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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문록 상권 상당 대기 21-3. 무엇이 한 티끌인지요?
한 스님이 법석에 나와 예를 다하고 운문선사에게 물었다.
[" '티끌 하나가 세상 티끌을 다 포함한다.' 는 옛사람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무엇이 한 티끌인지요?"] 라고 물었습니다.
여기서 한 스님이 물은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한 티끌입니다.
한 티끌이란 미진(微塵)입니다. 그럼 미진이란 무엇인가?
삼천대천세계가 사실 존재하는 것으로 인식하지만 그 색이란 것이 나누어 질수 없는 실체적 진여가 있느냐 하면은 사실 없지요 모든 색은 나누면 다 나누어 집니다. 옛날 사람들이나 부처님도 과학적으로 미진이라 했지만 사실 지금의 현실속에서는 과학적 기술을 빌어 색을 나누면 세포가 되고 세포를 나누면 분자가 되고 불자를 나누면 원자가 되고 원자을 나누면 원자 핵이 되고 원자 핵을 나누면 양자가 된다는 것을 다 압니다. 그럼 양지는 나눌 수 있습니까?
나눌 수가 없습니다. 양자는 색입니까? 아니면 공(空)입니까? 공도 아니요 색도 아닙니다. 형상이 있으면 색입니다. 그러나 형상이 없으면 공이라고 하지만 양자는 형상도 아니요 그렇다고 없는 것도 아닌 것입니다. 그럼 형상도 아니요 형상아님도 아닌 것은 무엇입니까. 양자는 그냥 에느지인 전자이며 빛인 것입니다.
이 빛은 에느지이면서 전자이면서 그 형상이 사실 있다 없다를 초월한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의 만물은 다 상대성원리로 되어 있지만 이 상대성를 벗어난 것이 바로 공이며 색이며 연기인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중도(中道)라 하면 중도가 바로 깨달음이며 부처인 것이지요. 그럼으로 부처는 양변을 벗어난 무유장단(無有長短)을 벗어난 중도실상(中道實相)을 말하며 절대평등(絶對平等)이며 불생불멸(不生不滅)이며 부증부감(不增不減)이며 법성원융(法性圓融)인 것임인 것입니다. 그럼으로 인연따라 모이고 흩어지는 무애법계(無碍法界)이며 사법계(四法界)인 이사무애법계(理事無礙法界)이며 사사무애법계(事事無碍法界)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잘 나타낸 의상조사의 법성게가 잘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직지인심(直旨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 할 때 법성과 불성(佛性)을 알면 부처를 이룬다는 근본 뜻을 읊은 법성게룰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의상조산 법성게 (法性偈
法性圓融無二相 법성원융무이상 법의성품 둥글넓어 두모양이 본래없고
諸法不動本來寂 제법부동본래적 모든법이 동요없어 본래부터 고요해라
無名無相絶一切 무명무상절일체 모든것이 끊어져서 이름없고 형상없어
證智所知非餘境 증지소지비여경 참지혜로 알뿐이지 다른경계 아니로다
眞性甚深極微妙 진성심심극미묘 참된성품 심히깊어 지극히도 미묘하니
不守自性隨緣成 불수자성수연성 자기성품 지킴없이 인연따라 이루어라
一中一切多中一 일중일체다중일 하나중에 일체있고 일체중에 하나있어
一卽一切多卽一 일즉일체다즉일 하나가곧 일체이며 일체모두 곧하나라
一微塵中含十方 일미진중함시방 한나티끌 그가운데 시방세계 머금었고
一切塵中亦如是 일체진중역여시 일체모든 티끌속도 이것또한 그러하다
無量遠劫卽一念 무량원겁즉일념 끝도없는 무량겁이 그대로가 일념이요
一念卽是無量劫 일념즉시무량겁 일념이곧 끝이없는 무량원겁 그대로다
九世十世互相卽 구세십세호상즉 구세도오 십세도오 서로서로 통하나니
仍不雜亂隔別成 잉불잡란격별성 그럼에도 안섞이고 따로따로 이루어라
初發心時便正覺 초발심시변정각 처음발심 한그때가 바른깨침 이룬때요
生死涅槃常共和 생사열반상공화 죽고사는 큰열반이 항상서로 함께하고
理事冥然無分別 이사명연무분별 이상현실 아득하여 분별할수 없었으니
十佛普賢大人境 십불보현대인경 열부처님 보현보살 큰사람의 경계여라
能仁海印三昧中 능인해인삼매중 해인삼매 그속에서 능히하여 이루리라
繁出如意不思議 번출여의부사의 불가사의 무진법문 마음대로 드러내며
雨寶益生滿虛空 우보익생만허공 보배의비 내리어서 중생이익 가득하니
衆生隨器得利益 중생수기득이익 중생들이 그릇따라 온갖이익 얻음이라
是故行者還本際 시고행자환본제 이까닭에 불자들은 본래자리 돌아가서
叵息妄想必不得 파식망상필부득 망상들을 쉬지않고 얻을것이 하나없네
無緣善巧捉如意 무연선교착여의 무연자비 좋은방편 마음대로 자재하면
歸家隨分得資糧 귀가수분득자량 보리열반 성취하는 밑거름을 얻음일세.
