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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여성시대* 차분한 20대들의 알흠다운 공간 원문보기 글쓴이: 스티븐이븐
2011.6.20이후 적용 자세한사항은 공지확인하시라예 출처: 여성시대 스티븐이븐
다섯살, 처음 본 눈이 파랗고 키가 큰 외국인 부모의 손을 잡고 나는 미국으로갔다. 상냥한 양부모, 캘리포니아 주 조용한 동네에 작은 마당이 딸린 2층집과, 커다란 개. 천사원에서 무관심에 가까운 대우를 받던 내게 그곳은 동화속 과자집 같이 달콤했다. 그러나 3년도 채 되지 않아 나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늦은 귀가길, 그들은 어두운 골목길 한켠에서 총에 맞았다. 절도범의 소행이었다.
내 처우는 순식간에 중간에 붕 뜬 채가 되었다. 친척들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반쪽 핏줄도 아닌, 동양인 입양아를 떠맡고 싶어하는 사람은 누구도 없었다. 결국 양아버지의 동생이라는 남자가 나를 데려가게 되었다. 감옥을 여러번 갔다왔다고 했다. 다들 저런 사람에게 아이를 맡겨서야 되겠냐고 말을 하면서도 막상 나서는 이가 없었다. 나는 그를 따라 동부로 이사를 갔다. 그는 나를 뒷자석 짐더미들에 끼여 앉히고 개를 앞좌석에 태웠다. 그는 아주 안색이 안좋았고, 자주 코가 톡 쏘는, 비린내가 나는 풀을 말아 피웠다. 우리가 출발하기 전, 그는 내 어깨를 잡고 말했다. "네가 애처럼 울거나 칭얼거리면 난 널 저 저수지에다 던져버리고 떠날거야, 알겠니?" 볼티모어의 동쪽, 우리는 늪지대 근처의 빈민가에 자리를 잡았다. 이곳은 바람이 불지 않는 날에도 집들마다 모두 문이 삐걱거린다. 낮에는 열 두어살된 아이들이 공터에 앉아 마리화나를 팔고, 밤이되면 근처 주차장에서 여자들이 몸을 판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똑같은 냄새가 난다. 버려지고, 녹슨 냄새. 더러운 거리와 양철지붕, 약물 중독자들, 배기관이 개조된 포드 자동차를 몰고 다니는 갱들, 창녀들, 거리를 걸어가면 따라붙는, 썩은 하수도관 사이로 받아낸, 고인 물 같은 눈빛. 희망이라곤 조금도 없는 듯 보이는, 슬럼가. 이곳에서, 여시가 마주치게 된 남자는 누구일까? 1. 감옥에 있는 삼촌대신 마약거래의 뒷책임을 져야하는 여시와 물건을 요구하러 온 갱단두목, NIGEL 어느날, 삼촌이 밀매 중 잡혀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요 며칠 얼굴이 안보인다 싶더니 그 탓이었던걸까. 제법 큰 건을 하다가 걸린 것 인지 분위기가 좋지 않다. 그러나 나는 그저 그러려니 한다. 삼촌은 이 전에도 짧으면 두세달 길면 일년넘게도 감옥에 있다오곤 했으니까. 난 이런일에는 이제 이골이 나 있다. 그리고 어느날, 늦은 오후 집을 방문한 남자. 한번도 본 적 없는 낯선 얼굴이다. 그는 문에 기대어 선 채로 나를 빤히 내려다본다. 키가 크고, 유난히 눈매가 매서웠다. "찰리 삼촌때문에 온 거라면, 그는 지금 집에 없어요." " 알아. 혹시 찰리가 내게 건네라는 물건은 없던가?" "... ... 아뇨 따로 내게 언급한건 없었는데..." "그가 내게 코카인 30파운드를 팔았어. 난 돈을 지불했고, 그는 분명 부두에 물건을 준비시켜놓겠다고 했는데, 오늘 가 보니 창고는 비어있고, 찰리는 감옥에 들어갔다고 하더군." 정신이 아찔해 지는 것 같다. 삼촌은 내게 그런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배상할게요. 다락방에 좀 모아둔 돈이 있을거에요." "액수가 얼마인지나 알고 하는 소리야?" 난 계산에 그리 강한편이 아니다. 입을 닫고 있자 남자는 웃는다. 결코 유쾌한 종류의 웃음은 아니었다. 순간, 남자가 성큼 집 안으로 들어선다. 당황한 난 한걸음 뒤로 물러선다. "네 살을 저며 팔아도 나오지 않을 만큼이지." 다가오는 그를 나는 막지 못했다. 남자는 잔뜩 긴장한채로 벽에 붙어선 내 목을 덥썩, 한손에 그러쥔다. 그가 달리 힘을 주지 않았음에도 나는 숨이 턱 막힌다. "이렇게 크게 뒷통수를 치다니. 네 삼촌에게 가서 말해. 당장 내 앞에 물건을 가져다 놓지 못한다면, 조카딸은 물론이고 그놈 모가지도 물론 무사하지 못할거라고 말이야."
