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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훈 30년 시화전 참여 작품
정세훈 시화용 시선집
50편
제1부
한평생 못 지을 집
한평생
흙 위에
못 지을 집이라서
못내
서러운
맞벌이 아내야
내 가슴
터 삼아
당신의 집 지으라
나는
당신 위해
흙이 되기로 하였나니
집 짓거들랑
뒤뜰에
해당화 심어 놓아
나를 위해
흘리는 눈물
살며시 감추어도 보라.
못 다한 사랑노래
못 다한
내 생生이
생生을 다 하거든
아내야.
고운 눈매에
눈물짓지 말아라.
나 죽어
당신 가슴에
소르르 누우리니
눈물 고인
그 가슴도
버릴 일이다.
다만,
목 놓아
불러 보던
내 흩어진 사랑노래
두어 개
주워 다가
무덤가의
들풀로
뿌려 보아라.
함박눈
소리 없이
다가오네.
그 모습
허름한 당신 같아
두 손 모아
받쳐 드니
손가락 사이사이
저리도록
못내 서러운 사랑이 되어
말없이 스미어드네.
우리 집 가을
더 이상 깊어지지 않을 만큼
밤은 깊어졌습니다.
내일의 노동을 위해선
벌써 깊은 잠에 들었어야 하는데
도대체 잠이 아니 옵니다.
말은 없지만 옆에 누운 아내도
아직 잠이 들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사 온 지 육 개월도 채 안되었는데
또 이사를 가야 합니다.
주인집 막내아들의
돌연한 결혼으로
셋방을 내놓아야 합니다.
억지로 잠을 청하려는 나에게로
아내가 서럽게 안겨오며
우리 집 가을을 말합니다.
"가을인가 봐요
귀뚜라미가 울잖아요."
조그마한 창문에 비춰오는 달빛이
시리도록 밝아 보입니다.
낮잠
사르르르르 -----
바람이 들어왔다 나가는가 하여
감았던 눈 살며시 뜨고
방문을 바라보았습니다.
아무 일도 없었다고
방문은 닫혀 있고
계단을 내려가는
철인이의 발자국 소리
닫혀 진 방문에
조용히 부딪혀옵니다.
야근으로 먹고 사는
아빠의 낮잠 때문에
방문 하나 마음 놓고
여닫지 못하는 우리 철인이
이 추운 겨울
밖에서 떨고 있을 것을 생각하면
방 한 칸의 어거지 낮잠이
날더러
그만 일어나라 합니다.
일어나서,
안 쓰면 못 배기는
눈물 나는
글을 쓰라 합니다.
부평 4공단 여공
늘 그녀들로부터 위축되어 있었다
맘에 드는 상대가 나타나도
내 처지만 생각하면
적극적으로 나서질 못했다
가까이 접근을 하면
공돌이 주제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며
면박을 줄 것만 같아 그냥 지나치고 말았다
궁여지책으로 펜팔을 했다
펜팔 업체로부터 소개받은 그녀는
부평 4공단에서 여공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립다, 보고 싶다, 사랑한다는 말 대신
연장 작업, 휴일 특근작업, 36시간 교대작업,
공장생활의 고단한 이야기들이 오고갔다
아프지만 병원 갈 돈이 없다는 소식이 오고갔다
“아프지만”이란 소식에
그녀가 보고 싶어졌다
“병원 갈 돈이 없다”는 소식에
서로 사랑하게 되었다
맑은 하늘 하나 낳아보리
비 내리는
눈 내리는
날 궂은 그 어느 날
그대에게 가리
왜 하필이면
맑은 날 놔두고
궂은 날 왔느냐
울먹이는 그대와
눈물로
얼싸안고
맑은 하늘 하나
낳아보리
저 별을 버리지 말아야지
저 별을
버리지 말아야지.
밤하늘 꼭대기
저 별을
버리지 말아야지.
내 비록 철야노동으로
하루하루를 때워가고 있지만.
앳된 사진
칠십 년대 싸구려 인화지에 담겨버린누렇게 빛이 바랜 한 장場의 노동.
삼십여 년을 훌쩍 지나와 버린열일곱 어린 나이의 얼굴들.검게 그을린 라면 냄비를 끼고 둘러앉아한 잔의 소주잔을 마주치고 있다.저마다 기름때 절은 철지난 겨울 작업복을 무릎 또는 팔꿈치께 까지 걷어붙였다.그러나 만면 가득 웃음이 쏟아질 뿐도무지 상심한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담길 때가 마침 봄날이어서 일까.하얗게 회칠을 한 공장 담벼락에 기대어 꽃을 피운 노란 개나리 꽃무더기가 함빡 배경으로 담겼다.