以陀羅尼無盡寶 이다라니무진보 다라니의 무진법문 끝이없는 보배로서
莊嚴法界實寶殿 장엄법계실보전 온법계를 장엄하여 불국토를 이루면서
窮坐實際中道床 궁좌실제중도상 마침내는 진여법성 중도자리 깨달으니
舊來不動名爲佛 구래부동명위불 본래부터 변함없는 그이름이 부처일세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법의 성품이 바로 불성(佛性)인 것입니다
이렇게 물었는데 이 미진(微塵)을 어떻게 설파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운문선사는 이렇게 답을 합니다.
["또렷한 소리로 다시 물어 보아라."]라고 하십니다.
미진을 설명하려면 법계의 이사무애법계와 사사무애법계까지 설파를 해야 하는데 이를 아무리 논리적으로 이야기 해도 성품론은 사실 논리가 적용되지 않는 것입니다. 논리는 상대성원리로 설명을 해야 논이 되는데 어찌 불성(佛性)을 법성(法性) 설명할 길이 없는 것이지요 오직 자기 스스로 자각(自覺)할 뿐인것입니다.
그래서 "또렷한 소리로 다시 물어 보아라."라고 반문하고 계십니다.
그른데 이 스님은 이렇게 받아 침니다.
["저는 묻지 않겠습니다. 스님께서는 그래도 대답하시겠습니까?"]
즉 내 묻는 말에는 법어나 항상일구(恒常一句)를 내려 주지않고 “또렷한 소리로 다시 물어 보아라”라며 미진에 대하여 물었는데 미진에 대한 설명은 하지않고 왜 부정를 해버립니까? 다시말해 한 티끌을 물었는데 색인지 공인지 연기인지 왜 대답은 하지 않고 전체를 부정해 버리니 그럼 저도 무위행(無爲行)으로 자는 묻지앟겠습니다. 그럼 물으니 답이 있으야 하는데 답을 주지 않고 부정을 해 버리니 저도 묻지 않겠습니다. 그러면 상대성이론을 떠나버리는데 그래도 스님께서는 대답하시겠습니까?라고 묻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운문선사는 이렇게 답을 하십니다. 그대가 무위행(無爲行)이라고 했는데 그것도 변이다. 하시면서 이렇게 답을 하십니다.
["네 입을 벽에다 걸어두지 못하겠구나."]라고 하십니다.
무위에 대한 답을 왜 이렇게 하실까요? 무위(無爲)도 변이며 유위도 변이다 너가 멈춘다고 해서 세상이 변하지 않는 가운데 변하고 변하는 가운데 변하지 않는다. 즉 색이 연기로 인하여 공이 되면 공이 연기로 인하여 색이 되는 것이니 너가 색이라고 해도 틀렸고 연기라해도 틀렸곡 공이라 해도 틀렸다. 이것이 선문답일 뿐이다.
순경계와 역경계가 다 있는 그대로며 아무리 변해도 한 티끌을 한 티끌일 뿐이다.라는 뜻으로 말씀을 해서 받아 쳐 버립니다.
