특이하였으나 재주가 많아 당시 사람들이 異人 또는 眞人이라 불렀다. 黃玹, 『梧下記聞』首筆(김종익 역), 역사비평사, 1994, 73면.
또한 서인주는 1885년 9월 상주 왕실촌에 머무르고 있던 최시형과 그의 가족에게 생활비를 지원해 주었으며, 최시형은 1889년 서인주가 金甲島에 유배되었을 때 그의 석방을 위해 기도를 하는 한편 5백금을 주고 그를 석방시켜 주었다. 오상준, 「본교역사」, 『천도교회월보』23호, 1912. 6, 17면;然然子, 「본교역사번역」, 『천도교회월보』29호, 1912. 12, 63면.
안교선은 호남출신으로 1883년 최시형이 경주에서 『동경대전』을 간행할 때 윤상오와 같이 有司로 참여하였다. 『東經大全』癸未版, 跋文.
그는 1884년 2월경 수원을 비롯한 경기지역에 동학을 포교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하였으며, 이 시기에 安承寬과 金鼎鉉(金乃鉉)이 그에게 입도하였다.「水原郡宗理院沿革」, 『天道敎會月報』191호, 1926. 1, 29면 ; 이병헌, 「수원교회낙성식」, 『天道敎會月報』292호, 1936. 12, 36면.
이들은 수원지역 동학 포교의 선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후 1880년 徐丙學․張晩秀․李圭植․金永根․羅天綱․申奎植이 六任으로, 안승관은 京湖大接主, 金鼎鉉은 京湖大接司로, 林炳昇․白蘭洙․羅天綱․申龍九․羅正完․李敏道는 각각 접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이들의 활동으로 수원지역의 동학교인은 수만명에 달할 정도로 교세가 크게 확장되었다.「수원군종리원연혁」, 29면.
이로써 수원지역의 동학은 비약적 발전을 보게 되었으며, 조성운, 앞의 책, 184-185면.
대접주, 대접사, 접주, 육임 등 교단조직을 갖추게 되었다.
이러한 교세를 바탕으로 수원지역의 동학은 1892년과 1893년 수운 최제우의 억울한 죽음을 풀어주고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한 敎祖伸寃運動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1893년 3월 10일 충북 보은군 장내리에서 斥倭洋倡義運動을 전개하자 신용구와 이민도의 주선으로 수천명이 참가하였다. 「수원군종리원연혁」, 29면.
그러나 관변측 기록인 「聚語」에는 수원과 용인의 동학교인 3백여명「聚語」, 『東學亂記錄』上, 국사편찬위원회, 1971, 118면,
, 수원접이라는 자들과 그 밖의 무리들 1천여명「聚語」, 118면.
, 수원접 840여명「聚語」, 124면.
등으로 그때마다 다르게 기록하고 있다. 교단의 측과 관변측의 기록이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으나 수원지역의 동학교인이 보은 교조신원운동에 참여한 것은 대략 청주영장이 보고한 840여명으로 보인다. 최홍규, 「경기지역의 동학과 동학농민군 활동」, 『경기사학』창간호, 1997, 89-90면.
이후 수원지역의 동학은 1894년 동학혁명에도 적극 참여하고 있다. 수원지역의 동학은 1894년 9월 18일 반외세의 봉기령에 따라 즉각 기포하였으며,「東學黨의 景況 및 征討에 관한 華城留守의 書翰」, 『駐韓日本公使館記錄』1, 국사편찬위원회, 159-191면.
일본군이 이들 동학지도자를 체포하려 하자 동학군은 잠시 후퇴하였다가 다시 전열을 정비하여 계속 활동하였다.「水原府 匪徒討伐을 위한 日本出兵과 朝鮮官軍의 협조에 관한 諸書翰」, 『주한일본공사관기록』1, 141-143면.
이처럼 수원이 크게 위협받자 정부는 일본군을 긴급히 증파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고 일본군이 즉시 투입되었다.「수원으로의 군대파견의 건」, 『주한일본공사관기록』3, 362-363면.
이러한 수원지역의 동학군의 활동에 대해 오지영의 『東學史』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安承寬․金昇(鼎)鉉 등은 5천군을 거느리고 수원부를 점령하고 南軍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바 官兵과 日兵을 만나 여러 날 싸우다가 마침내 패하였고 ...... 오지영, 앞의 책, 152면.
이로 미루어 보아 기호대접주 안승관과 기호대접사 김정현 등이 지휘한 수원지역의 동학조직은 5천여명에 이르는 막강한 병력을 갖추고 있었으며, 수원부를 점령할 정도로 기세를 올렸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수원의 동학군을 지휘한 안승관과 김정현은 피체되어 서울로 압송되어 南筏院에서 효수되었으며「갑오실기」,『東學亂記錄』상, 38면;오지영, 앞의 책, 156면.
수원성에서 체포된 金元八도 효수되었다.「수원군종리원연혁」, 29면.
그리고 남양지역의 동학군도 白樂烈과 金興烈의 지휘 하에 수원의 高錫柱․김정현 휘하에서 활동하였다.『天道敎百年略史』上卷, 천도교중앙총부, 1981, 252면.
동학혁명 이후 한동안 동학 세력이 쇠퇴하였으나 수원지역은 안성출신의 金漢式,「수원군종리원연혁」, 29면.
남양지역은 백낙렬 김승학, 『韓國獨立史』, 독립문화사, 1966, 655면.
의 노력으로 점차 회복되었다.
이러한 노력으로 수촌리의 백낙렬은 삼괴지역, 삼괴지역은 우정면과 장안면을 통칭하는 말이다.
김성렬은 팔탄면 고주리, 李秉蘷은 팔탄면 노하리의 포교책임자로 활동하였으며, 조성운, 앞의 책, 191면.
1910년에는 수촌리를 비롯하여 독정리․어은리․장안리․화산리․이화리․덕목리․고주리․매향리 등 8개 전교실을 설치 관장하였다. 金善鎭, 『일제의 학살만행을 고발한다』, 미래문화사, 1983, 21-31면.
특히 남양교구는 1909년 8월 전국에서 성미납부 성적이 우수하여 1등에 선정되기도 하였다.「중앙총부휘보」, 『천도교회월보』8호, 1911. 3, 48면.
한편, 1910년대 들어 전국지역에 교리강습소를 설립, 근대교육활동을 실시하자 수원과 삼괴지역에서는 栗北面 佛井里에 309강습소, 貢鄕面 堤巖洞에 310강습소,「중앙총부휘보」, 『천도교회월보』 23호, 1914. 6, 46면.
鴨丁面 沙基村에 제446강습소,「중앙총부휘보」, 『천도교회월보』28호, 1912. 11, 44면.
수원군내에 544강습소,「중앙총부휘보」, 『천도교회월보』12호, 1911. 7, 65면.
634강습소,「중앙총부휘보」, 『천도교회월보』29호, 1912. 12, 49면.
陰德面 北洞에 733강습소,「중앙총부휘보」, 『천도교회월보』83호, 1917. 6, 43면.
장안면 장안리에 734강습소「중앙총부휘보」, 『천도교회월보』68호, 1916. 3, 37-38면.
등 7개의 강습소를 운영하였다. 이러한 천도교의 조직은 훗날 수원지역 3․1운동의 기반이 되었다. 특히, 천도교는 일제의 강점이 시작된 1910년부터 독립운동을 준비하였다. 이를 위해 손병희는 지방의 중진 교역자를 중앙으로 불러 49일간 정신적 수양을 시키는 한편 민족의식을 함양시켰다. 수원지역에서는 이종석․鄭道永․金正淡․李圭植․李敏道․韓世敎․金興烈․金昌植 등이 참여하였다.「수원군종리원연혁」29면;조기주, 『동학의 원류』, 보성사, 1979, 369-373면.
이들은 3․1운동 당시 앞장서서 교인들을 지도하였다. 한편, 3․1운동이 일어나기 직전 중앙대교당 건축비를 명목으로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할 때 남양지역에서는 백낙렬을 비롯하여 솔선해서 자금을 갹출하였다. 김선진, 앞의 책, 68-69면.
이때 갹출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독립자금 갹출내역>
성 명
지 역
갹 출 내 역
비 고
백 낙 렬
수촌리
논 3,000평 밭 2,000평
백 낙 소
수촌리
논 1,500평 밭 1,000평
백낙렬의 동생
기 봉 규
사금말
논 3,000평 밭 7,000평, 가옥
김 흥 렬
고주리
논 3,000평 밭 3,000평
최 진 협
한각리
논 1,500평 밭 1,000평
최 진 승
한각리
논 1,000평 밭 6,500평
박 시 정
이화리
산 3,000평 소 1두
박 용 석
노진리
논 1,000평 밭 2,000평
박 운 선
노진리
논 1,000평 밭 2,000평
우 준 팔
거묵골
논 450평 밭 1,000평
우 의 현
거묵골
논 1,500평
문 경 화
거묵골
논 2,000평
우 경 팔
거묵골
논 1,500평
* 김선진, 『일제의 학살만행을 고발한다』, pp. 68-69.
