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에 나앉은 사람이면 다들 흐르며 머무는 물너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뒷전에 있는 신두만이도 그런 축의 하나였다. 앉아 무심히 흐름새를 보고 있노라면 물이 흐른다기보다 강이, 강기슭이 떠내려가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때론 문득 저 자신이 물굽이 얹혀 이렇게 흐른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는 머리때가 켜로 올라 시커멓게 더뎅이진 퇴침을 깔고 앉아 담배를 피우며 그러고 있었는데, 땟국에 절어 끈적거리는 퇴침이라 바짓가랑이에 냄새가 묻었을 때처럼 개운찮아 이따금 엉덩이를 궁싯거리곤 했다. 흐르는 물을 한참 쳐다보고 있으면 눈이 침침해 가물거려진다.
두만은 시력의 피로를 느끼자, 방풍림으로 늘어선 미루나무 키 너머로 들앉은 강 건너 마을 잠실리 동구에 시선을 두었다. 그러면서 오덕칠이가 생각나 찾으면 보이기라도 하는 듯 잠실리 지붕 위를 한바퀴 둘러보며……놈, 열무 겉절이에 살찐 막걸리 하며, 배 뚜드리겄다, 하고 중얼거렸다. 한 방에 있는 오덕칠이 오늘은 현장 일감이 차례 안 가 처음으로 나루 건너 잠실리 농가에 품팔이 가곤 아직 오는 길이 아니었던 것이다. ……님도 보고, 장도 복, 놈 재미를 아주 담아올 거라, 덕칠이 간 김에 달포 전부터 말이 오고 간 그 처녀 선까지 봤겠다 싶어 샘이 나는 건 아니지만, 두만은 저도 모르게 투덜거려졌다. 이 합숙소에 든 인부들이 노임 타는 날마다 밀주를 들여오던 줄뻔댁이 중매를 서보겠다고 했던 거다. 자기 말로, 서른일곱에 과부가 되어 벌써 이태째나 수절해온다는 그녀를, 인부들은 말만 잘 놓으면 일도 공짜로 치를 수 있잖겠나 싶고, 그녀 또한 장삿속으로 치마폭 여밀 줄 모르는 터라, 인부들은 너나없이 줄뻔댁이라 불러온다. 그녀는 덕칠에게 선봬줄 처녀 말을 꺼낼 때, 서두를 ‘먹고 나서 셈친대도 씨주머니에 소금 끼얹을 색시는 아니라’고 뗐을 정도로 입부터가 걸진 여자였다.
강변을 일구어 땅마지기나 내 것 만들고 식구마다 들며 나며 묻혀들여 소문 안 난 든부자이므로, 처녀가 한쪽 눈을 마저 뜨고 머리 길렀더라면 노가다판 잡동사니쯤 어느 물건이더냐고 내려다볼 처지나, 한쪽 눈을 못쓰는 죄로 본 적이 없는 사내나마 곁눈질하게 된 형편이라고 은근히 덕칠의 어깨를 주눅해놓기도 했지만, 저쪽 사정도 누구 말마따나 ‘딱하디딱한’모양이었다. ……시집 못 간 나이 스물아홉이면 적은가? 이구 십팔 이놈 팔자엔 그런 것도 안 걸려, 두만은 중얼거린 사이 침에 불어터진 담배꽁초를 뱉고 나서, 하여간 오늘밤은 귀청에 가난이 들어 잠 못 자진 않게 됐다고, 덕칠이 건너 여기가 여간 기다려지는 게 아니었다. 이 합숙소에 신세를 지는 사람들은 진종일 고된 노동에 근력을 버렸음에도 밤엔 이슬로 먼지가 자 이슥해지도록 잠에 못 들어가 한이었다. 물론 죄다 그런 건 아니다. 고향에 머리 풀어준 여편네가 있고 사립문 지킬 자식 보아 땅뙈기라두 두어, 농약대나 비료값이 아쉬워 며칠씩 머물다 푼전이라도 집어넣게 되자 떠나는 사람들이야 편지 한 자를 하려도 잠 쫓다가 종이나 버리기 일쑤지만, 두만이나 덕칠이말고도 이미 별명에 본명을 먹힌 함경도 아바이 최판식 영감, 의정부가 고향이라는 양곤죠 김민득 영감, 언동이 느려 서산 엿가래로 불리는 장자근식이 같은 떠돌이에겐, 잠복마저 박해 풋새벽의 선잠밖엔 차례 오지 않는 거였다. 그러던 터에 덕칠에게 혼담이 생기니 누구라도 관심 안 갈래야 안 갈 수 없는게, 우리같이 드센 팔자라도 언젠가 임자가 나타나리라는 바람, 그리고 우선은 화젯거리가 생겨 두만이 즐거워했던 것이다.
밤은 언제나 먼 길을 타고 와 맨 나중에야 시야에 멎는다. 두만이 어둠을 의식했을 때, 강 건너 마을은 멀리 관악산의 무딘 봉우리 두어 부리만 놓고는 어느새 별빛을 받고 있었다. ……니미 오늘밤에 아주 쇼부를 봐버릴 작정인가 왜 여태 안 와? 기다리기 지겨워진 두만이 중얼거릴 때 뒤에서 가까운 인기척이 들렸다.
합숙소 야외등에 몸을 드러낸 사람은 두만이 또래로 스물대여섯이 될까말까 하는 낯선 청년이었다. 낡은 야전용 군용백을 짊어진 청년은 테 나간 밀짚모자를 벗으며, 여기가 수원지 취수탑 공사장 인부 함밧집(합숙소)이냐고 묻는다.
“알구서 와설랑은 뭐슬 그런디야?” 서산 엿가래가 부러진 대답을 하자,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다더냐고 청년이 재차 물었다. 갈 길이 없어 현장 사무실에 들렀다가 가보라고 하여 왔다는 것이다. 다된 일판에 사람만 자꾸 붙이면 어떡하느냐고 모두들 이맛살을 찌푸린다. 두만은 훑어본 청년의 입성이 낡기 전엔 꽤 입을 만한 것이었겠고, 몸매, 인상, 말씨의 어울림이 촌놈은 아니라 여기고 있는데.
“일감은 워디 맨날 쌓였간? 서까래 빼다 바지랑대 깎는 심판인디.”
일거리가 동나가 없을 일 꾸며 해먹는 중이란 말로 서산 엿가래가 거절해버릴 참이었다. 그런 낌새 알아차린 청년의 며칠 분만 여투어달라는 배짱에 값하기엔 모자란 거였다. 그럴 때 낯선 목소리를 보러 내달은 합숙소 안주인이 반색으로 안에 데려갔다. 하숙을 치는 것도 장사라 되돌려보낼 까닭이 없는 것이었다. 새 끼니 대주고 재우며 하루 백이십 원씩인데, 노임을 일당 이백 원씩 받더라도 그냥 있을 의향이면 시민증 먼저 맡겨야 되며, 그것은 떼먹고 날 도둑놈이 더러 있어서란 안주인의 싫은 소리가 들리자, 모두들 한마디씩 두런대었다. 일손이 늘수록 공사 기간을 줄어 다시 떠나야 할 날이 훨씬 당겨지는 탓에서 그러는 거였다.
비 안 새지, 식구 단출하지, 이 방이 제일이라며 방을 정해주는 안주인의 목소리에 두만은 나오는 욕을 침에 뱉었다. 가장 쓸 만한 방이라면 두만이 덕칠이와 둘이 써온 가운데 방을 정해주는 게 뻔해서였다. 이윽고 청년은 발도 닦지 않고 방 가운데로 나자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판자벽이라 방에 깔린 가마니귀만 들썩거려도 이내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이다. ……아무리 하던 노가다일망정 통성명도 없다니, 낫을 베고 누울 놈, 하긴 노가다 인사 따로 있었나, 무턱대고 서로 형씨 하면 그만이지, 그래도 두만은 마뜩찮아 담배를 다시 붙여 물었다.
덕칠이 돌아온 건 열시나 가까이 돼서였다. 그를 보자,
“전에 보던 기부는 아닌 모양이다야.”
하니,
“넌 왜 여태까장 잠 안 잤데?”