어느 사이인가손가락이 잘리고시력이 손상되고청력을 잃고가슴이 결리고혹은 주검이 되어버린앳된 사진이,
내 낡은 사진첩 한 귀퉁이를 장식해 주고 있다.
산재産災 1-분칠
거동마저 불편해진 그는
끝내 묻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셋방 쪽문 밑으로
해 그림자 깔릴 무렵이면
어김없이 돌아오던 아내가
달포 째 늦어지는 이유를
묻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화장을 별로 즐겨하지 않던 그녀가
요즈음 들어서 부쩍
얼굴에 분칠을 해대는 이유를
묻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밤마다 늦은 밤 부엌에 나가
조용히 긴긴 울음을 놓는 이유를
묻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앞으로 잔업이 있으면
있는 대로 다 해야겠다는
아내의 슬픈 말을
끝까지 믿기로 마음먹었다.
아내가
퇴폐 이발소에 나가는 것 같다는
문병 왔던 친구의 말을
잊기로 마음먹었다.
개밥바라기
모든 그림자들이 어둠 속으로 저물어버린 초저녁이었다네. 저문 날 어두워진 밤하늘을 무심코 바라보고 있었는데아 글쎄 어린 시절 이후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살아왔던금성이란 별이 마침 서쪽 하늘가에 걸려 반짝거리고 있었던 거야.태양계의 혹성들 중에서 지구와 가장 가까이 있다는 저 금성은새벽 동쪽하늘에 나타날 땐 샛별이라 불리지만초저녁 서쪽하늘에 나타날 땐 개밥바라기라 불리고 있지.개밥바라기라 불리고 있는 거기엔 물론 특별하고 심오한 뜻을 달리 담고 있는 것이겠지만개밥바라기라는 글자 그대로만 본다면 개밥을 담아내는아가리가 바라진 조그마한 사기그릇을 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한마디로 하잘 것 없어 보이고 천박스럽게까지 보이는저 개밥바라기 그 어느 곳으로 그 무슨 일을 하러 가는 것인지해가 지면 맨 먼저 어둠 깔린 초저녁 서쪽하늘 외진 길을 따라 나타났다가는, 밤하늘 모든 별들이 마치 제 세상인양 마냥 활개치고 있는 동안 밤새도록 그 어느 곳에서 그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것인지도무지 그 모습을 보이지 않다가도, 밤하늘 모든 별들이 제풀에 지쳐 사라져 가는 새벽녘이 되어서야새벽 동쪽하늘 외진 길을 따라 다시 나타나고 있단 말이야.그 이름도 가슴 벅찬 샛별이란 이름을 찬란하게 달고서.
하잘 것 없어 보이고 천박스럽게까지 보이던 개밥바라기라는 이름이 눈물겹도록 고귀하게 보이고 찬란하게 보이는 샛별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나타나기까지에는, 저물어가던 서쪽하늘에서 떠오르는 동쪽하늘로 다시 나타나기까지에는,어두워가던 초저녁에서 밝아오는 새벽으로 다시 나타나기까지에는,그 어느 곳에 있는 그 어느 누구도쉽사리 상상할 수도 없는 그 모진 곳에서쉽사리 상상할 수도 없는 그 모진 일들을저 홀로 감당해낸 용기와 아픔이 있었지 않았나 싶은 거야.
어찌했던 간에, 이 세상에 개밥바라기만큼 확실한 샛별도 없다는 거야.
한여름 밤의 노래
길섶의 이름 없는 풀꽃들
아직도 해당화 그늘에서
수군대는 한여름 밤이다.
앵두꽃 매만지던
나의 꿈은
셋방살이 창살에 갇히었다.
아내여,
날 저문 쉴 시간이다.
노동의 멍에를 벗고
그대 지친 팔을
이제 창가에 모으라.
별빛이 떨어져 오는
슬픈 이 밤.
애써 그리움 감추지 말고
걸 맞는 노래를 부르라.
나는 펜을 들어
그대의 노래를 받아 적으리니,
해당화 꽃잎에
빠짐없이 적어 놓으리니.
제2부
저 고향의 길섶에
나를
떠나보낸 고향 길.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마모된 기계소리만큼만
추억을 깔고 누워라.
