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4년 8월 25일 주일
[(녹) 연중 제21주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오늘은 연중 제21주일입니다. 구원의 주 하느님께서는 영원한 말씀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주님의 사랑을 완전히 밝혀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성령의 빛으로 거룩한 백성의 모임을 이끄시어, 세상의 그 어떤 말에도 흔들리지 않고, 진리와 생명의 샘이신 주님을 떠나지 않게 하여 주시기를 청합시다.
말씀의 초대
여호수아는 온 백성에게, 누구를 섬길 것인지 오늘 선택하라며, 그와 그의 집안은 주님을 섬기겠다고 한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남편과 아내는 서로 순종하라며, 둘이 한 몸이 되는 것은 큰 신비인데, 그리스도와 교회를 두고 이 말을 한다고 한다(제2독서). 시몬 베드로는 예수님께,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다고 고백한다(복음).
제1독서
<우리도 주님을 섬기겠습니다. 그분만이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 여호수아기의 말씀입니다. 24,1-2ㄱ.15-17.18ㄴㄷ
그 무렵 1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를 스켐으로 모이게 하였다.
그가 이스라엘의 원로들과 우두머리들과 판관들과 관리들을 불러내니,
그들이 하느님 앞에 나와 섰다. 2 그러자 여호수아가 온 백성에게 말하였다.
15 “만일 주님을 섬기는 것이 너희 눈에 거슬리면,
너희 조상들이 강 건너편에서 섬기던 신들이든,
아니면 너희가 살고 있는 이 땅 아모리족의 신들이든,
누구를 섬길 것인지 오늘 선택하여라. 나와 내 집안은 주님을 섬기겠다.”
16 그러자 백성이 대답하였다.
“다른 신들을 섬기려고 주님을 저버리는 일은 결코 우리에게 없을 것입니다.
17 우리와 우리 조상들을 이집트 땅에서, 종살이하던 집에서 데리고 올라오셨으며,
우리 눈앞에서 이 큰 표징들을 일으키신 분이 바로 주 우리 하느님이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걸어온 그 모든 길에서,
또 우리가 지나온 그 모든 민족들 사이에서 우리를 지켜 주셨습니다.
18 그러므로 우리도 주님을 섬기겠습니다. 그분만이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2독서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 이는 큰 신비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에페소서 말씀입니다. 5,21-32
형제 여러분, 21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서로 순종하십시오.
22 아내는 주님께 순종하듯이 남편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23 남편은 아내의 머리입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이시고 그 몸의 구원자이신 것과 같습니다.
24 교회가 그리스도께 순종하듯이, 아내도 모든 일에서 남편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25 남편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교회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것처럼, 아내를 사랑하십시오.
26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교회를 말씀과 더불어
물로 씻어 깨끗하게 하셔서 거룩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27 그리고 교회를 티나 주름 같은 것 없이
아름다운 모습으로 당신 앞에 서게 하시며,
거룩하고 흠 없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28 남편도 이렇게 아내를 제 몸같이 사랑해야 합니다.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29 아무도 자기 몸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하여 하시는 것처럼
오히려 자기 몸을 가꾸고 보살핍니다.
30 우리는 그분 몸의 지체입니다.
31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됩니다.”
32 이는 큰 신비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를 두고 이 말을 합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60ㄴ-69
그때에 60 제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말하였다.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
61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당신의 말씀을 두고
투덜거리는 것을 속으로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 말이 너희 귀에 거슬리느냐?
62 사람의 아들이 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게 되면 어떻게 하겠느냐?
63 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
64 그러나 너희 가운데에는 믿지 않는 자들이 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믿지 않는 자들이 누구이며
또 당신을 팔아넘길 자가 누구인지 처음부터 알고 계셨던 것이다.
65 이어서 또 말씀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고 너희에게 말한 것이다.”
66 이 일이 일어난 뒤로, 제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되돌아가고
더 이상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았다.
67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에게,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하고 물으셨다.
