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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역사(11월 20일)◆
1602년 독일의 물리학자 오토 폰 게리케 출생
1737년 영국 왕비 캐롤라인 사망
1815년 영국·오스트리아·프로이센·러시아가 4국동맹 맺음
1873년 프랑스군, 하노이 점령
1878년 아프가니스탄과 영국의 제2차 아프간전쟁 시작
1889년 천문학자 에드윈 허블 출생
1894년 러시아의 작곡가 루빈스타인 사망
1897년 독립문 준공
1905년 장지연,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 게재
1910년 톨스토이 사망
1918년 미주교포단체, 미대통령 윌슨에게 독립요망진정서 제출
1922년 연합국-터키 간의 제1차 로잔회의 개최
1942년 일본, 조선징병제도실험요강 결정
1945년 뉘른베르크 전범재판 개정
1947년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 결혼
1948년 국가보안법 통과
1952년 이탈리아 철학자 베네데토 크로체 사망
1954년 미 8군사령부 일본으로 이동
1958년 농업협동조합 중앙회 발족
1959년 서구7개국 자유무역연합(EFTA) 결성 가조인
1961년 케네디-아데나워 서독수상 회담
1962년 미국 케네디 쿠바 해상봉쇄 해제 선언
1963년 유엔총회, 인종차별철폐 선언을 채택
1966년 충남선 (논산-부여 간 24km) 기공
1967년 여야전권회담 성공, 합의의정서 발표
1969년 펠레 900경기 만에 1,000골 달성
1970년 유엔총회, 중국대표권 문제 중요사항으로 채택
1975년 대구 서문시장에 화재. 천팔백여 점포 전소
1975년 프랑코 스페인 총통 사망
1980년 정부, 공직자 재산등록제 및 사기앙양 종합대책 발표
1982년 박상은 살해용의자 정재파, 대법원서 무죄선고
1983년 미 ABC-TV, 핵공포 가상영화 '그날 이후' 방영
1985년 MS윈도우 1.01리테일 버전 출시
1991년 마케도니아 독립
1991년 우편물 차량배달제 시행
1992년 태평양 해저케이블(TPC4) 개통
1992년 한국-우즈베키스탄, 무역협정-투자보장협정-과학기술협력협정 체결
1994년 남산 외인아파트 철거
1994년 앙골라 19년 간의 내전 종식
1997년 북한 일본인 처 고향방문
1998년 클린턴 미국 대통령 방한, 김대중 대통령과 대북정책 집중 논의
2000년 인천국제공항을 잇는 영종대교 개통
2001년 덴마크 총선, 70여년 만에 우파승리
2002년 북한경비정, NLL(북방한계선) 침범
/1865(조선 고종 2) 조선 말기의 정치가 좌옹 윤치호 태어남
독립협회를 주도하였고, 서재필 뒤를 이어 독립신문 2대 사장을 지냈다. 장지연과 함께
대한자강회를 만들고 회장을 지냈다.1911년에는 105인 사건 가담혐의로 체포되어 10년형을 선고받았다.
일제 말기에 한 때 변절하여 귀족원 의원을 지냈고 그 일로 광복 후 친일파로 몰리자 자살하였다.
1896(조선 고종 33) 독립협회 독립관 준공
1897(조선 고종 34) 독립문 준공
1905 장지연,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이 날을 어찌 통곡하지 않으랴)' 씀
1958 농협중앙회 발족
1975 대구 서문시장에 화재. 점포 1.900개 소실
1976 대한상의, 우리 노동자 평균임금이 선진국의 10% 수준이라고 보고
1982 경찰, 서울강남지역 아파트 투기 수사 마무리
투기부동산업자와 복부인 11명 구속, 1,663명 불구속 입건
1985 제5차 남북한경제회담 판문점서 개최
1910 톨스토이 세상 떠남
이날 가출한 톨스토이는 조그만 정거장에서 페렴으로 죽었다.