나는 바들바들 떨며 그의 팔을 잡았다. 그렇지 않으면 커다란 손이 단번에 내 목을 꺾어버릴 것 같아서였다. 그러자 틀어쥔 손이 조금 느슨해 지는가 싶더니, 남자의 표정이 이상해진다. 퍼덕이는 새처럼 그의 손바닥 아래에서 내 맥박이 요동치고 있었다. "... 일주일." "그게 내가 배풀 수 있는 최선이야." 짧은 침묵이 흐른 후, 으름장을 놓은 그는 그대로 발걸음을 돌려 자리를 떠난다. 난 자리에 주저앉아 한참을 숨을 골라야만 했다. 난 다음날 당장 삼촌이 있는 교도소를 방문했다. 나이젤이 찾아왔었다고 말하자, 그는 단번에 안색이 시퍼렇게 변한다. "일단, 시간을 좀 끌어봐. 제기랄, 난 여기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알겠어? 대충 둘러대면서 좀 기다려 보란말이야." 그도 딱히 대안책이 없는 듯 보인다. 나는 마음이 조급해진다. 교도소에서 나오는 길, 잘 빠진 자동차가 내 앞에 멈춰선다. 운전석의 검은 유리창이 내려가더니 불쑥 낯익은 얼굴이 드러났다. 그는 타라는 듯이 고개짓을 한다. 제의보다는 명령에 가까웠다. 고민하던 나는 얌전히 그의 차에 탑승한다. "......이러지 않아도 도망 안가요." "글쎄. 내게 그렇게 맹세했던 놈들은 죄다 한시간 뒤면 국경을 넘고 있던데." ... 그래서, 그 다음 그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죠? 나는 차마 물을 용기가 나지 않아 고개를 돌린다. 그는 의외로 나를 얌전히 집으로 데려다주었다. 쭈뼛거리며 내리자 그가 묻는다. "몇살이지?" 난 약간 얼떨떨한 기분으로 스무살이 넘었다고 대답한다. 그는 날 가만히 흝어보다가 말없이 떠난다. 도대체 뭘까. 난 이상한 기분을 애써 떨쳐버렸다. 그 이후 남자와 대면하는 일이 잦아졌다. 늦은 귀가길, 카페, 클럽 가는곳 마다 그가 있다. 그러나 난 불평할만한 처지가 되지 않아 남자의 눈치만 본다. 동시에 나는 이 상황이 못견디게 숨이 막혀 사방 팔방으로 돈을 구할 방법을 모색한다. 그러나 모두 남자의 이름을 듣고서는 기겁을 하며 손사레를 친다. 삼촌은 여전히 물건의 행방에 대해서는 묵묵부답이다. 그저 불안한 표정으로 내게 어떻게든 버텨보라고만 한다. 그리고 그 사이, 날 대하는 남자의 태도가 유난히 이상해졌다. 어느날 내 무릎위에 툭, 자그마한 상자를 던져놓는 남자. "이게...뭐에요?" "볼품이 없으면 치장이라도 해야지." 하지 않아도 될 말까지 곁들이며, 마치 버리는 물건이라는 듯한 말투이다. 그 이후로도 그는 나를 찾아올 때 마다 무언가를 준다. 향수, 립스틱, 머리끈, 구두... 거절할 말도 마땅치 않은데다가 감사를 하기에도 그의 태도가 너무 애매해, 대부분의 경우 나는 그걸 쭈뼛거리는 태도로 받아든다. 사용하기엔 찝찝해 모두 여전히 새것이다. 당황스러울 정도로 비싼 물건들. 눈이 휘둥그래질 만큼 고급스러운 상표는 차마 건드리기가 무서웠다. 왜? 의문이 켜켜이 쌓여간다. 답답하고 옹졸한 방 안, 낡은 화장대 위에 화려한 금박무늬의 선물들만 반짝거린다. 그러나 나는 그에게 무언가를 묻기가 무서워 가만히 입을 닫는다. 알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이유없는 선물공세는 결국 압박감으로 이어졌다. 어울리지 않는 것들을 바라볼 때 마다, 난 마치 그 물건들이 내게 어서 빚을 청산하기를 강요하는 느낌이다.
