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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소설 / 기무 부대와 여자 이야기
난 가톨릭 신자다. 영세(領洗)한 지 만 14년이다. 그래서인지 항상 죄 의식에 사로잡혀 산다. 가톨릭 신자라서 당연한 ‘습관’이다. 하기야 참 많이도 죄를 지었다.
나는 평화방송 즉 PBC를 자주 시청한다. 그 방송국에서 가끔씩 내보내는 영화, 거기에 심취하기도 한다.
어떤 영화 한 편. 어느 병든 아버지가 신부 아들을 두고 멀리 떠나게 된다. 아버지는 평소 난봉꾼이었던 모양이다. 여자관계가 복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뭐 그 정도로 해 두자. 그 아버지를 보내는 신부의 마음은 아프다. 하지만 아버지는 더 하겠지. 아들은 아버지의 손을 잡고 말한다.
“아버지, 그냥 가시면 어떡해요? 지난번 엄마 몰래 다른 여자와 잠자리를 같이하신 적이 있었음을 소자는 기억합니다. 고해성사를 보셔야지요.”
세상사, 다 남녀 사이가 주제요 내용이다. 그 저변에 성(性)이 깔려 있어, 흠칫 놀라게 된다. 아무리 하느님이 개입하셨다 해도, 아버지를 그런 식으로 윽박지르는 것은 불효이기 때문이다. 신부도 사람이다. 자기의 신분만 감안하여, 아버지께 강요를 함으로써 결국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게 했다 치자. 그것도 씻을 수 없는 죄다.
내가 그만큼 고루하다는 증거일까? 이 세상에서 나 같은 불효자가 없음을 자인하면서도 이렇게 함부로 입을 놀리는 내가 밉상이고말고. 난 근래 청천벽력 같은 소릴 들었다. 내가 복무했었던 8171부대(사단)가 없어진다는 것이다.
대여섯 달 전, 신병 교육대에서 열린 사단 주임원사 임무 교대식에 초청을 받아 나는 거기 참석했다. 사단장에게 다짜고짜 내가 물었다.
“사단장님, 정말 우리 사단이 없어진단 말입니까?”
“항간에 떠도는 소문과는 달리 근래 결정된 사항이 아닙니다. 국방 개혁, 이게 핵심입니다. 국민들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부대 통합입니다.”
“어느 부대와 통합하는 겁니까?”
“밝히면 안 됩니다. 제가 사단장인데 함부로 입을 열면 안 되겠지요.”
“그럼 우리 모부대는 어디가 되는 거지요? 어머니 모(母)를 부대 앞에 붙이 면 ‘모부대’가 되는 줄은 사단장님도 아시겠지요. 물론 장교들은 수십 년 군에 몸을 담으니까, 근무지도 모부대 개념이 약하지만…. 저는 모부대를 진짜 어머니처럼 여깁니다. 다수 병사들도 그러하지요.”
“선배님, 감사합니다. 기어이 알고 싶다면 밝히지요. 대상 사단은 8사단입니다.”
나는 사단장에게 다시 악수를 청했다. 그리고 감사하다는 뜻으로 약간 고개를 숙이고, 왼 손바닥으로 그의 오른 손등을 토닥거렸다.
귀가하려면 지하철을 이용해야 한다. 나는 서울역에서 환승하기로 작정하고 양주 역에서 1호선을 탔다.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겨 있다가 도봉산역까지 오게 되었다.
한데 엉뚱한 생각이 드는 게 아닌가? 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돌아가자, 의정부역으로…. 나는 주섬주섬 짐을 챙겨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정부는 정말 잊을 수 없는 곳이다. 나는 역전에서 택시를 집어타고 기사에게 주문하였다. 행여 의성 극장을 알면 그리로 가자고. 기사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더니, 그런 극장은 지금 없다고 했다. 자기가 의정부 토박이인데, 나이 쉰이 넘어도 처음 듣는 곳이라고 했다.
나는 헛수고일 줄 지레짐작을 하면서도, 그에게 간청하다시피 했다. 의성 극장이라고 내비게이션에 두드려 보라고 연거푸 말을 건넨 것이다. 그는 시무룩한 표정을 짓더니 대충대충 시늉을 하면서 말을 걸어 왔다.
“할아버지, 무슨 사연이 있습니까?”
“이건 부끄러운 얘긴데, 반세기 전에 내가 자주 들르던, ‘유곽(遊廓)’이 그 극장 앞에 있었습니다. 기사 양반이 이상하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내게는 그리운 곳이지요.”
“아니 유곽이라 하셨습니까? 거기가 무엇 하는 곳입니까?”
“이런 말 전하기기 쑥스럽소. 사창가(私娼街)….난 소설가가 돼서 직업의식이 발동하는구려. 미안하오. 기사 양반이 모른다니 포기해야지. 그만 내려 주세요.”
