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CLASS [문화] 2015년 04월호>
세계 무용계가 주목하는 18세 발레리나 이수빈
불가리아 소피아 국립발레단에서 〈백조의 호수〉 주연으로 공연
오주현 인턴기자(이화여대 졸)
2014~15년 불가리아 소피아 국립발레단 전막 공연 〈백조의 호수〉에 주연으로 공연하는 최초의 한국인 무용수가 있다. 제26회 바르나 국제발레 콩쿠르에서 주니어 부문 최고 상인 스페셜 디스팅션(시니어의 그랑프리에 해당)을 수상한 18세 발레리나 이수빈이다. 그는 3월 16일 출국해 불가리아의 수도 소피아에서 5일 동안 코르 드 발레(군무)와 호흡을 맞추고 22일 전막 무대에 선다. 해외 공연을 앞두고 구슬땀을 흘리고 있는 그를 만났다.
백조의 호수〉는 〈호두까기 인형〉 〈잠자는 숲 속의 미녀〉와 더불어 차이콥스키의 3대 발레 음악으로 평가받는 작품. 이 작품에는 여주인공 오데트와 지크프리트 왕자를 유혹하는 오딜이 등장하는데 오데트 역을 맡은 무용수가 오딜 역을 함께 공연한다. 상반된 매력을 가진 캐릭터를 한 발레리나가 연기해야 하기 때문에 최고의 발레리나만이 할 수 있는 역으로 꼽힌다. 어려운 만큼 많은 관객에게 오랜 시간 큰 사랑을 받고 있는 공연이기도 하다.
“전막이 2~3시간 걸려요. 그 긴 공연을 다 소화할 수 있을지 걱정도 되고 긴장도 됩니다. 하지만 제 나이에 전막에 설 기회는 흔하지 않거든요. 그래서 설레기도 합니다. 이번 기회에 전막의 스토리를 풀어나갈 수 있는 능력을 키워서 돌아오고 싶습니다.”
지난해 바르나 콩쿠르 3관왕 수상
세계 최초 발레 콩쿠르인 바르나 콩쿠르는 세계 3대 발레 콩쿠르 중 하나로 가장 오래된 역사와 권위를 자랑한다. 그동안 패트릭 듀폰(전 파리오페라 발레단), 휘트니 젠슨(보스턴 발레단) 등을 배출했기에 세계 최고 무용수가 되기 위한 관문으로 꼽힌다.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영재 입학한 이수빈은 지난해 7월, 불가리아에서 열린 이 대회에서 스페셜 디스팅션뿐만 아니라 무용 유망주에게 주는 에밀 드미트로프 상과 스페셜 상도 수상해 3관왕의 영예를 안았다.
“스페셜 디스팅션은 실비 길렘, 패트릭 듀폰이 받았던 상이에요.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정말 놀랐어요. 이름이 불렸을 때 머릿속이 백지장같이 하얘져서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습니다. 내가 받아도 되는 상인지 얼떨떨하고 감사했죠.”
그러나 그동안 그의 무용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예상했을 상이었다. 그는 중2 때 〈고집쟁이 딸〉에서 리즈 역 바레이션으로 국내 콩쿠르를 휩쓴 기대주였다. 어렸을 때부터 탄탄한 기본기를 바탕으로 나이 이상의 표정 연기를 보여주며 성숙한 연기를 해왔다. 이번 콩쿠르에서는 〈백조의 호수〉 중 오데트와 〈라 바야데르〉의 니키아를 정확한 기교와 성숙한 감정표현으로 공연해 큰 박수를 받았다. 특히 니키아는 5분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실망, 원망, 광적인 모습까지 다양한 감정이 끊이지 않고 연결된다. 이수빈은 어린 나이지만 이러한 감정선까지 세심하고 훌륭하게 표현했다는 평을 받았다.
“제가 드라마를 무척 좋아해요. 주인공 캐릭터에 감정이 이입되어 보곤 하는데 그게 도움이 많이 되었어요. 발레 동영상도 많이 보며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구나’라고 생각해요.”