어느날, 결국 나는 폭발하고 말았다. 평소와 같이 상자를 내 앞에 내려놓는 그의 팔목을 덥썩 잡는 나. 그는 조금 놀란듯이 나를 바라본다. "나한테 왜이래요?" 그는 내가 화가 난 이유를 도무지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이다. "왜 이러냐구요. 당신 입으로 내게 일주일의 유예기간을 주겠다고 했잖아. 그런데 왜 자꾸 나한테 뜻모를 행동을 하느냔 말이에요. 난 그렇지 않아도 불안한데..." "넌 통 호의를 받아들일 줄을 모르는군. 말해봐, 내가 무서워?" 갑작스러운 물음에 나는 말문이 막힌다. 그러나 난 딱딱하게 대답했다. ".......아니라곤, 말 못하겠네요. 그리고 어차피 그게 당신이 의도하는 바 아닌가요?" "그런가?" 어딘지 모르게 넋이 나간 답변이 돌아오고, 그의 손등이 내 벗은 어깨를 쓸어내린다. 나는 몸을 움츠렸다. 부드러운 감촉이 미끄러지고, 소름이 죽 돋아났다. 손목까지 천천히 쓸어내린 그는 내 귀에 나직이 읊조린다. "내가 준 선물은 쓴 적이 없는 것 같은데." "... ..." "써봐." 내 물음에 대한 답은 없었다. 그리고 그가 선고한 기일의 마지막이 가까워져 오고 있다. 이곳저곳 돈을 빌려도 금액의 삼분의 일조차 되지 않는다. 조급해진 나는 몇번이고 삼촌을 찾아가 묻는다. "삼촌. 도대체 어디에있어요? 어디다가 숨겨둔거냐구요. 그사람, 날 쫓아올거에요. 삼촌이 더 잘 알잖아. 정말 지구 끝까지 쫓아올거라고, 그사람... ..." "내가 다 알아서 할거야. 지금 날더러 무슨 수로 그걸 해결하라는 거냐고, 응? 일단 네 몸으로 꼬시든 도망치든, 어떻게 해서든 출소날까지 버티란 말이야. 알겠어?" 그러나 큰소리를 치는 것 치고 그의 표정은 대단히 불안해 하고 있었다. 난 그가 조금 진정될 때 까지 기다렸다가, 다시금 조용히 물었다. "삼촌, 제발, 말해줘요. 대체 어떻게 한거에요?" "....... 빠트렸어. 강에. 경찰이 왔을때, 난 증거를 없애야 했단 말이야. 발각되면 10년은 거뜬히 처박혀 있어야할 양 이었다고. 어쩔 수 없었어. 어쩔 수 없었어......." 정신이 아득해진다. 난 비틀거리며 교도소를 빠져나왔다. 온갖 생각이 떠오른다. 날 죽일거야. 도망갈까. 하지만 그럼, 삼촌은? 아니, 일단 내가 무슨수로 그 남자에게서 도망친다지? 순간, 남자가 내게 유독 다정했던 순간들이 떠오른다. 난 도무지 빈틈이 없을 것 같은 그 차가운 얼굴과 눈빛이, 유독 날 보는 순간 누그러졌던 것을 기억해냈다. 동시에 삼촌의 말이 내게 속삭인다. 몸으로 유혹이라도 해 보란 말이야... 망설임은 짧았다. 난 집으로 돌아가, 사놓고도 한번도 입어본적 없던 달라붙는 원피스를 꺼냈다. 그리고 남자가 주었던 화장품들, 묵혀두었던 것들 따위로 치장을 한다. 어울리지 않는 향수도 뿌리고, 난 손끝까지 박제인형처럼 굳은채로, 그가 오기를 기다린다. 어김없이 날 찾아온 남자. 거실 한켠에 가만히 앉아있는 나를 본 남자의 표정이 잠시 의아했다가, 내 차림새를 흝고는 곧 딱딱하게 굳어진다. "선물, 써봤어요. 어때요?" 나는 그 순간, 남자의 무표정 속에서 희미한 당황을 엿본다. 잠시 오갈 데 없는 침묵이 흐르고, 남자는 곧 아무렇지도 않게 다가와 내 앞에 섰다. 