한편, 우정면․장안면 지역의 기독교는 1900년경 인천으로부터 전파되었다. 남양출신으로 인천에 살던 洪承河가 고향에 기독교를 전파하였고, 그의 영향을 받은 동생 홍승문이 적극 포교하였다. 이리하여 1900년 말에 남양읍내 외에 향갈동과 포막동에 교회가 설립되었으며, 복정채, 「남양군에서 전도한 일」, 『신학월보』, 1901.1(이덕주, 앞의 책, 41면 재인용)
1902년에는 양철리․용머리․경다리․덕방리․영흥도․대부도․선감도 등 도서지역을 포함 9개의 교회로 남양계삭회가 조직되었다.『신학월보』, 1902.5, 231면.(이덕주, 앞의 책, 41면 재인용)
1902년 홍승하가 하와이 이민들을 위해 선교사로 떠난 후 하춘택․박세창․김우권․이창회․김광식․한창섭 등이 남양지역을 담당하였으며, 1914년부터는 金敎哲, 1918년부터는 董錫璣이 구역을 담당하였다. 이로써 초기 인천지방회에 속해 있던 남양구역은 1907년부터 수원지방회로 편입되었다. 3․1운동 당시에는 수원을 포함한 남양구역은 지방감리사에 노블, 수원읍교회는 任應淳, 오산구역은 金光植, 남양구역은 동석기가 각각 시무하였고, 김교철은 본처목회자로 수촌리에 머물면서 활동하였다. 이덕주, 앞의 책, 41면.
그리고 한말 군인출신으로 1907년 군대해산 때 충남에서 의병활동을 참가했던 경력이 있는 洪元植은 1914년 청북면 판교리에서 제암리로 이거한 후 제암교회 권사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는 제암리에서 書齋를 설립하고 계몽교육을 실시하면서 제암리교회 안종후, 고주리 천도교 전교사 金聖烈 등과 救國同志會라는 비밀조직을 결성하여 지속적인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독립유공자공훈록』제2권, 국가보훈처, 1986, 619면.
이상에서 살펴본 삼괴지역은 천도교와 기독교가 일찍이 전파되었으며, 천도교 지도자는 동학혁명과 비밀결사를 통해, 기독교 지도자들은 구국동지회 등 비밀결사를 조직하면서 항일의식과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이리하여 이들은 3․1운동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삼괴지역 만세운동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제3장 우정면과 장안면의 3․1운동 전개과정
우정면과 장안면의 3․1운동은 수원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수원의 3․1운동은 서울보다 보름정도 늦은 3월 중순부터 격렬하게 전개되어 4월 중순까지 이어졌다. 수원 3․1운동의 특성은 초기에는 천도교와 기독교가 중심이 되어 전개하였으나 점차 시간이 지남에 따라 천도교가 운동의 중심으로 자리를 잡았다. 조성운, 앞의 책, 194면.
즉, 초기에는 감리교 신자인 김세환이 경기 남부와 충청 일부를 책임지면서 운동을 독려하였다. 이와 동시에 천도교에서는 서울에서 李炳憲이 북수동 수원교구에 내려와 만세운동을 논의하면서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이병헌은 경기도 평택출신으로 1913년 수원교구장을 역임한 李敏道의 장남으로 수원교구에서 傳敎師․講道員․典制員․金融員 등을 역임하고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기 직전 손병희의 부름을 받고 보성전문학교에 입학한 후 3․1운동에 직접 참여하였다. 졸고, 「신앙보국의 화신 이병헌」, 『신인간』575호, 1998. 7, 81면.
이병헌은 2월 27일 보성사에서 독립선언서의 인쇄가 끝나자 申肅․印鍾益과 함께 李鍾一의 집으로 운반하였으며, 3월 1일 당일에는 손병희를 따라 민족대표 33인 모여 있던 태화관에서 李奎甲과 같이 탑골공원과의 연락책으로 활동하였고 남대문 만세시위를 주도한 바 있었다. 이병헌, 『3.1運動秘史』, 시사시보사출판국, 1959, 64-67면.
이로 인하여 이병헌은 종로경찰서로부터 검거령이 내렸으며 일단 이를 피해 수원교구로 내려왔다. 이병헌, 「水原事件」, 『新天地』통권2호, 1946. 3, 72면.
수원교구에 내려온 이병헌는 서울에서의 상황을 설명하고 수원에서도 교인을 모두 동원, 대대적인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3월 16일 시일날인 이날 聖化會를 마치고 시내의 만세시위에 참가하였으며, 늦은 밤 11시에는 수원교구에서 이병헌과 교구장 金仁泰, 理文員 安政玉, 典制員 金正淡, 講道員 羅天綱, 巡廻敎師 李星九․安鍾麟, 傳敎師 洪鍾珏․安鍾煥 등 주요교역자들이 모여 만세시위와 독립운동비 모금을 구체적인 계획을 마련하였다. 이병헌, 『3.1운동비사』, 868면.
그리고 이에 앞서 수원교구의 교인들은 천도교의 교조인 의암 손병희가 독립운동의 주모자로 일경에 피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로 올라가 구출하려는 비밀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 金正明, 『朝鮮獨立運動 Ⅰ-民族主義運動篇』, 原書房, 1967, 000면.
천도교 교구실에서 만세시위를 준비한다는 소식을 정탐한 일제측은 소방대와 일본인이 합세하여 소방용 갈고리와 괭이 등으로 교구 대문을 부수고 난입하여 회의중인 교인을 마구 구타하였다. 이 사건으로 金正淡․金正模․安鍾煥․安鍾麟․洪鍾珏․金相根․李炳憲 등이 중경상을 입었다. 이병헌, 『3.1운동비사』, 868면.
이중 안종환과 안종린은 후에 제암리에서도 만세시위를 주도하였을 뿐만 아니라 일제의 보복만행인 제암리학살사건으로 희생되었다.
수원 3․1운동의 영향을 받은 장안면과 우정면의 3․1운동은 천도교의 백낙렬․김흥렬, 기독교의 안종후 등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이들은 서울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서울로 올라와 직접 만세시위에 참가하고 귀향하여 만세운동을 준비하였다. 당시 순회교사인 백낙렬은 장안면 거묵골(篤亭里) 전교실의 李鍾根․禹英圭․禹鍾烈. 기림골(漁隱里) 전교실의 金顯祚․金益培, 장안리 전교실의 趙敎淳․金仁泰, 덕다리 전교실의 金昌植, 사기말 전교실의 金永甫, 고온리 전교실의 白樂溫, 덕목리 전교실의 韓世敎․朴龍錫․朴雲錫 등을 만나 만세운동을 전개할 것을 논의하였다. 그리고 이어 우정면 주곡리의 車喜植과 팔탄면 고주리의 金興烈과도 만나 만세시위 계획을 논의하였다. 김선진, 『일제의 학살만행을 고발한다』.
또한 백낙렬은 중앙총부의 이병헌과 연락을 취하면서 우정면과 장안면의 만세시위를 추진하였다.
이처럼 만세운동이 무르익어 갈 무렵 서울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던 이병헌이 일경을 피하여 3월 15일경 수원교구에 내려와 만세운동을 계획하자 안종환, 안종린은 수원교구로 가서 구체적인 의견을 교환하였다. 그러나 일본수비대의 피습으로 안종환, 안종린 등은 중경상을 입고 돌아와 김흥렬에게 ‘각 교구의 만세운동은 자체부담으로 계속 전개하라’는 중앙의 지시사항을 전달하였다. 이어 김흥렬은 다시 백낙렬에게 이를 다시 전달하였다. 하지만 초기 준비하였던 만세운동은 안종환과 안종린의 부상으로 자연 소강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수원교구로부터 메세지를 전달받은 백낙렬은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만세시위를 추진시키기로 결심하고 김흥렬을 팔탄면과 향남면을, 백낙렬 자신은 우정면과 장안면을 책임지기로 했다. 백낙렬과 김흥렬은 그 다음날부터 동분서주하면서 운동자금을 모금하는 한편 만세운동을 전개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와 때를 같이 하여 우정면과 장안면의 구장들도 3월 27일 구장회의를 개최하고 만세시위를 준비하였다. 이날 참석자는 수촌리의 백낙렬, 어은리의 李時雨, 독정리의 崔建煥, 장안리의 金俊植, 덕다리의 金大植, 사랑리의 禹始鉉, 사곡리의 金贊圭, 금의리의 李浩悳, 석포리의 車炳漢, 노진리의 金濟允의 아들 등 10명이었다.『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19, 국사편찬위원회, 1974, 348면.
이들은 차병한이 ‘지난 발안장 만세시위에서 일본인 아이가 게다로 구타하는 것을 보고 분개하여 만세를 부르자’고 발의하자『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19, 348면.
