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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신앙인물]신앙과 용서의 화신 손양원 목사 2
요한복음 12:24~25,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지난 주에 우리는 손양원 목사님이 믿음이 좋으신 가정에서 태어나 가난과 일제의 탄압 중에도 꿋꿋한 신앙과 가난가 맞서 싸워가면서 주의 종의 길에 들어섰고, 또 그가 신사참배 강요의 엄혹한 일제의 강압의 맞서 결연하게 감옥 생활을 했던 것을 살펴본 바 있습니다. 그는 신사참배에 굴복하지 않은 이유로 무기징역을 받아 감옥에서 온갖 고생을 다하는 중에 그 가족들도 뿔뿔히 흩어져 목숨을 부지할 수밖에 없었고, 그 가운데 애향원의 문둥병자 성도님들과 진주 남강 다리 밑의 문둥병자 거지 공동체의 사랑으로 그 가족들에게 구걸해온 음식, 쌀, 보리 등이 전달된 것을 보았습니다. 그렇게 일제의 탄압 속에 목숨 걸고 신사참배를 결행하였을 때 평양에서 신사참배반대운동에 앞장섰던 주기철 목사님은 평양경찰서에서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의 자녀들도 흩어졌는데, 운명의 손길처럼 부산에서 손양원 목사님의 자녀들이 고아원에서 살면서 공장 다닐 때에 주기철 목사님의 큰 아들과 셋째 아들이 부산에 내려와서 고생하면서 그 자녀들끼리 만나 부모의 안부를 서로 물으면서 교제를 나누었다고 합니다. 일제의 고통스러운 시대 속에 그 자녀들까지도 가정을 떠나 산지 사방에 흩어져서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겪어야 했던 것이 그 시대 진정한 기독교인의 삶이었음을 우리는 기억하게 됩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면서 편하고 안락한 생활만을 추구하면 안됩니다. 예수님을 믿고 세상에서 행복하고 복만 받으려고 하면 안됩니다. 사도 바울이 루스드라 지방에 가서 전도할 때 믿음을 가진 자들을 격려하면서 일러준 당부 말씀이 이러합니다.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행 14:22)
또 빌립보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에도 이런 말씀을 주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빌 1:29)
도리어 그리스도를 위한 신앙의 길에서 핍박과 멸시와 손해를 당하는 일을 만난다면 그것을 소중히 여기고 감사하면서 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신앙적인 핍박과 어려움을 당하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직장에서 직접적인 박해를 받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적극적으로 전도하며 늘 기도하는 삶을 살고, 참 기독교인으로서 살려고 힘쓸 때 한편에서는 칭송하기도 하지만 반드시 핍박이 찾아올 것입니다. 그러한 핍박과 멸시와 손해를 받을 때 앞서간 믿음의 선현들을 생각하면서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주기철 목사님이나 손양원 목사님의 아내와 자녀들이 겪은 그 당시의 고통은 헛되지 않고 그 부모님의 신앙의 증인이 되고 그 후손들이 다 평안하고 아름답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해방되고 김일성이 북한에 집권하여 많은 현금과 땅 문서와 적산가옥을 선물로 가져왔습니다. 이는 주기철 목사님의 높은 명성을 김일성 북한 정권이 악용하고자 한 것입니다.
“주 목사님은 일제와 맞서 싸운 위대한 혁명투사입니다. 그래서 우리 공화국의 김일성 장군님께서 주 목사님의 숭고한 항일 투쟁 정신에 감복해서 이 하사품을 보내주셨습니다.”
그 때 주 목사님을 간병하며 일제의 신사참배에 맞서서 숱한 금식과 마음고생으로 결국 큰 병을 얻어 죽어가던 오정모 사모님은 그 선물을 딱 잘라 거절하였습니다.
“받을 수 없습니다. 주 목사님은 혁명투사가 아닙니다. 그분이 순교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였습니다. 결코 사람에게 칭찬받거나 보상받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여러 차례 방문하여 김일성 장군님의 성의를 무시하면 안된다고 설득해도 요지부동이었습니다. 그 오정모 사모님 곁에서 남아서 돌보던 주기철 목사님의 막내 아들 주광조 소년은
“언제 돌아가실 지 모르게 위독한 어머니...만약 어머니마저 갑자기 돌아가신다면, 이 험난한 세상에서 나 혼자 살아가기 위해서는 저 돈이, 저 재산이 꼭 필요한데...”
