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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사로운 봄볕이 청마루에 성큼 다가들 때쯤, 빨래를 끝낸 어머니는 청마루에 걸터앉아 나를 불렀다. 머리를 감고 옷도 말끔하게 갈아입은 나를 무릎에 뉘고 귀를 후벼주셨다. 어머니의 무릎을 베개 삼고 누운 내 동공으로 물기 걷혀가는 빨래들이 꽉 차게 들어왔다. 마당을 가로질러 빨랫줄이 길게 걸쳐져 있었다. 할머니의 흰 고의적삼, 아버지의 푸르죽죽한 바지, 어머니의 얼룩덜룩 일 바지, 우리들의 푸르뎅뎅한 옷들과 발꿈치를 기운 양말, 그리고 가슴이 볼록해진 언니들의 속옷을 감춘 옷들 위에 봄볕이 걸렸다. 봄볕은 색고운 꽃들을 피워내고서도 우리 집 빨랫줄에 걸린 옷들의 때깔만은 어쩌지 못하는지 그저 그런 색 바랜 옷들뿐이었다. 옆으로 드러누운 놈, 철봉에 거꾸로 대롱대롱 매달린 놈, 무릎이 꺾여 널린 아버지의 바지, 허수아비처럼 헤벌쭉 걸린 놈, 마악 철봉이라도 넘을 듯 짧게 걸린 동생들의 바지 등 하여튼 제 깜냥대로 빨랫줄이 축 늘어지게 걸렸다. 그러고도 모자라 마당가 나뭇가리 위에 세상은 나 몰라라 번듯이 드러누운 빨래도 있었다. 우리 집 빨랫줄은 다른 집들보다 길었다. 식구가 많은 탓도 있었을 게다. 여름엔 마른빨래와 젖은 빨래가 시나브로 걷히고 내걸렸으며 겨울이면 옷들마다 고드름을 매단 채 굽힐 줄 모르는 뻣뻣한 자존심처럼 며칠이고 걸려 있었다. 비오는 날을 빼고는 빈 빨랫줄을 보는 날이 드물었다. 비가 오면 빨랫줄에 앉아 놀던 제비들이 처마 밑 제집을 찾아들 듯 빨래들도 처마 밑에 걸린 간이 빨랫줄에 빼곡하게 피신을 했다. 하지만 마당의 빨랫줄은 바람 비 눈서리를 일 년 내내 맞으며 마당을 지키고 있었다. 빨랫줄은 아버지를 닮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들은 아버지의 빨랫줄에 걸려 나부끼는 옷들이었다. 아버지의 어깨와 팔에 매달려 그네를 뛰고 철봉을 넘고 드러누워 뒹굴며 놀았다. 옷들의 무게에 빨랫줄이 자꾸 늘어져 가면 어머니는 바지랑대를 다시 높이 곧추세우셨다. 지게 위에 얹힌 짐이 무거워올수록 다시 고의춤을 추스르고 지게 끈을 고쳐 메고 지게 작대기를 바투 거머쥐듯이 어머니와 아버지의 안간힘에도 바지랑대는 번번이 휘청거렸다. 아버지는 고만고만한 조무래기들이 어깨와 팔에 오종종 매달려 놀 때는 흐뭇한 얼굴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빨랫줄에 걸린 옷들이 많아지고 바지 길이가 길어질수록 위태위태한 바지랑대는 쉬이 휘청거리고 어머니는 고임돌까지 받쳐 바지랑대의 힘을 덜어보려 애썼다. 그래도 바지랑대가 바들바들 떨리면 힘겨운 짐을 나누어 짊어지듯 어머니는 바지랑대 하나를 더 세웠다. 아버지의 어깨가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작은 섬처럼 안타까워 보였을까. 또 하나의 바지랑대는 어머니가 이룩하는 다릿발, 손을 맞잡고 험한 바다를 건너기 위한 다리 하나가 놓였다.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 어머니는 난생처음 나에게 새 옷을 사주셨다. 빨간 스웨터에 초록색 나팔바지였던 새 옷의 그 환상적인(?) 색상의 조화가 나를 마냥 들뜨게 했다. 영락없는 한 송이 꽃이 아닌가. 나는 언제나 그 새 옷 한 벌만 입고 다녔고 어머니의 성화에 못 이겨 겨우 옷을 갈아입었다. 어머니가 깨끗하게 빨래를 해서 빨랫줄에 널어놓으면 마루에 걸터앉아 다리를 달랑거리며 봄바람에 나붓나붓 흔들리는 옷을 흐뭇하게 바라보기도 했다. 새 옷이 마르면 빨리 갈아입을 요량으로. 