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휠체어를 탄 남성
〔사진 #1〕 휠체어를 탄 남성이 돌팔매를 돌리고 있다. (Mahmud Hams/AFP)
사진 중앙 한 남성이 휠체어에 탄 채로 돌팔매를 겨누고 있다. 이 남성은 황량한 흙바닥까지 어떻게 휠체어를 끌고 왔을까? 그리고 왜 왔을까?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은 어디일까? 남성 뒤편에는 검은 안개가 자욱하다. 검은 옷으로 몸 전체를 두른 두 사람이 보인다. 흰 천으로 머리를 가린 것으로 보아 무슬림 여성인 듯하다. 마치 스카프처럼 목과 어깨를 감싸고 있는 천은 흰색, 빨간색 그리고 조금이지만 초록색이 섞여있다. 팔레스타인 국기이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나? 자신들의 국기를 몸에 두르고 나오는 일은 흔치 않다. 국기를 흔들거나 게양된 국기를 쳐다보는 편이 자연스럽다. 몸에 두르고 나온 천은 (그것도 단단히 고정했다면) 마냥 즐겁게 환호하기 위한 용도는 아닐 것이다. 검은 연기, 황량한 흙바닥, 몸에 두른 국기만으로도 이 사진 배경이 무언가 위협적이고 즐겁지 않은 상황이라는 느낌을 준다.
사진 속 휠체어에 앉은 남성의 모습은 이 모든 시각적 기호들이 보이지 않을 만큼 강렬하다. 두 다리를 잃은 남성이 휠체어에 앉아 누구의 도움도 의지하지 않고 돌팔매질하고 있다. 짧은 머리, 검게 그을린 피부, 청바지에 민소매 티셔츠만 걸친 모양새는 왠지 모를 어떤 고단함마저 느껴진다. 속살은 비교적 덜 그을린 것으로 보아 아마도 웃옷을 벗은 것처럼 보인다. 검은 연기 속 광야가 더웠을 수도 있고, 아니면 돌을 던지기에 겉옷이 불편했을 수도 있겠다. 현장에 나온 지는 이미 한나절은 지났을 것이다. 하얬을 티셔츠는 검은 연기와 흙먼지, 땀 등이 뒤섞여 거무스름하다. 그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사회적 배경을 가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전방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눈빛과 굳은 입 모양 등에서 상당한 결기마저 보인다.
〔사진 1〕은 프랑스 통신사(AFP) 소속 사진기자 마흐무드 함스(Mahmud Hams)가 2018년 5월 11일,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경계에서 촬영한 것이다. 사진 제목은 ‘휠체어를 탄 남성’(The Man in the Wheelchair)이다. 이 사진으로 함스는 2018 Bayeux Calvados-Normandy Award1)에서 수상하기도 했다. 이 사진이 가진 힘은 무엇일까? 단지 사진 속 남성이 하체가 잘린 장애인이어서만은 아닐 것이다. 〔사진 1〕에서는 폭력적 시위를 떠올릴 때 쉽게 예상되는 모습들, 예를 들어 매우 격앙된 감정이나 표정, 행동 등이 보이지 않는다.2) 남성은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휠체어 위에서 균형을 유지한 채 돌팔매를 겨누고 있다.3) 심미적인 측면에서 보아도 구도와 배경, 남성의 표정과 손에 묻은 흙, 돌팔매 각도마저도 하나의 일관된 메시지로 귀결되는 듯이 너무 완벽해 보이기까지 하다. 자신을 향해 카메라를 들이대는 기자의 시선도 개의치 않는다. 오히려 당당하고 결의에 찬 표정이 마치 어떤 메시지를 전하려는 듯하다.
현대판 다윗과 골리앗
여러 사진들 중에서 유독 〔사진 1〕이 눈에 들어온 이유는 뭘까?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장애를 가진 그가 휠체어에 올라 돌팔매질하는 장면 그 자체도 강렬하거니와 사진과 함께 붙은 “현대판 다윗과 골리앗”이라는 설명 때문이기도 했다.4) 우리가 아는 성경 속 다윗과 골리앗의 상황이 그들의 후손들인 현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에서 비슷하게, 그러나 정반대 모습으로 펼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머릿속을 땅 하고 때리는 것 같은 절묘한 상황이었다. ‘누가 다윗이고 누가 골리앗인가’ ‘누가 선이고 누가 악인가’ ‘하나님은 누구 편이실까’ 하는 잡념들이 떠올랐다.
