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詩》가 선정한 좋은 시·43 / 이대의 추천
최명길 :「 물까마귀의 겨울살이」(계간《시와 세계》2010 가을호)
김사인 :「 조용한 일」(창비시선,『 가만히 좋아하는』중에서)
박해림 :「 한쪽」(계간《시에》2010년 가을호)
고성만 :「 11월, 애인에게」(월간《우리詩》2010년 10월호)
이용헌 :「 벼랑 위의 낮달」(계간《리토피아》2010년 가을호)
방인자 :「 기억에서 어부바를 찾아내다」(계간《시에》2010년 가을호)
사단법인『우리詩진흥회』가 ‘좋은 시 읽기운동’의 일환으로 매월 본지에 좋은 시를 선정 소개한다.
시와 독자와의 거리를 좁히는 이 운동에 독자 여러분들의 뜨거운 관심을 부탁드린다. <편집자 주>
물까마귀의 겨울살이 | 최명길
벼락바위를 휘돌아드는 물길은 급하다.
물까마귀가 올해에도 그곳에서 겨울을 난다.
아주 급한 물살,
얼음조차 겁이나 비켜서는 물길 속에서
살기 위해 곤두 박혀 몸부림치는 물새여
물은 토왕성 낭떠러지를 뛰어내려서인지
겨울이면 더 새파래진다.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새파래져서 엄동 동장군조차 맥을 못 쓰게 한다.
그렇지, 그건 쩍 벌어지려다 입을 다문
이 바위 때문일 거야
하늘이 심심해 잠시 기웃거려 본 곳
갈라진 틈서리에 손을 세워 넣었다 얼른 뺀다.
손끝으로 아직 뜨거운 불기운이 스친다.
지상의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해 낼 수 없는
단 한 번의 불힘이 바위를 내리쳤겠지
이름 별나 설악산 이정표로 삼기도 하지만
그 아래로는 물이 홀연히 꺾이면서 만들어놓은
맑고 가물한 道川潭
물까마귀들의 식사거리가 파들대는 물 안
나는 돌난간을 붙들었다 얼른 놓고
까만 날갯짓에 놀치는 깊이를 헤아린다.
- 계간《시와 세계》(2010 가을호) 중에서
시읽기
물까마귀는 벼랑 밑이나 암벽, 다리 밑의 이끼에 둥지를 틀고 산다. 따스하고
안락한 자리를 두고 척박한 곳에 둥지를 튼 것은 아마도 더 이상 밀릴 곳이 없
어 그곳에 자리 잡았을 것이다. 또한 가까운 곳에서 먹이를 찾기 위한 방안이
기도 했을 것이다. 휘몰아치는 물살에 얼음조차 얼지 못하는 곳에서 먹이를 구
하며 살아가고 있는 물까마귀의 집은 어떤 곳일까?
‘하늘이 심심해서 잠시 기웃거려 본 곳’이란 생각에 손을 넣어 확인해 보려
한다. 집을 지키려고 필사적으로 대응하는 물까마귀의 몸부림은 불기운이다.
하여 돌난간을 얼른 놓고‘까만 날갯짓에 놀치는 깊이를 헤아린다.’
이토록 절박한 삶이 어디 물까마귀뿐이겠는가? 생존을 위한 몸부림은 서민
들도 마찬가지다. 불안정한 삶 속에서 겨울을 보내야 하는 우리 삶의 깊이를 헤
아려 보게 된다.
조용한 일 | 김사인
이도 저도 마땅치 않는 저녁
철 이른 낙엽하나 슬며시 곁에 내린다.
그냥 있어볼 길밖에 없는 내 곁에
저도 말없이 그냥 있는다.
고맙다.
실은 이런 것이 고마운 일이다.
- 창비시선,『 가만히 좋아하는』중에서
시읽기
요즘 세상은 너무 시끄럽다.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소통의 부재에서 파생
되는 문제들로 온통 자기주장만을 내세우느라 목소리만 커지고 있다. 이러한
환경에 적응해서 생활하기란 마뜩치 않다. 계획했던 일도 잘 안 풀리고 ‘이도 저
도 마땅치 않은 저녁’에 낙엽 하나가 곁에 내려와 말없이 그냥 있어주는 조용한
일들이 그냥 고맙다. '실은 이런 것이 고마운 일이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한가.
그렇다. 고달픈 삶속에서 일이 풀리지 않아 어찌 해 볼 도리가 없을 때, 내게
와서 그냥 조용히 있어 줄 사람이 그리울 때가 있다. 낙엽 하나가 내 곁에 와서
위안을 주듯 조용하게 와서 곁에 있어 주는 사람이 정말 고마운 것이다.
