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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파 (LOVE WAVE) 1,276호 - 6.25 고아 임종덕 하우스보이, 미 백악관 대통령 안보비서관 된 교훈 -
6.25 고아 임종덕 하우스보이, 미 백악관 대통령 안보비서관 된 교훈
세계를 감동시킨 인생교훈----
* 625 전쟁때 인민군에 아버지가 처형당하고-.>고아가된 14세소년이--> 서울역에 100여명 고아를 먹여살리기 위해--> 미군장군 소매치기 하다가 붙들리고-> 하나님을 만나고->미국으로 가게되고-> 하바드대학 정치학박사로 졸업하고 ->평화를 위해 월남전 지원하여 ->동료를 살리기위해 포로되어 죽을 고비를 하나님의 기적으로 탈출 -> 은성무공훈장을 받고 특진되어 ->대통령안보비서관으로 닉슨, 존슨, 카트 대통령을 모시며 ->탁구공 외교로 미국 중국평화회의를 유도하고 -> 한국 이민자를 위해 -> LA에 동양선교교회개척하여 미국 최대의 교포 교회로 성장하게 한 장로의 간증
* 감동적인 - 미국사관학교 교재 - 영화 디어 헌터 -우물가의 거지 사진 상으로 유명한 인생교훈
하우스보이란 6.25 전쟁때 미군 부대에서 막사 청소를 하고 미군의 군화를 닦아주고 그리고 각종 심부름을 해주는 소년을 말한다. 주로 전쟁 고아들 중에서 선정했는데, 당시 미군부대의 하우스 보이가 된다는 것은 대단한 행운이었다.
6.25 전쟁때 하우스 보이로 성공한 잘 알려진 인물로는 미국 워싱턴주 상원의원이된 신호범 장로/ 세계침례교총회장된 수원중앙교회김장환 원로목사 / 미국 하바드대학교 정치학박사 임종덕 장로를 들 수 있다.
이들 세사람 중에서 임종덕 장로는(2011년 현재 나이 75세) 그가 오늘이 있기까지 살아온 그 파란만장의 위대한 생애를 아는 사람이 많치 않다. 그 이유는 임종덕 장로는 미국 육군대령으로 예편하기까지 백악관에서 닉슨대통령, 포드대통령, 카터대통령 등 세분 대통령의 안보비서관으로 근무했기 때문에 2014년 까지는 자신의 과거 직책과 관련된 일체의 말을 절대 못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미국의 여러 교회에서 그의 신앙 간증을 요청해도 일체 거절하고 있다.
<14세 고아 의 사랑과 리더십>
625전쟁 때 부모님이 인민군에 총살 당하는 모습을 보고 서울중학 다니던 임종덕은 14살때고아가되어 소매치기 절도를 하면서 서울역에 모인 100여명의 고아들을 먹여 살리고 있었다.
< 미군 비밀가방 절도로 화이트장군을 만난 소년 >
하루는 미군 장군 찝차가 서울역에 왔다. 순간 임종덕은 불과 몇초 사이에 뒷좌석의 가방을 소매치기 하고 사라__다.. 그 장군은 625전쟁에 공군을 총지휘하는 제 5공군 사령관 스티브토마스 화이트 중장이며 그 가방은 당시 미 공군 특급작전계획 1급비밀문서가 던 가방이다. 미군은 즉시 한국경찰에 의뢰하여 경찰에서는 소매치기 왕초인 임종덕의 소행으로 알고 조사를 했다. 임종덕은 가방에 카메라와 서류가 있어서 서류는 쓰레기통에 버리고 카메라는 남대문 시장에 팔았다고 하여 경찰이 쓰레기장에가서 서류를 찾았다,
<자신보다 거지아이 사랑을 위한 소년 >
경찰서에서 조사 받는 동안 수십명의 전쟁고아가 우리 형님 살려달라는 아우성을 하여 화이트사령관은 임종덕의 처지를 알고 임종덕을 하우스보이(하우스보이는 의식주가 해결되는 당시 최고의 자리다)로 가자고 하니 ‘여기 아이들 위해 떠날수 없다’는 말을듣고 화이트 장군이 그 고아들을 미군이 운영하는 제주도 고아원으로 보내고 임종덕을 자기 하우수보이로 채용했다.