68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69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제자들 가운데에서”(요한 6,66) 많은 이가 돌아갔다는 구절이 눈에 들어옵니다. 단순히 빵을 찾아왔던 군중이 아니라, 그래도 그들 나름으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배우려고 하던 이들이 돌아서서 떠나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붙잡지도 않으십니다. 그래도 이 말씀이 생명의 말씀이라며 남아 있겠다는 이들만 예수님 곁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듣기에 거북할까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일까요? 듣기에 거북하다고 한 이들도 틀린 말을 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요한 복음서 6장에서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살을 먹고 그 피를 마시라고 하신 말씀 때문에 떠나갑니다. 성경의 다른 부분들에서는,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실 때 제자들은 듣기 거북해합니다. 포도밭의 일꾼들은 포도밭 주인이 후하다고 하여 화를 내고, 집을 나갔다가 돌아온 둘째 아들을 아버지가 받아주자 첫째 아들은 집에 들어가지 않으려 합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말씀도,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고 따라오라는 말씀도 듣는 이에게는 편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듣던 그 시대 사람들만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말씀이 영원한 생명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떠나가는 이들에게 이것을 굳이 다시 설명하지 않으십니다.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6,65) 당신 곁에 머무를 수 없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일 것입니다. 거북하게 들리는 그 말씀, 따라가면 죽을 것만 같은 그 말씀을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라고 믿고 뛰어들 수 있는 이들만 끝까지 예수님을 따라갑니다.(안소근 실비아 수녀)
지금 어디를? 누구를? 찾아가고 있습니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하고 있는 일들이 술술 잘 풀리면 좋겠는데, 꼬이고 꼬입니다. 인생이 괴롭습니다. 그럴 때 누구를 찾아가십니까? 요즘 ‘영적 동반’이란 용어가 유행입니다.
기꺼이 내 고민을 들어주고, 신앙 안에서 성찰할 수 있도록 방향을 제시해주는 좋은 영적 스승을 찾아간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은 다시 또 없을 것입니다.
오랜 세월 동고동락했던, 그래서 세상 편한 절친을 찾아가는 것도 좋은 일입니다. 차 한 잔 하면서 훌훌 다 털어놓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그런데 어떤 분처럼 혹시라도 이상야릇한 분위기의 철학관이나 도사님을 줄창 찾아가는 것은 아닙니까?
사랑하는 자녀의 시험 철이 다가오면 어디를 찾아갑니까? 아무런 의미도 없는 바위 덩어리를 찾아가지는 않습니까?
승진을 앞두고, 선거철을 앞두고 어디를 찾아갑니까? 결코 기대서는 안 되며, 절대로 찾아가서는 안 될, 그리고 언젠가 허망함만을 느낄 ‘유력인사’를 찾아가는 것은 아닙니까? 그렇다면 참으로 큰 실수를 하는 것이며, 잘못 찾아가는 것이 분명합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베드로는 이렇게 자문합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그리고 이어서 지체하지 않고 이렇게 다짐합니다.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이러한 고백 이면에는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동안 좋다는 곳, 정말 대단하다는 사람, 참 진리를 가르쳐준다는 스승, 효험이 있다는 곳... 세상 곳곳을 다 찾아 다녀봤지만 모두 부질없는 행동이었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결국 주님만이 영원하신 분, 주님만이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 그분만이 내 존재 전체를 내어 맡겨도 괜찮은 분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왜 누군가를 찾아갑니까? 그 이유는 너무나 분명합니다. 명쾌한 자문을 구하기 위해서입니다. 의견을 구하기 위해서입니다. 삶의 이정표를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삶의 진리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유한한 것, 잠시 지나가는 것, 의미 없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 참 진리를 찾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아무 데나 찾아가서는 안 되겠지요. 그들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참으로 보잘 것 없는 것들입니다. 잠시의 위로 정도겠지요. 감언이설이겠지요. 거짓된 공약이겠지요. 그들의 가르침에는 오류투성이입니다. 괜히 잘못 찾아갔다가는 패가망신입니다.
