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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에서는 10호 태풍 마트모가 불어온다는 예보가 연일 들려오는데 약간은 염려스런 마음으로 우산도 조금 큰 것을 준비하고 정해진 일정에 맞춰서 새벽밥을 먹고 출발을 하였다. 날씨가 덥기는 하지만 벌판은 벌써 벼들이 자라서 초록빛으로 물들고 산도 온통 푸르름으로 신록이 무성한 낭만의 계절, 7월의 막바지를 달리고 있었다.
충주 휴게소에 잠깐 쉬니 자연을 가슴으로, 눈으로 즐긴다는 것은 언제나 마음과 몸을 가볍게 해 주며 기분을 들뜨게 한다. 중부 고속도로는 휴가철인데도 차들이 별로 다니지를 않고 한가하여 막힘없이 버스는 달려서 남성주휴게소에 잠시 쉬고 예정된 12시경에 고령에 도착하였다.
내가 태어난 곳이, 알고 보니 가야 땅이었는데 가야에 대해서는 학교에서도, 개인적으로도 별로 관심이 없고 배운 것도 없어서 아는 것이 전무 상태나 마찬가지였다. 다만 문화해설사의 설명에 의하면 가야산 신령인 정경묘주에 의해서 가야가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문헌상에서 보면 가락국기의 구지가에 AD42년에 구지봉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서 아홉 추장들이 구지봉에 올라가니 하늘에서 음성이 들리면서 시키는 대로 노래를 부르라고 하여 노래한 것이 구지가다. 우리나라 최초의 노동요로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龜何龜何 거북아거북아
首其現也 네 목을 내놓아라
約不現也 내놓지 않으면
燔灼而喫也 구워서 먹겠다.
아홉 추장들이 시키는 대로 춤을 추며 노래를 불렀더니 하늘에서 붉은 보자기에 금합자가 싸여 내려왔다. 그것을 열어보니 황금알 여섯 개가 들어 있었다. 12일이 지난 아침에 그 알들에서 어린 아이가 나왔고, 그 중에서 수로가 대가야의 왕이 되었다고 한다.
별다른 기록이 없고,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가야는 잘 알려지지도 않았거니와 역사를 모르는 우리들에게는 백지나 마찬가지라고 하겠다. 가야는 AD562년에 신라에 의하여 망하고 말았다. 그 유명한 김유신도 가야 사람이었다. 신라에서 인정받기 위해서 얼마나 애를 썼으며 노력을 했던가는 사극에서 보아서 어렴풋이 알고 있다.
고령은 안동의 유교문화와 경주의 신라문화와 더불어 고령의 가야문화가 경상북도의 3대 문화라고 한다. 그리고 우리의 역사 중에서 가장 오래된 문화라고 할 수 있다. 우리 것이 소중하다고 말은 하면서 정작 우리 것에 대해서 얼마나 무관심했는가 하는 반성을 하는 기회가 되었다. 그런데도 고령이라는 지역은 가본 적이 없는 낮선 곳이다. 지형은 아무래도 분지형인 대구와 가까워서 그런지 몹시 후텁하고 끈적끈적하여 힘들었다. 도착하자마자 점심을 먹고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우륵박물관이었다.
우륵박물관
경상북도 고령군 고령읍 가야금길 98에 위치한 박물관은 2006년 3월31일에 개관하였으며 악성 우륵과 관련된 자료를 발굴하고 수집하여 보존하는 전시관으로 가야금의 세계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건립한 전국 유일의 가야금 박물관이다. 고령의 정정골에 세워진 박물관은 가야금을 비롯한 국악기에 대한 대중의 이해와 관심을 높이고, 지역의 교육문화 발전에 기여할 목적으로 설립되었다고 한다.