라고 묻기나 할 뿐, 별다른 기미를 내 보이진 않았다. 두만은 잠실리 소식 궁금하여 잠이 오겠느냐고 되묻고 나서 실은 방에 새 식구가 들었다고, 한데 생긴 꼴이 노는 꼴이더라고 어딘지 탐탁잖다며 떫은 입술을 해 보였다. 덕칠은 그까짓 거야 아무일도 아닌 일 아니냐는 눈으로, 형이 아우 구슬리듯 두만의 어깨를 툭 치고 만다.
“줄뻔댁이 말해줘설랑 어떤 뇡삿집 샛밭에 주녀리콩 뒤 말 있어주고 왔다야, 그루갈이로 많이 갈긴 했다는디 쥐가 닿았나 드문드문 나서……거 농사 실농했던걸.” 방에 들어서자 덕칠은 걸린 남방을 내려 갈아입으며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막걸리두 한 양푼 걸치고, 헌디 멕여주는 것도 션찮으메 둔은 제우 이십사십 원배끼 안 주더라야, 너무 하리여.”
“맞전이라 괜찮구먼 뭐.”
“모르겄다. 시방이사 뺏기가 있으니께 이러지, 내중에는 워쩔까나 허구 오며 생각헌께 부애가 나서 시펄……”
덕칠은 새삼스럽게도 심각한 낯을 지어가며 방바닥에 주저 앉았다. 두만은 또, 이게 선뵌답시고 주춤대가가 졔집한테 차인 분풀이를 못 해 저러나 하여 뭐라 말 붙이기가 망설여졌다. 둘이 담배만 죽이고 있노라니, 자는 줄 안 청년이 옆구리를 두어 번 긁적거리다 일어앉으며 “ 이 방에 벼룩이 있수?”하고 나서는 갑자기 생각난다는 양 “참, 이거 인사도 없이 미안합니다.” 그는 자기가 박영식이란 사람인데 잘 부탁드린다고 간단히 말하고는 난 신두만이고, 오덕칠이요, 어쩌고 할 사이, 들쳐메고 오던 야전용 군용백을 모로 세워 좀 높여 베고는 두 다리를 뻗으며 눈을 감는다. 그 꼴이 두만이 낯을 좁히며, 내 보기 그렇다라잖다더냐는 시늉을 하자, 덕칠은 “이분 식사나 하셨나…… 형씨 저녁은 먹었소?” 하고 친절을 내밀어 본다. 덕칠이 성질이 니 하던 예로 미루어보아, 대번 너 갈빗대 볓 개비 솎는다 하며 곧 시비가 붙을 것으로 안 두만은 좀 실망 같은 걸 느꼈다. 떠돌이 노동자들은 초면 인사부터가 아주 거칠거나 반대로 동지 의식과 거기서 우러난 동정심에 기울어, 조용하고 점잖은 두종류가 있고, 말을 시켜보아 대꾸하는 투로, 먹은 물이나 밟아온 길을 넘겨짚어 곧잘 이용해먹곤 하는 법이다. 덕칠이 거친 편인 반면 두만은 그러질 못하는 천성이 소심한 위인이었고, 그러기에 지금껏 불쾌하고 불안하기까지 한 거였다.
“그야……” 박은 상대하기가 성가시다는 투로 대답한다.
“학생이슈? 요새는 무전 여행 댕기는 사람도 흔헙디다!” 덕칠은 마지못한 대답에 거만 떠는 게 아니꼬워 오금을 잡아볼 셈이었으나, “최종 학교로 의무 교육 수료한 지가 십 년이 넘는데 학교가 어디야.” ……요거 노가다 중에도 바닥 노가다로구나. 말발이 무디잖은 걸로는 콧잔등에 책먼지깨나 앉던 녀석 같기도 한데, 하다가 다시 덕칠은 “고향이 워디슈?” 해놓고는, 물어를 봐도 너무 촌스럽고 서툴렀다고 자탄하며 두만이 볼을 슬쩍 훔쳐봤고, 그 점을 에워볼 양으로 얼른 “고향에는 다들 있슈?” 해버린다. 양친과 동기간, 먹고 살 만한 터전 따위를 물은 거였으나, 박이 무슨뜻이냐고 눈을 들어 멀거니 바라봄에 시선이 닿자 엯 못 배운 소갈머리는 할 수 없구나라고 자책한다.
“양동 밑번지에서 나서 도동 3통서 크고, 종삼건민약국 안채에서 강가들도록 애비는 수배를 해도 나타나질 않아” 하는 박의 태도는, 상대도 안될게 말벗 삼아보려고 주접떨 것 없이 자빠져 자기나 하라는, 닳아질 대로 닳아진 꼴이었다. 덕칠은 망신인데 했지만, 무안해진 낯을 두만 앞에, 더구나 박에겐 보일 수도 없기는 하지만 이왕이면 한번 눌러나 보자는 생각도 들어 “허기사 나도 우리집 보기개가 마루 밑에서 새끼 갈 때 배꼽 뗀 신세지만……”
했는데, 그나마 어조가 여물지 못하고 중동무이를 매게 되자, 덕칠은 또 말꼬리에 맥없는 웃음을 이어놓았다. 그러니까 더욱 쑥스러웠다. 그래 그는 다시 화제를 내어 이처럼 눅눅해진 분위기를 풀어야 될 거라는 부담을 제물에 느끼며 당황해하다. 잠실리로 일 간 김에 줄뻔댁이 먼발치로 보여본 노처녀를 이야깃거리로 쳐들었다.
“얘 두만아, 저 근너 늙처녀 말여, 그 작것을 뵈긴 봤는디……”
“듣던 말보다는 날씬하담?”
두만이 어색해서 어쩔 줄 모르던 낯을 약간 풀며 나온다.
“그렇기나 했으면 오늘 해전에 연애를 한판 했게? 그 정반대더란 말이다.”
예측한 바대로 박도 덩달아 몫을 한다. 하는 소리마다 건방지고 비위를 거슬리지만, 이미 한방에 든 이상, 서먹서먹하니 아래윗물 지어 지내느니보다야 한결 낫잖나 싶고, 대식 박의 언동은 가급적 묵살하기로 내심을 지어, 두만은 한마디 더 묻는다. “그꼴에 애꾸면 부르는 값도 없을 것 아녀?”
“눈이 반이면 세상을 작게 보는 데에 의의가 있겠군” 하며 박은 눈이 작아야 살림의 규모를 먼저 배울 거라고 은연중 위로삼을 말을 뒤로 댄다. 그러나 덕칠은 나이 겁나 지레 늙어엉덩이가 처지고 아랫배의 비곗살도 거의 내려버린 데다 땟물마저 충충하니, 한몸으로 엮어 산대도 보리누름철까지 썰렁하리라는 예감을 버리지 못한다. ……이상하게도, 그는 자기한테 혹시 변태적이랄 어떤 고장이라도 있는게 아닌가 하는 의문도 들었다.
어찌 된 셈으로, 여대생이나 그 또래의 한창 제철을 만난 성숙한 처녀에게선 아무리 가까이 대해도(그럴 기회란 게 별로 없기도 하지만) 아무런 신경을 못 느끼면서, 애도 굵은 남의 유부녀나 아니면 그 훨씬 아래의 어린 여고생들 뒷모습에선 가당찮게도 성욕이 발작한 말이다. 그 버릇으로 낮에 미스 장이란 노처녀를 보고도 하초가 무감각이었을 거다. 덕칠은 좀더 차근차근, 가급적이면 기억의테두리에서 벗어나간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원인을 찾아보기로 마음먹으며 누웠다. 줍자 잠을 설쳐 내일 하루를 공때리는 한이 있더라도 진지하게 머릿속을 감고 훑어보리라 다짐했다.