거리로 나와 이경진 직전 사단 주임원사에게 전화를 넣었다. 두 시간 전에 헤어졌던, 의형제 사이다. 대놓고 형님과 아우라는 호칭이 오간다는 말이다. 물론 내가 모부대에 출입하면서 맺은 인연이고.
그도 모르겠다고 했다. 그런 극장 이름 처음 듣는다고 하면서, 형님이 팔순 가까운 노병으로서 '낮거리'를 하시겠느냐고 호탕하게 웃었다. 난 씁쓰레한 표정을 지을밖에.
경로석에 앉아 지그시 눈을 감고 회억에 잠겼다. 삼랑진 ‧ 감물리 ‧ 초등학교 ‧ 기무대(방첩대/보안대) ‧ 엄마 ‧ 아버지 ‧ 부관부 ‧ 전우 ‧ 제대 등등에 휘감긴 옛 이야기를 뒤죽박죽 섞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그날의 편린들을 여기 묶어낸다.
내 고향은 밀양시 단장면 국전리 진주동, 일본인들이 버리고 간 폐광이 동네 가까이 있어서 흉물스러워도 그것 빼고는 나무랄 데 없는 아름다운 고장.
아버지는 군내에서 명창으로 소문나 있었디/ 6척 장신에다가 탄탄한 몸으로 무장까지 하신 데다가 인물이 워낙 좋으셨다. 게다가 타고난 목소리가 앞산뒷산을 흔들 정도여서 아무 누구도 감히 멈접을 못하였다. 그 중에서도 당신이 상여 앞에서 부르는 앞소리에 정작 상두꾼부터 먼저 울었다. 다시 한 번 당신의 그 노래를 들어 보자.
나는 간다 떠나간다/ 만당 같은 집을 두고/ 부모처자 이별하고/ 이제까지 울 너머로/ 자고나니 허망하네‧…
그런 아버지셨으니, 자연히 여자들이 많이 따랐다. 엄마가 시집오시기 전에 아버지는 이미 다른 여자와 살림을 차리셨고, 둘 사이에 자녀를 두셨다. 그러니 엄마와 아버지는 항상 티격태격 다투실밖에. 게다가 엄마는 큰엄마가 잘못 던지신 불씨에 눈두덩을 맞은 게 끝내 실명으로 이어져 앞을 못 보셨다. 처음엔 한쪽만 그랬는데 마침내 남은 눈동자의 시신경마저 망가지시게 된 거다. 그런 아버지도 일상의 과로 때문에 예순을 넘기지 못하고 저승으로 떠나시고 말았다.
아버지의 유산인지 나도 일찍부터 여색(女色)을 밝혔다. 단 하나 나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뺴닮지 못했다. 노래라면 숙맥인 것이다.
그래도 부전자전이었디. 다른 건 제쳐 두고라고 건강 하나만 해도 그렇다.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직전에 180센티미터의 키에 70킬로그램의 근육질을 자랑하는 젊은이로 변해 있었으니. 누구와 싸워도 이기는 싸움 실력은 문자 그대로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다. 더 이상 말하면 자화자찬이라는 소릴 더 들을 터, 그만두자.
참 내 학력은 밀양 농잠고등학교가 전부다. 수산대학교 중등교원 양성소에 잠깐 적을 둔 적이 있다. 삼랑진 형님 집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부산으로 통학을 했으나,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바람둥이였던 나의 고백 하나.
삼랑진에서 고향 국전리 진주동까지는 장장 삼십 리다. 버스비가 없어서 큰 고개를 두 개가 넘어 걸어서 집에까지 다녀올 수 있었다. 어느 해 겨울 나는 늦은 시각, 형님 집을 나서서 고향으로 향했다. 짧은 해는 이내 어둠을 몰고 왔다.
딱 중간인 용소 고개에 올라 보니, 이미 사위는 어둑어둑하였다. 더 걸을까 하다가 나는 포기하고 말았다. 시오리 길과 씨름하기에는 너무 두려워서다. 마침 용소 부락에는 나와 여남은 촌 되는 친척 몇 집이 있었다.
행촌 아지매 집 사립문이 열려 있었다. 나는 잔기침을 하고 아제에게 하룻밤 묵고 가게 해 달라고 청을 넣었다. 한데 아지매는 곤란하다는 표정을 짓더니 큰방 작은방을 제외하고는 구들이 고장 나서 군불을 뗄 수 없다고 하는 게 아닌가? 나는 그래도 좋다고 했더니, 아지매는
“너거 서모(庶母) 집이 바로 옆 아니가? 그리로 가래이.”