발레는 2~3시간 동안 발레리나가 무대를 이끌어 가야 한다. 발레리나가 몸으로 하는 이야기를 관객이 집중해서 들어야 하므로 발레리나의 눈빛이 중요하다. 많은 관객을 사로잡으려면 엄청난 에너지도 필요하다. 무용수가 캐릭터를 먼저 이해하고 몰입해야 관객도 몰입하기 때문에 그는 공연이 있기 전, 연습실에서 온종일 표정 연기를 연습한다. 무용수의 표정만으로도 관객이 스토리를 읽을 수 있도록 작은 표정이나 섬세한 움직임 등에 대해 수없이 연습하고 고민한다. “발레클래스(발레 무용수들이 하는 연습. 보통 벽에 고정된 긴 바를 잡고 기본 동작을 하는 ‘바 워크(bar walk)’와 연습실 중앙으로 나와 하는 ‘센터 워크(center walk)’로 이루어져 있다)는 몸을 풀고 근력을 강화하는 데 필수적이죠. 아침 일찍 발레클래스부터 공연 전 리허설, 개인 연습까지 하고 나면 어느새 하루가 지나 있어요(웃음).”이수빈은 연습실에서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보통 하루를 오전 6시 반에 시작해 자정이 되어야 끝이 난다.“힘든 걸 잘 말하지 않고 혼자 삭히는 편인데 발레를 할 때면 저 스스로 위로받는 느낌이라서 좋아요. 힘들거나 슬럼프가 올수록 더 연습하려고 합니다.”꼭 하고 싶은 역할은 〈지젤〉의 주인공초등학교 3학년 때 취미로 발레를 처음 접한 수줍음 많은 소녀는 금세 발레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선생님, 부모님 누구도 권유하지 않았고 스스로 발레를 하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초등학교 6학년 때 본격적으로 발레리나가 되기 위한 여정에 올랐다.“어렸을 때는 낯을 많이 가리고 말도 없는, 내성적인 아이였거든요. 발레는 말없이 몸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게 매력적인 것 같아요.”어린 나이지만 그동안 〈호두까기 인형〉의 어린 마리, 〈백조의 호수〉의 오딜・오데트, 〈라 바야데르〉의 니키아・감자티, 〈레실피드〉의 공기의 요정 등 많은 역을 했다. 그런 그가 가장 해보고 싶은 역은 낭만주의의 대표 작품인 〈지젤〉이다.“처음 본 발레 영상이 〈지젤〉이었어요. 그 영상을 보면서 발레리나의 꿈을 키웠습니다. 캐릭터 자체가 사랑스럽고 예뻐요. 의상은 물론이고요. 발레단에서 〈지젤〉 공연을 할 때 모든 공연을 다 챙겨보았어요. 이번에 공연하는 국립발레단 〈지젤〉도 꼭 보러 가려고요. 기회가 된다면 지젤 역은 꼭 해보고 싶습니다.” 그가 존경하는 발레리나는 러시아의 ‘다이애나 비쉬네바’다. 마린스키 발레단과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에서 주역으로 활동했던 다이애나 역시 이수빈처럼 어렸을 때부터 주목받았던 천재적인 발레리나다. 지금 마흔 살이라는 나이임에도 한결같이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관객에게 위안을 주는 발레리나가 되고 싶어요. 무대에서 발레리나는 의상에서부터 분장까지 모든 걸 다 갖춘 공주 같은 모습이잖아요. 그런데 내면엔 오히려 상처나 아픔이 많아요. 지금 제 모습이 그런 것 같아요. 겉은 화려한데 속은 무언가 비어 있는 모습이요. 더 많이 노력해서 속이 꽉 찬 무용수가 되고 싶습니다. 관객의 아픔이나 시름도 공연을 통해 감싸주고 공유해줄 수 있는 무용수가 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