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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 1의전투 계백장군과 그의 5천결사대
여기 계백장군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산길 이야기는 황산벌과 백제가 꼭지켜야 했던 탄현을 찾아보는 것이니
금남 정맥을 하실분들 이길을 지날때 생각하십시요
"백제의 5천 결사대가 장열하게 전사한곳이 그대 발걸음속에 있다는걸...."
오늘 역사를 찾아 함께 걸음 해주신 폴모리님.희야 지부장님.그리고 돌팔이
5천의 군사로 5만을 막을 수 있는 장소 싸리재
신라의 오만 군사가 이동한 탄현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싸리재
이른아침 대전역 앞에서부터 금산을 지나 진안의 운일암 반일암 협곡을 지나고 대불리에서 이곳 싸리재 비포장 오르막까지
2시간 이상을 탱크로 밀어 붙여 올라와 주신 바람구름님
님 덕분에 덜컹 거리는 차안에서 웃으며 올라올 수 있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나라가 위급할때 꼭 지켜할곳중 육로인 탄현
백제의 충신 두분 성충과 흥수가 상소를 한 탄현이 어디일까
한명의 군사가 창을들고 능히 만명을 상대할 수 있는곳
험준하고 협곡이라야 할곳인데
탄현으로 지목되는 식장산 자락은 한명이 만명을 대적할안한곳이 못되며
대동여지도에 나오는 금남정맥길의 백령고개
백암산에서 인대산으로 가는 길 산이 험준하기는 하지만
성충과 흥수가 말한 한명이 만명을 상대할 곳도 못되는곳이다
당나라와 기벌포에서 만나기로 한 날짜는 다가오고 갈 길급한 신라의 5만 대군이 한여름 타오르는 태양과 함께 식수 찾아가
며 고을마다 성마다 백제군과의 싸움을 피하며 부여로 갈수 있는곳 바로 이곳 운일암 반일암을 넘어 싸리재로 가는길이다
영동군 이후로는 금산은 백제의 땅이기에 전쟁을 피하며 가야하고 물이 있어야 하고 물의 도움을 받으며 험준한 산길을 버리고 가야하는길
경주ㅡ대구ㅡ성주ㅡ김천ㅡ영동ㅡ금산에서 전북 진안의 하루에 해가 반나절만 뜬다는 깊은 골짜기 운일암 반일암을 지나
현, 금남정맥길 싸리재를(경주-싸리재까지 거리상 250km) 넘어 탑정까지 (싸리재-황산벌 35km)별다른 싸움없이 모두
피해서 갈수있는 곳이다
운일암 반일암을 지나면 금남정맥길 성충과 흥수가 탄현을 넘지 못하게 하라는곳이라 생각이 들며 한사람이 만명을
상대할곳으로 여기 뿐이다.
다소 위험한 바위 협곡을 2km를 지나면 대불리가 나오며 대불리에서 싸리재 까지 큰 힘들이지 않고 오를 수 있는곳이다
신라는 이곳 협곡을 지나 대불리(중리마을 )에서 싸리재를 지나 두모소 계곡과 천등산을 우측에
두고 운주를 지나 탑정호까지 (장만천-장선천-논산천)물길따라 별 저항없이 지났을것으로 보여진다
군사들의 보급 문제로 하루 30km 진행시 경주에서 황산벌까지 대략 300km 10일이면 당도 할 수 있는 거리다.
신라군은 험준한 백암산과 인대산 대둔산의 날까로운 지형을 고스란히 우회해서 연산에서 계백장군이 이끄는
오천결사대와의 일전을 벌일 수 있다
싸리재가 성충과 흥수가 말한 탄현이 라면 실로 전략적 요충지가 분명하고 백제가 이곳을 지켰다면 전쟁에 이겻을
가능성도많아 진다.
