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이름 찾아 떠나는 여행 42>
부산(釜山)
2006년 1월, 부산 신항이 개장될 때 각 언론에서 ‘1876년 개항한 부산항이 130년 만에 제2의 개항을 하는 역사적인 순간’이라는 말로 개장의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문제 제기도 있었습니다.(부산대 김성진 교수) 조선 초기에 이미 실질적인 개항이 이뤄졌기 때문입니다. 부산포는 태종 7년(1407)에 웅천의 내이포와 함께 개항되었습니다. 이후 울산 염포도 개항하니 이것이 이른바 삼포개항입니다. 예전에는 항구에 ‘浦’라는 말을 붙였는데, 이 ‘浦’는 대개 강과 바다가 만나는 지점에 위치했습니다. 강물이 넓어지는 포구는 배를 정박하기도 좋고 사람이나 물건을 싣고 바다나 내륙으로 이동하기에도 편했기 때문입니다.
부산의 원래 지명은 부산포(富山浦)였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솥’을 의미하는 ‘富’자가 ‘가마’를 뜻하는 ‘釜’로 바뀌어 ‘釜山’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동국여지승람>에 ‘부산은 동평현에 있으며 가마를 닮은 형국이다. 그 아래에 부산포가 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부산은 본래 산의 이름입니다. 동구 좌천동에 있는 증산(甑山)이 옛 부산으로, 임진왜란 전부터 부산진성이 구축되어 있던 곳입니다. 부산포(富山浦)는 그 산 아래 있었던 포구였습니다. 고려 공민왕이 1368년 사신 이하생을 대마도로 보낼 때 백미 1천석을 부산포(富山浦)에서 보냈다는 옛 문헌의 기록이 있습니다.
1471년 신숙주의 ‘해동제국기’, ‘동래부산포지도’에 나오는 기록을 보면 ‘부산은 동래에서 25리 떨어져 있고 왜인들이 사는 집도 67가구나 있고 남녀 323명이 살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때의 기록에도 富山浦였습니다. 釜山浦라는 이름이 처음 나타나는 기록은 성종 즉위(1469년) 한 달 뒤인 12월 조선왕조실록의 ’釜山浦僉節制使 秋毫不犯 倭人咸服之‘라는 구절입니다. 연대를 살펴보면 富山浦와 釜山浦가 잠시 혼용된 시기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려 태조에 역명(逆命)했던 자를 천역에 종사케 했던 곳을 부곡(部曲)이라 했다는 설이 있는데, 富山部曲에 있던 포구라 하여 富山浦라 하다가 富山部曲이 이미 없어졌고, 釜山이라는 산 아래 있으니 釜山浦로 써야 한다는 실록 편찬자의 견해에 말미암아 개명된 것이라 추정하는 주장도 있습니다.(‘부산사 탐구’의 저자 최해군)
‘동국여지승람’ 산천 조항에 ‘산이 가마(釜)와 같아서 그리 이름 했다. 그 아래가 곧 釜山浦다.’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동래부산포지도’나 ‘釜山’이라는 산의 설명으로 보면 부산포는 오늘날의 동구 좌천동과 범일동의 바닷가가 되고, 釜山이란 산은 좌천동의 배산이 되는 증산(甑山)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임진왜란 때 이 부산이라는 산에 왜군이 성을 쌓았는데, 그 성이 무너지고 보니 꼭 시루와 같았습니다. 그래서 부산이라는 산 이름 대신 증산으로 부르게 된 것입니다. 이곳 증산에서 바다를 바라볼 때 자성대가 마치 솥뚜껑을 엎어 놓아둔 것 같다고 해서 ‘가마 부’자를 썼다고 하는 설도 있으나 신빙성이 없는 주장입니다.
또, 임진왜란 때 부산·경남 지역 도공들이 일본에 붙잡혀 갔는데, 가마터에서 붙잡혀 왔다고 해서 포로인 도공들의 택호를 ‘부산댁’으로 불렀고, 도공 1세들이 죽은 후에는 선조의 택호를 따서 신사와 사당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나가사키 시 사세보란 지역에 가면 ‘부산신사(釜山神社)’가 있는데, 그 유래를 보면 부산포에서 온 도공 고려할머니가 도공 기술이 뛰어나 ‘부산할머니’라 불리며 존경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 후손들은 ‘부산은 가마터가 많아 일본에 온 분들이 지은 이름’이라 주장합니다. 그러나 부산은 임진왜란 이전에 이미 사용했던 지명이기에 이 역시 잘못된 주장입니다.
<정공단(鄭公壇)>
1592년 임진왜란 당시 부산진성을 지키며 군민과 함께 적장 고니시의 1군과 싸우다 성과 운명을 같이한 부산첨사 정발(鄭撥)과 그를 따라 순절한 군민들의 충절을 기리는 제단이다. 현재 설치되어 있는 곳이 부산진성의 남문 자리였다. 부산진성은 임란 때 최초의 전투가 벌어진 곳이다. 단의 중앙에는 ‘정공단(鄭公壇)’이라고 새긴 비를 세우고, 서쪽에는 정발의 막료였던 이정헌(李庭憲), 동쪽에는 정발의 첩인 애향(愛香), 남쪽에는 군민들을 모셨으며, 남쪽 층계 밑에는 충직한 노복이었던 용월(龍月)의 단이 마련되어 있다. 1766년 부산첨사 이광국이 이들이 순절한 장소인 부산진성의 옛터에 이 제단을 만들었다
<좌천동굴>
지하철 1호선 좌천역에서 내려 일신기독병원으로 가는 골목으로 접어들면 정공단이 있다. 이 남문 자리를 50m 정도 가면 동굴술집이 있다. 예전에는 ‘구 동굴집’과 ‘원조 동굴집’ 두 곳이 있었다. 이곳 좌천동굴에는 2009년 도로개설사업으로 동굴이 폐쇄되기 전까지 영업을 했던 이색 주점 ‘동굴집’의 추억을 되살리기 위한 ‘전통술(막걸리)’이 좌천동 주민협의회 등 공동체의 노력으로 조성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방공호로 개발된 것으로 추정되는 좌천동굴은 한국전쟁 때는 피란민들이 동굴에서 살기도 했으며 이후에는 민방위교육장으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일제 강점기의 방공호는 태평양 전쟁(1941-1945) 당시 미군의 공습과 상륙에 대비하여 한국인을 강제로 동원해 구축한 인공 동굴로서, 일제로부터의 억압을 보여 주는 또 다른 흔적이다. 좌천동 일대에 해당 방공호가 조성된 것은, 좌천동이 일본의 군대 물자가 수송되던 부산진역과 지리적으로 인접한 곳이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