하며 내 손을 끌었다. 나는 이상야릇한 심정으로 아지매를 따라 나설 수밖에. 생전 처음 보는 서모였다. 인상이 그런 대로 괜찮았다. 두 살 위 누나 뻘 규수가 눈인사를 건네고 미소를 지어 보였다. 사실 나는 그 규수를 안다. 아버지의 딸을 거의 일고여덟 해 만에 해후하는 나는, 난 어쩐지 아찔하다는 느낌에 빠졌다. 이윽고 저녁상이 나왔는데, 제법 기름졌다. 동동주까지 올라와 있었다. 몇 잔이고 사양하지 않고 마셨다.
그런데 사건은 그 다음에 일어났다. 누나가 내게 미순이를 기억하겠느냐고 물은 것이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중학교 3학년일 때 미순이에게 동정을 빼앗긴 일이 있는데, 상여 집 옆 들국화 밭에서였다. 미순이와의 관계는 아마 여남은 번 계속되었으리라. 그러던 미순이가 결혼을 한다고 했다. 하지만 이윽고 그게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는 소문.
누나가 하는 말이다. 미순이가 옆에 살고 있으니 합석하면 어떻겠느냐는…. 나는 취중 몽롱한 정신으로 동의하고 말았다. 이윽고 미순이가 들어섰다. 다소 수줍은 표정이지만, 미순이는 20대 중반의 무르익은 여인으로 변해 있었다. 밤이 이슥했는가 싶었는데, 새벽에 깨어나 보니 미순이가 옆에 그대로 누워 있었다. 기억을 되살려 보니 밤새 몇 번이나 정사(情事)를 계속한 것 같다. 나는 신음 소리를 섞어 나지막이 울부짖었다. 아, 불효로다!
나는 서둘러 서모 집을 빠져 나왔다. 서모가 지난밤에 준 빳빳한 새 돈을 산마루 후미진 곳 부토(腐土) 밑에 묻었다. 저 멀리서 담비 한 마리가 똑바로 얼굴을 들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불쌍한 엄마에게는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세월이 흘렀다. 스무한 살이 되었을 때 나는 군에 입대한다. 논산 훈련소에도 고된 기초 훈련, 영천 부관학교에서 보수 교육을 받고 배치된 곳이 8171부대였다.
참, 군 학예 발표회에서 서예 우수상을 받은 경력이 있어, 부관 학교에 가는 것은 떼어 놓은 당상이었다. 당시만 해도 부관부는 끗발이 좋기로 이름 나 있어, 병사들에게는 선망의 적이었다. 마침 사단장 표창장을 쓰는 둘 중 이른바 사수(射手)가 제대를 목전에 두고 있었다. 난 쉽사리 조수 자리를 꿰찼다. 상벌계였다.
처음 내무반에 갔을 때, 노래를 한 곡 불렀다. ‘가슴 아프게’? 그걸로 끝나는 줄 알았는데, 재창을 외치는 게 아닌가! 오기택의 ‘영등포의 밤’으로 응했다. 삼창까지 주문하는 바람에 나는 쟈니리의 뜨거운 안녕’으로 마무리했다. 그런데 갑자기 주먹이 날아든 것이다. 까닭? 없었다. 너무 건방지게 노래를 잘한다는 트집이었다 하자. 태권도 고단자라는 그 선임, 내가 맞붙어 치고받는다면 한 주먹에 때려눕힐 자신이 있었다. 참았다. 고된 신고식을 그렇게 치렀다.
부관부! 정말 군기가 셌다. 대신 거듭 말하지만 끗발은 최고였다. 주워들은 풍월인데, 사단 사령부에서 군기가 센 세 개 부서 혹은 중대가 있다고 했다. 부관부와 헌병중대, 군악대….우열을 가리기 힘들다고 입을 모았다. 과연 그랬다. 묘하게도 세 부서 혹은 중대 혹은 내무반이 바로 이웃에 있었다. 밤마다 야전삽 자루로 ‘빠따’ 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졌다. 비명과 섞여서.
이윽고 기쁜 소식이 들렸다. 나에게 주먹질을 한, 석 달 선임의 부서가 바뀐 것이다. 존슨 미국 대통령을 비롯한 국가 수반급 내빈들의 부대 방문 시 태권도 시범 일정은 어김없이 포함되는데, 정 상병이 격파 전문조로 편입된 것이다. 그날 저녁 나는 그로부터 사과를 받았다. 나보다 한 살 적었다.
사단에서는 일 년에 한 번씩 체육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3개 연대 ‧ 포사령부 ‧ 사단 직할대 등으로 나누어 대항전 형식으로 치러졌다. 우리 부관부에서 추천, 난 육상 100미터에 출전하여 실력을 겨루게 됐다. 지금 생각해 봐도 꿈같은 일이 벌어졌으니, 내가 12 초 00으로 우승을 해 버린 것. 그 인연으로 잊을 수 없는 전우를 둘 만나게 된다.