< 화이트장군과 하나님을 만나고 두 아버지를 갖게 된 고아>
이렇게 만난 인연으로 임종덕은 성실함을 보여서 그의 양아들이 되고 서울중학교를 재학하고 일요일에 양아버지 화이트장군을 따라 여의도비행장에 있는 미국교회에 갔다
미군들의 예배가 끝나자 바로 한국 공군 장병들의 예배가 시작되었다. 이날 예배석 제일 앞줄에는 이승만 대통령과 김정열 국방장관, 김신 공군참모총장 그리고 화이트 장군과 그외 외국 고관들이 앉았다. 한국 공군군종감 임동선 목사의 설교에 감동받고 하나님을 마나서 평생 인생지주로 영적 아버지로 삼았다.
<하나님, 이승만 대통령, 한국공군 임목사 존경>
설교중 임종덕의 마음을 울렁거리게 했다. “지금 이 나라는 온갖 부정부패의 척결을 단행하지 않으면 이 자유당의 정부는 오래가지 못할 것입니다.”자유당의 총재인 대통령에서부터 국방장관 그리고 군종감의 직속상관인 공군참모총장까지 앉아 있는 자리에서 새파란 20대의 청년 군종목사가 거침없이 설교를 해나갔다.
감수성이 예민했던 임종덕은 마음 속으로 “저 목사님은 오늘 당장 형무소 가겠구나”하고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예배가 끝나자 이승만 대통령은 강대상에서 내려온 군종목사를 덥석 안으면서 “아주 훌륭한 설교였소, 이 자리에 참석한 여러분들이 목사님의 설교를 모두가 다 깊히 생각하고 각자의 소임을 성실히 해 나가십시오”하면서 다시 군종목사의 손을 잡고 목사로서 애로 사항이 있다면 말해보라고 하여 그날 만난 하나님, 목사님, 대통령을 존경하게되였다.
< 대통령이 대방동에 한국 공군교회부터 건축지시 >
그는 공군초대 군종감의 입장에서 제일 큰 애로사항으로 교회가 없어 미군 교회를 빌려쓰는데 하루빨리 우리공군도 자체 교회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승만 박사는 앞으로 서울 대방동에 건설될 공군본부 건설 때 공군 교회부터 먼저 건축하라고 공군참모총장에게 지시했다
<부모의 조국을 떠날 수 없다고 한 소년의 효심과 애국심 >
화이트 사령관이 미국 발령으로 같이 가야 한다고 할 때 어린 소년은 부모가 살해당한 조국을 떠날 수 없다고 하자 화이트장군이 더욱 감격하여 미국에 가서 조국을 도울 수 있다고 하여 미국으로 갔다.
< 하바드 대학 박사 논문에 감동한 미국대통령과 장군들의 눈물 >
미국에 가서 조국을 생각하며 친구들 놀때도 공부를 열심히하여 고등학교 우등생으로 졸업하고 하바드 대학에서 “미래의 중국에 대한 논문”이 백악관까지 감동하고 졸업식에 미군 최고의 합참의장이 된 아버지의 아들 축하를 위해 사상 가장 많이 참석한 ‘별들의 잔치’였다.
이날 화이트 장군은 625전쟁 고아의 처지에서 이렇게 성장한 아들에 감격해서 껴안고 울면서 “하나님이 도와주신 은혜에 감사합니다, 내 아들 동건아 빛내주어 고맙다, 훌륭하게 교육시킨 하바드대학에 감사한다” 하며 펑펑울고 참석자 모두가 감격의 눈물바다를 이루었다.
<인류평화를 위해 월남 그린베레로 악전고투 구사일생으로 생존 >
하바드 논문으로 빛난 임종덕박사는 초청하는 곳이 많았지만 군에 지망하여 월남전 그린베레에 참전하고 월남전에서 부하 3명을 살리기 위해 자진해서 월맹군 포로가 되어 월맹군이 죽일여고 머리에 권총을 대고 쏘울 때 마다 하나님께 기도했드니 불발로 살아 난 것이 세 번 있엇고, 탈출을 위해 4초계획 (감시자 4명을 1초에 1명씩 처치하고 도망계획)을 기도하고 탈출 때 기총사격을 받았으나 상처받지 않고 , 정글에서 살기위해 뱀과 초근목피로 연명하며 죽을 고비를 수차례 격었으나(상세내용 첨부참조) 항상 성경을 암송하며 기도하므로 하나님이 그 때마다 기적적인 간섭으로 죽음을 모면하게 되었고 구사일생으로 살게 하였다.
