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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중 한명이 웃는 낯으로 조영과 고구수에게 말했다.
“두 분의 시가 참 가슴 아프게 들립니다. 두 분은 아마도 고려 사람인가 봅니다.”
조영이 가슴이 뜨끔해, 예리한 눈빛으로 그들을 쳐다보며 되물었다.
“귀하는 어디에서 사시오?”
“저는 멀리 창주에서 사는데, 이곳의 처가댁에 들렀다가 구경삼아 산을 올라왔습니다. 이름은 이고생李高生이라고 합니다.”
그가 자기 이름을 밝히자 조영이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이름의 뜻은 고고하고 고상한데, 우리 고려어 발음으로는 참 듣기가 거북하오.”
“그래요? 고려어로는 어떻게 들리는데요?”
“이토록 고생苦生한다는 뜻이라오.”
이고생도 역시 빙긋 웃고 동행인 두 사람을 소개했다.
“이 쪽은 제 처이고, 저 사람은 제 처남입니다.”
조영은 이고생이라는 청년의 얼굴을 보니 부잣집 도련님 같은데 스물도 채 되어 보이지 않았다. 조영이 의아한 얼굴빛을 보이자, 이고생이 웃으며 말했다.
“제가 장가를 좀 일찍 갔습니다. 저는 올해 열일곱 살인데, 처는 열아홉이에요. 처남은 저와 한동갑이고요.”
“아, 그렇군요. 얼굴이 참 잘 생긴 것 같습니다. 근데, 형님은 우리들이 심심파적으로 몇 마디 나눈 것을 자세히 듣고 계셨는가 봅니다.”
“형님이라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형님은 저보다 나이가 훨씬 많아 보이는데다 기골이 비범하고 얼굴은 청수해, 일견 큰 뜻을 품은 대장부다워 보이는데, 오늘 형님을 보자마자 제 가슴이 떨릴 정도로 마음이 끌렸습니다.”
이고생이 해맑은 낯으로 조영에게 요청했다.
“저를 아우라고 불러주시면 안 될까요?”
조영이 그를 바라보니, 귀티가 나는데다 사심이 없는 것 같아, 역시 웃으며 대꾸했다.
“그래도 괜찮겠네. 아우는 나이가 어리지만 공부를 많이 했는가 보오.”
“시문나부랭이들과 경서들을 좀 읽었지만 어찌 형님들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그는 겸양을 떤 후 조영에게 부탁했다.
“형님, 같이 계신 분들을 저에게도 좀 소개해주시면 안될까요?”
“아, 내가 실례했구먼.”
조영은 고구수와 이해고, 사비우를 이고생 일행에게 소개했다.
“와, 고구려 보장태왕의 아드님이시군요.”
그는 이어서 이해고와 사비우에게도 친근감을 표시했다.
“두 분을 처음 뵙지만, 우람한 체구와 형형한 안광을 보니, 아마도 대장군쯤 되시는 것 같습니다.”
“과찬이네.”
고조영이 곁들여 설명했다.
“이 분은 강호무림에서 유명한 신창 이해고 장군이시고, 이 분은 천하장사 사비우 장군이시네.”
“내 그럴 줄 알았어요. 나 같은 문약한 서생이 장군님들 앞에 서니 기가 질려 옴짝달싹도 하기 어렵군요.”
하지만 그의 유창한 언변은 결코 기가 질린 듯한 태도가 아니었다.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어느 덧 산을 내려와 갈림길에 도달했다. 고조영이 이고생에게 작별인사를 한다.
“그럼 다음에 또 만나 뵐 수 있으면 좋겠네.”
“인생하처불상봉이리요? 언젠가는 만날 날이 있겠죠. 형님들과 사귈 수 있어서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그가 인사하고 처와 처남을 데리고 떠나갔다.
요동주도독 관저 숙소에서 그 날 밤을 보낸 후, 이튿날 일행은 고구수에게 작별을 고했다.
관저를 나오면서 조영이 이해고와 사비우에게 말한다.