대지면적 9,098평방미터에 건축면적은 965평방미터의 2층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1층은 전시실과 사무실, 2층은 강당과 악기고 등으로 되어있다. 그리고 가야금 연구와 제작과정을 설명해 준 김동환 씨의 자상한 설명에 의하면 25~30년 된 오동나무를 널빤지로 잘라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사시사철 밖에서 5년 동안 뒤집고 또 뒤집어가며 말려서 쓸만한 것을 고르는데 약 10% 정도가 나온다고 하였다. 그 중에도 명품은 3% 정도라니, 그 길고 긴 기다림과 인내의 과정이 참으로 어렵고 힘들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우륵이 가야금을 만들었다니 새삼 우륵에 대해서 연민의 정을 느꼈다.
박물관에는 여러 가지의 가야금이 전시되어 있는데 산조 가야금과 정형 가야금, 25현 가야금이 있고, 가야금을 만들기 위해서는 잘 말린 오동나무를 붙여서 뒷면에 공명을 위하여 빈 공간을 만들고 안현을 대고, 명주실로 된 줄을 거는데 높은 소리를 내는 가는 줄은 30가닥, 낮은 소리를 내는 굵은 줄은 80가닥을 합쳐서 만들었다고 한다. 보통 12줄로 된 것이 일반적이다. 수명은 평균 3~4년이고 하나를 만드는데 공정이 약 200번이며 1000번의 손이 간다니 얼마나 길고 힘든 작업이며 기다림의 산물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얏고 마을
가야금의 옛 이름이 가얏고다. 우륵박물관에서 멀지 않은 곳에 가얏고 마을이 있다. 가는 길에 우륵이 살던 집이 그러했을 거라는 짐작으로 만든 초가집이 정겹기는 하였지만 가상적으로 만들었다고 하니 마음이 별로 끌리지는 않았다. 화려하거나 초라하거나가 문제가 아니고 실제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 같다. 바로 이어지는 마을이 가얏고 마을인데 별다른 것은 없고 가얏고문화관의 큰 건물만이 농촌의 정경과는 이질적인 분위기로 우뚝 서있었다.
대가야박물관
우륵박물관이나 별로 차이가 없었다. 다만 다양한 역사와 악기가 전시되어 있고 규모가 크고, 옆에는 체험관이 있으며 바로 옆과 뒤에는 산과 같은 고분군이 박물관을 에워싸고 있는 것이 이색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특히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많았는데 당시 무기인 칼과 말안장과 투구, 각종 질그릇을 비롯한 생활용구와 장식을 위한 귀고리와 왕관인 금관은 그 절정을 보는 듯했다. 그런데 加耶搏物館이라는 현판의 한자가 의구심을 자아내게 하였다. 알아보니 삼국사기에 기록이 되어있어서 논란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어디에는 伽倻라고 쓰고 어디에는 加耶라고 써서 사람들을 헷갈리게 하는 것은 잘 못 된 것 같다. 논란이 있든 없든 한가지고 통일을 해야 하리라고 생각한다.
왕릉전시관과 순장묘
충격적인 곳이었다. 먼저 가야의 고분이 700기가 넘는다는데 놀랐고, 그 많은 고분을 일제시대에 일본 놈들이 도굴을 하여 지게로 70지게 분량의 유물을 가져갔다는데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세계사에서도 보기 드문 야만적인 순장이라는 제도가 행해졌다는 것에 미리 책을 읽고 가기는 했지만 실제로 무덤의 형태를 보면서 더욱 실감나게 다가오고, 가슴이 먹먹해지는 느낌이었다. 김훈의 소설 “현의 노래”에서는 순장자의 수가 민초가30명인데, 농부5명, 어부4명, 대장장이4명, 목수4명, 옹기장이4명, 늙은 부부 두 쌍, 아이 달린 젊은 부부 두 쌍, 그리고 처녀 등과 궐내에서 12명은 문무신하2명, 호위무사 동서남북4명, 시녀4명 등 무려 50 여명에 이르는 사람을 왕의 무덤에 순장하였다고 하니, 얼마나 야만적인 행위인지 가히 말로 표현하기 조차 어려울 지경이었다. 산채로 왕의 하관을 맞이해야지 발자국 소리나 우는 소리, 병장기 소리도 일체 허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죽는 사람도 울거나 소리를 내지 못하고 조용히 순장을 기다렸다고 한다. 다만 무덤에 들어갈 때는 산채로 묻는 것이 아니라 죽여서 묻었다고 하며, 그들은 죽어도 살았을 때처럼 영혼의 삶이 계속된다는 계세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하니 사람의 사상과 마음가짐이 얼마나 중하며 그들은 혹시 기꺼이 응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사람이 죽기를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궁중에서 가실왕을 수발하던 ‘아라’라는 궁녀는 밤에 궁전 밖 뜰에서 소변을 보다가 자기가 누는 오줌소리에 삶에 대한 의식이 깨어나서 살고 싶다는 강한 열망으로 배수구를 통해서 궁을 빠져나와서 도망을 하였는데, 많은 군사들이 찾아다니는 모습은 순장의 의미가 얼마나 절대적이었는가를 짐작하게 하였다. 책속에서 아라는 우륵의 제자 니문과 합방을 하고 평범한 백성으로 행복하게 살다가 뱀에게 물려서 온 몸이 퍼렇게 변색이 된 채 주검으로 발견되는 장면은 가슴을 아리게 하였다.
