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덕성 교수, 브니엘신학교 총장
1. WCC의 의도
WCC의 총무 울라프 트베이트 목사는 부산총회를 앞두고 가진 기자회견에서 “한국교회는 자기중심적 시각에서 벗어나 세계교회의 경험을 수용하라”(경향신문, 2012.3.16.)고 말했다. 한국교회로부터 겸허히 배우겠다고 말한 몇 달 전의 음조와 판이하다. 한국교회 안의 WCC 부산총회 개최 반대 목소리를 의식한 듯하다. 트베이트의 말은 성경적 신앙과 신학을 버리고 자유주의 신학, 종교혼합주의, WCC 에큐메니칼 신학으로 이동, 전환하라는 말로 들린다.
한국교회는 성숙해야 하고 배워야 할 과제를 많이 안고 있다. 지상교회는 마지막 날까지 미완성 공동체이다. 누구에게나 배울 점이 있고, 어느 단체가 유익한 면이 있다. 한국교회가 ‘세계교회의 경험’을 배우고 수용하고 새로운 교회 모델로 삼으면 그 뒤에는 무엇이 따라오는가? 생명력이 넘치는 성경적 교회가 될 것인가? 그렇지 않다. 이와는 정반대일 수 있다. 여기에 WCC의 심각성이 있다. WCC를 따라가면 교회가 생명력을 상실하고, 퇴락하고, 사라지게 된다.
WCC의 종교간의 대화와 에큐메니칼 신학을 추종하던 유럽, 북미, 대양주 주류교회들은 생명력을 상실하고 조종(弔鐘)을 울리고 있다. 퇴락의 원인은 프로그램의 결핍이나 시대적 변화에 신속히 대처하지 못한 까닭이 아니다. 새벽기도회, 금요철야기도회, 주일성수를 하지 않은 탓이 아니다. 상대주의 진리관, 만인 보편 구원관, 종교다원주의, 포용주의, 신앙무차별주의에 기초한 ‘신학’ 때문이다. 기독교 진리에 대한 확신의 부재, 십자가 도리 중심의 복음의 실종, 하나님의 말씀 결핍 때문이다.
2. WCC의 신학
WCC가 널리 알리고자 하는 신학적 특징은 15가지로 집약된다. 이 점들은 역사적 기독교와 복음주의적인 한국교회의 신앙과 완전히 상반된다. 상이한 진리 인식 패러다임이 가져다준 이 주지들은 역사적 기독교와 신학충돌을 일으킨다.
1) WCC는 종교다원주의를 표방한다. “하나님의 구원이 특정 문화-종교, 인종, 지역에 제한되지 않는다”고 한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 모든 종교인들을 다 사랑한다고 한다. 종교다원주의는 만인보편구원 사상에 기초해 있다. 종교다원주의는 WCC 안에 소수 종교인들의 주장이 아니라 이 단체가 몇 가지 문서들을 통해 공식적으로 표방하는 신학이다.
2) WCC는 기독교 진리의 상대적 가치만을 인정하는 종교대화주의를 표방한다. 타종교간의 대화에서 새롭게 참된 진리를 찾아낼 수 있다고 한다.
3) WCC는 종교혼합주의를 추구한다. 기독교공동체만이 아니라 모든 종교들을 아우르고 하나로 묶으려고 한다. ‘폭넓은 에큐메니즘’(wider ecumenism)과 ‘거대 에큐메니즘’(macro ecumenism)을 추구한다.
4) WCC 신학은 예수를 꼭 믿어야 할 당위성을 제시하지 못한다. 이 단체의 선교와 복음전도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리가 없다. 부산총회에 보고할 세계선교복음전도위원회의 최근 문서에도 십자가 진리와 믿음으로 의롭다고 일컬음을 받는 진리 제시가 없다. WCC는 ‘전 복음’(whole gospel)과 통전적 신학(holistic theology)를 읊조린다. 그라나 이 단체의 신학과 그 진리인식 패러다임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유일 신앙이 들어설 공간이 없다. ‘오직 예수 구원’이라는 신앙은 WCC 신학과 에큐메니칼 운동의 최대의 장애물이다. WCC는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구원의 도리와 이 진리의 복음 전도를 위해 동전 한 닢도 사용하지 않는다. 사회구원지상주의 선교에 매진한다.