결국 우리가 찾아갈 곳은 베드로 사도의 고백처럼 주님이십니다. 그분만이 우리를 참 진리의 길로 인도할 것입니다. 그분만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의 양식을 주실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말씀을 강조했는데 왜 성체를 떠났을까?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체성사의 신비를 설명해 주시는데, 사람들의 반응은 대부분 싸늘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떠납니다. 예수님은 성체에 대해 말씀하시기보다는 ‘말씀’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이 말이 너희 귀에 거슬리느냐? 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
열두 제자들에게도 너희도 떠날 것이냐고 물으십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생명’이라고 믿고 실천하려는 이는 성체를 떠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마르틴 루터는 ‘성경만으로’(Sola Scriptura)라고 하며 말씀을 강조했는데 왜 성체를 떠났을까요? 그는 말씀을 생명으로 실천하려 하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해석하려 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사람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말씀에 순종하려고 하지 않는 이들은 말씀을 ‘해석’하려 듭니다. 말씀을 해석한다는 말은 말씀을 자기보다 낮은 수준에 두는 것입니다. 마치 의대생이 죽은 시신을 해부하듯이 말씀을 자신 뜻대로 해석하겠다는 뜻입니다. 자신들이 실행하는 대로 해석하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수백, 수천 개의 성경의 다른 해석과 종파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성체의 역할이 사라집니다. 루터는 실천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야고보서를 성경에서 빼려고 했습니다.
부자 청년에게 예수님께서 가진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고 당신을 따르라고 했을 때 그는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 말씀을 실천할 힘이 없었던 것입니다. 말씀을 실천하려고 하면 힘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힘을 찾기 위해 성사에 머무를 수밖에 없습니다.
저 같은 경우도 말씀을 통해 늦게나마 사제 성소에 응답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응답에 힘차게 따를 힘이 없었습니다. 그때 성체를 영할 때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 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다 주시는데 내가 뭘 드린다고 유세를 떨었던가?’라며 크게 회개하고 그 힘으로 지금까지 살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을 실행하려고만 한다면 성체는 떠날 수 없는 존재가 됩니다. 이는 마치 거울과 물의 관계와 같습니다. 거울은 말씀이고 물은 성사입니다. 거울을 보면 물을 찾게 됩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얼굴이 더럽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물로 씻으면 다시 거울을 찾습니다. 잘 씻겼나 봐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씀과 성체는 마치 자전거의 두 페달처럼 서로를 필요로 하게 됩니다.
말씀이 생명이 된다는 말은 말씀의 실천이 곧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만약 십일조를 내라는 성경 말씀을 읽으면 어떨까요? 순종하지 않고 해석합니다.
‘그건 그때 당시나 그런 것이고, 또 개신교나 하는 것이지 이젠 그런 율법은 없어.’
이렇게 되니 모든 것을 주시는 성사가 의미가 없어집니다. 그러나 다 주신 분을 성사 안에서 만나면 어떨까요? 소득의 십분의 일 바치는 것은 일도 아니게 됩니다.
디즈니플러스에서 ‘삼식이 삼촌’(2024)이란 드라마가 방영되었습니다. 삼식이 삼촌은 어렸을 때부터 자기 사람은 세 끼니를 다 먹인다고 하여 별명이 삼식이라고 붙여졌습니다. 그렇게 사람이 많으니 뒤에서 나라를 좌지우지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돈은 기업가들의 모임인 청우회 회장이 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죽고 어리바리해 보이는 아들이 수장을 맡자 그를 무시하고 자기 뜻대로 정권을 잡으려 합니다. 그러다 죽게 됩니다. 삼식이 삼촌은 말합니다.
“저는 평생 청우회를 위해서 열심히 뛰었습니다. 사냥이 끝났다고 사냥개를 잡아 먹습니까?”
“사냥이 끝나서 잡아먹는 게 아니죠. 사냥개가 지가 사람인 줄 알더라고. 왜 자꾸 식탁 위에 올라와? 잡아먹어 달라는 거 아니에요?”