라고 생각하며 아쉬움이 컸다고 합니다. 그 마음을 알았는지, 오정모 사모님은 침상에 누운 채 소년이 된 광조 아들을 불러 앉힌 휘에 성경 구절 한 구절을 찾아 읽도록 했다고 합니다.
시편 37편 25,26절 말씀입니다.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의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그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주니 그의 자손이 복을 받는도다”
이 말씀을 유언처럼 받들고 세상에 홀로 나섰던 주광조 소년은 마침내 남한에 내려와서 큰 기업체 사장도 하였고 장학재단을 세워 많은 불우 소년들을 돕는 일에 압장서게 되었습니다. 성경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을 진실로 경외한 자손들은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위하여 복음을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진심을 다하여 충성스럽게 받듭시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의 신앙과 삶을 책임져주실 것입니다.
마침내 해방이 되었습니다. 미군 비행기가 1945년 8월 6일 일본의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터트려 20만 명이 한번에 죽고 8월 9일 두 번째로 나가사키에 떨어뜨려 또 다시 15만 명 정도가 죽는 대 참사가 일어났습니다. 결국 결사항전하던 일본이 8월 15일에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을 하고 천황이 직접 말하기를 “나는 신이 아니고 사람이라”고 선언했습니다. 그 결과 종신형을 언도받고 일제의 고통 아래 신음하던 한국인들은 거리로 뛰쳐나와 “조선독립만세”를 외쳤습니다. 감옥에서 죽을 예정이던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줄지어 출옥하였는데, 손양원 목사님도 8월 17일 해방과 함께 출옥하였습니다. 그 당시 손양원 목사님 가족은 뿔뿔이 흩어져 살아야 했습니다. 그의 아내와 큰 오빠와 막내는 남해의 깊은 산골에서 기도하던 중이었습니다. 일본군의 징집 대상이어서 일본군에 끌려가 신사참배, 동방 요배를 강요당할 것이기 때문에 그는 군대 징집을 피하여 숨었던 것입니다. 또한 둘째 아들은 문둥병자들이 기거하는 산속 움막에 숨어 살았고, 두 딸은 부산 애린원 고아원에서 살았습니다. 참 기가 막힌 이산가족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해방이 되자 손양원 목사님이 부산 애린원에 찾아와서 가족들과 다시 만났습니다. 그리하여 온 가족들이 함께 만나 재회의 기쁨을 누렸습니다. 그리고 진주의 남강 다리 구걸하던 문둥병자 거지 공동체 식구들도 목사님을 맞아 환영하고 애향원에 돌아가 그곳에서 다시 목회를 하게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손양원 목사님의 큰 딸 손동희 권사님은 이 때야말로 가장 행복했던 시기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마른 가지에서 새싹이 돋아나듯 문둥병자 성도님들과 사랑의 교제를 나누며, 흩어졌던 가족들이 다시 한 지붕 아래 오순도순 살아가고, 그 동안 그토록 다니고 싶어했던 학교에도 다닐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이듬해 1946년에는 손양원 목사님이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손양원 목사님 나이 45살이요, 그가 전도사가 된 지 20년만입니다. 그 기간 동안 수많은 일들이 있었고 일제 때 감옥에서 7년을 지냈기 때문에 그토록 목사가 된다는 것이 늦어진 것입니다. 이 행복하고 안정된 시기에도 손양원 목사님은 많이 바쁜 나날을 보내셨습니다.