5) WCC는 용공주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민족주의 인민해방운동과 공산주의 게릴라 단체들에게 거액을 제공했다. 쿠바에서 군사훈련을 받고 소련제 무기를 들고 인종차별 정책을 펼치는 정부를 전복하려는 단체들을 지원했다. WCC의 용공정책은 폭력을 용인한 데까지 나아갔다.
6) WCC는 개종전도금지주의를 표방한다. 로마가톨릭교회와 정교회 신자들에게 이신칭의의 구원론 중심의 개종전도 활동을 금한다. 우상숭배, 성인숭배, 죽은 자를 위한 기도, 마리아 숭배가 잘못이라고 가르치지 못하게 한다. 선점(先占)한 이들 교회와 협조하여 인간화, 해방투쟁, 피조물들과 상생을 추구하는 등 이른바 ‘하나님의 선교’만 하라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전도를 도외시한다. 인민해방, 구조악 철폐, 빈자 구제를 선교와 복음전도의 지상(至上) 과제로 삼는다.
7) WCC는 로마가톨릭주의화되었다. 로마와 가시적 교회 일치를 도모하려고 종교개혁 신앙의 정박지를 버렸다. 가시적 일치의 장애물인 ‘오직 성경’ 원리를 포기했다. 그 자리에 ‘전통론’이라는 모호한 이론을 대체하여 모든 기독교 전통이 유효하다고 본다. 신학은 ‘오직 의견수렴’의 원리에 따른다.
8) 로마가톨릭교회는 개신교회를 ‘교회’로 인정하지 않는다. 현 로마 교황은 2007년에 유일한 그리스도의 교회는 로마가톨릭교회만이라고 성명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종래의 배타적 교회관을 쇄신하거나 바꾸지 않았다고 했다.
9) 교황청의 태도변화로 말미암아 반세기 동안 지속해 오던 WCC 세계교회일치운동은 ‘물 먹은 격’이 되었다. WCC는 딜레마에 빠졌다. 개신교회들을 이끌고 교황좌 아래로 ‘귀정’(歸正)하든지, 에큐메니칼 은동의 목표를 사회복음주의 활동과 교제에 제한해야 할 처지이다. 부산총회에 보고할 세계선교복음전도위원회의 새 문서는 인간과 피조물들의 ‘상생’(相生)에 초점을 맞춘다.
10) WCC는 성경적인 교회일치운동의 전제인 신앙고백적 일치를 보호하는 울타리를 갖고 있지 않다. ‘다른 복음’을 외치는 자와 ‘거짓 교사’를 규제, 제재할 수 있는 기능이 없다. WCC는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381)를 회원들이 고백해야 할 신조로 천명한다. 사도신경과 마찬가지로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는 훌륭한 문서이다. 그러나 21세기 교회 일치의 신조로는 불충분하다. 현대교회의 일치고백으로 충분하지 않다. 인간의 부패성, 이신칭의 교리,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 화목제물 사역, 인간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 성경의 권위와 신적 속성을 언급하지 않는다. 죄와 회개, 은혜의 수단, 천국과 지옥, 내세의 실재와 상벌을 다루지 않는다. 역사적으로 조건 지어진 로마가톨릭교회의 미신적인 오류를 반박하는 내용이 없다. 뉴에이지운동, 프리메이슨, 포스트모더니즘, 진리 상대주의에 근거한 짝퉁 기독교 대한 지침이 없다.
11) WCC는 교회의 본질에 해당하는 신앙고백적 일치는 도외시하고, 다만 가시적 교회 일치에만 관심을 가진다. 성경적 신앙고백적 에큐메니즘을 사실상 무시한다. 이러한 구도에서 이 단체는 실제로 하나의 세계적 교회(Una Sancta) 건설을 추구해 왔다.