난 가만히 그를 올려다 본다. 남자는 탁자위에 놓인 술을 한입에 비우고는, 내 맞은편에 앉는다. "....넌 어리고, 예쁘고, 순진해." 난데없는 이야기에 난 인상을 쓴다. 그는 당황했던 것이 언제냐는 듯이 희미하게 웃음을 띄고 있다. "이 바닥에서 순진한 여자들은 빨리죽어. 아니면, 빨리 팔리거나 더 많이 맞거나... ... 그리고 종래에는 제일 더러운 시궁창 밑바닥을 핥고있는거야. 너도, 아마 그렇게 될테지." "... 난 성인이에요. 난 어리지도, 순진하지 않아요. 게다가 여긴, 이미 밑바닥이잖아." 욱해서 내지른 말에 그는 메마른 웃음을 터뜨렸다. "넌 몰라. 비참하다는게 뭔지, 밑바닥이 어떤것인지 결코 몰라..." 그의 커다란 손이 불쑥 다가오자 나는 움찔 굳었다. 움츠러든 나를 보며 그는 다시 웃는다. 그러나 그 손바닥은 내 머리를 쓰다듬고, 엉망으로 헝클여놓나 싶더니 이내 내 뒷목을 잡아 거칠게 끌어당긴다. "...그리고 알 필요도 없고." 의도한 바 였음에도, 그의 손이 내게 와닿자 나는 긴장으로 떤다. 그는 내 얼굴을 잡고 빤히 들여다보고 있다. 그의 얼굴은 표정이 없다. 애써 붙인 속눈썹, 분칠한 뺨, 관자놀이를 더듬던 엄지손가락이, 어느 순간 윗입술로 다가온다. 그리고, 묘한 눈빛으로 흝어보는가 싶더니, 부드럽게 스치던 손길이 곧 입술을 짓뭉갠다. 난 당황해 그의 손을 만류했다. 그러나 허우적거리며 떨어져나가기만 한다. 이리저리 번지는 립스틱에, 거침없는 손가락, 마찰에 섬뜩하게 날이 선 통증이 날 괴롭힌다. 그는 꼭 아주 더러운 것이라도 묻어있다는 듯이 내 뺨을 그러쥐고 입술을 닦아내고 있다. 여린 피부가 쓰라리다. 눈물이 핑 돌 정도로 아팠다. 나는 그를 밀어내려 했으나 꼼짝도 하지 않는다. "아파요. 진짜 아프단 말이에요." 내가 울먹이며 애원하자 그제서야 손가락이 떨어져 나간다. 입가로 엉망으로 번진 화장이 흉하다. 새빨간 루즈가 피처럼 붉게 그의 손가락에 묻어있다. "내가 준 건가? 색을 잘못 골랐어. 이렇게 싸 보일줄은 몰랐는데."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것을 옷깃에 닦아낸다. 난 부르트고 아려오는 입술을 더듬거리며 등받이에 바싹 등을 붙인다. 그러자 그는 몸을 굽혀 내게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가 속삭이자 숨결이 내 뺨을 간질인다. "짐작해볼까? 네가 싸구려 매춘부 꼴을 하고 벌인 이 촌극의 이유 말이야. 찰리가 네게 시켰을거야. 그렇지? 넌 물건을 가져올 수 없는거야. 어쩌면 아예 처음부터 없었는지도 모르지. " 위협하는 듯한 낮은 목소리에, 난 겁에 질려 말을 쏟아낸다. "강에 버렸대요. 어쩔 수 없었다고 했어요. 삼촌도, 어쩔 수 없었다고..." "그래?" 불같이 화를 낼 줄 알았는데 그의 목소리엔 별 감흥이 없다. "그래서. 어쩔거지?" "뭐라구요?" "이제 어떻게 할거냐고 했어. 네가 배상할 만한 돈은 턱없이 모자라고, 너도 알다시피 나는 그다지 인내심이 많은 편이 아니거든." 그는 느긋하게 등을 기대어 앉는다. 난 혼란스러워졌다. 그는 내게 무슨 대답을 바라는걸까. "계속해봐. 