그 중에 한 가지 일은 많은 부흥회를 다니면서 신앙의 순결을 강조한 일입니다. 가는 곳마다 신사참배와 동방요배로 인하여 더럽혀진 일제 통치하의 한국 교회의 신앙 양심을 새롭게 하여 오직 하나님 한분께만 신앙의 순결을 드리도록 권면하는 일에 혼신의 힘을 기울이셨습니다. 그때에 목사님이 부흥회를 할 때마다 꼭 먼저 읽고 실천하고자 했던 내용을 보면,
첫째, 하나님의 지능을 의지하고 자기의 지식을 믿지 말 것
둘째, 주님을 나타내지 않고 인간을 나타낼까 조심할 것
셋째, 성경 원리 모르고 자기 지식을 따라 거짓말하지 않도록 할 것
넷째, 간증시에 과장하여 거짓말이 되지 않게 할 것
다섯째, 나도 행하지 못할 것을 성도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게 말 것
여섯째, 설교자의 말 한 마디가 청중의 생명을 좌우하니 말 조심 잘할 것
일곱째, 음식을 대접받을 때, 주님 대신 받는 음식이니 자기의 자격을 살피고
배 위하여, 입맛에 취해 먹지 말고 일하기 위하여 먹고
물질 선물에는 관심을 두지 말 것
그래서 부흥회 인도할 때 주님 앞에 범죄되지 말고 사람 앞에 비 없는 구름처럼 은혜 못 끼치고 돌아가지 않게 하옵소서. 오직 유일한 참고서는 성경 66권이 되게 하시고 가르치는 지능은 오직 기도로만 하게 하소서. 아멘
이러한 부흥회 인도할 때 스스로를 조심시켜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이 되고 듣는 회중의 신앙과 양심에 큰 힘이 되게 하고 거짓이나 과장이 아닌 진실만을 증거하려고 힘썼고, 자기를 낮추고 드러내지 않으려고 힘쓰고 오직 말씀과 기도로만 무장하여 섬기려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당시 일주일 정도의 부흥회를 인도하곤 했는데, 크나큰 은혜가 목사님 가는 곳마다 있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목사님이 일제하에서 신사참배 운동하다가 고생한 이야기 간증이 많았을 것이라고 짐작합니다. 그 감옥에서 7년 동안 겪으면서 당한 어려움, 고난 등을 전할 때, 순교자의 신앙 정신을 회중들이 본받고 뜨겁게 기도하고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았을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리고 당시 해방 후에 나라 안팎에서 일제의 신사참배 대신에 단군 신사참배 운동이 일어나고, 황국 요배 대신에 천산요배, 일장기 앞에 절하는 대신에 태극기 앞에 절하는 것을 강요하는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손양원 목사님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이러한 일은 잘못된 일임을 지적하면서 기독교 탄압과 주일에 국민행사 금지와 태극기 앞에 절하는 국민의례를 금해달라는 탄원서를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노력들과 교회들의 노력으로 태극기 앞에 절하는 대신에 오늘날 우리가 행하는 바 태극기에 대한 경례가 차려 자세로 주목한 후에 오른편 손을 왼편 가슴 심장에 대는 것으로 바꿔진 것입니다. 신사참배의 악에 대하여 목숨걸고 싸운 손양원 목사님의 간절한 기도와 이렇게 탄원서까지 만들어 보내려고 한 노력들이 결실을 맺은 것이라 할 것입니다.
그렇게 애양원에서 목회를 재개하여 문둥병 성도들을 사랑하며 섬기고 있었는데, 손양원 목사님을 임시정부 수반이었던 김구 선생이 몹시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김구 목사님을 만나셨던 것 같습니다. 목사님 역시 김구 목사님을 존경하였는데, 한번은 이화여고에서 목사님을 초청하여 학생들에게 강연을 한 후에 그 자리에 참석한 김구 선생님이 자기 집으로 초대하여 함께 가셨다고 합니다. 그 때 저녁상이 나왔는데, 상위에 김치, 나물, 시래기국이 전부였다고 합니다. 김구 선생은 말하기를
“내 동포는 지금 굶주리고 헐벗고 사는데, 내 어찌 잘 먹고 잘 입겠는가!”라고 하시더라는 것입니다. 그 식사 후에 김구 선생이 여러 장 붓글씨를 써주셔서 가지고 와서 손 목사님이 애향원 집 벽에 걸어놓았다고 합니다. 그 74세의 독립운동가이며 상해 임시정부 수반이셨던 김구 선생님은 50세의 손 목사님을 많이 사랑하였고 존경하였습니다. 그래서 한번은 서울에 자기가 세운 학교에 교장으로 와달라고 간절히 청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손양원 목사님은 애양원 식구들을 두고 갈 수 없다고 사양했다고 합니다.
