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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결한 순이] 이은주
1-1. 60년대 서울 전차 거리 외경(낮)
1-2. 전차 내부(낮)
창밖으로 길거리 풍경이 흐르고 화분을 든 손이 화면에 들어온다. 이윽고 순이의 뒷모습과 옆모습이 아른아른 보여지고....
1-3. 전차 정류장(낮)
전차에서 내린 순이, 어디론가 걸어간다.
1-4. 돌담길(낮)
한손에 짐가방, 다른 한손엔 화분을 들고
낯선 세계에 떨어진 이방인 같은 순이.
순이 화면에서 사라지면 돌담길 벽을 배경으로
타이틀 ‘순결한 순이’
2 준수네 마당(낮)
E “신문이요!”
담장위로 날아와 떨어지는 신문.
신문을 잡는 손, 준수다.
박전무, 텃밭에 물을 준다.
의자에 앉아 턱을 괴고 신문 보는 준수.
준수 소르본 대학에 휴교령이라....
프랑스 학생데모가 갈수록 심상치가 않네.
드골정권도 물러 날 때 가 된 건가?
박전무 먹고 살게 해주니까.... 누가 누굴 물러나래.
어디서나 좌파쥐새끼들이 문제야.
고런 놈들은 쥐약으로 싹 박멸을 해야 돼!
준수 (다른 면 읽는다) 20대 식모.. 여주인 살해!
박전무 (움찔 놀란다)
준수 (재미있다는듯) 쥐약으로 죽였대요!
김여사 (앞치마 두르고 어느새 나와 있다) 하여간 식모년이 문제라니까. 식사들 해요! (들어간다)
박전무 (김여사 들으라는 듯) 우리 집엔 쥐약 놓지 말어!
(한쪽에 놓인 쥐덫 본다) 어디.. 좀 잡혔나?(들여다본다)
준수 (끔찍한 듯 쥐덫을 본다)
3 주방(낮)
새까맣게 탄 굴비 세 마리와 간장 종지, 고추장 종지, 달랑 있는 식탁.
굴비접시 외면한 채, 준수는 고추장에, 박전무는 간장에 밥을 비비고 있다.
김여사 (탄 껍질 벗기며) 강원도 애고 나인 스물이래요.
열두살부터 식모 일을 했다니, 살림 하난 기똥차게 잘한대요.
준수, 박전무 밥과 자기밥에 참기름을 떨어뜨린다.
각자 자기밥을 열심히 비비고 있는 준수와 박전무.
김여사 (지친 듯) 이번엔 제발 오래 붙어야 있어야 는데..
어떤 애가 들어올지 벌써부터 걱정이네. 살발라 놨으니까.. 먹어요
(굴비접시 가운데 놓고 일어난다) 먼저 일어날게요. 부인회 모임이 있어서....
박전무 (숟가락 탁 놓고) 살림도 때려친 마당에... 예편네 자리도 때려쳐!
김여사 (팩- 해서) 뭐라구요?
박전무 한달에 고작 두세번 오는 서방한테... 이게 먹으라구 주는 밥상이야?
김여사 (할말이 없다) 그건.... 내가 뭐 놀러 다니나? 좀 봐줘요.
박전무 집에 오면 뭐해? 뭔 낙이 있어야지... (벌떡 일어나 나간다)
김여사 아니.. 저 양반이.... 새삼스럽게....
준수 고추장밥도 물리네. 콩가루에 비벼야겠다.(일어나 찾으며 비꼬듯이)
콩가루가 어딨드라?
4 극장앞(낮)
순이 누군가를 기다린다.
배고픈지 가방에 있는 감자떡을 꺼내 먹는 순이.
입안이 우물우물...시선은 누군가를 찾고 있다.
(jump)
순이, 기다리다 지친 듯 앉아 꿈벅꿈벅 졸고 있다.
월남치마 입은 영자가 이제야 나타난다.
‘얘구나!’ 졸고 있는 순이를 꼬나 내려 본다.
영자 (껌 짝짝 씹으며) 이봐! 네가 순이야?
순이 (잠에서 깬다, 영자를 본다)
5 골목 골목(낮)
순이, 영자, 걸어간다.
동네구경에 여념 없는 순이 얼굴 위로, 영자 껌 씹으며 계속 떠든다.
영자 아저씬 부산에 있는 큰 신발공장 전무시래,
그래서 서울집엔 가끔씩만 오셔.
순이 (동네 간판들 하나하나 보고)
영자 아줌만, 교회 집사에 애국부인회 총무라나. 교회랑 부인회 살림을 도맡아 하시느라 집안 살림엔 영 관심이 없으셔. (빈정) 근데, 이름 한번 거창하지? 애국부인회! 도대체 부인들이 모여 무슨 애국을 한단 걸까?
순이 (관심 없는 듯 표정 없고)
영자 부부가 전무에 총무에 안팎으로 공사가 다방? (눈알 굴리다가 에라..) 다방 하셔. 근데, 전무가 높을까? 총무가 높을까? (보면)
순이 (태연스럽게 어딘가를 보며) 식모!
영자 (썰렁해서 본다)
순이 (씩 웃으며) 농담인데!
영자 (그제야 깔깔) 맞아! 식모가 높아. 식모오.
(뭐가 그리 웃긴지, 눈물까지 찔끔 흘리며 웃다가, 문득 표정 바꿔 명령하듯) 근데 너, 조심해!
순이 (본다) 뭘?
영자 준수 오빠!
순이 (고개를 갸웃하면)
영자 준수오빤 내꺼야! 건들면 너 죽고 나 살어!
6 마당(낮)
순이 앞에 준수오빠 서있다.
준수 오느라고 힘들었지?
순이 (준수를 본다)
준수 난 준수야.. 준수오빠라구 불러.
순이 (목례하고, 아.. 바로 그 준수오빠구나!)
7 2층 다락 방(낮)
순이, 들어오면 침대와 옷장이 있는 개끗한 방안.
준수, 짐가방 내려놓고 창문을 연다.
준수 음식은 잘하니?
순이 (머뭇거린다)
준수 고추장 밥만 안먹게 해줘!
순이 예?
준수 (차차 안다는 듯, 순이 화분 보며) 그건 뭐야?
순이 고향에서 가져온 거예요.
준수 (바짝 와 화분 보며) 눈물 나네. 이름이 뭔데?
순이 순이.
준수 네 이름 말구.... (화분 가리킨다)
순이 몰..라요!
준수 (보면)
순이 이름 없는 풀이예요!!!
준수 (고개 갸웃하며 풀 본다) 이름 없는 풀?
8 거실(낮)
박사장과 준수, 흑백 티비 보고 있다.
박사장 (티비 보며) 애 상판이 어째 식모 상판 같질 않어.
준수 (티비 본다)
박사장 우리 신발공장에서 여공이나 하라 할까?
준수 (못 말린다는 듯) 아버지!
박사장 안되겠지?
준수 (그냥 웃는)
박사장 (옆구리 쿡 찌르며) 조심해!
준수 (관심 없고, 걱정 말라는 듯) 식모예요. 아버진.