그 이후로 어머니가 새 옷을 사주었던 기억이 내겐 없다. 언니들에게 물려 입어 언제나 색 바랜 옷들 사이에 눈부시게 환한 한 벌의 새 옷은 지금도 잊히지 않고 강렬한 색채로 남아 있다. 그러나 나는 어려서 빨랫줄에 빨강, 파랑, 노랑의 새 옷들이 화려하게 내걸릴수록 아버지의 바지랑대는 더 힘들게 휘청댄다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철들 무렵의 어느 날, 세찬 바람이 불고 바지랑대는 심하게 흔들렸다. 아버지는 몹시 취해 집으로 돌아와서는 핏줄 도두라진 붉은 얼굴로 온몸의 기운을 가슴에 모아 토악질을 하셨다. 무엇이 아버지의 가슴을 저리 쥐어짜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우리들의 지주였고 지축이었던 아버지가 ‘쿨렁쿨렁’ 토악질을 할 때는 우주의 지각변동이 시작된 듯 세상이 요동쳤다. 그 반동은 우리들을 어지럽게 흔들어댔고 천방지축이던 우리들에게 물기 걷혀가는 빨래들처럼 철이 들게 했다. 아버지의 처진 어깨, 휜 등을 바라보며 스스로 가벼워져야 함을 깨달아 갔다. 흙에 패대기쳐지지 않고 스스로 사뿐히 내려서는 날까지 아버지의 어깨는 간간이 전해지던 흔들림조차 유희에 지나지 않는 무풍지대였다. 어머니의 무릎에 누워 꽃같이 빨갛고 푸른빛, 색을 잃어버린 무채색 영상들이 섞여들며 내 머리통은 봄볕 아래 졸고 있는 노란 병아리처럼 자꾸 봄 속으로 잠겨들고 있었다. 봄볕에 가랑가랑 말라가는 빨래들처럼 나는 나른한 꿈길에서 나부끼고 마당엔 빨랫줄이, 속이 텅 비어 버린 대나무 바지랑대가 십자가처럼 서 있었다. 남편이 평소보다 술을 과하게 마시고 현관을 들어서면 가슴에 한 줄기 찬바람이 싸하고 지나간다. ‘아버지의 술잔은 반이 눈물’ 이라는 말을 알고부터다. 어릴 적 아버지에 대한 기억 때문인지 남편의 대취(大醉)에 잦아드는 가슴은 그를 붙들어 세운다. 안색을 살피며 바라본 그의 어깨에도 여지없이 삶의 무게가 빼곡하게 걸려 있다. 말없는 토로(吐露), 그의 휘청거림을 바라보면서 선뜻 짐을 나누어 짊어지기에 나는 많은 주저와 입술을 깨무는 용기가 필요했다. 몇 년 전, 십오 년 전업주부를 탈출했다. 유년의 외적 허기를 채워주기에 안성맞춤인 현대인의 소비 천국이라 할 수 있는 백화점이 나의 일터가 되었다. 마네킹이 입고 있는 날렵하고 맵시 있는 옷들, 물감을 어떻게 버무리면 저렇게 곱디고운 색채가 나올까 싶은 옷이며 온갖 명품과 보석들이 눈만 돌리면 유혹의 눈길을 보낸다. 그뿐이랴. 여자가 중년의 나이에 접어들면 명품 가방 하나쯤은 있어야 하고 모피코트를 떨쳐입고 연말 모임에 참석해야 격이 산다는 둥 카드 할부로 장만하라는 둥 유혹의 말들도 난무한다. 장만이란 내 집 마련이나 가전제품을 들일 때나 쓰는 말인 줄 알았는데 몸치장에 장만씩이나 해야 한다니 난 여자가 아닐까. 그 어느 것 하나도 갖지 않았다. 갖지 못한 겐가. 어느 쪽이든 내가 그들의 유혹에 초연할 수 있는 것은 그것들을 가진다고 행복할까 싶은 내 마음이다. 그것은 잠깐의 만족일 뿐 행복이 아님을 나는 안다. 유년의 나의 집 빨랫줄을 떠올린다. 남편의 가뿐한 모습이 좋다. 어머니가 그랬듯 난 남편 곁에 나란히 선 바지랑대가 되고 싶다. 우리의 빨랫줄에 명품이 내걸리고 비싼 옷이 나부낀다면 우리 집 경제의 축이 기우뚱할 것은 예나 지금이나 자명한 사실이다. 남편의 등이 휘지나 않았는지 가만히 쓸어볼 일이다. |
<당선소감>
수필과 멀어진 지 꽤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생활 때문이었다고 말하기에는 부끄러운 변명이 되겠지만 어느 날 문득 들추어본, 먼지가 내려앉은 글들을 다시 갈고닦아 오늘의 영광을 안게 되었습니다.