땀 빼지 않고 밥 들어가본 일이 없는 녀석이 하필 오늘사말고 고단한 건 뭐야. 아무래도 박가녀석과 동숙할게 불쾌하여 저러리라 여기며, 두만이도 팔베개를 하여 눕는다. 한번 누우면 일어나기 어렵다. 아예 전등들 꺼버려야 편하다 하면서도 한참만에야 두만은 상반신을 일으켜 소켓에 손을 가져가다 만다. 박이 배를 깔고 엎드린 채 베고 있던 군용백을 뒤적이며 뭘 찾고 있어서였다. 두만은 모로누워 슬금슬금 곁눈질을 하다가 시선을 바로했다. 백 안엔 칫솔, 면도기에서부터 철을 타지 않고 빨래해 입을 수 있는 자자분한 옷가지며, 실패에 바늘까지. 생략되고 간추려진 대로, 떠도는 홀아비 생활에 아쉽지 않을 만큼은 살림붙이가 뒤죽박죽인 채 담겨 있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뭐 새로워 보여서는 아니었다. 덕칠이나 두만이 자신뿐만이 아니라, 이 합숙소에 묵는 인부들이면 그만한 채비쯤 대개들 갖춰두고 있었기에 말이다. 다만 겉에다 소화제라고 볼펜으로 쓰인 가루약 한 봉지를 간수해온 것같이 보여서였다. 박은 약봉지를 집어들고 귀퉁이가 헐어 터지거나 누기가 차지 않았나 살펴보고 있었다. 온전함을 확인한 그는 바닥에 늘어놓았던 물건들을 싸집어 욱여넣고는, 약봉지는 맨 나중에야 여벌로 가지고 다닐 양말 속에 담아 접어놓고 백을 잠갔다.
“형씨는 소화제도 다 필요하슈?” 두만은 비렁뱅이가 소화제를 들고 다는 게 가소로웠다. 박의 안색이나 몸집으로 보아 위장병 또는 다른 무슨 고질이라도 든 위인이 아니어서였다.
“흐……” 박은 비죽이 웃으며 백을 베어 바로 놓고는,
“소화제도 좋지만 이건 쥐약이오.” 퉁명스럽게 대꾸한다. 순간 두만은 가슴이 섬뜩함을 느꼈다. 그렇게 말할 때 박의 두 눈에서, 보통 이상으로 번득이는, 노기 같은 서슬의 뻗침을 보았던 거다. 두만이 사람 몸에서 볼 수 있는 것 중 가장 징그러운거라고 알아온, 바로 그것을 본 셈이었다.
“형씨는 무슨 약을 상비하고 있구?” 잠수 후 박이 두만이더러 물었다. 두만이 대답할 말이 없다. 도대체가 일 년 열두 달 두고 약이 필요한 때라곤 없었으니 말이다. 덕칠이만 해도 가끔 테라마이신이란 걸 며칠씩 복용할 때가 있었지만, 두만에겐 몇 해짼가 ‘아까징끼’ 한 방울 바를 데가 없어온 터였다.
“하여커나 쥐약은 쓸데없이 뭐에 쓰요? 하루살이 나그네가……”
그 말에 박은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고 나서 실소를 하려다 참고 뭔가 생각해보는 눈치더니 정색으로 얼굴을 고쳐 말했다.
“보니 형씨도 조상 탓하기 전에 타고난 복을 몽땅 써버릴 모양인데, 그게, 그게 아니지. 값싸고 먹기 좋은 건 바로 이거야. 한 봉지 사슈, 사. 사서 갖고 다니다가 기분 날 때 맛보라는 건 아니고……어디까지나 겉봉을 감상하는 데에 의의가 있을 뿐이니.”
두만이 무슨 뜻인지 깨닫지 못해 어름거리니, 박은 쥐약의 용도에 대한 설명이라며, 제법 목소리가 듬직하게 가다듬어가지고 말에 말을 잇기 시작한다.
일껏 자기에 대해 검토를 해보려던 덕칠은 귓전이 시끄러워지자 돌아누워버린다. 말끝마다 신경을 건드려 생각이 이어지지 않아서였다.
박은 간단히 말해 사람이 죽음을 눈앞에 두지 않고 어떻게, 무슨 용기, 무슨 재미로 하루인들 견디겠느냐는 거였다.
“형씨, 이건 숫제 상식이니까 말이지 설교라거나 뭐 그쪽으로 오해하진 마쇼.” 죽음은 애당초 우리와 노상 함께 살고 있는, 없을 수 없는 물체 아니겠느냐고 박은 말을 이었다. 제격이 아닌 예를 드는건진 모르지만, 가령 숨을 신다는 것에 죽음의 일부를 마신 기분은 아니었는지, 햇볕을 받을 때 그것이 죽음에 이르는 분위기를 익히기 위한 요소란 생각이 들진 않았는지, 짐승들의 변모, 또 초목이 철을 따르는 과정을 보고서, 인간의 수명을 되새겨본 기회라든가…… “그런 것들에 대해 이 나이 먹도록 한 번도 유심해본 적이 없을 정도라면 문제가 다르니 두말할 나위도 없지만 형씨도 말귀는 있을거라 생각돼서 하는 소린데.” 어쨌든 우리의 일상에서 그럴 여가 따로 없이 틈틈이 때때로, 그럴 겨를이 있어도 죽음을 의식핮 못했다면 결국 삶에 관해서, 혹은 생명 그 자체에 대해서도 아무런 값어치도 못 느껴왔다는 결론이 나올 수 있다. 죽음 앞에서 삶은 있고, 그러기에 늘 죽음을 아는 자만이, 누가 살기 위한 발버둥을 쳐도, 그 버둥거림을 어떤 형태로 나타내건 간에 천박해, 더러워. 혹은 하찮고 업신여기지 않는 거다. 흔히 말이 쉬어 하는, 죽지 못해 산다는 건 누가 죽여지기를 기다리는 꼴이이 그야말로 정말 치사스러운 짓이다. 삶에 대한 용기, 욕망, 기대, 이것이 두루 갖춰져 있다면 살고자 누가 어떤 짓을 저지르건, 이 사회에선 법률 혹은 윤리, 도덕 따위로 이름한 연장을 만들어 그 규격에 따라 이해와 정상을 겸한 아량으로 받아 주는 것이지, 만약 모두들 무가치한 목숨만 붙들고 매달려 있다면 사회란 존재하기 전에 이미 있어야 할 필요성마저 없었을 것이다. “아까 말한 상식이란 말을 되풀이해서 이야기지만, 물론 이 땅엔 상식에서 그 이상도 이하도 없다고 나는 믿는데……”죽음은 어떤 형용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죽음을 본 사람이 있을까? 있다면 다만 죽음의 시체를 보았을 뿐이다. 그러기에 그것은 일상에서 잘 의식되지 않는데, 그것을 잊지 않기 위해서는 다른 무엇, 이를테면 예수나 불타의 성상 또는 그들의 말씀을 기록한 책자들보다 훨씬 휴대하기 짐 안 되고 감각이 몇 갑절 더 절실해지는, 죽음을 부르는 약, 값싸고 구하기 쉬운 쥐약. “어떠슈 형씨는…… 쥐약을 지니고 다닌다는 게 그렇게도 마땅찮으슈? 한 봉지 사넣고 다니슈.” 박은 실컷 씨부려놓고 거듭 당부한다. ……콩 궈 먹자는 소린지. 떡 치자는 소린지 알 수가 있나.
“누가 그렇디까?”
“내가……형씨는 하루 쌀밥 세 끼씩 먹으면서, 죽이나 가루것보다 근기가 있어 든든하단 생각만 해왔소?”
“다음 번에 공천을 받으셔야 할 텐디.”……보다보니 별난 녀석도 다 보네. 진작 덕칠이처럼 자는 시늉이나 했으면 기분 나쁜 소린 안 듣지. 이젠 잠자기 글렀다고 속으로 투덜거리다가, 허벅지에 모기가 앉아 신경질로 때려잡았다.
“형씨, 참 박형. 그 머리 한번 잘 쓰슈. 옳았어……” 못 들은 척하던 덕칠이 쓸쓸하게 웃다 말고 “보다 시연스런 사람 하나 보는디, 나 이거 내일부터 박형헌테 홀랑 반헐 것 같유그려.” 마치 무슨 감명을 받은 사람처럼 수다를 떤다. 두만은 덕칠이 전에 없던, 그답지 않은 주책이다 싶어 이맛살이 절로 오등거려졌지만, 말로는 뭐라 할 수 없는 입장이라 화제를 돌려봄이 상책이다 싶다. 아까부터 덕칠이와 내일도 현장 일거리가 차례 안 오면 어떡 할 것인가 상의해보고 싶기도 했던 거지만, 공사 준공일을 보름 남기고 있는 이상, 인부들은 너나없이 자기 거취 문제쯤 미리 해결지었어야 옳을 일이기도 했다. 구월 십일이니 이 밤도 다 새어가고 열나흘밖에 남지 않았다. 일해봤으니 아는 바이지만 앞으로 남은 바이라곤 현장 철수 작업과 그 부수 작업이 있을 뿐인데, 그나마도 기공 아래로 일해온 고참 인부들로부터 아래로 내려오며 서열을 따져 일시키니, 후참인 청년측들은 일거리 차례 오기 기다리다 모아둔 것마저 까먹기 십상인 것이다.