12) WCC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지 않는다. 역사서와 문학서와 같은 인간의 책으로 여긴다. 다만 하나님이 독자들의 마음속에 특별한 무엇을 일으키기 때문에 그 책이 권위를 지닌다고 한다. 무모하다거나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말씀이라는 논의는 하지 않는다. 종교다원주의, 종교대학주의, 종교혼합주의는 성경관과 궤를 같이 한다.
13) WCC는 시류(時流)에 따라 순교자 개념을 바꾸었다. 인도주의 활동, 인간화, 혁명투쟁, 해방운동을 하다가 희생된 기독인을 순교자로 추서한다. 예수 그리스도 신앙에 대한 신앙고백 차원의 순교에는 무관심하다.
14) WCC는 야누스의 얼굴을 가졌다. 한 입으로는 예수를 주(Lord)로 고백한다. 그러나 다른 한 입으로는 예수 그리스도 밖에도 하나님의 구원이 있다고 한다. WCC는 니케아-콘스탄티노플신조를 회원교회들이 고백해야 할 신조, 곧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신조를 고백문으로 천거하던 그 해(1990)에 예수 그리스도 밖에도 하나님의 구원이 있다고 하는 종교다원주의 표방 문서를 발표했다.
15) WCC는 포용주의, 다원주의, 신앙무차별주의(indifferentism, latitudinarianism)을 추구하면서 복음주의자들을 앞세워 진리를 위협하는 ‘다른 복음’에 대한 교회의 경계심, 민감성을 갖지 못하게 한다. WCC에 들러리 서는 복음주의자들은 이단보다 더 위해(危害)하다.
3. 패러다임의 충돌, 신학충돌
WCC에 들어가서 리더십을 발휘하여 이 단체가 복음적으로 전향하도록 하자는 일부 복음주의 신학자들의 주장은 지나치게 순진한 생각이다. 진리 패러다임의 성격과 신학충돌을 고려하지 않은 오판이다.
역사적 기독교와 WCC 기독교는 서로 다른 신학 패러다임을 가지고 있다. 진리와 인식에 관련된 패러다임의 속성은 중간을 배제하며, 타협을 허용하지 않는다. 패러다임의 차이는 지동설과 천동설의 관계와 같다. 하나의 패러다임은 다른 패러다임을 포용하거나 다원성을 수용하는 태도를 거부한다. 상대 패러다임의 이동, 전환, 포기를 요구한다.
부산총회를 기회로 이 단체가 복음적으로 변하기를 희망하는 신학자들의 기대는 공상(空想)에 지나지 않는다. 트베이트는 한국교회가 ‘세계교회의 경험’을 따라 배우라고 한다. 복음주의적인 한국교회가 변화하고 패러다임을 이동하여 WCC 에큐메니칼 신학을 받아들이라고 한다.
WCC에 가담하는 복음주의자들은 반기독교 운동의 들러리 역할을 했을 뿐, 이 단체의 신학 노선을 ‘쬐끔’이라도 복음적으로 바꾼 적이 없다. 비성경적 홍수의 물줄기를 가로막거나 중단시킨 전례가 없다. 이 단체의 신학이 피사의 사탑처럼 로마가톨릭주의, 자유주의 신학, 종교다원주의, 진리상대주의, 성경불신주의로 기울어져도, 개신교회를 떠받들고 있는 기둥들이 뽑혀져도, 기독교의 중추적인 진리가 부정되어도, 그 흐름을 막지 못했다. WCC는 자신의 신학 패러다임을 바꿀 정도의 신학적 소양을 갖춘 복음주의자들을 초대하지 않는다.
신학사상은 하루아침에 개조할 수 있거나 끌어당길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한 통 속에 집어 넣고 섞을 수 있는 성질의 어떤 것이 아니다. 검정색 페인트 통에 한 숟갈의 흰색 페인트를 집어넣는다고 하여 통 안의 페인트가 희게 되지 않는다. 맑은 강물과 탁류의 강물이 합치면 탁류의 강이 된다.