네가 계획했던 것 말이야." 난 숨을 삼킨다. 그는 여전히 대단히 평온한 표정이다. 난 딱딱하게 말한다. "......그럼, 넘어와 줄거에요?" 그는 대답없이 웃기만 했다. 그의 눈빛이 유난히 다정하다. 그의 의도를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난 홀린듯이 다가가, 남자의 무릎 위에 앉는다. 그의 눈빛이 내 목덜미에 꽂혀있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걸까. 난 멍하니 그의 셔츠 단추를 푸른다. 그의 뜨거운 손이, 원피스 안으로 파고들어와 맨 살갗에 와 닿는다. 그 순간, 가눌 수 없이 아찔한 현기증이 일어난다. 그는 내 귀에 웃으며 속삭인다. "예술과 외설은 종이한장 차이라고 하지. 내겐 너도 마찬가지야. 네가 빌어먹게 하얗고 예쁜 발목으로 복도를 걸어오는걸 보는 순간," 그의 향기. 낮은 숨소리. 비죽 일어난 솜털 하나하나로 느껴지는, 남자의 열기. 난 결국 버티지 못하고 눈을 감는다. 그의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마지막이었다. "...난 날 끓어오르게 하는 그게 네 백지같은 순수인지 아니면 타고난 천박함인지 구분을 못하겠단 말이야......" 2. 장부를 관리하는 여시와 그런 여시를 이용해 돈을 가로채려는 사기꾼, JACE 제이스 요즘 삼촌의 사업이 유난히 손이 커졌다. 그가 어릴 적 부터 내게 장부 정리를 맡겨왔으므로, 나는 그의 사업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면면이 모르는 것이 없다. 얼마 전 러시아인들과 손을 잡았다고 하더니 그 탓일까. 이제는 거리에서 왠만하면 삼촌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드물었다. 삼촌은 이제 아주 가끔밖에는 집에 들르지 않는다. 요즘에는 유난히 큰 규모의 거래가 잦은 듯 했다. 마약, 총기류, 다루지 않는게 없다. 적어내려가다 보면 어느 순간은 정신이 아찔해진다. 그럼에도 나는 묵묵히 그 일을 한다. 이곳에서 내게 선택권 같은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느 저녁, 클럽을 찾은 나. 다운타운에 위치한 클럽은 그리 크진 않지만 내가 즐겨찾는 곳이다. 그런데 몇 시간 전 부터 알아챈 시선이 달갑지 않다. 건물의 구석에 붙어서 날 주시하고 있는 한 무리의 남자들. 이 근방에는 동양인이 그닥 많지 않아서인지 내게 시비를 걸거나 괜스레 작업을 거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이번에도 그런 종류겠지. 난 불쾌해진 기분으로 자리를 뜨려고 잔을 비운다. 그 때, 무리 중 한명이 성큼성큼 내 쪽으로 걸어온다. 뒤집어 쓴 후드에 유독 번쩍거리는 불빛때문에 얼굴은 잘 보이지 않는다. "Hi." "......" "너, 찰리의 조카라면서?" 내 냉담한 반응에도 그는 아랑곳 않고 말을 잇는다. 난 짧게 대꾸했다. "용건이 뭐야?" 후드를 벗고 드러난 얼굴은 내 짐작보다 더 어리다. 열 일곱, 열 여덟? 