작품속의 순장하는 장면을 살펴보면 ‘군졸이 무당 딸의 어깨를 도끼로 내리 찍었다. 농사꾼 부부는 마주 눕고 아이는 사이에 끼어 있었다. 시녀들이 멈추자 군사들이 등을 발길로 찼다. 돌 뚜껑이 덮였다’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광경이다.
지산리 44호 고분이 순장묘라고 하는데, 그 모습을 그대로 재현해 놓았고 사람들의 형상을 만들어 누워있는 모습을 보니 가슴이 섬뜩하고, 그 시대에 태어나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이며 행운이라는 생각에 감사하는 마음이 들었다. 사진을 세세하게 찍기가 싫어서 순장묘와 장면은 피하여 지나가고 말았다. 순장제도는 502년에 금지되었다고 하니 백성들이 얼마나 좋아하였을까?
왕릉에서 출토된 유물은 항아리, 잔, 그릇받침, 금동관모장식, 쇠창, 쇠화살촉, 고리자루 튼칼, 모형철기, 굵은 귀고리 등 수많은 2000년 전의 유물을 내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다는 것은 이 시대에 태어난 복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낭독회
곽용환 고령군수가 인사말을 하고 낭독회가 진행되었다. 먼저 대구 연극배우 성석배 씨가 낭독을 하였고, 지역 문인들 모임의 회장 외 다수가 낭독을 하였다. 어느 귀촌했다는 분은 너무 열정이 넘치고 몸짓이 과장되어 보기에 민망하기도 하였다.
개실마을의 민박
개실마을에서의 민박은 시골의 전형을 그대로 느끼게 해주었으며 조용하고 예스런 분위기가 좋았고 마을의 집들이 모두 기와로 된 전통가옥으로 시골이지만 잘 정돈된 것이 정감을 느끼게 하였다. 다만 120호 정도로 큰 마을이었는데 지금은 여러 집이 도시로 나가고 빈 집만 남아있는 폐가를 보니 마음이 짠하고 개나 닭이나 소 등의 동물이 보이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아침은 마을에서 운영하는 공동 식당에서 뷔페식으로 식사를 했는데, 농촌의 산골에 생선을 비롯한 여러 가지 반찬이 입맛을 돋우기에 족하였다. 봉사하시는 분들이 모두 6~70대의 노인들이어서 움직임이 느리고 힘든 일은 하지 못한다는 말을 들으니 우리의 농촌의 현실을 보는듯하여 잠시 농촌의 미래를 생각해 보았다.
