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짝 성묘 최학용
평택에 사시는 외숙모님의 갑작스러운 병환 소식을 접했다. 이튿날 남편의 주선으로 외숙모님께 갔다. 늘 아내 마음을 헤아리는 남편이 오늘도 빛난 하루를 선물했다. 남편과 언니와 동행했다. 외숙모님 찾아뵙고 마땅히 친정 조상님들 산소에도 들리자 했다. 비 예보가 있었다. 외가에 들른 후, 친정 문중 산소에 들리려던 진로를 바꾸었다. 궂은날에 질척거릴 산의 상태를 감안 해서였다. 외곽으로 들어서다 보니 산소에 가지고 갈 꽃도 준비 못했다. 빈손으로 가기가 서운했다. 조상님들께 술잔이라도 올리고 싶은 생각이 번개처럼 떠올랐다. 우리가 산소 갈 때마다 들리던 식당, 그곳에 가면 무엇이 있으려나? 그곳에서 아쉬운 대로 소주와 종이컵을 살 수 있었다.
산소로 오르는 길, 흙의 감촉이 부드러움도 고향의 흙이라는 생각 때문이었으리라. 등을 비추는 봄의 햇살도 햇병아리 솜털처럼 부드러웠다. 증조부모님 조부모님 큰댁 작은댁 조상님들 부모님 오빠 묘에 당도하니 눈물부터 흐른다. 오빠의 얼굴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윗 조상님들부터 참배하며 묵념 기도 후 소주 한 잔씩을 올려 드렸다. 오빠께는 여러 잔을 올려드렸다. 오빠 투병 중일 때 생각 때문이다. 주치의 만나는 시간 진료실에 같이 들어갔을 때다. ‘선생님 저 막걸리 한 모금 마셔도 될까요?’ ‘막걸리는 왜요?’‘유산균이 많잖아요’ ‘야쿠르트를 드셔요’ 머쓱해진 그때 오빠 표정은 불쌍할 정도로 심히 딱했다. 얼마나 어렵게 건넨 질문이었을 텐데, 단칼에 거절 당했을 때의 당혹감은 듣는 나도 난감했었다. 같이 들은 주치의 답변이 맞긴 하지만 그냥 한 모금 드시게 할걸? 그걸 못해 드린 나의 짧았던 생각이 지금도 아쉬움을 넘어 나의 쎈스 없었음을 후회했다. 후회를 넘어 목에 가시가 걸린 듯 늘 마음에 걸렸다.
그 후 두 주일 간이나 물 한 모금 못 마시고 수액에만 의존하다가 생을 달리했던 그때의 오빠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의 의식을 떠나 옆에 계신 조상님들께 물 한 잔 드리는 마음이었다. 이런 상황 하나님께서도 이해(?)하셨으리라 믿고 싶었다. 여기 모셔진 친척이며 초등학교 동창인 승보 아저씨께도 막걸리 한잔 올렸다. 술 좋아해 술로 인한 간암으로 돌아가셨는데 하는 생각이 번쩍 들기도 했다.