여기서 한 스님은 회광반조(廻光返照)하여 공즉시색(空卽是色)과 공즉시색(空卽是色)이란 것을 바로 알아차려야 하는데 아쉽다.
그렇게 선문답은 끝은 내고 말았으니 이 말이 화두가 되어 수없는 고뇌 속에 길을 찾아가시길 빌 뿐입니다.
이 때 한 스님이 운문선사를 향하여 예를 올리고 이렇게 묻습니다.
["모든 것이 일상 그대로인 경계(境界)라면 어떻습니까?"]라고 물었다. 여기서 “모든 것이 일상 그대로인 경계”를 물었습니다.
이 물음은 진리에 대하여 공간적으로 물은 것입니다. 정말 진리인 제법(諸法)을 너무나 논리적으로 공간적으로 바르게 묻는게 아니라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를 너무나 명확하게 드러내었습니다.
지장스님이 말씀한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 일 뿐”은 연기적인 시간을 지준으로 한 말씀이 아닙니다. 찰나간의 시간이 멈춘 공간적으로 진리를 설파한 말씀입니다. 그 말 밖에는 사실 선사가 아니라 부처님이라도 여기에는 할 말이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공간적이 있느냐 하면 시간적으로 연기가 있습니다.
이 연기를 빼고 공간적으로만 말을 한다면 이것도 또한 편견인 것입니다. 색이 연기로 인하여 공이되고 공이 연기로 인하여 색이 되는 삼위일체(三位一體)를 말해야 하는데 참으로 난해 한 문제입니다. 그래서 운문선사이 이렇게 답을 하십니다.
["똥 냄새가 나에게 스미긴 하나 내가 우선 묻겠다. 낮에 3천리를 가고 밤에 8백리를 가면 너의 발우 속 어디에 가서 닿겠느냐?"]라며 경계를 시간적으로 연기적으로 이렇게 설파를 하십니다.
"똥 냄새가 나에게 스미긴 하나 내가 우선 묻겠다.“라는 말씀은 너가 말하는 진리는 공간적으로 말하는 것이지만 그것으로 다 드러낸 것은 아니다. 그 진리안에는 공간적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적으로도 존재하는 것이다. 누가 무어라 해도 진리의 당체인 진여는 말로써는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오직 그대 스스로 감각(感覺)할 뿐이며 그 감각 자체가 그대로 진여 자성인 것이다.
그러니 그대가 진리를 어떻게 말해도 바로 진여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것을 “똥 냄새가 나에게 스미긴 하나 내가 우선 묻겠다”라고 하신 것은 무엇이라 해도 지금 여기서 언어도단인 진리당체를 공간적으로 말을 해도 나에게는 다 똥냄새가 스미는 것 같다고 하신 것은 연기적으로 성품적으로 이렇게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그 다음에 “낮에 3천리를 가고 밤에 8백리를 가면 너의 발우 속 어디에 가서 닿겠느냐?"라고 공간적이 아니라 연기적으로 밝혀 볼 수 있겠느냐?라는 뜻이다. 즉 연기와 공과 색이 하나가 될 수 있느냐를 묻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자 사실 그런 말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 스님은
[대꾸가 없자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부질없이 헛소리나 지껄이는 놈아."]라고 물론 말로서는 드러 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찰라간에도 마음으로는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알아 차릴 수 있는 것입니다. 알아차리고 못 알아차리고는 그 스님의 견처와 안목(眼目)으로 알 수 있는 것이지 세상 누구도 그 순간은 알아차릴 수가 없습니다. 오직 그대 마음에 어떻게 비추이느냐 하는 것은 즉 경계는 색입니다. 그러나 그색은 또한 색이 아닙니다. 형상은 형상이 아니요 형상 아님도 아니며 형상 그대로가 형상인 것입니다. 돌~~!!!!!!!!
이 스님이 운문선사의 말을 알아 들었는지 몰랐는지 다시 묻습니다
["무엇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보는 안목(眼目)입니까?"]라고 물었다.
여기서 물은 것은 안목(眼目)입니다. 그럼 안목은 무엇을 말합니까?