"행복한 가정은 한결같이 같다. 불행한 가정은 각각 그 결말에 따라 불행하다"
1945 뉘른베르크 전범재판 개시
1954 미8군사령부 일본으로 이동
1959 세계 아동인권선언
1962 케네디 미국대통령, 쿠바해상봉쇄해제 선언
1975 스페인 36년간의 독재자 프란시스코 프랑코 총통 세상 떠남
1977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 이스라엘 의회 연설
1989 유엔, 어린이 헌장 채택
체코, 반정부 연합체 결성, 10만여 명 개혁 요구 시위
1993 마케도니아 비행기, 스페인 공항에서 추락
제네바를 떠나 스커페공항에 도착할 예정이던 아비오 임펙 항공 소속의 마케도니아 공화국 여객기가
공항 상공에 안개가 끼어 남부 오흐리드공항에 착륙을 시도하다 추락. 승객과 승무원 116명 전원 사망
【오늘의역사】 2008년 11월 19일 (수)
△독립문 준공(1897)
△장지연,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 게재(1905)
△미주교포단체, 미대통령 윌슨에게 독립요망진정서 제출(1918)
△일본, 조선징병제도실험요강 결정(1942)
△국가보안법 통과(1948)
△미 8군사령부 일본으로 이동(1954)
△농업협동조합 중앙회 발족(1958)
△유엔총회, 인종차별철폐 선언을 채택(1963)
△충남선 (논산-부여 간 24km) 기공(1966)
△여야전권회담 성공, 합의의정서 발표(1967)
△유엔총회, 중국대표권 문제 중요사항으로 채택(1970)
△대구 서문시장에 화재. 천팔백여 점포 전소(1975)
△정부, 공직자 재산등록제 및 사기앙양 종합대책 발표(1980)
△박상은 살해용의자 정재파, 대법원서 무죄선고(1982)
△MS윈도우 1.01리테일 버전 출시(1985)
△우편물 차량배달제 시행(1991)
△한국-우즈베키스탄, 무역협정-투자보장협정-과학기술협력협정 체결(1992)
△태평양 해저케이블(TPC4) 개통(1992)
△남산 외인아파트 철거(1994)
△북한 일본인 처 고향방문(1997)
△클린턴 미국 대통령 방한, 김대중 대통령과 대북정책 집중 논의(1998)
◆1841년 화폐속의 인물 로리에(캐나다-) 태어남
로리에(Sir Wilfrid Laurier) 1841. 11. 20 ~1919. 2. 17 캐나다 2002년 발행 프랑스계 캐나다의 정치가
1841년 11월 20일 로어캐나다 퀘벡 생랭에서 출생, 1919년 2월 17일 오타와에서 타계
프랑스계(系) 주민의 가정에서 태어나 몬트리올대학에서 법률을 수학하고 변호사?신문기자를 거쳐 정계에 투신, 웅변으로 유명해 졌다. 1871년 퀘벡주(州)의회 의원에 선출되고 1874년 연방 하원의원이 되어, 프랑스계 주민과 영국계 주민과의 협력, 온화한 보호관세정책을 주장하였다. 1888년 자유당 당수, 1896년 프랑스계 주민으로서 첫 총리가 되어 1911년까지 재임하였다. 영국으로부터의 수입품에 대한 특혜관세나 남아프리카전쟁에의 파병 등으로 영국과의 관계를 밀접하게 하고, 알래스카 국경문제에서는 미국과의 협조로 최후의 미국-캐나다 국경문제를 해결하였다. 그는 온 생애를 프랑스계 캐나다인과 영국계 캐나다인 사이의 협력과 화합을 위해 바쳤고, 다른 한편 캐나다를 가능한 한 영국으로부터 독립된 상태로 유지하려 애썼다. 그는 개인적인 매력과 위엄, 두드러진 연설솜씨, 타고난 지적 능력으로 캐나다인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도 찬사를 받았다.