“물 건너 잠실리로나 가자야, 게는 아직도 뇡촌이라 일감을 찾으면 있것더라.” 덕칠인 두만의 몫까지 결론짓고 입을 다물어버린다.
어느새 찬바람이 났나, 굽도리 저쪽 귀뚜라미 소리에 머리가 그닐거리고 풀벌레 울음 소리를 실은 강물이 귓가로 흐르는데, 판자벽 틈으로 강물에 미역감고 나온 달이 발돋움해와 방안을 엿본다.
“벌써 초승달인가, 요새 무슨 달이랴?” 덕칠이 눈을 못 뜨고 중얼거린다.
“무슨 달은……이태백이 놀던 달이지.” 박이 잠긴 목소리로 싱거운 대꾸를 한다. 두만은 숨소리가 고르다. 잠에 곤드라진 모양이다.
……이태백이 놀던 달, 덕칠은 불현듯 향수에 젖기 시작한다. 달이 나올 때마다 그 넓은 잎새로 감추고 봬주지 않으려던, 순금이네 울타리 밖 돼지우리 곁의 오동나무 밑으로 달려간 것이다. 순금이…… 잡을 년. 덕칠은 속이 좀 후련해질까 하여 그녀 욕을 거듭 뇌까려본다.…… 올 가을엔 세상없어도 내려가야지. 그가 지난 봄 고향땅 등지던 날은 어제 낮처럼 선명한 기억으로 간직해오고 있다. 세월은 한번 가면 그만이라지만, 좋았던 시절에나 해당되는 말일 뿐, 아팠던 과거는 순식간에 되돌아오는 거였다. 그녀는 떠나기 전전날, 서울 가 있을 땐 다른 건 다 못 해도 서 돈쭝 정도의 금가락지만은 꼭 해다 주마고, 약혼을 그때 가 하잔 말에 굳은 대답까지 해놓고는, 이튿날 최장기가 나무하러 가는 산에 송황가루 훑는다고 핑계 대어 따라가 몸대줬다는, 그랬다더라는 소문이 날 짓을 해버렸던 거였다. ……염통으로 맺은 약속을 치마끈으로 풀어버리다니…… 말뚝을 박아둘 년. 솜털이 가시면서 짝사랑해온 순금이를 창기녀석한테 빼앗긴 생각은, 하면 할수록 지금도 속이 끓는다. 본디 그년과 창기와는 주고받는 사이란 풍문이 파다하긴 했지만. 돈이 미국이지. 리어카라도 사서 김장철 한때 부지런히만 끌어다 팔면 창기 머슴살이 한 해 새경에 비기랴는 계산도 해본다. 잡년, 덕칠은 당장 어째보기라도 할 듯 이를 악문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기분을 잘 다스려야 그나마 가능한 거였다. 앞으로도 속 못 차려 종전처럼 일할 땐 일한다고 먹고, 놀 때면 쉴 때 잘 먹어둬야 된다고 먹어조져, 수염이 자주 자라는 것밖엔 자라는 게 없이 돼선 안 될 것이다. 안정을 해야지. 터를 잡아 진드근히 눌러 배겨야 된다. 줄뻔댁 말마따나 비록 얼굴 없는 계집이라도 얻어 살게 되면, 굶네 먹네 해도 없는 것 한 가지 늘면 늘었지, 줄어들 건더기는 없을터이다. 강 건너 늙처녀, 경치는 쓸쓸하더라도 속맛에 살아갈 수 있다면 그것도 한 방편이긴 해. 덕칠은 밤새 뒤치락거리다가 파했다.
두만은 귓전이 시끄러워 눈을 떴다. 아직 먼동이 트지 않은 신새벽인데 잠은 그냥 달아나버리고 만다. 강기슭에서는 여전히, 죽는다, 참아라, 놔, 왜이래, 해싸며 울부짖는 소리가 계속되고 있다. 하룻밤에도 보통 한두 차례씩은 있는 일이어서 이젠 예삿일이나, 그래도 마음이 여린 두만이로선 불안하고 안쓰러움을 감당 못 하고 있었다. 뉘 집에서 복잡한 가정 불화가 일어 밤새껏 싸우다가 죽는답시고 강가로 뛰쳐나온 것일 게다. 아니면 돌림밥은 여이 떨어진 남자를 이리로 불러가지고 사랑, 결혼, 배신 따위의 말들을 입에 올려 태격거리다 뛰어든다고 신발을 벗었거나.
이 한남동, 보광동 일대의 한강변에 연접해 있는 동네 사람들은 집안에, 혹은 이성간에 불화가 일면 우선 강가로 뛰쳐나와 한바탕 북새를 핀 후에 그래도 참을 것인가, 아니면 다른 해결책을 강구할 것인가를 창창로 생각해보는 거북한 버릇이 들어 있는 모양이었다. 저런 소동뿐이지 막사 투신하여 시체로 귀가하는 꼴을 보진 못했으니 말이다. 저런 꼴을 구경할 때마다 두만은 으레 돈을 생각하곤 했다. 오가는 소릴 들으면, 가정 불화일 경우 대개는 돈이 원인이었다. 물론 그 전부터도 그는 죽이고 살리는 고삐를 쥔 놈이 돈이란 놈이라고 믿어오긴 했지만.
저의 경우도 그는 열대여섯의 여린 나이 때부터 장돌뱅이로 한 이태를 보냈었고, 끝내 절도 미수라는 누명을 달고 도망쳐온 경력이 있는 터였다. 그는 자전거 한 대로 하루 오륙십 리 자갈길을 달리며 닭장사를 했던 건데, 재미를 알 만해진 무렵에 폭삭 망해버렸고, 병들어 내놓은 닭을 싼 맛에 사들였다가 성한 닭에게 전염시켜 하루아침에 죽은 고깃값으로 처분한 게 그 원인이었던 거다. 밑천이 적지 않게 축나자 그는 눈이 뒤집혀지고 말았는데 화풀이겸 찾아다닌 머슴방 섰다판에 미치다가 아주 빠져버렸고, 소문대로 날털터리가 되어 환장을 하자, 동네에서 밥술이나 먹는 차모씨네 곳간을 헐고 삽짝을 져내 돈 사려다 뒤를 밟혀 줄행랑쳐오고 말았던 거다. 그 후로 삼년. 그렇게 고향과 거기에 남은 모두를 잃은 다음부터 그는 누가 뭐라기 전에 먼저 제 자신이 스스로 믿듯 양심적으로, 성실하게, 깨끗이. 남은 세상을 살아보자던 결심은 아직 굳건하지만, 그리고 앞으로도 그게 지켜지리라는 믿음 또한 흔들림 없지만, 따라서 돈이 모든 걸 좌우한다는 생각도 굳어지는 거였다. 그러나 모든 건 분수대로 분에 넘치지 않게, 두 번 다시 부끄럽지 않게 살아야 된다고 그는 지금도 거듭 자기 자신에게 한 선언을 다진다. 동시에 이 박이란 녀석을 경계해야 할 것임도 강조해둔다. 어물거리다 물이 들면 또다시 우는 신세가 될 것 같은 예감에서였다. 그런저런 생각에 날이 새고 부엌 밥 눋는 냄새가 나자, 두만은 덕칠을 깨웠고 덕칠은 박을 흔들었다.
박은 숭덩숭덩 썰어넣어 덜 무른 호박 몇 점이 떠도는 된장국에 밥을 말아, 물들인 고추씨를 빻아 탄 간장을 숟갈 끝에 찍어가며 반찬하여 상을 비웠다.
“건건이가 션찮어서 입맛할래 버렸다니께.” 예전에 알았던, 무엇무엇 먹은 입맛까지 전부 잃었다면서도, 서산 엿가래는 밥술을 꿀 버무려 넘기듯 달게 먹었다.