먼저 안목에 대하여 설법하신 수불스님의 법문이 있어 소개 하겠습니다. 안목(眼目)이란?
삶. 이란 여러 가지 형태로 사람마다 다르지만 인생이란 삶은. 누구나 똑같은. 희로애락 에 불과하다. 그래서 만사만생이 연기요. 인연에 의해 생 하고 멸한다. 지혜가 짧으면 육안으로 보이는 모든 형상만 보아지고 본질을 보지 못한다. 같은 형상 모양이라도, 천안으로 보는 형상의 본질은 다르다. 법안(法眼)은 진리로 보는 눈이다. 혜안(慧眼)은 사물의 본질을 보는 눈이다. 불안(佛眼)은 깨달은 안목 지혜를 바로 보는 눈이다.
모든 것에는 본질이 있다. 이 말은.!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지고 한 저 마다 가치 가 있다는 것을 말한다. 전도된 지견에, 혜안이 없으면 세상은 아수라장 되고 말 것이다. 삶에 가치가 물질이 전부라는 미혹함. 에서 깨어나 진리의 눈으로 본질을 보고 높은 안목으로 살아가야 한다. 지구의 모든 인종이 언어가 다르고 문화가 달라도 명실 공히 "오안"이 다 있다. 오안(五眼)은 육안 천안 혜안 법안 불안 (肉眼. 天眼. 慧眼. 法眼. 佛眼.) 보고도 보지 못하는 것은, 육안에만 갇혀 탐욕의 무명 때문에 보이지가 않은 것이다.
미혹 한 마음.! 육안 (肉眼)을, 혜안으로 밝히는 공부가 불교 수행법이다. 하나의 열매가 열리는 까닭은, 한 톨의 씨앗에서 인연함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 해와 달과 비바람 눈보라를 거쳐야 비로소. 열매가 열린다는 것을 볼 줄 아는 지혜가 안목이다.
그 공부가 「인욕바라밀」(忍辱波羅蜜)의 수행 공부이다.
이 세상에 자기 것은 본래 하나도 없다. 또 아무리 많은 것과, 법적으로 등기되고. 금은보화를 소유하여도 갈 때는 종이 한 장도 가져가지 못한다. 공(空)에서 연기(緣起)하여 온 것이 나요, 수없는 욕망만 추구하다 무(無).로 돌아가는 것이 나다.
생명의 존재는 해와 달과 땅과 바람 물. 이지.!- 재물이나 권력 명예가 아니다. 전생에서 타고 온 나의 본질은 무엇일까.?
이 생에 오기 전에. 천지가 생기기 전에. 타고 온 나의 천성(성질)을 말한다. 어머니 한 뱃속에서 태어나도 언니와 내가 다르고. 형님과 내가 다르다.
무엇이 다른가.? 한 부모 배속에서 태어나지만. 업인중생(業人)각자 성격과 성품 성질머리가 다 다르다. 자신의 본질인 성품(性品)을 살펴라. 모든 일의 본질("물은 젖는 것이 본질이다")을 보는 안목을 길러야 한다. 자신의 본질을 보지 못하면. 늘 짜증내고 신경질 내며 화나고 성질만 내는 자기밖에 보이지 않는다.
조급하고 서두르며 자기 고집에만 갇혀 살면 사랑을 주어도 사랑받지를 못한다. 자기 성격을 고치지 않으면. 사랑받을 수가 없고. 행복할 수가 없다. 편협하고 고질화 된 자기에서 허물"을 벗어라.
뱀의 허물을 벗어던지고. 중생의 허물을 벗고. 부처의 옷으로 갈아입어라. 중생의 바탕이 「불성」이니.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하루에 「반야심경」을 3번 이상 독경하는 노력을 한다면. 자기 인생" 자기 성격"을 바꾸어 부처의 길 성공의
길로 나아갈 수가 있어진다.라고 설파하였다.