◆라게를뢰프 Selma (Ottiliana Lovisa) Lagerlof(1858.11.20~1940.03.16)
라게를뢰프는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최초의 여성이자 최초의 스웨덴 작가이다. 설화나 영웅담에 기초한 소설을 주로 썼다.병으로 한동안 다리를 절었던 것을 제외하면 행복한 유년기를 보냈다. 1885년에 란스크로나로 가서 교사가 되었고 그곳에서 첫번째 소설인 <예스타 베를링의 이야기 Gosta Berlings saga>(2권, 1891)를 썼다. 이 소설은 고향인 베름란드의 부유한 제철소 주인과 소지주들의 생활상을 연대기적으로 다룬 작품으로서 1890년대 스웨덴 낭만주의 부흥운동에 기여했다. 이탈리아를 방문한 뒤 시칠리아에 관한 사회주의적 소설인 <반(反) 그리스도의 기적 Antikrists mirakler>(1897)·<지주(地主) 이야기 En herrgardssagen>를 썼다. 1899~1900년 이집트와 팔레스타인에 체류하던 중 얻은 영감을 바탕으로 <예루살렘 Jerusalem>(2권, 1901~02)을 발표해 스웨덴 최고의 소설가로 자리를 굳히게 되었다.1909년 노벨상을 수상한 뒤, 그 상금으로 아버지가 죽은 후 팔았던 모르바카의 저택을 되사서 정착했다. 현대 소설가 중 가장 재능있는 작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힌다.
◆라게를뢰프 Selma (Ottiliana Lovisa) Lagerlof1858년 11월 20일 태어남 / 1940년 3월 16일 죽음
라게를뢰프(1909) "충실한 딸과도 같이 그녀는 자신이 물려받은 값진 유산인 모국어를 사용했다. 그녀가 쓴 모든 작품의 특징인 순수한 말투, 명쾌한 표현, 음악적 아름다움은 바로 여기에서 나오는 것이다. "- 클라스 아네르스테트(스웨덴 아카데미 회장)
라게를뢰프는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최초의 여성이자 최초의 스웨덴 작가이다. 설화나 영웅담에 기초한 소설을 주로 썼다. 병으로 한동안 다리를 절었던 것을 제외하면 행복한 유년기를 보냈다. 1885년에 란스크로나로 가서 교사가 되었고 그곳에서 첫번째 소설인 <예스타 베를링의 이야기 Gosta Berlings saga>(2권, 1891)를 썼다. 이 소설은 고향인 베름란드의 부유한 제철소 주인과 소지주들의 생활상을 연대기적으로 다룬 작품으로서 1890년대 스웨덴 낭만주의 부흥운동에 기여했다. 이탈리아를 방문한 뒤 시칠리아에 관한 사회주의적 소설인 <반(反) 그리스도의 기적 Antikrists mirakler>(1897)·<지주(地主) 이야기 En herrgardssagen>를 썼다. 1899~1900년 이집트와 팔레스타인에 체류하던 중 얻은 영감을 바탕으로 <예루살렘 Jerusalem>(2권, 1901~02)을 발표해 스웨덴 최고의 소설가로 자리를 굳히게 되었다. 1909년 노벨상을 수상한 뒤, 그 상금으로 아버지가 죽은 후 팔았던 모르바카의 저택을 되사서 정착했다. 현대 소설가 중 가장 재능있는 작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힌다.
◆독립문 준공(1897.11.20)◆ [1897년] 독립문 준공
독립협회는 독립정신을 고취하기 위해 영은문(왼쪽)의 석조기둥을 제외한 나머지를 헐어버리고 바로 그 뒤에 독립문을 세웠다. 1897년 11월 20일 프랑스의 개선문을 본따 독립협회가 서대문구 현저동에 독립문을 세웠다. 독립협회는 한국의 자주독립을 기원하며 청나라 사신을 접대하던 영은문 자리에 독립문을 세웠다.