“먹는게 이 지경이라 밤에 뭣 생각은 안 나 다행입니다. 중들도 아마 그래서 사는 모양이죠?” 누군가의 말에 거 참 크게 다행스럽다고 모두들 한마디 했다.
“대접 바닥이 뵈는 멀국을 먹고 비지땀을 짜내는데, 골병 안 들고 어디 가겠수?” 평소에 말이 뜬 양곤죠도 한마디 했다.
“난 엊그제 해봤는데 영양실조로 조루증이 나타나던데.” 집에 다녀온 지 얼마 안 되는 고씨가 심각한 표정까지 지어가며 호소하듯 말했다. 때마다 변동 없는 식탁에 먹으면서 하는 게 저런 소리뿐이라는 거였다. 박은 이를 쑤시며, 저는 어디선가 저기 놓여진 상황에 적응하는 데엔 무리 없이, 무난하게, 또 두드러질 것도 없는 태도로 임해왔고 그러기에 익숙해져 있으며 무슨 일이건 주어지는 대로 서툴지만 끝가지, 그리고 도중에 잘못이 드러나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시작해야 될 만큼 어설피 빗나간 일은 없었다고 생각한다.-여기서도 잘해보자, 잘해보려는 건 능동적이고, 능동일 경우 결과 여하에 관계 없이 스스로 후회할 건더기가 없어 유쾌한 법이니, 박은 그렇게 심경을 정리하며, 합숙소에서 멀지 않은 현장으로 덕칠이 뒤를 따랐다.
그런데 막상 현장에 들어서니 여의치가 않았다. 먼저, 일거리가 없다는 거였다.
“저 당꼬즈봉에 뇡립 쓴 치가 조십장이라구 저것이 다 이럭저럭허는디, 승질이 개떡같으니께 눈에 거슬리지 마슈.” 덕칠의 이런 주의를 받고 있을 때 십장이라는 자는 인부들을 자기 앞에 간격 없이 모아놓고, 설명인지 설득인지를 하는 거였다.
일거리가 아직 며칠 치는 남아 있지만 시공청인시에서 중간고를 내어주지 않아 노임 지불이 제 날짜에 지켜질지 의문시되며, 일단 손을 놓고 중간교부 지령장이 내려올 때까지는 며칠만 쉬기로 했으니 향해하되, 오늘만은 질서 없이 널려 있는 현장을 대충 정리하고 끝내자는 거였다. 그러니 쉬게 되는 며칠간은 아무데서건 제각기 나가서 일을 하라는 것이다. 박의 경우엔 취업과 동시에 조업을 하게 된 꼴이다. 그는 어쨌건 오늘 해나 채우리라고 남들 움직이는 대로 일을 하면서도 고약해진 기분을 돌리기가 수월하진 않았다.
“야리기리를 줄 테니깐 한 무데기씩 구미를 짜서 해요. 오정 때 손 떨어져도 햐꾸와리는 달아줄 거니낀.” 십장은 마지막으로 선심을 베푼다는 듯이 온전한 하루 품으로 쳐주겠다며, 무척 너그럽고 양해 깊은 낯으로 현장을 돌아다녔다. ……일하러 온 게 아니라 설거지 해주러 온 셈이군. 박은 일할 기분이 나지 않아 가끔 멀리 시원하게 솟은 관악산 쪽을 바라보며 투덜거리곤 했다.
애초 도급을 시작한 일이라 점심 시간도 없이 내처 나간 덕에 오후 세시쯤에 모두들 땀을 거두게 되었다. 이젠 할 일이 없나? 박은 하늘을 쳐다본다. 아직 팔원인 하늘이 맑다. 합숙소를 돌아와 주는 밥을 먹었다. 주는 밥은 달래서 먹은 것보다 배가 더 부르다는 인식을 가져선지 곧 식곤증이 더위를 몰아왔자. 낮잠을 자두자. 성욕밖엔 움직일 게 없는 지루한 밤을 땀 흘리지 않고 보내기 위해서. 그는 침침한 방구석 가마니 자리 위에 네 활개를 폈다. 개미 두 마리가 배꼽 위로, 겨드랑 밑으로 두루 왕래를 해도 떼어버리기조차 귀찮았다.
그가 낮잠을 물렸을 때 합숙소와 그 근처로 인정되는 둘레엔 아무도 눈에 띄지 않고 들리는 기척도 없었다. 그리고 사람이 낼 수 있는 가장 시끄러운 육성들은 몽땅 저 어느 한편으로만 모인 것 같았다. 그는 시끄러운 곳을 찾았고, 거길 가야만 잠깐 왔다 간 낮잠이 건드려놓은 신경을 타일러 앉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길게 자란 그림자를 데리고 가 그 속에 섞어버렸다.
아이가 죽었다는 젊은 어머니가 자기 머리끄덩이를 쥐어뜯으며 울부짖고 있었다. 점심 전에 나온 아이가 때도 못 찾길래 부르러 나와보니 모래톱 위에 있던 옷가지만 놓이고, 아이를 봤다는 이가 한사람도 없다는 거였다. 익사 여부를 확인도 안 해본 채 한강에 놀잇배 몇 억이 낚싯줄을 드리우고 수면에 맴돌고 있었다. 시체 한 구 건져주는 데 이천 원이 공정 가격이더라는 수군거림이 귀를 밝혀 준다. 돈 소리에 귀어두운 사람은 없겠지만 이천원이 사실이라면 많지도 적지도 그리고 적당한 금이랄 수도 없는 보수라 생각된다. 누구한테서 보다 더 정확한 내용을 알 수 있나 하여 박은 두리번거리다가 그 무리 속에서 덕칠이와 두만이, 그 외의 합숙소 얼굴들을 발견한다. 시체 인양 사례금이 더도 덜도 없는 굳은 금인가, 또 어김없이 주기나 하는지를 물었다.
두만은 이천 원에 눈기 가린 것 같아 천덕스러워 보이나 묻는 일에 다물 수도 없고 하여, 이왕이면 꼴이나 보자는 심정에서,
“찾다가 안되면 게워내더라도 미리 선금을 받으얄 거 나요. 찾아주면 시체 부둥켜안고 미치는 사람더러 손바닥 내밀 용기가 있으면 몰라도 말이요.”
참 어수룩하기도, 저렇게 저 나이에 지질할 수가 없다고, 박은 코웃음치고.
“저 낚시에 사람이 걸리기나 하나?” 익사체는 스물네 시간 제돌이 돼야 뜬다더라는 말을 들은 것 같아 그 점이나 물었다.
“실쩍 시쳐가기만 해두 대번 뜬다던디, 살점만 쬐끄메 꾀져도 대뜸 쫓아나온다더먼그려.” 덕칠이 어깨 너머로 듣다가 심드렁하게 대답한다.
“어디 한 이천 원 만져볼까.” 그러나 박에겐 낚시가 없다. 어떡할 건가. 한동안이나 궁리 끝에, 혹시 합숙소 인부들 가운데 공치는 날 심심풀이로 장난하던 낚시 가지고 있는 이가 없나 알아보기로 했고, 돌아가며 수소문한 끝에 수월히 얻어낼 수 있었다. 서산 엿가래 강자근식이가 강에서 주워 몇 번 해보았으나 안 잡혀, 아예 합숙소 가마니 자리 밑에 꿍쳐든 채 잊은 정도로, 고기 낚시엔 전혀 쓸모없는 물건이었다. 박은 도구가 마련되자 곧 인양작업에 뛰어들었다. 두 무르팍에 낚싯줄 하나씩을 감아매어 몽깃돌과 낚시를 물 속에 내려뜨리고, 놀잇배들이 일 난 현장이리라 어림하여 맴돌고 있는 복판에 들어가, 이리저리 물결을 가르며 개헤엄으로 뒤지기 시작한다. 두 다리가 낚싯대 노릇을 하는 셈이다.