< 백악관 초대 은성무공 훈장 받고 특진 후 대통령 안보비서관 됨>
존슨 대통령의 부름을 받고 처음으로 백악관에 가서 은성무공훈장을 받고 특진하였다, 존슨 대통령이 화이트장군에게 어떻게 이렇게 훌륭한 아들을 두었냐고 해서 “하나님이 함께하기기 때문이라”라고 하였다. 5년후 닉슨대통령의 부름을 받고 두 번째 백악관을 가서 대통령 안보비서관 임명을 받고 전 미 국무장관 키신저와 함께 외교활동을 했다
<세계평화를 위한 미국 중국 핑퐁 외교로 극비합의 성공 >
미국과 중국이 적성국가로 외교가 단절된 상태이고 당시 중국은 모택동의 문화혁명으로 외국의 어떤문화도 침투할 틈이 없었는데 오직 탁구경기만이 중국정부와 국민이 거부반응이 없어서 임종덕비서관은 미국 탁구선수단을 베이징 상하이 광저우등지로 순방하면서 탁구를 통한 양국의 스포츠 교류를 서서히 진행시켰다
임종덕비서관은 당시 중국총리 주은래를 여러번 만나면서 주은래가 동생처름 호의를 베풀면서 임종래라는 이름도 지어주고 모택동도 다섯 번 만났다
< 한국을 위해 박정희 대통령 만남과 결혼 >
1971년 미국과 중국이 극비리에 정상회담을 합의하고 키신저가 가는 길에 인접한 일본에도 알려야겠다고 할때 , 한국도 알여야 한다고 하자 한국은 당신이 가서 알리시오 해서 처음으로 박정희 대통령을 만났더니 그렇게 좋아하면서 일 하느라 장가 못간 노총각이니 중신은 내가 서겠다고 하며 육여사에게 당부하여 한국의 전통 가문인 민씨 가문의 규수를 소개하여 결혼하고 더욱 친밀 해 __다.
<미국과 중국 양국 정상 화해로 1등공신 노벨평화상 감 >
1971년 키신저의 중국 극비방문에서 합의 한 대로 1972년 2월 닉선대통령이 중국을 공식 방문하여 양국공식성명이 발표되었다 불과 2.5g 의 작은 탁구공이 미중외교를 성사시킨 1등공신으로 노벨평화상감으로 선정되어 세계를 흥분시켰다
<이민동포를 위한 LA 동양선교 교회 설립>
임종덕비서관은 LA출장 중에 한국에서 온 목사의 부흥회에 참석 했다가 설교한 목사님을 본 기억이 났다 20여년 전 1953년 15살 때 이승만 대통령과 아버지 화이트장군과 여의도 미군공군교회에서 예배를 드릴 때 한국공군군종감 임동선 목사의 설교를 듣고 감동받은 목사였다
그래서 임종덕비서관은 임동선목사에게 70년대에는 한국에서 이민을 많이 올텐데 와서 서로 위로 받을 이민교회를 세우자고 하여 1970년 동양교회를 창립하여 8000명의 교포가 모인 가장 큰 한인교회가 되었다. 1975년에 임종덕비서관을 장로추대를 했으나 자신이 장로될수 있는지 고민하고 장로학과 장로란 책 두권을 필독하고 부족하다고 사양햇다
< 키신저 국무장관승진과 아버지의 재산 기증 >
함께 일한 헨리 키신저가 국무장관이되어 미,중 외교에 전념하여 순조롭게 이루어 __는데 1974년 양아버지가 83세로 서거하고 화이트장군은 재산을 임종덕을 훌륭하게 교육시킨 하바드대학과 모교인 미 공군사관학교에 기증했다.
임종덕비서관은 닉슨, 포드, 카트,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안보비서관을 잘 수행했다.
중국과 친선경기로 시작한 핑퐁외교도 1979 양국간 국교가 수립되었다.
