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동서원
수령 400년이 넘는 은행나무 지나 수월루로
달성군 구지면에 있는 도동서원은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선생을 배향하고 있다. 서원에 가려면 중부고속도로 현풍나들목에서 나와야 한다. 옛날에는 구지면을 지나 낙동강을 거슬러 도동리로 들어가는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2019년 다람재 아래로 도통터널이 뚫리면서 오산리를 거쳐 낙동강을 따라 내려가는 것도 가능해졌다. 우리는 갈 때는 오설리 쪽으로 해서 도동서원으로 들어가고, 나올 때는 도동서원에서 오산리 쪽으로 나왔다. 그러므로 낙동강 물을 거슬러 여행한 셈이 되었다. 올여름에는 어찌나 비가 많이 왔는지 낙동강 물이 넘실거리며 흐른다.
도동서원에 도착하면 커다란 은행나무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한강(寒岡) 정구(鄭逑)가 1604년 서원을 현재 자리로 이전하면서 심었다고 하니 수령이 400년이 넘었다. 은행나무를 보고 서원으로 들어가기 전 네 개의 비석을 만날 수 있다. 하나가 도동서원사적비다. 두 개는 신도비인데 하나는 한문으로 다른 하나는 우리말로 되어 있다. 나머지 하나가 문경공 한훤당김선생 500주기 추모비다.
이들을 보고 나면 길은 계단을 통해 수월루로 이어진다. 2층 누각으로 1층 오른쪽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수월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수월(水月)은 한수조월(寒水照月)의 준말로, 차가운 물에 비치는 밝은 달을 말한다. 한수조월은 공부하는 선비가 갖춰야 할 마음가짐을 담고 있다. 수월루는 서원 건물 중 가장 늦게 지어졌지만, 앞과 뒤로의 전망이 가장 좋다.
전면으로는 은행나무와 그 너머로 흐르는 낙동강을 볼 수 있다. 강을 보며 호연지기를 기를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뒷면으로는 환주문과 강당 등 서원 내부를 들여다 볼 수 있다. 유감스럽게도 강당에 가려 사당은 보이질 않는다. 수월루 안에는 수월루중건기, 수월루상량문, 수월루중수상량문, 수월루중건전말소기(重建顚末小記)가 걸려 있다.
이러한 편액을 통해 수월루가 1849년(헌종 15) 3월 지어졌고, 1863년(철종 14) 6월 중수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1888년(고종 25) 수월루가 전소되었고, 1913년 9월 건축을 시작해 12월 완공되었다. 그러므로 수월루는 중건 된지 100년이 넘었다. 이러한 사실은 1974년 김은영(金殷永)이 찬한 수월루중건전말소기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중정당(中正堂)에 앉아 많은 이야기를 나누다.
수월루 지나 있는 환주문(喚主門)은 서원의 강학공간으로 들어가는 외문이다. 환주는 주인을 부른다는 뜻이다. 작은 일각문(一角門)이지만 사모 지붕으로 옥개부를 강조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의 폭이 너무 좁아 두 사람이 겨우 교차할 수 있을 정도다. 우리는 회원들은 일렬로 서서 계단을 올라 환주문을 통과한다. 환주문은 강학 공간을 둘러싸고 있는 담장 한 가운데 있어, 수월당, 중정당, 사당과 일직선을 이룬다.
강당인 중정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의 홑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다. 평면은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둔 중당 협실형(中堂夾室型)이다. 전면에 반 칸 규모의 툇간을 두었다. 동재(居仁齋)는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홑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다. 평면은 왼쪽부터 2칸의 온돌방과 1칸의 마루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온돌방의 전면에 쪽마루를 달았다. 서재(居義齋)는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홑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다. 평면은 왼쪽으로부터 1칸의 마루방과 2칸의 온돌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동재의 당호는 인을 강조했고, 서재의 당호는 의를 강조했다.