여기서 안목이란 자기 스스로 경계를 보는 여래장의 소현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세상을 살면서 보고 듣고 맛보고 향기맏고 몸으로 느끼고 머리로 생각하는 육식을 통하여 사량분별하고 수많은 경계를 자기적 천진성을 이용하여 간추려 기억한 저장식(貯藏識)이 바로 아뢰야식(阿賴耶識)이며 이것을 혜안으로 법안으로 불안으로 정리하여 생겨난 견처(見處)인 것을 바탕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힘이 바로 안목인 것입니다. 이 안목은 다 자기스스로 얻어 밝힌 지혜인 것입니다. 그래서 운문선사는 안목이 있고 없고는 다 자기 수행의 척도일 뿐 지금 여기서는 그런 말이 왜 필요한가 이렇게 선지식앞에 왔으니 묻지만 말고 유위행인 행동으로 보여라 하는 뜻으로 이렇게 말후구를 날립니다.
["얼른 3배하라."] ㅎㅎㅎㅎㅎㅎㅎ
하여 그 스님이 절을 하고 물러났다. 그 때 또 다른 스님이 법석에 나와 예를 다한 후 운문선사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우두(牛頭)스님은 종횡으로 자재하게 설하긴 했으나, 향상의 관문을 여는 빗장은 몰랐다는 옛사람의 말을 들었습니다. 무엇이 향상관문을 여는 빗장입니까?"] 여기서 우두(牛頭)스님은 복주(福州)사람이며 스님의 법명은 미(微)였습니다. 동양의 4조이신 도신(道信)스님께 법을 깨친 스님이다. 여기서 이 스님이 물은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향상의 관문을 여는 빗장입니다. 향상의 관문이란 깨달음의 관문인 것이니 그 관문을 여는 빗장이란 향상일구(向上一句)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럼 한 구의 말에 상대가 깨달음에 이룰 수 있는 향상일구(向上一句)인 것입니다.
그럼 향상일구는 무엇입니까? 향상(向上)이란 것은 위로 향한다는 것이니 곧 구경인 절대 평등, 절대 무한(絶對無限)한 이지(理智)의 극점인 형이상(形而上)의 경지를 말한다. 향상구(向上句), 향상일구(向上一句)라는 것은 이 깨달음에서 나온 지극한 한마디를 이르는 것이다. 그런데 운문선사는 이렇게 답을 하십니다.
["동산의 서쪽 산마루가 푸르구나."]라고 하십니다 동문서답(東問西答)입니다. 왜 이렇게 동문서답을 하실까요?
향상일구가 만약 있다면 하향일구도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상대성원리에서 한 변에 불과 한 말입니다. 이 양쪽 경계를 물은 것은 편견이며 바른 정견(正見)이 아닙니다. 이것이 차별심이요 분별심인 것입니다. 그러니 이 양변을 다 벗어난 것은 그럼 무엇일까요?
이것이 말로는 불안(佛眼)이라고 하지만 이것은 바로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 일 뿐”인 것입니다. 이것을 말로 빌어 중도정견(中道正見)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선지식인 운문선사는 지금 여기가 바로 동산입니다. 그러니 있는 그대로는 무엇입니까? “서쪽 산마루가 푸르구나”인 것입니다. 알겠습니까? 돌~~~!!!!!!!!!
이 때 또 한 스님이 법석에 나와 예를 다한 후 이렇게 물었습니다.
["무엇이 큰길가의 흰 소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여기서 “큰길가의 흰 소”는 무엇입니까?
큰 길가의 흰 소는 <법화경>비유품에 나오는 말로서 2승과 보살을 사슴수레 양 수레에 비유하는데 비하여 큰 길가의 흰 소는 일승(一乘)을 비유하는 말입니다. 일승(一乘)에서 본다면 화엄경의 핵심사상인 것입니다. 일승이면 오직 일심(一心)이라 모든 상대성 원리를 뛰어넘어 “모든 것은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 일 뿐”인 경지입니다.
차별도 분별도 없으며 모든 것은 다 자기의 성품을 그대로 드러낸것이며 이것을 부처라고 하면은 다 부처이고 보살이라면 보살이 되어 버리는 경지이니 모든 것은 부처님의 성품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그 어떻한 의심이나 걱정이 있을 수 없는 절대평등의 경계이며 오직 삼세인과도 없도 극락과 지옥도 없는 부처와 중생도 없으며 모든 것은 다 그대로 불성의 바다로써 있는 그대로가 표출되어 있음을 감각하는 마음 밖에는 아무것도 없는 경지입니다.
