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시위대에 휩쓸려 부상
증언자 : 서만동(남)
생년월일 : 1954. 12. 30(당시 나이 27세)
직 업 : 가게 배달원(현재 싱크대 대리점)
조사일시 : 1988. 12
개 요
20일 광남로 사거리에서 공수부대원들에게 개머리판으로 허리를 맞아 부상을 당함.
우연히 목격한 공수부대의 만행
나는 무안군 몽탄에서 4남 2녀 중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중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고향에서 부모님과 함께 살았다.
중학생이 되자 광주에서 혼자 방을 얻어 자취하고 있는 둘째형에게로 왔다. 그러나 어린 나이에 부모님 곁을 떠나서인지 학교생활에 적응하기가 힘들어 결국 중학교 3학년 때 중퇴하고 서울로 올라갔다.
서울에서는 유흥업소를 전전하다가 폐에 이상이 생겨 다시 고향으로 내려왔다. 건강이 어느 정도 회복되자 1976년 광주로 나와 금남로에 있는 '현대가스상사'에 배달기사로 취직했다. 그때부터 계속 그곳에서 근무했기 때문에 1980년 5월도 금남로에서 맞이하게 되었다. 나는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오토바이로 가스를 배달하고 다녔으므로 시내 분위기를 조금은 알 수 있었다.
19일 오후 3시쯤 박인천 씨 집으로 가는 골목에 있는 공터(현 강산치과)에서 머리가 짧고 책가방까지 든 고등학생을 5-6명의 공수들이 때리고 있었다. 어떻게 해서 잡혔는지는 모르지만 개머리판으로 치고 워커발로 차는 등 무지막지하게 패고 있었다. 나는 우연히 가게에서 나와 이 광경을 보고 치를 떨면서도 두려움 때문에 감히 말릴 생각도 못 하고 있었다. 그때 마침 지나가던 아줌마가 '어린애들을 왜 그렇게 때리느냐'고 말렸다.
그러자 공수부대원들이 40대로 보이는 그 아줌마에게로 다짜고짜 달려들어 정신 없이 패버렸다. 말리는 말 한마디에 피곤죽이 되도록 맞은 아줌마는 그자리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그러고 난 후 공수부대 지휘관이 꽥 소리를 질렀다.
"전라도 새끼들, 씨를 말려버리겠다."
이런 말하면 다른 지역 사람들은 지역감정을 조작하기 위해서 하는 말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직접 들은 말이다. 시내상황이 그렇게 험하게 돌아가고 있어서 가게문도 못 열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금남로에서 빠져나가 학동에 있는 집으로 가야 될 것 같았다. 더구나 우리 가게 바로 앞에서도 대학생으로 보이는 젊은 애들은 무조건 개머리판으로, 곤봉으로 두들겨맞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오른쪽 허리에 개머리판이
어떻게 하면 이 가게에서 무사히 집까지 갈 수 있을까 궁리하다가 4시가 넘어서야 가게를 나섰다. 회사 마크가 찍힌 옷을 입고 나는 두려움에 떨면서도 침착하게 걸어 무사히 학동에 있는 집으로 왔다.
가게문도 열지 않으니까 집에서 꼼짝하지 않으려 했는데 20일 아침 갑자기 남평의 있는 친척집에서 왔다 가라는 연락이 왔다. 아침밥을 먹고 걸어서 백운동까지 갔다. 비가 온 후여서 그런지 학동에서 백운동까지 가는 동안 특별한 일은 없었다. 남평에 가서 볼일을 마치고 시외버스를 타고 오는데 기사가 공용버스터미널까지는 못 간다며 광남로 사거리 미처 못 가서 내려주었다.
걸어서 광주일고 있는 쪽으로 가는 도중 마침 쫓기고 있는 학생들과 함께 섞이게 되었다. 갑자기 한 패거리가 된 나는 공수부대가 쫓아와도 도망갈 생각을 하지 않고 걷고 있었다. 그들은 닥치는대로 학생들을 구타하더니 내게도 달려들어 개머리판으로 오른쪽 허리를 내리쳤다. 나는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그들의 곤봉 세례를 받으며 그 자리에 쓰러져버렸다.
정신을 차려보니 임동 둘째형님 댁이었다. 같은 동네에 사는 사람이 쓰러져 있는 나를 데리고 왔다고 한다. 그 사람은 우연히 그곳을 지나가다 나를 알아보고 형님댁으로 옮겨주었다는 것이다.