우선 시원해서 좋았다. 가끔 낚시가 바위너설이나 공사판에서 흘러들어 묻힌 철사 따위에 물려 그때마다 물 속에 거꾸로 박혀 풀어내야 했는데, 밑에서 무엇이 무릎을 잡아당길 때마다, 몇 차례의 경험으로 그것이 바위너설 혹은 다른 물건인 줄 번연히 알면서도 가슴이 섬뜩하며 굳어지곤 했다. 시체가 흘러내렸을 것도 예상, 박은 폭을 넓히며 수색을 계속했다. 놀잇배 사공들은 모두들 여러 번 해본 경험이 있는 터라 그네들 눈치만 살펴 움직이면 되었으므로, 박의 머릿속은 남 보매보다 훨씬 한가한 편이었다. 그는 단지 두 가지 일에만 머리를 나누고 있을 따름이었다. 해가 원래 저렇게 붉었던가 하는 의문, 또 목적물이 내 낚시에 걸렸을 때, 내 마음은 흐믓해질지 혹은 달리 예상찮은 파문을 순간적이라도 느끼게 될는지, 겸하여 다른 뱃사공의 손에 인양된 경우, 좀 섭섭하거나 허전하고 쓸쓸해질는지 그 두 가지였다. 해가 유난히 붉은건 오늘따라 새삼스럽게 문득 쳐다본 탓이며, 건감과 얼마간의 연관이 있을진 모르나, 하여간 즉흥적인 느낌일 거라고 그는 간단히 정리해버린다. 한데 그 다음 문제는, 결국 어느 쪽으로 기울든 딱 겪고 난 후에야 판가름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지금 죽음의 시체를 찾는다. 이건 삶의 신체를 위한 노력임이 분명하다. 이건 용기일 것이다. 이 용기를 내 스스로 인정한다면 내가 진실로 행복한 놈임을 재확인하게 된다. 언제는 그렇질 못했다는게 아니라, 사람은 때로 자기 믿음에 대한 자기 믿음을 자기가 의심해보는 수가 있어서이다. 그는 변명처럼 입 속으로 뇌다 말고 픽 웃었다. 그런 남 듣기에 맹랑하고 허황한 주장만을 되풀이할 게 아니라, 한시바삐 목적을 찾기에만 정신을 겨누기로 작정해야 되게 됐던 거다. 숨이 가빠지고 팔다리가 무거워져 있음을 뒤늦게 깨달아서였다. 한동안 놀리며 먹인 몸이 한나절이 넘게 땡볕에 부려댄 탓도 있을 거였다.
그는 보다 여유 있는 작업을 진행하기 위해 대여섯 차례나 뭍으로 올라 볶이는 모래 위에 누워 굳은 살집을 눅여 다시 들어가곤 했다. 부러워하는 눈으로, 더러는 깔보거나 저게 돈 녀석 아니냐고 돌아가는 눈으로 바라보는 합숙소 식구들을 따라 많은 시선들이 박에게로만 쏠리고 있었다. 한편 박자신은 이젠 제가 방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건지, 일 자체에 대한 의식이 흐려져가고 있어, 돈 이천원, 분명 돈을 건져내자고 사지를 허우적거리는 것과, 그러기 위해서라기보다 실은 어쩌지 못해 토막 숨을 연방 들이켜고 있음은 알겠는데, 그것도 시각부터 더 이상 견딜 수 없음에 욕심이 멈춰진 순간까지 두 시간 정도였을까. 그는 남의 발로 모래 위를 기어올랐다. 그리고 모래에 몸을 주며 중얼거렸다.
……난 물에는 약해, 물엔.
한켠에서는 여태 찾아 해맸던 목표물을 인양하고 있었지만 밥ㄱ은 누구 손에, 아니 자기 낚시에 걸려 예인된 사실조차 모를 지경에 이르렀던 거다. 그는 얼마 동안인가를 호된 몸살이나 학질에 시달리던 때처럼 몸뚱이를 통째로 누가 해먹는대도 꼼짝못할 것같이 되어 방치해두고 있었는데, 바카스 두 병을 마시고 제정신을 가져오도록 두만이가 뛰어다니며 애쓰는 꼴조차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거 이러다가 돈할래 뜯기고 마는 것 아녀?”
하는 소리를 듣고서야 박은 몸을 가누기 시작했다.
“이천 원 번 기분이 어때?” 덕칠은 또 물었다.
“괜찮은 편이지. 내가 행복한 놈이란 걸 알고 있는이상……”
덕칠은 웃으며 둑을 가리켰다. 많은 사람들이 커다란 덩어리를 이루어 둑 위로 옮겨가고 있었다. 박은 안간힘으로 일어나 옷을 갈아입고 그 뒤를 따랐다. 그는 모래밭을 걸으며, 아직도 모래톱이 수면으로 착각되어 물이 너무 차다. 강폭이 넓은 줄 이제 알았다라고 몇 차례나 뇌작거렸다. 이윽고 죽은 아이 가족을 둘러싼 구경꾼들 가운데로 파고들었으나 누가 가족이며 친지, 이웃, 지나다 본 구경꾼인지 눈이 가물거려 식별할 수 없었다.
“여보쇼.” 박은 무턱대고 거친 목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러자 한눈에 누구란 걸 알아봤나 한 청년이 돌아서서 남을 뿐, 사람 떼거리는 여전히 멀어져가고 있었다. 다시 보니, 자동차 정비공 차림인 기름때 옷을 걸친 그 청년은 저 아이 삼촌이 된다며 두 번인가 고개를 숙여 보이곤, 가지러 갔으니 좀 참아달라고 울상을 한다. 졸지에 당한 일이라 준비가 아직 안 되었지만 변통해오는 대로 금방 주겠다고 한다. 박이 기운이 없어 더 어쩌지 못하고 속으로만 받아낼 방법을 결정 못 해 망설이고 있을 때, 한 아이가 달려와 청년에게 옮겨주어 박이 받아 세어볼 수 있는 건 차액이 심해도 너무한 홑 칠백 원뿐이었다. 선금을 받지 않은 불찰이지……작정된 금액(가족들과 사전 타협은 없었지만도)을 채우도록 기를 쓰기엔 심신이 표현 그대로 과로 상태이고, 결국 박은 다른 이유를 내세워 더 받기를 단념해버렸다. 죽음과 삶, 두 가지를 한꺼번에 얻었으니 통쾌하지 않느냐고.
그가 돈을 받아쥐고 오는 꼴에 두만은 덕칠이 귀에 대고,
“저 징그런 놈……”했다.
“좌우지간 질기게 살아갈 놈이여.” 덕칠은 혀를 찼다.
해질 무렵까지 방에 누워 원기를 찾던 박은, 배를 부리고 나서 외출복을 꺼내 입고 간다온단 말도 없이 어둠 속으로 없어지더니, 자정이 겨워서야 술에 얼근하여 돌아오는 거여다. 지친 몸에 어딜 갔댔더냐고 덕칠이 물으니,
“마음과 몸의 건강이 보다 더 견실해지게.” 오입을 하고 오는 길이란 대답을 태연히 하는 거였다. 들은 사람들은 어이가 없다기보다 기가 차서 할말이 없었다. 그 돈의 출처를 잘들 알기에 말이다.
“고 멫 푼 가지고, 하고 나서 술 마실 것까지 돼?” 덕칠이 곧이들리지 않아 다시 떠보니, 그의 대답은 더 간단했다.
“촌스런 소리…… 나야 오입 값은 내 물건 애쓴 값으로 때우고, 되려 불알 장단친 값을 받아내는 판인데.”
이튿날. 다른 사람들처럼 두만이와 덕칠이도 당장 할 일이 없게 되자, 아침부터 제각기 행 할 일을 찾는 데에 많은 시간을 들였다. 두 사람은 노임이 한목에 나올 경우, 날씨로 공친 날을 제한 나머지로 식대와 안주인 낯을 달고 먹어온 담배, 세탁비누, 소주, 오징어 따위를 주전부리한 근처 구멍가게 외상값을 대충 어림해보았는데, 한푼이라도 치고 들어갈지언정 나올 돈이 없다는 해답을 나눠 갖게 되었다.
잠실리에 가 농사 품팔이를 하기로 덕칠은 작정했다. 추수 때까지 뜨내기일로 견뎌내면 가으내 대우 좋은 품일을 노박이로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보다 더 긴요한 것, 줄뻔댁을 잘 다루어 아꾸눈 노처녀 미스 장에게 장가를 가는 방향으로 일을 해보자는 막연한 생각을 했다. 추수가 끝나 김장철이 되면 리어카를 끌되, 리어카값도 그곳에서 장만하기로 하고, 덕칠은 곧장 짐을 싸서 거룻배를 타고 강을 건너갔다.