모두 찬성하고 시위를 준비하였다. 그리고 이와는 별도로 수촌리의 車漢傑과 李順模는 화수리주재소 순사보 吳麟永을 매수 등 치밀하게 준비하였다.『한국독립운동사자료집』19, 244면 및 341면.
이들은 3월 30일 오후 4시 쌍봉산 중턱에서 우정면 석천리 金在植, 매향리 栢南杓, 화산리 奇鳳奎, 조암리 金文明 장안면 장안리 崔成鶴, 독정리 禹暎圭, 수촌리 백남렬과 洪順根 등 10여명은 일본인 순사 살해반으로 차한걸․이순모․김재식․우영규, 주재소 및 면사무소 방화반으로 오인영․김문명․백남렬․최성학․홍순근․백남표․기봉규 등으로 각각 결정하고 그 실행방법을 논의했다.『한국민족운동사자료집』19, 245면. 그러나 343면에는 김재식이 金在肅, 백남열은 白樂烈로 증언하고 있다.
그리고 실행방법으로 첫째 독립만세로 시위군중을 선동하고, 둘째 이들로 하여금 주재소와 면사무소를 포위한 후 돌을 던지고 곤봉으로 문을 부수고, 셋째 방화반은 방화하고, 넷째 살해반은 일본인 순사를 타살하는 것으로 결정했다.『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19, 245면.
이와 같은 계획은 수원교구에서 부상당한 안종환과 안종린이 점차 회복되고 만세시위의 준비를 마친 우정면과 장안면 주민들은 4월 1일 저녁 9시경 장안면 수촌리 개죽산 봉화를 신호로 일제히 시작되었다. 개죽산의 봉화는 조암리의 쌍봉산, 팔탄면 고주리의 천덕산, 향남면 가재리의 당재봉, 장안면 석포리의 무봉산, 어은리의 남산, 우정면 덕둑리의 보금산, 장작터 봉화산, 운평리 성신재, 고온리 원원대에서 받아 높은 산마다 치솟아 올랐고 사방으로 번져 나갔다. 이어서 우정면과 장안면 일대는 만세소리도 뒤덮였다. 김선진, 앞의 책, 34-35면.
이처럼 봉화시위가 전개되자 발안주재소에 대기하고 있던 일본수비대는 총을 쏘면서 우선 고주리 천덕산으로 추격하였다. 고주리 주민들은 어둠을 이용하여 산을 내려왔으며『경기도항일독립운동사』, 경기도사편찬위원회, 1995, 300-301면.
봉화시위는 다음날 2일까지 지속되었다.『한국독립운동사자료집』19, 344면.
장안면의 만세시위는 4월 3일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수촌리의 백낙렬은 이날 새벽 5시 李鳳九․鄭淳榮․洪秀光 등과 같이 만세시위가 성공리에 전개될 것을 기원하였으며, 사환 李元俊과 함께 집집마다 돌면서 교인과 주민들을 동원하기 시작하였다.『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20, 국사편찬위원회, 1994, 4면 및 58면.
아침 9시가 되자 석포리 방면에서 많은 주민들이 몰려나오기 시작하였다. 수촌리 방면에서는 머리에 흰띠를 두루고 손에는 몽둥이를 들고 나왔다. 잠시 후 수촌리 전교실이 열리면서 이봉구는 쓴 ‘대한독립만세’, ‘수원군 장안면 수촌리’라고 쓴 커다란 깃발을, 홍수광과 차인범은 각각 태극기를 한아름 들고 나왔다. 이 태극기는 이봉구, 홍수광 등이 수촌리전교실에서 비밀리에 제작한 것이다. 태극기를 든 주민과 교인들은 백낙렬의 지시에 따라 수촌리를 한바퀴 돈 다음 독정리로 향하였다. 이때 독정리에서는 전교사 李鍾根과 禹鍾烈, 禹敬奎가 주민들과 함께 전교실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합류하였다. 또한 김창식은 덕다리 교인과 주민들을, 최건환 구장은 전주민을 동원하여 신촌으로 집결하였다. 이처럼 사방에서 모인 주민들은 신촌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어서 주민들은 어은리 기림골로 항하였다. 기림골에서는 金顯祚 남양교구장과 金益培 전교사가 주민들을 동원하여 전교실 앞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합류하자 순식간에 5백여명이 넘었다. 이때 백낙렬이 앞으로 나가 장안면사무소로 가자고 외치자 군중들은 만세를 삼창한 후 태극기를 앞세우고 장안면사무소로 향하였다. 면사무소에 이른 군중은 면사무소를 진입, 집기를 모두 부수고 서류를 밖으로 내던지고 파손하였다. 기세가 오른 군중은 도망하려다 붙잡힌 金顯黙 면장을 강압하여 만세를 부르게 한 후 앞장 세우고 쌍봉산으로 이동하였다. 이에 앞서 이봉구와 이순모에 의해 면사무소에 삽시간에 재로 변했다.
쌍봉산은 해발 117m로 심괴지역에 가장 높은 산으로 우정면과 장안면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었다. 산 정상에는 우정면 한각리와 이화리, 장안면 수촌리에서 가져온 대형 태극기가 바람에 휘날렸다. 이에 정상에서 내려온 군중들은 조암리 주민들과 합류하여 우정면 사무소로 향하였다. 우정면사무소에서는 장안면사무소의 습격 소식을 듣고 미리 피신하여 텅비어 있었다. 군중들은 장안면사무소와 마찬가지로 집기를 부수고 서류를 밖으로 끌어내어 불을 질렀다. 이날 모인 군중은 1천5백여명이 넘었다. 이어 군중들은 백낙렬과 정순영의 지시에 따라 김현묵 면장에게 태극기를 들게 하고 앞장세워 우정면장 최중환을 살해코자 하였으나 이미 피신하여 한각리로 향하였다.
일단 한각리에 모인 군중들은 소산에서 만세를 부른 후 주재소로 이동하였다. 주재소를 포위한 군중들은 세 방면으로 나누어 주재소를 공격하였다. 이때 주재소 안에 있던 가와바다(三端豊太郞) 순사부장과 순사들이 군중을 향하여 일제히 총격을 가하였다. 그러나 군중들은 투석전을 전개하면서 포위망을 점점 좁혔다. 이에 당황한 순사들은 총을 버리고 달아나다 이내 군중들에 붙잡혔다. 군중들은 순사들에게 만세를 부르게 하였다. 그러나 가와바다 순사부장은 여전히 문 뒤에서 총격을 가하였다. 이를 본 이봉구는 깃대를 들고 주재소를 향해 뛰어가다가 넘어졌다. 이를 본 김정식이 몽둥이를 휘두르면서 쫓아갔으나 가와바다의 총격으로 그 자리에 쓰러졌다. 그 뒤를 이어 이경백과 김현모가 주재소 안으로 뛰어들었으나 마찬가지로 희생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주재소 뒤쪽에 있던 장소진과 장제덕은 산에 쌓아 놓은 나무를 지고 주재소로 달려가 벽에 세워놓고 불을 붙였다. 주재소로 불이 옮겨 붙자 가와바다는 필사적으로 도망을 치면서도 따라오는 군중을 향해 계속 총격을 가하였다. 이에 흥분한 군중들은 돌을 던지면서 추격하였으며 앞서 추격하던 김익경이 가와바다를 잡아 내동이치자 군중들은 이를 기다렸다는 듯이 가와바다를 폭행하여 마침내 참살하였다. 일단 만세시위가 끝나자 군중들은 각기 부락으로 돌아갔는데 이날 시위로 2명이 죽고 3명이 부상당하였다.『독립운동사』2, 국사편찬위원회, 1983, 681-687면.
당시 주민들이 주재소와 면사무소를 습격한 것은 면사무소의 경우 세금을 많이 징수하고 조선민족을 괴롭혔기 때문이며, 주재소의 경우 일본인 순사가 조선인을 가혹하게 취급하였기 때문이었다.『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19, 245면.
이외에도 이날 참살당한 가와바다 순사가 부임 이후 도박에 대한 단속이 심하였기 때문에 주민들로부터 적지 않은 반감을 사기도 하였다.『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19, 342면.
한편, 우정면과 장안면과 인접한 향남면과 팔탄면의 만세시위는 3월 31일 장날을 이용하여 전개하였다. 이날 수천명의 장꾼과 군중은 만세를 부르며 시위운동을 전개하자 일경은 이를 제지하고 해산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만세를 부르던 군중들은 이를 듣지 않고 계속 시위를 하자 일경은 시위행렬을 향하여 발포하여 2,3명이 부상을 당하고 해산하였다. 이병헌, 『3.1운동비사』, 870면.