9 순이 방(낮)
태어나 침대가 처음인 순이, 새하얀 시트를 쓸듯이 만져본다.
순이, 창가에 화분을 놓는다.
10 안방(낮)
김여사, 화장하며 일장연설을 늘어놓는다.
순이는 다소곳이 듣고 있다.
김여사 전쟁 때 부모를 잃었다구?
순이 .... 네.
김여사 행실 바르게 얌전히 있으면, 남부럽지 않게 시집도 보낼 줄테니..
잘 지내보자꾸나.
순이 감사합니다.
김여사 근데 너, 글은 아니?
순이 읽은 줄은 아는...데요. (꼬리 흐린다)
김여사 다행이구나. (경대 위의 메모 주며) 여기.. 장 볼 거랑 할일 적어 놨다. (다시 화장 하며) 전에 애들은 줄줄이들 글을 몰라서...
내 입이 고생했지. 지금이 어떤 시댄데 글을 몰라. 안그래?
순이 (메모를 본다)
11 한의원(낮)
순이, 개봉한 약 한 첩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꼼꼼히 살피고 있다.
허의원 십년 단골인데, 설마 허튼 거 넣었을 가봐?
순이 (약재 보며)가끔 곰팡이 쓴 걸 넣는 집도 있거든요.
허의원 (발끈) 예끼.. 우리 집을 뭘로 알구...
순이 (됐다는 듯 약재를 다시 싼다) 좋네요.
(일어서며) 안녕히 계세요. (인사하고 나간다)
허의원 (아쉬운 듯) 우리 집에도 저런 애 하나 들어왔음...을마나 좋을꼬?
(쩝쩝-)
12 길(낮)
순이, 한손엔 한약, 한손엔 수박 들고 걸어간다.
멀리서 준수가 온다.
준수, 와서는 수박을 들어준다.
준수 무겁지?
순이 (수줍은 듯) 괜.. 찮아요.
준수 가자. (한마디 하고 성큼성큼 걸어간다)
순이 (고맙고 듬직해서 준수를 본다)
13 주방(낮)
큼지막하게 수박을 자르는 순이.
14 마당(낮)
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준수.
순이, 수박 들고 나온다.
순이 드세요!
준수 고마워!
순이, 한쪽에 있던 빨래 그릇 들고 빨래를 넌다.
준수, 수박을 먹으며 책을 본다.
순이, 빨래를 널다가 문득 준수를 흘끔 본다.
책을 보던 준수, 무심결에 고개 들어 순이를 본다.
빨래 너는 순이 모습이 눈이 부셔 순간 당황하는 준수.
준수, 벙하니 바라보다가 순이와 눈이 딱 마주친다.
괜시리 놀라 동시에 시선을 피하는 순이와 준수.
준수 (어색해서 일어나며) 내 방으로 차 좀 갖다 줘.
순이 (준수를 본다)
15 주방(낮)
준수 E 선반 위에 내가 마시던 차가 있어.
선반 위의 찻병 보인다.
뚜껑 열어 향을 맡아보는 순이.
찻주전자가 끓는다.
찻잔에 잎을 넣고, 조심스럽게 찻물을 붓는 순이.
16 준수 방(낮)
빙그르 돌아가는 LP 판에서 도니제티의 ‘사랑의 묘약’ 중 ‘남몰래 흐르는 눈물’
이 흐르고 있다.
준수, 책상에 앉아 책을 본다.
찻잔 들고 문을 여는 순이, 준수를 잠시 바라본다.
다가가 찻잔을 내리는 순이.
준수 고마워!
순이 (음악이 좋은지 듣고 있다)
준수 좋니? 이 노래?
순이 네.
준수 도니제티의 ‘사랑의 묘약’이야.
순이 사랑의 묘약이요?
준수 (책을 보며) 사랑의 묘약을 함께 마신 사람들은 영원히 함께 삶과
죽음까지 사랑하게 된대.
순이 정말 그런 약이 있어요?
준수 (웃으며) 그런 게 어딨어. 영생불사 한다는 불로초나, 사랑의 묘약이나, 어리석은 인간의 욕망이 만들어낸 상상속의 약 일 뿐이지.
순이 (그렇구나...)
준수 (차 마시다 심각한 얼굴로) 어째 차 맛이 다른데...
순이 (놀라 보면)
준수 (차 보며) 이 안에 사랑의 묘약이 들었나?
순이 (당황해서 본다)
준수 (웃으며) 농담이야.
순이 (빨개진다)
순이와 준수, 음악에 귀를 기울인다.
함께 ‘사랑의 묘약’을 듣는 순이, 준수.
툭- 바늘 멈추고, 음악 끝난다.
썰렁해진다.
준수 (라디오 준다) 방에 갖다놓고 들어.
순이 (의아해 본다)
준수 밤에 심심하잖아. 난 책 보느라... 라디온 잘 안 들어.
순이 (망설이면)
준수 (순이 손에 덥석 라디오 안긴다) 자..
순이 (얼굴 붉히며) 고맙습니다. (후다닥 나간다)
준수 (흐뭇해서 웃고 남은 차를 마신다)
17 순이방(밤)
순이, 아까부터 라디오를 보고 있다.
창밖에서 누군가 “순이야!” 부른다.
일어나 창밖을 보면
아래에서 손 흔드는 영자 보인다.
(jump)
양손에 신발 들고, 순이 따라 몰래 들어오는 영자.
영자 (한쪽에 신발 놓고 부러운 듯 방안 본다) 언제 봐도 이방은 멋져.
내방은 부엌 옆 쪽방이라 햇빛은 없구, 쥐새끼만 득실한데....
먼젓번 식몬 연탄까스에 꽥- 죽어 나갔대.
순이 (안 된 듯) 너두 조심해!
영자 (침대에 벌렁 누워) 불공평 해! 준수 오빠넨 이렇게 좋은 방도 내주
는데, 식모 복은 지지리 없구.
순이 (뜻밖인 듯)
영자 (라디오 봤다, 벌떡 일어나) 와... 이거 네 꺼야?
순이 아니, 준수 오빠가 줬어. 나 들으라구..
영자 (표정 바뀐다) 준수 오빠가?
순이 응. 라디오 잘 안 듣는데. 맨 날 책만 봐.
영자 (눈빛에 날선다)
순이 들어볼까?
순이, 라디오 켜면 연속극 나온다.
라디오에 귀 바짝 대고 해맑은 얼굴 되는 순이.
18 대문 앞(밤)
순이, 영자, 안에서 나오며
영자 (아쉬운 얼굴로) 꼭 재미나는 데서 끝나더라.
사람 약 오르게. 나 또 와도 되지?
순이 응. 대신, 오늘처럼 아줌마 없을 때만...
영자 (아니꼬운듯 쳇 보며) 알았어! 나, 간다! (토라진 듯 간다)
순이 (개의치 않고, 들어가려는데)
준수 E 잠깐!
순이 (닫은 문 다시 열면 준수다)
준수 (가는 영자 보며) 쟤랑 친하니?
순이 (문 닫으며) 네.