요즘 같은 시기에 돌팔매질이라니? 최첨단 무기를 소유한 군사 강국인 이스라엘의 부당한 점령에 맞서 싸우겠다면서 돌팔매질이라니 당황스럽기까지 하다. ‘달걀로 바위 치기’라는 속담이 떠올랐고, 또 한편으론 부녀자들까지 돌을 날라 왜군에 맞서 싸웠던 행주대첩이 떠올랐다. 힘이 없어 외세의 침략과 전쟁을 자주 겪었던 우리 역사를 돌아보니 묘한 친밀감이 들기도 했다. 이번 글을 쓰면서 알게 된 것인데 돌팔매는 중세 시대까지만 해도 군대에서 사용하던 정식 무기였다고 한다. 다루기가 까다롭고 적중률이 떨어지기는 해도, 파괴력이 약한 것은 아니었으며 살상 무기로도 사용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제아무리 정교한 돌팔매질 선수라도 하여도 돌팔매로 현대 최첨단 무기들을 대적할 수는 없는 일이다. 달걀로 바위 치기만큼 무모한 일이다. 그런데도 왜 그들은 돌을 던지는가? 이스라엘 점령군을 향해 돌을 던지는 행위는 그들에게 민족 정체성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한 팔레스타인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우리가 팔레스타인 사람이라 돌을 던지는 것이 아니다. 돌을 던지기 때문에 우리는 팔레스타인 사람인 것이다”라고 대답하기도 했다.5) 그들에게 돌을 던지는 일은 다분히 상징적인 행위이다. 그 행위자가 어린 소년이라면 의미는 더 크게 와닿을 것이다. 2000년 10월 29일, 14세 소년(Faris Odeh)이 탱크를 향해 돌을 던지는 사진이 크게 화제가 된 적이 있다(사진 2).6)
〔사진 #2〕 탱크를 향해 돌을 던지는 팔레스타인 소년. (Laurent Rebours/AP, FILE)
〔사진 1〕 속 휠체어를 탄 남성도 마찬가지이다. 당시 29살이었던 그의 이름은 사베르 알 아슈카르(Saber al-Askhar). 두 다리를 잃은 그가 휠체어를 타고서 돌팔매질하는 이유도, 자신의 고향을 강제 점령한 이스라엘에 저항하는 의미이다. 이 남성은 2018년 3월 30일부터 시작된 ‘위대한 귀향 행진’(Great Return March) 시위에 여러 차례 참석해오던 중이었다. 가자지구에서 활동하던 사진기자 함스는 이 현장에 이미 몇 차례 방문했을 것이며, 아마 이전에도 이 남성을 만난 적이 있었으리라. 함스는 참가자 중 이 남성과 유사한 장애를 가진 사람이 두 명 더 있었다고 소개한다.7) 달걀로 바위 치기처럼 무모한 행위일 수 있다. 비록 두 다리가 없을지라도 남은 두 팔로 돌을 던진다. 그의 모습은 마치 현대판 다윗과 골리앗처럼 팔레스타인 시위대의 상징이 되었고, 언론 및 SNS를 통해 빠르게 확산되었다.
주이스라엘 미 대사관 이전식과 ‘위대한 귀향 행진’
이 사진을 처음 보았을 때 상당히 인상적인 기억으로 내 머릿속에 남았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이유에서였는지를 알게 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이 사진은 국내 한 언론 기사를 통해서 처음 접했다.8) 해당 기사에는 이 사진에 대한 직접적인 설명이 없었다. 대신 “지난 11일(현지시간)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국경지대에서 이스라엘군에 맞서 ‘위대한 귀향 행진’을 벌이고 있는 팔레스타인 시위대 모습”이라는 설명을 달았다. 헤드라인은 “이스라엘, 美대사관 이전식 앞두고 국경병력 2배 강화”였고, 소제목은 “‘위대한 귀향 행진’ 팔레스타인과 충돌 예상”이었다. 기사는 미국 대사관이 예루살렘으로 이전하게 되면서, 이에 앞서 한 달여간 금요일마다 진행되어왔던 팔레스타인 ‘위대한 귀향 행진’ 시위대와의 갈등이 심화되고 있으며, 이전식을 며칠 안 남기고 가자지구 국경지대 경비가 더욱 삼엄해지고 있다는 것, 이로 인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간 폭력적 갈등이 발생할 것이라는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팔레스타인 ‘위대한 귀향 행진’은, 미 대사관을 예루살렘으로 옮길 것을 지시하고 이스라엘의 영토를 공식 인정하는 트럼프 전 대통령의 발언 등에 반발하면서 시작된 거리 시위이다. 가자지구 국경을 따라 3월 30일부터 매주 금요일에 모여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강제 점령을 국제사회에 알리고, 이에 대한 근본적인 변화를 촉구하는 시위에서 비롯하였다. 엄밀히 말해서, 반대 시위의 빌미를 제공한 것은 미국 정부였고, 이스라엘군은 이를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2018년 5월 14-15일에는 시위대의 저항이 최고조에 이르렀고, 이스라엘 정부도 강경 무력 대응으로 응수했다. 이 과정에서 50명이 넘는 시위 참가자가 목숨을 잃고 수천 명의 부상자가 발생하는 최악의 결과를 맞게 되었다.