바로 군기 세기로 이름난 군악대 김상견 일병과 헌병대의 박예규 일병이었다. 김 일병은 예하 포병사령부 123 포병대대 대표 선수로 사단 체육대회에 출천하여 복싱 미들급 우승한 친구였다. 대대장이 소원을 물었더니, 그 친구가 사단 군악대에 가고 싶다는 얘기를 했던 모양이었다. 헌병대 박 일병은 씨름으로 최우수상을 받았다.
연병장 가까운 데에 본부중대 식당이 있었다. 물론 시상식에서 우리 셋은 인사를 나누었었기 때문에 김 일병과 나는 가끔씩 거기에서 만나 서로 악수를 하곤 했다. 이윽고 김 일병이 군악대로 올라오자 셋이서 일부러 비슷한 시간에 식당에서 만나곤 하였다. 8171부대 본부 중대 삼총사는 그래서 탄생하게 된다. 박 일병은 순찰을 해야 하기 때문에 가끔 어긋나긴 했어도….
그러던 어느 날, 박 일병이 우리 둘에게 넌지시 권하는 것이었다. 토요일 오후 외출하자고. 우리 대답을 기다릴 새도 없이 박 일병이 새끼손가락을 세워 보였다 의성 극장 옆에 깔치들이 있다고 귀띔했다.
그야말로 의기투합이었다. 우린 이구동성으로 찬성했다. 나도 그런 데에 몇 번 가 본 적이 있어, 별로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아니 억누를 수 없는 욕정을 불태우고 싶었었다고 하자.
나는 헌병대에서 넘어온 군풍기 적발 확인서 몇 장을 빼내었다. 그리고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의 공병 대대로 갔다. 그건 바로 현금과 같았다.
부관부에서 왔다니까, 일등병을 물론 병장도 꼼짝 못했다. 왜냐면 그 적발이 중대 본부에 들어갔을 경우, 중대장으로부터 문책을 당할 염려가 있어서였다. 심하면 영창 행이기도 했으니, 사창가에 출입하다 헌병에게 붙잡혀서 확인서에 사인이라도 해 준 병사는 그야말로 좌불안석이었다.
그런데 그걸 빼 준다는 내가 구세주로 보일밖에. 하지만 그건 위험천만한 짓이었다. 들통 나면 처벌을 받을 건 불을 보듯 뻔한 노릇, 아슬아슬한 게임이었다. 어쨌든 난 군복 하의 호주머니에 지폐 몇 장을 집어넣을 수 있었다.
박 일병은 ‘가라’(가짜의 일본말-일등병인데, 병장 계급장쯤 다는 게 예사였다) 계급장을 단 채 선임을 따라 백차를 타고 순찰을 하다가 가차 없이 병사들을 불러 세우곤 시비를 걸었다. 여차하면 ‘보행 중 흡연’ , ‘우산 착용’, ‘음주’ , ‘복장 불량’ 등은 이현령비현령이었다. 그건 바로 돈과 직결….
김 일병은 그런 부정과 관련이 없었다. 대신 집이 부자라 항상 넉넉하게 지냈다. 식사 하고 나서 틈만 나면 PX로 우리 둘을 데리고 가서는 황도 통조림이며 빵, 초콜릿 등을 사 주었다. 곁가지 이야기는 일단 여기서 접자.
하여튼 토요일 오후 우리 셋은 빳빳하게 풀을 먹여 다린 작업복을 갖춰 입고 부대를 나섰다. 어깨동무까지 하면서 의미심장한 웃음을 나누었고.
차는 주내 검문소를 거쳐, 의정부 시내로 접어들었다. 조금은 늦은 오후 시각이었다. 이미 전깃불이 하나 둘씩 켜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극장 앞은 술집도 즐비하고, 잠자리 날개 같은 옷을 입은 시민들의 발걸음이 분주했다.
박 일병은 백차를 돌여 보냈다. 그러곤 어느 대중음식점 안으로 우릴 안내했다. 술이 너무 취하면 방사(房事)의 질(?)이 떨어지니 적당히 마시자고 하며, 넷은 소주 두 병을 끝으로 일어섰다. 부대찌개 국물에 밥 두어 그릇을 넣고 비벼 먹음으로써 저녁을 대신했다.
그리고 드디어 유관 지대로 들어섰다. 아가씨들이 호객 행위는 노골(露骨) 그거였다.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치마를 입었고, 윗옷은 걸친 둥 마는 둥 했으니, 그 모습만 봐도 춤이 꼴깍 넘어갔다.
