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마지막 목수이자 중요무형문화재 제74호 대목장 보유자
배희한님이 지난 1997년 11월 5일 노환으로 별세했습니다(향년 89세)
이를 기리는 뜻에서 제 4회에 걸쳐 <뿌리깊은 나무>에 연재되었던
생생한 생전의 증언을 연재하여 드리겠습니다.
다음은 한국항공대학교의 윤석달 교수의 글로써 배희한 님에 대한 간략한 소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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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궐 목수로 조선집을 지었던, 도편수 배희한 】
조선집을 제대로 지을 줄 알았던 목수, 도편수였던 최백현-최원식의 제자인 대궐목수
대궐 목수 백년 계보
건축은 수많은 사람들이 쏟아붓는 노력의 결정체다. 특히 옛건축물은 모두 엄격한 수업을 통해 기능을 수련한 장인정신의 소산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옛건축물을 짓는 사람들의 모든 기능은 도제수업으로만 이루어졌으며, 그들은 스승으로부터 오랜 기간 호된 단련을 받아서 일정한 수준에 오른 다음에야 한 사람의 기능인으로서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목수 중에서도 상급에 속하는 사람은 대궐을 지을 줄 알았던 목수다. 대궐목수의 최상급자는 도편수라 불렀으며, 그 아래에 부편수(또는 중편수)가 있고, 그 밑에 다시 여러 종류의 편수들이 있었다. 편수는 목수들의 우두머리이다. 마름질을 하는 목수의 우두머리는 정현편수라 하고, 공포를 짜는 목수의 우두머리는 공답편수라고 한다. 이런 식으로 중편수 아래엔 여러 명의 편수들이 있었는데, 서까래 일을 하는 목수들의 우두머리인 연목편수, 수장일을 하는 수장편수, 단청쟁이의 편수는 단청화사라 하고, 조각쟁이의 편수는 조각편수, 자귀쟁이의 편수는 선장소임, 톱쟁이는 기거소임, 나막신쟁이는 목혜, 가칠쟁이는 가칠, 석수쟁이는 석수, 대장쟁이는 야장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편수들의 최우두머리를 지낸 도편수로서 이름을 날린 이로는 1880년대에서 1920년대엔 한세진과 최백현이 있었고, 그 뒤를 이어 1930년대까지 활동했던 최원식, 임창식, 이세영, 오홍범 등이 있었으며, 1960년대까지 활약한 대궐목수로는 임배근, 심홍민, 배희한이 있었다. 배희한은 최백현-최원식-배희한으로 이어지는 조선건축의 도편수의 반열에 드는 인물이었다.
도편수 최원식의 제자가 되어
목수 배희한은 1907년 서울 용산에서 태어났다. 아홉 살 때 용산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삼일운동이 일어났던 그 해 열두살 때 학교를 중퇴했다. 열네살에 당시 철도청 소속의 일본 목수 밑에 들어가서 일을 배워 일본집과 일본창고 짓는 일을 하다가 그만 두었다. 열 일곱 살이었던 1924년, 그는 도편수 최원식의 제자가 되어 조선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최원식은 그 때에 조선에서는 ‘그이를 웃친 이’가 없을만큼 뛰어난 목수였다고 한다. 이 무렵 대조전 역사가 있었고, 그는 일을 배우면서 뒷일거리를 맡아 했다. 이 당시 그는 처음부터 최원식의 사랑을 받았지만, 품삯 따위는 생각조차 할 수도 없이 도편수의 수발을 하면서 재주를 익혔다. 끌질, 대패질, 자귀질을 차례로 익혔다고 한다. 스무살 적부터 집을 지었는데 경기도 고양군의 능곡관, 삼청동 민영휘의 사랑채도 그 무렵에 지었다.
스물 세 살 적에 경기도 용강면 무쇠막 김씨의 딸과 혼인하여 스물일곱에 맏아들을, 이듬해엔 맏딸을 낳았고, 이후 모두 합해서 아들 둘과 딸 다섯을 낳았다. 용산 김재은의 집, 파주 노유성의 별장, 돈암동 송성진의 집, 화성군 남양면 최기태의 집을 지었고, 서른 다섯 살에는 평안북도 구성군에 있는 최창학의 집을 지었다. 최창학은 금광개발로 당대 최고의 부자소리를 듣는 이였다.