바람 부는 길가에서
민들레
꽃씨를 휘날리지 않아도 좋고
길모퉁이 도랑에서
시냇물 소리
흐르지 않아도 좋아라.
슬픔처럼 다듬어진
저 고향의 길섶에
다만,
되밟고
돌아가야 할
내 옛 발자욱 같은 흰 눈발만
조금 조금 나리어라.
저 하늘에 구름이 흘러 흘러
저 하늘에
구름이 흘러 흘러
먹구름 비구름
속절없이 흘러 흘러
이렇게도
비가 오는
날 어두운
날이면
내 고향 비얄진 땅
버려진
묵정밭 잔돌들이
생각납니다.
빈 손 쥔
농자農者들만 같은
묵정밭
그 잔돌들
이 변두리 공단마을
빈자貧者들 되어
가슴 저리게 가슴 저리게
생각납니다.
가을
구부정히 촌노가 간다
어스름 빛 어려 오는
해질녘 뒷 마당가 곰삭은 두엄
한 바지게
퍼 담아 지고 간다
꾸불꾸불,
산 땅거미 지는
산밭둑길 간다
소나기
소나기 한차례 몰고 간 뒤에
옥수수
한 뼘쯤씩 자라고 있을까.
옥수숫대 씹어 단물 빨던 나
잡초처럼 커온
내 고향 월계리.
사모님이 된
소꿉친구 여자아이
내 등에 업히어 수줍이 건너던
홍수 난 시냇물은
옥수수 밭 지나 산모퉁이에서
아직도 여전히 흐르고 있을까.
빈들
터엉
비어 있었다.
내 눈에
보이는 것이 하나 없었고
내 귀에
들려오는 소리 하나 없었다.
그저
사랑 많은 어머니의 마음처럼
고요하였다.
마치
아무것도 지닌 것이 없어
나에게 줄 것이 없는 듯이
왜 이리
자꾸만 눈물이 쏟아지려 하나.
말없는 빈들이여
오 나의 늙으신 어머니여!
봄날이 눈부셔 눈물 납니다
화창해서 눈이 부신 봄날
쉰네 살 아들 엄마 뵈러갑니다
먹고 살기 바쁘다
돈 벌어야 한다
수발들어 드리지 못하고 입원시킨
치매 걸린 엄마 뵈러갑니다
뵈러가는 길 산허리 돌아 굽이굽이
연분홍 아기 진달래 피었습니다
엄마가 좋아하는 할미꽃도 피었습니다
자식을 업어주는 모습으로 피었습니다
봄날이 눈부셔 눈물 납니다
어머니가 우신다
“난 안 운다! 울지 않는다!”
어머니가 난 안 운다며 울지 않는다며
우신다
6·25전쟁 그 북새통에 헤어진
코흘리개 어린 아이였던 아들을
남북이산가족 상봉장에서 만난
구순 나이 늙고 구부러진 어머니
품 떠난 지 오십년 만에
북에서 온 아들을
칠순이 되어 온 아들을 부여안고
난 안 운다 울지 않는다며
우신다
차가운 사랑
차가운 사랑이
먼 숲을 뜨겁게 달굽니다
어미 곰이 애지중지 침을 발라 기르던
새끼를 데리고 산딸기가 있는 먼 숲에 왔습니다
어린 새끼 산딸기를 따먹느라 어미를 잊었습니다
그 틈을 타 어미 곰
몰래 새끼 곁을 떠납니다
어미가 떠난 곳에
새끼 혼자 살아갈 수 있는 길이 놓였습니다
버려야 할 때 버리는 것이
안아야 할 때 안는 것보다
더욱 힘들다는 그 길이
새끼 앞에 먼 숲이 되어 있습니다
탯줄을 끊어 자궁 밖 세상으로 내놓던
걸음마를 배울 때 잡은 손을 놓아주던
차가운 사랑이
먼 숲을 울창하게 만듭니다
패랭이꽃
아버지 주검이 담긴 꽃상여를 따라
고향 땅 월계리 선산으로 가는 길
잠시 쉬어 가는 산모롱이에