“여기서 서북으로 백여 리를 가면 노룡현성盧龍縣城이 나오고 노룡현성 남쪽 십여 리 되는 옛 요수의 기슭에 백이숙제의 고죽성孤竹城이 있다 하니, 한 번 들렀다 가는 게 어떻소?”
“저도 일찍이 고죽국 왕자들의 고처를 답사해보고 싶었으나 아직 가보지 못해 늘 아쉬웠는데, 정말 잘 됐습니다.”
사비우가 즐거워한다.
그늘 밤 노룡현에서 일박한 일행은 이튿날 이른 아침 강을 따라 내려가며 난하灤河 기슭의 고죽성과 수양산을 찾았다.
청룡하와 옛 요수가 만나 한 줄기를 이루니, 돌연 강물은 하나의 드넓은 호수처럼 변한다. 물의 맑기가 마치 수정과 같다.한줄기 고아한 가을바람이 호수 위를 비끼듯 훑는다. 강기슭에는 험준한 절벽이 있어서 흡사 백이숙제의 절개를 말해주는 듯하다.
조영 일행은 고기잡이 배 한 척을 빌려 타고 호수를 유람해보았다. 호수 안에는 매우 작은 섬과 기암괴석들이 우뚝우뚝 서 있었다.
“바로 이곳이 옛날 고죽성이 자리잡은 곳입니다. 이 풍경 좋은 곳에서 번조선의 거수국(제후국)이었던 고죽국의 왕자들이 말년을 한가하게 보내며 인생의 시름을 잊었겠죠.”
조영의 말이다.
물가의 하얀 모래밭과 강을 두른 숲의 정취가 가을의 풍광을 한껏 고취시킨다.
“이 물 맑고 기 맑은 고장이 원래 번조선의 땅이었는데, 백이숙제의 삶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한낱 고사로 화했을 무렵, 연나라의 장수 진개가 번조선을 침략해 천 리의 땅을 빼앗았죠. 연 나라는 그 지역에 다섯 개 군을 설치했는데, 바로 이 고장을 포괄하고 있었습니다.”
“고 장군은 역사에 아주 해박한 지식을 가졌군요.”
이해고가 감탄조로 말한다.
“서한시대의 사가 사마천의 글에도 나옵니다. 전한 때에 이곳 옛 요수를 경계로 삼아 번조선이 중국과 대치했는데, 번조선왕 기준이 연나라 사람 위만을 받아들여 이곳에 머물게 했습니다. 알다시피, 그 후 위만이 반역을 일으켜 번조선의 왕성을 점령하자, 기준 왕은 하는 수 없이 바다로 달아나 막조선 땅으로 피난해야 했습니다.”
고조영이 감회에 젖은 듯 하늘을 우러러보았다. 물새들이 날고 있다. 청명한 가을바람이 심신을 달랜다. 조영이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위만이 번조선을 점령했으나 삼세三世에 이르러 한 무제 유철에게 망하니, 번조선은 드디어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그 후 대부여에 영웅들이 일어나 많은 땅을 다물했으나 이곳 난수灤水를 넘기 어려웠죠.”
뭍으로 나왔을 때 조영이 제의한다.
“여기까지 왔으니, 백이숙제가 즐겨 찾아 책을 읽었다는 이제독서산夷齊讀書山마저 들렀다 가죠.”
백이숙제의 독서산은 그곳에서 남쪽으로 이십 여리 되는 곳에 있었다. 세 사람은 잠시 산중의 적막을 즐기다가 다시 노룡현을 경유해 영주성營州城으로 향했다. 일행이 말을 타고 관도를 따라 터벅터벅 가고 있을 때다.
뒤쪽에서 세 필의 건마가 속력을 내어 달려오더니, 조영일행을 바짝 좇은 후 걸음을 늦추었다. 맨 앞에서 선 이가 큰 소리로 묻는다.
“거기 앞서 가시는 분, 고조영 형님이 아니신가요?”
조영이 놀라 돌아보니, 맨 앞의 말 위에 얼마 전에 만난 이고생이 앉아 있는 게 아닌가?
