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言靈 제16집 ]
구상문학관동인시집 / 동아출판사(2011.11.18) 값 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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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두시
새봄의 조화
구 상
엊그제도 함박눈이 오셨는데
오늘은 해사하고 따스한 날씨,
산책을 나서다 무심히 바라보니
아파트 잔디밭 양지 바른 곳마다
파릇파릇 새 풀들이 소복하다.
나는 놀라움과 반가움에 멈칫 서서
다가올 자연의 향연을 떠올리다가
뿌리 썩은 고목古木 같은 자신이 서글퍼진다.
이제 이내 몸은 소생은커녕
하루하루가 버티기가 고작이지만
나도 머지않아 이승이 끝나는 대로
바로 다름아닌 저 신령한 조화造化로서
저승의 새 삶을 우리겠거니 여기니
다시 새봄이 흥그러워진다.
지도교수
꿈꾸는 화병.1
김주완
꽃이란 꽃은 모두
가장 싱싱하고 화려할 때 여기로 온다
더러 덜 핀 봉오리도 우수로 따라와서
생애 가장 찬란한 한 시절을 여기서 보낸다
그러나 마침내
허줄그레 시들기 시작하면 이곳을 떠나야 한다
늙은 미스 유니버스처럼 영광의 기억을 쓸쓸히 안고
마른 노구는 어디론가 끌려가 버려져야 한다
덜 자란 꽃술머리 보듬고 풋내 뿌리며 어쩌다
마른 나무 같은 내게로 와서
송이송이 꽃 피우고 열매 맺은 아내,
나이 자꾸 들어도 마음만은 여전히 신록인 그녀
이제 마른 꽃잎처럼 늙어간다면
나도 낡고 깨진 화병으로 부서져
그녀 따라 함께 가겠네, 그림자처럼 따라 가겠네
계절 끝난 낙엽처럼 혼자는 보내지 않을 것이네
회원시
갈대
권정숙
한 길이 넘는 키에
은실 머리 나부끼며
하얀 달빛 아래
길을 내던 그대,
젖은 발아래
한겨울이 가혹하게 시리지만
작은 바람에 흔들려도
더 센 바람에는 쓰러진 몸
또 일으켜
우우우
울음으로 길을 내는 그대.
회원시
솔바람소리
김명희
하늘을 들어 올리던
소나무 가지가 회오리바람에 흔들린다
천둥과 장대비가 먹장구름을 몰고 온다
오랜 세월 풋풋한 솔향을 내던 속리산 정이품 소나무
비수 같은 번개가 내려쳐 가지들이 뚝뚝 분질러졌다
송진이 밤사이 소리 죽여 찾아들어
상처난 자국에 볼을 비벼대며
보듬고 안으며 치료해 주자
그 정성에 오롯이 깨어나 나이테를 늘려 간다
상처난 가지는 칼바람의 아우성에 보대끼어도
앓은 기억은 묻어 두고 샤위어 간다
맨몸뚱이에 깊은 상처가 있어도 아랑곳 가슴하지 않듯이
둥지에 옹이가 박혀도 옹그린 가슴을 열어 두리라
낮은 가지 사이로 솔바람 소리가 자분자분 어루만지며 달래준다
회원시
눈총
김선자
하얀 눈이 질척질척
천덕구러기로 변한 날
뒤쳐진 겨울 낙엽 같은 사내가
오물을 뒤집어쓴 듯한
욕설을 내뱉으며
거리를 휩쓸고 다닌다
동네 아낙들의 따발총 속에서도
환삼넝굴 같았다
넝쿨넝쿨 뻗는가 했더니
어느새 주변으로 영역을 넓혀
슬쩍 스치기라도 하면
따가운 생채기를 내는 놈이었다
“무슨 생명이 저렇게 질기기도 하냐”
동네 할머니의 말도
덩굴 속으로 삼켜버리고
질척거리며 간다
회원시
대못
김인숙
아버지의 가슴은 널찍한 벽이었습니다
그 넓은 벽에다
대못 하나 박아두고
매번 다른 그림을 걸었지요
마음 내키는 대로
아무 거리낌 없이
입이 없는 벽은
아프단 말, 무겁단 말을
한마디도
하지를 않았습니다
내가 좋으면
벽도 좋은 줄만 알았습니다
철부지 시절만이 아니라
벽이 허물어질 때까지 그렇게 보냈습니다
허물어진
벽에는 더 이상 그림을 걸 수가 없었습니다
못은 삭아서 사라졌지요
사라진 그 못, 뒤늦게
내 가슴에 와서 박히면서 알았습니다
대못 박힌 벽이 얼마나 아픈지를
내가 박은 못이 내게 와서 다시 박히는 것을
참 많이 늦게야 알았습니다
못 박히지 않는 벽은 벽이 아니겠지요
회원시
개망초
김정숙
여기 가벼운 무늬가 있다
먼 하늘 새털구름에서
포르르 떨어져 내린 흰 깃털 가장자리
송화가루 묻히며
모닥모닥 핀 흰 마음들에서
뻗어 내린 푸른 대궁들이 있다
옥양목 바탕의 흰 메밀꽃이나
눈밭 위에 버려진 안개꽃이나
가벼운 서러움
누가 그리겠는가
그러나 이 무늬는
후끈거리는 유월의 풀밭을 압도한다
웃자란 푸른 대궁에서
가만가만 풀어 놓는 말들의 향이 좋다
젖은 빨래 마를 때
더 날아가지 않은 비누냄새처럼
은근한 낯빛
한 덩이로 가는 시간이
여기 풀밭에 흰 무늬로 남아 있다
회원시
꼬리
이경이
수평선에서 겉과 속을
수도 없이 뒤집고 섞으며
이어진 물결 행렬이 밀려나온다
폭 넓은 푸른 파도 겉치마로 몽돌을 덮고
손톱 세운 하얀 손은 조개껍질마저 끌어
바다 속 깊이 가져간다
또, 남은 아쉬움인가
금방 풀어져
감춰둔 속 내보이듯 치맛자락으로
갯바위를 치고 친다
그래도 벼랑 끝을 딛고,
꼬리 치는 파도를 바라보는 미끈한 해송
송진의 눈물은 마르질 않는다
회원시
江의 소리
이성원
1.