그 애양원 식구들은 누구입니까? 아무 것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얼굴의 눈썹도 다 없고 눈과 입이 비뚤어지고 코끝도 뭉그러지고 손가락이 다 사라진 분들입니다. 그런 분들을 위하여 손양원 목사님은 동분서주하면서 때로는 사회 기관들에게 호소하면서 먹이고 입히는 데 앞장섭니다. 그리고 부흥회 가는 곳마다 애향원의 그 불쌍한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해주시기를 간절히 부탁하곤 했습니다. 애향원에 머물 때면 모든 식구들을 사랑으로 돌보곤 했는데, 그 때 성도님들을 끔직히 가족처럼 사랑하였기 때문에 애향원 성도님들이 몸이 아프거나 혹 세상을 떠날 때가 되면 손목사님을 애타게 찾곤 했다는 것입니다. 한분은 목사님을 아들처럼 사랑하여 돌아가실 때 목사님이 마침 부흥회를 인도하러 출타중이어서 목사님 오시기전까지는 죽을 수 없다고 애타게 찾다가 돌아가시고, 목사님도 뒤늦게 와서 애통해신 적도 있다고 합니다. 그렇게 온통 사랑으로 끈끈히 가족처럼 연결된 애향원 식구들을 놓고 아무리 금은 보화, 권력과 화려함과 평안함이 가득한 목회지가 그를 기다린다 해도, 화려하고 평안한 교장의 직무가 기다린다 해도 그는 결코 그 목양지를 떠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처음 애향원에 부름받았으니 거기서 자기의 목회를 끝마치겠다고 처음 결심한 것을 끝까지 지켜간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 명예, 평안, 성공이 버리고 오직 부르심과 섬김의 외길을 걸어가신 목사님이야말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신 예수님의 진정한 제자의 모습을 보여주셨다 생각됩니다.
무엇보다 손양원 목사님의 신앙의 고매함과 위대함을 드러난 사건은 그의 두 아들을 죽인 살인자를 양아들로 입양한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때는 1948년 4월 3일 제주도에서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폭동이 일어났습니다. 이 일로 참혹한 양민학살이 자행되자, 폭동 진압차 제주도로 경비대가 파견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제주도 경비대 총사령부가 있던 여수의 육군 부대 병사와 지휘관들 중 일부가 좌익계열의 군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제주도로 진압차 출동하는 대신에 반란을 일으켜 여수와 순천 지역의 군대와 경찰서를 점령하고 방송국을 접수하고 공산주의 구역으로 바꾸고 말았습니다. 순식간에 여수와 순천은 공산주의자들의 무법천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좌익계 학생들은 우익계 학생들을 찾아내어 붙잡아서 만신창이가 되도록 무참하게 때리고 순천경찰서 뒤뜰로 데려가 거기서 총살하였습니다. 그 중에 당시 손양원 목사님의 두 아들 동인, 동신 두 형제도 포함되었습니다. 큰 아들 동인은 당시 순천 고등학교의 기독학생 회장을 역임하면서 학교 전도 활동을 열심히 하였기 때문에, 좌익계 학생들이 살해 대상으로 지목하고 반란이 시작되자마자 두 사람을 잡아들여 때리고 총살시켰던 것입니다. 그 당시 애양원에서는 이인재 조사님을 모시고 부흥집회를 열고 있었다고 합니다. 평양신학 동창이며 신사참배 거부로 함께 감옥 생활을 했던 출옥 성도였습니다. 그렇게 부흥회 도중에 여순반란 사건이 터지고 두 아들을 잃었던 것입니다. 그 때 두 아들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넋이 빠진 듯 있을 때 함께 있던 부흥회 강사였던 그 이인재 목사님이 어깨를 치면서 호통을 쳤다고 합니다.
“손 목사 정신 차리시오. 우리는 과거 감옥에서 순교를 원했으나 하나님은 우리의 순교를 허락지 않았소. 오늘 젊고 아름다운 두 아들을 순교의 제물로 바친 것이 그리도 아깝소? 슬퍼할 일이 아니라 더 좋은 천국에 갔으니 오히려 기뻐해야 할 일이오.”