역사적 기독교와 자유주의 기독교 합하면 자유주의 기독교가 된다. 유서 깊은 기독교와 WCC는 교학상장(敎學相長)의 관계 아니다. 두 그룹은 결합할 수 없는 서로 다른 사고구조, 패러다임, 신학사상을 가지고 있다. 신학충돌이 불가피한 신념체계, 신앙이해, 진리관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앎이 무엇인가를 알아 갈수록 겸손해 진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서로에게서 배우고 상호보충적으로 타인을 수용하는 관용성은 필요하다. 자기의 약점을 변명, 미화, 게토화하는 태도는 바람직하지 않다. 그러나 기독교와 WCC의 신학충돌은 중간을 배제하는 진리와 패러다임의 갈등이다.
WCC는 한국교회의 ‘패러다임의 이동’을 재촉한다. 그리스도 구원 유일 신앙을 고백하는 복음주의 신앙, 개혁주의 신학을 버리고 WCC 신학 패러다임으로 이동하라고 재촉한다. 한국교회가 WCC의 표리부동(表裏不同)의 신학, 양두구육(羊頭狗肉)의 신학을 따라가면 어떻게 될까? WCC의 신학과 에큐메니칼 운동에 앞장선 유럽과 북미와 대양주 교회들의 조종(弔鐘) 소리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4. WCC와 영적 쓰나미
알렉산드리아의 정교회 감독 파르테니오스는 WCC 제7차 총회(오스트레일리아 캔버라, 1991)의 개회 기조연설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악의 신비,’ 악마, 사탄, 그리고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의 신비,‘ ’악령의 실재성‘을 너무나 쉽게 잊는다고 용감하게 말했다.
WCC가 ‘무당신학자’ 정현경 교수(당시 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학과 교수)를 앞세워 총회 개회식 행사로 초혼제(招魂祭) 푸닥거리를 한 마당을 펼치던 자리였다.
사탄의 선교(mission)의 최대 과제는 예수가 그리스도 또는 유일한 그리스도라는 복음을 듣지 못하게 하고, 이 같은 신앙고백의 터에 세워진 교회를 무너뜨리는 일이다. 사탄의 선교는 WCC의 신학에 힘입어 유럽교회를 괴멸시키는 데 성공했고, 북미와 대양주의 주류 교회들의 생명력을 앗아갔다. 한국교회를 무너뜨리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사단의 지능은 신학자보다 훨씬 높다. 사단과 신학자가 의기투합하고, 복음주의자들이 맞장구쳐주면, 교회를 무너뜨리는 일은 아주 쉽다.
성경은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고후 6:14)라고 가르친다. 성경이 이 같이 가르치는 데는 이에 상응하는 어떤 까닭이 있지 않겠는가? 천둥이 치면 만물이 응하는 것처럼 함께 어울리다보면 남의 의견을 무의식 가운데 따라 가게 되고 동화된다. 화이부동(和而不同)은 부화뇌동(附和雷同)과 사문난적(斯文亂賊: 이단적 언동으로 종교의 도를 어지럽힘)으로 발전할 수 있다.
WCC 부산총회는 영적 쓰나미이다. 한국교회를 죽음으로 몰고 갈 핵 방사능 분진을 몰고 온다. 신앙무차별주의 교회일치운동의 위험을 자각하지 못하게 한다. 한국교회로 하여금 포용주의, 다원주의를 조장한다. 진리에 대한 민감성을 잃게 한다. ‘모든 교회, 모든 기독교, 모든 종교는 다 똑 같다’는 분위기를 조장한다. 원수에게 대항할 힘을 뺀다. 근육을 무기력하게 만든다. 진리의 전신갑주를 취하지 못하게 한다. ‘주전자 안의 개구리’가 되게 한다. 진리의 터에 세워진 신앙고백공동체의 성문(城門)을 거짓 교사와 이단에게 열어주는 역할을 한다.
5. WCC는 부산총회를 철회하라
한국교회는 전체로 보아 복음적이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다.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고 믿는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 4:12)는 진리를 믿는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다.