준수 (언짢은 듯) 별로 좋은 앤 아냐. 너무 가까이는 마. (들어간다)
순이 (????)
준수 어머닌?
순이 아직...요.
19 주방(밤)
식탁에 밥을 차리는 순이. 나물밥.
준수, 들어와 앉는다.
순이 (상냥하다) 곤드레밥인데요. 저희 고향에서... 많이 해먹어요.
준수 곤드레?
순이 (웃으며) 네.
준수 (먹어본다) 맛있네! 서있지 말고 앉어.
순이 (헤 웃으며 앉는다)
준수 난 음식 잘 하는 여자가 좋더라.
여잔 이쁘고 착하고, 살림까지 잘하면 금상첨화지.
(무심결에) 순이 너처럼....
순이 (조심스럽게) 식모 말곤... 할 줄 아는 게 없는대두요?
준수 잘나고 똑똑한 우리 엄말 보고도 모르겠어?
여잔.. 살림 잘하는 게 최고야!
순이 (태어나 처음 듣는 말.. 감격한다)
20 순이방(낮)
결연한 마음으로 앞치마와 머릿수건 두르는 순이.
행복한 얼굴로 역동적이고 즐겁게 집안일을 한다.
20-1 주방(낮)
설거지 하고,
20-2 거실(낮)
먼지 닦고, 마루 닦고
20-3 마당(낮)
빨래하고, 빨래 널고
20-4 주방구석(낮)
일을 마치고 양푼에 비빈 밥을 먹는 순이, 행복해 죽겠다.
준수 E (달콤하게 속삭이듯) 여잔... 살림 잘하는 게 최고야!
좋아서 양푼 껴안고 큭큭큭 웃는 순이.
무심코 지나치던 준수, 까르르 웃는 순이를 보고
‘뭐가 저리 좋을까? 고개를 갸웃한다.
21 거실, 현관(낮)
김여사(외출복), 친구와 전화중이다.
김여사 보이면 귀찮구, 안보이면 불안하니, 그래 보약 핑계로 몰래 감찰가는거야. 또 알어? 어느 젊은 년이랑 살림이라도 차렸을지.
그러기만 해, 내 쌍도끼로 콱 요절을 낼테니....
(호호호) 그래.... 끊는다. (수화기 내리면)
순이 (한약보자기와 밑반찬보자기 양손에 들고 주방에서 나온다)
김여사 (일어서 현관으로 가며) 부산서 자고, 내일 올테니, 그리 알어.
(밑반찬보자기 보더니) 그건 뭐야?
순이 아저씨 밑반찬이예요! 장조림이랑 멸치볶음이랑...
김여사 (OL의 손사래 치며) 아서. 나더러 그 짐 들고 부산까지 가라구.
됐다!
순이 (슬그머니 밑반찬 내린다)
22 집 앞 (낮)
순이, ?걀 꾸러미 사들고 오는데...
영자가 쨘- 나타난다.
영자 순이야!
23 마당(낮)
큰 솥단지 들고 나오는 영자.
따라 나오는 순이.
영자 (심통 나서) 솥단지는 빌려주면서.. 라디온 왜 안되는데?
딱 하루만 듣고 돌려준다니까..
순이 글쎄 그건 안돼! 미안해, 영자야.
영자 치사빤스다. (‘치’하고 나가다가 마당에 떨어진 편지 본다, 퉁명하게) 편지 왔다!
순이, 편지 주워 본다.
순이 준수오빠 편지네!
영자 준수오빠?
순이 어. (장난으로) 러브레터가봐. 여자한테 왔어.
영자 (놀라서) 진짜?
순이 (웃으며) 김정숙이 누굴까?
영자 김정숙? (편지 뺏아 보며) 대체 누구야 이년은....
순이 (깔깔 웃으며) 잘 봐.
영자 (예민해져) 잘 보지 그럼... 김.정.숙! 이깐것도 못읽을까봐.
순이 (웃음 걷히고 영자를 본다)
영자 (순이 표정에 당황하고...버리듯이 편지 주며) 나, 간다.
(솥단지 들고 허둥지둥 나간다)
그런 영자를 유심히 새기는 순이.
편지 보면 보낸 사람 ‘ 김철진’이다.
금새 하늘이 어두워지더니.
편지 위로 후두둑 빗방울이 떨어진다.
순이, 비 맞으며 빨래줄의 빨래를 걷는다.
24 집 앞(낮)
준수, 머리 위에 책가방 이고, 비 맞으며 달려온다.
25 거실, 현관(낮)
비 맞고 들어와 “순이야..” 부르는 준수.
소파에 놓인 빨래들.
바닥에 뚝뚝 떨어진 물방울 자국들 보인다.
준수, “순이야” 부르며 이층으로 올라간다.
26 순이방(낮)
라디오에서 노래 흐르고.
젖은 옷은 바닥에 흐트러져 있고
속옷차림의 순이는 수건으로 머리 물기 닦고 있다.
“순이야” 하며 벌컥 열리는 문.
순이, 화들짝 놀라 보면, 준수 서있다.
놀라서 두팔로 가슴께 가리는 순이.
당황한 준수, 머뭇대다 얼른 문 닫는다.
27 순이방 밖(낮)
준수, 문 앞에 서서 호흡을 가담는다.
28 순이방(낮)
후다닥 옷을 입는 순이.
서서히 문이 열린다.
준수가 들어온다.
준수, 순이를 바라본다.
순이에게 다가가는 준수.
박힌 듯 그 자리에 서있는 순이.
우르 쾅 - 또 한번 크게 울리는 천둥번개.
준수, 순이를... 와락 안는다.
29 순이방 창가 밖(밤)
창밖 창가에 내놓은 순이의 화분이 비를 맞고 있다.
Dissolve
29-1 순이방 창가 밖(아침)
비가 개인 듯 화분에 물방울이 영롱히 맺혀있다.
30 목욕탕(낮)
흰색 시트를 빨래하는 순이.
어느 한 부위를 집중적으로 부비는데, 보면 붉은 혈이 묻어있다.
31 마당(낮)
빨래줄에 시트를 너는 순이.
시트 보며 행복한 표정 되는데...
김여사, 대문 박차고 성난 얼굴로 들어온다.
순이, 놀라 보고, “오셨어요?” 하면
일별도 없이 안으로 들어가는 김여사.
왜 그럴까? 고개 갸웃하는 순이.
32 거실(낮)
순이, 밖에서 들어오면
안방에서 물건들 내던지는 둔탁한 소음,
으아악- 김여사가 내지르는 괴함 소리 이어진다.
걱정스러워 안방 문앞에 가 서는 순이.
벌컥 문 열리고, 김여사 나온다.
김여사 (신경질적으로) 구경났니?
순이 (서슬에 질려 아무 말 못한다)
김여사 방이나 치워! (씩씩대며 홱 하니 다시 나간다)
33 안방(낮)
순이, 들어오면, 난장판이다.
물건들을 치우는 순이.
놀란 얼굴로 들어오는 영자.
영자 (호들갑 떨며) 어머머머.. 일 났네! 일 났어!