사적 32호로 지정된 독립문의 창건당시 면적은2,800㎡였다. 현재면적은 2,640㎡이다. 독일공사관의 스위스인 기사가 서재필이 독립문의 윤각을 스케치한 것을 바탕으로 설계를 담당했고, 토목·건축공사는 심의석이 담당했다. 중국인 노무자가 노역을 맡았으며 공사비는 기부금으로 해결했다. 독립문은 중앙에 14.28m, 너비 11.48m의 홍예문(虹霓門)이 있고, 왼쪽 내부에서 옥상으로 통하는 돌층계가 있으며 문 앞은 영은문의 주추였던 돌기둥이 두 개 있다. 문의 주재료는 화강암이다.1978년 성산대로 건설로 인해 원래 독립문이 있던 자리에서 80m정도 북서쪽으로 이동해서 복원시켜 놓은 것이 오늘날의 독립문이다.
◆장지연, '시일야방성대곡' 발표(1905.11.20)◆장지연, '시일야방성대곡' 발표1905. 11. 20
<황성신문>(1898. 6. 23) 1905년 11월 20일 장지연은 자신이 발행하던 <황성신문>에 을사조약을 개탄하고 무효를 주장하는 글을 실어 서울에 배포했다. 장지연은 신문 2면에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란 제하에 논설을 싣고,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침략의 앞잡이로, 을사오적을 '매국의 적'이라고 비난하면서, 이 조약은 고종황제가 승인을 거부했으므로 무효라고 주장했다. 또한 기사를 통해 조약을 강제 체결하게 된 정황을 상세히 보도했다. 이 비분강개의 논설이 실린 <황성신문>은 평소보다 많은 1만 부가 인쇄되어 서울에 배포되었고, 신문이 배포되자마자 장지연과 신문사 직원 10명이 경무청에 체포되었으며 신문에 대해서는 무기정간령이 내려졌다. <대한매일신보>는 11월 21일자 논설에서 <황성신문>과 장지연을 찬양한 반면 <제국신문>은 '과격한 논설로 나가면 탄압을 받아 신문 없는 사회가 될 것이므로 신중한 태도를 취하자'는 자중의 자세를 취했다. 장지연은 체포된 후 태형을 선고받았으나 1906년 1월 24일 석방되었고, <황성신문>은 같은 해 2월 2일자부터 속간되었다.
◆황성신문 정간(1905.11.20)
일본이 우리 나라를 빼앗는 구실이 된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자, 황성신문의 주필 장지연은 이를 반대하는 내용의 '시일야 방성대곡(오늘에 목놓아 우노라)'이라는 사설을 썼다.을사조약이 일제와 일부 매국노들 사이에 맺어진 것이라 지적하고 국민들의 저항을 호소한 내용이었다. 이에 일본은 1905년(광무 9년) 오늘 황성신문 발행을 정지시켰다.황성신문은 대한 제국 시대 말인 1898년 9월 5일 창간되었으며, 한글과 한문을 섞어 쓴 국한문체의 일간으로 발간되다가 한일합방으로 결국 1910년 9월 14일 폐간되고 말았다.
◆러시아 작가 톨스토이 사망(1910.11.20)
도스토옙스키와 함께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레프 톨스토이가 1910년 11월 20일 사망했다.
나폴레옹의 모스크바 침입을 배경으로 젊은이들의 삶과 사랑을 그린 소설을 많이 발표했다. '전쟁과 평화', '안나카레니나', '부활' 등이 대표작이다.그를 사상가로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그의 소설과 생활이 인도주의를 바탕으로 해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안나 카레니나'의 결말 부분에서 안나를 죽게 하고 1주일간 울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 [1910년] 톨스토이 사망 작가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와 함께 19세기 러시아문학을 대표하는 톨스토이가 1910년 11월 20일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향년 82세였다. 가정의 계속된 불화를 못이겨 방랑 여행길에 올랐으나 도중에 병을 얻어 이날 아스타포보역의 역장 관사에서 숨을 거둔 것이다.톨스토이는 1828년 남러시아 툴라근처의 야스나야 폴랴나에서 명문 백작가의 4남으로 태어나 어려서 부모를 잃고 친척집에서 자랐다. 그는 1847년 대학교육에 실망을 느껴 카잔대학을 중퇴하고 향리로 돌아가 지주의 입장에서 영지내의 농민생활을 개선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잠시 방탕생활에 빠지기도 했다.1952년 복무중인 군에서 처녀작 `유년시대`를 익명으로 발표해 격찬받았으며, 1962년에는 소피아와 결혼하고 문학에 전념해 나폴레옹의 모스크바 침입을 중심으로 한 러시아사회를 그린 불후의 명작 `전쟁과 평화`와 `안나 카레니나`를 연이어 발표했다. 그는 러시아정교회에 속하지 않는 성령부정파교도 4,000여명의 미국이주 자금을 조달할 목적으로 1899년에 장편소설을 발표하기도 했는데 그것이 그 유명한 `부활`이다.