이 마을은 영남학파 종조인 문충공 점필재 김종직의 생가와 350년간 살아온 유서 깊은 마을이라고 한다. 무오사화 때 김종직이 1457년(세조3년) 10월에 쓴 글, 즉 황후에게 죽은 초나라 의제를 조문하는 내용으로 세조에게 죽은 단종을 의제에 비유하여 세조 왕위 찬탈을 비난한 것을 후에 제자 김일손이 사관으로 있을 때 사초에 적어 넣었는데 이것이 무오사의 원인이 되었다고 한다. 무오사화는 1498년(연산4년) 7월 김일손 등 신진사류가 유자광을 중심으로 한 훈구파에 의해 화를 입은 사건이다. 조의제문으로 김종직은 부관참시를 당하게 되었다. 조선4대 사화 중 최초의 사화로 사초 문제가 원인이라고 하여 史禍라고도 한다. 무오사로 화를 입은 선생의 5대손이 1650년경에 이 마을로 피신하여 살았으며 꽃이 피고 아름다워서 개회실이라고 하였는데 개애실로, 다시 개실로 바뀌어 지금은 개실마을이라고 하였다.
김종직은 학문과 문장, 행정능력을 고루 갖춘 당대 제일의 유학자로 폭넓은 학문과 역사에 대한 풍부한 지식은 물론 충절을 강조한 史觀을 지니고 있었다. 그의 제자 김굉필과 정여창, 김일손은 역사에 이름을 남긴 훌륭한 인물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경상북도 민속자료 62호로 아직도 김종직 선생님의 종택이 고풍스런 멋을 그대로 간직한 채 역사의 산 증인처럼 마을을 지키고 있었다. 사람이 살고 있기 때문에 들어가지 말라는 푯말이 서있어서 멀리서 안채를 바라만 보았다. 마침 하얀 노인이 대청마루에서 움직이는 모습이 보이고 집안은 정갈하게 정리되어 선생님의 흔적을 느낄 수가 있었다.
지산동 고분
가야박물관을 성처럼 둘러싸고 있는 봉분들이 마치 한 줄로 서서 시위를 하듯이 바로 박물관 옆에서부터 산꼭대기까지 연결되어 있으며, 고령 읍내를 커다란 품에 아늑하게 안고 있는 胞卵의 지형 같았다. 올라가기도 힘들 정도로 높은 고분군이었다. 등산을 하는 기분으로 서서히 올라가면서 보니 발아로부터 꼭대기까지 모두 700여기라고 하니, 그 엄청난 고분이 지금까지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것이 신기하고 놀라웠다. 그 많은 무덤 중에 큰 왕릉도 있지만 700여기의 수많은 무덤들이 누구의 무덤이었는지 알수가 없고, 왕과 다른 사람들의 무덤이 같이 붙어있다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고, 무덤과 무덤이 바로 이어져 있는 것도 있고, 크기도 애기 무덤같이 아주 작은 것으로부터 큰 것까지 다양하였는데, 세월로만 이해하기에는 어려움 점이 있었다. 고분은 해방 후44호와 45를 발굴한 이후 현재까지 30기의 고분이 조사되었다고 한다. 특히 2007년 발굴한 73호는 지름이 20m가 넘은 구덩식 나무덧널무덤으로 75호를 비롯한 대부분이 구덩식 돌방무덤인 것과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나무덧널무덤의 크기는 길이가 10m, 너비가 5m, 높이가 3,3m로 왕을 안치한 으뜸덧널과 그 서편에 딸린 T자는 3기의 순장덧널이라고 한다.
대가야는 철산이 발달하여서 각종 무기를 생산하여 국력을 키우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철 생산은 야로와 쌍림면 용리 등 미숭산(734m) 기슭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야로의 철은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세금으로 바쳤을 만큼 품질이 좋았다고 한다.
소설 “현의 노래“에서 야로는 도끼와 가지극을 만들었으며 군사들에게 보급을 하고, 그 중에 도끼를 이사부에게 넘기고, 또 긴 박달나무 끝에 갈쿠리와 비늘을 단 무기 가지극 등을 군선에 실어서 신라로 밀수출까지 하기도 하는 자신만이 살아남고 또 전란 중에서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조국을 배반하는 장면은 이기적인 세대를 사는 지금의 현실에 던지는 메시지가 있는 것 같았다.