주변머리 없이 아무 대책도 만들지 못한 두만은 기껏 찾아낸다는 게 윤호생이었다. 시골 국민학교때 한 반이던 친구인데 남산 육교 근처에서 리어카 한 대로 삼 년째 살아오는 지악스런 녀석이었다. 가서 그의 협조를 얻기로 했다. 그 억척스런 친구라면 허튼소리는 안 할 것이고 또 하란 대로 해도 실수가 없을 거라는 역시 막연하고 어설픈 생각이었다. 두만은 반년 가까이 이를 갈며 모은 저금 통장을 꺼내들고 나섰다. 오래간만에 입어보는 나들이 옷이라서 곰팡내가 역해 서너 정류장 푼수나 걷다가 버스를 탔다.
만 이천 원, 그간 벌어먹고 남아 모은 건 지난번 장마에 일 못 해 다 까먹고, 아니마 적은 돈이라도 지니게 된 건 오로지 남들같이 입이 헤프지 않은 덕분이었다.
“박씨는 어떡할래요?”저마다 가볼 데가 있어 뿔뿔이 흩어져 나가고 박 혼자만 남자, 안주인이 딱해서라기보 일도 않는데 죽치고 눌러붙어 밥만 먹어댈까 걱정으로 묻는 거였다.
“”현재 계속 염려와 걱정을 해대는 중이죠.“ 그는 귀찮아서 건성으로 대답했다.
“어디 갈 데라두 말해뒀수?”
“……”
“사무소에서 돈이 안 나오니 쌀은 떨어져가는데……”
“나 어제 일한 걸로 낼 아침까진 먹여주셔야죠.”
“아침만 먹으면 살우?”
“낼 점심은 내일 먹는 건데 오늘부터 김칫국 마셔요?”
하고 나서 박은 내처 낮잠을 자버렸고, 낮잠에서 깨어났을 땐 갈 곳을 정하고 들어온 다른 사람들이 밤잠을 자려는 참이었다. 그 시간에 두만이도 합숙소로 돌아왔는데, 그도 짐을 꾸려가려고 온 거였다. 밤잠 자긴 틀린 박이 심심풀이로 묻자, 두만은 하루를 보내고 온 자초지종을 대강 설명해주었다.
친구인 호생은 고구마튀김 장사를 하고 있었다. 사정 이야기를 듣고 나자 마침 리어카 한 대가 나있는데, 그다지 고물도 아닐 뿐 아니라 여태 장사하던 리어카라서 구색이 다 갖춰 있으니 보려면 보라도 하더랬다. 처음엔 호생 자신이 하다가 팔아넘긴 거라는데, 두만은 리어카 꼴을 보자 사내자식이 어떻게 먹는 장사를 하랴 싶어 돌아서려고 했었다. 리어카안엔 연탄 화덕 두 개가 붙박여 있고 전떨어진 양은 솥과 큰 냄비 한 개, 국이 흐르는 양재기 몇 개, 소주병, 국수 채반, 칼, 도마, 대강 그런 것들이 눈에 띄었으며, 솥과 큰 냄비 속에 고춧가루병, 간장병, 만나니통, 고추깡통, 참기름병 따위가 들어 있었다. 지게꾼이나 구두닦이 아이들을 상대로 국수, 라면 , 꼬치 안주 등속을 파게 되어 있는 o 내놓은 거랬다. 삶은 국수, 꼬치 안주, 막소주하는 엔간한 것들은 식전에 배달까지 해주는 곳이 있으니, 앉아서 돈 받고 팔기만 하면 될 뿐더러, 겨울이 오면 포장을 갈고 군참새, 토끼고기로 안주를 바꾸면 꽤 재미를 보게 되리라고, 호생이 열을 내어 권고하던 것이다. 돈만 치르면 손질할 것 없이 당장에라도 장사할 수 있고, 하게 되면 리어카를 나란히 놓고 함께 하되, 잠자리쯤은 저 혼자 사글세로 들어 있는 방이 있으니 그까짓 막노동에 비길거냐고 흰소리 치는 거였다.
호생의 말이 그럴듯하고 비품 일습을 싸잡아 오천 원이면 헐값이기도 하여 눈감고 모개흥정을 했는데, 당장 통장을 못 열므로 계약금도 호생이 제주머닛돈을 털어 대충 해주는 거였다. 밑진대로 리어카는 본전으로 남을 테고, 음식 장수가 재 배 곯릴 리 없고……호생은 옳은 소리만 했다. 국수는 보가 이십 원, 특은 삼십 원, 막소주 한 잔에 십원씩 받으라며, 전 주인은 며칠 전에 새로 시작했던 과일 리어카로 옮겨가며 말해주었다. 두만은 리어카 소재를 마치고 그릇들도 연탄재로 말끔하게 닦았다. 그때 시간이 연할시경이었는데, 호생은 다시 오늘 개시를 해버리라고 충동질하기 시작했다. 열두시부터 두시까지가 첫 대목이고 어두워져야 막 대목인데, 한푼이 어디냐고 서두르라며 요령을 알려두었다. 두만은 호생이 가라는 데로 가서 연탄과 숯, 파와 마늘 하는 것을 사 날랐고, 호생은 또 국수와 소주, 안주거리를 배달해달라고 이르는 거였다.
밤 열시 반에 리어카를 걷어 보관소에 맡겼다. 그리고 그 참 이리로 온 길이라며, 두만은 숨을 돌리자 수지 계산을 차근차근 따지기 시작했다. 원체 뒤늦게 시작하여 연탄불도 하나인데다 그나마 괄게 피어오르지 않아 찾아온 손님도 여럿 놓쳤지만, 좌우간 마수걸이는 괜찮았고, 재료값 일체를 제외하고 남긴 돈이 사백십 원이었다. 지출은 백조 한갑 피워 이십 원, 시장세가 이십 원, 시장세가 이십 원, 청소비 물어 이십 원, 물 길어 쓴 게 십 원, 변소 다니느라고 모두 오 원, 동네 건달들한테 인사가 없을 수 없어 오십 원, 연탄 두 장 가아넣으니 삼십 원, 불켠 카바이트 값 십 원, 마지막으로 리어카 보관료 십 원 하여 경상비를 제하니 순이익이 이백삼십오 원이어야 하는ㄴ데 이십 원이 부족이었다. 쓴 곳을 기억 못해선지, 거스름돈을 잘못 내주어선지 아무리 따져봐도 알 길이 없었다. 하여간 남은 돈으로 내일 쓸 재료값도 되지 않아 라면만 사다 놓고 온 거였다. 그러나 수단이 나고 요령이 생기면 훨씬 잘될 것으로 바라뵈며 알았더라면 진작 손댔어야 좋았다고 두만은 아쉬워했다.
“개업 인사가 없을 수 있나. 낼 한번 가봐야겠군.”
넉살 좋다. 벌서 먹으러 오겠다구?두만은 오랄수도 말랄 수도 없어 입술만 들먹거리는데, 게다 한술 더 떠 “맛이나 있겠나, 순 노가다 솜씬데……”
마침 잘됐다 싶어 두만은,
“아닌게아니라 어렵기는 어렵습디다. 호생이란 친구 아니었다면 진짜……”
하고 화제를 돌려버렸다. 사실이 그랬으니까. 국수 국물 끓이기, 꼬치 안주 국물 간맞추기, 비빔국수 주문에 고추장 덜 들이기, 라면을 꼬들거리게 삶는 요령 등 해복 이력이 갖가지인 호생이 시범조로 손이 되주었던 것이다.
이튿날 두만이 앞에 박이 나타난 건 때맞춘 점심시간이었다. 말을 그럴싸했다. 오늘 해전에 합숙소를 떠나는데, 가 있을 곳도 알아볼 겸 나와 지나는 기리에 들렀다는 거였다. 성냥까지 한 통 사들고 있었다. 두만은 따돌릴 수도 없고 하여 국수를 말고 소주도 한잔 따랐다. 처음엔 입맛이 떫기만 했으나, 한편으론 성냥을 사온 성의와 일부러 말벗이라도 돼주는 게 고맙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럭저럭하다 기분이 좀 풀리자 소주 한 잔을 더 권했고, 자기도 먹을 줄 모르는 대로 한 모금씩 목을 축였다.