6월의 새벽이 흐르는 강가로 갔습니다
두 동강 난 호국의 다리 쇠창살에 걸려 있는 원혼들
붉은 아가미로 호흡하는 각시와 한바탕 춤을 춥니다
강물 때문에 놓은 다리, 당신 때문에 폭파되고 무너질 줄이야
이 강이 없었다면 왜관도 없었고 나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한 방울의 물이 세계를 움직일 줄 몰랐습니다
이제 당신을 물로 보지 않겠습니다
2.
물은 물이고 강은 강입니다
흐르는 물은 물이 아니라 강이고 바다입니다
시냇물은 졸졸 강으로 흘러들어 어느새 당신에게 안깁니다
바다는 파도치며 당신을 어서 오라 손짓합니다
그러나 강물은 아무 소리없이 아래로 흘러만 갑니다
엉엉 울어도 말없이 내리는 나의 눈물인가 봅니다
3.
어제도 물이고 오늘도 물이고 내일도 흐르는 물인데
강가에 핀 달맞이꽃은 태초의 물을 기다립니다
강은 과거 현재 미래가 흐르는 대자연이고 피안(彼岸)인데
우리는 왜 목숨 걸고 이 강을 건너려고 합니까
회원시
여치 소리
이연주
밤이 깊어가고 있다
뒤뜰에 여치의 찌릿대는 울음소리 귓가에 울린다
남자는
가슴 깊이 파고드는 여치의 울음소리
마른 갈바람에 몸을 떨고 있다
그믐달 바라보며
가을 여치 소리 멀어져 가는
허공에 한숨을 흘린다
회원시
간이역의 소금 옹기
최은영
어른거리는 유월,
평행선에서 비켜선 간이역
삶의 속도를 쫓는 사람들 속에
옹기 하나 내려놓는다
철없던 재 너머의 도투락댕기는
성글거리는 앳된 티를 벗고
소금 단지 장수가 되었다
제법 어른티가 난다 했더니
자글자글한 주름사이로
굴곡진 여인네 설움
마디마디 서려 있다
어느새 구겨진 바짓가랑이
툭툭 털어보아도
거친 손바닥을 바람만 스친다
회원시
손맛
최인희
손가락 사이로 흘러나오는 줄기에 눈이 부신다
검은 손맛에 감겨 철가방이 달린다
멍석말이 홍두깨가 떡메를 친다
도마 위를 미끄러지는 정갈한 손맛이
곤두박질하는 멸치, 파도 속을 흘러든다
붓끝의 먹물이 발묵으로 번지고
턱선에 매달린 가락도 한 몫을 더한다
장인이 주물러 내는 손맛이
입 속에서 감긴다
회원시
연밭에서
최지숭
연꽃을 아주 좋아하는 왕이
여러 대신들과
왕비 후궁들을 대동하고
연밭에서 연꽃을 감상하고 있었다
갑자기 왕이 소리쳤다
“짐이 십팔 년 동안 오만연을 다 봤지만 저런 쌍연은 처음 본다”
그날 그 쌍연雙蓮은 정일품연正一品蓮이 되었고
쌍연을 키운 연못은 종구품연從九品蓮못이 되었다
그날은 아무도 웃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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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言靈』 제 6집을 내면서……
유난히도 비가 많았던 여름을 보내고
청명한 가을 하늘이 펼쳐졋습니다.
구상선생님의 시 정신을 이어가고자
쉼 없이 공부하는 언령은
올해도 부족하나마 정성스럽게 작품을 빚었습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순간순간을 열심히 살았지만
지나고 나면 후회와 미련이 남습니다.
많이 부족한 것을 압니다.
그래도 예쁘게 보아 주시길 감히 바라며,
이 한 권으로 잠시 마음의 여유와 기쁨을 누리시길 빕니다.
2011년 11월
구상문학관 시동인 언령 회장 김 인 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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