그리고 다음날인 4월 1일에는 발안장 주변 산에서 봉화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러나 본격적인 만세시위는 4월 5일 역시 발안장을 이용하여 전개되었다. 앞서 4월 3일 우정면과 장안면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한 바 있는 장안면 수촌리의 백낙렬은 향남면 제암리의 안정옥, 팔탄면 고주리의 김흥렬과 4월 5일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하는 한편, 팔탄면 가재리의 유학자 李正根에게도 계획을 알리고 함께 거사하기로 결의하였다. 4월 5일 장날이 되자 이미 계획한대로 이정근은 제자들을 곳곳에 배치하였으며, 고주리 주민들은 김흥렬과 김성렬의 주도 아래 만세 행렬을 이루면서 발안장으로 향하였다. 이때 수촌리의 이봉구도 합류하였다. 12시가 되자 이정근, 백낙렬, 안정옥, 김흥렬의 선창으로 군중들은 만세를 부른 후 발안주재소로 몰려가 돌을 던지기 시작하였다. 이때 사이다(佐板)가 배치한 순사들이 위협사격을 하였다. 이에 흥분한 군중들은 돌을 던지며 주재소로 다가가며 만세를 불렀다. 사이다는 군중이 가까이 오자 칼을 휘두르며 저항을 하였다. 이날 시위로 이정근, 김경태가 희생되었으며 이봉구․안진순․안봉순․홍원식․안중후․김정헌․강태성․김성렬 등이 수비대에 붙잡혀 주재소에서 고문을 당하였다.『수원시사』CD, 수원시사편찬위원회, 2000.
이날 고문으로 이봉구는 수원형무소에서 희생되었다.
제4장 만세시위에 대한 일제의 보복
이처럼 우정면과 장안면에서 만세시위가 점차 지속화․폭력화되자 일제는 보다 강력한 진압을 위해 일본군을 동원했다. 이미 3월 31일 발안장 시위가 있은 직후 경기도 장관과 수원군수에게 군대지원을 요청하였다. 특히, 일제는 가와바다 순사가 참살되는 격한 시위는 천도교가 주동하였다고 판단하고 천도교 전교실을 비롯하여 집집마다 수색하는 한편 방화를 하였다. 그리고 마침내는 제암리에서 37명이, 고주리에서 6명이 각각 희생되었다.
한편, 일제의 보복에 앞서 화수리주재소를 습격하는 등 만세시위를 주도한 백낙렬은 ‘곧 수비대가 오면 많은 주민들이 사살할 것으로 보고 저녁 식사 후 남산에 웅거하자’고 주장하였으며『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20, 국사편찬위원회, 1994, 78면.
이에 대해 군중들은 수비대가 와서 총을 쏘는 일이 있다면 산에서 봉화를 올리고 일제히 만세를 부르기로 하였다.『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20, 78면.
이에 따라 만세시위를 마친 군중들은 일단 해산하고 저녁 식사 후 만세시위에 사용하였던 몽둥이와 돌을 지니고 사랑리 남산으로 모여서 수비대와 결전에 대하여 논의하였다.『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19, 국사편찬위원회, 1994, 347면 및『한민족독립운동사자 료집』20, 80면.
그리고 화수리와 굴원리 주민들도 일제의 보복을 예견하고 원안리와 호곡리 방면으로 피신하였다. 김선진, 앞의 책, 47면.
4월 4일 새벽이 되자 화수리주재소 습격사건을 보고 받은 일본군은 제20사단 39여단 78연대 소속 아리다(有田) 중위가 이끄는 1개 소대를 파견하였다. 아리다는 발안에서 달려와 화수리를 완전히 포위하고 마구 총질을 하였다. 그러나 이미 주민들이 다른 곳으로 피신한 것을 안 아리다는 집집마다 방화하기 시작하였다. 날이 밝자 아리다는 원안리와 굴원리로 몰려가 송낙인 등 4명을 포박 주재소로 끌고 가 주민들의 행방을 알아내기 위해 몽둥이로 고문하였다. 이어 아리다는 수비대를 이끌고 호곡리와 원안리로 몰려가 만세시위의 주동자를 색출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이들은 잠시 후 주민 30여명을 포박하여 주재소로 끌고와 갖은 고문과 폭행을 자행하였다. 주민들은 고문에 성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으며 고문을 하다가 정신을 잃고 탈진하면 냇가에 내다버렸다. 김선진, 앞의 책, 48-55면.
이어 아리다는 사이다와 함께 다시 수비대를 이끌고 불에 타다 남은 화수리주재소 주변을 조사하였다. 주재소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소나무 숲에서 돌무덤을 발견하고 가와바다의 시체를 찾아낸 다음 사이다는 한각리로, 아리다는 화수리임시주재소로 돌아왔다.
이처럼 화수리부터 시작된 아리다의 일본군 보복만행은 수촌리․한각리․조암리․석포리․장안리․어은리․멱우리․사곡리․고온리․덕정리․독정리․사랑리․화산리․운평리․원안리․젱마리․고주리․이화리 등 우정면, 장안면, 팔탄면, 향남면 등 전체 마을에 걸쳐 자행되었으며, 이 만행으로 1백여채의 가옥방화와 20여명의 사상, 40여명의 투옥, 5백여명의 주민을 고문과 폭행을 당했다. 아리다와 일본군의 보복만행에 대한 상세한 것은 김선진의 『일제의 학살만행을 고발한다』를 참조.
본고에서는 이중 가장 처참한 보복을 당한 수촌리와 제암리, 고주리를 중점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일본군이 네 차례에 걸쳐 가장 혹독하게 보복을 가한 곳이 장안면 수촌리이다. 이것은 장안면과 우정면사무소, 화수리주재소 습격 때 ‘대한독립만세 수원군 장안면 수촌리’라 쓴 깃발을 들고 항상 앞장서서 만세시위를 주도했기 때문이다. 이 깃발은 李鳳九가 만들어 화수리주재소를 습격할 때 주재소로 달려가다가 넘어지는 바람에 버리고 나왔다. 이봉구는 천도교인으로 1909년 2월 중앙에서 師範講習所를 개설하자 孔炳台와 같이 입학 수료하였으며 1910년과 1916년에는 수원교구 교구장을 맡았다.「수원군종리원연혁」, 31면.
4월 4일 오전 사이다는 수비대와 함께 화수리주재소 현장을 조사하다가 이 깃발을 보고 수촌리 주민들이 선동하였을 것이라고 단정하였다. 이리하여 수촌리는 네 차례의 보복을 당하였다. 1차 보복은 4월 5일 시도되었다. 이날 오전 3시 반경 아리다는 수비대 30여명을 이끌고 수촌리 큰말을 완전히 포위하고 총을 마구 쏘아댔다. 뿐만 아니라 교회당과 집을 닥치는대로 방화하였으며 주민들은 마을 뒷산으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이날 보복으로 가옥 24채와 5명의 주민이 부상을 당했다. 김선진, 앞의 책, 66-68면.
2차 보복은 이날 오후 어은리를 거쳐 발안으로 나오던 수비대에 의해 자행되었다. 수비대는 수촌리에 다시 들려 불타고 남은 8채의 가옥을 샅샅이 수색하였다. 이때 이봉구가 화수리주재소 가와바다 순사를 참살할 때 피가 묻은 옷을 미처 처분하지 못하고 다락에 감추어 두었는데 이때 발견되었다. 그리고 오전 산으로 피신하였던 주민이 집으로 내려왔다가 검거되어 발안리주재소로 끌려갔다. 이들은 이곳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김선진, 앞의 책, 71-72면.
3차 보복은 이틀 후인 4월 7일 다시 자행되었다. 이날 일본 수비대는 수촌리 가장말을 비롯하여 꽃말, 용담굴을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주민들은 협박하여 모은 다음 발안리주재소로 끌고 갔다. 이들은 밧줄에 묶여 뭉둥이질을 당했으며 피투성이가 된 채 버려졌다. 이날 끌려온 주민들은 130여명에 달하였다. 김선진, 앞의 책, 72-76면.
그리고 4차 보복은 그 다음날인 4월 8일 전개되었다. 수비대는 수촌리로 몰려와 만세시위를 주도한 백날렬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주민들의 호응이 없자 수비대는 1차 보복 때 방화하고 남은 8채의 가옥 중 4채를 다시 방화하였다. 김선진, 앞의 책, 76-77면.
이와 같이 네 차례의 보복으로 수촌리는 42채의 가옥 중 38채가 방화되었으며 천도교전교실과 강습소, 이봉구․백낙렬의 가옥 등 모두 소각되었다.
한편, 삼괴지역의 우정면, 장안면사무소와 화수리주재소 습격사건에 이어 발안에서도 만세운동이 계속해서 전개되자 사이다는 4월 4일부터 4월 13일까지 모든 마을을 보복한 후 제암리에 보복의 손길이 뻗쳤다. 4월 15일 오후 2시 반경 사이다는 아리다를 앞세우고 제암리를 완전히 포위한 후 한사람도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였다. 이어 ‘사이다가 할 말이 있으므로 교회로 전원 다 모이라’고 시달하였다. 이에 주민들은 이때 金學敎의 집에 숨어 있던 이병헌에게 통역을 부탁하였으나 이병헌은 자신도 검거될 상황이라 하는 수 없이 거절하고 뒷산에 숨어서 동태를 파악하였다. 이병헌, 「수원사건」, 72면.