패랭이꽃 무더기무더기 피어있네
가야 할 곳
가고 싶어도
마음대로 갈 수 없던 시절이
아버지에게 있었듯이
피어야 할 때
피고 싶어도
마음대로 필 수 없던 시절이
저 패랭이에게도 있었을까
가야 할 곳 가고 싶어 아버지
눈물 젖어 눈물 젖어 살았듯
피어야 할 때 피고 싶어 저 패랭이
눈물 젖어 눈물 젖어 살았을까
아버지 주검을 담은 꽃상여를 따라
고향 땅 월계리 선산으로 가는 길
잠시 쉬어 가는 산모롱이에
패랭이꽃 무더기무더기 흔들리고 있네
달
함부로맘 돌리지 말라 하네
맘 한번 돌리면세상이 달라 보일 것 같은 나에게
맘 한번 돌리는 것은산중에 홀로 사는 이나
한번쯤맘 편히 생각해 볼일이라고
이름 모를 어린 누이 야근하고 돌아가는
산중 아닌 속세의 내가생각해 볼일이 아니라고
겨울 새벽 서녘 하늘에나지막하게 걸린 정월 대보름 달
달치고는 너무 커다랗고 둥글어서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은 그 모습으로
함부로 맘 돌리지 말라 하네
첫사랑
녀석이 나보다부잣집 아들이었다는 것도학업을 많이 쌓았다는 것도돈을 많이 벌었다는 것도그 어느 것 하나 부럽지 않았다
다만, 녀석이내 끝내 좋아한다는 그 말 한마디전해지 못했던 그녀와 한 쌍이 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을 적
난 그만녀석이 참으로 부러워 섧게 울어버렸다
나를 시인이라 부르지 마
나를 시인이라 부르지 마
글 쓰는 사람이라 부르지 마
그냥 노동자라 불러줘
가난한 가정에 태어나
어릴 때 공돌이가 된
노동자라 불러줘
시인은 노래하지만
나는 노래하지 않아
이야기를 할 뿐이야
가난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한 여인의 남편으로서
두 자식의 아비로서
비밀 언덕이 없고
배움이 없고
백이 없는 노동자가
이 한 세상을
어떻게 사랑하며 살아가는지
그저 이야기할 뿐이야
나를 시인이라 부르지 마
열심히 노동을 팔아 살아가는
노동자라 불러줘.
제3부
밥 먹는 법
밥 먹는 것에도 법이 있다는 걸
엄동설한 공사판 새참
야간노동 공장 야식
더불어 허겁지겁 먹어 본
없는 반찬 가난한 밥상
함께 옹기종기 먹어 본
우리는 절실하게 안다네
내 밥 수저에 올릴
반찬 한 젓가락 집어
상대방의
부실한 밥 수저에
말없이, 고이 올려주는, 법
관심關心
아무 것도 뿌리 내리지 못할 것만 같던집채만한 바위덩이에어느 사이인가 조그마한 금이 가고금이 간 그 틈바구니에낙엽이 떨어지고산비탈 어디선가 바람결에 날아와흙먼지가 쌓이고날아가던 이름 모를 산새 용변을 떨어뜨리고
홀로 외롭던 민들레 홀씨 가녀린 새싹을 틔우네
달뜨는 마을
어둔 밤,
달 하나로
모든 걸 말해 버리는 마을마을이
아직도 내 맘에 솔찬히 남아 있다
"여보! 오늘밤 저 담이 참으로 밝지요?"
"그러게 말이야. 참으로 밝구먼."