첩첩산중 수많은 성에서 지키는 백제의 군사들과 큰 싸움없이 모두 피하며 갈곳 안일 반일 2km의 협곡만 통과하면 백제의
수도 사비성까지 순식간에 지나갈수 있기에 신라로서는 모험을 해볼 만한 곳이였으며 성공한것이다
금남정맥 얼마만이던가
금남정맥은 호남정맥과 금남호남 분기봉인 조약봉에서 분기되어 연석산-운장산-인대산-대둔산-계룡산-부소산까지의
도상거리 127km의 산길이며 금강 발원지 뜬봉샘에서 시작 군산 앞바다까지 401km의 강줄기이다.
금강을 모두감싸 안은 산줄기라기 보다 삼국시대 백제 700년 역사성을 예우한 산길이라 봐도 무방할듯한 금남정맥 길이다.
영조때 만들어진 신경준의 산경표에는 역사성을 예우한 정맥길은 한북정맥길의 한양이 내려다 보이는 수도 서울의 삼각산
(북한산 상장봉) 그리고 낙남정맥( 조선시대 성종 임금의 명으로 만들어진 동국여지승람에는 낙남정간이라 되어 있음 영조
때 만들어진 산경표의 원조격)은 500년 도음지이며 가락국의 시조인 김수로왕의 탄생된 구지봉이 자리하는 김해의 분산을
예우한것도 그렇고 지금 이자리에서 금남정맥길의 금만봉(싸리봉)있는곳에서 좌측 산길은 남당산-미륵산-봉화산 -금성산
-장계산이 자리하는 금강 하구로 산자분수령 원칙을 안고 이어진다.
금강을 고스란히 감싸고 흐르는 산줄기인 셈이지만 산경표에는 이곳에서 백제의 수도가 자리하던 곳으로 산길을 이어간다.
700년 역사를 잊지 못해서 아니면 조선 영조시대 힘있는 사대부의 힘있는 외침이 부여로 향하게 했을까
영조때 사대부들의 사치풍조가 사회적 문제로 대두었지만 영조는 언제나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했을터 산경표 역시 농업의
기반이 되는 10대강 (압록강-낙동강-두만강-한강- 대동강-금강-임진강-섬진강-청천강-예성강)아마도 산경표의 저자는
이곳에서 농업의 기반이 되는 금강의 물줄기를 안고 끝부분 군산으로 가고자 하였을 것이라 생각이 든다.
자연적인 산길과 인간적인 산길 그가운데 인간이 살수 있었던 역사속의 산길
그리고 신라 오악중에서 서악이라는 계룡산을 따라 부여의 부소산으로 지나는 금강정맥길을 만들어 내며
700년 역사성을 예우 하느라 금강을 온전히 둘러싸는 산길을 포기한다.
정맥 산줄기 이야기는 제생각이니 딴지 걸지 마시라
금만봉(싸리봉)
산경표에는 금남정맥을 금강의 하구가 아닌 내륙의 충남 부여 부소산으로 향하게 하였다.
조선시대 농업기반이 되는 10대강의 금강 감싸 안을것을 포기하고 호남의 금강과 풍수터인 계룡과 옛백제의 수도였던
부여의 부소산으로 산길을 이어가게 만들었다고 보여진다.
모처럼 희야 누님과 함께 이자리에 선다.
가야할 백암산이 멀리서 다가온다.
산길은 늘 그렇다
힘들고 지루하고 졸음과 배고픔...
하지만 오늘은 다르다.
신라의 5만 군사가 지나갔을것 같은 장만천 골짜기 저곳을 지나가면 황산벌이 자리하는 탑정 저수지까지(35km) 가장 빠른길이 된다.
산행 전투 복장으로 갈아 입고
싸리재에서 태평 봉수대 찾아 가는길 잠시 낙엽과 함께 걷는다.
태평 봉수대
백제 최후의 방어선격인 이곳 금남정맥길의 산길에 자리한다
싸리재가 탄현이 맞다면 이곳 봉수대에서 지키던 군졸들은 봉화 불을 피워 신라가 온다는걸 알렸을터
하지만 늦었다.
운장산과 연석산
신라 5만 군사는 운일암 반일암을 지나 아래 대불리 평야지대에서 싸리재로 올라왔을것 같다.