◆멕시코혁명 시작(1910.11.20)◆멕시코 혁명 시작 1910. 11. 20
마데로(1910경) 1910년 11월 20일 멕시코의 반 디아스파 진영은 혁명가 프란시스코 마데로가 발표한 '산루이스포토시 계획'을 실천하기 위해 봉기를 일으켰다. 이 날의 봉기는 실패로 끝났지만 멕시코 전역에 혁명에 대한 기대가 불붙으며 멕시코 혁명의 서막을 열었다. 1911년 봄 마침내 마데로가 이끄는 혁명군이 포르피리오 디아스의 대통령 7선을 저지하고 마데로는 멕시코의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마데로는 지나친 이상주의로 인해 멕시코 통치에 실패하고 암살당했다. 그뒤 디아스의 측근인 빅토리아노 우에르타가 다시 정권을 잡았으나 광기어린 전제적 통치를 펼치자 1914년 혁명군은 우에르타를 외국으로 쫓아냈다. 혁명군의 합의 없이 베누스티아노 카란사가 대통령 자리를 차지하자 혁명 세력은 다시금 반란을 일으켰고 카란사는 결국 1920년 철도 노동자 파업을 강제 진압하다 살해되었다. 11월 알바라 오브레곤이 새로운 대통령으로 선출됨으로써 혁명은 일단락되는 듯했으나 그뒤에도 연방군과 반란 세력 사이에 폭력과 마찰이 계속되다가, 마침내 1934년 개혁주의자 라사로 카르데나스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혁명이 마무리되었다.
◆국제군사재판(뉘른베르크 전범재판) 개정(1945.11.20)
독일 뉘른베르크는 나치시대 전당대회의 중심지였다. 1935년에는 유대인 말살을 위한 인종법 '뉘른베르크 법령'이 이곳에서 발표되었고 많은 유대인과 반나치 사형수가 처형당한 곳이다.뉘른베르크에 1945년 11월 20일 국제군사재판이 열린다. 독일전쟁 책임자들을 심판하기 위한 법정이다. 이에 앞서 미국·영국·소련·프랑스는 국제군사재판의 설립에 관한 협정에 서명했고,이에 의거 국제군사재판소가 설립되었다. 재판소는 앞의 연합국 4국이 임명한 재판관 4명과 주임검찰관 4명으로 소추위원회가 구성된다. 재판장은 영국인 판사 제프리 로렌스가 맡았고 변호인은 모두 독일인이 맡았다. 1급 나치전범 헤르만 괴링 등 24명이 기소되었다. 기소이유는 침략전쟁 계획과 모의죄,반평화죄,전쟁법규 위반죄,반인도죄다. 재판은 다음해 8월 31일까지 무려 403회에 걸쳐 개최된다. 판결은 46년 9월 30일과 10월 1일 이틀에 걸쳐 내려졌다. 자살하거나 병으로 공판이 연기된 2명을 제외한 괴링 등 12명은 교수형,3명은 종신형,4명은 징역형을 선고받았고 나머지 3명은 무죄였다.이 재판은 국제군사재판의 모델이 되었으며 극동국제군사재판(도쿄재판)과 함께 침략전쟁을 범죄로 규정했다. 또한 국가의 이름으로 저지른 비인도적 행위에 대해 개인의 책임을 물었다는 데 의의가 크다. '죄형법정주의' 등 피고측의 반대 논리도 있었으나 전쟁의 광기와 반인륜적 범죄를 단죄하는 데는 이의가 있을 수 없었다. 승자의 법은 곧 정의이기도 했다. 뉘른베르크는 2001년 유네스코 인권상을 수상했다. 나치 잔재 청산의 상징으로서.