“아니, 동생이구먼. 또 만나서 반갑네. 그래 어디 가시는 길인가?”
“실은, 엊그제 형님들과 헤어진 후, 섭섭한 마음이 너무 강렬해 물어물어 헤매며 형님들을 찾았는데, 천우신조로 이렇게 길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었습니다.”
“뭐라고, 그게 사실인가?”
“어차피 저희들은 부모님의 허락을 얻어 한 일 년 정도 세상 유람을 하기로 하고 집을 나왔습니다. 마땅히 갈 곳도 정하기 어려워 형님들을 찾아온 것이니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그가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린 공무로 바쁜 사람들인데, 우리를 따라오다니 참 난처하구려.”
“저, 무슨 공무를 수행하고 계시는지 여쭈어보면 실례가 될까요?”
고조영은 잠시 생각에 잠기다가 대답했다.
“나라의 일로 하북 지방 곳곳을 순무하는 중이네.”
“아, 그러니까 순무대사이시군요.”
“그렇다고 보면 되네.”
“야, 정말 재미있겠다. 세상 곳곳을 구경할 수 있으니.”
“철부지 소리. 이 일이 얼마나 막중하고 힘든 일인데, 재미있겠다니.”
조영이 웃으며 대답한다.
“하지만 재미없이 하면 너무 힘드니 어차피 할 일, 재미있게 하면 안 되나요?”
“하하하! 동생의 말이 맞네. 동생한데 한 대 얻어맞은 것 같구먼.”
조영은 발걸음을 늦추어 그와 나란히 걸으며 물었다.
“동생의 집은 대단한 부잣집인가 보오. 일 년씩이나 돌아다니며 세상 구경을 한다니.”
“뭐, 그렇지도 않아요. 절더러 강호를 떠돌아보아야, 세상인심과 물정을 알고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네요.”
“하인들도 데리고 다니지 않고 이렇게 아내와 함께 셋이서 다니면 위험하지 않겠는가?”
“실은 그래서 형님들을 따라다니고 싶은 거예요.”
그가 웃음으로 대꾸했다.
“형님들의 굉장한 무공武功에 기대어 내 색시 좀 안전하게 지키고 싶어서요.”
“나야 별 볼일 없지만, 나와 동행하는 분들은 모두 강호의 고수들이네. 하지만, 자네 일행을 안전하게 지켜줄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네.”
“그러면 저희가 동행하는 것을 허락하시는 거죠?”
그가 매우 기쁜 듯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아하, 이거 어쩐담. 동행인들의 의견도 물어봐야 하네.”
“순무대사님께서 모든 걸 알아서 결정하시지요.”
조영이 묻기도 전에 이해고가 대답했다. 조영은 나이어린 세 젊은이가 강호를 떠돈다는 것이 염려스럽게 생각되어 동행을 허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좋네. 하지만 우리의 여정은 험난하니 고생을 각오해야 할 걸세.”
“그까짓 고생쯤이야. 첫눈에 반한 형님들과 동행한다면, 하늘 끝까지라도 따라갈 수 있을 거예요.”
이고생이 즐거움을 못 이겨 싱글벙글이다.
“근데 동생은 무예를 배운 적이 없는가?”
“약간은 배웠지만, 그냥 심신단련을 위해 달마역근경 같은 맨손체조 정도나 하고 있습니다.”
며칠 함께 지내는 동안 조영은 이고생 일행과 매우 친숙해졌다.
687년 (고조영 일행이 요동고성 창려에 도착하던 때)
우리 이야기의 현장을 남쪽으로 내리고, 시간을 조금 앞당겨, 잠시 이루하와 여미아에게 조명을 비추어 보자.
순무대사 고조영 일행이 요동고성에 도착하던 때에, 동도 낙양성의 이루하 집에서는 여미아가 진지한 얼굴로 이루하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아씨, 어젯밤에 제가 밤새워 기도하는데, 아무래도 매우 위험한 일이 일어날 것 같습니다.”
“위험한 일이라니? 누구에게? 하북으로 올라간 고조영 공자님에게?”