그러니 이것을 말을 하든 안하든 관게가 없습니다.
그래서 운문선사는 이렇게 대답을 하십니다.
["거룩한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거룩한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 이 말씀은 삼보님께 귀의합니다라는 불공인데 세상 만사는 다 마음이 펼쳐내는 것이며 이 우주도 마음에서 드러내는 것임을 밝히는 것입니다. 알껬습니까?
그런데 이 스님은 바로 알아차리지를 못하고 이렇게 다시 묻습니다
["그 흰 소는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하니 그 흰 소는 지금 여기 모든 것이 다 마음이요 형상은 다 불성인 것입니다.
그러니 이렇게 상대성 원리인 차별심으로 묻고 있으니 무어라 하겠습니까 그래서 참 안타깝다 보고도 모르고 들어도 모르니 무엇이라 하겠습니까 그래서 운문선사는 이렇게혀를 끌끌 차고 계십니다.
[스님은 쯧쯧쯧 혀를 찼다.] 이런 명색에 물들어 묻고 있는 이 스님에게는 말이 필요가 없다. 수행을 해서 한 마음을 깨칠 때까지 기다릴 수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 때 또 다른 스님이 운문선사앞에 나와 이렇게 묻습니다.
["나무가 시들어 잎이 질 땐 어떻습니까?"]라고 연기적 형상을 물었스니다. 그래 시간으로 변해가는 것은 다 자연의 이치이며 본래부터 성품이 그렇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운문선사도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온통 가을바람이로다."] 가을이면 잎이 떨어 집니다. 봄이면 다시 싹이 나옵니다 여름에는 꽃이 피고 새가 웁니다. 그러한 평상심에 무엇이 잘못되었다고 묻고 있느냐 연기란 인연법이며 가을 바람이 부니 낙엽이 지는 것이 아니냐며 직설적으로 가리켜 줍니다.
그런데 이 스님은 다시 이렇게 묻습니다.
["무엇이 포대 속의 진주입니까?"]라고 다시 물었습니다. 포대속의 진주는 무엇을 말합니까? 포대는 형상입니다 그러나 형상은 실상이 아닙니다. 사람의 몸도 지수화풍으로 되어 있지만 그 근본은 바로 마음이지요 그래서 몸속에 가려 보이지는 않지만 그 안에 마음이 있으니 이것이 진주인 것이지요. 이른 평범한 진리를 모르고 물으니 그럼 너는 무엇이라고 하겠느냐고 다시 이렇게 묻습니다.
["말할 수 있느냐?"]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스님은 의심이 너무 많습니다. 답을 들어면 회광반조 할 생각은 안고 또 다른 질문을 합니다.
["무엇이 조종(祖宗)의 적자입니까?"]라고 묻습니다. 조종(祖宗)이란 조계종의 종지를 말하는 것이며 지금 혜능대사의 법맥을 이른 적자는 누구냐고 물었다. 지금 여기 운문선사가 법맥을 이어 설법하고 있지 않느냐 그래도 법맥고 종풍과 종조를 아는 것으로 보아 조금의 견쳐가 있다고 보고 친찬하듯이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말 속에 메아리가 있구나."]라고 하시어 상대성를 비유하여 말이 있느니 그 여순경계에서 매아리가 되어 들리니 싹은 살아있다.
부디 열심히 수행하여 그 메아리의 원천을 찾아 보아라고 하시면서 선문답을 마쳤습니다.
성불인연 맺으소서 옴 바아라 믹~~~!!!!!!!!
운문록 상권 상당 대기 22. 병통을 알아야 한다
[상당하여 말씀하셨다. "반야(般若)를 배우는 보살(菩薩)이라면 모름지기 중생(衆生)의 병통을 알아야 하며, 반야(般若)를 배우는 보살(菩薩)의 병통을 알아야 한다.]
이 초구에서 반야(般若)를 배우는 보살(菩薩)이라면이라고 할 때
그럼 반야(般若)는 무엇입니까? 흔히들 많이 들은 소리지만 막상 반야라면 바로 직지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이 반야에 대하여 육조단경에서 혜능선사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말 돈황본 육조단경 15. 반야(般若) 무엇을 반야라고 하는가?