◆로널드 레이건, 이란 무기밀매 시인(1986.11.20)
이란에 대한 무기판매로 최악의 위기를 맞개된 레이건 미대통령. 1986년 오늘 마침내 이란에 대한 무기판매 사실을 공식적으로 시인했다.레이건은 18개월 전 이란에 군장비 수송을 허락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러나 무기판매 스캔들은 미즈 미 법무부장관의 폭로로 더욱 가열됐다. 미즈는 미행정부가 무기판매 수익금을 나카라과의 반정부군인 콘트라반군에 지원했다고 폭로했다. 결국 미의회 상하원 조사위원회가 구성돼 공식적으로 조사가 시작됐다.이듬해인 1987년 11월 3인 조사위원회는 무기수익금을 콘트라반군 지원에 전용했다는 보고서를 미의회에 제출했다.
◆인천공항 잇는 영종대교 개통(2000.11.20)
2000년 오늘, 인천 국제공항과 인천 서구 경서동을 연결하는 영종대교가 개통됐다. 1993년 12월에 착공해 7년 만에 완공된 것이다.윗층은 6차선 도로, 아래층은 4차선 도로와 복선철로가 놓인 2층 구조로 돼있다. 세계 최초로 케이블을 콘크리트 구조물에 의지하지 않고 고정시킨 자정식 현수교. 총 연장 4.420m로, 자정식 현수교로는 가장 길다. 영종대교에 사용된 케이블은 직경 5.1mm짜리 와이어 6.720가닥을 겹쳐 만든 것으로 총중량이 1.300톤에 달한다.수도권의 다른 교통망과 연계돼 항로와 육로 고속화 시대를 이어주고 있다. 2001년 2월에는 육지 쪽 입구에 영종대교기념관이 건립됐다.
▶ 인천공항 잇는 영종대교 개통(2000)
2000년 오늘! 인천 국제공항과 인천 서구 경서동을 연결하는 영종대교가 개통됐다. 1993년 12월에 착공해 7년 만에 완공된 것이다. 윗층은 6차선 도로, 아래층은 4차선 도로와 복선철로가 놓인 2층 구조로 돼있다. 세계 최초로 케이블을 콘크리트 구조물에 의지하지 않고 고정시킨 자정식 현수교!
총 연장 4.420m로, 자정식 현수교로는 가장 길다. 영종대교에 사용된 케이블은 직경 5.1mm짜리 와이어 6.720가닥을 겹쳐 만든 것으로 총중량이 1.300톤에 달한다. 수도권의 다른 교통망과 연계돼 항로와 육로 고속화 시대를 이어주고 있다. 2001년 2월에는 육지 쪽 입구에 영종대교 기념관이 건립됐다.
▶ 레이건, 이란 무기밀매 시인(1986)
이란에 대한 무기판매로 최악의 위기를 맞개된 레이건 미대통령! 1986년 오늘 마침내 이란에 대한 무기판매 사실을 공식적으로 시인한다. 레이건은 18개월 전 이란에 군장비 수송을 허락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러나 무기판매 스캔들은 미즈 미 법무부장관의 폭로로 더욱 가열됐다. 미즈는 미행정부가 무기판매 수익금을 나카라과의 반정부군인 콘트라반군에 지원했다고 폭로했다. 결국 미의회 상하원 조사위원회가 구성돼 공식적으로 조사가 시작됐다. 이듬해인 1987년 11월 3인 조사위원회는 무기수익금을 콘트라반군 지원에 전용했다는 보고서를 미의회에 제출했다.
