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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기원 박사의 周·人·工 四書三經] *—<제42강> (2016.11.21)
— <周·人·工 四書三經>은 ‘周易과 人性을 工夫하는 四書三經 강좌’를 말한다 —
맹자(孟子) (제7강) —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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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공부> ; 1. <맹자 6강> [복습] ‖ 2. 오늘의 <맹자> 읽기
* [오늘의 맹자(孟子) 읽기②] *— [공손추·상](제2장a-1) *
* [공손추·상](제2장) ① — [我四十不動心] 현자(賢者)의 마음은 흔들리지 않는다
03-02-01 公孫丑問曰 夫子加齊之卿相 得行道焉
雖由此霸王 不異矣 如此則動心 否乎
孟子曰 否 我四十不動心
02 曰若是則夫子過孟賁 遠矣 曰是不難 告子 先我不動心
공손추(公孫丑)가 물었다. “선생님께서 제나라의 경상의 자리에 오르시어 도(道)를 행할 수 있게 된다면, 비록 이로 말미암아 패업(霸業)을 이루거나 왕업(王業)을 이루게 된다 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와 같다면 마음이 동요되겠습니까? 그렇지 않으시겠습니까?”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다. 나는 40세가 되었으니 마음이 동요되지 아니한다.”
“이와 같다면 선생님께서는 맹분(孟賁)보다 뛰어남이 많으십니다.” / “이것을 어렵지 아니한 것이다. 고자(告子)도 나보다 먼저 마음이 동요되지 아니하였다.”
* [자구(字句)의 해석] —————
· ‘夫子加齊之卿相’에서 ‘加’는 ‘(齊의 卿相의 자리에) 오른다’는 뜻.
` ‘如此則動心’에서 ‘動心’은 ‘마음이 움직인다’는 뜻. 글자 그대로 번역하면 ‘마음을 움직이게 한다’는 뜻이 되지만, 우리말에는 목적어를 주어처럼 사용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여기서도 ‘마음이 움직인다’로 번역하면 자연스럽다. ‘下雨’를 ‘비를 내리게 한다’로 번역하기보다는 ‘비가 내린다’로 번역하는 것과 같다.
· ‘我四十不動心’에서 ‘四十’을 두 가지 뜻으로 번역한다. ① 이 말을 하고 있을 당시 맹자의 나이를 40으로 보는 견해이고, ② 맹자의 나이는 이보다 훨씬 많은데 ‘不動心’을 이루었을 당시의 나이가 40세였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論語』에서 공자가 ‘四十而不惑’이라고 한 말은 70세가 지나서야 한 말이지만, 여기서는 ‘四十’ 뒤에 ‘而’가 없으므로 전자의 견해가 옳다고 봐야 할 것이다
· ‘孟賁’(맹분)은 힘이 세고 용감했던 장사의 이름. 살아 있는 소의 뿔을 뽑을 수 있었다.
· ‘夫子過孟賁 遠矣’는 ‘부자께서 맹분보다 지나는 것이 멀다’로 직역, ‘맹분보다 나은 정도가 많다.’
· ‘告子’ ; 맹자와 동시대의 사람. 이름은 ‘不害’. 맹자와 성(性)에 관하여 많은 논란을 벌임.
* [강 설(講說)] —————
제(齊)나라의 정승이 되어 왕업이나 패업을 이루게 되면 마음이 기뻐서 동요할 것인지 어떤지를 묻는 공손추(公孫丑)에게 맹자가 답변한 것이다. 공자는 ‘사십이불혹(四十而不惑)’이라 하였으니, 그것은 어떠한 유혹이나 고난을 받더라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고요한 상태를 유지하였다는 말이다. 공자처럼 되기를 바라는 맹자도 그러한 경지가 되었을 것이다.
주자(朱子)가 말했다. “맹분의 혈기의 용(勇)을 공선추가 빌려서 맹자의 부동심의 어려움을 칭찬한 것이다. 맹자께서 ‘고자는 도(道)를 알지 못하는데도 나보다 먼저 부동심을 하였으니, 이것은 족히 어려운 것이 못된다.’ 하고 말씀하신 것이다.(孟賁血氣之勇 丑蓋借之 以贊孟子不動心之難 孟子言告子 未爲知道 乃能先我不動心 則此未足爲難也)”
사람은 누구나 끝없이 충격을 받으며 살아간다. 살아가면서 받는 충격들을 극복하지 못하면 고통을 받게 된다. 그런데 충격은 마음이 받는 것이므로 충격을 극복한 마음의 상태가 바로 부동심(不動心)이다. 이 부동심은 ‘진리 학습’과 ‘명상 수양’을 통해서 내공(內攻)이 깊어져서 자득(自得)하는 것이다.