난 인상을 쓴 채로 그의 나이를 가늠해 본다. 그는 키만 멀대같이 크고 겨울가지 처럼 말랐다. 턱 아래만 보고 있자면 스무살 청년즈음은 되어 보이고, 유난히 파랗고 호기심 어린 눈동자를 보고 있자면 열 여섯 까지도 짐작이 가능하다. 그를 빤히 바라보던 나는, 곧 내밀어진 손을 무시하고 자리를 빠져나온다. 어린애들은 상대하다보면 끝없이 귀찮아진다는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등 뒤에서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연신 들려온다. 흘끗 뒤돌아보니 급히 날 쫓아나온 듯 보이는 그. "바래다 줄게." "지금 농담하는거야?" 어이가 없다는 내 말투에도 그는 아랑곳 않는 표정이다. 거리를 걷는 동안, 그는 한결같은 내 무시에도 불구하고 혼자 무언가를 떠들어댄다. 난 꿋꿋하게 앞만 보며 걷는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매몰차게 그에게 작별인사를 건넨다. 그리고 문을 여는 나를 그가 다급히 불러세웠다. "잠깐." "뭐." "나랑 이야기좀 더 하고 싶지 않아?" 난 그냥 그의 얼굴 앞에서 문을 쾅 소리가 나게 닫아버렸다. 알게뭐야. 그러나 다음날, 난 집 앞에서 그의 얼굴과 다시금 마주했다. 그는 얄미울 정도로 천진하게 웃으며 내게 인사를 한다. "안녕." 난 그를 무시했다. 그러나 그는 그 다음날도 날 찾아와 이것 저것 물어대고 자기 이야기를 한다. 아침마다 찾아오기를 사흘, 열흘... 한결같은 내 반응에도 불구하고 하루하루, 끈질긴 방문이 이어지고, 이윽고 그애는 문턱을 넘어서 까지 우리집에 찾아오게 되었다. 그는 누나라고 부르며 유독 친근하게 군다. 흑심이 있는 것 같지도 않아, 몇번 짜증을 내던 나는 언젠가부터 그의 방문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긴장을 늦추지 않는다. 소문이 안좋았기 때문이기도 했고, 도무지 그의 의도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 이었을까. 언젠가부터인지, 그는 자주 날 웃게 만들었다. 유독 스킨쉽에 민감한 내게 그는 거리낌없이 목이나 허리에 팔을 두르기도 한다. 이상하게 나는 그것이 그렇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남동생이 있다면 이런 기분일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그에게 냉담했다. 어쩔 수 없다. 난 체질적으로 남과 살갑게 어울리지 못한다. 게다가 사실 그가 마냥 남동생 같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한번씩, 통화를 하거나 혼자 생각에 잠겨있을때면 그의 표정은 유난히 날이 서 있다. 그럴때 그는 꼭 다른사람 같이 보인다. 몸 곳곳에 숨겨진 작은 나이프 같은것을 언뜻 보게 될 때도 마찬가지였다. 순간 순간, 나는 그가 마냥 동생같은 아이가 아니라는것을 깨닫게 된다. 그럴 때면 기분이 이상해진다. 내게 하는 짓을 보면 어린애가 따로 없는데.
