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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종로구 일대는 멀리는 조선조부터 가깝게는 개화기, 해방후에 이르기까지 한국사의 주요한 사건들이 벌어진 정치일번지였습니다. 하지만 현대와 가까울수록 그 유적들이 쉽게 잊혀지고 있어 시급한 대책이 필요한 실정이에요. 때문에 근현대 역사유적들을 찾아서 기억하고 보존하는 작업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과연 그럴까? 정치일번지 종로를 함께 하시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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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일번지를 살펴보자면 북촌을 중심으로 살펴보아야 합니다. 북촌이란 조선왕조가 왕족과 사대부들에게 집터로 배분하여 만들어진 양반 거주지역을 말합니다. 북촌은 북악산 아래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에 만들어졌습니다. 서쪽으로는 삼청동, 중간의 계동, 동쪽에 안국동이 그 중심을 이루었죠. 북촌의 영역은 사대부 수가 늘면서 주변의 사직동, 체부동, 통의동, 통인동, 필운동, 옥인동, 창성동, 효자동, 궁정동, 안국동, 송현동, 계동, 가회동, 재동, 화동 등으로 확대되었답니다. 북촌과 달리 남산아래는 낮은 양반의 거주지역이 형성되었고, 효자동일대는 내시, 관철동, 청계 일대는 상인, 혜화동 일대는 백정의 거주지역이 형성되었었구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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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재판소 서북쪽에 자리한 백송은 천연기념물 8호로 개화사상가 박규수의 집 뒤뜰에 있던 나무였다고 합니다. 현재 박규수가 살던 집은 헐리고 나무만 제자리를 지키고 있어요. 원래 백송은 중국 특산 희귀수종으로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것이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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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규설의 집은 현대본사 사옥 옆에 길쭉한 한옥입니다. 한규설은 한말의 무신으로 한성부판윤, 법부대신 등을 역임했습니다. 특히 그는 독립협회와 가까운 인사로 독립협회의 활동을 적극 지원하였어요. 그는 을사조약 체결당시 끝까지 반대하다 면직되었고, 이후 일제가 남작 작위를 주어 회유하고자 하였으나 끝까지 이를 거부했습니다. 한규설의 집은 현재 '박리분식'이라고 씌여진 부분부터 쭉 이어진 기와집으로 원래는 꽤 큰 한옥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비교적 원형이 남아있는 경우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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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문중학교는 지금의 현대 본사 사옥 자리에 있었습니다. 이 곳에서 해방후 최초의 대중집회가 있었어요. 해방직후 여운형은 서대문형무소에 가서 석방된 정치범들과 만났습니다. 여운형은 이들과 함께 휘문중학교로 돌아와 군중에게 처음으로 모습을 나타냈구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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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본사 사옥 옆으로 조금 올라가다보면 왼쪽으로 높은 담으로 둘러쌓인 멋진 양옥집이 보이는데 이것이 건국준비위원회 건물입니다. 이것은 당시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몇 안되는 건물 중의 하나입니다. 이 건물은 건준이 인민공화국으로 대체되면서 그대로 조선인민공화국 건물로 사용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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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재판소 한켠에는 창덕여고가 있었음을 알리는 표석이 있는데, 이 곳은 창덕여고가 옮겨오기 전에는 본래 경기여고가 있던 자리였습니다. 해방직후인 1945년 9월 6일부터 3일간 경기여고 강당에서는 전국인민대표자회의가 개최되었어요. 이 자리에서 전국에서 올라온 1천여명의 인민대표들은 조선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하였습니다. 이들 좌익세력이 자주적인 국가의 수립을 서두른 것은 미군 상륙 이전에 정부를 수립하는 것이 대외협상력을 높이고 자주성을 인정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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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준 건물을 지나 계속 올라가다 오른쪽으로 돌아가다 보면 여운형의 자택이 있었던 곳을 찾을 수 있습니다. 현재 역사문제연구소 앞 '안동손칼국수집'이 원래 여운형의 집이 있던 곳입니다. 역사문제연구소 위층에서 보면 칼국수집에는 아직도 기와가 남아있다고 합니다. 물론 그것이 원래 기와는 아니겠지만, 집의 원형을 일부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 재밌죠. 여운형은 이 집에서 한차례 집의 일부가 폭파되는 테러를 당했고 혜화로타리에서 테러분자들의 총격에 암살당할 때까지 거주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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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진우는 일제치하 동아일보 주필, 사장 등을 역임하고, 김성수, 장덕수 등과 함께 대표적인 동아일보 인맥으로 활동하였습니다. 그는 해방직후 이들과 함께 한국민주당(한민당)을 창당했고 수석총무를 맡아 우익의 거두로 활약하였죠. 그는 주한미군사령관 하지의 행정고문으로 미군정에 적극 협력하였으며 우익세력의 규합에 앞장섰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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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송진우 자택의 일부는 재개발되었으나, 그가 최후를 맞은 것으로 알려진 사랑채는 여전히 원형을 보존하고 있습니다. 송진우의 집은 현대 본사 사옥에서 오른쪽 길로 쭉 올라가다보면 만날 수 있어요. 여기서 왼쪽으로 돌아 첫 번째 골목으로 올라가면 그의 집 사랑채를 볼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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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중학교는 원래 기호흥학회가 세운 기호학교가 흥사단이 설립한 융희학교 등을 합병하여 중앙학교로 개칭하면서 출발하였습니다. 1915년 김성수는 이 학교를 인수하고 송진우, 현상윤 등을 교사로 초빙하였어요. 김성수는 원래 전북 고창의 지주출신으로 중앙중학교의 인수를 시작으로 경성방직회사 설립, 동아일보 인수, 보성전문학교 인수 등 교육자이자 사업가로 변신했습니다. 해방후 김성수는 송진우의 뒤를 이어 한민당 수석총무, 한민당 당수를 역임하면서 대표적인 야당지도자로 활약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