성터 위에서
봉화대 위에서
잠시 휴식을 하며
옛 봉화대 주변으로는 사람이 살았기에 분명히 근처에 물이 있다는 이야기를 하며
나중에 다른산에 가시더라도 봉화대를 찾게되면 꼭 물을 찾아 보라고...
봉화대에서 내려와 안부에 도착하니 맑은 물이 흐르고 있다.
마실 수 있는 물
지나온길과 성치 지맥길이 보이고
백암산 오르기
백암을 힘겹게 오르는 자라 한마리
백암산 정상에서
백암산에서 보는조망속에
동쪽으로 금산 진악산과 봉화대가 눈에 들어온다
이곳 백암산에도 돌무더기가 있는걸로 봐서는 백제시대의 봉화대 터 였을거라 생각이들고
삼국시대 황산벌과 후대의 임란때 신립장군의 배수진
누가 뭐래도 한국전쟁은 산악지형인데 왜 산악을 버리고 드넓은 평지를 선택해서 싸운걸까
암릉이 아름다운 곳
지나온 산줄기
백암고개
탄현은 두가지 설이다.
하나는 현 식장산 인근 장고개 이고 한곳은 대동여지도에 표기된 금남정맥의 백령성이 자리하는 백령재
하지만 백암산-인대산은 중간 부분은 분지형이라 신라 5만 군사가 이동 하더라도 성충이 말한 용맹한 군사 한명이 만명을 막아내지 못하는 장소이다.
660년 7월 신라군 황산벌로 집결
신라군 출동 루트는 경기(이천)- 충주-충북괴산-보은(삼년산)-옥천-대전(식장산)-논산-황산벌로 보는 루트와
경주 -대구-김천-황간-영동-금산-논산-황산벌로 보는 루트로 크게 2가지 학설로 구분
어쨋거나
신라군 5만명 이동수단
8명이 횡대로 진행시 1천명이 한무더기로 진행했다고 본다면
모두 5만이 10km의 거리로 진행
그당시 8명이 어깨를 나란히 해서 갈많큼의 산길은 없다고 판단되며 험준한 산길을 어떻게 수래끌고 지나갔을지
백령성
그당시에 쌓은 성터지만 견고하게 잘 쌓은 성터이다.
백제 후기의 3충신(성충.흥수.계백) 중의 한분인 성충은 옥에서 죽기 전에 글을 올려 "충신은 죽어도 임금을 잊지 않으니
한마디 하고 죽겠다.시국의 사변들을 보건대 반드시 전쟁이 있을 듯한데, 반드시 상류에서 대적을 맞이해야 보전할 수 있다.
만약 다른 나라 군사가 오면 육로로는 침현(沈峴:또는 炭峴,)을 지나지 못하게 하고 수군은
기벌포(伎伐浦:금강 하구) 연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며 험준한 곳에 의존하여 적을 막아야 가능하다"고 했다.
백령성터 비석
육백이고지
6,25전쟁 전적비
낙동강전투에 대해서는 수박 겉핧기로 배웠지만 이곳에 대해서는 자료를 찾아봐야 할것 같다
성터를 돌고 전적비 구경하고 백령고개에 도착하니 두사람은 쉬지도 않고 가버렸다
잠시 포장마차에 들러 콜라 한병 사고
수박 한쪼가리 얻어 나온다
백령고개에서 바람산-인대산 가는길은 산길이 순한 능선이다.
이곳이 탄현이 될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식장지맥 분기점
조만간에 이곳에 다시 서야 하고
나름 까칠한 인대산 조망도 없고
헬기장에서 본 천등과 대둔
허둥지둥 내리막길 지나 조망좋은 헬기장에 도착하니 일본 학생들인것 같은데
멀리 대둔산과 천등산을 보며 환호성을 지른다.