아줌마 마악 화나서 나가시던데.. 뭔 일이야?
순이 (치우며) 몰라. 부산 다녀오시더니, 저러 셔.
영자 부산?
순이 어.
영자 (알겠다는 듯) 드디어 올 것이 와버렸군.
순이 뭐가?
영자 딱 보면 모르냐? (어딘가를 눈으로 가리키면)
결혼사진 액자, 박살나 있다.
사진보고도 감을 못잡는 순이.
즐기듯이 방안 꼬라지를 보는 영자,
경대 서랍들 함부로 열어다 닫았다 한다.
영자 난 언젠가 요런 날이 꼭 올 줄 알았어.
솔직히 아줌만 정신을 좀 차려야 돼.
(서랍 속 립스틱 순이 몰래 꼬불치고)
순이 .........
영자 사회활동? 꼴 같지 않게.. 조강지처랍시고.... 온갖 폼은....
(패물함 연다) 어머 진주목걸이네.
(목에 걸고 거울 보며) 어때? 어울려?
순이 (불안하게 본다)
영자, 이번에 장롱을 열더니, 실크스카프를 꺼내 걸친다.
영자 세상은 너무 불공평해. 집안일은 우리가 다하는데...
이런 건 왜 놀구 먹는 아줌마들 차지야?
순이 영자야!
영자 그동안 우리가 일한 월급 다 모아봐라, 이런 목걸이 꿈이나 꾸나.
순이 (안되겠는지, 벌떡 일어나 단호하게) 아줌마 물건 손대지 마.
영자 (홱 돌며) 뭐?
순이 (스카프를 확 뺏고) 목걸이 이리 내!
영자 (어이없다는 듯 보면)
순이 (힘주어) 어서!
영자 (별꼴이라는 듯, 목걸이 풀어 주며) 네가 무슨..
이집 주인이라도 된 것처럼 말한다.
순이 (패물함에 목걸이 넣고 서랍을 닫는다)
밥 때 됐어. 가서 밥이나 해!
영자 (기막혀서 본다)
34 마당(낮)
영자, 씩씩거리며 나온다.
영자 (어이없어) 별꼴이야! 지가 뭔데.
영자, 분한 마음으로 나가다가 문득 멈추고
영자 그럼 어제 둘만 있었다는 거잖아. (파르르 분해서) 앙큼한 년!
영자 눈에 보이는 빨래줄의 순이 시트.
영자, 분한 마음에 주머니에서 꼬불친 립스틱 꺼내더니,
시트 위에 휘갈기고는
영자 드런 년!
35 동네 길(밤)
어깨 쳐져 걸어오는 준수.
훅- 한숨 이다.
36 순이방(밤)
목욕 끝낸 순이, 젖은 머리로 거울 앞에 섰다.
입술에 립스틱 발라보는 순이.
어떤가? 이쁜가? 자신을 본다.
현관문 소리 들린다.
왔구나! 환한 얼굴의 순이.
37 거실(밤)
들어오는 준수.
립스틱 지우며 이층에서 내려오는 순이.
순이 시선 피한 채 이층으로 올라가는 준수.
순이 (환한 미소로) 밥은 요?
준수 먹었어.
순이 과일이라도...
준수 (피하듯) 됐어. (올라간다)
순이 (허탈해서 고개 푹 숙이면)
준수 (문득) 순이야...
순이 (기대감에 다시 고개 들면)
준수 아.. 아니야. (다시 올라간다)
순이 (내가 뭘 잘못했나?)
38 주방(밤)
술통(뱀술) 앞에 두고, 술 마시는 김여사.
많이 취했다.
김여사 박봉수! 내가 널 가만 둘지 알어.
(독기 품은 눈으로 병안의 뱀 보며) 너두 얘처럼 병에 가둬놓고,
진액 다아 빼서... 내 두고두고.. 홀짝홀짝 마실 거야.
(불현듯 벌떡 일어나더니)
39 순이방(밤)
달라진 준수 때문에 심란해서 골똘히 생각중인 순이.
김여사, 벌컥 문 열고 들어와 취기에 행패를 부린다.
김여사 이방에 침대니 옷장이니 들여 놓을 때 알아봤어야 했어.
(때려 부수며) 식모년 방에.. 내 미쳤지.. 미쳤어.
순이 (놀라서 말리며) 아줌마 왜 이러세요? 아줌마...
김여사 아줌마? (홱 째리고 따귀를 철썩)
순이 (고개 돌아가고)
김여사 너두 아주머니 하다 혀엉님 할래?
순이 (영문 몰라 보며) 왜 그러세요?
준수 (소란에 들어와 놀란 얼굴로 김여사에게) 무슨 일이예요?
김여사 나 원, 동네 챙피해서... 어디 여자가 없어 식모년이랑...
순이, 준수 (동시에 죄진 듯 뜨끔 놀라 본다)
김여사 (준수 보며) 잘난 네 애비... 말자년이랑 살고 있더라...
준수 (표정 굳고)
순이 (표정 굳고)
김여사 더러운 년 같으니!
순이 (마치 자신에게 퍼붓는 것처럼 서글프다)
40 안방(밤)
이부자리 펴는 순이.
잠든 김여사를 업고와 자리에 눕히는 준수.
순이, 준수를 바라보면
준수, 외면하고 나간다.
41 순이방(밤)
김여사에 의해 난장판이 된 방안.
마치 주홍글씨처럼 휘갈긴 영자의 낙서 새겨진 흰색시트.
처참해진 방안꼴을 바라보는 순이.
42 준수방(밤)
책상서랍에서 우편물을 꺼내 보는 준수.
미국대학 입학허가서!
준수, 착잡하고 무겁다.
김여사 E 입학허가서도 나왔으니, 갈 준비 해야지.
43 거실(낮)
편치 않은 준수 얼굴.
김여사와 참한 아가씨 지숙이 앉아 있다.
김여사 (지숙 보며) 금지옥엽 외딸인데, 미국 가버리면 부모님 서운해서 어쩌니?
지숙 (수줍게 웃는다)
준수 (순이가 있는 주방 쪽을 본다)
44 주방(낮)
굳은 얼굴로 과일 깎고 있는 순이.
순이 손이 부르르 떨고 있다.
칼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순이.
기계처럼 과일을 깎다 제 살을 베고 마는데....
김여사 E 차 안내오구 뭐해? 순이야... 순이야.....
45 거실(낮)
순이, 차와 과일 들고 천천히 나온다.
김여사 (간만에 밝은 얼굴로) 원조 받던 시댄 지났어. 니 아버지 신발처럼
수출시대가 왔지않니? 그러니 큰 나라라고 괜히 가 기죽지 말고,
자신감을 가져!
지숙 네. 어머니... (하면)
찻잔과 과일 접시 내려놓는 순이.
준수, 순이 외면하고 딴 곳 보는데
지숙 (소스라치게) 어머!
흰색 탁자보 위로 뚝! 뚝! 떨어지는 핏방울, 순이 손가락에서 피가 떨어진다.