강학공간인 중정당의 핵심 개념이 중정인의(中正仁義)다. 중정인의는 주돈이(周敦頤)의 『태극도설(太極圖說)』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되고 있다. “성인은 중정과 인의를 바탕으로, 고요함에 중점을 둬 사람의 태극을 이룬다.(聖人定之以中正仁義 而主靜立人極焉)” 사람의 태극인 성인이 되기 위해 중정과 인의가 바탕이 되어야 함을 말하고 있다. 중정은 한 가운데 바로섬을 말하고, 인의는 어짐과 의로움이다.
중정당에는 세 개의 현판이 걸려 있다. 도동서원이라는 사액현판과 이황의 글씨를 모각한 서원현판이다. 그리고 사액현판 아래 중정당이라는 당호현판이 걸려 있다. 강당 안쪽에 있는 사액현판은 경상도사 배대유(裵大維)가 썼다. 중정당 현판은 봉조하(奉朝賀) 이관징(李觀徵)이 썼다. 이황의 글씨를 모각한 도동서원 현판 아래에는 「도동서원액판하(道東書院額板下」라는 작은 현판이 걸려 있다. 한강 정구가 1606년 이황의 글씨 현판을 걸게 된 사유를 적어 놓았다.
“이(황) 선생이 일찍이 김(굉필) 선생의 서원을 건립하는 일에 크게 관심을 가졌으나 안타깝게도 선생의 생존 시에 그 일이 미처 이루어지지 못했다. 만일 도동서원이 그 당시에 존재하였더라면 액호(額號)를 손수 쓰시는 일을 어찌 여느 서원보다 뒤에 하였겠는가. 지금 서원이 중건되어 이름을 도동(道東)으로 하라는 명이 대궐에서 내려오고 뒤이어 판액(板額)이 장차 내려올 예정이다. 마침 선생이 쓰신 편액의 글씨 중에서 네 자의 큰 글씨를 찾아서 본을 떠 각(刻)하여 서원으로 보냈다. 이리하여 선사(先師)의 옛 필치와 성주(聖主)께서 하사한 판액이 장차 안팎에서 빛을 발하게 됨으로써 배우는 유자(儒者)로 하여금 무엇을 모범으로 삼을 것인지를 알게 하였으며, 또 이 선생의 유지(遺志)를 이루게 되었다. 이 어찌 다행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중정당에서는 건물 외에 기단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지대석, 면석, 갑석으로 이루어진 기단은 높이가 1.5m로 7개의 계단을 통해 올라가야 한다. 기단의 돌은 사암(沙岩)으로 각기 다른 색을 가지고 있다. 석축의 아랫부분에는 거북머리 돌조각이 있고, 상부 갑석과 만나는 부분에는 네 마리의 용두가 돌출해 있다. 좌우 계단 사이 두 마리 용은 물고기를, 계단 밖 각각의 용은 여의주를 물고 있다. 이들 네 개 용머리 중 옅은 색 하나만 진본이고 나머지 세 개는 복제본이다. 석축의 양쪽에는, 올라가는(東) 세호(細虎)와 내려가는(西) 세호를 조각했다. 세호와 함께 꽃이 조각되어 있는데, 이는 해와 달을 상징한다고 한다.
중정당 벽면에는 도동서원의 역사와 규범 등을 기록한 현판이 걸려 있다. 「전교(傳敎)」는 숙종임금이 내린 특전 교서다. 「김안국시판(金安國詩板)」은 경상감사 김안국이 김굉필을 추모하는 시문이다. 「백록동규(白鹿洞規)」와 「서원동규(書院洞規)」는 서원의 학생이 지켜야 할 규약을 적었다. 「국기(國忌)」는 조선시대 왕과 왕비의 기일을 기록해 놓은 것이다.
문이 걸려 사당에는 들어가지도 못하고
사당으로 진입하는 내삼문은 5단의 석축 위에 있다. 석축 한 가운데 계단을 만들었으며, 하단부에 만(卍)자문과 태극문이 보인다. 계단 중단부에 꽃봉오리 모양이 있고, 상단부에는 들어가는 계단과 나오는 계단을 따로 만들었다. 나오는 계단 쪽에는 양머리(羊頭) 조각이 있다. 계단 양쪽으로 4층의 정원(後苑)이 만들어져 있다. 내삼문은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홑처마 맞배집이다. 그런데 문이 걸려 사당 안으로 들어가질 못했다.