* [공손추·상](제2장) ② — [不動心章] ; ‘북궁유’와 ‘맹시사’와 ‘증자’의 용기(勇氣)
03-02-03 曰不動心 有道乎 曰有
04 北宮黝之養勇也 不膚撓 不目逃 思以一毫挫於人 若撻之於市朝
不受於褐寬博 亦不受於萬乘之君
視刺萬乘之君 若刺褐夫 無嚴諸侯 惡聲至 必反之
05 孟施舍之所養勇也 曰 視不勝 猶勝也 量敵而後進 慮勝而後會
是畏三軍者也 舍豈能爲必勝哉 能無懼而已矣
06 孟施舍 似曾子 北宮黝 似子夏
夫二子之勇 未知其孰賢 然而孟施舍 守約也
07 昔者 曾子謂子襄曰 子好勇乎 吾嘗聞大勇於夫子矣
自反而不縮 雖褐寬博 吾不惴焉 自反而縮 雖千萬人 吾往矣
08 孟施舍之守 氣 又不如曾子之守約也
(공손추가 물었다) “마음이 동요되지 않도록 하는 데에 방법이 있습니까?” / “있지. 북궁유(北宮黝)가 용기를 기르는 방법은, 피부가 찔려도 움직이지 아니하며 눈이 찔려도 피하지 아니하고서, 조금이라도 남에게 꺾이면 시장이나 조정에서 종아리를 맞은 것처럼 생각하여, 갈관박(褐寬博)에게 (모욕을) 받지 않고 또한 만승(萬乘)의 임금에게도 (모욕을) 받지 않으며, 만승의 임금을 찌르는 것을 갈부(褐夫)를 찌르는 것처럼 보아서 제후를 두려워함이 없으며 (자기를) 험담하는 소리가 이르면 반드시 보복하는 것이었다.”
* [자구(字句)의 해석] —————
· ‘不膚撓’에서 ‘膚’(부)는 ‘피부’, ‘撓’(요)는 움직이다. ‘膚’와 ‘撓’는 도치되었다. 타동사와 목적어가 연결될 때, 타동사와 목적어가 도치되는 예를 따른 것이다. ‘不膚撓’는 ‘(피부가 찔리더라도) 피부를 움직이지 않았다’는 뜻이다.
· ‘不目逃’도 역시 ‘目’이 ‘逃’와 도치되어 있다. ‘(눈이 찔리더라도) 눈을 피하지 않았다.’
· ‘思以一毫挫於人 若撻之於市朝’에서 ‘挫’(꺾이다)와 ‘撻’(매를 맞다)은 ‘於’와 연용되어 피동형으로 해석한다. ‘市朝’는 ‘시장이나 조정’ 즉 ‘많은 사람들이 보는 공공연한 장소’를 뜻함.
· ‘不受於褐寬博’에서 ‘褐寬博’(갈관박)은 ‘너절한 베옷을 입은 사람[褐夫]’ 즉 ‘미천한 사람’
· ‘思以一毫挫於人’에서 ‘挫’(좌)는 ‘치욕(恥辱)이나 모욕(侮辱)을 당하다’의 뜻이다.
· ‘惡聲至’에서 ‘惡聲’은 ‘험담하는 소리’, ‘惡聲至’는 ‘험담하는 소리를 들으면’
(이어지는 맹자의 말씀) “맹시사(孟施舍)가 용기를 기른 방법은, ‘이기지 못하는 것을 이기는 것처럼 보는 것이니, 적(敵)을 헤아린 뒤에 진격하여 이길 것을 고려한 뒤에 회전(會戰)한다면 이는 (적의) 삼군을 두려워하는 자이다. 내 어찌 반드시 이기는 것만을 할 수 있겠는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을 뿐이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맹시사는 증자(曾子)와 유사하고 북궁유는 자하(子夏)와 비슷하다. 이 두 사람의 용기에 대해서 누가 더 나은지 모르겠으나 그러나 맹시사의 지킴이 치밀하다.
* [자구(字句)의 해석] —————
· ‘是畏三軍者也’에서 ‘三軍’은 ‘제후국 중에서 큰 나라의 군대’ 천자의 군대는 ‘六軍’이다.