가이드 하는 여선생님이 "어디서 오는길인데 혼자 다니세요 대둔산을 가리키며 무슨 산이냐 묻는다"
호남의 금강 대둔과 하늘에 불 밝히는 천등이라며 천등산은 견원의 전설이 있는곳이라 설명해 드리니 학생들에게 바로
일본어로 통역을 해준다
해빠지기 직전이니 빨리 하산 하라며 한마디 덧붙이며 오향고개로 향한다.
고개를 지나 산불 감시 초소봉에서 보니 대둔이 바로 코앞이다.
오향고개에 도착하니 두분이 쉬다가 바로 진행 하신다.
오늘은 완전 낙동강 오리알 산행이 이어진다
다시 천천히 뒤따라 가며
언덕하나 넘어서니 벌써 다음 언덕베기 오르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그러다 없어짐
정신이 어쩌고 하는 글귀가 눈에 거슬린다.
없던 정신 더 없어질 정도로
천등산에 불 밝히고
호남의 금강 대둔
배티재 도착하기전에 두분을 만나고
혹시나 여기서 그만두면 대전으로 가려고 바람구름님께서 마중 오셨다
인사를 나누고 2층 식당에 들러 쌀이란 녀석 구경 한다.
야간에 대둔을 넘느냐 새벽에 대둔에서 일출을 보느냐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대로 진행하기로 하고 매점에서 몇가지 물품
구입해서 대둔산을 오른다.
의리의 폴모리님
바람불어 좋은날
정맥때 한번
바위할때 두번 오늘 또 한번
눈에 보는 조망도 좋지만 마음으로 보는 산길이 더좋은 밤길이 이어진다.
미소가 아름다운 폴모리님
바위틈에 쪼그리고 앉아 전화기를 드니 작은놈한테 문자가 와있다.
추운데 산으로 돌아 다니지 말고 집으로 빨리 오라는 ...
ㅡ알았다ㅡ
봄날밤은 그렇게 익어가니 모든게 즐겁기만 하다.
수락재에서 월성봉 가는길 철계단의 연속이다
사람이 아름답다는 말...
고요한 저녁에 별빛을 친구삼아 거친 호흡과 함께걷는 발걸음이 아닌가 생각을 해본다.
한발 두발 그 아름다운 미학을 위해서
월성산에 오르니 이곳도 6,25전쟁 격전지다
날이 밝으면 좀더 알아 볼텐데...
누군가 우리앞길에 금낭정맥 이라쓴 종이을 바닥지를 곱게 깔아 두었다
누굴까 누굴까 이생각만 하며 혼자 걷는다
바스락 바스락 낙엽소리가 좋고 멀리서 개짖는 소리도 좋고
두분의 렌턴 불빛이 멀어질수록 혼자라는 느낌이 더 좋게 다가온다.
성터를 지나고
호남 고속도로
차가 뜸한 틈을 타서 무단으로 넘어진행
덕목리 고갯마루에 도착한다. 새벽부터 동네 똥강아지들의 외침은 끝도 없이 이어진다.
황산벌 전투가 벌어진곳을 보려면 아침은 되야 하는데 시간이 너무 이른시간
백제때 쌓은 성터 시간이 지난 많큼 무너져 내린곳이다.
이곳을 지나 함박봉 가기전에 참나무 낙엽위에 잠시 누워 시간을 보내지만
새벽녁 찬바람은 온몸 구석구석 부드럽게 스치듯 지나가니
추워서 10분을 못 누워 있겠다.
함박봉 황산벌이 가장 잘보이는 조망터이다.
황산벌 10대 1의 싸움
장군으로서 황산벌이 마지막 命이다.
최정예 5천의 군사와 백제의 패망을 눈앞에 둔 사기충천한 5만 신라군사의 싸움
660년 7월9일
짧고도 가장긴 여름 하루가 시작된다
그해 여름 하루는 봄날 화려했던 날 보다 더 화려한 꽃들이 지던날이였으며 황산벌 전투는 날이 밝아 오면서 시작
한여름 아침부터 구슬같은 땀방울이 흘러 내렸지만 죽음을 눈앞에둔 백제의 5천 결사대는 새까많게 몰려온 신라의
5만 군사들과 첫대면을 목숨으로써 마감하리라 생각을 했을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고 내가 알고있는 모든것들을 지키기 위해서
아침부터 뜨거운 태양에 열받은 병장기를 쥔손은 태양보다 더 뜨겁게 달군다.