하얗게 질려 순이를 보는 준수.
46 안방(밤)
김여사, 주판알을 튕기며 견적을 뽑는다.
순이는 옆에서 힘없이 걸레질을 한다.
김여사 인륜지대사를 번개불에 콩 볶아먹게 생겼네.
순이 ........
김여사 그래도 하나뿐인 며느린데, 세상 안부럽게 해줘야지.
순이 (넋 나간듯 앉아 있다)
김여사 내일 허의원집 가서 준수 보약 찾아와라.
순이 .........
김여사 약은 정성이야. 정성껏 달여 시간 맞춰 먹여. (대꾸 없자 보더니)
얘.. 예!
순이 (그제야) 예?
김여사 정신을 엇따 두고 있는거야?
순이 예..
김여사 준수 결혼식 끝나면, 이집 정리하고 부산 가기로 했다!
순이 !!!!!!!!
김여사 그러니, 너두 다른 집 알아봐!
순이 (쿵- 한다. 다른 집이라니!)
47 준수방(밤)
준수, 책정리를 하다가 문득 떠올린다.
(cut in)
#45의 피 뚝뚝 흘리는 순이.
준수, 오싹해지는데....
스륵 문이 열리고, 찻잔 든 순이가 들어온다.
순이 (찻잔 내려놓고) 사랑의 묘약이예요!
준수 (오싹해 본다)
순이 그 노래 들려줘요!
준수 (침묵)
순이 듣게 해줘요!
준수 (아무리 생각해도 할말이 그것밖엔) 그땐, 미안... 했어!
순이 (‘미안’이란 말이 가슴을 후빈다)
준수 (시선 피하고) 잊어줘! 힘들겠지만, 나도 어쩔수가 없어.
순이 (상관없다는 듯) 노래 듣게 해줘요.
준수 (답답하고 벌컥 화가 나) 도대체 나한테 원하는게 뭐야?
난 아버지랑 달라. 너 따위랑 안살아!
순이 (무턱대고 그냥 서있다)
준수 (그 모습에 더 열받아) 나가!
순이 (뚫어지게 본다)
준수 내 말 안들려? 나가! (확 찻잔 밀친다)
사랑의 묘약인 찻잔이 바닥에 산산이 부서져 있다.
부서진 찻잔 바라보는 순이, 가슴 도려내듯 아프다.
준수 한달후 면 나 떠나. 떠나야 돼! 내가 어떡하면 좋겠니?
제발... 순이야...
순이 (눈물 뚝뚝 흘리며) 나 같은 여자... 좋다구 했잖아요.
준수 (어이없는 듯 본다)
순이 (확인받고 싶은) 그랬잖아요!
준수 (정나미 떨어지게) 너 따위... 식모를?
순이 (비수가 되어 꽂힌다)
48 한의원외경(낮)
48-1 한의원안(낮)
병든 닭 모냥 매가리 없이 앉아 있는 순이.
허의원, 준수 보약을 내놓는다.
허의원 (살피며) 무슨 근심 있니?
순이 .........아니요. (보약 들고 일어서면)
허의원 (아쉬워) 오늘은 검사 안 해?
순이 (힘없이) 십년 단골인데.. 믿고 살아야죠. (나간다)
허의원 (갸웃하며) 어디.. 아픈가? 파릇파릇한 게 왜 저리 시들었누?
49 동네 거리(낮)
한약 들고 힘없이 걸어오는 순이.
순이를 본 영자, 쪼르르 온다.
영자 정말이야? 준수 오빠, 결혼한다는 거...
순이 (무시하고 걷는다)
영자 (풀썩 주저앉아 엉엉 울며) 어떻게... 어떻게 이럴수가 없어.
순이 (돌아본다)
50 동네 일각(낮)
순이, 영자 침울하게 앉아
영자 오빤 날 사랑하는데... 하늘이 미워죽겠어.
오빠가 결혼해버리면, 난 쥐약이라도 먹고 콱 죽어 버릴 거야!
순이 (표정없이 있다가) 준수 오빠.... 사랑해?
영자 (자신 있게) 그러엄! 오빨 위해서라면... 난 모든지 할 수 있어!
순이 모든지?
영자 모든지!
순이 목숨도 버릴 만큼?
영자 (눈을 깜박 깜박) 응!
순이 ...
51 순이방(밤)
표정없는 얼굴로 물끄러미 화분 보는 순이.
그 속을 도무지 모르겠다.
52 준수방(밤)
눈을 꾹 감은 준수, 침대에 누워 자고 있다.
스륵 문이 열리고
순이의 맨발이 들어온다.
속옷만 입은 채, 천천히 준수에게 다가가는 순이.
파고들듯이 준수 침대로 쓱 들어가는 순이.
준수, 감촉에 화들짝 놀라 눈을 뜨면
어느새 자기 옆에 드러누운 순이를 본다.
놀라 벌떡 일어나는 준수.
준수 (긴장하며) 왜 이래?
순이 (누운 채 담담하게) 나두 데려가요!
준수 (헉- 기막혀 본다) 뭐?
순이 (일어나 애원하듯) 식모로 있을 테니.. 옆에 있게만 해줘요.
준수 (기막혀 말이 안 나온다) 제발... 순이야....
순이 (무릎 꿇고 빌듯이) 다른 집으로 가기 싫어요.
월급도 필요 없구, 결혼 안해도 돼요. 그냥 오빠랑 있게만 해줘요!
준수 (환장해 돌겠다, 침대에서 나와) 왜 이렇게 말을 못알아들어?
바보야?
순이 (울며 간절하다) 제발... 제발... 가지 마요.... 제가... 잘할게요...
준수 (소름 끼치고 넌더리난다) 누구 죽는 꼴... 보고 싶어 그래?
순이 (표정 바뀐다)
준수 살려줘! 순이야.. 제발 날 좀 살게 해줘어...
순이 (표정 바뀐다)
준수 내가 죽을까? 그럴까?
순이 (그건 안된다) 안돼요!
준수 (답답해서)그럼 어쩌라구!
순이 (모르겠다)
준수 (고개 돌려 외면한다)
순이 (절망의 눈물이 뚝, 앉은 채 준수 올려다보며)
죽지.... 말아요!
준수 (외면하고)
순이 (혼자말 하듯) 죽으면....볼 수 없잖아!
준수 .......
순이 죽지 말아요..... 살려...줄게요!
53 다리 난간 (밤)
쏟아지는 빗줄기.
순이, 그 비를 고스란히 맞으며 서있다.
빗물과 함께 순이 눈에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눈물.
다리 아래 흐르는 물을 바라보는 순이.
순이, 눈을 질금 감는다.
이대로 죽고 싶은 순이.
F.0
54 순이방(낮)
아주 깊은 잠을 자는 순이, 눈을 뜬다.
순이, 머리를 곱게 빗고 단정히 옷을 입고, 앞치마를 두른다.
이전과 달라진 순이의 모습이다.
55 몽타주(낮)
-1. 마당 : 순이, 준수의 보약을 정성껏 달이고 있다.
-2. 준수방 : 준수, 순이가 달인 약을 먹는다.
