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서는 처절한 실존을 다룬다.
그래서 무겁고 어렵다.
그런데도 이런 질문들을 성경이 숨기지 않았다는 사실 자체가
내게는 큰 은혜가 된다.
다루기 힘든 인간의 혼란과 절규를 삭제하지 않으시고
그대로 언급하시는 것을,
나는 오히려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한 증거처럼 느낀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이 사탄의 시험을 허락하시고,
욥이 하루아침에 재산과 자녀를 잃고 자신의 몸까지 병드는 장면이다.
처음에는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던 욥도 결국 깊은 절망 속에서 탄식한다.
그러자 친구 엘리바스는 욥의 고통에 반드시 죄의 원인이 있을 것이라고 조언한다.
자연스럽게 질문하게 된다.
사람에게 왜 이런 고통과 절망이 존재하는가.
왜 하나님은 사랑하는 사람에게조차 절망을 허락하시는가.
그리고 죄 없어 보이는 욥의 자녀들까지
이 비극 속에 휩쓸리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분명 인간의 죄와 깨어짐은 이 세상의 고통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지금 당하는 고통을 단순히
개인의 죄값으로 연결하는 것은 위험하다.
욥의 친구들이 바로 그 오류에 빠진다.
그들은 아주 틀린 말을 한 것이 아니라, 너무 쉽고 단순하게 단정했다.
욥기는 내가 던진 질문을 완전히 설명하지는 않는다.
표면적으로는 오히려 설명되지 않는 고통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흔들리고,
또 얼마나 쉽게 타인을 판단하는지를 보여주는 듯하다.
그래도 한 가지 희미하게 붙드는 것은,
하나님은 인간의 고통을 가볍게 여기시는 분은 아니라는 믿음이다.
많은 경우 하나님의 선하심은 시작부터 끝까지를 보여주시지만
욥이 당하는 고통과 절망 속에서는 그 끝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욥기는 결국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하나님은 일점일획의 오차도 없이 공정하신 분이다.’
라는 믿음으로 버텨 내야 하는 경우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은 하나님의 선하심의 결말까지 다 볼 수 없지만,
결국에는 알게 될 것이라는 믿음.
어쩌면 고통과 절망의 궁극적인 대답은
이 세상 안에서 풀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준비하고 계신 궁극적인 ‘좋은 나라’까지 시야를 넓힐 때야
비로소 이해하게 되는 영역인지도 모르겠다.
지금 매우 피곤해서 머리가 뒤죽박죽인데
내일부터 차근차근 욥기서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기 위해
노력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