· ‘舍豈能爲必勝哉’에서 ‘舍’는 ‘孟施舍’의 이름이니 ‘내가~’로 해석.
· ‘子夏’(자하) ; 공자의 제자[孔門十哲의 한 사람]. 성은 ‘복(卜)’, 이름은 ‘상(商)’이다.
‘子夏’는 예(禮)를 특히 중시한 사람으로, 자하의 계통을 이어받은 사람이 순자(荀子)다.
· ‘守約也’에서 ‘約’은 ‘긴요하다’, ‘압축이 되어 있고 요령이 있다’
옛날에 증자(曾子)가 자양(子襄)에게 말하기를 ‘자네는 용기를 좋아하는가? 내 일찍이 선생님에게서 큰 용기에 대해서 들었다. 스스로 돌이켜 보아서 바르지 아니하면 비록 갈관박(褐寬博)이라도 내 두려워하지 않겠는가. 스스로 돌이켜 보아서 바르면 비록 천만의 사람이라 하더라도 내 가서 대적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맹시사(孟施舍)의 지킴은 기(氣)이니 또한 증자의 지킴의 치밀한 것만 못하다.”
* [자구(字句)의 해석] —————
· ‘子襄’(자양)은 증자의 제자이다.
· ‘吾不惴焉’에서 ‘惴’(췌)는 ‘두려워한다’
· ‘氣’(기) ; ‘기운(氣運)’ ‘인간의 몸을 움직이는 원동력’
* <제2장>② (不動心章)의 [강 설(講說)] —————
정자(程子)는 “마음에 주체가 있으면 능히 흔들리지 않는다.(程子曰 心有主則能不動矣)” 했다. 그런데 부동심(不動心)을 터득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 한 가지는 ‘한 가지 일에만 관심을 집중시키는 것’이다.
북궁유(北宮黝)는 남에게 모욕을 당하지 않는 일에만 모든 신경을 집중(集中)시킴으로써 부동심을 터득하였고, 맹시사(孟施舍)는 이기고 지는 결과에 상관하지 않고 오직 공격하는 것에만 신경을 집중함으로써 부동심을 터득하였다. 부동심(不動心)을 터득하였다는 점에서는 두 사람이 같지만, 북궁유가 남에게 모욕을 당하지 않는 것에 집중한 것은 남과 나를 구별하는 데에 주력한 것이고, 맹시사가 이기고 지는 것을 따지지 않은 것은 남과 나를 구별하지 않는 데 주력한 것이다.
주자(朱子)가 말했다. “북궁유는 남을 대적하기에 힘쓰고 맹시사는 자신을 지키기를 오로지 하였으며, 자하는 성인[공자]을 독실하게 믿었고 증자는 자기 몸에서 돌이켜서 찾았다. 그러므로 이 두 사람[북궁유와 맹시사]이 증자나 자하와 비록 동등한 무리가 아니나, 그 기상을 논하면 각기 유사한 바가 있는 것이다.(黝務敵人 舍專守己 子夏篤信聖人 曾子反求諸己 故二子之與曾子子夏 雖非等倫 然論其氣象 則各有所似)”
증자(曾子)는 남과 나를 구별하지 않는 마음인 효(孝)와 충(忠)을 강조하고 덕(德)을 밝히는 데 주력한 사람이며, 자하(子夏)는 남과 나를 구별하는 예(禮)를 강조한 사람이므로, 맹시사는 증자와 유사하고 북궁유는 자하와 비슷하다. 그런데 인간의 본질이 인(仁)이라는 견지에서 보면, 맹시사가 중시하여 지키고 있는 것이 차원이 높으므로 더 치밀하다고 할 수 있다.
증자(曾子)는 자신의 행동이 본마음에서 벗어나지 않은 것이면 상대가 아무리 강하더라도 과감하게 대결하지만, 본마음에 벗어난 것이라면 위축되어 보잘것없는 상대도 두려워했다. 이는 상대를 의식하지 않고 오직 본마음을 실천하는 데에만 주력한 것이다. 남과 나를 구별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맹시사와 증자가 비슷하지만 맹시사가 지킨 것은 공격하는 것이므로 육체적인 요소에 속하는 것이고, 증자가 중시하여 지킨 것은 본마음을 실천한 것이므로 마음의 차원에 속하는 것이다. 따라서 증자가 지킨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 [요점 정리] <제2장>② (不動心章)에서 맹자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내용 ———*
* 북궁유의 용기 ; ‘不膚撓 不目逃’ … ‘惡聲至 必反之’ [외적 용기] ◀[子夏] 예(禮)
* 맹시사의 용기 ; ‘視不勝 猶勝也’ … ‘能無懼而已矣’ ‘守約也’ [내적 용기]◀[曾子]
자하(子夏)는 예(禮)를 중시하였으므로 북궁유와 같은 외적(外的) 용기에 해당하고 증자(曾子)는 ‘一日三省吾身’함으로써 맹시사와 같이 자신의 내면(內面)의 올바름을 추구하였으니, 용기의 핵심(核心)인 ‘마음’을 보존하는 것이다.