-3. 순이방 : 달력의 날짜 한 장 한 장 찢겨간다.
56 주방(낮)
밥 먹는 준수, 김여사.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옆에서 제 할일을 묵묵히 하는 순이.
그런 순이가 왠지 더욱 불편한 준수다.
57 거리(낮)
과일봉지 들고 걸어오는 순이.
걸어오던 준수와 마주친다.
순이, 준수를 외면하고 간다.
순이 바라보는 준수, 정말 날... 완전히 포기 한 건가?
작열하는 태양.
준수, 햇빛이 눈부신지, 눈을 떴다 감는다.
58 주방(낮)
찻잔에 물을 붓는 순이.
59 준수방(낮)
클래식 LP 판이 돌아간다.
떠나기 전 책 따위 등의 짐정리를 하는 준수.
똑똑 노크.
순이, 들어와 책상 위에 찻잔과 신문을 내려놓고 조용히 돌아선다.
준수 듣고 싶다던 노래... 들려줄까?
순이 (멈칫 서고, 담담하게) 아뇨. ........이젠 됐어요. (나간다)
준수, 순이 태도에 조금 벙하고 서운키도 하다.
차를 마시는 준수.
그런 자신이 우스운지 피식 웃고 신문 든다.
신문 펼치는 준수, 눈을 깜박깜박 한다.
글자가 잘 안보이는지 눈을 부빈다.
활자들이 뿌옇다.
눈을 부릅뜨는 준수.
모든 사물들이 뿌옇고 희미하다.
당혹스런 준수.
60 계단(낮)
계단 내려오는 준수.
점점 더 희미해지는 사물들.
준수, 발을 헛딛고 우당탕탕 굴러 떨어진다.
계단 아래로 굴러 떨어진 준수, 고개를 든다.
준수 (두려움으로) 순이야... 순이야....
61 순이방(낮)
차분한 얼굴로 창가의 화분에 물을 주고 있는 순이.
준수 E 순이야... 순이야...
62 거실(낮)
이층 계단 위 그런 준수를 내려다보는 순이.
준수 눈에 비친 순이, 형체가 이그러진다.
준수 보이지 않아!!! 보이지 않아!!!!
얼음처럼 얼어 준수를 내려다보는 순이.
63 준수방(낮)
시체처럼 침대에 누워있는 준수.
초점을 잃은 준수의 눈동자.
64 거실(낮)
침통한 얼굴로 앉아 있는 김여사.
신부 집에서 돌려보낸 함을 보고 있다.
피눈물이 떨어지는 김여사다.
조금 뒤 박전무가 현관으로 들어온다.
박전무 준순?
김여사 (앉은 채 무섭게 노려보며) 일찍도 와 묻는다.
박전무 (버럭) 준수 어딨어?
김여사, 울화가 터져, 벌떡 일어나
김여사 죽어! 죽어! 이 인간아.. (달려들어 때린다)
박전무 이 여편네가.. 미쳤어?
김여사 그럼 미치지 안미쳐? 구만리 같은 아들이 별안간 눈멀고,
파혼까지 당했는데.. 안미치면 그게 사람이야? 이 더러운 인간아...
박전무 저리 못 비켜! (질린 얼굴로 확 밀친다)
김여사 (나가 떨어져 부르르 한다)
박전무 네가 집구석에서 한 게 뭐 있다구 큰소리야? 어?
준수, 그리된 게 내 탓이야?
김여사 (부르르) 뭐?
박전무 준수 땜에 살았지, 너 좋아 산거 아니야.
나도 참을 만큼 참았어. 끝내! 이혼해!
(밀치고 이층으로 올라간다)
김여사, 부르르 떤다. 뒷골이 땡긴다.
몹시 괴로운 표정에 이윽고 쓰러지는 김여사.
65 안방(낮)
풀려있는 김여사의 동공.
누워있는 김여사에게 침을 놓는 허의원.
66 거실(낮)
허의원, 안방에서 나오면
순이 (다가가) 아주머닌요?
허의원 저러구 살아야지, 별수 있겠냐?
순이 (표정 없고).
허의원 그나저나 이 집 일로 나도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냐?
순이 왜요?
허의원 준수가 우리집 보약 먹고 나서 저리 됐으니,
소문 때문에 손님들이 당최 안와! (축 쳐져 나간다)
순이 (표정 없이 서있는데)
허의원 (가다 멈추고 돌아서서) 어쨌든 네가 고생이다.
식모 하난 잘뒀다고 동네 사람들 칭찬이 자자해.
하나도 아니고 둘씩이나 병수발 드는 게 어디 쉽냐?
순이 (표정 없다)
67 준수방(낮)
수염 덥수룩한 준수, 웅크리고 앉아 불쌍한 모습으로 책을 품에 안고 있다.
이제는 볼 수 없단 말인가... 흐느끼는 준수.
카메라 돌리면 문 앞에 우뚝 서서 그런 준수 내려다보는 순이, 차갑다.
(jump)
순이, 무릎 꿇고 앉아,
의자에 앉은 준수를 칼로 슥슥 면도하고 있다.
준수 내가 이리 돼서 넌 좋지?
순이 (면도에 열중하며 위협하듯) 말하지 마요. 칼에 베요.
준수 저리 가! (하다가 칼에 벤다)
순이 (준수 턱에 흐르는 피를 본다, 수건으로 닦으며 화내듯)
움직이지 말라니까.. 칼에 벴잖아요.
준수 (베인 곳 쓰린지 표정 찡그린다)
순이 내 말 들어요! 오빠도 아줌마도 이젠 나 아니면 아무것도 할수없어!
준수 아버지한테 연락하겠어!
순이 (냉소를 띠며) 아저씬 모든 걸 나한테 맡겼어요.
월급도 두배로 올려줬는걸.
준수 (두렵다)
순이 아저씬 오빠랑 틀리잖아. 부산에서 식모랑 살면서 하던 일 하셔야죠. 서울 와서 뭘 어쩌라구.
준수 (캄캄하다)
순이 (면도크림 붓에 묻히며) 침대에 종을 달았어요! 필요할 때 울려요!
준수 뭐? (기막혀 일어서려다 의자에 걸려 넘어진다)
순이 (일으키며) 봐요. 나 아니면 캄캄해서 살수가 없잖아.
준수 (겁에 질려 보면)
순이 (부드럽게) 내가 오빠 눈이 되고, 빛이 되줄게요!
준수 (소름 끼친다)
땡땡땡 종소리 울린다.
순이 (면도칼 들고 준수 귀에 속삭인다)
들리죠? 필요할 때 저렇게 울리라구요!
68 안방(낮)
누운 채 종을 울리는 김여사.
순이 들어오면, 쉬- 했다고 이불을 드는 김여사.
순이, 묵묵히 이불안에 손을 넣고 옷을 벗긴다.
김여사 (중풍환자 특유의 어눌한 어조로) 쥰순?
순이 (옷을 벗기며 무뚝뚝하게) 자요!
69 마당(낮)
순이, 김여사 이불을 줄에 널고 있다.
