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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 소감(눈꽃송이 피던 날)
캘거리 도시 전체가 커다란 눈꽃으로 피어났다. 데이케어 아이들과 함께 눈 속에서 뒹굴며
눈사람을 만드는 날이었다. 온몸이 젖어들어 나른한 오후 몸을 벌떡, 일으켜 세우는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당선을 축하합니다." 잠시 무슨 소리인지 정신을 가다듬었다.
한 달 전 우연히 신문을 보고서 무슨 공모전인가 응모를 한 사실을 재빨리 기억해 내었다.
혹시? 그것인가. 동상을 수상을 했다는 소식이었다.
기쁘다!
지금 창밖에는 축복처럼 눈이 내리고 있다.
글쓰기는 나에게 자연치유요법이 된다.
마음속 깊이 전해지는 이 온기를 더 오래오래 간직하고 싶다.
내 옆에 머무는 사람, 내 가정 안에, 어쩌면 뒷마당 자작나무 위의 로빈 새까지도
모두 감사하다. 민들레 홀씨처럼 공중에 떠다니는 글감을 내 마음의 안테나로 잡아내어
조심스럽게 펼쳐 보였던 나의 글, 어느 시인은 글은 쓰는 것이 아니고 마음으로 받아 내는 일이라고 하였다.
당선 될 거라며 응원해주는 문우의 따뜻한 말 한마디,
글쓰기 동기부여의 힘을 실어주는 옆지기, 사랑하는 아들, 딸
새해가 오면 나를 할머니로 만들어 줄 우리 집 새아기, 마리 스텔라 그리고 어머님
기쁨의 기회 주신 실리콘 밸리 롸이더스 그룹에 감사함을 실어 보내는 겨울 아침,
캘거리 도시 전체가 눈꽃으로 활짝 피었다.
행복을 수선하는 그녀 얼마 전 전철역에 있는 캘거리 센터빌딩이 새로 단장을 해서 문을 열었다. 아름다운 샹젤리제의 불빛과 늘어진 커튼 그리고 공간마다 아름다운 장식품들에 제법 갤러리와 스튜디오도 갖추고 있어 쇼핑은 물론 휴식 공간으로도 손색이 없다. 출퇴근 시간에 이 아름다운 곳을 밟고 지나가면서 그림과 조각을 감상할 때면 마치 예술인이 된 느낌이 들기도 하였다. |
무채색의 가을 몇 월에 와있는 것일까. 잠시 생각에 잠겨본다. 여자의 평균 수명을 팔십이라고 한다면 아마 나는 여름의 끝자락에서 이제 막 시작하는 구월을 향하여 가고 있을 것이다. 내 인생의 가을은 무슨 색으로 물들어 갈까?
얼마 되지 않아 나는 아주 이상한 느낌이 받았다. 나는 나대로,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각자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닌가. 무엇인지 모를 불안감, 마치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과의 대화처럼 소통의 불가능 앞에서 좌절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토록 정신이 맑고 총명하여 누구에게 무엇을 빌려주면 노트에 기록하지 않아도 정확한 날짜까지 기억하시던 어머니께서 말로만 듣던 치매 초기를 넘기고 계셨다. 그 후로 나는 여름휴가를 온전히 친정어머니를 방문하는 시간으로 마련하였다. 젊은 시절 어머니는 성품이 조용하기도 하셨지만, 아버지께서 우리를 엄하게 다루시니 우리 삼남매를 자애롭게 대할 수밖에 없었노라고 나중에 말씀하셨다. 어머니는 더욱 말수가 줄어들고 얼굴에는 예의 그 잔잔한 미소만 띠셨다. 가만히 앉아서 하시는 일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휴지를 돌돌 말아 주머니에 모으시는 것이 아닌가. 하였다.
친구 어머니께서 여행용 가방을 들고 거실로 내려오셨는데 다른 물건과 돈도 없어졌는데 누가 훔쳐갔다면서 의심의 눈초리로 친구를 바라보았다고 한다. 친구가 지금 사는 집으로 이사 올 때도 여름이었는데 미처 이삿짐을 풀지도 못하고 있을 때 친구 어머니는 한복이 없어졌다고 한바탕 소란을 피웠다고 한다. 친구는 그 이야기를 하면서 얼마나 속상했는지 그해 여름이 다 가도록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하고 마음고생을 하여서 저절로 체중조절이 되었다면서 허탈하게 웃었다.