1차전부터 4차전 결사대는 목숨을 버린탓에 백제군의 승리로 이어진다. 하지만 싸울곳을 넓은 평야인 황산을 택한것은
잘못이었다
황산벌에서 신라는 왜 4전 4패를 기록하게 되었나.
백제 패망후 당과의 피할 수 없는 교전을 생각해서 김유신장군이 일부러 져 준건 아닌지 고도로 계획된 작전이 아닌가 생각 해본다.
마지막 싸움 5차전을 준비하던중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처와 자식을 모두 죽이고 나온 계백장군과
자식을 죽음의 사지로 내몰기까지 눈물을 흘렸을 관창의 아버지 신라의 김품일 장군이 묘하게 대조되는 순간이다.
처자식을 모두 자신의 칼로베고 나왔지만 정작 싸움에서는
적장의 아들을 사로잡아 투구를 벗껴보니 어린 소년이다.관창을 다시 돌려 보내는 따뜻한 아버지의 마음을 보낸다.
관창이 살아 돌아가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본인 스스로 왔다면 부끄러워서 계백장군을 차마 올려다 보지 못했을것 같고
강요에 의해 왔다면 너무나 대조적인 두 아버지의 모습을 봤을것 같다.
이후 다시 사로 잡혀 관창의 목이 떨어 지기까지
계백장군은 어린 관창의 죽음이 적의 사기를 올리는것이라 알았지만 서로가 돌아 갈길이 없다는걸 알았기에 목을 베고 만다
신라군은 어린 화랑들의 죽음을 보며 사기가 오른다.
음력 7월 장마철 드넓은 황산아래 벌판은 뜨거운 한낮의 기온을 무색하리 많큼
뜨거운 싸움이 이어져 백제의 결사대 4천명이 목숨을 다한다
초록 벌판은 피로 물들였으며 계백은 남은 천여명의 결사대와 함께 수락산 인근에서 최후를 맞이 하는데
황산벌 전투는 660년 7월 9일 불과 하루만에 끝이나고 만다.
*전투에 앞서 신라는 643년부터 당나라에 가서 백제를 멸망시키자며
17년간 외교에 노력을 기울였다.
그로부터 수년이 지난 660년 7월에 나당 연합군이 결성된다.
백제의 충신 성충과 흥수는 기벌포와 탄현을 꼭 지켜야 한다고 상소를 올렸지만 신하들에 의해서 묵살되고 만다
기벌포는 현재의 금강하구이며 적이 서해 뱃길로 사비성을 공격해 오면 썰물때 배가 갯벌에 갖혀 움직이지 못할때
공격하면 되는곳이고 炭峴(탄현)은 두가지 설이 있다
백제의 산하들은 평야전을 해야 승산이 있다며 험준한 지형의 산자락을 버리고 드넓은 평지를 선택한 연유는 무엇인지...
임진왜란때 신립장군(권율장군 첫째 사위)은 한양을 방어 하기에 가장 좋은 조령을 버리고 충주의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쳤
고 평야전을 벌리지만 왜장 가토 기요마사.고니시 유기나가 에게 패한후 탄금대에서 몸을 날린다.
이 두싸움 어찌보면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다 결사와 배수진
지략가는 분명 이길 수 있는장소에서 싸움을 할것을 주장 하지만 작전가는 그렇지 못한것 같다.
동양 최고의 지략가로 곱히는 유비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은 제갈공명이 있었다면
조선 최고의 지략과 작전가로써 선조임금의 끝없는 의심에도 23전 23승의 대기록을 남긴 이순신장군 해전에서는
세계최고의 장군이다.