이에 비해 가나안 여인의 자세는 어떻습니까? 예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개처럼 여깁니다. 그러니까 성사, 곧 마귀 들린 딸이 낫습니다. 개에게 주인의 말은 생명입니다. 그래서 밥을 얻어먹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저희는 『하.사.시.』를 읽고 매일 하루를 살 한 문장을 공유하며 말씀으로 나아갑니다. 이렇게 살면 결코 성체성사의 은총에서 멀어질 수 없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삼권분립인 나라에서 국회는 ‘청문회’ 제도를 통해서 과거에 있었던 불의와 부정을 밝혀내고, 현재 발생한 사건과 사고의 진상을 규명하고, 미래에 있을 정부 관료의 능력을 검증합니다. 과거에 있었던 불의와 부정을 밝혀내려 했던 청문회로 ‘5공 청문회’가 있습니다. 이때 청문회 스타로 활약했던 의원으로 이해찬, 노무현 의원이 기억납니다. 의원들은 송곳 같은 질문과 잘 준비된 자료로 증인들의 잘못을 밝혀냈습니다. 최근에 발생했던 사건과 사고의 청문회는 작년 7월에 숨진 해병대원에 대한 청문회가 있습니다. 증인들은 거짓과 허위를 말할 때는 처벌받을 수 있다는 ‘선서’를 하게 됩니다. 의원들의 질문과 증인들의 답변이 있었습니다. 몇몇 증인은 현재 수사 중인 사건이기에 재판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이유로 증인 선서를 거부하기도 했습니다. 미래에 있을 정부 관료에 대한 청문회는 ‘방송·통신 위원장’에 대한 청문회가 있었습니다. 이런 청문회 과정을 거치면서 어떤 후보는 자진하여 사퇴하기도 하고, 어떤 후보는 오히려 검찰의 조사를 받기도 합니다. 능력과 자질을 보여 준 후보는 대통령에 의해서 임명됩니다.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청문회’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엄격한 과정을 넘어서지 못할 후보는 알아서 사퇴하는 것도 좋습니다.
성직자가 되기 위해서 10년 동안 신학교에서 공부합니다. 기도와 성찰을 통해서 영성(Sanctitas)을 배우고, 학업과 독서를 통해서 지성(Scientia)을 배우고, 내규와 운동을 통해서 건강(Sanitas)한 몸과 마음을 가꾸게 됩니다. 선배들은 이것을 3S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준비가 되었어도 또 하나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서품 대상자들이 걱정하기도 하고, 두려워하는 ‘서품 공시’입니다. 서품 후보자가 사제가 되기에 합당한지, 중대한 허물이 있는지 물어보는 것입니다. 청문회처럼 치열한 과정을 거치는 것은 아니지만 당사자인 서품 후보자들에게는 긴장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저는 성소국장으로 근무할 때, 서품 후보자들의 서류를 확인했습니다. 대부분은 사제가 되기에 이상이 없었습니다. 제가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에 올 때도 검증을 거쳐야 했습니다. 먼저 댈러스 교구에서 초청하는 절차를 거쳐야 합니다. 제가 속한 서울 대교구에서 저에 대한 서류를 보내야 합니다. 미국에서 합법적으로 머물 수 있는 비자를 발급받아야 합니다. 서류작업이 완료되면 댈러스 교구에서 실시하는 교육프로그램을 받아야 합니다. 저는 10개의 영상을 보았고, 영상에 대한 문제를 풀었습니다. 문제를 다 풀면 확인서를 받습니다. 그 확인서를 댈러스 교구로 보내면서 모든 검증이 끝났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여호수아는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백성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만일 주님을 섬기는 것이 너희 눈에 거슬리면, 너희 조상들이 강 건너편에서 섬기던 신들이든, 아니면 너희가 살고 있는 이 땅 아모리족의 신들이든, 누구를 섬길 것인지 오늘 선택하여라. 나와 내 집안은 주님을 섬기겠다.”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하느님을 섬겨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면 안 됩니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야 합니다. 우상을 섬기면 안 됩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응답했습니다. “다른 신들을 섬기려고 주님을 저버리는 일은 결코 우리에게 없을 것입니다. 우리와 우리 조상들을 이집트 땅에서, 종살이하던 집에서 데리고 올라오셨으며, 우리 눈앞에서 이 큰 표징들을 일으키신 분이 바로 주 우리 하느님이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걸어온 그 모든 길에서, 또 우리가 지나온 그 모든 민족들 사이에서 우리를 지켜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주님을 섬기겠습니다. 그분만이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느님만을 섬기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약속의 땅으로 들어갔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떠났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주님을 믿고 따르기 위해서는 주님의 가르침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것은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같은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시작은 가정입니다. 아내는 남편을 하느님처럼 여겨야 합니다. 남편은 아내를 하느님처럼 여겨야 합니다. 이것은 교회 공동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가장 보잘 것 없고, 가장 굶주리고, 가장 헐벗은 이에게 해 준 것이 곧 나에게 해 준 것이다.”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신앙생활을 한다면 우리들 역시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이 없으면 온갖 심오한 진리도, 화려한 건물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오늘의 성인
성 루도비코(Louis)
신분 : 왕, 3회원
활동지역 : 프랑스(France)
활동연도 : 1214-1270년
같은이름 : 누수, 루도비꼬, 루도비꾸스, 루도비쿠스, 루수, 루이, 루이스
성 루도비쿠스(Ludovicus, 또는 루도비코)는 프랑스 왕 루이 8세와 카스티야(Castilla)의 블랑쉬(Blanche)의 아들로 프와시(Poissy)에서 태어나 어머니의 종교적인 분위기 속에서 성장하였다. 1226년 그의 부친이 서거했을 때 그의 나이는 12세에 불과 했으므로 어머니가 섭정의 자리에 올랐다. 그녀는 아들의 왕권을 노리는 샹파뉴(Champagne)의 티보를 비롯하여 야심 많은 귀족들과 대항했고, 어떤 때에는 전쟁도 불사하였다.