개포나루
대구의 달성군 구지면과 고령군 개진면을 이어주는 개포나루는 몇 일전에 탐방을 하였던 목계나루와 비슷한 지형으로 그 기능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겠다. 일본과의 교역을 하는 곳이며 남쪽의 소금을 비롯한 해양물산과 내륙의 곡식과 육지 물산이 모여드는 곳으로, 근처에 있는 20여개의 나루 중에서는 꽤 큰 나루였다고 한다. 특히 고려시대에 불심으로 호국을 하겠다는 정성으로 강화도에서 제작한 팔만대장경 경판을 배에 싣고 황해와 남해를 거쳐 낙동강 하구를 지나 후포까지 바람을 타고 돛을 이용하여 나루까지 고디꾼들이 강가에서 돛대에 묶은 밧줄을 당겨 200여리 물길을 올라왔다고 하니, 그 노정과 고생을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운송해 온 경판을 해인사 승려들이 하나씩 머리에 이고, 80리 길인 해인사까지 날랐다고 한다. 그 정신과 신앙의 깊은 의미를 알듯 모를 듯 긴 강물과 함께 끝없이 이어지기만 하였다. 며칠 전에 보았던 충주의 목계나루와 흡사한 모습으로 옛날 차가 없던 시절에 교통의 요지로, 물류의 중심지로 그 역할을이 얼마나 컸던가를 알 것같았다.
장기리 암각화
고령을 떠나기 전에 시간적인 여유가 있어서 장기리 회천변의 알터마을 입구에 있는 암각화를 보았다. 보물 제605호로 지정되었으며 청동기 때 새겨진 것으로 추정하며 가면모양은 신을 상징하고, 동심원은 태양을 상징한다고 한다. 가면모양은 무슨 형상인지 정확하게 알 수가 없는데 내가 보기에는 도깨비 형상처럼 보였다. 가면모양과 태양은 다산과 풍요를 상징하는 제의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고 있으며, 다산이 미덕이었던 시대를 생각하니 격세지감이 많이 든다. 지금은 저출산으로 걱정을 하지만 불과 30~40년 전만해도 산아제한을 하여, ‘아들 딸 구별 말고,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는 표어를 외치던 때가 엊그제 같다. 그 때는 두 명 이상은 가족수당도 안 나오고 세제혜택도 주기 않았다. 특히 예비군 훈련을 가면 그날 불임수술을 하면 하루 훈련을 제외시켜주면서까지 출산을 억제하던 시절이 생각하니 참으로 웃음이 나면서 한편 노화되는 우리사회의 현실이 걱정스럽기도 하다. 우리민족의 다산정책은 고대로부터 이어져 온 전통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륵
우륵은 박연, 왕산악과 함께 우리나라 3대 악성의 한 사람으로 대가야 성열현 출신이라고 한다. 가실왕의 명을 받아서 정정골에서 가야금을 만들었다고 한다. 고령읍 쾌변3리 속칭 정정골, 정정곡, 금곡, 금산곡이라고 부르는데, 정정골은 우륵이 가야금을 연주하니 정정정하는 소리가 골짜기에 울려 퍼져 정정골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가 작곡한 곡이 185곡이라는 기록이 있지만 아쉽게도 모두 전하지 않고, 왕명을 받아서 작곡한 하가라도, 상가라도, 보기, 달기, 사물, 물혜, 하기물, 사자기, 거열, 사팔혜, 이사, 상기물 12곡 역시 이름만 전하고 곡은 알 수가 없다고 하니 안타까운 마음이다. 황병기 씨가 작곡한 ‘하림성‘이 있는데, 멀리 있는 것을 당기고 가까운 것은 밀어내는 대금곡으로, 우륵이 작곡한 것을 생각하면서 지었다고 한다. 그런데 우륵이 어떤 마음과 상황에서 작곡을 하였을까를 생각해도 알 수가 없어서 별을 보고 지었다고 한다. 우륵이 보았던 별이나 자기가 보는 별은 같은 별이었을 것이라는 마음에서라고 한다.