격렬한 갈등의 시기, 다시 한번 휠체어를 탄 남성이 찍힌 〔사진 1〕이 언론 및 누리꾼들 사이에서 빠르게 공유되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의 무력 진압 과정에서 사진 속 남성이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것이 잘못된 정보라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무력 진압 도중 사망한 남성은 파디 아부 살라(Fadi Abu Salah), 〔사진 1〕의 주인공인 아슈카르와 나이가 비슷한 서른 살 전직 군인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이스라엘군의 공습으로 두 다리를 잃게 되었다고 알려졌으며, 이스라엘군의 무력 진압 과정 중 사망하고 말았다. 비슷한 연령대와 장애를 가진 두 남성은 언론 및 SNS에 혼재되어 소개되거나 잘못된 내용으로 전파되었다. 위 사진을 촬영한 마흐무드 함스가 사실관계를 밝혀주었지만, 일부 언론이나 상당수의 SNS에서는 여전히 잘못된 정보를 그대로 전하고 있다. 어쩌면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는지 모른다. 이 사건을 보면서 독자들이 보고 싶은 ‘진실’은 이미 정해졌는지도 모르겠다. ‘이스라엘 점령군의 공습에 의해 두 다리를 잃은 전역 군인이 시위에 나와 돌팔매를 던지며 저항하다가 결국 목숨을 잃었다’는 이야기가 독자들이 원하는 진실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돌맹이, 약자, 장애인 그리고 죽음
이 사진이 SNS를 통해 화제가 된 배경에는 복합적인 이유가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주목할 점은 휠체어를 탄 팔레스타인 남성이 돌팔매질하는 모습, 그리고 그 상대가 이스라엘 점령군이라는 익숙한 프레임이다. 해외 언론은 많은 경우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간 갈등을 ‘선과 악’의 이분법적 구조로 보곤 한다. 강자와 약자, 점령군과 피해자, 총과 돌멩이, 군인과 민간인(그것도 장애인)이라는 구조는 실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의 복잡성을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이분법적 구도는 해외 갈등 보도에서 자주 발견되는 고질적인 문제점이다.
제이크 린치와 요한 갈퉁은 주류 언론의 갈등 보도 방식이 “한 쌍의 적대 관계”를 상정하고 서로 경쟁하거나, 끝내 승패의 결과를 예측 혹은 전달하는 역할에 치중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이를 가리켜 ‘폭력 저널리즘’(violence journalism)이라 부른다.9) 이런 보도 프레임은 갈등을 승자와 패자로 나누고, 사상자 및 물리적 피해의 규모 등을 전달하는 데 그치곤 한다. 여기서 언론 입장은 ‘중간’과 ‘균형’이다.10) 하지만 갈등의 현상만을 겉핥기로 보도하는 방식을 통해서는 갈등을 해결할 수 없다. 스테판 와드(S. J. Ward)는 “원인과 배경에 대한 설명을 수반하지 않고 폭력에 관해 단순화되고 스테레오타입화된 저널리즘은 시민들에게 갈등을 촉발시키고 ‘폭력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잘못된 인식을 낳게 만든다”고 주장한다.11) 이러한 보도는 전형적인 군사적 언어이며 힘의 논리에 기반으로 한다고 지적한다. 갈등의 단계가 증폭되고 폭력의 정도가 높아질수록 이분법적 프레임은 힘을 얻기 마련이다. 언론은 ‘우리 대 그들’이라는 도식을 강화하여 그들(타인)은 곧 악이며, 폭력적이며, 통제되고 파괴되어야만 하는 ‘분명히 현존하는 위협’이란 인식을 만들어낸다고 말한다.
