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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 영화
블루톤으로 채색한 젊은 예술가의 초상
하재봉 작가,영화평론가
인류의 발생과 거의 기원을 같이 하는 타예술 장르에 비해서 영화예술은 발생학적으로 가장 젊은 예술이다. 뤼미에르 형제가 대중들 앞에서 자신들의 영화를 상영한 지 이제 겨우 100여 년이 지났을 뿐이다. 영화예술은 문명의 발달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현대문명의 최첨단 테크놀로지는 영화예술의 표현을 방법적으로 뒤바꿔 놓는다. 무성에서 유성으로, 흑백에서 칼라로의 전환도 그렇지만 최근의 컴퓨터그래픽 기술이나 특수장비와 효과 등의 사용을 생각하지 않은 영화제작은 상상하기가 힘들다. 영화예술은 발생 초기에는 서사적 내러티브 구조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소설과 비교되었고, 배우들이 연기를 한다는 점에서는 연극과 비교되었으며, 눈에 보이는 세계를 담아낸다는 점에서는 사진과 비교되었다. 초창기의 영화는 이렇게 먼저 발달된 예술들의 하위 장르로 인식되기도 했었지만, 영화는 영화만이 갖고 있는 독특한 표현방법을 개발하면서 어떤 예술보다도 영향력있는 장르로 성장해 왔다. 그 힘은, 모든 예술 장르의 특징적 성향들이 영화라는
용광로 안에서 서로 충돌하고 조화되면서 발생하는 또다른 형태의 힘이다. 영화
속에는 문학의 서사와 미술의 시각과 음악의 청각, 그리고 육체로 드러내는 무용과 연극의 표현방법이 동시에 존재한다. 이제 영화는 모든 예술 장르의 중심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어느 예술도 따라올 수 없는, 영화예술이 갖는 놀랄만한 종합적 능력과 대중적 흡인력 때문이다.
이 사회를 살아가는 예술가의 초상
뉴욕의 거리 화가 바스키아의 삶을 그린 영화 「바스키아」는, 단지 한 요절한 젊은 예술가의 삶을 영화로 만들었다는 의미 이상을 갖고 있다. 이 영화의 감독은
’80년대 뉴페인팅의 기수였던, 화가 쥴리앙 슈나벨이기 때문이다. ’80년대의
또 한사람의 전위였던 로버트 롱고가 주류 헐리우드에 입성했을 때, 많은 사람들은 우려를 했었다. 롱고 감독이 만든 키아누리부스 주연의 「코드명 J」라는 SF
영화는, 영화적 테크놀로지를 많이 요구하는 기술적 요인에 의해 많은 문제점을
노출시켰다. 결국 부분적인 시각적 아름다움에도 불구하고 서사를 이끌고 가는
힘의 불균형으로 참패해서, 롱고는 화가로서의 명성을 상당부분 상실하는 결과를
초래했었다. 거기에 비하면 쥴리앙 슈나벨은 동료화가의 삶이라는 훨씬 안전한
소재를 택한 셈이다. 영화 「바스키아」는 ’96년 베니스 영화제 감독상 후보에
올랐다. 이미 앤디 워홀도 ’60년대에 많은 영화를 만들었었지만, 영화예술은 화가들과 아주 친숙한 것이다. 영화는 근본적으로 빛의 예술이기 때문이다.
바스키아는 한때 ‘흑인 피카소’라고 불리우기도 했었던, 흑인 출신으로서는 사실상 처음으로 정상급 화가로 인정받았던 80년대의 전설적 인물이다. 그가 죽은지 꼭 10년만에 미술관(서울 아트선재센타)에서 국내 개봉되는 영화 「바스키아」는, 강렬한 원시주의적 야만성과 즉흥적 기지 등이 발휘하는 독특한 감각으로
현대미술의 중요한 성과를 보여준 그의 미술언어에 대해, 영화라는 대중적 장치를 통해서 우리들이 친근하게 접근할 수 있는 통로를 만들어줄 것이라고 보여진다.
1960년 뉴욕 브룩쿨린에서 태어난 바스키아는, 15살때 가출해서 거리의 부랑아로 자라난다. 그는 또 한사람의 동시대 거리화가 케이쓰 해링이 그러했던 것처럼,
길거리와 지하철에서 낙서로 처음 자신의 예술을 시작한다. 해링이 흰색분필로
검은 흑판에 그림을 그리다가 경찰에 체포당했다면, 바스키아는 지하철의 내부나
몸체에, 그리고 건물의 외벽에 스프레이를 뿌리거나 단단한 벽을 긁어 표현하는
그라피티Graffiti를 하며 그림을 그렸었다. 그는 고등학교시절 알게된 낙서화가
알 디아즈와 함께 SAMO 프로젝트라고 불리우는, 그림과 경구를 써넣는 낙서로서 세상에 발언하는 운동을 펼쳤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뉴욕현대미술관MOMA
앞에 가면 가난한 무명의 화가들이 길거리에 자신들의 그림을 전시해 놓고 기회를 엿보고 있다. 바스키아도 엽서나 티 셔츠 위에다 그림을 그려서 MOMA를 찾는 관광객들에게 판매를 하며 살았었다.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던 바스키아의 예술적 재능이 처음 알려진 것은, 이스트 빌리지에 거주하는 예술가들이 모여 개최한 ‘타임 스퀘어 쇼’(1980)부터였다. 그리고 바스키아에 대해 처음으로 본격적인 평론을 시도한 사람은 평론가 르네 리카르였는데, 『ART FORUM』(1981년 12월호)에서 “젊은 뒤비페의 모습이 보인다”고 썼었다. 그의 주선으로 바스키아는 그룹전 ‘뉴욕 뉴 웨이브’(1981)에서 주목받게 되고, 이듬해 팝아트의 대부 앤디 워홀을 만나면서 워홀의 적극적 후원아래 첫 개인전을 성공적으로 갖게 된다. 그후 바스키아는 취리히, 동경, 로테르담 등 해외 에서 개인전과 그룹전을 가졌고, 각 언론매체에 의해서 흑인 천재화가로 대중들에게 소개되었으며, 상업적 성공과 예술적 성공을 동시에 거 머쥐었다. ‘83년 비엔날레 전시회’(1983, 휘트니 미술관)와 ‘카셀 도큐 멘트’ 참가이후 그는 뉴욕 타임즈 매거진의 표지모델이 되면서 정상급 아티스트로서 인정받았지만, ’88년 8월 12일 불과 27살의 나이에 자택에서 숨진채 발견되었다. 사인은 마약의 장기 과다복용으로 인한 약물중독.