이에 주민들은 교회당으로 모였으며 수비대는 교회당 정문에서 총을 세워 놓고 사람 키를 비교한 다음 하나 둘씩 들여보낸 후 문을 닫아 버렸다. 그리고 곧바로 석유를 뿌린 후 방화를 하였다. 이병헌, 「수원사건」, 72면.
이중 洪淳鎭은 밖으로 나오다가 총에 희생되었고, 盧慶泰는 구사일생으로 탈출하여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김선진, 앞의 책, 144-147면.
. 이날 교회당에서 참살당한 주민들은 대부분 천도교와 기독교인으로 일반적으로 23명이라 하고 있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서는 좀더 고찰할 필요가 있을 것으로 사료된다. 이에 대해서는 별도로 논하고자 한다. 당시의 학살상황을 정한경은 「한국의 사정」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목요일인 4월 15일 낮 몇명의 군인들이 마을로 들어와 강연이 있을 터이니 모든 남자 기독교 신자와 천도교 교인들을 모두 교회로 집합하라고 알렸다. 29명의 남자들이 교회에 가서 안에 들어 앉아 무슨 일이 있을 것인가 하고 웅성거리고 있었다. 그들은 종이 창문 틈으로 군인들이 교회를 완전히 포위하고 불을 지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죽거나 심하게 다쳤을 때에도 일본군인들은 이미 불길에 싸인 교회 건물에 계속 불을 붙였다. 그 속에 있던 사람들은 탈출을 기도했지만 칼에 찔리거나 총에 맞아 죽었다. 교회 밖에는 이같이 탈출하려다 목숨을 잃은 6구의 시체가 흩어져 있었다. 남편이 교회에 불려 갔는데 총소리가 나자 놀란 두 명의 부녀자가 남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 아닌가 하고 달려와 군인들의 틈을 비집고 교회로 접근하러 하자 그들을 무참하게 죽여버렸다. 19세의 젊은 부인은 칼에 찔려 숨지고 40세를 넘는 다른 한 여자는 총살당했다. 그들은 모두 기독교 신자였다. 군인들은 그런 다음 온 마을에 불을 지르고 어디론지 사라져 버렸다. 정한경, 「한국의 사정」, 『한국독립운동사자료집』6,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3, 301면.
제암리 교회에서 주민들을 참살한 아리다는 곧바로 향남면 고주리로 향하였다. 고주리는 제암리에서 불과 10분 거리 밖에 안되는 가까운 마을이었다. 당시 고주리 주민들은 제암리의 참변을 보고 대부분이 산속으로 피신한 후였다. 그러나 발안장날 만세시위를 주도했던 김흥렬 일가는 ‘그놈들도 사람인데 죄없는 사람을 함부로 죽이지는 못하겠지’ 하는 생각으로 온가족이 피신하지 않고 그대로 집에 있었다. 수비대는 유일하게 남아 있던 김흥렬의 집으로 들이닥쳐 김흥렬을 비롯 집안에 있던 金聖烈․金世烈․金周業․金周南․金興福 등 일가족 6명을 포박하고 백낙렬의 행방을 추궁하였다. 김선진, 앞의 책, 148-152면.
김흥렬이 대답을 하지 않자 아리다는 김흥렬 가족을 짚단과 나무로 덮어 놓고 석유를 뿌린 후 생화장을 했다. 이병헌, 「수원사건」, 81면.
당시 상황을 이병헌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 隣洞(고죽골) 天道敎인 金興烈氏 집으로 가서 金聖烈, 金世烈, 金周男, 金周業, 金興福 等 六人을 逮捕하여 結縛하여 놓고 짚단과 나무로 덮어 놓고서 石油를 뿌리고 또 生火葬을 하였다. 이병헌, 「수원사건」, 『신천지』통권2호, 서울신문사, 1946.3, 81면.
제5장 제암리 학살사건에 대한 몇가지 문제점
그동안 제암리학살사건에 대한 희생자는 23명으로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이 23명의 숫자는 언제부터 고정화되었는지도 불분명하다. 아마도 이 숫자는 일제측의 기록을 그대로 원용하고 있다고 본다. 그런데 3․1운동 뿐만 아니라 일제와 관련된 사건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학계나 학자들은 축소하거나 왜곡하였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유일하게 제암리사건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실정이다. 일본측은 당시의 제암리사건을 다음과 같이 왜곡 축소하고 있다.
경찰이 기독교인과 천도교인을 마을 교회에 초대하여 호의적인 상담을 가지려고 하였던 바, 그들이 모였을 때 몽둥이와 지팡이 등으로 일본군인을 공격하였고, 이 혼란한 통에 램프가 엎드려져서 교회에 불이 붙고 이 불 때문에 많은 사람이 타죽고 어떤 사람은 탈출하려다 총에 맞아 죽었다.「주서울 미국총영사 보고」, 『한국기독교와 역사』제7호, 1997, 121면.
이러한 일제의 왜곡 축소된 제암리사건에 대한 진상은 기록마다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필자는 이에 대해 각종 사료를 조사한 결과 많은 의문점이 있다고 판단하고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하고자 한다. 따라서 제암리사건에 대한 접근할 수 있는 자료는 사건 담당자인 일본군측의 보고자료와 언더우드 언더우드는 선교사이며 1919년 4월 16일 제암리사건 이튿날 오후 제암리 현장을 방문한 최초의 외국인으로 이 사건을 외부에 알린 첫인물이다. 그의 증언은 미국 기독교연합회가 편찬한 『3.1독립운동진상보고』에 수록되어 있으며 국제 여론화에 중요한 소재로 활용되었다.
․테일러 테일러는 프리랜서 기자로 3.1운동 당시 <재팬 애드버타이저>의 한국 특파원 신분이었다. 1919년 4월 16일 제암리 현장을 취재한 기사가 <재팬 애더버타이저> 4월 29일에 보도됨으로써 일본에 사건 진상을 알렸다.
․스코필드 제암리사건과 관련하여 가장 주목할 선교사로써, 3.1운동이 일어나자 한국인을 돕기에 앞장서서 언론을 통해 일제의 비인도적 만행을 폭로하였다. 특히 1919년 4월 17일 제암리학살사건 소식을 듣고 18일 사건 현장을 찾아가 사진을 찍고 조사했으며 같은 날 수촌리를 방문하여 부상자를 돕는 한편 수촌리의 잔학행위에 관한 보고서를 남겼다. 이때 조사한 보고서는 1919년 7월 기독교연합회 동양관계위원회가 발행한 『한국의 상황』에 실려 있다.
․노블 노블은 제암리가 소속되어 있는 감리교 수원지방 감리사로 제암리사건에 대한 상황을 비교적 잘 기록하고 있다. 그의 기록은 1919년 11월 서울에서 열린 미감리회 조선연회에서 행한 ‘수원지방감리사보고’와 제암리교회에서 복구 작업에 참여했던 기록은 그와 동행한 아내의 일기에 있다.
․로이즈 로이즈는 3.1운동 당시 영국대리영사로 4월 19일 제암리를 방문하여 교회 안에 갇혀 있다가 탈출한 유일한 생존자 노씨를 만나 사건 경위를 청취하였다. 이 기록은 비망록 형식으로 영국 외문성 문서에 들어있다.
등 기독교 선교사들과 외국인이 현장 조사한 증언 및 보도내용, 그리고 희생자들의 증언을 통해 정리하고자 한다. 우선 일본측의 자료는 사건을 축소하거나 왜곡할 가능성이 적지 않으며, 외국인의 자료는 현지 주민을 통한 현장조사라고 하지만 통역과 기록과정에서 오류가 적지 않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전동례, 김순이 할머니의 경우 60여년이 지난 후에 이루어진 것이라 사건 당시의 상황에 대한 세밀한 부분까지 정확을 기할 수 없으리라는 점에서 사료적 한계가 있음을 먼저 밝혀둔다.
제암리사건의 희생자의 숫자는 해방 후 1959년 정부에서 건립한 순국기념비에 의하면 23명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이것이 통설로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사건 당시 희생자의 숫자는 기록마다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는데 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일본인들은 이런 방법으로 12명 정도의 기독교인과 25명 정도의 한국종교인(천도교인 25명)을 불러 모았다.「미국국회의사록(발췌)」, 『독립운동사자료집』4,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2, 309면.
② 살해당한 기독교인수는 12명인데 그들의 이름은 입수되었고, 그들에 더하여 여자가 있었는데 그들의 살해당한 남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보기 위해 왔었다. 한 여인은 40세가 넘었고 다른 한 여인은 10세였다. 이들 시체들은 교회 밖에서 불 수 있었다.「미국국회의사록(발췌)」, 『독립운동사자료집』4,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2, 310면.