평소에 잘 알지도 못하던 그 사람 덕분에 나는 다행히 공수부대에게 끌려가지 않고 형님댁에서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형수님께서 사오신 약을 개머리판에 찍혀 움푹 패인 허리에 바르고, 침을 맞고 한약을 달여 먹으면서 지냈다. 어깨며 허벅지 등이 멍들고 온몸이 아팠지만 그래도 겉으로는 멀쩡했다. 그 후 후유증으로 1년간은 직장생활을 온전히 할 수 없었다. '현대가스상사'에서 5-6년 근무했기 때문에 내 사정을 봐주었다. 몸이 아프면 결근하고 좀 나아지면 출근하는 식으로 근무할 수 있었던 것이다.
1984년 아는 분이 서방에 가게(중흥동 백조싱크)를 하나 얻어주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집사람과 함께 운영하고 있다.
배상보다는 진상규명이 우선되어야
그때 부상당한 것이 창피한 일이라고만 생각하고 하소연 한 번 못한 채 8년 동안을 살아왔다. 그러다가 1988년 둘째형님이 부상자 신고를 하라고 권해서 그해 5월 20일에야 시청에 신고를 했다.
그동안 분하고 억울하다는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부상자 판명에 필요한 검사를 받을 때 다른 부상자들을 보고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휠체어를 탄 사람, 목발을 짚은 사람, 아직도 병원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 그때 충격으로 정신이상이 된 사람 등등 나보다 심하게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당한 사람들이 부지기수였기 때문이다.
나도 당시 부상을 당했지만 TV에서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안경 낀 대학생이 '폭도들이 광주교도소를 습격했다'고 했을 때 정말 그런 줄만 믿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그동안 광주문제에 대해서 많이 거론되고, 곳곳에서 민주화 바람이 일고 있는 것을 보고 생각이 차츰 달라진 것이다. 나는 참여하지도 않고 부상만 당했지만 5·18의 한 일원이었다는 점에 조금은 자부심을 느낀다. 엊그제 MBC에서 방영한 '어머니의 노래'를 보고 복사를 해서라도 안 본 사람이 있으면 보여주고 싶었다.
국회 광주특위청문회를 보고 있으면 질문하는 사람들이나 답변하는 사람들이나 울화통이 터지게 한다. 그러나 정상용이 국회에 나가서 그래도 그만큼 하고 있다는 게 조금은 위로가 된다.
우리 집은 나뿐만 아니라 둘째형님도 광주 5월의 피해자다. 19일 내가 집으로 들어가기 전에 전화로 몸조심하라고 말했다.
그런데 20일 아침, 남평 가기 전 통화에서는 '사람이 다 죽어가는데 내가 보고만 있을 수 있느냐'고 하시더니 결국 교도소에서 23개월이나 살았다. 형님이 교도소에 계실 때 두세 번 면회를 갔다. 그때마다 형님은 오히려 가족들을 위로했다.
그리고 돈이 문제가 아니니까 자주 오라고 하셨다. 그러나 내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고 했지만 교도소이기 때문에 한번 가려면 돈이 우선 필요했다. 나도 부상 후 경제적으로 쪼들린 상태여서 자주 면회 가볼 수가 없었다.
시골에 계신 큰형님은 큰형님대로 둘째형님과 나 때문에 어디 가려면 지서에 신고를 해야 할 정도로 감시를 받고 있다고 했다. 23개월 후 형님은 석방되어 나오셨지만 지금까지 그때 상황에 대해서는 함구 무언이시다.
나는 5·18 광주의거부상자회 회원으로 늦게야 활동하게 되었다. 부상자 신고를 한 후 계속 연락이 왔는데도 나는 임동성당 모임시 처음으로 참석했다. 그때가 5·18 광주의거부상자회의 월례모임이었는데 회원들에게 배지를 나누어 주었다. 그 이후 나는 모임 때마다 참석하고 싶지만 한 번도 못 나갔다. 지금 하고 있는 가게를 종업원 없이 집사람과 둘이서 운영하고 있기 때문에 바빠서 못 나간다. 직접 참석하지는 않지만 소식은 계속 듣고 있고 회원들이 와서 많이 도와준다.
아직도 5·18 광주민중항쟁에 대해서 다른 지역 사람들이 너무 모르고 있고, 폭도 누명을 쓰고 있는데 하루빨리 진상규명이 되어야 할 것이다. 광주 시민들의 명예회복을 꼭 시켜준 다음에 배상을 해주어야 할 것이다. (조사정리 장옥근) [5.18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