슈나벨 감독은, 집을 나온 바스키아가 거리 화가로 살아갈 때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차분하게 그의 삶을 뒤쫓고 있다. 바스키아를 통해 이 사회를 살아가는 예술가의 초상의 한단면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거대조직의 백인 주류 사회에서 소외된
인간들의 삶과 폭력적인 도시
의 무질서와 혼돈을, 격렬하고 직설적인 미술언어로 드러냈다. 그것은 체제순응주의적인 사고를 깨트릴 때만 비로소 가능한 것이었다. 특히 바스키아는 냉장고나 입고 있는 옷, 미식축구용 헬멧 등의 일상적 소품에도 즉흥적으로 작업을 해서, 경쾌한 속도감으로 도시인들의 일상적 삶을 신선하게 표현했다.
영화 「바스키아」 속에는 바스키아의 절친한 친구였던 또 한사람의 뛰어난 거리화가 케이쓰 해링은 등장하지 않는다. 바스키아는 해링이야 말로 진정한 거리화가라고 생각했었고, 그의 재능을 높이 인정했다. 해링 역시 바스키아 사후 3년 뒤에 28살의 젊은나이로 세상을 떴다. 사인은 AIDS. 예술가들의 삶은 자주 영화의
소재로 선택되었었다. 로댕의 연인이자 그녀자신 뛰어난 조각가였던 「카미유 끌로델」이나,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화가 중의 한사람인 「파블로 피카소」, 「달리」, 빈센트 반고호와 동생을 중심으로 불우한 예술가의 내면세계를 그린 「고호와 테흐」같은 영화들은 화가들을 소재로 하고 있다. 또 음악가들을 소재로 한
영화들로는 밀로스 포만 감독의 ’84년 아카데미 수상작 「아마데우스」, 베에토벤의 여자들을 중심으로 그의 음악적 생애를 더듬어 본 게리 올드만 주연의 「불멸의 연인」, 쇼팽을 소재로한 안드레이 쥴랍스키 감독, 소피마르소 주연의 「쇼팽의 푸른 노트」, 「슈만과 클라라」 그리고 「토스카니 니」 등을 들 수 있고, 문인을 소재로 한 영화는 상징주의의 천재 시인 베를렌느와 랭보의 동성애를
다룬 「토탈 이클립스」, 우리나라 시인 이상의 삶을 다룬 「금홍아 금홍아」 등이 있다.
영화 「바스키아」는, 그러나 같은 동료 화가가 감독을 맡았다는 점에서 이런 예술가들과 또 한번 구별된다. 왜냐하면 영화는 바스키아의 삶과 예술에 관해 말하고 있는 것 같지만, 어느 한쪽으로는 감독자신의 세계를 드러내 보여주고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바스키아의 그림(영화 속의 그림은 슈나벨 감독이 직접 그렸다)을 보는 재미도 있고, 평론가, 큐레이터, 미술상, 동료화가들 사이의 갈등이나, 뉴욕화단의 분위기도 덤으로 알 수 있는 영화가 「바스키아」다.
화가출신 감독의 뛰어난 영상
바스키아 역에는 연극 무대 출신의 제프리 라이트가 영혼의 상처와 정신적 성취를 보여주고 있으며, 금발의 앤디 워홀에는 유명한 바스키아 그림 애호가인 데이비드 보위가 맡아서 워홀 특유의 말투와 표정을 보여주고 있으며, 감독자신인 슈나벨 역에는 게리 올드만이, 바스키아와 계약하는 미술상 역에는 데니스 호퍼가,
바스키아의 친구 역에는 윌리엄 데포, 방송기자 역에는 크리스토퍼 워켄이 맡는
등 호화케스팅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바스키아의 내면에 대한 영화적 접근이 충분하게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서사적 구조를 필요로 하는 부분이었는데 화가인 슈나벨 감독자신이 각본까지 직접 맡았기 때문으로 보여진다. 가까이서 바스키아의
삶속에 동참했었던 감독자신의 시선으로 축조된 서사구조는, 바스키아에 대한 인간적 이해의 깊이를 더 할 수 있었지만, 내면의 복잡한 심리적 갈등을 영화언어로
치환시키는 것은 만족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대부분 블루톤으로 만들어진 「바스키아」의 영상은 화가출신 감독이 만들 수 있는 뛰어난 것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바스키아 같은 화가들은 한국에도 많다, 다만 한국에는 뉴욕이
없을 뿐이다”라고 말하면서, 배운 것 없고 이름도 없는 거리의 무명화가가 그의
뛰어난 예술적 재능만으로, 세계 최고의 화가로 인정받을 수 있는 뉴욕의 예술적
풍토를 부러워 하기도 한다.
영화 「바스키아」가 우리의 열린 예술적 환경을 위해 조금이라도 기여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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