참 놀라운 말입니다. 이런 말은 아무나 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더욱이 당사자가 아닌데, 그 두 아들을 한꺼번에 잃은 큰 일을 겪은 손양원 목사님 당사자에게 이렇게 정신 차리고 슬퍼 말고 기뻐하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대단히 강직한 믿음입니다. 이 말씀을 할 충분한 자격이 있는 것은 그분도 과거 손양원 목사님과 함께 감옥에서 신사참배 반대 운동하시다가 감옥에서 순교하기를 각오하셨던 분이기 때문입니다. 온갖 고문과 수모와 조롱과 배고픔과 추위와 절망과 맞서 싸우면서 순교를 각오하며 깊은 감옥에서 어서 순교하기를 기다렸던 두 분이셨기에, 갑작스러운 이 일을 만나서도 감히 그렇게 슬픈 일을 당한 목사님에게 정신 차리시라고, 슬퍼할 일 아니라 기뻐하라고 권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난 후에 손양원 목사님의 심령에 밝은 한 줄기 빛이 비추이고 그 순간 감사의 마음이 목사님의 마음에 환하게 밝혀지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손 목사님은 처참하게 죽은 시체가 되어 돌아온 두 아들의 장례식을 치르면서 다음 9가지 감사의 기도문을 적어 고백합니다.
「9가지 감사문」
첫째, 나 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의 자식이 나게 하셨으니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둘째, 허다한 많은 성도 중에 어찌 이런 보배를 주께서 하필 내게 맡겨주셨는지 감사합니다.
셋째, 삼남 삼녀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두 아들 장차 차자를 바치게 된 나의 축복을 감사합니다.
넷째, 한 아들의 순교도 귀하다 하거든 두 아들의 순교이리요, 감사합니다.
다섯째, 예수 믿다가 와석종신하는 것도 큰 복이라 하거든 전도하다 총살 순교당함이리요, 감사합니다.
여섯째, 미국 가려고 준비하던 내 아들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 갔으니 내 마음 안심되어 감사합니다.
일곱째, 나의 사랑하는 두 아들을 총살한 원수를 회개시켜 내 아들 삼고자 하는 사랑하는 마음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여덟째, 내 두 아들의 순교의 열매로 말미암아 무수한 천국의 아들들이 생길 것을 믿어지니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 감사합니다.
아홉째, 이 같은 역경 속에서 이상 여덟 가지 진리와 신애(神愛)를 찾는 기쁜 마음, 여유 있는 믿음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 감사 감사합니다.
이렇게 비통함과 슬픔 중에 드려질 장례예배 가운데 순교 감사 천국 환송 예배로 바꾼 후에 두 아들을 죽인 자를 사형장에서 빼내어 아들 삼겠다고 선언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순천 경찰서에서 사형을 앞두었던 자기 아들을 죽인 그 학생의 이름이 안재선인데, 그 딸 동희를 보내어 사형 집행을 면하고 보내달라고 간청합니다. 만약 그 살인한 학생을 손끝 하나 대지 않고 보내주시면 그 아들을 용서하여 양자로 삼아 기르겠다고 말하자, 당시 순천경찰서에서 반란군에 가담했던 자들을 처단하던 책임자가 이 말을 확인하고 그 청년 안재선을 목사님 가정에 인계합니다. 아무런 조건없이 안재선은 죽을 자리에서 살아나 그가 죽인 자의 가정의 장남의 자리로 갔습니다. 자기 아들을 죽인 원수를 목사님은 친아들처럼 사랑했습니다. 함께 밥을 먹고 잠을 자고 공부시켰습니다. 주의 종의 길로 가도록 권면하여 신학교에 보냅니다. 부흥회 때에는 함께 가서 은혜받도록 이끌었습니다. 그 용서와 사랑에 감격하여 안재선은 신학교에서 공부할 때 뜨겁게 공부합니다. 그는 손양원 목사님과 그 아내 사모님의 사랑에 감격하면서 부산에 있는 신학교에서 감옥살이 하시던 아버님의 순교 정신 이어받아 십자가 군병이 되겠노라고 다짐하는 편지를 많이 보냈습니다.
이 일은 많은 파장을 낳았습니다. 진정 손양원 목사님의 용서와 사랑은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당시 반란군이 죽인 여수 순천의 무고한 양민들이 약 만 명 정도 되었다고 합니다. 그들의 슬픔과 분노는 하늘을 찌를 듯했습니다. 그래서 좌익계열에 속한 자들에 대하여 거센 피의 보복을 자행할 분노가 치달아 올랐습니다. 그러나 자기 두 아들을 죽인 손양원 목사님의 용서와 양아들로 삼은 이 일을 접한 수많은 사람들이 분노를 자제하고 차분하게 대응하여 더 이상 피의 보복이 반복되지 않도록 막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예정대로 부흥회를 인도하러 가면 목사님께 대한 존경이 지극히 높여졌는데, 한번은 서울 남대문교회에 부흥회 인도차 갔는데 그 딸 손동희 양도 함께 따라 간 적이 있답니다. 그런데 교회 게시판에 집회 포스터가 있는데 “세계 성자 손양원 목사”라는 제목이 붙어 있더랍니다. 그것을 손양원 목사님께서 보시자마자 치 포스터 떼지 않고는 설교하지 않겠노라고 말씀하더라고 그 따님이 증언하였습니다. 결국 그 포스터를 떼고 나서 설교하셨다고 합니다.
