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 관징 스님의 진면목
(1) “건들이지 마라”
몇 년 동안 사부님을 모시고 다니면서 늘 한 방을 썼기 때문에 스님의 일거수일투족을 그대로 볼 수 있었다. 큰 절에서는 반드시 큰스님을 한 방을 주고 나는 다른 방에서 자도록 했다. 그러나 큰스님은 언제나 나를 불러서 같은 방을 썼다. 반드시 통역문제 때문만은 아니었다. 바로 옆방을 주어도 마찬가지였다.
일단 저녁에 숙소에 들어가시면 먼저 나에게 이불을 개라고 한다. 보통 큰스님 방에는 이불을 깔아놓기 때문이다. 그리고 텔레비전을 보시거나 다른 일을 일체 않으시고 결과부좌를 한 상태에서 약간 앞으로 숙이고 앉으셔서 꼼짝을 하시지 않는다. 이렇게 12시가 넘으면 반듯이 앉아서 선정에 들어가신다. 8년을 모시고 다녔지만 한 번도 드러누워서 자는 것을 보지 못했다. 계속 앉아 있다 가끔 한 번 씩 일어났다가는 다시 앉아서 결과부좌를 하신다.
단 둘이만 있으면, 나는 너무 심심하기 때문에 말씀이라도 좀 나누려고 흔들어 깨워본다. 그러면 이렇게 말씀하신다.
“건들이지 마라. 나 지금 극락 모습을 보고 있다. 극락세계는 멋진 것이 아주 많다.”
“그렇다면 멋진 극락세계를 나에게도 좀 보여주십시오.”
이렇게 투정을 하면 실제로 조금 전에 보았던 극락을 그림으로 그려서 보여 주셨다. 아주 별난 그림이 많았다.
절이 아니라 시내의 호텔이나 여관에 들어가도 똑같다. 한 번은 만덕 스님이 중국어로 된 이소룡 영화 같은 비디오를 빌려다 드렸지만 거들떠보시지도 않았다. 그리고 절에 가서 법회하는 것 빼놓고는 어떤 것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지 않으신다. 시내에서도 아무 곳이나 들어가려 하지 않으신다. 오신채를 비롯해서 냄새가 너무 많이 난다는 것이다. 범부가 이런 스님 모시고 다니는 것이 쉽지가 않았다. 그런 생각을 할 때면 큰스님은 내 마음을 읽으시고 말씀하신다.
“나가서 목을 씻고 오너라. 그 대신 먹고 올 때는 반드시 김을 먹고 오너라.“
아마 김을 먹고 오면 냄새가 나지 않는 모양이다. 이처럼 자신에게 철저하지만 옆 사람들에게는 늘 너그러우셨다. 큰스님은 불법체류자인 나의 사정을 잘 알아 주셨다. 그리고 나 대신 중국 연변에 있는 우리 집에 2번이나 돈을 직접 부쳐주셨다.
(2) 배려하는 마음
어느 날 국민대학 옆에 있는 계곡을 지나다 잠깐 휴식을 취할 때가 있었다. 그런데 아래 계곡에는 많은 무당들이 기도를 하고 있었다. 중국에서 본 적이 없기 때문에 한 번 보고 싶어 큰스님께 말씀드렸다.
“큰스님, 내려가서 잠깐 보고 오겠습니다.”
“가지 말아라. 가게 되면 무당들의 기도를 방해하게 되고 기도가 중단된다.”
그래도 만덕 스님과 나는 기도처에 가보았다. 무당들이 큰 바위 밑에 무엇인가를 차려놓고 열심히 기도를 하고 있었다. 나는 처음 보는 광경이기 때문에 가까이 가서 구경을 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무당들이 기도를 중단하고 쫓아와서 떠나라고 위협을 했다. 우리는 돌아와서 큰스님에게 말씀드렸더니 이렇게 말씀하셨다.
“우리 기가 그들의 기운보다 높아 눌리기 때문에 접신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가지 말라고 하지 않았느냐!”
(3) 통역이 못가니 제주행 비행기 표도 취소
한국말을 한 마디도 못하는 큰스님이 혼자서 당당하게 16번이나 한국을 방문한 것은 놀라운 일이다. 1997년 처음 큰스님과 인연을 맺은 나는 그 뒤 큰스님이 한국에 오시면 늘 함께 다녀야 했다. 언젠가 제주도에서 초청이 있어 약속을 해놓고 비행기 표를 샀다. 그러나 나는 당시 불법 체류자이기 때문에 비행기를 탈 수가 없었다. 여권이나 주민등록증을 보여 주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내가 불법체류자라는 것이 들통이 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갈 수가 없다는 사정을 말씀드리자 큰스님도 결국 제주행을 포기하셨다.
(4) 휴지도 3번씩 쓴다.