우륵은 궁중 악사였다. 가실왕이 음악을 이해하고 좋아하였으니까 궁중악사까지 두었을 것이다. 궁중악사는 궁중의 음악에 관한 것을 총괄하며 찬치가 열리면 연주를 하고, 나라에 상을 당하면 연주를 하고 춤을 추었다고 한다. 우륵은 가야가 위기에 처하자 신라로 망명을 하여 신라 진흥왕 앞에서 연주를 하고, 진흥왕의 배려로 지금의 충주지역인 하림성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조국을 배반하고 신라로 간 까닭은 오직 한 가지 음악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망하는 가야에서는 자신의 음악을 제대로 지키기가 어려울 것으로 판단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결국 탄금대에서 연주를 하게 되었고,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되었으며 3대 악성으로, 우리나라 음악의 계보를 이루게 되었던 것이다. 우륵이 훌륭한 업적을 남긴 배후에는 가실왕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가실왕은 대가야의 말기 왕으로, 우륵과 신라 진흥왕(546~576)과 같은 시기에 살았던 왕으로 민족 특유의 악기로, 민족정신을 담은 음악을 구상하였던 문화적 성군이라고 할 수 있다. 가야국을 가야금 음악으로 하나 되게 함으로써 정신적 결속을 다졌을 것으로 보인다. 우륵을 불러서 가야금을 만들게 하고 곡을 짓도록 명하였던 것과 궁중에 악사를 두어 음악과 춤을 관장하게 하여 각종 행사에 이용을 한 것을 보면 짐작이 가는 바이다.
탄금대
탄금대는 옛 신라 땅으로 지금의 충주에 있는 역사와 아름다운 절경이 살아있는 명소다. 남한강을 끼고 높은 절벽과 울창하고 깊은 숲은 사람들의 마음을 정화시켜 주기에 좋은 곳이라고 하겠다. 그 아름다운 곳에서 사람들이 사는, 평화로운 나라와 유유히 흐르는 강물을 보면서 가야금을 연주하였을 우륵을 생각하니, 귓가에 12줄, 명주실을 뜯는 소리가 들릴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하였다. 다만 신립 장군은 문경새재에서 적군을 맞았더라면 유리한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승리를 하였을 지도 모르는데, 평평한 지형인 충주에서 일본의 소서행장을 맞아 싸우다가 패전하여, 강물에 투신하여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사실을 생각하면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한다는 말이 실감나게 다가오며 한 나라의 역사를 좌우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국을 말하지 않고 가르치지도 않는 현대 사회에 나라와 민족을 위해 싸우다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스스로의 책임을 지고 자결한 신립의 정신이 다시 나의 가슴을 울리었다.
1986년 8월에 공원으로 지정되고 충청북도 기념물 제4호로 지정되어 보호하다가 2008년 7월에 국가 명승지로 승격되었다고 한다. 토성과 역사적 유적, 신립장군순절비, 탄금대기비, 악성우륵선생 추모비와 충혼탑이 있어 역사 탐방코스 및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는 명소가 되었다.
철이 발달하여 쇠를 두들기는 소리와 가야금을 연주하는 음악소리는 가야를 대표하는 소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천년의 소리를 울린 가야의 소리가 지금도 진공상태의 어딘가에서 울리고 있지나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을 해본다.
마무리
여행은 언제나 즐겁고 설렌다. 계획을 세우는 순간부터 여행은 시작되는 것이며 길위의 인문학 여행을 통해서 새로운 역사와 문학, 철학 등 다양한 체험을 하는 여행이라서 더욱 알차고 값진 여행이라고 할 수 있다. 그냥 따라다니는 여행이라면 인문학 여행이 오히려 재미없고 지겨울 수 있을 것이다. 같은 취미와 같은 성향을 가진 사람들의 여행이라서 더욱 부담이 없고 즐거운 것 같다. 다시 다음을 기대하며 마무리 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