③ 언더우드 : 교회 안에서 죽은 사람은 몇 명이나 되는가? 한국인 : 약 30명「한국의 정세(1)」, 『독립운동사자료집』4,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2, 406면.
④ 그가 설명한 사건 전말도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와 모든 면에서 부합했다. 그도 역시 몇명이 피살되었는지 몰랐으나 약 30명 정도로 보았다.「한국의 정세(1)」, 『독립운동사자료집』4,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2, 407면
⑤ 이 사건은 헌병과 군인이 이 마을에 들어가 명령을 내릴 것이 있다고 하면서 마을 남자들을 교회에 모이게 하여 저지를 것이다. 교회에 모인 사람들은 50여명 정도가 되었다.「한국의 정세(1)」, 『독립운동사자료집』4,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2, 409면.
⑥ 명령대로 교회에 모인 인원은 30여명이었다고 하는데 병정들은 모인 사람들에게 사격을 가한 후 교회에 들어가 아직 죽지 않은 자들을 군도와 총검으로 모두 해치웠다는 것이다.「한국의 정세(1)」, 『독립운동사자료집』4,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2, 413면.
⑦ 마을에서 약간 떨어진 집안에 있던 여인들에게 조심스럽게 물어본 결과, 살해된 기독교인은 12명이라 하며, (중략) 교회 안에서 살해된 나머지 남자들은 천도교인이며 25명이었다고 한다.「한국의 정세(1)」, 『독립운동사자료집』4,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2, 415면.
⑧ 약 30명이 교회 안으로 들어섰을 때 병사들이 소총으로 그들에게 사격을 개시했다.「한국의 진상(2)」, 『독립운동사자료집』4,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2, 625면.
⑨ 모든 기독교 신도와 천도교 교인들은 모두 교회에 집합하라고 알렸다. 29명의 남자들이 교회에 가서 안에 들어 앉아 무슨 일이 있을 것인가 하고 웅성거리고 있었다.「한국의 사정」, 『독립운동사자료집』6,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3, 301면
⑩ 30餘名의 敎人이 敎堂에 會集하여 何事가 有한가 疑惑하는 中 (중략) 堂內에서 死한 者 二十二人이요 庭內에서 死한 者 六人이라. 金秉祚, 『한국족립운동사략』, 宣民社(상해), 1920 ; 김형석, 『一齋 金秉祚의 民族運動』附 韓國獨立運動史(上),남강문화재단출판부, 1993, 274면.
⑪ 예수교도 및 천도교도 있음에 알고 4월 15일 부하 11명을 인솔 순사, 순사보와 함께 동지에 이르자 예수교 회당에 집합한 교도들의 반항을 받자 사격으로 대항 사자 20명, 부상자 1명을 내고「조선3.1독립소요사건」, 『독립운동사자료집』6,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3, 930면.
⑫ 군대 협력으로 진압하고 폭민의 사망 32명, 부상자 약간명 金正明, 『朝鮮獨立運動Ⅰ-民族主義運動篇』, 原書房, 소화 42년, 606면.
⑬ 사상자 20명 확실, 부상자 1명은 도주 행위불명 金正明, 『朝鮮獨立運動Ⅰ-民族主義運動篇』, 原書房, 소화 42년, 631면.
⑭ 야소교회당에 교도 30여명 집합, 불온한 상태로 해산명령에 불응하며 폭거로 나오려고 하자 발포, 死者 約 20명, 負傷者 1, 2명 金正明, 『朝鮮獨立運動Ⅰ-民族主義運動篇』, 原書房, 소화 42년, 627면.
⑮ 천도교도와 야소교도 25여명이 야소교회당에 집합, 전부 사살『不逞團關係雜件 朝鮮人의 部 在內地』,일본외무성, 1919(국사편찬위원회)
앞서 살펴보았듯이 제암리사건의 희생자는 기록자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이 기록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하나는 외국인이 현장을 취재하고 보도한 것으로 ①부터 ⑨까지이며, 다른 하나는 일본측의 기록으로 ⑪에서 ⑮까지이다. 이 두 종류의 기록에서 외국인의 기록에는 희생자의 수가 대체로 30명으로 표기하고 있으며, 일제측의 기록은 20여 또는 25명 정도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희생자 숫자의 차이는 일제측이 고의로 희생자의 숫자를 줄이려고 하는 의도가 분명하게 엿보이고 있다. 또 하나 유의해야 할 점은 외국인의 취재기록중 증언관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외국인의 취재는 현장중심이지만 증언한 사람 역시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하나는 제암리 주민이고, 다른 하나는 제암리 인근 마을 주민이다. 이것은 취재자료의 정확성을 확인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앞서 본 자료중 ①, ②, ⑦은 제암리 주민이 현장 또는 주변에서 본 상황을 증언한 것이며 ③, ④, ⑤, ⑥은 제암리 인근마을 주민의 증언으로 이는 제암리사건을 주변으로부터 듣고 전언한 것이다. 이 전언한 것은 현장 또는 주변에서 본 상황보다 부정확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제암리사건의 희생자의 수는 37명이 가장 정확하다고 판단된다. 그리고 이 37명의 희생자는 기독교인이 12명, 천도교인이 25명이라 할 수 있다. 이를 뒷받침하는 자료가 주서울 미총영사 앨런 홀쯔버그가 4월 23일과 5월 12일 미국무장관에게 두차례 보고한 것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달 16일에 일본군 78연대 사병들이 제암리에 들어가 남자 기독교들을 모두 마을 교회에 모이도록 명령하였습니다. 그 마을 교회는 감리교의 교회였습니다. 커티스 영사는 보고에서 ‘남자 기독교인들이 모두 교회에 모이자 일본군은 그들에게 일제히 사격을 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일본군은 사격을 가한 후에 총검과 군도로 생존자를 죽였습니다. 질문을 받은 마을사람들은 희생자가 약 30명에 이를 것이라고 말한 바, 이 숫자는 마을주민 숫자를 감안할 때 설득력 있는 숫자라고 믿어집니다. 학살이 끝난 후 교회에 방화하였으며, 불길은 마을의 낮은 곳으로 번져 나갔습니다’라고 쓰고 있습니다. 그 후에 입수한 소식에 따르면 모두 37명이 교회 안에서 학살된 바 그 가운데 2명은 남자를 쫓다 들어간 부인들이었다고 합니다.「주서울 미총영사 앨런 홀쯔버그의 보고」(4월 23일자), 『한국기독교와 역사』제7집, 1997, 122면.
저의 1919년 4월 23일자 보고서 제35호에서 보고드린 바와 같이 저는 여기 총영사관의 커티스 영사를 제암리에 출장시켜 일본군이 촌락을 불태웠고 30명을 학살하였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다음에 들어온 소식에 따라 일본군은 기독교인과 천도교인을 마을 교회에 모이도록 하여 교회 내에서 35명을 학살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35명 가운데 기독교인은 10명이며 천도교인은 25명이었습니다. 이밖에도 교회 안에 갇힌 남편을 구하려던 부인 2명이 노상에서 사살되었습니다. ....(중략).... 총독부는 공식사과의 표시로 매우 소규모의 구제대책을 세우고 있으며, 노블 박사에게 35명의 마을사람들이 계획적으로 살해된 감리교회 재건에 쓰라고 1,500엔(750달러)을 주었습니다.
커티스 영사가 직접 제암리를 찾아가 진상을 밝히기 전까지는 일본측이 내세운 37명의 학살과 마을을 파괴하게 된 구실을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경찰이 기독교인과 천도교인을 마을 교회에 초대하여 호의적인 상담을 가지려고 하였던 바, 그들이 모였을 때 몽둥이와 지팡이 등으로 일본군인을 공격하였고, 이 혼란한 통에 램프가 엎드려져서 교회에 불이 붙고 이 불 때문에 많은 사람이 타죽고 어떤 사람은 탈출하려다 총에 맞아 죽었다.「주서울 미국 총영사 보고」(5월 12일자), 앞의 책, 119-121면.
이 두 보고서는 매우 중요한 점을 시사하고 있다. 처음 4월 23일 보고한 내용에 의하면 초기에는 희생자가 30명으로 알았으나 그후 입수된 소식에 의하면 희생자가 37명으로 확인하고 있다. 그리고 이어 재차 보고한 5월 12일자에서도 역시 희생자는 37명으로 기독교 12명, 천도교 25명으로 확신하게 보고하고 있다. 그리고 일제측인 총독부도 희생자가 37명임을 스스로 밝히고 있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제암리에서 희생된 사람은 23명이 아니라 37명임을 확인할 수 있다.
다음으로 희생자의 명단에 관하여 살펴보자. 앞서 살펴보았듯이 희생자는 37명이나 현재 확인되고 있는 명단은 이보다 훨씬 적은 23명에 불과하다. 이러한 점은 앞으로 좀더 밝혀내야 할 것으로 보인다. 희생자의 명단을 최초로 확인된 것은 제암리사건을 현장에서 직접 목격한 이병헌의 기록이다. 이병헌은 제암리사건이 일어난 지 7년이 지난 1926년 11월에 발행된『天道敎會月報』에 실린 「水原郡宗理院沿革」에서 천도교측 희생자 17명의 명단을 확인하고 있다.