엄동설한
달동네 단칸 셋방 독거 할머니
달랑,
한 장 남은
금이 간 연탄
부서질세라
조심조심
노끈으로 동여매시네
장작더미
폭설에 갇힌
외딴 산 집 뒤꼍
쌓아놓은 장작들이
따스운 것은
혹독한 추위와
막막한 폭설과
당당하게
맞설 수 있는 것은
저마다 하나하나
불이 붙어
외딴 산 집 구들장을
데울 수가 있어서가 아니다
엄동설한 뒤꼍을
장작더미 되어
함께
지키고 있어서다
행 복
난 참으로 행복한 놈이다
남을 억누르며 못살게 구는
남의 눈에 피눈물 나게 하는
그러한 힘을,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으니
난 참으로 행복한 놈이다
그 무엇보다도
내 육신이 언제나 남에게 얻어터질 수 있는
아주 작은 볼품없는 몸뚱아리라는 것이
그리하여, 남을 하나도 때려눕힐 수 없다는 것이
나는 죽어 저 하늘에 뿌려지지 말아라
나는 죽어 저 하늘에 뿌려지지 말아라저 하늘의 해와 달과 별무리로 뿌려지지 말고뿌려지어 뿌려지어 외롭지 않은 이 산천에 뿌려지거라
내 주검 이 산천에 뿌려지어곰삭은 흙이 되면이름 모를 초목들과 이름 모를 들꽃들이 달려오고때로는 이름 모를 벌레들이쓴 입맛을 다시며 고단하게도 하겠지
인생은 살아서 한 철이듯죽어서도 한철주검에서도 달려오는 기쁨이 있고쓴 입맛을 다시는 고단함도 있는 것
살아생전 내 생에 저 하늘을 탐하지 않고해와 달 별무리 또한 탐하지 않았으니내 주검 또한 이 산천에서끝끝내 기쁨과 고단함의 눈물을 함께 맛보아라
산천에 비가 오고 바람 부는 날이면눈이 내리고 인적 끊긴 날이면나는 초목과 들꽃의 꽃가루 향기로 앉아그대 외로운 가슴으로 날아가는 노래를 부르겠네
저 천상이 이 산천을 탐하는 노래를 부르겠네
가을비
어찌하다가절실하게 뜨겁지도 않고그렇다고냉철하게 차갑지도 않게 되었니
사십 줄 나이 나에게 물으며가을비가 지나간다
어찌하다가 줄기차지도 않고그렇다고세차지도 않은 가을비가
추적추적 나를 적시고 간다
몸의 중심
몸의 중심으로
마음이 간다
아프지 말라고
어루만진다
몸의 중심은
생각하는 뇌가 아니다
숨 쉬는 폐가 아니다
피 끓는 심장이 아니다
아픈 곳!
어루만져 주지 않으면
안 되는
상처 난 곳
그곳으로
온몸이 움직인다
맑은 하늘을 보면
맑은 하늘을 보면
걱정이 생겨
슬픔도 생겨
어디선가 갑자기
구름들이 달려와
하늘을
온통 덮어버릴 것만 같구먼.
천성
하늘은
작은 구름
큰 구름
다
껴안고 사네
저항
금방 배설한 배설물이 아니다
배설 한지 두어 달쯤 이나 되어 보이는한때는 여름 땡볕에 말려지기도 했다가한때는 소낙비에 흠뻑 젖기도 했다가한때는 장마철 습기에 부패되기도 했다가 이제는 퍼질러 질대로 퍼질러 진 배설물이다
그 언뜻 보아 진기 없는 듯 보이는 말똥한복판을 뚫고 들어가코를 들이밀고 입을 박아둥글둥글 먹거리를 만들어밀고 가는 말똥구리의 땀 젖은 뒷발질!
뒷발질은 지금 풀숲에 숨겨놓은 작은 집으로 간다
농부여! 밭을 갈아라
참된
농부는
봄을
기다리지 않는다.
아직 먼
봄을
불러들인다.
긴
겨울
쇠스랑을
헛간에서
녹슬게 하지 않는다.
그래서,
얼어붙은 땅을
두려워 않는다.
묵정밭의
자갈을
다스리는 법을
안다.
농부여!
밭을 갈아라.
밭은
지금
얼어
붙은 채로
그대를
기다린다.
이
한겨울에.
제4부
두엄 속 굼벵이
뜨거운 여름날이건
날 추운 겨울날이건
썩어 가는 김 뿌연
두엄더미 속에서
하얀 등줄기에
터질 듯,
한 가닥 푸른 힘줄 내지르고
굼실굼실
꿈틀대는 살아 있음이여
아, 맑은 꿈이여
봄나물
돌짬 돌틈
비집고
사이 사이
얼굴 내밀었구나
못난 듯이
열린 창문
열린 창문에
길이 하나 있습니다
열린 창문은
그 길로
세상을 내다보라 합니다
왠지 그 열린 창문이 싫어져
창문 없는 벽을 바라봅니다
창문 없는 벽은
자기에겐 길이 없다 합니다
그 길 없는 벽에
나는 열길 백길 천길을
만들어 봅니다
저런 게 하나 있음으로 해서
저런 게 하나 있음으로 해서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거지
아무 쓸모없는 듯강폭 한가운데에버티고 선작은 돌섬 하나
있음으로 해서,
에돌아가는 새로운 물길 하나 생겨난 거지
강물아
바다로 가는 강물아
그냥 흘러만 가다오.
강둑의 자갈돌들
쓸어가지 말고
강변의 모래무덤
허물지 말고
바다로 가는 강물아
그냥 바다로만 가다오.