WCC 총무 트베이트가 말한 대로 이 단체의 총회는 개최되는 지역 교회와 상호 교류하고 배우는 마당이다. WCC는 한국교회의 변화를 원한다. 패러다임의 전환을 재촉한다. 에큐메니칼 운동에 걸림돌인 복음주의 신앙, 개혁주의 신학을 버리라는 말이다. WCC의 15가지 신학적 특징들을 수용하여 새로운 교회모델로 삼으라고 한다.
자기 동네에 교회당이 들어서면 마을 사람들이 땅값 내려간다고 데모한다. 이웃집에서 날라 오는 독성 물질에 항의한다. 일조권 시비가 벌어지기도 한다. 짝퉁 물건 제조자, 판매자, 구매자를 처벌한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자신을 괴멸시키려고 달려드는 거대한 ‘쓰나미’ 행사에 침묵한다. 교회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재앙을 가져올 ‘짝퉁 기독교’ 부산총회 계획을 무감각하게 바라보고만 있다.
주님의 신실한 신부는 WCC가 예수 구원 유일성을 부정하고, 교회의 생명력을 앗아가는 특성을 지녔다는 사실을 알고서도 무관심한 태도를 보일까?. 한국 기독인들은 WCC를 향하여 부산총회를 철회하라고 요구함이 마땅해 보인다. 한국교회가 살아 있음을 세계인에게 보여주는 일이기도 하다. 대한민국은 종교, 언론, 신앙, 집회의 자유가 보장된 나라이다. 그러나 교회의 생명을 위협하는 ‘짝퉁 기독교’ 행사에 강력한 이의를 제기할 수 있지 않을까?
한국교회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구원에 감사하여 바친 거액의 헌금이 교회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종교다원주의 따위의 반기독교적인 신학 계발에 사용된 것도 확인하고 따져볼 사안이다.
나팔은 분명한 소라를 낼 때만 가치를 가진다. 침묵은 인정, 동의를 뜻한다. WCC 부산총회 개최에 침묵하는 한국교회를 생각하면 종교개혁신학자 존 칼빈이 나바르의 마아가렛에게 한 말이 떠오른다. “개는 자기 주인이 공격을 받으면 짖는다. 만일 하나님의 진리가 공격을 받는 데도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침묵한다면 나는 개만도 못한 겁쟁이가 될 것이다.” 한국교회 구성원은 당당히 외칠 수 있다. "WCC는 부산총회를 철회하라."
WCC 지지자와 반대자 모두가 WCC의 신학과 정체에 관심을 가지고 정확히 이해하는 일이 급선무이다. 필자가 최근 출간한 <신학충돌: 기독교와 세계교회협의회>(본문과 현장사이, 2012)는 WCC의 신학을 분석하고, 기독교와 WCC의 신학충돌을 상론한다. 반론이나 구체적인 학문적 논의는 이 책을 바탕으로 이루어지기 바란다. WCC의 신학을 정확히 알리고, 이 단체의 부산총회에 대한 심각을 깨닫게 하고, 항의나 반대의 신학적 논거를 정확히 밝힌다. WCC의 독성과 위험이 무엇인가를 밑바닥에서부터 여론이 형성되어 올라오도록 할 목적으로 저술했다.
[최덕성은 한국복음주의신학회로부터 ‘신학자 대상’을 수상한 <한국교회 친일파 전통>(2000), 교회일치운동의 중요성을 다룬 <에큐메니칼운동과 다원주의>(2005), 1910-1960년의 한국교회사를 신앙고백사관으로 서술한 영서 KOREAN CHRISTIANITY(2008) 등 여러 권의 신학서들을 저술했다. 현재 기독교사상연구원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첫댓글 지금 한국교회는 인간관계로 입장을 서는 것을 규탄한다.
누가 반대하니 참여하지. 않는. 교단을. 규탄한다
최덕성총장님은 저희 브니엘신학교에서 신대원생들에게 성령론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신학적인 지식과 기반을 갖추신 분으로 오랫동안 고신대학교와 천안 고려신학대학원에서 교수로 계셨던 분입니다. 최덕성총장님이 쓴 신학충돌은 신학적인 바탕에서 쓴 글입니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신학자 최덕성박사님 화이팅!
다른 신학교들도 브니엘 신학교 같았으면 좋겠습니다...
희망을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