임시공휴일인지라 북적이는 손님들로 바쁜 시간, 당선 전화를 받고 솟구치는 눈물과 기쁨을 꾹꾹 다져 누르며 고객들을 맞았습니다. 누구도 저의 달뜬 마음을 눈치채진 못했습니다. 제게도 고배(苦杯)의 긴 시간이 있었습니다. 쉽게 주어지는 영광은 영광이 아니겠지요.
오직 수필에만 매진했던 시간만큼 수필과 담을 쌓고 산 세월이 지나갔습니다. 가끔 옛 문우들이 그렇게 물어옵니다. 언제 생활에서 수필로 회귀하느냐고. 저는 말합니다. 언제가 될지 알 수 없지만 꼭 돌아가겠다고. 수필을 잊은 건 아니라고 말입니다.
신춘문예 당선을 계기로 수필을 다시 쓰고 싶다는 뻔한 얘기는 하고 싶지 않습니다. 수필의 내공도 중요하지만 아직 삶의 내공이 제겐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가정을 갖고 아이들이 한참 쑥쑥 커갈 즈음 아버지라는 이름의 무게를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키 작고 깡마른 아버지를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아려왔습니다. 그런 저의 마음이 ‘빨랫줄과 바지랑대’를 쓰게 하였습니다. 오래전 돌아가신 아버지와 지난여름 하늘나라로 간 어머니도 기뻐하시겠지요.
사랑하는 가족과 저의 글 선생님, 저를 아는 모든 분들과 이 기쁨 나누고 싶습니다. 부족한 글 어여삐 여겨 제 이름 곁에 평생 걸어둘 큼지막한 상패를 안겨주신 심사위원님께 무한한 감사를 드립니다.
△1964년 하동 출생 △부산중앙여상 졸업 △2005년 CJ문학상 수필부문 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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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목일
한후남 수필은 체험의 문학이다. 그러나 체험의 단순한 기록만으론 부족하다. 자기를 객관화하면서 자신을 비추어보는 인간탐구의 문학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통찰을 통해 인생의 깨달음의 꽃을 피워내는 데서 수필의 가치를 찾을 수 있다. 200편 가까운 응모작품들은 평년 수준이었다. 대다수의 응모작들이 일상사의 단순한 형상화에만 머물러 있어 아쉬움이 컸다. ‘수필은 붓 가는 대로 쓴다’는 잘못된 인식으로 인해 구성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평범한 소재의 기술에만 치중한 작품이 많았다. 두 사람의 심사위원이 각기 5편씩을 골라내어 10편의 후보작을 놓고 세 번씩 정독한 후, 장고(長考)의 토의가 있었다. 주제의 일관성과 소재의 참신성, 구성의 효율성을 중점으로 문장력을 갖춘 작품의 완성도 등을 따져서 이두래의 ‘빨랫줄과 바지랑대’를 당선작으로 선했다. ‘빨랫줄과 바지랑대’는 전통사회 가장(家長)의 무거운 책임감을 바지랑대로, 또 그 식솔을 빨래로 형상화시킨 작품이다. ‘할머니의 흰 고의적삼, 아버지의 푸르죽죽한 바지, 어머니의 얼룩덜룩 일 바지, 볼록해진 언니들의 속옷…’ 등의 묘사가 예사롭지 않다. 가족애의 진한 결속 없이는 눈에 잘 띄지 않을 글감이다. 흔한 소재를 갖고 세밀한 관찰력으로 주제를 끌어내는 솜씨가 만만찮아, 그 점을 높이 평가했다. 후반부의 구성이 느슨해진 것만 주의한다면 앞으로 좋은 수필을 쓸 자질을 갖추고 있어 신뢰감이 들었다. 당선작과 끝까지 겨룬 ‘마디’는 주제와 제목의 참신성은 있었으나 주제를 살려내는 데는 미흡했다. 또 다른 경선작 ‘오이 무침’은 글의 주제와 제목이 동떨어지고 주제를 풀어내는 방향이 선명하지 않으나 묘사력은 탁월했다. 아쉽게 뽑히지 못한 두 응모자는 다음 해를 기대해도 좋을 것 같다. 응모작 과반수가 평범한 소재에 안일한 태도로 창작에 임하는 인상을 주어, 치열함이 아쉬웠다. 사회 전반에 걸친 경기 침체의 영향인 듯, 남성들의 축 처진 어깨를 연상하게 하는 글들이 많아 마음이 무겁다. 그늘진 구석구석에 따사로운 햇살이 고루 퍼지기를 기대하며 당선자에게는 축하를 또 아쉽게 뽑히지 못한 두 분에게는 격려를 보낸다. <심사위원 정목일·한후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