강둑엔 자갈돌들 있어야 하고
강변엔 모래들이 있어야 하듯
너는 바다로 가야 하는
강물이잖니
너 흘러가는 길
외로움도 괴로움도 너만의 것
자갈 모래 슬픔은 어루만져주고
힘으로 데려가지 말아라.
바다에서 살아갈 강물아
바다처럼 그저 넓게 넓게만
흘러가다오.
그냥 바다로만 가다오.
꽃그늘
애써 둘러보지 않아도
보이는 건
봄꽃들만 무성하여서
화사함에
난 그만
깜빡 죽어버리고 싶었어.
어느 얼빠진 시인이
봄꽃에 저 홀로 취해서
함부로 지껄여댄 것처럼
그늘진 곳 하나 없는 꽃빛깔로
이 세상에
진정 봄이 온 줄 알았지.
헌데, 눈깔을 까뒤집고 살펴보자니
꽃이란 묘한 것이어서
참으로 묘한 것이어서
그 꽃자리에
꽃 피운 만큼
한 다발 그늘도 만들고 있어.
무시무시한, 꽃그늘을 만들고 있어.
꽃 무덤
종다리 날기 전에는
진달래 그리움처럼 피지 말고
백목련 눈물처럼 피지 말아라
아픔 같은 개나리도 피지 말아라
한 시절을
꽃물들이듯 피어나도
날개 꺾인 종다리
날지 못하니
차라리,
쉬 사라지는
언덕배기 아지랭이로나
피어올라라
종다리 날기 전에는
꽃일랑은 이제 피우지 말아라
씨감자
-상처
토실토실한 감자알을 주렁주렁 매달고 다시 살아날 수 있는 씨감자가 되려면 상처를 입어야만 해 상처도 혈서를 쓰듯 새끼손가락 하나 깨물어 피만 조금 내는 그러한 조그마한 상처가 아니라 적어도 두서너 번은 성한 몸뚱이 온전히 절단당하는 그야말로 치명적인 상처를 입어야만 해 그래야만 상처 입은 몸 미련 없이 푹 썩히어 새싹을 틔우고 새 줄기를 내리고 끝내는 새 감자알을 키워나가는 감자밭 이랑에 비로소 묻힐 수 있는 거야
별
별을 바라본다.
어둠 속에서
별을 바라본다.
달라 하지 않아도
빛을 주는
별을
오늘 낮 동안
나는 까마득히
잊었다.
그리고,
어둠도
잊었다가
이 밤 또다시
어둠 속에서
별을 바라본다.
어둔 밤
어김없이
나를 찾아와
어둠을 짊어지고
홀연히
떠나가는 별을
새
제 날고 싶을 때
곧바로 날개 짓 하는
저 작은 둥지의 가녀린 새
그러나,
함부로 그 날개 짓 하지 않는다
제 낳은
새알 하나의 무게에
웅비의 슬픔을
달 줄 아는 새만이
제대로
저 하늘로
날아가는 법을 안다
바다
사랑에
사무침이 있다면
그 사무침은
결코 가두어두지 않는 것
가슴속 아득히
담아두고
드넓게 드넓게
소용돌이치는 것
그리하여,
세상의 고단한 눈물 삼키고
스며든 작은 물방울들
아픈 상처
어루만져주어
공존의 마을을
이루는 것
무지개로
마을을 하늘에 닿게 하는 것
봄꽃
보송보송한 땅에서만 살아간다면
봄꽃이 아니지
따뜻한 곳에서만 피어난다면
봄꽃이 아니지
때로는 꽁꽁 얼어붙기도 하고
때로는 겨울찬바람 불기도 하는
그런 곳에서 살아
그런 곳에서 피는 거지
겨울이 지났다고
혼자서만 피어난다면
봄꽃이 아니지
봄꽃이 아니지
메마른 들녘 여기저기
서로서로 더불어
한마음으로
흐드러지게 피는 거지
봄이 왔다고 마냥 피어있는 것은
봄꽃이 아니지
천지에 푸른 들녘
포근히 깔아놓고서
홀연히 사라지는 거지
홀연히 사라지는 거지
우리가 이 세상 꽃이 되어도
우리가
이 세상 꽃이 되어도
잘난 꽃 되지 말고
못난 꽃 되자
함부로
남의 밥줄
끊어 놓지 않는
이 세상의
가장 못난 꽃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