< 장군진급 포기하고 카트 대통령과 결별후 LA동양교회 장로가 됨>
카트대통령이 주한미군을 4,5년사이 완전 철수 하겠다고 할때 주한 미군사령부참모장 싱글러브소장이 철군반대를 주장했다. 이틀뒤 5월19일 카트대통령을 싱글러브장군을 소환하고 참모장 직에서 해임시킨후 카터대통령은 임종덕비서관에게 “당신의조국이란 입장을 떠나서 나의 철군계획과 한반도 정책에대해 말해보시요”하여 “ 현재 4만여 미군이 주한하여 북한이 도발 못하며, 한국은 경재부흥과 더불어 미국이 바라는 민주주의국가로 성장하고 있다”하였다.
또 카트가 국가안전보장 이사회에서 과거 월남전에서 도망한 도망병을 전부 사면하라는 지시에 아무도 말 안할 때 장군 진급심사를 두달 앞둔 임종덕은 싱글러브장군과 같이 불이익을 받을줄 알면서도 “전투중 자기만 살겠다고 도망친 자를 대통령이 사면하면 앞으로 전쟁터에서 누가 미국을 위해 생명바치겠냐”고 했다
임종덕은 대통령비서관이 걸림돌이 되어 결례가 되므로 자진해서 자리를 옮기겠다고 건의하여 백악관을 떠나면서 몇 번이고 뒤돌아보면서 발길은 교회로 향하고 텅빈 교회에 들어가서 모처름 하나님께 긴 시간의 감사기도를 드리고 1986년 육군대령을 예편하면서 LA동양교회 장로가 되었다
<풀브라이트 종군기자상으로 유명한 우물가의 소년이 임종덕 거지>
625 당시 밥을 얻어먹지 못하여 물배를 채우려고 종로구 내자동 우물가를 찾아가서 허기에 지처 힘없이 누어있던 임종덕 아이를 625타임즈 종군기자가 찍은 사진이 유명한 풀브라이트 종군기자상을 수상한 사진 ‘우물 가의 소년’이다.
< 세계를 감동시킨 The Deer Hunte (디어헌터)영화가 임종덕 대위 포로탈출기 >
임종덕의 포로수용소 탈출 기자회견을 계기로 그가 겪었던 수용소 생활과 특히 러시안 룰렛 즉, 권총 살인게임 등을 소재로 한 영화가 제작 되었다. 감독에 마이클 치미노 주연 배우에는 로버트 드니로를 비롯한 존케세일, 존세비지 등이 출연한1978년에 제작된 디어헌터는 우리나라는 물론 전세계 영화 펜들을 감동시켰다.
임종덕 소령은 당시 영화 제작사로부터 기막힌 소재를 제공한 대가로 당시 15만불을 받았고
또한 미국 육군사관학교는 임종덕의 수용소 탈출과 15일간의 정글 생활에서 살아나온 과정을『정글 탈출기』란 책으로 만들어 육군사관학교 정식 교과서로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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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세 내용 >
고아 임종덕 하우스보이가
/ 미 백악관 대통령 안보비서관, 장로 된 이야기
~ 하나님이 함께한 요셉 같은 기적의 인생 드라마 ~입니다
1949년 당시 12세의 임종덕은 중국 용정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부모님과 함께 귀국하여 서울중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1년뒤 북한의 6.25 남침으로 미쳐 피난을 가지 못하고 고아가 된다. 임종덕 소년이 고아가 되어버린 그날의 불행을 6.25전쟁 61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잘 알고 지내던 형님뻘 되는 청년이 임종덕에게 서울중학교 한쪽 교실에 불을 지르라고 했다. 당시 서울중학교는 인민군들이 주둔해 있었는데 이곳에 수감된 수십명의 청년들이 훈련을 받고 곧 북한 의용군으로 전쟁에 나가게 된 것이다.
바로 이 청년들을 탈출시키기 위해서 임종덕에게 불을 지르라는 지시를 한 것이다. 평소부터 의협심이 강했던 임종덕은 그 청년이 전해준 기름통을 들고가서 교실옆 목조 건물에다 불을 지르고 북아현동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도망을 갔다.
집에 도착한 임종덕은 집안에 있던 큰나무에 올라가 나무속에 숨었다. 잠시후 인민군 찌프차가 집앞에 도착 인민군 요원들이 대문을 박차고 들어와 마침 마당에 있던 어린 여동생의 머리에 총검을 데고 부모님을 찾았다. 어린 여동생은 겁에 질려 와들와들 떨더니 지하 창고에 부모님이 있다고 말을 해 버렸다.