폭력에 길들여진 보도 방식은 갈등의 원인을 짚거나 해결에 집중하기보다는 둘 사이를 적대 관계로 선명하게 그려내길 원한다. 동시에 독자들은 그런 쉽고 분명한 구분에 익숙하고, 이를 더욱 선호하는 편이다.
어쩌면 〔사진 1〕은 폭력에 길들여진 언론과 독자인 우리가 보고 싶은 것을 충족해준 이미지일지도 모른다. 돌멩이, 약자, 장애인 그리고 (비록 잘못된 정보이지만) 죽음은, 팔레스타인은 선한 피해자이며 이스라엘은 악한 점령군이라는 단순화된 이미지를 소비하도록 이끄는지 모르겠다. 이러한 단순화된 이분법적 프레임은 표면적 갈등을 부각해 갈등을 악화할 뿐, 갈등의 원인에 대한 깊은 이해나 해결 방안을 추구하지는 못하게 가로막는다. 평화를 위해서는 진실과 정의가 필수적이다. 하지만 갈등을 단순화하고 이분법적으로 보도하는 방식은, 자칫 ‘우리 대 그들’로 편 가르기를 하고 상호 적대감만 높이는 결과로 이어질 우려가 있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평화를 위한 상상력이다. 폭력에 길들여진 방식을 벗고 평화를 추구하는 대안적 언론 보도 방식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살펴보기로 하겠다.
덧. 이왕 질문을 던졌으니 짧게라도 대답하는 것으로 마무리를 갈음한다. 현대판 다윗과 골리앗이 성서 속 다윗과 골리앗은 아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상황도 성서의 맥락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되었다. 또한 하나님은 누구의 편도 아니다. 모두를 포용하시지만, 공의를 원하시고, 사랑으로 약자를 돌보길 원하신다. 하나님 나라에는 선과 악, 강자와 약자의 구분이 없다. 하나님은 모두가 서로 사랑하며 자신을 내어줌으로 함께 평화를 만들어가기를 원하신다고 나는 믿는다.
■ 주
1) 공식 명칭은 ‘Bayeux Calvados-Normandy Award for war correspondents’이며 1994년에 처음 수여하기 시작한 이래로 매해 전쟁의 실상을 보도하는 언론 기자들을 선정하여 수여하고 있다.
2) 위 사진이 촬영된 시점은 미 대사관 이전식이 열리기 나흘 전인 5월 11일이다. 상대적으로 물리적 충돌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는 아니었다.
3) 물론 버스에서 내린 후 이곳까지 옮겨준 친구(동료)들이 있었지만 말이다.
4) 당시에는 그런 기사를 본 기억이 나는데 지금 찾아보니 그 출처를 찾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을 ‘다윗과 골리앗’에 비유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5) Julia Macfarlane, “Why Palestinians throw stones: A Reporter’s Notebook”, ABC News (17 May, 2018) https://abcnews.go.com/International/palestinians-throw-stones-reporters-notebook/story?id=55200067
6) 이 소년은 열흘 후인 2000년 11월 8일에 이스라엘군의 총에 맞아 사망하고 만다.
7) 이런 사실관계들은 마흐무드 함스가 그의 사진을 찍은 당시를 회고하면서 비교적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 https://correspondent.afp.com/man-wheelchair
8) 이원준, “이스라엘, 美대사관 이전식 앞두고 국경병력 2배 강화: ‘위대한 귀향 행진’ 팔레스타인과 충돌 예상”, 〈뉴스1〉(2018.5.13.), https://www.news1.kr/articles/?3315836
9) 제이크 린치·요한 갈퉁, 김동진 옮김, 《평화 저널리즘》, 21-22쪽. 반면에, 폭력 저널리즘의 대안으로서 ‘평화 저널리즘’(peace journalism)은 갈등의 현실을 보도하되 거기서 그치지 않고 갈등을 해결하고 전환하기 위한 목적으로 갈등을 바라보고 보도하는 것이다. 평화 저널리즘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다.
10) 하지만 어느 언론도 완벽한 중립과 균형을 유지하지 않음을 지난 글에서 이야기한 바 있다.
11) 황치성, 《갈등이슈 보도의 새로운 접근》(한국언론재단, 2008), 24쪽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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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함께 평화를 만들어가기를 원하신다..
나도 그렇게 믿는다..
함께 평화를 만들어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