의자왕의 명으로 황산으로온 계백장군은 결사대를 이끌고 이곳에 왔지만 황산벌 이전의 기록은 전무한 인물이며
생에부터 어디서 무엇을 하였는지 기록이 없으나 황산벌 전투하면 계백장군을 떠 올리게 할많큼 유명하다.
황산벌 전투 안내도
5천대 5만 황산벌 장소
예전 황산벌 종주때 담은 황산벌
우측으로 금남정맥길 천호산이 지척이다.
계백장군 무덤
(벼슬:달솔이며 달솔은 왕실 .종친에게 부여) 660년(의자왕 20) 나당연합군이 백제의 요충지인
탄현과 백강으로 진격해왔을 때 죽음을 각오한 5,000여 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신라 김유신의 5만 대군을 맞아
황산벌에서 싸웠다. 결사대의 용맹스러운 활약으로 4번의 싸움에서 이겼으나 결사대와 함께 장렬한 최후를 맞았다.
백제군은 중과부적으로 (황산-사청)벌에서 패하자 진선거리로 3km 지점인 이곳 수락산(首머리수 落떨어질락)과
충곡리 일대에서 최후를 맞이하고 '전쟁이 끝난 후 김유신은 계백의 시체를 찾도록 하였으나 끝내 찾지 못했다고 한다.
계백의 충성어린 죽음을 본 백제 유민들이 장군의 시선을 거두어 은밀하게 가매장한 것으로 전해진다.
장군의 성품
처자식까지 모두 자신의 칼로 베고 왔지만 어린 관창을 차마 죽일수 없어 살려 보내길 반복하다 결국 관창의 목을 베어
말 안장에 매어 돌려 보낸다.
아무나 죽이는것이 아니라 가려서 죽이는 살생유택(殺生有擇)에 가까운 장군의 성품이 나타난다
장군의묘
수락산 자락 가장골에 위치하며 그당시 장군이 시신을 가매장했다고 붙여진 이름
수락산.충혼산.충장산.충훈산으로 불리우다가 수락산으로 이름 붙여짐
예전에는 이곳이 공동묘지 였으나 지금은 계백장군 묘역 성역화 작업으로 모두 이전하고 장군의 묘역만 남아있다
새벽녁 배 고플시간에 다시 밤길을 이어 가기로 하고 길을 나선다.
함박봉에서 얼마 남지않은 식수 폴모리님께 드리고
다시 뒤에 떨어져 걷는다.
천호산 방향
예전보다 등로가 많이 좋아졌다.
이른아침 모처럼 듣는 편한소리가 하나 있다.
꼬르륵 꼬르륵
배고플때 나는소리
얼마 만이던가 배에서 나는 신비한 소리
천호산 정상 예전에 태극기가 하나 걸려 있었는데
마을 순찰중
남은것 모두 털어 내보니 사과 하나 딸랑이다.
팔각정자
두사람은 다시 앞서가고 조용히 뒤 따라 내려간다.
역사찾아 떠나본 금남 정맥길 싸리재에서 양정고개까지 마무리 하며 다음구간은 최고의 풍수터라는 계룡을 앞둔다.
고생하신것지 즐긴것인지 알길 없는 두분 폴모리님. 희야지부장님
이번 산길은 두분 앞장 세우고 조용히 따라 다닌 산행이었으며 많이 배운 산행이었다.
그리고
종환님의 낙타털 양말 테스트 결과
짧은 산길 55키로 걸어보니 발가락이 편안하고
산행후 발샘새도 안날 정도로 뽀송뽀송
아주 좋았습니다
강추 해드리며
날머리 양정 고개에 마중 와주신 구름님 차를 타고 대전시로 와서
목욕탕에서 씻고 나와 근처 닭도리탕 집으로 가서 모처럼 하산주 한잔 해본다.
금남정맥이라는 바닥지를 곱게 갈아주셨던 대전 시청 산악회 회원겸 클럽 회원이신 바닥지님 저하고는 갑장
바닥지님 덕분에 편안한 산길 이었구요 감사 드립니다.