잠시후 부모님이 양손을 뒤로 묶인채 마당에 섰다. 인민군은 당신네들은 반동문자이기 때문에 인민 재판에 의해 처형하겠다고 했다. 임종덕을 학교 방화범으로 체포하러 온 것은 아니었다. 형식적인 재판이 끝나자 총 소리와 함께 부모님은 쓰러졌다. 아버지 임성규는 독립운동가였고 어머니는 당시 숙명여고 교사였다.
인민군들은 미리 준비해온 장작 위에 시체를 얹어 놓고 기름을 부어 불을 질렀다. 이 무서운 만행을 나무 위에서 직접 목격했던 임종덕은 그 길로 서울을 탈출 피난민 대열에 끼어 정처없이 걷다가 다시 9.28 수복때 미군을 만났다.한 미군 대위는 임종덕을 친동생처럼 보살펴 주면서 데리고 다녔다. 그러나 원산과 흥남까지 임종덕을 데기고 간 그 미군 대위가 전사하면서부터 임종덕은 외로운 고아로 거지생활을 시작했다.
주로 서울역 앞에서 거지생활을 하던 임종덕 소년은 고아들을 데리고 당시 불광동에 있는 희망원으로 들어갔다. 그때 그의 나이는 열다섯살이었다.
자신보다 어린 고아들을 동생처럼 보살폈다. 그러나 어느날 고아원 원장의 놀랄만한 부정행위를 목격한 임종덕은 몽둥이를 들고 원장실로 쳐들어가 사무실을 박살냈다. 원장은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산으로 도망쳤다. 임종덕도 주위 형들이 너도 빨리 도망가라고 권유해서 고아원을 나와 서울역을 향해 달렸다.
그런데 뒤를 돌아보니 동생뻘 되는 아이들이 “형, 오빠”하면서 29명이 따라오고 있었다. 임종덕은 깜짝 놀라 돌맹이를 던지면서 따라오지 말고 고아원으로 다시 들어가라고 소리를 질렀다. “내 혼자도 얻어 먹기 힘든데 너희들을 어떻게 먹이고 또 잠은 어디서 잔단 말이냐”하면서 계속 돌맹이를 던지면서 저지했으나, 어린 소년, 소녀들은 함께 손을 잡고 울며불며 임종덕을 따랐다.
저녁때가 되어 서울역에 도착한 임종덕은 염천교 다리 밑에 임시 거처를 정하고 모두가 밥을 얻으러 나갔다. 두시간 후에 이들이 얻어온 각종 음식을 다 모아서 비빕밥을 만들어 골고루 배식을 했다.
그러나 정작 임종덕은 자신이 먹을 음식이 없었다.
그러나 다행히 잠잘 곳을 찾아서 임종덕은 행복했다. 즉 큰 방공호로 만들어 놓은 장소를 깨끗이 청소를 하고 나니 그곳에 많은 아이들이 들어갈 수 있었다. 나이별로 남·녀 구분과 엄격한 규칙을 정했다. 임종덕은 어느날 염천교 밑에서 당시 거지왕자로 소문난 김춘삼을 만나서 거지로써 살아가는데 지켜야할 중요한 규칙 몇가지를 교육받았다.
1) 밥을 얻으러 갈 때 대문을 두드리지 말고 깡통 소리를 내라.
2) 밥을 얻을 때는 꼭 깡통이나 그릇을 준비해 가라.
3) 하루에 같은 집에 두번 가지마라.
4) 땅에 떨어진 음식은 절대 먹지 말아라.
한편 날이갈수록 고아들이 계속 모여들어 129명이 되었다.
* 129명 고아들을 살리기 위해 임종덕은 소매치기와 절도범으로 변했다.