잠겨있는 재실엔 들리지 못했다. 재실 울타리 안엔 대나무가 무성했고 대문 틈으로 드려다 본 마당엔 봄꽃들이 우리를 반겼다. 잘 정리된 주변을 돌며 동생이 최씨 문중 종친회 회장 일을 맡아 보는 수고도 한눈에 보였다. 떠나기 전 최근에 쓴 수필 몇 편을 모아서 부모님과 오빠 묘소 앞에 비닐로 싸서 준비한 채로 놓고 왔다. 그 속엔 사랑의 편지도 넣어드렸다. 이때 돌아서며 드는 마음. 이런 묘한 마음을 허허롭다 하나? 소리쳐 울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참았다. 아마 남편이 동행 안 하고 언니와 단둘이 갔었다면 고을이 울리도록 목 놓아 울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몇천 평의 넓은 산에 나란히 자리하고 누워계신 조상님들을 한분 한분 떠 올려본다. 나의 눈물을 대신하듯 비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다. 갑작스런 성묘. 예정에도 없던 성묫길이다. 서해대교가 눈앞에 보이며 사방이 탁 트인 편안한 곳이다. 선산서 내려오는 길, 착잡한 마음에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자꾸만 뒤가 돌아다 보인다. 이때 외사촌의 전화가 울렸다. 점심 준비해 놓았다며 기다리고 있단다. 외가까지의 거리는 5킬로 정도다. 딱 점심 시간이다. 외가 식구들의 환대 속에 모두를 만났고, 병상에 누워서 반기시는 외숙모님 손을 잡았다. 많이 야위신 모습에서 전동차로 온 동네를 매일 도셨다는 일상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때를 따라 자녀들 챙기실 때마다 나까지 챙겨 주시던 일들이 떠오른다. 감자 고구마 밤 마늘 김장 무짠지 오이지 참깨 참기름 고춧가루 쑥떡 반죽까지도 챙겨 보내시던 그 사랑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자주 걸어 주시던 다정다감 했던 전화 속의 음성은 어디서 듣나? 수액에 의존하고 계시니 얼마 동안이나 우리 곁에 계시려나? 아쉬운 마음뿐이다. 당신은 간신히 미역국 한 수저밖에 못 넘기시고, 나에게 밥 한 수저만 더 먹으라 성화하셨다. 몸 약한 조카인 나에 대한 염려 때문이셨으리라. 이렇게 식사를 못 하시니, 걱정이 앞섰다. 소문난 외사촌 네 남매의 효심으로 다시 회생하실 수는 없으실까?
잔칫상을 방불케 한 점심상을 물린 후, 외삼촌 면장 퇴임식 때 비디오를 보았다. 곱게 차려입으신 한복의 외숙모님 그때 모습, 누워계신 외숙모님이 일어 나실 것 같은 생각도 들었다. 비가 쏟아지는 마당에서 외가 식구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어릴 적 겨울 추녀 밑 고드름 달렸던 그 추녀 밑이다. 외할아버지 6형제분이 모여 사는 공 씨 집성촌이니, 어릴 때도 가면 늘 친척들이 많이 모였던 생각이 난다. 늘 북적이던 사람 사는 동네 같았던 생각이 머리 가득한 마을이다. 방학 때마다 찾던 외가다. 대문에는 오래된 외삼촌 이름‘공창환’이 새겨진 문패를 사진에 담아 왔다. 78세에 세상 떠나신 외삼촌. 오빠가 유난히 좋아했던 우리 외삼촌의 이름, 오늘도 아니 영원히 별처럼 우리들 가슴에 새겨지리라. 외삼촌께선 경기도 평택군 현덕면의 부면장을 지내셨었다.
100년도 넘었다는 고목이 버티고 서있는 작은 대문 앞, 그 고목 아래 둘레엔 분홍색 꽃잔디가 활짝 피었다. 어릴 적 방학 때마다 찾아왔던 추억 속 상자엔 외가의 추억이 가득 담겼다. 외숙모님 안 계신 외가는 상상하기도 싫다. 봄비 내린 날, 외숙모님 병문안, 그리고 깜짝 성묘도 번개같이 이루어졌다. 많은 생각을 불러온 하루였다. 최학용 경기도 평택 출생, 고려대학교 간호대학 졸업 《문예사조》(1997) 수필 등단, 《문예사조》(1997) 시 등단 《수필문학》(2009)수필 등단, 수필문학상 수상(2018)짚신문학상 본상 수상(2018), 중앙여자고등학교 교사 역임, 중앙여자고등학교 총동창회 회장 역임, 현 한국수필문학가협회 이사. 짚신문학회 부회장 한국문인협회 회원. 국제 펜 한국본부 회원, 여울문학회 회원, 성동 문인협회 이사, 수필집 《비취반지》, 《50년만의 주례사》 출간, 시집 <학의 이름으로 지상을 날다.> 2024년 4월 7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