난, 입대 후 처음으로 여자를 안아 본 셈이다. 각기 인연이 닿은 아가씨와 세 시간씩 지내다가 나오기로 했는데, 내 욕정은 끝을 몰랐다. 하늘과 땅이 뒤바뀌는 세계를 그렇게 체험했다. 얼마나 심했으면 아가씨가,
“야, 이 군바리 아저씨 아마도 미쳤나 봐. 그렇게도 하고 싶었어? 나도 아 저씨가 욕심 나. 살다 보니 원 희한한 일도 다 있네.”
고 하고선 오히려 제 쪽에서 적극성을 띠는 게 아닌가! 난 하도 고마워 팁을 마다하는 아가씨 손에 쥐어 주었다. 엄마의 모습이 어른거려 눈물이 났다.
한 번 들여 놓은 의성 극장 유곽에서 나는 발을 빼내지 못했다. 어느 새 나는 아가씨의 단골손님이 되고 말았다. 어떨 땐 아가씨가 해웃값을 받지 않고 오히려 용돈까지 쥐어 주기도 했으니, 세상사 그래서 요상한 모양이다.
그러다가 예하 부대 중위에게 군풍기 적발 확인서와 현금을 빅딜(?)하자고 제안했다가 최병학 선임하사에게 발각된다. 그는 어쩌자고 이런 짓을 저질렀느냐 적잖은 호통을 치곤 용서해 주었다. 하지만 허사였다. 수색 중애에 있는 열두 촌 동생한테서 빌려서라도, 현찰을 쥐면 의성 극장 앞으로 달려갔다. 사람은 죽으란(?) 법은 없는 모양이다. 표창장을 받은 장교가 그 걸 쓴 나를 불러다가 지폐 두어 장을 쥐어 주는 일도 생겼다. 그래서 다시 의성 극장 앞 행.
내 불효 중의 불효는 몸을 파는 여자로부터 그렇게 시작되었다. 첫 휴가를 가서 엄마한테 보름 남짓 있다가 귀대를 하게 되었다. 떠날 때 엄마는 버선 속에 감추어 두었던 지폐 몇 장을 내 손에 쥐어 주었다.
“이 노무 자슥아, 니 어떤 일이 있어도 여자 조심하래이. 아부지 맹쿠로 여자 가슴에 못 박지 말거라. 군대에서 병 걸려 오는 넘 있다 카더라. ”
나는 앞도 못 보시는 엄마께 안심하라고 말씀드렸다. 하지만 말짱 헛말이었다.
부관참모부의 군기가 워낙 세다 보니, 휴가 갔다가 귀대하는 그 자체가 고통 중의 고통이었다. 나는 의정부에서 거리를 방황하다가 마침내 엄마와의 다짐도 어느 새 잊고 유곽 지대로 들어서고 있었다. 이쯤에서 이름을 밝히자. 아가씨 선유자는 두 팔로 나를 얼싸안고 반겼다. 나이는 나와 갑장. 우린 오랜만의 정사를 대낮부터 불태웠다.
그렇게 세월은 흘렀다. 우리 셋도 어느덧 상병으로 진급했고 이윽고 병장 계급을 달 차례가 되어갔다. 휴가는 우리 부관부 소관이라 다른 부서 병사들보다 자주 다녀왔다. 나는 부지런히 선유자를 쫓아다녔다. 이상한 것은 친구 둘도 그런 ‘애인’을 두고 있다는 점이었다. 본부 중대에 이미 그런 소문이 쫙 퍼진 있는 모양이고, 셋은 그걸 제어할 방도가 없었다.
그러나 꼬리가 길면 밟힌다는 속담은 결코 허언이 아니었다. 우리 자신이 그걸 절실히 체험하는 순간을 맞은 것이다.
우리의 잦은 유곽 출입이 마침내 방첩대 안테나에 걸려든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방첩부대장 김병영 선임하사에게 제보(?)가 들어간 모양이었다. 병사 셋이 작업복을 입고 토요일 오후 같은 자주 유곽에 모습을 드러낸다? 어쩐지 군기가 빠진 듯하니, 본부중대장(군악대장) ‧ 부관참모 ‧ 헌병대장 등에게 주의 촉구를 하는 게 좋겠다고 연락을 한 것 같았다.
방첩대 그 정도로 권력이 센 줄 몰랐었는데…. 어느 날 내가 표창장을 쓰고 있는 부관참모실로 찾아온, 새파란 김병영 중사가 부관참모 이청우 중령에게 이런 말을 한 것이다.
“이 셋은 일단 영창이라도 보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셋 다 필수 요원이야. 여기 이 병사가 갇힌다면 당장에 표창장을 누가 쓴단 말이오? 젊은이들의 장래를 생각해서 선처를 베푸는 것이 좋겠어.”
그 사건은 그렇게 유야무야 되었다. 하지만 본부 중대 전우들의 시선이 따가웠다. 그걸 견디기 힘들었다. 꼬리표가 달린 것이다.