증자(曾子)가 제자인 자양(子襄)에게 “스스로 돌이켜보아서 바르면[自反而縮] 천만의 사람이라 하더라도 내 가서 대적할 것이다.”라는 말을 인용하여, 맹자(孟子)는 “맹시사의 지킴은 기(氣)이니, 또한 증자의 지킴의 치밀한 것만 못하다.”고 하여 맹시사의 기(氣)보다는 증자의 ‘마음의 바름[縮]’을 더 강조했다. 맹시사의 기(氣)는 몸의 기운(氣運), 행동으로 나타나는 분위기라면, 증자의 마음[心]은 성선(性善)의 밭이다. 결국 ‘마음[心]의 바르고 의로운 것을 수약(守約)하는 것’이 대용(大勇)이라는 결론이다. 이는 맹자(孟子)가 주창하는 ‘성선(性善)’의 뿌리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다.
* [공손추·상](제2장) ③ — [孟子의 不動心] ; ‘志’는 ‘氣’를 거느리는 장수(將帥)이다.
03-02-09 曰敢問夫子之不動心 與告子之不動心 可得聞與
告子曰 不得於言 勿求於心 不得於心 勿求於氣
不得於心 勿求於氣 可 不得於言 勿求於心 不可
夫志 氣之帥也 氣體之充也 夫志至焉 氣次焉 故曰 持其志 無暴其氣
10 旣曰 志至焉 氣次焉 又曰 持其志 無暴其氣者 何也
曰志壹 則動氣 氣壹則動志也 今夫 蹶者趨者 是氣也而反動其心
(공손추가 계속 묻는다) “감히 묻겠습니다. 선생님의 부동심과 고자(告子)의 부동심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 “고자(告子)가 말하기를, ‘말에서 납득이 되지 아니하면 마음에서 구하려고 하지 말며, 마음에서 납득이 되지 아니하면 몸[氣]에서 구하지 말라’고 하였는데, 마음에서 납득이 되지 아니하면 몸에서 구하지 말라는 것은 괜찮지만, 말에서 납득이 되지 아니하면 마음에서 구하지 말라는 것은 불가(不可)하다. 대저 지(志)는 기(氣)를 거느리는 장수(將帥)이고 기(氣)는 몸에 가득 차 있으며, 대저 지(志)는 지상(至上)이고 기(氣)는 그 다음이다. 그러므로 ‘그 지(志)를 간직하면서도 그 기(氣)를 난폭하게 하지 않는다’고 한 것이다.” /
“이미 지(志)는 지상(至上)이고 기(氣)는 그 다음이라 하시고 또 그 지(志)를 간직하면서도 그 기(氣)를 난폭하게 하지 않는다고 하신 것을 무슨 뜻입니까?” / “지(志)가 한결같으면 기(氣)를 움직이고 기(氣)가 한결같으면 지(志)를 움직이는 것이니, 지금 넘어지거나 달리는 것은 기(氣)이지만 도리어 그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다.”
* [자구(字句)의 해석] —————
· ‘氣體之充也’에서 ‘之’는 도치되었음을 나타내는 역할. ‘氣充於體也’로 놓고 해석한다.
* [강 설(講說)] —————
앎에는 귀로 듣고 아는 것과 마음으로 이해하는 것, 몸으로 아는 것 등 세 종류가 있다. 귀로 듣고 아는 것은 들은 말 그대로 알 뿐 그 말이 함축(含蓄)하고 있는 진정한 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참으로 아는 것이 아니다.