내삼문 안쪽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홑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다. 가운데 김굉필 선생의 위패를 그 왼쪽에 정구 선생의 위패를 모셨다. 사당의 좌우 벽면에는 벽화가 그려져 있다고 한다. 왼쪽 벽화는 ‘강심월일주(江心月一舟)’고, 오른쪽 벽화는 ‘설로장송(雪露長松)’이다. 강심월일주는 김굉필의 시 ‘선상(船上)’의 한 구절이다.
배가 하늘 위에 앉은 듯 船如天上坐
물고기 거울 가운데 노는 듯 魚似鏡中遊
술 마신 후 거문고 끼고 돌아가니 飮罷携琴去
강 가운데 달빛이 배 하나 가득 江心月一舟
설로장송은 눈과 서리 내리는 겨울에도 푸르름을 자랑하는 낙락장송(落落長松)을 가리킨다. 설로장송은 군자의 높은 절개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 그림에도 소나무 가지 사이로 보름달이 보인다. 이 그림은 김굉필의 시 ‘노방송(路傍松)’과 비슷한 이미지를 보여준다.
한 그루 늙은 소나무 길가에 서서는 一老蒼髯任路塵
오가는 손 보내고 맞느라 수고롭구나. 勞勞迎送往來賓
겨울철에 너와 같은 마음 가진 이를 歲寒與汝同心事
지나가는 사람 중 몇이나 볼 수 있으려나. 經過人中見幾人
사당 옆 증반소는 밥을 짓는 건물로, 정면 2칸, 측면 1칸 규모의 홑처마 맞배지붕이다. 장판각은 정면 2칸, 측면 1칸 규모의 홑처마 맞배지붕 건물로, 중정당 좌측 배면쪽 한 단 낮은 대지에 자리한다. 중당당 우측의 전사청은 정면 5칸, 측면 4칸 규모의 홑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다. 평면은 'ㄷ'자형으로 본채의 중앙 3칸은 전면이 트인 대청마루로 구성되어 있으며, 좌우 칸은 전면으로 이어져 익사(翼舍)를 형성하고 있다. 우익사는 배면부터 2칸 부엌과 2칸 온돌방, 좌익사는 배면부터 1칸 온돌방, 1칸 부엌, 1칸 온돌방, 1칸 마루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사청 앞 곳간채는 정면 4칸, 측면 1칸 규모의 홑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다. 내부는 통간으로 칸막이 없이 창고로 이용하고 있다. 문간채는 정면 4칸, 측면 1칸 규모의 홑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다. 평면은 'ㅡ'자형으로 왼쪽 첫 번째 칸은 현재 창고로 사용되고 있으나 원래는 외양간이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곳간채를 나오면 왼쪽으로 유물전시관이 있다. 그런데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로 문이 굳게 닫혀 있다. 내부에 고문서와 서적류가 굉장히 많을 텐데 보지 못해 아쉽다. 소장 유물로는 조선시대부터 대대로 전래되어 온 제기(祭器)와 벽화가 다수 있다고 한다. 도동서원을 답사하는 동안 소리 없이 여름비가 내린다. 갑자사화로 극형에 처해진 김굉필 선생의 죽음을 슬퍼하는 듯하다.
선생의 호는 처음 사옹(蓑翁)이었다. 도롱이를 걸친 늙은이라는 뜻이다. ‘비록 큰비를 만나 겉은 젖을지라도 속은 젖지 않겠다.(雖逢大雨 外濕而內不濡)’는 선생의 뜻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처세가 둥글지 못하고 모난(渾然) 것으로 생각되어 호를 한훤당(寒暄堂)으로 바꿨다고 한다. 한훤은 백거이(白居易) 시 ‘오동나무꽃(桐花)’을 생각나게 한다. “지기에 반하면 춥고 따뜻함이 있고, 천시에 어긋나면 삶과 죽음이 있다.(地氣反寒暄 天時倒生殺)” 한훤당이라는 호는 지기에 따라 자연스럽게 살아가려는 선생의 희망을 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