仝年(1919년:필자) 四月 十五日에 本區 管內 鄕南面 堤岩里 傳敎師 安鍾煥 外 金興烈, 金基勳, 金基榮, 安慶淳, 金聖烈, 洪淳鎭, 安鍾麟, 金基世, 安應淳, 安相容, 安政玉, 安鍾亨, 安鍾嬅, 金世烈, 安子淳, 安好淳 諸氏는 그곳 卽 耶蘇敎堂에서 無故히 敎의 嫌疑로 燒殺을 當하고 곳곳마다 甚한 苦楚에 잇섯다. 이병헌, 「수원군종리원연혁」, 30면.
이들 가운데 김흥렬․김성렬․김세열 등 김씨 3인은 고주리에서 희생된 천도교인으로 이들을 제외하면 14명의 천도교인 제암리에서 희생된 사람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11명의 희생자 명단을 확인할 수 없다. 그리고 기독교인의 경우 사건 직후 현장을 방문한 선교사들에 의해 희생자 12명의 명단을 확인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그 내용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한국의 정세(1)」, 『독립운동사자료집』4,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2, 415면.
이와 같은 초기의 제암리사건 희생자 명단은 해방 후 1946년 이병헌의 「수원사건」과 <조선일보>의 「記憶 새로운 己未鬪爭」에 의해 새롭게 밝혀지고 있는데 다음과 같다.
▲天道敎人-安政玉 安鍾麟 安慶淳 安應淳 安鍾煥 安鍾燁 安命淳 安官淳 趙敬七 洪淳鎭 金德用 金敎學 金世基 ▲基督敎人-安鍾樂 安鍾厚 安珍淳 安鳳淳 安相容 安有淳 姜泰成 金正憲 洪元植『조선일보』, 1946년 2월 26일자.
▲天道敎人-安政玉 安鍾麟 安慶淳 安興淳 安鍾煥 安鍾燁 安命淳 安官淳 趙敬七 洪淳益 金德用 金學敎 金世基 ▲基督敎人-安鍾樂 安鍾厚 安珍淳 安鳳淳 安泰淳 安相容 安有淳 姜泰成 金正憲 洪元植 金氏(姜泰成氏婦人) 金氏(洪元植氏婦人) 이병헌, 「수원사건」, 81면.
그리고 1959년 정부에서 순국기념비를 세우면서부터 희생자의 확인된 명단은 23명으로 다음과 같다.
安鍾煥 安慶淳 洪淳鎭 安鍾麟 安政玉 安鍾燁 安鍾樂 安鍾厚 安珍淳 安鳳淳 安相容 安有淳 姜泰成 金正憲 洪元植 金德用 趙敬七 安命淳 安官淳 姜泰成婦人 洪元植婦人 安武淳 安弼淳
이상의 세 기록에서 중요한 변수는 우선 희생자의 수와 명단이 일치하지 않고 있다. 이병헌의 「수원사건」에는 25명, 〈조선일보〉에는 22명, 순국기념비에는 23명을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조선일보의 경우 강태성 부인과 홍원식 부인을 포함하면 24명이 되는데 이 세 기록도 희생자의 수와 명단이 일치하기 않고 있다. 그러면 앞서 살펴본「수원군종리원연혁」의 명단을 포함하여 네 기록에 거명된 희생자 명단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위의 표에서 보듯이 희생자의 명단은 기록자마다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병헌의 경우도 1926년의 기록과 1946년의 기록도 다르게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오차는 당시의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고 다만 관계된 사람의 증언이나 전언을 통해 기록하고 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1926년의「수원군종리원연혁」과 1949년의 <조선일보>와 「수원사건」의 기록을 먼저 살펴보면 첫째 세 번 모두 기록된 희생자는 6명으로 안종환․안경순․홍순진․김기세․안정옥․안종환이며, 두번 기록된 희생자는 17명으로 안종린․안경순․안종락․안진순․안종후․안봉순․안상용․안유순․강태성․김정헌․홍원식․안흥순․김덕용․조경칠․김교학․안명순․안관순 등이다. 그리고 한번만 기록된 희생자는 9명으로 김기훈․김기영․안종형․안자순․안종진․안호순․강태성부인․홍원식부인․안태순 등으로, 이들은 희생자는 모두 32명에 이른다.
한편, 1959년 4월 순국기념탑이 건립되면서 명단에 오른 희생자는 23명인데 이들은 앞서 보았듯이 안종환․안경순․홍순진․안종린․안정옥․안종엽․안종락․안종후․안진순․안봉순․안상용․안유순․강태성․김정헌․홍원식․김덕용․조경칠․안명순․안관순․강태성부인․홍원식부인․안무순․안필순 등으로 현재 공식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이중 1946년 이전에 확인된 희생자의 명단에서 누락된 희생자는 김기훈․김기영․김기세․안응순․안종형․안호순․안자순․김교학․안종진․안필순․안태진 등으로 11명에 해당한다. 여기서 순국기념탑에 오른 23명과 오르지 않은 11명을 모두 합치면 34명에 이른다. 따라서 제암리사건에서 희생된 사람은 앞서 살펴보았듯이 37명이라면 일단 희생자 명단에 오른 34명을 모두 포함한다 하더라도 3명의 희생자를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앞으로도 더 조사할 필요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끝으로 희생자에 대한 종교적 분석이다. 이 역시 기록마다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필자의 의견으로는 기독교인 12명과 천도교인 25명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확인되고 있는 것은 34명의 희생자만 가능하다. 본고에서 논하고자 하는 것은 우선 1959년 건립된 순국기념탑에 기록된 23명을 기준으로 논하고자 한다. 이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기 때문이다. 앞의 표에서 본 바와 같이 이를 분석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천도교인의 희생자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수원군종리원연혁-安鍾煥, 金基勳, 金基榮, 安慶淳, 洪淳鎭, 安鍾麟, 金基世, 安興淳, 安相容, 安政玉, 安鍾亨, 安鍾嬅, 安子淳, 安好淳
▲조선일보-安政玉, 安鍾麟, 安慶淳, 安興淳, 安鍾煥, 安鍾燁, 安命淳, 安官淳, 趙敬七, 洪淳益, 金德用, 金學敎, 金世基
▲수원사건-安政玉, 安鍾麟, 安慶淳, 安興淳, 安鍾煥, 安鍾燁, 安命淳, 安官淳, 趙敬七, 洪淳鎭, 金德用, 金敎學, 金世基
▲일제의 학살만행을 고발한다-安鍾煥, 安慶淳, 洪淳鎭, 安鍾麟, 安政玉, 安鍾燁, 安鳳淳, 安相容, 安有淳, 金正憲, 金德用, 安命淳, 安官淳, 安武淳, 아기
▲3.1운동과 제암리사건-安鍾煥, 安慶淳, 洪淳鎭, 安鍾麟, 安政玉, 安相容, 安官淳
천도교인의 경우 「수원군종리원연혁」은 14명, 〈조선일보>는 14명, 「수원사건」은 13명, 『일제의 학살』은 15명, 「3.1운동과 제암리사건」은 7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기독교인의 희생자는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조선일보-安鍾樂 安鍾厚 安珍淳 安鳳淳 安相容 安有淳 姜泰成 金正憲 洪元植
▲수원사건-安鍾樂 安鍾厚 安珍淳 安鳳淳 安泰淳 安相容 安有淳 姜泰成 金正憲 洪元植 金氏(姜泰成氏婦人) 金氏(洪元植氏婦人)
▲일제의 학살만행을 고발한다-安鍾樂, 安鍾厚, 姜泰成, 洪元植, 趙敬七, 강태성부인, 홍원식부인, 安弼淳
▲3.1운동과 제암리사건-安鍾厚, 安珍淳, 安鳳淳, 姜泰成, 金正憲, 洪元植, 金德用, 趙敬七, 강태성부인, 홍원식부인
기독교인의 경우 <조선일보>는 9명, 「수원사건」은 12명, 『일제의 학살』은 8명, 「3.1운동과 제암리사건」은 10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제암리사건에서 희생자의 종교상황 역시 기록마다 다양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당시 직접 기록한 것이 아니라 전언이거나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기록되었기 때문에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이중 문제가 되는 경우는 다음과 같다.