그렇게 두 아들을 하나님께 보내드린 후 2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또 다시 이 가정에 불행이 닥칩니다. 그것은 민족적인 큰 재난이었던 1950. 6. 25. 한국 전쟁이 터진 것입니다. 북한의 김일성이 철저히 전쟁을 준비하고 남한을 기습 남침한 것입니다. 3일만에 서울이 무너지고 남한 전역은 순식간에 불바다 전쟁터로 바뀌었습니다. 온 세상은 피난처를 찾아 헤매는 아비규환의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죽음과 배고픔과 공포가 온 세상에 가득한 생지옥이 되었습니다.
어느 정도였는가 하면 한 예로 들자면, 주기철 목사님의 막내아들 주광조 학생의 경험을 들 수있 습니다. 주광조 소년은 육이오가 터지기 전에 남한으로 탈출했다가 서울에서 어느 정도 생활하던 중에 또 다시 북한군이 쳐들어 내려오자 서울을 탈출하여 남쪽으로 내려왔다고 합니다. 그 때 꾀를 써서 남쪽에서 농아 곧 벙어리 아이들을 섬기다가 수화를 배웠기 때문에 농아들과 함께 남쪽으로 피난 내려오면서 자기도 농아인 것처럼 위장했다는 것입니다. 본인도 이전에 아버지 주기철 목사님과 어머니가 평양경찰서에서 고문당할 때에 실어증이 와서 말을 제대로 못하게 되었던 적이 있기 때문에 말이 어둔했던 것도 작용했습니다. 그는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숨어서 있다가 비행기가 폭격하여 북한군 병사들이 죽으면 달려가서 죽은 병사들의 옷에서 가지고 있던 음식물을 꺼내어 배를 채우곤 했다고 증언하였습니다. 참 놀라운 일입니다. 전쟁터에 폭격이 일어나면 그 자리 가기도 싫을텐데 얼마나 배고프면 그 죽은 시체가 널부러진 자리에 달려가서 시체의 옷을 뒤져서 먹을 거리를 찾아 먹고 굶주림을 해결하곤 했다니 말입니다. 이것이 전쟁의 참상입니다.
그런 가운데 북한군이 빠르게 진군해내려오면서 여수와 순천도 북한군에 의하여 점령될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러자 여러 목사님들이 찾아와 손양원 목사님께 함께 피난을 가자고 권면하였습니다. 북한군과 빨갱이들은 무엇보다 교회 성도들과 목회자들을 겨냥하여 체포하고 죽이는 일이 다반사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목사님들이 애향원 바로 앞에 바다니까 배를 타고 와서 함께 잠시 피하자고 권면하기를 수차례 했습니다. 무엇보다 애향원 성도님들이 목사님께 피하라고 그렇게 권면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손양원 목사님은 강제로 몇 번 배에 태웠으나 끝내 뛰쳐나오곤 해서 결국 어쩔 수 없이 배가 떠났다는 것입니다. 목사님이 남는다는 것은 곧 순교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미 목사님은 순교를 작정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한 주간 애향원 교회에 부흥회를 열었는데, 목사님은 그 부흥회에서 이러한 말씀을 유언처럼 선포합니다.
“주의 이름으로 죽는 것 이상 큰 영광이 어디 있겠는가. 첫째도 순교요 둘째도 순교요 셋째도 순교입니다.”
“때가 왔다. 순교를 각오하라. 우리가 예수님 이름으로 대접받았으니 이젠 예수님 이름으로 순교할 때다.”