기(氣)는 몸을 움직임을 가능하게 하는 원동력이므로 ‘기(氣)로써 안다’든가, ‘기(氣)에서 구한다’ 등의 말은 ‘몸으로 아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말에서 납득한다’는 말은 귀로 듣고 아는 것이고, ‘마음에서 납득한다’는 말은 마음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몸으로 아는 세계가 마음으로 다 이해할 수 없고, 마음으로 아는 세계가 말로 다 이해될 수 없다. 앎이 언어의 세계에 국한되면 앎의 세계는 그만큼 축소되고 제한되는 것이다. 몸에서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인 사랑의 감정이 마음속으로 다 이해될 수 없고, 또 마음에 있는 사랑의 감정이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으므로, 말로 표현된 사랑은 사랑 그 자체를 온전히 표현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말은 마음을 표현한 것이지만 마음을 있는 그대로 표현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말을 듣고 그 뜻이 다 이해되지 않을 때는, 그 말이 표현하려 했던 마음의 세계에 침잠하여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부분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마음의 세계에서 이해되지 않는 부분은 더욱 침잠하여 몸으로 체득하는 데까지 이르러야 원래의 완전한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
고자(告子)는 사람의 본질에 있어서 동일성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의 마음도 사람마다 다른 것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해되지 않는 말을 듣고 그것을 마음속에서 이해하려고 고심할 때 번민이 생기므로, 고자(告子)의 입장처럼 남의 말을 듣고 이해되지 않더라도 몸으로 실천할 수 있도록 노력하지 않는다면 마음에 동요되는 일은 적을 것이다.
맹자(孟子)의 입장은 이와 다르다. 인간의 존재는 마음과 몸의 두 요소로 구성된다. 샘의 밑바닥에는 샘물로 솟아오르는 지하수가 있듯이 마음의 밑바닥에는 마음으로 솟아오르는 움직임이 있으니 그것이 이른바 성(性)이다.
마음과 몸으로 구성된 인간의 본질은 결국 성(性)으로 귀결되므로, 인간의 삶은 성(性)을 터득하여 성(性)에 따라 살 때 본질적이고 고귀한 것이 된다. 귀로 아는 것, 마음으로 아는 것, 몸으로 아는 것이라는 앎의 세 층위가 일직선으로 연결되는 것이 아니다. 귀로 알고 마음으로 안 다음에 도달하는 근본적인 앎이 성을 아는 것이다. 몸으로 아는 것은 성(性)을 알고 실천한 결과 저절로 도달하는 지점이다.
참다운 삶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먼저 말을 이해해야 하고 다음에 그 말이 표현하려 했던 마음의 세계를 이해해야 하며, 그 마음의 밑바닥에 존재하는 성(性)을 아는 데 심화되어야 한다. 그러나 몸으로 아는 단계에 도달하기 위하여 굳이 노력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몸으로 아는 단계는 성(性)을 알기만 하면 저절로 터득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맹자는 ‘마음에 납득되지 아니하면 기(氣)에서 구하지 아니한다는 말을 가하지만, 말에서 납득되지 아니하면 마음에서 구하지 아니한다는 말은 불가(不可)하다고 했다.
몸의 삶을 유지하는 원동력이 기(氣, 몸의 기운)이고 그 기(氣)를 작용하도록 지시하는 것이 지(志, 마음)이므로 지(志)와 기(氣)의 관계는 장수(將帥)와 병졸(兵卒)의 관계와 같다. 장수가 우수하면 병졸을 잘 거느릴 수 있고 병졸이 충실하면 장수를 강하게 할 수 있는 것처럼 지(志)와 기(氣)는 서로 영향을 준다. 비유컨대 기(氣)가 말이라면 지(志)는 말을 타도 가는 사람과 같다. 사람이 의지(意志)대로 말을 몰고 가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지(志)가 기(氣)를 조종하고 움직인다. 지(志)가 훌륭할수록 기(氣)의 작동이 순조롭다. 그러나 말이 갑자기 넘어지거나 놀라서 뛰면 말을 탄 사람을 놀라게도 하고 떨어지게도 한다. 이와 만찬가지로 기(氣) 때문에 지(志)가 영향을 받기도 한다. 맹자는 지(志)를 동요시킨다고 하지 않고 심(心)을 동요시킨다고 했다. 심(心)에는 정(情)은 물론이고 생각하고 분별하고 지각(知覺)하는 기능이 포함된다.