그래도 이겨야만 했다. 나는 워낙 탄탄한 몸에 싸워서 남에게 져 본 적이 없는 터였다. 그 따위(?)를 빌미로 구타는 선임은 없었다. 내무반의 장기 복무 하사들 외엔….그래 약간 우세했다는 정도의 표현으로 마감하자. 나머지 둘인들 어찌 예외이랴. 셋은 병장을 거쳐 하사를 달 때가 거의 다 되어 갔다. 우리들의 유곽 출입은 가물에 콩 나듯 할밖에.
그 무렵 마지막 휴가를 다녀오게 되었다. 열흘 동안의 짧은 기간이었다. 십 리를 걸어야 있는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여 떠나려는데, 엄마는 또 여자 이야기를 하셨다. 조심해라이, 니는 애비 닮으면 안 된다. 알겠제? 참아라이.
나는 큰소리로 걱정하지 말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완행열차를 타고 용산에서 버스로 갈아타고 보니, 엄마와의 약속은 말짱 도루묵이 되고 말았다. 귀대 시간까지는 반나절이나 남아 있었는데, 머리를 온통 여체 아니 선유자가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혼잣말이다. 따지고 보면 몇 달이나 지났다. 잘 있을까? 지금 들른다 치자. 다른 손님이 얼씬거리지도 않을 시간이다. 그래 직행이다! 나는 가게에 들러 초콜릿 한 상자를 사 들었다.
속칭 쌍마포집은 변한 게 없었다. 아가씨 두엇이 얼굴을 내미는가 싶더니, 나를 짐짓 못 본체했다. 내가 자기들을 상대하는 군바리가 아닌 줄 알아서였을까? 나는 그래도 닫힌 문을 열고 들어섰다. 포주의 얼굴도 낯설었다. 포주의 입에서 엉뚱한 말이 튀어나왔다. 총각, 아니 군바리! 어지간히 급한가 보지?
그러나저러나 나는 유자를 찾았다. 한데 포주가 정말 뜻밖의 말을 내뱉는 게 아닌가? 그 아가씬 다른 데로 옮겼단다. 대신 참한 아가씨 하나 들여보내 줄 테니 기다리라는 거다. 방 하나를 가리키며 들어가라고 했다.
나는 포주가 시키는 대로 방으로 들어갔다. 유자가 없으니, 돌아 나와 버릴까 했지만, 그 생각을 접었다. 굶주림 탓이다. 깔려 있는 요에 드러누워 하릴없는 사람처럼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톡톡 노크 소리가 나더니 문을 열고 여자 하나가 들어선다.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둘은 얼음이 되고 말았다. 세상에 이런 일이 있다는 말인가? 아가씨는 미순이! 미순이가 누구냐고? 서모의 이웃, 학창 시절 내 동정을 앗아갔었고, 몇 년 전 기가 막힌 사연으로 조우하여 하룻밤을 완전히 엉망으로 만들었던 여자. 둘은 한참이나 말문을 닫고 말았다. 하지만 이야기를 들어야만 했다. 궁금한 안부도 있었고.
잠시 요 위에 둘은 앉았다. 미순이의 첫 마디가 그랬다. 내가 이 근처 부대에 복무한다는 얘긴 들었다고. 하나 이런 데에 출입하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고 했다. 미순이의 계속되는 말.
“용소리에 어느 해 경기도 무슨 산악회에서 와서 며칠 야영을 했었지. 그 회원들에게 반찬거리를 전해 주다가 어떤 남자와 눈이 맞아 파주까지 따라온 거야. 면사포를 씌워 준다는 말에 속은 셈이지. 근데 유부남이야. 직장도 시원찮고….석 달 전에 들어왔어. 이미 빚이 불어나 뛰쳐나가기도 힘들어.”
유자는 침묵하는 내가 너무 급한가 보다 생각했는지 자기 옷부터 벗었다. 그러곤 내 군복 상의에 손을 냈다. 갑자기 엄마 말씀이 생각났다. 여자 조심하라는….미순이의 그 넋두리도 너무 싫었다. 난 쏘아 붙였다. 나 갈래!
미순이도 위기를 벗어나고 싶은 눈치였다. 한데 미순이가 내게 보여 주는 게 하나 있었다. 묵주였다. 자기는 가톨릭으로 개종했다고 했다. 난 시큰둥한 반응을 보일밖에. 난 부리나케 달려 부대로 돌아오고 말았다. 그런 뒤에 나는 결코 돈을 주고 여자를 사는 일은 여태 한 번도 없었음을 장담한다.