고조영을 떠나보내고 자나 깨나 그를 잊지 못하고 있던 이루하가 금새 여미아의 말뜻을 알아차린다.
“그래요. 아씨. 조영 공자님에게 큰 위험이 닥칠 것 같습니다.”
“무슨 위험이 닥칠까?”
“그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럼 어떡해야지?”
“제가 그분을 안전하게 지켜 달라고 우리 임금이신 어진님께 간절히 기원했지만, 그래도 마음이 불안합니다.”
“곁에 계시면 가보기라도 하겠지만, 수천 리 머나먼 길에 계실 터인데,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여미아가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우리가 한 번 올라가봐야 할 것 같아요.”
“너도 공자님이 그리워서 보고 싶니?”
이루하가 직격탄을 날렸다. 여미아는 차마 부인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바닷물 속에서 바늘 찾기라도, 일단 올라가서 그 분을 찾아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얼굴을 보기 전에는 마음을 놓을 수 없다는 말이구나?”
“저희들이 가면 아마도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루하가 창밖으로 눈길을 돌리고 말했다.
“태후마마께서 우리의 외유를 허락하실지 모르겠구나.”
“찾아뵙고 간청해 봐야죠.”
“그럼 언제쯤이 좋을까?”
여미아의 지혜를 신뢰하던 이루하는 여미아가 자신의 여종이지만 이제 매사에 여미아의 의견을 묻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었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지금 당장 궁내로 들어가 보는 게 좋겠어요.”
두 여인은 옷을 곱게 차려입고 얼굴을 아름답게 꾸민 후 황궁으로 직행했다. 북쪽 현무문을 통과해 먼저 미시아의 거처를 찾았다.
미시아와 함께 남궁南宮으로 나아간 그들은 무 태후가 정사를 보는 자신전으로 향했다.
“폐하, 송막도독 이진영의 따님이 폐하를 알현하러 왔사옵니다.”
내시의 진언에 무 태후가 들어오라 명했다.
이루하와 여미아, 미시아가 무 태후 앞에 엎드려 절했다.
“일어나라. 무슨 일로 이곳 남당南堂까지 찾아왔는고?”
“폐하의 젊고 아름다운 존안도 뵈올 겸, 또 한 가지 심원도 아뢸 겸 찾아뵈었습니다.”
이루하가 대답했다.
“내 얼굴이 젊고 아름다운가?”
“그렇사옵니다. 폐하는 아주 젊어 보이십니다. 제 모친의 나이가 마흔인데, 폐하는 저희 모친보다 더 젊어 보이십니다.”
이루하가 좀 과장을 섞었지만, 금년 예순네 살의 무 태후 얼굴이 사십대로 보인다는 것은 그 곁에서 시위하는 사람들의 한결같은 증언이었다.
무 태후가 웃는 낯으로 물었다.
“그래, 마음속에 원하는 게 무언가?”
“어린 소녀가 부친과 모친으로부터 오래 떨어져 있으니 부모님이 몹시 뵈옵고 싶습니다. 가끔씩 편지는 보내지만, 부모님의 염려도 덜어드릴 겸 부모님을 찾아뵙고 싶습니다.”
“부모님에게 무슨 근심거리라도 있는 건가?”
“저의 혼사 때문에 노심초사하고 계십니다. 이다조 장군님의 둘째 아우인 이기창 공자와의 혼사가 틀어져 부모님이 몹시 가슴 아프게 생각하고 계십니다.”
“오, 그래? 혼사가 왜 틀어졌는고?”
“제가 오랫동안 회답을 주지 않았더니, 그 쪽에서 이미 다른 처자를 물색하고 있다 하옵니다.”
“오, 그렇게 되었구먼.”
“부모님을 찾아뵙지 못한 지 벌써 긴 시일이 흘렀으니, 상심한 부모님도 위로해 드릴 겸, 또 솔직히 말씀 드려 바람도 쐴 겸, 영주營州 본가에 한 번 다녀오는 것이 딸의 도리인 줄 아옵니다.”
(다음회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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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
2025. 4. 11. 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