한쪽 | 박해림
화분의 잎과 가지들이 한쪽으로 휘어져 있다
물을 휘저어 몸을 일으켰지만
몇 번 풀썩이다 그대로 주저앉는다
무엇이 이들을 동시에 불러 모았을까
뚫어져라 한곳을 응시하고 있다
거수경례를 올려붙이는 군인처럼
압구정동 쇼윈도의 마네킹, 그 도톰한 입술처럼
늦도록 가장을 기다리는 백열등 뒤편의 중년 아내
붉은 벽돌 담장 밑 반쯤 몸을 밀어올린 채송화
철거 직전의 세운상가 계단 중간 쯤
움푹 패인 시간의 발밑,
그 기울어진 천막지붕도
뜨거운 햇볕 아래 한쪽으로 휘어 있다
한쪽으로 휘었다는 건 끝까지 한마음이라는 것
벌어질 틈조차 휘어버렸다는 것
그 출렁이는 땅 위
절실한 것은 모두 한쪽으로 휘어 있다는 것
나를, 식물에게서 읽는다
-계간《시에》(2010년 가을) 중에서
시읽기
식물은 환경에 따라 잎과 가지가 한쪽으로 휘어져 자란다. 화분의 식물 줄기
들은 햇빛을 향해 휘어지고 바닷가 나무들은 바람 불어오는 반대 방향으로 휘
어져자란다. 한쪽으로 휘어져 있는 것은 식물뿐이 아니다.‘ 군인의 거수경례’,
‘쇼인도우 마네킹’, ‘중년의 아내’, ‘담장 밑의 채송화’등도 휘어져 자라고
‘철거 직전의 세운상가 계단 중간쯤 움푹 패인 시간의 발밑’ 등과 같이 모든 것
은 한쪽으로 휘어져 있다.
모든 식물과 우리의 삶을 지탱하는 것들은 왜 모두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을
까? 그것은 ‘끝까지 한 마음이라는 것’ 그리고 ‘절실한 것은 모두 한쪽으로 휘
어져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삶도 생각해보니 한쪽으로 휘어져 살고 있다.
11월, 애인에게 | 고성만
11월은 쓸쓸한 달, 흰 항아리 같은 달이 뜨고 잎 진 나무들 사이 배고픈
유령들이 우는 밤
잠은 오지 않고 보고 또 보고 싶어지는 애인아
눈부시게 휘날리는 머리칼로 만나자 훨훨 벗어버릴수록 단단한 피부로
북서쪽에서 확장하는 저기압 가장자리에 들어
“왜 이리 춥지?” 속삭이면서 어깨 위에 얹은 손을 내려 두툼한 스웨터
안으로 집어넣으려하면 모르는 척 슬쩍 빠져나가는 애인아
볶은 원투커피 혹은 흑설탕에 재어놓은 과실처럼
저절로 향긋해지는 시간
걱정하지 말자 나날이 실업자 수가 늘어나고 지구 온난화가 진행되고
연인들은 헤어지리니 텅 빈 이 세상, 네가 없어도 나는
빨간 스토브 켜진 카페에서 일찍 저문 거리의 불빛처럼 설렌다
- 월간《우리詩》(2010년 10월호) 중에서
시읽기
11월의 이미지는 참 매력적이다. 가을이 끝나는 달이기도 하고 겨울이 시작
되는 달이기도 하여 이미지가 슬프도록 아름답다. 우리 마음 속에 내재되어 있는
아련한 추억과 기억들이 새삼 떠오르고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진다. 쓸쓸하고
우울한 계절, 회색빛 감정 속에도 한때 열병을 앓으며 사랑을 나누었던 애인과의
추억은 더 아프게 생각난다.‘ 잠은 오지 않고 보고 또 보고 싶어’ 진다.
11월은 ‘볶은 원두커피 혹은 흑설탕에 지어 놓은 과실처럼 저절로 향긋해지는
시간’이다. 그러기에 이 계절은 더욱 아프고 그리우나 그 기억만으로 설렘이
있다.
11월은 우리에게 아련한 추억을 꺼내게 만든다. 덜 익고 떪은, 그래서 순수해
보이는 기억이 스며드는 계절이다. 이 계절에 이 한 편의 시가 또다른 애인을
생각하게 한다.