그는 1234년 5월에 프로방스의 공작 레이먼드의 딸인 마르가리타(Margarita)와 결혼하여 열 명의 자녀를 두었다. 같은 해에 그는 대권을 물려받고 통치자가 되었고, 모친 블랑쉬는 고문관으로 아들을 도왔다.
그는 1242-1243년의 남 프랑스의 반란을 진압했고, 또 잉글랜드(England)의 헨리 3세를 테임브르그에서 격퇴하였으며, 포와투를 손에 넣는 등 국가의 권력을 점점 확대하였다. 1248년 그는 십자군을 지휘하여 출정하였으나 1249년에 다미에타에서 포로가 되어 사라센인들의 손에서 곤욕을 치렀다.
그 후 그는 석방되어 성지로 가서 1254년까지 머물다가 모친의 사망 통보를 받고 프랑스로 돌아왔다.
그는 플랑드르(Flandre)와의 평화를 이룩했고 리모주(Limoges), 카오르(Cahors) 등 수많은 지역을 평정하였다.
루도비쿠스는 천성적으로 신심이 깊었고, 또 실제로 이상적인 수도자를 꿈꾸었다.
이 때문에 그는 정의를 펴고 그리스도교적 사랑으로 나라를 다스렸으며, 왕으로부터 농부에 이르기까지 각자의 권리를 옹호하여 성왕으로 불리었다. 동시에 그는 예리하고 힘찬 군주였으며, 동시에 평화를 사랑하는 뛰어난 군인이었다. 그는 하느님께 불경한 태도나 말을 한 사실이 없다. 그의 맏아들에게 했던 유언에서도 그는 자신의 신앙을 그대로 설명하고 지키도록 부탁할 정도였다. 1270년 그는 재차 십자군을 일으켰다가 8주일 후에 이질에 걸려 운명하였다.
성인은 한마디로 가장 이상적인 중세의 그리스도인 왕이었다. 그의 치하에서 프랑스는 최대의 번영을 누렸다.
그의 신심은 자신이 작은 형제회 3회원이 됨으로써 입증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는 작은 형제회 3회의 남자 수호성인이다. 그는 1297년 교황 보니파티우스 8세(Bonifatius VI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임종시에 그는 이런 말을 하였다. “주님, 저는 이제 당신의 집에 들어가렵니다. 당신의 거룩한 성전에서 예배하리이다.
당신의 이름에 영광을 드리나이다.” 그리고 오후 3시경에 “제 영혼을 당신 손에 맡기나이다.” 하며 숨을 거두었다. 그의 유해는 생드니(Saint-Denis) 수도원 성당에 안장되었다.
성 요셉 데 갈라산즈(Joseph de Calasanz)
신분 : 신부, 설립자, 교육자
활동연도 : 1556-1648년
같은이름 : 갈라산스, 갈라상스, 요세푸스, 요제프, 조세푸스, 조세프, 조셉, 조제프, 주세페, 쥬세페, 칼라산스, 칼라산즈, 호세
아버지 페드로 갈라산즈(Don Pedro Calasanza)와 어머니 마리아 가스토네아(Maria Gastonea)의 막내아들인 성 요셉 데 갈라산즈(Josephus de Calasanz)는 에스파냐 아라곤(Aragun)의 페트랄타 데 라 살(Petralta de la Sal) 근처의 칼라산사(Calasanza) 성에서 태어났다. 그는 에스타디야(Estadilla)에서 문법과 수사학을 공부하였으며, 레리다(Lerida) 대학에서 철학과 법학을 공부하여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1571-1577년). 그리고 발렌시아(Valencia) 대학과 알칼라 데 에나레스(Alcala de Henares)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였다.