첫째, 천도교인이 기독교인으로 된 경우-안상용, 김덕용, 조경칠 등이 있다. 안상용은 <조선일보>와 「수원사건」에서는 천도교인으로, 「제암리사건」과 『일제의 학살』에서는 기독교인으로 분류하고 있다. 안상용은 안경순의 아들로 안경순은 천도교인으로 마땅히 천도교인으로 분류해야 할 것이다. 김덕용은 <조선일보>, 「수원사건」, 『일제의 학살』에서는 천도교인으로, 「제암리사건」에서는 기독교인으로 분류하고 있다. 김덕용은 해방 직후 기록한 <조선일보>와 「수원사건」에 다 신빙성을 둔다면 이 역시 천도교인으로 분류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본다. 조경칠은 해방 직후 기록한 <조선일보>와 「수원사건」에서는 천도교인으로, 1980년대와 1990년대 기록한 「제암리사건」과 『일제의 학살』에서는 기독교인으로 분류하고 있다. 이 역시 해방 직후 증언을 통해 확인한 기록이 더 정확하다고 보고 천도교인으로 분류하는 것이 더 타당성이 있다고 사료된다.
둘째, 희생자 확인만 되고 종교상황이 확인되지 않는 경우이다. 이에 해당하는 희생자는 안종엽, 안종락, 안유순, 안명순, 안무순, 안필순 등이다. 먼저 안종엽은 안정옥의 아들로 1914년 수원교구 교당 건축시에 2원을 기부한 사실「중앙총부휘보」, 『천도교회월보』64호, 37-38면.
로 보아 안정엽은 천도교인으로 분류할 수 있으며, 안무순은 안종린의 아들, 안명순은 안종엽의 아들로 이들은 모두 부친이 천도교인으로 이들 또한 천도교인으로 분류할 수 있다. 안종락은 수원교구 강도원과 공선원으로 활동한 안정옥「중앙총부휘보」, 『천도교회월보』39호 33면 및 「중앙총부휘보」, 『천도교회월보』103호, 53면.
의 조카로 종교는 천도교인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안유순은 안봉순의 아들로, 안봉순은 기독교인임으로 기독교인으로 분류할 수 있다. 안필순은 『일제의 학살』에서 기독교인으로 분류하고 있는데 이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타당할 것으로 본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천도교인이 기독교인으로 분류되거나 종교상황이 확인되지 않는 경우에서 이를 좀더 세분하면 안상용, 김덕용, 조경칠, 안종엽, 안명순, 안무순, 안종락은 천도교인으로, 안유순과 안필순은 기독교인으로 분류할 수 있다.
따라서 필자의 논고에서 비록 37명의 희생자 명단은 확인할 수 없었지만 논고에서 확인된 34명의 희생자의 명단과 종교분포 상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천도교인-安鍾煥, 金基勳, 金基榮, 安慶淳, 洪淳鎭, 安鍾麟, 安應淳, 金基世, 安興淳, 安相容, 安政玉, 安鍾亨, 安鍾燁, 安子淳, 安好淳, 안종락, 김덕용, 김학교, 조경칠, 안종진, 안명순, 안무순, 안관순(이상 23명)
▲기독교인-安鍾厚 安珍淳 安鳳淳 安泰淳 安有淳 姜泰成 金正憲 洪元植 安弼淳, 金氏(姜泰成氏婦人) 金氏(洪元植氏婦人)(이상 11명)
제6장 맺음말
이상으로 본고에서는 우정면과 장안면을 중심으로 향남면과 팔탄면의 3․1운동의 사회적 배경과 만세시위 전개과정, 그리고 일제의 보복만행과 제암리학살사건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이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면서 결론을 맺고자 한다.
첫째, 우정면과 장안면의 3․1만세운동은 대체로 종교단체의 활동이 다른 지역보다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점은 3․1운동의 핵심적 세력이 천도교와 기독교의 종교단체에서 추진되었기 때문으로 풀이되지만 우정면과 장안면의 지역적 특성도 적지 않다고 본다. 천도교의 경우 1860년 4월 5일 동학이 창도된 이후 1861년에 이미 경기도 남부지역에 포교가 되었으며, 1880년대에는 수원지역에 포교될 정도로 널리 알려졌다. 이러한 동학은 1894년 동학혁명의 기본 조직으로 활동하였으며 1905년 동학이 천도교로 이름을 재정립한 후에는 근대적 조직인 교구로 전환 교육운동을 비롯하여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동학혁명과 개화운동을 거치면서 종교활동과 민족운동의 주체로 성장하였다. 특히, 우정면과 장안면의 천도교 지도자인 백낙렬과 김흥렬은 반일외세의 동학혁명에 참여한 바 있으며, 3․1운동 민족대표 손병희의 지도를 받으면서 항일민족의식을 배양하였을 뿐만 아니라 3․1운동이 일어나자 앞장서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리고 기독교의 경우도 이미 1900년대 초에 우정면과 장안면에 전래되어 애국계몽운동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한편 구국동지회라는 비밀조직을 결성 항일운동을 이끌었다. 이러한 천도교의 반외세의 민족주의와 기독교의 애국계몽운동을 통한 민족의식의 고취는 우정면과 장안면의 3․1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는데 그 기초적 바탕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둘째, 우정면과 장안면의 3․1만세운동은 전주민이 참여하는 계획적이고 민중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천도교인과 기독교인의 서울과 수원에서 3․1만세시위가 일어나자 즉시 이에 호응하였다. 특히 서울에서 만세시위를 목격한 백낙렬, 김흥렬, 안종후는 고향으로 돌아와 전주민이 참여하는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하고, 이를 위해 구장회의와 면사무소와 주재소 방화반, 순사 살해반을 편성하는 등 매우 주도면밀하게 계획하였으며, 그리고 전주민을 동원하였으며 단순히 만세시위로 그치지 않고 주재소와 면사무소 방화, 순사 살해 등 적극적이고 공세적인 만세시위로 발전하였다. 또한 면단위 만세운동에서 1천명 또는 2천명의 참여는 적지 않은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셋째, 우정면과 장안면의 만세운동에 대한 일제의 보복은 비인도적인 탄압의 만행의 탄압과 축소 왜곡으로 이어지고 있다. 우정면과 장안면에서 만세시위가 점차 지속화 폭력화되자 일제는 보다 강력한 진압을 위해 일본군을 동원했다. 이미 3월 31일 발안장 시위가 있은 직후 경기도 장관과 수원군수에게 군대지원을 요청하였다. 특히 일제는 가와바다 순사가 참살되는 격한 시위는 천도교가 주동하였다고 판단하고 천도교 전교실을 비롯하여 집집마다 수색하는 한편 방화를 하였다. 그리고 마침내는 제암리에서 37명이, 고주리에서 6명이 각각 학살하였다.
뿐만 아니라 일제는 보복만행에만 그치지 않고 이를 축소 왜곡하는 등 사실 자체를 은폐하고자 하였다. 다행이 스코필드와 노블 등 외국인 선교사와 커티스 미영사의 노력으로 밝혀졌지만 일제는 여전히 경찰이 기독교인과 천도교인을 마을 교회에 초대하여 호의적인 상담을 가지려고 하였던 바, 그들이 모였을 때 몽둥이와 지팡이 등으로 일본군인을 공격하였고, 이 혼란한 통에 램프가 엎드려져서 교회에 불이 붙고 이 불 때문에 많은 사람이 타죽고 어떤 사람은 탈출하려다 총에 맞아 죽었다고 왜곡하고 있다. 이러한 축소 왜곡은 현재의 제암리순국기념관에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일본측 그것도 기독교의 일부이지만 제암리학살사건을 그들은 여전히 ‘제암리燒打事件’으로 축소하고 있다.
넷째, 제암리사건의 희생자는 그동안 알려진 것처럼 23명이 아니라 37명으로 바로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제암리사건의 희생자 수는 1959년 4월 순국기념탑이 건립되면서 23명이 희생된 것으로 공식화되고 있다. 그러나 제암리사건에서 희생된 사람은 이보다 훨씬 많은 37명으로 보아야 한다. 당시 사건을 목격하고 증언한 기록은 희생자의 수를 37명으로 확인하고 있다. 그리고 주서울 미총영사 홀쯔버그의 두 보고서는 매우 중요한 점을 시사하고 잇다. 처음 4월 23일 보고한 내용과 이어 다시 보고한 5월 12일자에서도 역시 희생자는 37명으로 기독교 12명, 천도교 25명으로 확인하고 있다. 또한 일제측인 총독부도 희생자가 37명임을 스스로 밝히고 있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보아 제암리에서 희생된 사람은 23명이 아니라 37명임을 확인할 수 있다. 다만 이러한 사실은 해방 이후 순국기념관이 건립되면서 23명으로 축소되었다. 이와 같은 23명의 희생자수는 일제의 축소 보고한 기록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과정에서 많은 의문점이 없지 않지만 새롭게 조명되어야 한다. 당시 제암리 마을의 증언자들도 하나같이 천도교인 25명, 기독교인 12명으로 37명이 희생되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또한 희생자 중 초기에 기록된 사람이 누락되는가 하면 초기에 없던 사람이 나중에 포함되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앞으로 본고를 계기로 하여 제암리사건에 대한 사건 경위를 비롯하여 희생자 수, 명단, 종교상황 등을 구체적으로 조명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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