그리고 구름님 앞으로 자주 뵈기로 하고 대전 인근의 산줄기 답사때 신세 자주 지겠습니다.
폴모리님 이번주 충남제일 100km 산길 잘 이어 가시기 바랍니다.
이번주는 계룡으로 넘어가고 4월 금북(독립유공자 산길) 그다음은 대구를 감싸 안은 금호강 북쪽 마루금으로...
혹시라도 오실분 연락 주세요
누님과 같이 걸음하니 내리만 평지는 얼굴 구경도 못하고
겨우 오르막에서 누님 얼굴 구경합니다.
토요일날 다시 만나요
금남정맥 좋은길로 기억 돼 우정산행까지 두번이나 하면서도 역사에 대해선 생각도 못했고 월성봉 오르며 이 징그러운곳 왜 또 왔나만 했던 자신이 부끄럽습니다.과연 자신이 걷는 산길에 대한 역사까지 헤아리며 걷는이가 얼마나 될지도 궁금하구요. 방장님 덕분에 많이 배우고 갑니다.덕목재까지 왕까칠한 구간 그나마 야간이라 다행이었지 싶습니다.수고많으셨구요.담구간은 비탐구간도 있고 안산 하시길요.
산길마다 아름다운 사연은 꼭 있겠죠
이번 산길을 좀더 알아 보려고 백제 역사 공부 한달간 하고 금남으로 2차 진행 했는데
슬픈 역사속의 삼국은 허구헌날 싸움밖질만...
글 감사합니다.
몇날 며칠 산행기 쓰신다고 할때부터
어떤 산행기가 올라올까 궁금했는데
역시 정성이 느껴지는 산행기네요
오늘 금남길 걸으며 역사의 숨결 느껴보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훗날 금남길을 가신다면 꼭 알고 가시면 도움될 글이 분명 있을것 같습니다.
보다 큰 산줄기 탐구 하시구요 큰 산꾼 되십시요
산행하는 것보다는 몇곱절 정성 들여 쓰신 산행기 잘보았습니다
세분이 함께하시니 홀로산행보단 마음에 여유가 있으셨죠
수고 많으셨습니다 ^~^
산행은 쉽고 산행기는 어렵고
사는게 다 그렇죠
지금까지 홀로 산행을 하다보니 아직 적응이 안되는게 누군가와 같이 걷는일이네요
대장님의 정맥길 아름답게 이어 가십시요
배방장님~~
대단한 후기 읽어 봅니다.
산행은 역사이기에 산행길에 관련된 역사를 안다면 산행길이 편해진다는 말씀, 깊이 생각하게 되네요.
산행에, 후기에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산행은 역사 그속에 일어난 민초들의 생활
우리가 알고 배워야 할거라 생각이 듭니다.글 감사합니다.
대전 근방까지 오셨는데 뵙지 못해 아쉽군요.
제가 충청도 사람이라는 것이 부꾸러울 정도로 많은 것을 배우고 갑니다.
아름다운 산행길 이어가시기 바랍니다.
대전으로 3번 갔지만 산지산인님을 뵙지 못했네요
죄송하구요
조만간에 신세지러 갈테니 준비 하십시요
독도와 위안부 문제로 인해
역사가 새롭게 조명되고 있는 이시기에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멸앙시키는 장소가
금남줄기에 그역사가흐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안순간 부끄럽네요.
그쪽지역은 생소해서 언제나 먼곳이라
여겼는데 이번기회에 제대로 배워갑니다.
금남길을 가실때 꼭 산행기 읽어 보고 가시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것 같습니다.
다음정맥길은 어딘지 궁금하네여
저는 다음 금북길로 가서 독립운동가분들의 발자취를 찾아 볼생각입니다.
늘 안전 산행 하십시요
@배병만 4차팀 다음정맥 금북입니다.
먼저가시면서 꽃단장 부탁합니다.
조심히 걸음하시구요.
@철옹성 이번달은 이래저리 바빠서 4월말부터 진행 할것 같습니다.
자료 잘 찾아볼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