우리 체육대회 삼총사 아니 ‘사창가 출입 삼총사’는 하사로 진급되었다. 그런데 부대에 이상한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영관급 장교 하나가 사창가에 가서, 발설해서는 안 되는 군 내부 이야기를 아가씨에게 건넨 것이다. 당연히 징계가 뒤따르게 됐다. 법무 참모부와 헌병 참모부에서 비슷한 자료가 내 책상 위에 올려졌다. 나는 그걸 일별하고, 사단장이 알아보기 사건요약서를 만들었다. 예감이 불길했다. 사창가와 군 기밀? 파장이 있으리라 짐작되었다.
아니나 다르랴, 장병들이 사창가 출입 단속이 크게 벌어졌다. 그뿐만 아니었다. 거슬러 올라가서 2회 이상 사창가 출입으로 적발되었다든지, 말썽을 일으킨 장병들의 뒤를 캐는 일이 자연히 따를밖에. 그 업무는 보안대에서 맡고 있는 모양이었다. 우리 셋도 사령부 한 귀퉁이에 자리 잡은 보안부대에 호출되어 갈 수밖에. 불행 중 다행으로 거의 극비리에 그 일이 추진되었다. 평범한 사무실 같은 데에 셋이서 동시에 들어섰는데, 참모실로 찾아왔었던 중사가 떡하니 버티고 앉아 있었다. 그의 첫마디였다. 요즘은 거기 안 가나?
그런데 군악대 김상견 하사가 대답 대신 손을 내밀며 말을 건넸다.
“야, 나 모르겠는가? 나 태룡초등학교 26회네.”
순간 중사는 인상이 험악하게 변하더니, 이 새끼 운운하면서 김 하사의 어깨를 탁 치면서 하는 말. 여기가 어딘 줄 알아? 정신 좀 차려!
중사는 이런저런 몇 가지를 물어 보았다. 우린 곱다랗게 얼차례 비슷한 수모를 당할 수밖에. 그 황망 중에 김 하사는 얼핏 보기에도 굉장히 분개해 있었다. 어금니를 깨무는 소리가 들릴 지경이었다.
다시 세월은 유수와 같이 흘렀다. 드디어 제대 말년이 가까워졌다. 그때 무슨 선거가 있었다. 개표 방송을 들으려고 라디오를 곁에 두고 누웠는데, 너무나 뜻밖의 말이 튀어 나온 것이다. 용주 모 사단사령부 군악대 하사라고 자칭하는 병사가 야당 중앙당사에 나타나 군 부재자 투표가 공개리에 진행됐다고 폭로했다는 게 아닌가? 군 보안대에서 병사의 신병을 확보했단다.
내무반에 함성이 터졌다. 공개 투표를 비난하는 병사들의 쉬쉬 소리가 아슬아슬하게 부대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해서 그렇지, 뭐가 폭발할 듯한 일촉즉발의 분위기를 우리 자신이 감지하고 있던 찰나였기 문이다.
그런데 이튿날 식당에서 그야말로 기절초풍할 소문을 들었다. 그 폭로 당사 자가 바로 김상견 하사였기 때문이다. 사실이었다. 김 하사는 그날부터 군악대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보안대의 서슬이 퍼렇던 시절, 모두가 쉬쉬하며 지냈다. 그가 쥐도 새도 모르게 세상에서 사라질 거란 성급한 진단도 내놨다.
그런데 모든 게 빗나갔다. 보름 만에 귀대한 김 하사는 되레 신수가 훤해져 있었다. 얼굴에 미소까지 머금고 우리 앞에 나타난 그의 말이다.
“보안대로 끌려가는 줄 알았어. 한데 지프에서 대위가 내리더니 나를 태우 는 거야. 회유를 받았어. 입 다물기만 하면, 무사히 제대시켜 주겠다는 거야. 그리고 제대 후 취직도 보장 약속. 아마도 보안대 군무원쯤 되겠지. 대학 공부도 보장하겠다나? 싸구려 사창 가가 아닌 고급 요정에서 융숭한 대접을 받았어. 물론 거기 아가씨들과의 잠자리도 마련해 주더군. 호의호식했네. 내 얼굴 좋지?”
김 하사가 그런 용감무쌍한 일을 한 것은 보안대에서 후배 중사로부터 당한 수모 때문이라는 소문도 무성했다. 그래서 인생만사 새옹지마일까?
비슷한 시기에 군복을 벗었음은 보나마나. 보안대 중사는 강제 전역….
다시 오랜 세월이 흘렀다. 나는 종합 병원 원무팀에서 근무하다 만난 아내와 결혼하였다. 아내는 간호사. 이윽고 아내는 최전방 문산 근처 요양 병원에서 수간호사로 일하게 되었고, 나는 따라 올라와 까지 올라와 농사를 짓는다. 제대 후 지역 문화원장과 함께 운영했던 웅변 학원 겸 음악 학원을 통해 말과 노래 솜씨를 익힌 게 도움이 되어 복지 회관에서 운영하는 노인 학교 강사를 몇 년 했다. 그 인연으로 바로 지척에 있는 8171부대로 드나든 게 4년 전이다. 어느덧 50시간을 넘겼으니, 나로선 새로운 기록에 도전하게 된 셈이다.