그런데 이 기간 중에 어머니와 형이 사망하자, 아버지는 요셉이 돌아와 결혼하여 가문을 이어가기를 바랐다. 그러나 요셉은 이러한 아버지의 뜻을 물리치고 1583년 12월 17일 우르겔(Urgell)의 주교인 우고 암브로시우스(Hugo Ambrosius)로부터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 후 성 요셉은 알바라신 교구에서 활동하였다. 교구장 주교는 성 요셉을 자신의 고문 신학자이자 주교대리로 임명하여 피레네 산맥의 외딴 지역들에 대한 성직자들의 개혁과 신앙 재건을 위하여 파견되었다. 요셉은 모든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1592년 로마(Roma)로 가서 콜론나(Colonna) 추기경을 만났는데, 그 추기경 역시 성 요셉을 자신의 고문 신학자 겸 조카의 스승으로 삼았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서, 그는 로마에서 교육과 자선 활동을 위한 공동체 설립을 시도하게 되었다. 그는 로마에서 일반 국민들의 무지와 윤리적 타락, 특히 부모가 죽은 뒤 버림받은 고아들을 보살피고 교육하는 일이 급선무임을 깨닫고 티베르 강을 끼고 있는 빈민가에서 유럽 최초의 무료 공립학교를 개설하였다. 그는 1597년에 두 사제의 도움으로 이 학교를 연 다음 ‘그리스도교 교리 형제회’의 책임자가 되었다.
마침내 1617년 교황 바오로 5세(Paulus V)는 성 요셉이 설립한 학교를 공식 수도회로 승인해 주었고, 많은 이들의 지원과 협력으로 이와 유사한 많은 학교들이 설립되어 학생수가 천여 명에 이르게 되었다. 1621년 11월 18일에 그의 공동체는 교황청으로부터 정식 인준을 받은 수도회가 되었으며, 성 요셉은 이 수도회의 종신 총장이 되었다.
초창기의 사제들은 주로 초등학교에서 가르쳤다. 성 요셉은 초급과 중급 학교의 체계화에 기여하였다. 그는 교과과정을 면밀히 구성하였고 어린이들이 선(善)을 사랑하도록 교육 원칙을 세웠다. “어린이들이 처음부터 신앙과 문학 교육을 받음으로써 자신의 삶이 행복함을 알게 된다.”고 그는 기록하였다.
이들 학교는 에스파냐, 보헤미아(Bohemia), 폴란드, 이탈리아 등 수많은 나라에 세워졌다. 그러나 설립자의 만년은 야심을 가진 후계자들의 심각한 분쟁으로 점철되었다. 그는 또 다른 욥처럼 용기를 발휘하였지만 그의 수도회에 대한 신뢰는 그가 죽은 후에야 되살아났다. 그는 로마에서 1648년 8월 25일에 운명하였고, 1748년 8월 7일 시복되었으며 1767년 7월 16일 교황 클레멘스 13세(Clemens XIII)에 의해 시성되었다. 교황 비오 12세(Pius XII)는 그를 ‘모든 그리스도교 학교의 천상 수호자’로 선포하였다.
성 제네시오 (Genesius)
활동년도 : +3세기경
신분 : 희극배우, 순교자
지역 :
같은 이름 : 게네시오, 게네시우스, 제네시우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궁중 무대에서 그리스도교의 성사를 풍자한 연극을 공연하였는데, 배우 성 게네시우스(또는 제네시오)는 세례를 받으려고 준비하는 예비자로 출연하였다. 이 예식이 공연되던 중에 그는 갑자기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겠다는 생각이 불같이 타올라 세례를 받았다. 그가 이 사실을 황제에게 선언하자 황제는 그를 재판장 플라우티아누스에게 넘겼다. 재판관이 이교신에게 희생 제사를 바치라는 요구를 하자 그는 믿음을 지키며 끝까지 거절하고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게네시우스는 배우의 수호성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