영자, 껌 짝짝 씹으며 들어온다.
영자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네.
순이 (무시)
영자 수수께끼야. 아줌마도.... 준수 오빠도...
순이 준수 오빠 사랑한다며....
영자 (깔깔깔 웃으며) 어머 순진하긴.. 그냥 해본 소린데..
너 깜박 속았구나.
순이 (그럴 줄 알았다....본다)
영자 인생이 심심해서 농담 좀 해봤어!
순이 (차갑게) 너랑 농담 할 기분 아니야. 가! (돌아서면)
영자 진짜 좋아한 사람은 따로 있었나봐.
순이 (돌아본다)
영자 결혼 일주일 앞두고, 눈이 멀다니, 이상하니 않어?
순이 (같지 않은 듯) 그래서?
영자 앞으로 그 문제나 연구해 볼까해. 재밌겠지?
순이 (담담히) 열심히 해봐. (홱 돌아서 간다)
영자 (어디 두고 보자 하는데)
순이 (차갑게 웃으며) 너, 또 이불에다 그런 짓 하기만 해.
영자 (보면)
순이 그동안 네가 훔친 물건들... 니네 아줌마한테 다 까발리겠어!
영자 (벙- 뒤통수 맞은 기분이다)
순이 (굳은 얼굴로 돌아선다)
70 주방(밤)
준수, 앉아 있다.
그 앞에 곤드래밥을 탁- 놓는 순이.
순이 (건조) 오빠가 좋아하는 곤드레밥 이예요!
준수 싫어!
순이 (앉는다) 싫어?
준수 먹고 싶지 않아.
순이 (남 얘기하듯) 고향에서 참 지겹게 먹었어요.
쌀이 없어 나물만 가득 넣구. 난 냄새도 싫을 만큼 지겨웠는데..
오빤 이게 맛있다구 그러드라.
준수 ........
순이 쌀밥에 물린 오빠가 어쩌다 맛있어 하는 줄도 모르고
괜히 감격했어요.(보면)
준수 (외면한다)
순이 (가시 있게) 내가 허접한 곤드래밥 인줄도 모르구.
준수 (흥.. 웃으며) 아네!
순이 (버럭) 그러니까 먹어!
준수 (어이없어) 싫다구 했잖아!
순이 (강제로 떠먹이며) 먹어!
준수 (순이 얼굴에 퉤 ?는다)
얼굴에 파편 묻은 채 우뚝 서있는 순이.
준수 (부들부들 떨며) 넌 독초야. 서서히 날 죽이고 있어!
순이 (얼굴에 묻은 걸 닦고 태연하게) 이밥에 독초라도 넣었다는 거예요?
준수 (두려워) 앞으로 네가 해주는 건 먹지 않겠어.
순이 (기가 막히다는 듯) 오빠 눈 이렇게 된게 나 때문이라 생각해요?
준수 ...........
순이 난 오빠와 아줌말 위해 죽을 만큼 노력하는데...너무 하지 않아요?
준수 ......
순이 오빤, 독초가 아니라 사랑에 눈이 먼 거예요.
그날, 함께 마셨잖아. 기억 안나요?
(간지럽게) 사랑의 묘약...
준수 (소름끼친 얼굴 된다)
71 순이 방(밤)
창가에 서있는 순이.
준수 E 넌 독초야... 서서히 날 죽이고 있어.
영자 E 결혼 일주일 앞두고 눈이 멀다니, 이상하지 않어.
앞으로 그 문제나 연구해볼까 해.
힘을 줘 뚝! 화분의 이파리 한장을 따는 순이의 손.
72 거실(낮)
영자, 소파에 앉아 있다.
김여사옷 입은 순이가 주방에서 차와 과일 들고 나온다.
영자, 휘둥그래 본다.
영자 (기막힌 듯) 그 옷 아줌마옷 아냐? 네가 그걸 왜 입고 있어?
순이 (말과 표정 달라져) 이젠 못 입게 됐으니, 비싼 옷 나라도 입으라구,
아줌마가 주시더라.
영자 (안믿겨 보는) 아줌마가? (그럴 리가 없는데)
순이 (진주목걸이 꺼내 탁자 위에 놓는다) 가져.
영자 (입 벌어져) 미쳤니? 훔쳤어?
순이 내가 너니? 애쓴다고 아줌마가 주셨어.
영자 고짓말! 당장 아줌마한테 가 물어볼까?
순이 그러든지. (목걸이 다시 집어넣으며) 기껏 생각해줬더니,
없던 걸로 하자.
영자 (표정 바꿔 목걸이 뺏으며) 성질머리 하곤...
(씩 웃는) 그냥 해본 소리 갖구. 암튼 고마워.
(비굴하게 웃으며) 고생을 왜 사서하나 했더니, 다 이유가 있었네.
순이 (묘하게 웃으며) 부탁 좀 할게.
영자 (목걸이 보며 신나서) 뭔데?
순이 고향에 편지 좀 쓸까 해. 난 쓸 줄 몰라. 대신 좀 써줘.
(편지지와 볼펜 꺼내 탁자 위에 놓는다)
영자 (당황한다) 나.. 나중에...
순이 오늘 부쳐야 돼.. 어서 적어.. 삼촌 보세요.
영자 (볼펜 들고 꾸물댄다)
순이 안 적고 뭐해?
영자 (안되겠는지) 사실은.... (차마 말 못하고)
순이 (속을 꿰뚫듯이 본다)
영자 나.. 글 몰라! (고개 푹 떨군다)
순이 (놀라는 기색 없이) 근데 왜 , 거짓말 쳤어?
영자 무시받기 싫어서... 아무도 몰라.
그러니까 순이야... 말하지 마. 제발....
순이 (걱정 말라는 듯 웃는다) 차 식겠다, 마셔.
영자 그래 주는 거지?
순이 (끄덕인다)
영자 (그제야 웃고 찻잔 든다) 역시 넌 좋은 애야.. (차를 마신다)
73 이층 난간(난간)
영자, 손 흔들며 좋아라 나가고 있다.
차가운 눈빛으로 영자를 바라보고 서있는 순이.
74 안방(낮)
누워있는 김여사.
물수건으로 김여사의 손과 발을 정성껏 닦아주는 순이(자기옷).
순이 기분이 어때요?
김여사 (애기처럼 순이를 바라본다)
순이 답답하세요?
김여사 (도리질 한다)
순이 장에 다녀올게요. 지난번처럼 저 없다구, 울면 안돼요.
김여사 (끄덕끄덕)
75 마당(낮)
순이, 장바구니 들고 현관에서 나오면
준수, 의자에 앉아 있다.
순이 시장에 가요. 필요한 거 있음 말해요.
준수 새 식모가 올 거야!
순이 (멈칫 선다)
준수 그러니까 넌... 이 집에서 나가.
순이 뭐라구요?
준수 나가! 식모 따윈 언제든지 바꿀 수 있어.
순이 (억울해) 죽도록 잘해주니까.. 뭐? 나가라구?
준수 (입 꾹 다문다)
순이 (따지듯) 내가 왜? 뭘...어쨌다구?