그런데 찝찝한 경험을 하나 하게 된다. 김신조가 타고 들어왔었던 파주의 12* 기보대대에 들렀을 때다. 난 가톨릭 신자지만, 대대 규모엔 성당이 없는 걸 섭섭하게생각한다. 물론 연대도….
성당은 사단에만 있다. 대대장이 하는 말
"부대 교회에 병사들이 모여 있습니다. 저도 강의를 들어야겠지만 중요한 손님이 오는 터라, 불참합니다. 미안합니다, 선배님." 아무려나 상관 없었다. 두 시간을 꼬박 채우는 나로서는 강행군이지만, 그런 대로 무난하게 해 나갔고 병사들도 신바람을 냈다.
하지만 도중에 마(魔)가 끼어들었다. 나도 모르게 남녀 간의 성(性) 문제를 건드리고 말았으니…. 남자는 건강해야 한다는 걸 강조하다 실언한 것.
“고추가 잘 서야 합니다. 고추 잘 서는 사람?”
녀석들은 낄낄대며 웃었다. 손을 가지런히 무릎 위에 얹고 있는 축은 극소수였고. 그러나 다음 순간 나는 뭐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꼬집을 수 없는….강의를 마치고 나는 대대장실로 내려왔다. 똑똑 노크를 하고 문을 열었더니 대대장은 어떤 준위와 차를 나누고 있었다.
내가 명함을 내밀었더니 준위는 ‘답례’를 한참 망설였다. 이윽고 마지못해 지갑을 열었는데, 거기엔 국군기무사령부 준위 이하영이라고 적혀 있었다. 나는 순간 현기증을 느꼈다. 난마처럼 얽힌 사건에 휘말려 들어가는 듯한 절망감도 엄습해 왔다.
그가 하는 말이다. 자기들은 명함을 남에게 주지 않는다고. 그리곤 경기도지사의 아들이 불미스런 사건에 연루된 것 아느냐고 물었다. 더 설명이 오갈 필요가 없었다. 부대 성 군기가 혼란스러운데, 아무리 선의로 해석되는 말이지만 고추 운운한 것은 하나의 오점으로 남지 않겠느냐는 질책이었다. 물론 확실히 꼬집은 건 아니지만.
마침 그날엔 보기 드물게 소꼬리곰탕이 나왔지만, 난 맛을 제대로 느끼지 못했다. 작전과장 이종혁 소령이 아무 말 하지 않고 내 어깨를 도닥거려 주어 약간의 위안을 얻었다.
나는 기무사(방첩대 ‧ 보안사라는 이름을 거친)를 아무리 좋게 보려 해도 그래서 잘 안 되었다. 난 우파도 좌파도 아니지만, 기무사에의 반감은 여전할 수밖에. 그러던 중 복음이 들려 왔다. 기무사가 해체 수준으로 개편된다는 것이다. 하회를 지켜봐 왔었다. 마침내 장병들을 원대 복귀시키고, 이름도 바꾼단다. 그리고 옛날과 같은 못된 업무를 못 보게 한다는 것! 비로소 내가 긴 악몽에서 벗어나는 느낌이었다.
예서 거듭 강조하자. 나는 아버지에게 간통을 고하라는 (성사) 사제가 잔인하다고 했었다. 고지식하니 불효를 저지른다는 뉘앙스를 풍기는, 해괴망측한 논리도 펼쳤고.
오십보백보다. 내가 엄마라 여기는 모부대 8171부대에서의 갖가지 추억을 장남 삼아 퍼뜨리는 건 엄마를 모독하는 것이다. 그래서 난 ‘불효자’임을 자처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 신부와 마찬가지로 나도 방법이 서툴렀을 뿐 할 소리는 했다. 엄마가 날 용서하듯이 새로운 모부대 8사단, 그러니까 ‘새엄마’도 마찬가지리라. 새엄마에게 나도 효도한다. 내 결심이다.
다만 부관부과 없어진 건 너무나 안타깝다. 그 생각만 하면 기운이 빠진다.
자, 매듭을 지으면서 남길 말 하나. 손자가 곧 사제 서품을 받는다. 나이 일흔 중반인데, 과연 다른 여자와의 인연으로 그에게서 성사를 받을 일이 또 있을는지? 아서라, 그런 허풍(?)은 떨지 말자.
* 고 이재수 사령관 묘소에 간다. 이유는 단 하나. 그의 유서의 띄어쓰기며 맞춤법 등이 너무나 발라서이다. 그리고 내가 이런 시시한 소설로 군을 욕되게 한 게 미안해서--.거기서 '육군가'를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