목수로 숨어살며 징용에 끌려가지 않았고, 6.25 이후엔 이태원 미군부대에서 일을 하기도 했다. 그 무렵 소목장이 되어 만든 ‘OK장’은 미군들한테 큰 인기를 얻었는데, 미군들은 그를 재주있는 늙은이라고 하여 그럭저럭 대접해주기도 했다. 그러나 대궐 목수가 베니어로 궤짝이나 짜고 있는 것이 그로서는 원통하고 한심한 나날이었다. 쉰살이 넘으면서 다시 집을 지었다. 용산구 도동의 남묘를 비롯해서, 1960년엔 경복궁의 하향정을 지었고, 향원정을 수리했다. 이후 예순아홉살에 성북구 성북동에 화가 서세옥의 집을 짓기까지 여러 군데에 조선집을 지었다. 전주의 이성계 비각, 도선사의 청담선사 비각, 장춘단 팔각정 두채, 연천향교, 과천의 연불암, 성북동의 오래사, 봉천동의 구암사, 행주산성의 충장사의 닫집이 그의 손으로 지어진 것이었다. 덕수궁을 수리했고, 삼척의 죽서루를 해체해서 수리했으며, 영월의 관풍루와 경복궁 경회루를 수리했다. 오랜 세월 조선목수로서 그는 조선집을 짓는 임무를 다했고, 보람도 누렸다.
돈은 모르고, 좋은 집 지을 궁리만
배희한은 스승을 비롯한 여늬 목수들과는 달리 술도 마시지 않았고, 투전 따위도 몰랐다. 그가 번돈 중 자신이 쓰는 것으론 담배값밖에 없었는데도 살림이 나아지지 않았고 겨우 입에 풀칠하면서 살았는데 그의 말에 의하면, ‘죽은 나무 깎아 먹는 사람’한테는 늘 것이 없어서 그랬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집장사를 해서 돈을 벌 기회도 있었지만, 그는 청부를 맡아서 집을 지으면 돈남길 생각만 자꾸 앞서게 되어 끝내 자신의 눈에 차는 집을 지을 수가 없어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오일륙 후 일시적으로 불어닥친 성역화 사업과 문화재보수는 대체로 짧은 기간안에 서둘러 끝내야 하는 일이어서 배목수 같은 이들은 필요가 없었다. 그는 조선집을 제대로 모르는 이들이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고 당치 않은 말을 하면 그 자리에서 연장망태기를 꾸려서 나오곤 했다. 자신이 하는 일은 틀림이 없어야 하고, 한 일은 모두 자랑스러운 것이어야 했다. 화가 서세옥의 집을 뽄때있게 지었다. 좋은 목재로, 집주인의 안목이 그런 집을 짓게 했다고 했다. 당시 서세옥의 집은 창덕궁에 있는 연경당의 사랑채를 그대로 본떠 지은 집이었다. 그 집을 둘러본 사람들은 그 집의 빼어난 아름다움과 그런 집을 지을 수 있는 목수가 아직도 살아있다는 데 놀라기도 하였다.
1980년 12월엔 국립민속박물관이 ‘목공특별연장전’을 열었을 때 배목수가 쓰던 연장을 빌어다 전시하면서, ‘도편수 배희한 현재 사용 연장’이라고 쪽지에 써붙이기도 하였는데, 그것은 ‘도편수’로서 그를 대접해준 일종의 인증서라 할 수 있었다. 배목수 이후에도 장유종, 신태희, 송희동, 이동호, 고택용 같은 이들이 조선목수의 맥을 이어가고 있고, 그들은 다시 또 제자들을 길러내서 그 명맥이 아주 끊어지지는 않았으나, 오늘날엔 나무값도 비싸고 좋은 나무도 없어서 점점 조선집 짓는 일도 드물어졌다.
1997년 노환으로 그가 별세하기 전인 1981년, 뿌리깊은나무사에서 민중자서전을 펴낼 때, 그의 생애를 구술한 [이제 이 조선톱에도 녹이 슬었네](부제; 조선목수 배희한의 한평생)라는 책이 나오기도 하였다. 여기에 그의 생애가 그대로 녹아있다. 그는 가고 없지만 그가 지은 조선집은 지금도 여러 곳에서 그 아름다움의 빛을 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