준수 소름 끼쳐!
순이 (쿵- 한다)
준수 네가.. 무섭구... 소름끼쳐!
순이 (할 말을 잃는다)
76 동네 일각(낮)
빈장바구니 들고 넋이 빠져 앉아 있는 순이.
의기양양 태도 돌변한 영자가 온다.
영자 얘기 들었지? 나 준수오빠네서 일하기로 했어.
순이 (너 였구나!)
영자 너 참 맹랑하더라. 아줌마가 진주목걸이를 줘?
순이 (노려본다)
영자 그 목걸이, 오빠한테 돌려줬어. 오빠가 내 손 잡고 애원하던데... 제발 널 나가게 해달구.
순이 (노려보며) 허튼 짓 하면 가만 안 둬!
영자 (지지 않고) 경찰에 신고 안한 걸, 고맙게나 생각해.
짐이나 싸! 이 도둑년아..
순이 (영자 목덜미 잡고) 대체 오빠한테 뭐라구 한거야?
죽고 싶어 환장했어?
영자 (확 뿌리치고) 너야말로 죽고 싶어 환장했니? 나가라면
나갈 것이지... 단물 빠진 껌처럼 왜 그케 질척대.
순이 (헉- 본다)
영자 내가 모를 줄 아니? 너랑 준수 오빠 그렇구 그런거 다 알어 기집애야. 확 소문 불기 전에 언능 떠나라!
순이 (눈빛 변해서) 준수 오빠 위해 모든지... 다 한댔지?
영자 그런대두! 모오든지 다 할게. (보며 얄밉게) 걱정마 순이야.
순이 (서늘하게 본다)
77 주방 (낮)
찬밥 된 곤드래밥(준수가 먹지 않은) 싱크대 위에 놓여있다.
배고픈 준수가 먹을 것을 찾아 들어온다.
여기저기 더듬지만 음식을 못찾는 준수.
마침내 싱크대 위의 곤드래 밥으로 손을 뻗는다.
손으로 그 밥을 먹기 시작하는 준수.
쥐 한마리 지나간다.
밥을 먹는 준수 귀로 “찍-” 하는 소리 들린다.
사색이 되어 먹던 걸 멈추는 준수.
설마.. 내가 먹은 이 밥에 쥐약이?
손으로 입 틀어막고 ‘우웩’ 토악질하는 준수.
준수, 공포에 질려 허둥지둥 나가려다
뭔가에 걸려 “악” 외마디 비명 지르고 넘어진다.
쥐덫에 걸렸다.
78 준수방(밤)
창백한 얼굴로 침대에 누워 있는 준수.
순이, 준수 발에 다진 약초 바르고 있다.
순이 다행히 상처가 깊진 않아요.
며칠 이 약촐 바르면, 금새 아물거예요.
준수 (말 없다)
순이 내 불찰 이예요. 그런 걸 집안에 놔두는 게 아니었는데...
준수 (차갑게 외면한다)
순이 (준수 보며) 날 또 의심하는 군요!
준수 (힘없이 애원하는) 제발 부탁이야. 이 집에서 나가줘!
순이 .........
준수 (힘빼고) 밤마다 악몽을 꿔! 네가 날 죽이는 꿈..
순이 (서럽다)
준수 (한탄하듯) 고대 인도엔 독초미녀가 있었다지.
순이 .....
준수 그 미녀를 품은 남자들은 모두 죽고 말았어.
미녀가 뿜는 치명적인 독기 때문에...
순이 (눈물 흐른다)
준수 넌 그렇게 날 죽이고 있어.
순이 이름 없는 풀이 있어요.
사랑을 줬더라면, 독초가 아닌 약초가 됐을지도 모르는데...
준수 (비웃기라도 하듯) 눈이 멀어 좋은 게 하나 있어.
순이 (보면)
준수 네가... 보이지 않는 거!
순이 (무너진다)
준수 너랑 산다는 건, 죽기보다 싫은 일이야.
순이 (참혹하다) 죽기보다.. 싫은 일....
준수 (입술 꾹 누른다)
순이 (혼자말 하듯) 난 항상 사랑을 줬는데... 어째서...받진 못하는 걸까?
준수 ........
순이 (희미하게 웃으며) 그래요... 떠날게요!!!!!!!
준수 (떠난다?)
순이 단물 빠진 껌처럼 질척대서.... 미안해요.
이젠..그만.. 떨어질게요. (준수를 본다)
79 순이방(밤->새벽)
순이, 석고처럼 앉아 있다. 아무 표정 없다.
그대로 날이 밝는다.
80 준수네 외경(낮)
81 계단(낮)
평소처럼 찻잔 들고 천천히 올라가는 순이.
82 준수방(낮)
똑똑 노크소리.
순이, 쟁반 들고 들어온다.
조용히 눈을 감고 침대에 누워있는 준수.
순이, 책상에 찻잔 놓고
준수 발의 상처를 살핀다.
순이 많이 아물었네요!
준수 (눈 감고 있다)
순이, 준수책상에 앉아 차를 한모금 마시고.
순이 오늘... 떠나요!
준수 .............
찻잔 내려놓고, 일어서는 순이.
전축 앞에 가서는 앨범을 꺼낸다.
순이 이건 내가 가져갈게요!
(준수 보며) 괜찮죠?
준수 ..........
준수 입술에 키스하는 순이.
순이 잘 있어요!
83 마당 텃밭(낮)
순이, 분신을 남기듯 화분의 식물을 소중히 옮겨 심고 있다.
일어나 가방 들고 쓸쓸히 나가는 순이.
대문... 닫힌다.
84 전차 거리(낮)
구퉁이에 쭈그리고 앉은 순이 보인다.
낯선 곳에 떨어진 이방인 같은 순이.
우물우물 감자떡을 먹고 있다.
단지 먹고 살아야 한다는 집념만이 보일뿐
마치 아무일도 없었던 듯한 순이다.
누군가 버리고 간 신문 하나가 바람에 펄럭인다.
순이, 아까부터 그 신문을 응시하고 있다.
다 먹은 순이, 자리에서 일어나 어디론가 간다.
순이 가고 난 빈자리... 아까의 신문이 바람에 실려온다.
클로즈업 되는 신문에는 다음의 기사가 눈에 띈다.
‘주인집 아들 살해한 20대 식모.. 유서남기고 연탄가스 자살’
그리고 해맑게 웃고 있는 영자 사진 보인다.
......
준수의 앨범을 가슴에 소중히 품으며 걸어가는 순이.(가방 없다)
그 위로 흐르는 도니제티의 ‘사랑의 묘약’
순이 E 사랑의 묘약을 마시면 삶과 죽음까지 영원히 함께 해요?
준수 E 응! 삶도 죽음도 영원히 함께 해.
순이 E (꿈꾸듯) 영원히.... 함께....
“영원히 함께!” 꿈꾸듯 행복한 순이 얼굴.
그런데.... 자세히 보면, 초점이 없다.
눈이 먼 채로 그렇게 어디론가 흘러가는 순이 부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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