고집 피우는 것이 행동에도 나타났는데 이번에는 진실로 하소연하는 하는 애처로운 눈빛으로 누구를 의심하는 것이 아닌 내 말을 믿어달라는 애원의 눈빛이었다고 하면서 친구는 눈물을 흘렸다. 아, 이 일을 어쩌나…. 오히려 친구는 눈짓으로 그러시면 안 된다고 하면서 오히려 동조하는 말로 어머니를 위로하였다고 한다. 이번에 수첩도 꼭 나올 거예요. 라고 하였단다. 그다음 주말, 친구를 다시 만났다. 아니나 다를까, 어제저녁 친구 어머니가 멋쩍게 웃으며 수첩을 찾았다, 여기 있다. 하였단다. 다시 한 번 위안의 말을 건넸다고 한다. 친구 어머니는 기필코 물건을 찾아내고야 마는 성품이신데 지난 며칠동안 온 집안을 벌집처럼 쑤셔대는 통에 친구는 많이 힘들었다고 하면서, 아무튼 수첩이 나와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하며 이마에 땀방울을 쓸어내렸다. 조만간 다른 물건도 나올 거야. 하며 친구는 다시 쓴웃음을 지었다.
아프지 않아,하면서 활짝 웃으신다.
친정어머니와 친구 어머니의 가을은 아마도 무채색으로 물들어 가는 것 같다. |
내 이름 변천사
나는 이름 때문에 웃기도 하고 이름 때문에 놀림을 당하던 속상한 일이 참 많다. 이민을 온 후로는 세례명인 안나로 주로 불리면서 실명인 신금재로 불리는 일은 좀체 없어서 다시는 이름으로 말미암은 사건은 더 없었다. 직장에서는 안나의 영어식 이름 애나로 불렸으며 한동안 잊고 지내던 내 이름이 이번에는 라이더스 그룹의 육아 일기 공모전에 당선되면서 또 한 번 웃지 못할 일이 생겼다. 지난여름 장가를 간 아들의 육아 일기와 떨어진 배꼽을 담아두었던 기응환 약통을 찾게 되면서 우연히 응모한 공모전에서 놀랍게도 동상을 받게 되었다. 이민 오기 전 한국에서 인천 새얼 문예 백일장에 나가 어머니부 차상으로 상품을 받은 것이 나의 전부였는데 이번에는 상금까지 있었다. 비록 육아 일기라는 생활문예의 입상이지만 내가 가꾸는 글 밭에 피어난 환한 한 송이 꽃이 되기에 충분한 사건이었다. 얼마 후 상장이 도착하였는데 이번에는 내 이름이 심.금.례 로 변경되어 있었다. 아마도 그룹 직원이 상장 만드는 집에 이름을 잘못 불러준 모양이라고 하였다. 다시 이름을 고쳐서 보내주겠다는 연락은 받았지만, 덕분에 옛날 기억이 떠올라 슬며시 미소가 지어졌다. 유년 시절 아버지에게 내 이름 바꾸어 달라고 한참을 조르곤 하였다. 그러나 아버지는 딸인 나에게도 문중의 돌림자인 재,자가 들어간 좋은 이름이니 절대 바꾸어 달라는 말은 하지 말라고 엄포를 놓으셨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가면서 누가 내 이름을 부르면 나는 신미미라고 대답을 하기도 했다. 그 당시 유행가 가수였던 조미미 씨의 히트곡도 잘 모르면서 단지 이름이 예뻐서 그녀를 좋아했던 기억과 만화 여주인공으로 자주 등장하던 미미라는 예쁜 이름이 매우 좋아서 나 스스로 신미미라고 소개하곤 하였다. 예쁜 이름에 대한 간절함이 참으로 강한 시기였다. 철없이 아버지께 이름 바꾸어 달라고 얼마나 졸라대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이름을 바꾸어 달라고 졸라대던 어린 시절은 저 멀리 가버렸다. 아랫집 미군 부대 다니시던 영자 아버지는 나를 볼 때마다 성이 신이라고 '아이 시다. 셔' 하면서 놀려대는 바람에 일부러 골목을 빙 돌아 집으로 돌아가곤 했던 기억이 난다. 성가대에서 활동할 때는 피아노 치던 성가대 언니는 나만 보면 심금을 울리는 노래를 불러야 한다며 심금재, 심금재,하고 놀리곤 하였다. 그 후로도 나는 '짠금재'등 여러 가지 웃지 못할 일들이 생겨나곤 하였다. 무수히 많은 이름으로 불렀던 내 이름 신금재가 심금재, 짠금재,안나, 애나, 심금례 여러 이름으로 불리는 동안에 요즘은 또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 캘거리 문인협회에 가입하고 문학 활동을 하면서 호를 받게 되었다. 