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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덕사의 현판은 과거 문화재 콜랙션으로 유명하였던 소전 손재형의 글씨이군요. 산문기둥이 예전에는 나무기둥이었는데 돌기둥으로 더 크게 해 놓아서 정겨움이 덜 합니다.
산문의 안쪽에는 동방제일선원이라는 글이 걸려있군요. 경허, 만공스님의 맥을 이어서 우리나라 근대선의 정통을 이어가고있다는 자부심이 엿보이는 글이 아닌가 싶네요.
산문 안쪽에 있던 수덕여관이 고암 이응로 기념관으로 바뀌어 개관을 했네요. 사실 예술적으로야 어떤지 몰라도 옥중생활을 뒷바라지 한 본처를 버리고 젊은 아가씨에게로 도망간 분을 절집안에 기념관까지 만들어 모시는 것은 좀 아니라고 봅니다.
마당에 있는 바위에는 고암이 이곳에 머물 던 당시 새긴 문자추상화가 있습니다. 고암의 본부인이 바로 이곳에서 수덕여관을 운영했고, 고암은 이곳에서 옥살이의 축난 몸을 추스렸습니다.
금강역사가 지키고 있는 금강문은 이제 보기가 좀 어렵지요. 현대의 금강역사상은 어떻습니까?
요사이는 금강역사나 사천왕이나 너무 악귀의 제압에만 뜻을 두는지, 모습이 위맹스럽기만 하여 정감이 가지는 않는 것 같아요. 여러가지 면에서 옛 전통을 제대로 잊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중국불교에서 많이 모시던 포대화상이 어느 덧 우리나라 사찰에서도 자리 잡았습니다. 전통사찰에서도 직지사에 이어 다시 보게 되는데, 글쎄요. 좋은 의미로 모신다고 받아 들이면서도 좀 석연치가 않습니다.
대웅전 앞마당은 많이 넓어 지기도 하고 정비도 했습니다. 여러 탑들과 나무들이 힘차 보입니다.
마당에 올라서니 좌측으로 범종각이 보이는군요. 수덕사는 범종 보다도 범종을 치는 당목이 더 재미있습니다.
종을 거는 부분인 용뉴의 용은 이름을 포뢰라고 하는데, 고래를 무서워해서 만나면 크게 운다고 합니다. 그래서 종을 치는 당목은 고래 모양으로 만든다는 기록이 있는데, 현재 남아 있는 당목은 모두 통나무형입니다만 수덕사 당목이 고래의 형상을 표현하고 있으니 의미를 살렸다고 봅니다.
수덕사는 범종각에는 범종만 모시고 우측으로 따로 전각을 만들어서 법고, 목어, 운판을 모셨군요. 법고를 받치는 좌대가 아주 멋집니다. 등에 거북무늬가 있는 것이 사신총의 현무처럼 보이기도 하지요. 그러나 머리가 용인 것을 보니 비석등 무거운 것을 받치는 비희인 것 같습니다.
법고의 옆에 있는 목어는 신비스럽기도하지만 볼에 웃음을 머금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나요. 이 정도의 수준은 되어야 절 집안을 지킨다 할 수 있지요. 그저 무섭게만 보이니 어린아이들이 절에 가는 것을 꺼려하는 경우도 생기더라고요.
만공스님께서 자주 쓰시던 세계일화, 세상은 한송이 커다란 연꽃과 같다라는 말입니다. 온 세상 중생들이 화합하여 한송이 꽃을 아름답게 피우는 그날이 어서 이루어졌으면 하고 바라봅니다.
수덕사의 대웅전은 우리나라에 몇 안되는 고려시대 목조건축물 입니다. 모습이 아주 단정하고, 어찌보면 새색시처럼 다소곳하고...맞배지붕이라 옆 모습이 허전할 수도있는데, 각 부재들이 어울려 짜임새 있는 구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몬딜리아니의 추상화 보다도 더 멋져 보이지요.
대웅전 좌측에 새로이 모신 관세음보살님, 뒷편 바위에는 요사이 유행하는 동전 붙이기..
수덕사를 보고서 견성암 쪽으로 올라갔습니다. 일엽스님의 "청춘을 불사르고"가 바로 이곳에서 나오게 되었지요. 많이 듣던 노래 수덕사의 여승도 이곳을 배경으로 제작된 것입니다.
견성암 옆의 도로를 따라 올라가다가, 그 마저도 시멘트길을 걷기 싫다는 말에 산길로 들어가서 완전히 산행이 되어버린 것이지요.
그래도 한참을 올라가서 바라본 수덕사의 전경은 마음에 듭니다. 이 때가 아니면 언제 또 산길로 올라가겠습니까. 이것도 다 인연인 게지요.
이리 저리 산길을 헤메고 걸어서 30분만에 도착한 곳이 바로 이곳 만공탑입니다. 사실상 수덕사의 정신적인 물줄기를 뿜어내는 원천이 되시는 분이 바로 만공스님이시라 하겠습니다.
만공탑의 바로 위 쪽으로 정혜사가 있습니다. 정혜사에 올라 보니 벌써 햇살이 설핏합니다.
정혜사 마당의 앞 아래쪽으로 서 있는 이 작은 바위는 꼭 손바닥을 닮았습니다. 부처님의 수인중 중생의 모든 두려움을 없애 주신다는 시무외인 같아 보이지 않습니까?
정혜사에 올라서자 마자 오른쪽으로 걸려있는 능인선원이라는 글씨는 만공스님께 서예를 가르쳐 주셨던 성당 김돈희의 글씨입니다. 능인이라는 말은 "능히 중생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이익을 주시는 분"이라는 뜻으로 부처님을 가르키는 표현입니다.
한쪽 구석으로 불유각이라는 이름으로 있던 수조가 옮겨져 있군요. 인연이 되려고 그랬는가 마당에 올라서서 사진을 찍다가 저쪽 바위에서 체조하시는 스님을 뵈었는데, 제가 20년 전에 대불련 활동 당시 같은 절에 계시던 스님이셨습니다.
수각이 저 관음전 앞 오른쪽 장독대 앞에 있었던 것 같은데.. 스님은 저녁공양을 하고 가라고 하시지만 자리에 앉으면 부지하세월이라...
정혜사라는 이 단정한 글씨도 해강 김규진의 글이군요.
절 분위기가 너무 좋다고 다 들 취해서 내려갈 생각을 안하다가..
이렇게 낮달이 뜬 걸 보고서야 더 늦기 전에 내려가자고 발길을 재촉합니다.
정혜사 아래의 이 석문은 아주 아담하면서도 예쁘네요.
만공스님 때 조성하였다는 이 불상은 보통 미륵불로 불리지만 자세히 살펴보니 관세음보살님이 십니다. 이마에 화불을 모시고 계시는 것이 보이지요. 미륵보살상에도 삼국시대 초기 전에는 화불을 모신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만 후로는 그런 경우가 없지요.
이곳이 소림초당입니다. 개울을 건너서 바위 벼랑 아래에 붙어 있는 작은 초가집이지요. 분위기는 아주 좋아 보여서 한번 가부좌 틀고 앉아보고 싶은 생각이 확 치솟는 군요.
소림초당으로 넘어가는 작은 다리 옆 바위에 새겨진 갱진교라는 글씨, 백천간두 갱진일보라. 백척높이의 장대 위에서 다시 한 발 자국을 나아간다라는 말이니 무섭지요.
아직 각오도, 경지도 따르질 못하니 슬며시 물러납니다. 다음 생에나 한번 이 자리에 앉아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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