하명반야(何名般若)? 반야시지혜(般若是智惠). 일체시중(一切時中) 념념불우(念念不愚) 상행지혜(常行智惠) 즉명반야행(卽名般若行). 일념우즉반야절(一念愚卽般若絕) 일념지즉반야생(一念智卽般若生) 세인심중상우(世人心中常愚) 자언아수반야(自言我修般若). 반야무형상 (般若無形相) 지혜성즉시(智惠性卽是).
무엇을 반야라고 하는가? 반야는 지혜이니라. 모든 때에 있어서 생각마다 어리석지 않고 항상 지혜를 행하는 것이 곧 반야행(般若行)이라고 하느니라. 한 생각이 어리석으면 곧 반야가 끊어지고 한 생각이 지혜로우면 곧 반야가 나거늘 세상 사람들은 마음 가운데에 항상 어리석으면서 나는 ‘반야’를 닦는다고 스스로 말하느니라. 반야는 형상이 없나니 지혜의 성품이 바로 그것이니라.
하명파라밀(何名波羅蜜)? 차시서국범음(此是西國梵音) 당언피안도(唐言彼岸到). 해의이생멸(解義離生滅). 저경생멸기(著境生滅起) 여수유파랑(如水有波浪) 즉시어차안(卽是於此岸) 이경무생멸(離境無生滅) 여수영장유(如水永長流) 고즉명도피안(故卽名到彼岸) 고명파라밀(故名波羅蜜).
무엇을 바라밀이라고 하는가? 바라밀은 서쪽 나라의 범어로서 여기 말로는 ‘저 언덕에 이른다’라는 뜻이니라. 바라밀이라는 뜻을 알면 생멸을 떠나느니라. 경계에 집착하면 생멸이 일어나서 물에 파랑이 있는 것과 같나니, 이것이 곧 이쪽 언덕이고, 경계를 떠나면 생멸이 없어서 물이 끝없이 흐르는 것과 같나니, 이것이 곧 ‘저 언덕에 이른다’라고 이름하며, 그러므로 바라밀이라고 이름하느니라.
미인구념(迷人口念) 지자심행(智者心行) 당념시유망(當念時有妄) 유망즉비진유(有妄卽非眞有). 념념약행(念念若行) 시명진유(是名眞有). 오차법자(悟此法者) 오반야법(悟般若法) 수반야행(修般若行). 부수즉범(不修卽凡) 일념수행(一念修行) 법신등불(法身等佛)
미혹한 사람은 입으로만 외우고 지혜로운 사람은 마음으로 행하느니라. 마땅히 생각할 때 망상이 있으면 그 망상이 있는 것은 곧 진실로 있는 것이 아니니라. 생각 생각마다 마음으로 행한다면 이것을 진실이 있다고 하느니라. 이 법을 깨친 이는 반야의 법을 깨친 것이고 반야의 행을 닦는 것이니라. 닦지 않으면 곧 범부요, 한 생각 수행하면 법신과 부처와 같으니라.
선지식(善知識), 즉번뇌시보제(卽煩惱是菩提) 전념미즉범(前念迷卽凡) 후념오즉불(後念悟卽佛). 선지식(善知識), 마하반야파라밀(摩訶般若波羅蜜) 최존최상제일(最尊最上第一) 무주무거무래(無住無去無來). 삼세제불종중출(三世諸佛從中出) 장대지혜도피안(將大智惠到彼岸) 타파오음번뇌진로(打破五陰煩惱塵勞) 최존최상제일(最尊最上第一)
선지식들이여, 번뇌가 곧 보리이니 앞생각이 미혹하면 곧 범부이고, 뒷생각을 깨달으면 곧 부처이니라. 선지식들이여, 마하반야바라밀은 가장 존귀하고 가장 높고 제일이라 머무름도 없고 가는 것도 없고, 오는 것도 없느니라. 삼세의 모든 부처님이 이 가운데로부터 나와 큰 지혜로써 저 언덕에 이르러 오음과 번뇌와 진로를 타파하는 것이니, 가장 존귀하고 가장 높고 제일이니라.