아름다운 생각을 하는 사람이란 뜻으로 미사(美思)로 불리게 되었다. 신금재에서 신안나로 그리고 미사라는 이름으로. 누구의 딸에서 누구의 아내로 누구의 어머니로 그리고 이제는 누구의 할머니로. 애벌레가 나비가 되기 위하여 여러 번의 다른 이름으로 변화되어 불리듯이 나도 변화하면서 그 이름에 맞는 사람으로 살아가야 겠다 생각하며 이제는 내 이름으로 인하여 생기는 사건을 즐기는 편이 되었다 간 맞추기/미사 어느 시인이 말하기를 詩는 시의 행과 행 사이의 간을 맞추는 일이라고 표현하였다. 알맞게 간을 맞추는 일이 어디 시뿐이겠는가. 우리 살아가는 모든 일에 간을 맞추는 일은 곧 우리의 삶을 적당하고 편안하게 만드는 일이 될 것이다. 요즈음 우리 집에서 음식을 해 주시는 시어머니의 음식 간이 너무 짜져서 가족의 불평이 늘어나고 있다. 나는 차마 말을 못하고 있지만, 당신 아들은 어머니 앞에서 바로 '제발 소금 좀 덜 넣으세요' 하고 말하는 통에 내가 다 미안해 지곤 한다. 처음부터 어머니의 음식 맛이 짠 것은 아니었다. 어머니는 한번 먹어본 요리는 그대로 만들어 내는 재주가 있으셔서 그전에는 우리 집 음식을 먹어본 사람들은 감탄하곤 하였다. 특히 전통요리를 맛있게 하셔서 김치, 청국장찌개 등은 누구도 따라갈 수 없었다. 김치는 김치전용 냉장고에 넣지 않아도 마치 시원한 사이다를 넣은 맛이 나고 청국장은 어머니식으로 대바구니에 넣어 발효를 시키는데 하얀 실이 죽죽 늘어져 나오는 맛이 일품이었다. 생리적으로 여자가 갱년기를 지나면 서서히 짠맛에 둔해진다고 들었다. 어머니의 음식이 간이 짜지고 음식 맛이 예전과 같지 않은 것도 알고 보면 어머니 탓만은 아니다. 남편은 간을 전혀 하지 말라고까지 주문하는데 그 마음을 나는 충분히 이해한다. 시아버지는 우리가 결혼하기 전에 돌아가셨다. 갑자기 운명하셨는데 원인은 혈압이 높아 뇌졸증이 온 것이었다. 남편은 아버지가 그렇게 돌아가신 것은 소금이 주범이라고 믿는 듯하였다. 온 가족은 싱겁게, 싱겁게, 를 구호처럼 외치며 부르짖었지만, 어머니는 그래도 -음식은 간이 제대로 되어야 맛있다. 하시며 자꾸 간을 하시곤 한다. 지난주에 장례식이 있었다. 이제 막 사십을 넘긴 가장이 갑자기 사망하였는데 그 원인이 아버님 증세와 비슷하다고 하였다. 평소 짠 음식을 즐기고 혈압이 높다고 하였다. 장지에 다녀온 남편과 어머니는 심도있는 대화를 나누었다. -그것 보세요. 그래도 계속 음식을 짜게 하실 건가요. 어머니는 아들이 하는 말을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이제 우리 집 식탁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어올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간을 맞추는 일, 참으로 어려운 그 일이 어디 음식에서뿐이랴. 사람 살아가는 모든 일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간을 맞추고 배려하는 일은 그리 녹록치않다. 이제 손자가 생기다 보니 나도 할머니가 되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 부부의 사이, 친구 간의 관계, 단체에서의 위치. 여러 관계에서 서로의 간을 맞추는 일은 어렵지만, 하나하나 나부터 허리를 숙이고 조금 양보하며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면 풀리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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