그리고 토요일 부흥회 마지막 날에는 나환자들에게 금식기도, 철야기도를 시키셨다고 합니다. 손목사님은 그 난국에 가장 급한 일은 바로 나환자 성도님들의 신앙을 무장시키는 것을 최우선 순위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불쌍한 나환자들을 위하여 죽어도 같이 살고 살아도 같이 살아야지” 생각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주일이 지난 후에 새벽 기도 마치고 강단 뒤에서 한참 기도 드릴 때에 북한 군인이 들어닥치더니 “동무! 잠깐 갑시다. 조사할 일이 있소.”라고 하면서 끌고 갔습니다. 그리하여 목사님은 여수 경찰서에서 15일 동안 감금되어 있다가 9월 28일에 인근 미평 과수원으로 끌려가서 거기서 총살을 당하고 맙니다. 지금도 애양원 부근에 그리 멀지 않은 여수 시내 입구에 있는 과수에 순교지 안내 표시판이 있습니다. 48세의 나이로 온갖 고난과 역경 속에서 끝내 불굴의 신앙과 뜨거운 사랑으로 일관하셨던 목사님은 그렇게 그토록 사랑하며 충성하였던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 곁으로 떠나가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시신을 찾아 애양원 성도님들과 목회자들은 큰 슬픔 중에 장례를 치렀습니다. 그 장례식에 맏상주 역할을 한 사람은 바로 그의 두 아들을 죽인 양아들 양재선 군이었습니다. 사랑했던 목사님을 잃은 애양원 성도님들의 눈물과 사모함은 지금도 변함없습니다. 그분의 그 사랑의 마음은 여전히 지금도 살아 있습니다. 그 불굴의 신앙 정신과 식지 않는 뜨거운 사랑은 나병환자도 품을 수 있었고 심지어 자기 아들을 죽인 원수마저 품고 양아들로 사랑할 정도였습니다. 그 사랑은 수많은 사람들을 지금도 참 신앙이 무엇인가를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어떻게 잘 살 것인가를 생각하기보다 어떻게 잘 죽을 것인가를 생각하라고 그분이 순교 직전에 설교하실 때 애양원 성도님들에게 권면하였습니다.
실로 손양원 목사님의 남은 자녀들은 잘 성장하였습니다. 그리고 목사님이 용서해주었던 안재선 군은 목사님이 세상 떠난 후에 세상의 눈이 따가와서 잠시 신앙을 떠났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말년에 돌아와 세상을 떠날 때에 그 아들에게 목회자가 되라고 유언했다고 합니다. 그 때까지 아버지의 지난 삶을 잘 몰랐던 그 아들 안경선은 신학교에 가라는 아버지의 뜻밖의 유언을 듣고 훗날 목회자가 되어 지금 전남 해남에서 귀한 목회를 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 용서의 열매가 후대에까지 맺어진 것입니다.
우리 모두 때가 되면 다 하나님 앞에 갈 것입니다. 그 날에 우리들이 어떤 모습으로 설 것인가를 온 몸으로 보여주신 목사님은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지금도 수많은 영혼들에게 도전과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경남 함안 칠원에 있는 손양원 목사님 생가에 안산 고훈 목사님이 쓴 이런 묘비 시가 있습니다.
「이곳을 그냥 지나가지 마십시오」
무자비한 일제 강점을
믿음으로 저항하며
삼일독립만세를 일으키신
손종일장로님의 집입니다
함안의 독립 애국자
칠원교회 신앙의 아버지
그 아버지에 그 아드님
손양원목사님은
신사참배 반대하다 옥살이로 부서지고
공산당에게 동인 동신 두 아들과
자신마저 순교당한 일가족
애양원 한센병자들을 위해 바친 일생
그들이 슬프면 눈물로 흐르고
그들이 헐벗으면 한 벌 옷이 되어 입히고
그들이 맨발이면 한 컬레 신발이 되시고
그들이 피고름 아프면 입으로 빨아내시고
두 아들 살해한 안재선 양자로 삼으신
사랑의 원자탄 애양원의 작은 예수
이 곳을 그냥 지나가지 마십시오
신을 벗고
순교자들의 신앙을 생각하며
당신과 당신 자녀들을 위해 우십시오
-고훈, "순교자의 생가 앞에서"-
오늘 읽었던 요한복음 12:24~25 말씀을 우리 마음에 새깁시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우리 모두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만을 사랑하는, 썩지 않는 밀알이 되지 맙시다. 도리어 손양원 목사님처럼, 주님을 위하여 신앙을 위하여 한 알의 썩는 밀알이 됩시다. 그리할 때 장차 주님 앞에서 귀한 상이 있을 것이요 이 땅에 많은 열매가 맺혀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