* [핵심 정리] 고자의 부동심과 맹자의 부동심 ; ‘기(氣)’와 ‘마음[心]’의 작용에 대하여
먼저 주자(朱子)의 주석을 살펴보자. “맹자께서는 그[고자]의 말을 외우시고 단정하시기를 ‘저가 마음에 <편안함을> 얻지 못하거든 기운에 도움을 구하지 말라’고 한 것은 근본을 급히 여기고 지엽을 느슨히 한 것이니 그래도 가(可)하지만, ‘말에 이해되지 못하거든 마음에 알기를 구하지 말라’고 한 것은 이미 밖에서 잃고 마침내 안마저 버렸으니 그 불가(不可)함이 틀림없다.”(孟子旣誦其言而斷之曰 彼謂不得於心而勿求諸氣者 急於本而緩其末 猶之可也 謂不得於言而不求諸心 則旣失於外而遂遺其內其不可也必矣 然凡曰可者 亦僅可而有所未盡之辭耳)고 하신 것이다.
손기원 선생이 강설한다. 맹자는 우선 ‘不得於言 勿求於心 不得於心 勿求於氣[말에서 납득이 되지 아니하면 마음에서 구하려고 하지 말며, 마음에서 납득이 되지 아니하면 몸[氣]에서 구하지 말라]’고 한 고자(告子)의 언급을 인용하여 그 문제점을 비판했다. 여기에서 기(氣)는 맹시사의 기(氣)와 상통하는 개념으로, ‘말’과 같이 몸[행동]으로 드러나는 분위기를 말한다.
맹자(孟子)는, 고자가 말한 ‘마음에서 얻지 못하면 말[氣運]에서 구하지 말라’는 것은 옳은 말이지만, ‘말에서 얻지 못하면 마음에서 구하려고 하지 말라’고 한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예컨대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에게서 ‘사랑한다는 말’을 구하지 말라는 것은 옳다. ‘마음’이 없는데 ‘말로만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위선(僞善)이거나 가식(假飾)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랑한다’는 말은 얻지 못하더라도 그 마음속의 뜻[사랑]을 구하지 말라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사람이, ‘사랑한다’는 말은 하지 않더라도 사람의 마음속에는 본래적인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맹자가 주창(主唱)하는 성선설(性善說)의 바탕이다.
무엇보다 맹자는 ‘마음[心]’을 중시한다. 지(志)는 ‘之와 心’의 합체어이니 ‘마음이 나아가는 바’이다. 그리하여 “마음[志]은 기(氣)를 통솔하는 장수(將帥)이며 기(氣)는 사람의 몸에 충만한 기운(氣運)이다.(志氣之帥也 氣體之充也)”라고 했다. 그래서 “지(志)는 지상(至上)이고 기(氣)는 그 다음이다. 그러므로 ‘그 지(志)를 간직하면서도 그 기(氣)를 난폭하게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夫志至焉 氣次焉 故曰 持其志 無暴其氣)” 장수가 우수하면 병졸을 잘 거느릴 수 있고 병졸이 충실하면 장수를 강하게 할 수 있는 것처럼 지(志)와 기(氣)는 서로 영향을 준다. 정자(程子)는 그 양자의 영향관계를 “지(志)가 기를 움직이는 것은 90%요, 기(氣)가 지를 움직이는 것은 10%(程子曰 溱氣者什九 氣動志者什一)”라고 하였다.
주자가 말했다. "그러므로 지(志, 意志)는 진실로 지극함이 되고 기(氣)는 곧 그 다음이 되니, 사람이 진실로 마땅히 그 의지(意志)를 공경히 지켜야 하나 또 그 기(氣)를 기름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이는 내(內)와 외(外), 본(本)과 말(末)이 서로 배양되는 것이니, 이는 맹자의 마음이 일찍이 부동심(不動心)하기를 기필하지 않으셨는데도 자연히 동하지 않으신 바의 대략이다.(故志固爲至極而氣卽次之 人固當敬守其志 然亦不可不致養其氣 蓋其內外本末交相培養 此則孟子之心 所以未嘗必其不動而自然不動之大略也)”
그런데 맹자는 “지(志)가 한결같으면 기(氣)를 움직이고 기(氣)가 한결같으면 지(志)를 움직이는 것(曰 志壹 則動氣 氣壹則動志也)”이라고 하면서 그 ‘한결같음’이 바로 부동심(不動心)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 부동심(不動心)은 ‘아무 것에도 거리낌 없는 순수한 마음의 평정(平定) 상태’이니 이것이 곧 ‘하늘마음’이요 사람의 ‘본성(本性)’이다. 부동심을 통하여 마음의 본성을 유지하는 상태가, 바로 맹자의 명상이론(瞑想理論)의 근본이라고 할 수 있다.
<계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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