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대회 후기 및 제주도 여행기
1990년 신혼 여행, 1999년 가족 여행에 이어 세 번 째 제주도 방문 길이었습니다. 제주대학교는 처음이었는데요, 넓은 대지 자연 속에 있는 캠퍼스가 정말 좋더군요. 또한 행사장이었던 로스쿨 건물은 마치 미국 동부의 유서깊은 로스쿨 건물을 연상케 하는 멋이 있었습니다.
학회 연구이사로 학술대회 전체를 관장하느라 분주하였고, 또 긴장도 많이 되어 정작 발표와 토론의 내용들에 집중하기는 힘들었습니다.
다만, 미래와 희망 산부인과 김향미 원장님(법학박사)이 대리모에 관한 발표를 하면서, 예전에 조선족이 불법체류하면서 대리모 일을 많이 맡았는데, 그 부부들이 아이가 기형인 경우에 찾아가지 않고, 또 수태를 시켜 놓고, 이혼을 하는 경우 역시 찾아가지 않는 사례들이 있었다는 얘기를 듣고, 마음이 착잡해졌습니다.
또 손영수 교수님(제주대 의학전문대학원)이 토마스 아퀴나스를 인용하며, 섹스의 기능에 대하여 1.종족 번식, 2.인간관계의 확장, 3.쾌락으로 설명하는데, 흥미로운 부분이었습니다. 또 손영수 교수님이 성의 결정을 얘기하면서 '남녀추니(남녀의 성기를 함께 가지고 있음)'를 설명하는데, 그냥 말로만 들었지, 실제 그런 사례들이 임상에서 경험된다는 얘기를 들으니 실로 생생하게 느껴졌습니다.
생명공학, 인공수정이 발전하여 인간의 삶과 운명이 인간의 손에 의하여 결정될 수도 있다는 것에서 인간의 기술의 놀라운 성취를 얘기할 수 있을까요? 인간의 운명을 인간 스스로 좌우할 수 있으니 이는 참으로 인간의 위대함을 증명하는 것일까요? 저는 쉽게 답할 수 없습니다. '착상전 유전자 검사', '인공 수정' 등 인간이 인간의 탄생을 그 뜻에 따라 조율하고 조작할 수 있는 것 같지만, 생명과 자연은 언제나 인간의 구상과 의도를 넘어선다고 생각합니다. 생명공학 기술이 아무리 발달해도, 생명을 '(신 혹은 전체 존재의) 선물'로 인식하는 겸허함을 잃는다면, 그것은 인간의 삶에서 오히려 비극과 재앙의 또 다른 원천이 될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음날 제주대 로스쿨 교수님의 안내로 제주 동쪽의 오름 두 곳을 다녀보았습니다. 조그만 동산 같은 곳이지만, 수 만 년(?) 전 화산 분출로 만들어진 지반과 곡선을 지금 바로 마주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그 의미가 전연 다르게 느껴졌습니다. 따지고 보면 여기 오름만이 아니라 우리의 대지와 하늘, 지구 자체가 그러한 것이지요. 기술 문명에 둘러싸여 있는 것 같고, 또 순간의 희노애락에 연연해 하고 있지만, 우리는 사실 억겁의 우주와 자연의 일부인 것이지요....
조그마한 오름을 오르는 데 저 멀리 무지개가 걸려 우리의 기분을 상쾌하게 하였고, 날이 개어 좋은 날씨가 될 것으로 기대하였는데, 오름 정상에 서니 다시 날씨가 바뀌었습니다. 다들 모여 기념사진을 찍고 있는데, 뒷편에서 웬 뿌연 커텐과 같은 것이 점점 다가오더니 순간 싸락 눈보라가 폭풍 휘몰아 쳐, 맨 얼굴을 내놓을 수 없을 정도로 따가웠습니다. 마치 어떤 기상이변을 다루는 영화 속의 한 장면과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습니다.... 조금 두려운 기분도 있었지만, 오랜 만에 자연 속에서 자연과 더불어 교감을 한 것 같아 좋았습니다. 마치 제주도의 기상이 저희 외지의 작은 사람들과 '장난 치며, 놀고 싶어'한다는 즐거운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점심을 하고는 평화박물관에들 가게 되었습니다. 제주 4.3 사건의 기억을 되새기는 기념관이었습니다. 6.25전쟁 전후로 우리 남한 땅에서 가장 참혹하게 벌어진 대량학살, 인간의 무지와 어리석음, 적의와 잔인함의 생생한 역사적 증언들을 듣고 볼 수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우리 역사는 이제 겨우 반 세기를 더 지났을 뿐입니다. 그리고 현대 우리 사회에 여전히 횡행하는 '색깔론'을 보면 정말 역사가 과연 얼마나 더 진전하였는지 의심이 들기도 합니다....
'인간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인간이다'이라는 말이 실감납니다.... 인간이 인간에게 기쁨과 위로가 되지 못한다면, 그 인간 사회는 어리석음의 조합일 뿐입니다....
학술대회를 치루기 위하여는 여러분들이 수고를 해 주셔야 합니다. 제주대 고봉진 교수님과 행정조교들, 그리고 숭실대 윤진숙 교수님, 숙명여대 홍성수 교수님께 다시 감사를 드립니다.
첫댓글 아..전 학술대회 명단만 보고, '왜 의사선생님이 법철학학회에?' 라고 생각했는데, 법학박사이기도 하신 분이군요? 멋진 기행문 잘 읽었습니다. 저도 함 가보고 싶군요ㅠ 이제까지 한번도 못갔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