▶ 앙골라 평화협정 조인(1994)
아프리카 남서부에 있는 앙골라! 1994년 오늘! 19년동안 지속된 앙골라의 내전이 두 정파간의 평화협정 체결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됐다. 정부군들이 평화협정 체결을 환영하며 서로 부둥켜 안고 환호성을 지른다. 1975년 포르투갈로부터 독립한 앙콜라는 19년동안 계속된 내전으로 폐허가 됐다. 앙골라 내전은 미국과 소련등 강대국들의 주도권 싸움에서 비롯된 냉전의 축소판이었다. 소련의 지원을 받는 정부군과 미국의 지원을 받는 완전독립연맹은 한치의 양보없이 싸워 왔다. 그러나 1990년 들어 냉전체제가 끝나면서 앙골라에서도 평화협상이 시작됐다. 협상체결에도 불구하고 두 정파 사이의 뿌리깊은 갈등과 열악한 경제 사정은 앙골라가 풀어야할 숙제로 남게됐다.
▶ 스페인 프랑코 총통 사망(1975)
36년동안 스페인을 통치해온 프란시스 프랑코 총통. 1975년 오늘! 여든 세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프랑코는 2년에 걸친 스페인 내전이 끝난 뒤인 1939년 수도 마드리드를 점령하고 총통 자리에 올랐다.
2차 세계대전 때는 스페인의 중립을 선언했던 프랑코는 이후 강력한 반공 우익노선을 걸어왔다.
프랑코가 사망하자 망명길에 올랐던 알폰소 국왕의 손자 카를로스가 새 국왕이 됐다.
<참고>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에 오름(286.11.20)
http://economy.hankooki.com/lpage/opinion/200711/e2007111917584363820.htm
<참고> 독립문 완공(1897.11.20)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50661&yy=2007
<참고> 뉘른베르크 전범재판 개정(1945.11.20)
http://www.donga.com/fbin/moeum?n=dstory$c_134&a=v&l=0&id=200711200074
<참고> 남산 외인아파트 철거(1994.11.20)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53836&yy=2005이 게시물을..
오늘의 관심뉴스는 기업의 사회공헌활동에 관한 기사입니다. 외국계 생보사 알리안츠 생명은 불우한 이웃들이 겨울을 따뜻하게 보낼 수 있게 연탄을 전달한다고 합니다. 이 기사를 보면서 제가 느낀 것은 한사람의 독지가가 기부나 나눔을 할 때는 그 규모에 있어 한계가 있지만 기업과 단체에서 관심있는 기업체와 여러 사람이 함께 할 때 그 규모가 엄청나고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지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정부나 유관단체에서 이러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우리의 불우이웃이 즐거워질 그날을 기원하며.. 오늘을 맞이합니다. 수고하세요~----오-늘-의--관-심-뉴-스-----------------------------
알리안츠생명, 봉사활동 캠페인 [머니투데이 2008.11.19 15:07:14]
[머니투데이 김성희기자]알리안츠생명은 이달부터 연말까지 전국의 임직원과 설계사들이 참여하는 '사랑의 봉사활동 캠페인'을 벌인다고 19일 밝혔다.지난 18일에는 이명재 부사장을 비롯한 본사 임직원 30여명이 서울시 노원구 중계동 일대에 거주하는 독거노인 15가구에 연탄 3000장을 배달했다. 이를 시작으로 28일까지 대전, 진주, 인제 등 전국 6개 지역에서 독거노인과 소년소녀가장 150세대에 연탄 3만장을 전달할 예정이다. 알리안츠생명은 올해로 3년째 연탄나눔 운동에 참여하고 있다.이번에 전달하는 연탄은 알리안츠생명 임직원이 어려운 이웃을 돕기 위해 자발적으로 조성한 '러브펀드' 기금과 회사의 후원금으로 마련한 것이다.11월 말과 12월 초에는 영업단 또는 지점 차원에서 설계사와 고객이 함께 하는 봉사팀을 구성해 직접 담근 김치를 지역 내 독거노인과 소년소녀가장에게 전달할 예정이다.또한 12월 한달 동안 '알리안츠의 아름다운 약속'이라는 소년소녀가장 결연 캠페인을 통해 단위 기관별로 소년소녀가장 1명씩을 선정, 결연을 맺고 지속적으로 후원할 방침이다.
모바일로 보는 머니투데이 "5200 누르고 NATE/magicⓝ/ez-i"김성희기자 sh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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