잠시 후 그들이 일어난 배를 삭이며, 내려다뵈는 서울역전 윤락가 뒷골목에 시선을 두고 음담패설이 고비를 넘어갈 무렵, 길에선 교통 사고가 나고 있었는데 그들이 뒤돌아봤을 땐 군용 지엠지 밑에 한 사람의 중년 남자가 나자빠져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엔 오이, 호박, 열무를 비롯한 각종 야채가 가드 찬 소쿠리와 자전거가 찌그러진 채 역시 죽어 있었다. 순식간에 사람들이 모여 담을 쳐서 잘 보이진 않으나, 운전병이 시체를 떠메고 인근 병원으로 치닫는 꼴이 보였고, 누가 전화를 걸었나 남대문쪽에선 경찰 백차가 달려들고 있었다. 두만은 인파에 몰리는 리어카를 보호하느라고 그 다음을 구경하진 못했다. 그런데 바께쓰 물이 엎질러지고 소주병이 쓰러지려 하는 통에 정신이 없을 때, 누가 어깨를 쳐서 돌아보니 낯선 순경이었다. 무조건 겁부터 먹고 어쩔 줄 모르는 두만이더러 순경은 명령하듯 말했다.
“미안하지만 수고 좀 해줘야겠어. 허가도 없이 노점 벌여 돈만 벌지 말고 말이야.”
두만은 무슨 소린지 몰라 어리둥절해 있지 않을 수 없었다.
“현장 사진을 찍어야 할 텐데, 당사자가 병원에 누워 있으니……”
하며 한쪽 팔을 움켜쥐고 끌어낼 때서야 눈치를 챘다. 죽은 사람의 대역을 하라는 건가 보았다. 두만은 얼굴부터 죽을상이 되며 완강히 뿌리쳤다.
“못 해요. 그건…… 그건 저는 못해요. 딴사람을 시켜요.”
“이 계제에 잘 사귀어보자는데 왜 이래? 나중엔 후회해도 소용없어.”
장사를 못 하면 말지, 잠깐이라도 죽어볼 수는 없었다. 이 시퍼런 나이에 죽는 시늉을 하다니,
“형씨, 나 좀……”
그들이 막 실랑이를 벌이고 있을 때 중간에 끼여드는 자가 박이었다. 두만은 구세주를 만나더라도 그처럼 반가울 수가 없을 거였다. 박은 순경의 팔을 붙들며,
“돈은요? 출연료 말이에요.”
순경은 힐끔 박의 주제 꼴을 훑어보고 나더니 짐짓,
“이백 원이면 돼? 싫으면 말고.”
“……”
박은 말 대신, 그러나 서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순경도 얼굴을 폈다. 원래 저런 놈이었지 싶어 두만은 육교 난간에 올라가 꼴이나 보기로 했다.
……교통사고 방기 계몽 사진전에 출품되면 대수로운가, 이 땅에 날 기억할 놈이 몇이나 된다구. 박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누가 지시를 받고 지시고 할 것도 없이 차 밑으로 기어들어갔다. 피가 흥건하고 냄새가 비위를 뒤집었다.
“됐어. 잠깐이니까 그러고 있기만 하면 돼. 움직이지 말라니깐.”
사진사가 위치를 고르느라고 엄벙대는 틈에 박은 잠깐 고개를 들어 두만을 찾았다 두만의 측은 한 듯 바라보고 있는 꼴이 우스워 박은 싱긋 웃어 보였다. 그랬더니 뜻밖에도 구경꾼들 틈에서 욕지거리가 튀어나오는 거였다. “야 저거…… 웃지나 말아라 자식……” “원, 저런 걸레 같은 새끼, 웃음이 나오겠다.” “저런 인간 보면 한심해서……” “사람 새끼 같으면 저 지랄하고 있을까 봐.” 박은 못들은 체해버린다. 죽고 삶이 어떤 관계인지 모르는 철 안 든 소리라 탓할 가치조차 없는 거였다.
그러나 두만은 그 숱한 욕설이 가는 걸 뻔히 알면서 몰라라 할 수만은 없었다. 박에 대한 동정에서라기보다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는 동류 의식에서였다는 말이 더 가까울 거였다. 그는 욕설을 말린답시고 자기도 모를 새 거친 음성으로 내뱉고 말았다. “누군 저 짓이 좋아서 하나, 욕은 왜 욕이여, 좇같은 새끼들……”
그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이번엔 두만이 앞으로 두어 사람인가 사이를 두고 끼어 있던 한 청년이 뒤돌아보며,
“뭐가 어째/ 아니 이게 누구더러 욕이야. 이거……” 하며 눈을 부라리기 시작했다.
“웃거나 말거나 . 그럼 아이고땜 찾고 울어야 실감나나?” 두만이 삿대질을 하며 낯에 핏기를 모으자,
“너 이리 못 내려와?”두만은 난간에서 뛰어내리기 전에 내가 술이 취한 거냐고 자문해보았다. 그 대답도 못 내고 서로 엉겨붙어 손발이 가는 대로 힘을 썼지만,
셔터 누르는 소리에 박은 차 밑에서 기어나왔다. 옷에 묻은 거나 없나 훑어본 다음 먼지를 털고 나니 순경도 두만이도 보이지 않는다. 리어카 쪽으로 가봐도 두만은 없고, 끌려가는 놈이 나쁘다느니, 동네 청년인데 송곳니가 부러졌다느니 하고 쑥덕거리는 소리뿐이었다. 짐작이 가자, 박은 저만치 구경꾼들을 뒤로 잔뜩 달고 가는 순경을 발견하며 정신없이 뛰어갔다.
곤봉이 쥐어져 있지 않은 순경의 다른 한 손엔 두만이의 멱살이 매달려 있었다. 박은 순경을 막으며 내 이백 원 어디 갔느냐고 캤다. 그에 순경은 청구서 한 장 써가지고 파출소로 오라고 한마디를 던졌다.
그가 바삐 두만이 리어카로 돌아오니 호생이란 청년이 두만의 리어카를 보살피고 있었다. 청년은 그가 두만이를 위해 무슨 유리한 증언이라도 해주기 위해 바쁜 줄 알고, 냉수를 떠주며 무척 다행스런 낯을 하는 거였다. 박은 그에게 종이와 볼펜을 빌려 청구 내용을 빈칸으로 하여 이백 원짜리 청구서를 써갔다.
그 사이 두만은 한차례 닦달을 당했는지 풀이 죽어 고개를 숙이고 있었는데, 순경은 돌아서서 땀을 훔치며,
“이놈의 새끼, 제주도에 가서 석 달만 썩어봐라.” 두만이 들으라는 혼잣소리를 하고 있었다. 박은 청구서에 파출소 인주를 빌려 지장을 찍어 내었는데, 곧 이백 원이 되어 돌아왔다.
“수고했어” 하며 이백 원을 받아 쑤셔넣고 나오려는 박에게 순경이 빙긋 웃었다.
“수고합쇼.” 박도 인사했다. 그러자 얼핏 두만의 낯이 다시 눈에 들어왔고, 그냥 나올 수는 없을 것 같아 생각 끝에 인사 삼아 한마디 튕겨주었다.
“형씨가 어제 오늘 보다시피 난 이제 쥐약 같은 거 안 갖고 다녀도 자신 있는데…… 내 함밧집에다 놔두고 갈 테니 나중에 형씨 가지슈.”
박이 백을 들쳐메며 하직하고 나가자, 혹시 피우다 끈 담배라도 남지 않았나 나간 방을 들여다보던 합숙소 안주인은, 방 가운데 떨어져 있는 약봉지를 빗자루 끝으로 끌어다 펴보고 도로 싼 뒤, 곁에 쓰인 글자를 다시 들여다보고 나서는 안방 시렁 위에 얹어두며 박을 나무랐다.
“비싼 소화제를 왜 버리고 가. 뒀다 내나 먹지……”(124.4장)
첫댓글 수고 하시었어요. 좋은 소설을 올려 주시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