그가 가진 물건들, 표정과 가끔 숨길 수 없이 드러나는 서늘함은 다르다. 그리고 아주 가끔은, 핏자국을 잔뜩 묻힌채로 현관에 서 있기도 했는데, 난 굳이 이유를 묻지는 않았다. 이 동네에서 그런 일이 딱히 드문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내가 건네는 수건을 받아들고, 거실에 가만히 앉아있는 그는 평소와는 다르게 조용하다. 한마디도 않고 숙인 얼굴은 창백하니 표정이 없다. 그럴때 나는 그저 말없이 그애의 옆에 다가가 앉는다. 그러면 젖은 머리카락이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온다. 평소라면 핀잔을 주거나 밀어냈을 테지만, 그애에게서 나는 비냄새와, 야윈 목의 감촉이 어딘지 모르게 안타까워, 난 그저 말없이 가만히 앉아있곤 했다. 그의 숨소리가 어느새 부드러워진다. 그러면 그는 어느 순간 말없이 떠난다. 그런날이면 유난히 어깨가 시렸다. "넌 너무 방어적이야." 어느날인가, 가만히 앉아있다가 하루는 그애가 그렇게 말한적도 있었다. 내가 대답이 없자, 그는 조금 풀이 죽은 목소리로, 작게 덧붙였다. "...그렇게까지 내게 선을 그을 필요는 없잖아." 난 사람을 대하는 요령을 몰랐고, 동시에, 불안했다. 끊임없이, 그가 조금 가깝게 느껴질 때 마다 난 나를 단단히 붙들어맸다. ... 난 네가 내게 이토록 친근한 이유를 모른다. 어쨌거나 그는 나를 찾는것에 아주 열심이었다. 하루는 그애가 새로운 타투를 한다고 하기에, 난 아무생각 없이 가볍게 물었다. "그래? 이번에는 뭘로?"
"...네 얼굴을 새기고 싶어." 잠시 얼어있던 나는 나는 어이가 없다는 투로 대답한다. "너 정말 별나구나. 도대체 그걸 새겨서 뭐하게?" "그럼 넌 내가 가진 가장 큰 흉터가 될테니까." 나는 그의 표정과, 말의 미묘함을 애써 모른채 한다. 그는 담담하게 나를 주시하다가 말한다. "어디가 좋을 것 같아?" "글쎄." "어디다 하면 좋을까. 봐, 네가 정해줘. 어디가 좋을지." 그는 냅다 상의를 벗더니, 내 손을 가져다 맨 어깨에 올려놓는다. 주저하던 나는 그의 벗은 몸을 찬찬히 더듬었다. 그는 얌전한 개처럼 가만히 앉아있었다. 손바닥이 쇄골에 내려앉았다가 등으로 미끄러진다. 그 사이에 그애의 손바닥이 내 허벅지 뒤쪽을 감싸안았다. 눈빛은 어둠속에서 파란 불빛처럼 나를 응시하고 있다. 말려야 하는데. 안된다고 해야 하는데, 이상하게 말이 나오지 않는다. 난 그저 목 졸린 듯이 가느다란 목소리로, 그의 날갯죽지 부근을 짚으며 말한다. "여긴, 어때...?" 뜨거운 손바닥이 서서히 허벅지를 타고 올라온다. 그의 숨이 내 갈비뼈 부근을 간질이고 있었다. "괜찮을 것 같아. 네가, 거기가 좋다고 한다면." 그리고 그의 손이 엉덩이를 그러쥐려는 순간, 나는 그를 만류한다. "싫어." 그는 곧바로 손을 멈춘다. 그의 입에서 한숨 비슷한 탄식이 흘러나온다. 그리고 그는 날 올려다보며 묻는다. 그림자에 가린 얼굴이 언뜻 붉었다. "왜?" "...... 왜냐니..." 화가 나려던 나는 정말 모르겠다는 표정에 김이 새 버렸다. 끈적한 분위기가 가시지를 않는다. 결국 허둥대던 난, 둘러대며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하루종일 싱숭생숭한 마음으로 거리를 떠돌던 나는 다시 클럽을 찾는다. 그리고 내가 제이스를 만난 첫날, 그와 함께 있었던 일행의 말을 엿듣게 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난 문고리를 잡고 나서려다가, 유난히 크게 들리는 목소리에 발길을 멈춘다. "아, 그 아시안 말이지?" "요즘 제이스가 한창 바쁜 모양이던데. 그 여자한테서 정보를 빼내려고 말야. 