큰스님은 정말 한 푼도 아끼고 쓰지 않을 뿐 아니라 자기 것이 아니라도 똑 같았다. 관징 스님의 절약 정신은 참 놀랍다. 휴지를 한 번 쓰고 나서는 다시 호주머니에 넣는다. 그리고 꺼내 쓰고 다시 넣고 해서 3번을 쓴다. 큰스님은 늘 이렇게 강조하신다.
“신도들이 낸 천 원, 만 원짜리 돈을 피눈물이 어린 돈이다. 그렇기 때문에 보시로 들어온 돈은 철저하게 불사를 위해서 그대로 써야지 한 푼이라도 허비해서는 안 된다. 자기가 번 돈도 넷으로 나누어 쓸 줄 알아야 한다. 4분의 1은 부처님을 위해, 4분의 1은 자기 사업 확장을 위해, 4분의 1은 먹고 사는데 쓰고, 4분의 1은 홍법에 써야 한다. 가정 있는 사람은 가정생활도 충실하게 해야 한다. 이것이 천인의 법이다.”
(5) 배는 타고 있으나 출항이 늦은 것과 같다.
관징 스님은 법문하실 때마다 늘 계를 지킬 것을 강조하신다. 말로만 강조하시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정말 철저하게 계를 지키신다. 그 가운데 하나가 철저하게 채식만 하고 오신채도 잡수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신도들이 스님을 식당에 초대하면 대부분 고기반찬이 있는 곳이다, 사실 한국 일반 식당에서 고기반찬이 없는 곳이 없기 때문에 만일 이 부분에 대해 큰스님이 까다롭게 하셨다면 모시기가 너무 힘들었을 것이다. 큰스님은 어느 식당이나 스스럼없이 들어가신다. 그리고 먹을 것이 없으면 스스로는 잡수지 않으시지만 대중들이 육식하는 것에 대해 일체 말을 하시지 않는다. 어떤 때는 승복을 입은 스님도 육식을 할 때가 있다. 그래서 내가 여쭈었다.
“큰스님, 법문하실 때는 그렇게 계를 강조하셨는데, 어찌하여 식당에서 육식하는 사람을 꾸짖지 않으십니까?”
“지금 같은 말세에 이것도 못 먹게 하면 시작도 안 된다. 그러나 그들도 진짜 수행을 하면 막식을 해서는 도를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들은 그래도 배를 타고 있다. 출항이 늦은 것과 같다.”
6) 전생의 인연을 살리는 길
(1) 관징 큰스님과의 전생 인연
2000년 강진 백련사에서 있었던 일이다. 그때는 선용 스님, 대주 스님, 만덕 스님 등 몇몇 스님들이 큰스님 시봉을 하였다. 그런데 시봉하는 스님들이 보니, 큰스님이 잠을 잘 때나 누구를 만날 때나, 심지어는 화장실에도 나를 따라 다니시는 것을 보고 참으로 의아하게 생각하였다고 한다. 나는 평소 떡을 좋아하기 때문에 떡 먹으러 주방에 간 사이에 중국말이 통하는 대주 스님이 큰스님에게 왜 그렇게 강 거사를 따라다니시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랬더니 큰스님이
“너희만 알아라, 사실 강 거사는 전생에 나하고 한솥밥을 먹던 사이다.”
내가 떡을 먹고 방으로 돌아오자 여러 스님들이 나를 보고 모두 웃으며,
“강 거사는 머리를 깍아야 할 인연이다”
라고 하며 나에게 머리를 깎으라고 윽박질렀다. 선용 스님은 이미 머리 깎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무슨 영문인지 모르지만 갑작스런 상황에 어찌할 줄을 몰랐다.
“딸에게 전화로 물어보고 딸이 출가해도 좋다면 출가하겠다.”
이렇게 변명하고 나와서 실제 딸에게 전화를 했다. 그랬더니 아버지가 머리 깎고 중이 되는 것은 남들에게 부끄러우니 싫다고 했다. 방에 돌아와 이런 정황을 스님들에게 말씀드리고 간신히 어려운 상황을 빠져 나올 수 있었다.
(2) 네가 먼저 자성염불이 되어야지 – 개인교습
큰스님 모시고 다닐 때 나에게도 염불을 열심히 하라고 여러 번 말씀하셨다. 그리고 시간이 나면 관징 스님과 둘이서만 서로 주고받으며 정토선 염불을 했다. 한국에 오시면 늘 빡빡한 일정에 바쁘게 움직이면서도 통역하는 나 한 사람을 위해 틈을 내서 염불을 함께 해 주신다는 것은 참으로 감격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너와 나는 전생부터 함께 했다. 네가 한 발 먼저 가야 다른 사람들도 믿을 것 아니냐?”