벼랑 위의 낮달 | 이용헌
제비가 집을 짓는다
변산반도 민박집 처마 아래
제비가 집을 짓는다
‘서해민박’이라 쓰인 견고딕체 간판 위에
제비가 집을 짓는다
‘서’ 자도 아니고 ‘해’ 자도 아닌
‘민’ 자 건너 머무를 ‘박泊’ 자 위에
제비가 곰비임비 방점을 찍는다
초여름의 땡볕이 등줄기에 쏟아지는 오후
갯바람도 개 혓바닥처럼 헉헉대는 산기슭
제비는 제 침을 퉤퉤 뱉어 뭉친 흙으로
잠시 머물 토담집을 짓는다
난생처음 지어보는 집
한철 쓰면 비워줘야 할 벼랑 위의 집
한 번 떠난 여자는 다시 돌아오지 않고
간밤 파도와 깡소주 퍼대다 일어난 민박집
제비가 온종일 낮달을 찍어 나른다
허공에서 완성되어가는 저 반달 같은 집 한 채
아니, 반쪽짜리 내 방 한 칸
-계간《리토피아》(2010년 가을호) 중에서
시읽기
여기서 제비는 민박집 처마도 아닌, 벽에 박힌 간판 위에 둥지를 튼다. 마치
문자를 아는 것처럼 하필 ‘박泊’ 자 위에 터를 잡았다. 잘 알다시피 ‘박’ 자는 잠
시 머문다는 뜻이 담긴 한자이다. 이 제비집을 보고 화자는 자신의 집 짓기와
같다는 생각에 잠긴다. 말 못할 가슴앓이를 하고 있는 화자는 ‘간밤 파도와 깡
소주를 퍼대다’ 잠들어 느지막이 일어나 그 제비집을 보고 눈물겨워한다. 먼 바
다를 건너 날아온 제비가 이 세상에 잠시 머물기 위해 지은 거처가 간판의 벼랑
이다. 제비는 지푸라기나 진흙에 자신의 타액을 섞어 벼랑에서 떨어지지 않도
록 집을 짓는다‘. 허공에서 완성되어가는 저 반달 같은 집 한채 아니, 반쪽짜리
내 방 한 칸’의 집을 짓는다.
제비가 집을 짓는 단순한 행위는 자아와 대상 간의 동일화된 내면이다. 우리
의 생이 멀리서 왔다가 잠시 머문 뒤 다시 먼 곳으로 떠나는 것이 이치겠지만 그
여정은 녹록치 않다. 벼랑 같은 삶의 터전에 집을 짓는 고단한 노동 같이.
기억에서 어부바를 찾아내다 | 방인자
낡은 지게 하나
오르막길에 누가 받쳐 놓고 갔다
긁히고 벗겨진 지겟가지
어긋나 있는 걸 보니
담배라도 하나 권하고 싶어진다
사는 일 다 그렇다고 되새겨 보아도
가난의 짐 쉽게 부려놓을 수 없는 마음을
늘 여린 작대기가 받치고 있었다
닳아진 어깨끈에 땀방울 밸 때마다
질긴 인내의 걸음이 무겁게 찍히고
침묵으로 들여 마신 가쁜 숨 뒤에는 어린 꿈들이
가냘픈 다리에 힘을 올렸을지도 모른다
내리막길 바라보는 빈 지게의
헐거운 등태를 햇살이 토닥이고
어린 것들의 가슴에 어부바의 기억이 따뜻해질 때
무겁지도 않은 짐을 힘겹게 지고 일어서던
작은 어깨가 작대기도 없이 오르막길에
막 접어들고 있었다
-계간《시에》(2010년 가을) 중에서
시읽기
지게는 애초에 농가의 운반 기구였다. 짐을 얹어 사람의 등에 지고 가는 원시
적인 도구였다. 요즘은 손수레나 경운기 등과 같은 운반 기구들이 많이 나와 지
게가 점차 사라지고 있으나 아직도 변두리 사각지대에는 이런 지게가 운반 기
구로 요긴하게 사용하고 있다. 그런 지게가 오르막길에 세워져 있는 것을 보면
한번쯤 유년의 우리 아버지를 생각할 것이다. 그러기에 담배를 권하고 싶어질
것이다. ‘가난의 짐을 쉽게 부려놓을 수 없는’ 지게, 그 지게를 보고 가난하나
행복했던 유년시절에 업어주었던 땀 절은 등이 생각났을 것이다. 그래서 그 기
억 속에 어부바를 찾아냈을 것이다.
운반 기구로 별 볼 일 없어진 지게. 우리의 기억에는 우리를 키우기 위해 사
용한 노동이 담겨 있고 아버지의 사랑이 담겨 있다. 그래서 지게의 기억 속에
부모가 우리를 사랑스럽게 업어주던 사랑을 찾아낼 수 있다. 시를 읽으니 참 따
스하다.
이대의 시인
* 1997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등단.
*『풀밭』동인. 현재 한국방송통신대학교 학보사 근무.
* yakung@kno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