찰리가 이달 말에 큰걸 한건 하는데 그 여자가 장부를 관리하는 모양이더라고. 제법 자신있다는 말투였어. 뭐, 어차피 그런 여자애들은, 다루기 쉽잖아? 안그래?" 난 한참을 못박힌 듯이 그 자리에 한참을 서 있었다. 그리고 손발이 얼음장 처럼 차가워진 후에야 그곳을 벗어날 수 있었다. 친구들에게 그에 대한 소문을 묻는다. 줄줄이 말이 쏟아져 나온다. 사기꾼, 도박꾼, 면허증 위조 신분증 위조, 가끔은 돈많은 사립고 학생들의 성적표도 손봐준다고 했다. 비상할 만큼 머리가 좋아, 이 일대 불량배들의 돈이란 돈은 다 그가 굴린다는 말까지. 난 얌전히 듣고만 있었다. "미친놈이야. 차라리 바지춤에 잭나이프 꽂고 마리화나 물고 다니는 애들이 질이 더 나아. 그런 놈들이야 그냥 똥 보듯이 넘기면 되지만, 그놈은 아니라고. 마피아들이랑 연계해서 투기자에게 사기를치거나 갬블링으로 끌어들여서 주머니를 털고 다닌다는 소문도 있어." 난 그 이후 한동안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기도 했고, 그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아서이기도 했다. 그러나 어느날, 거리에서 난 유난히 수척해진 얼굴을 발견한다. 제이스. 그는 한번도 본 적 없는 표정으로 내게 다가온다. 그는 거의 헐떡이고 있었다. "내가 아무렇지도 않을거라고 생각했어?" 그런 목소리는 처음이었다. 그는 거의 울 것 같기도 하고, 반 쯤은 분노에 미쳐 버린 듯한 표정이다. 그가 성큼 다가오기에 나는 그저 가만히 있었다. "도대체 왜..." 난 그의 말에 덤덤히 시선을 돌린다. 화를 내려 했는지, 잔뜩 흥분되어있던 그의 표정은, 내 한마디에 와르르 무너지듯 내려앉았다. "너 삼촌때문에 나한테 접근했다며." "... ..." "다신 나한테 말 걸지마." 그리고 돌아서려는 내 어깨를 그가 거칠게 돌려세운다. 난 그를 밀쳐내려 했는데, 그의 표정이 너무 절박해서 그럴 수 없었다. 그는 완전히 얼어붙은 것 같았다. 이리저리 방황하던 손이 내 손목을 틀어쥔다. "제이스." "생각이 안났어." " "생각이 안났다고. 아는데, 그냥 난 잊어버리고 있었단 말야. 생각을 하고 가는데, 네 집 앞에만 서면. 네 얼굴만 보면 아무것도 생각이 안나서... ..." 돌아서야 하는데. 네가 지금도 날 이용하려 하는지 어떻게 알아. 넌 사기꾼이잖아. 말이 입안을 멤돌았으나 한마디도 밖으로 내지 못한다. 난 계속 더듬거리고, 그는 거의 정신이 나간것 처럼 보인다. 마침내 내가 무슨 말을 꺼내려 입을 열자, 그는 듣기가 겁이 난다는 듯이 날 확 끌어당긴다. 내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는 그는 꼭 커다란 동물 같다. 그의 팔이 단단히 나를 조여온다. 그는 떨고 있었다. 온 몸은 얼음장 같이 차가웠다. 그리고 그의 얼굴이 이번에는, 어깨가 아니라 천천히 내 입술로 내려앉는다. 차갑고 뜨거운 감촉히 한번에 내 안으로 타고들어온다. 난 놀라 그를 밀어내다가 팔의 힘을 풀었다. 그가 내게만 부리는 어리광. 내가 네게 허락한 접촉은 단순히 연민이었을까? 정말로? 난 자꾸 부딫혀 오는 그의 입술에 퓨즈가 나갈 것만 같았다. 가까스로 트인 숨 가운데에 난 깜빡이듯이 말한다. ...용서, 해줄게. 그애가 그제야 웃는다. 난 이젠, 아무래도 상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온기가 오가고, 난 이윽고 처음으로 그의 목을 세게 끌어안았다. * 배우 : 1번 - 매즈 미켈슨 2번 - 제이미 캠벨 바우어 참고 영화 : 1번 - 찰리 컨트리맨, 시티 오브 갓 2번 - 섀도우 헌터, 락앤롤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