그래서 나름대로 시간 나는 대로 염불을 하였으나 당시 불법체류자 신분이었고 연변에 있는 집의 경제도 책임을 져야하기 때문에 어디 한 군데 머물러 염불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없었다. 그러다 2001년 상주 석문사에 오래 머물게 되면서 석문사에서 여러 신도들이 함께 염불하는 팀에 끼어 염불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얼마 안 가 등에서 염불소리가 들렸다. 바로 관징 스님이 말씀하신 ‘간배’ 지점이었다. 나는 바로 관징 큰스님에게 말씀드렸다.
“생각보다 늦게 되었구나. 자성염불이 시작된 것이다. 나는 네가 2000년 강진 백련사 법회 때 자성염불이 된 것을 알았다. 그런데 네가 잡념이 많고 머리가 복잡하기 때문에 늦게 나타난 것이다. 이제부터 입으로 염불하지 않고 선을 해야 한다. 선을 하면서 아주 면밀하게 그 소리를 들어야 한다. 열심히 하면 꼭 된다.”
그리고 수시로 자성염불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을 해 주셨다.
“자성염불이 되는 것은 극락 가는 출입증이다. 사람이 목숨이 다 할 때 죽는 고통이 심하기 때문에 염불을 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그러나 자성염불이 되면 업이 커서 육신이 염불을 못하더라도 자성이 염불하기 때문에 업을 가지고 극락에 가게 된다. 업을 가지고 가더라도 극락은 뒤로 물러나는 일이 없기 때문에 열심히 해서 도를 이룰 수 있다. 내가 ‘우리 극락에서 만나요!’라고 써준 사람은 그런 근기를 확인하고 써준 것이다.”
“한국 제자들은 자성염불이 된 것을 내세우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자성염불이 되면 자기 스승한테나 이야기 하고 조용히 다음 단계를 닦아야 하는데 여기저기에 떠벌리는 사람이 많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자성염불이 끝이 아니다. 그때부터 선을 해야 한다. 그래서 정토선이라 하는 것이다.”
당시 소리가 약하게 들리거나 때로는 끊기는 경우도 있었는데 때로는 소리가 사라졌다가도 이틀만 열심히 염불하면 바로 다시 살아나고, 하자고 마음만 먹으면 금방 자성염불이 되살아난다. 그 뒤 소리가 점점 자리를 잡더니 이제는 하단전에서 계속 염불 소리가 난다.
앞에서 이야기 했지만 나는 중국에서 공무원 생활을 했기 때문에 종교를 미신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7년 동안 큰스님 모시면서 통역을 하고 다니다보니 어느새 나도 불교사상이 내 마음속에 스며들었고, 이처럼 자성염불까지 이룰 수 있었던 인연에 대해 정말로 감사하고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큰스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전생의 인연’이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사실을 더욱 실감이 난다.
(3) 정토선 수행이 큰스님의 가르침을 이어가는 길
2004년에도 큰스님은 두 번 한국에 오셨다. 그러나 나는 2003년을 마지막으로 모실 수 없게 되었다. 누군가 불법체류자로 신고를 해서 공개적인 자리에 나타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2005년부터는 한국에 오실 수가 없었다. 큰스님은 2004년까지 미국 영주권으로 미국에서 발행하는 재입국 허가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영주권과 재입국허가서만 한국 대사관에 제출하면 바로 비자를 내 주었다. 그러나 2005년부터는 중국으로 영구 귀국하여 중국 여권을 새로 받았기 때문에 한국에서 초청을 해야만 올 수가 있었다. 큰스님은 여러 차례 나에게 전화를 해서 마지막으로 한국의 제자들을 보고 꼭 당부할 말이 있다고 했으나 초청이 잘 진행되지 못했다. 그리고 2년 뒤 2007년 입적하셨다는 소식을 접했다.
큰스님 입적하시고 이제 8년이란 세월이 지났다. 그 사이 아들딸들이 모두 장성하였으니 자식들에 대한 임무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지금은 나도 법복을 입고 있다. 이는 오로지 관징 큰스님의 넓고 큰 광명의 가피를 받은 것이고, 내 인생을 마무리하는데 큰 변화라고 할 수 있다. 한편으로는 늘 관징 스님의 그늘에 있을 때 제대로 공부하지 못한 것이 아쉽고 후회스럽다.
그러나 지금도 큰스님의 법력인 자성염불이 내 단전에서 돌아가고 있다. 비록 번잡한 임무 때문에 선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지만 가능한 최선을 다해서 자성염불 소리를 관하여 지금 상태를 이어가다 언젠가는 일념과 무념을 이루는 것만이 큰스님의 가르침을 이어가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나모아미따불
나모아미따불
나모아미따불
|
첫댓글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 수고많으셨습니다 무량공덕이 되소서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