129명의 아이들이 제대로 못먹고 질병으로 그동안 24명이 죽었다. 어떤 날은 8명이 한꺼번에 죽는 날도 있었다. 약 사먹을 돈이 없기 때문에 심한 감기만 걸려도 고열로 쓰러져 죽어갔다. 그래서 임종덕은 중대한 결심을 했다. 그것은 바로 소매치기와 도둑질을 해서라도 약값을 모으기로 했다. 그 해가 1952년이었다. 매일매일 소매치기로 번 돈으로 당장 아이들에게 옷도 사 입히고 그리고 약값에 충당했다. 임종덕은 서서히 간이 커지면서 소매치기에서 부잣집들의 담을 넘기 시작했다. 주로 서울 장충동이 활동 무대가 되었고, 특히 제니스 라듸오를 훔치는 날은 아이들에게 특식으로 꽈배기 빵을 한 보따리씩 사가지고 왔다. 어느날 임종덕 소년에게 그의 인생의 운명을 바꾸는 날이 왔다.
서울역 대합실에서 좀 고급스러운 손님을 찾기 위해 대기하고 임종덕은 미국 공군 장성이 탄 승용차 한 대가 미군 전용 주차장에 도착하는 것을 목격했다.
미군 헌병들의 호위를 받으며 차에서 내린 장군은 환송차 대기 중이던 사람들과 악수를 나누며 잠시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바로 이때 임종덕은 승용차 뒤의 트렁크가 약간 열린 것을 발견하고 그안에 있는 가방 하나를 훔쳐 비호처럼 도망갔다. 그러나 그는 멀리 못가고 미군 헌병들에게 붙잡혔다.
임종덕은 과거 미군부대에 조금 있을 때 배운 서투른 영어로 자신이 절도를 하지 않으면 자신이 데리고 있는 고아들이 굶어 죽는다고 말했다.
근처에서 임종덕을 유심히 보고 있던 장군은 곧 절도죄로 파출소로 연행할려는 헌병들에게 임종덕을 조선호텔 즉 장군의 숙소로 보내 하우스보이로 일하게 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임종덕은 이 절호의 기회, 이 좋은 직업을 사양했다.
이유는 내가 없으면 100여명의 고아들이 당장 굶어죽는다고 했다. 장군은 헌병들에게 100여명 고아들의 생활 현장을 확인하고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 고아들 전원을 미국 공군이 운영하던 제주도 고아원으로 입소시키고 그리고 임종덕은 자신의 하우스 보이로 일하겠금 명령했다.
그가 바로 미국 5공군 사령관 스티브 도마스 화이트 중장이었다. 당시 사령부는 일본에 있지만 작전 지시 관계로 서울 조선호텔에 상주하고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전투비행기 조종사인 그의 외아들이 전투비행중 전사했다. 한편 화이트 장군은 임종덕을 데리고 약 1년동안 유심히 관찰한 후 어느날 임종덕에게 “너는 오늘부터 내아들이 되었다”며 양자로 입적을 시키겠다고 했다. 모처럼 장군의 가슴에 푹 안긴 임종덕은 탱큐를 연발하며 엉엉 울었다. 임종덕은 다시 서울중학교 3학년에 복학하여 중단되었던 학업을 계속했다.
어느날 임종덕은 사령관을 따라 수원의 미공군 기지를 찾았다. 그는 이곳에서 좋은 친구를 만났다.
즉 같은 하우스 보이로 이곳 공군기지 막사에서 일을 하는 김장환이란 소년을 만났다. (후일 수원중앙교회 원로목사) 김장환 소년은 임종덕을 아주 경계하는 눈초리로 보면서 “너는 도대체 누구냐 너는 무엇 때문에 여기왔느냐”며 매우 못 마땅한 표정으로 임종덕의 어깨를 툭툭쳤다. 그 이유는 자신이 일하는 이곳의 하우스보이 자리를 임종덕이 차지할려고 온 것으로 오해를 한 것이다. 그러나 잠시후 오해가 풀린 김장환은 임종덕에게 “너는 어떻게 장군의 하우스 보이가 되었느냐, 누구 빽이냐”며 너무나 궁금하다면서 계속 캐 물었다.
임종덕은 하는 수 없이 자신의 살아온 과거와 특히 장군과의 인연이 된 사건까지 다 말해 주었다.
임종덕의 말을 다 듣고난 김장환은 임종덕의 손목을 꼭 잡고 앞으로 좋은 친구가 되자며 격려를 해주었다. 그리고 자신도 하우스 보이가 된 사연을 간단하게 말했다.
즉 김장환이 동네 아이들과 지게를 지고 산에 나무를 하러 가는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