찬최상승법(讚最上乘法) 수행정성불(修行定成佛) 무거무주무래왕(無去無住無來往) 시정혜등(是定惠等) 불염일체법(不染一切法). 삼세제불(三世諸佛) 종중변삼독(從中變三毒) 위계정혜(爲戒定惠).
최상승의 진리를 찬탄하는 것은 이 진리에 따라 수행하면 결정코 성불하여 가는 것도 없고 머무름도 없고, 오고 가는 것도 없나니, 이것이 정과 혜가 함께 하는 것이며 일체법에 물들지 않는 것이니라. 삼세의 모든 부처님이 이 가운데서 삼독을 변하게 하여 계ㆍ정ㆍ혜로 삼느니라.
선지식(善知識), 아차법문(我此法門) 종일반야(從一般若) 생팔만사천지혜(生八萬四千智惠). 하이고(何以故)? 위세인유팔만사천진로(爲世人有八萬四千塵勞). 약무진로(若無塵勞) 반야상재(般若常在) 불리자성(不離自性). 오차법자(悟此法者) 즉시무념(卽是無念). 무억무저(無憶無著) 막기광망(莫起誑妄) 즉자시진여성(卽自是眞如性). 용지혜관조(用智惠觀照) 어일체법불취불사(於一切法不取不捨) 즉견성성불도(卽見性成佛道).
선지식들이여, 나의 이 법문은 하나의 반야로부터 팔만 사천의 지혜를 나타내느니라. 무엇 때문인가? 세상 사람들에게 팔만 사천의 진로가 있기 때문이니라. 만약 진로가 없으면 반야가 항상 있어서 자성을 떠나지 않느니라. 이 법을 깨달은 자는 곧 무념이니라. 기억하는 것도 없고 집착하는 것도 없어서 거짓되고 허망함을 일으키지 않나니 이것이 곧 진여의 성품이니라. 지혜로써 보고 비추어 모든 법을 취하지도 아니하고 버리지도 않나니, 이것이 곧 자성을 보아 부처님 도를 이루는 것이니라.라고 하셔씁니다.
이 내용으로 반야를 이해한다 해도 반야는 지혜이니 이 지혜를 바로 깨달으려면 팔만사천 법문으로도 알수 없으며 오지 자기 스스로 깨닫음을 얻어야만 반야 지혜가 나오는 것이니 부디 수행정진하시옵기를 빕니다.
그럼 "반야(般若)를 배우는 보살(菩薩)이라면“에서 보살(菩薩)은 누구를 보고 하는 말입니까?
보리살타(菩提薩埵) 또는 보디삿따(팔리어) 줄여서 보살(菩薩)은 보리(Bodhi)는 ‘깨달음’, 살타(Sattva)는 ‘존재’를 뜻한다. 즉 보살은 ‘깨달음을 추구하는 존재’, ‘깨달음의 의지를 지닌 존재’로 해석된다. 그러나 단순히 목적지로서의 깨달음에 도달하려는 의지만을 가진 것이 아니라, 그 과정 속에서 끊임없이 타인을 이롭게하며 자비와 선행을 실천하고, 함께 열반에 이르기를 서원하는 자이다.
대승불교의 여러 경전에는 보살의 삶과 서원, 수행의 방식이 제시되며, 누구나 보살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처럼 보살은 철학적 개념이자 종교적 실천의 주체이며, 동시에 대승불교에서 모든 인간이 따라야 할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그려진다.
역사 및 발전을 살펴보면 초기 불교에서는 깨달음을 이루기 직전의 석가모니를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으나, 대승불교로 발전하면서 보살 개념은 보다 보편화되어 이타적 존재로 재정의 되었다. 이 개념은 대승불교에서 중심적인 이념으로 자리 잡았으며, 단지 자신의 해탈에만 이르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함께 깨달음으로 인도하려는 실천적 이상을 담고 있다.
"나는 언젠가 미래에 여래이자 아라한이며, 바른 깨달음을 이룬 부처가 되기를 바란다. 지혜와 실천을 함께 갖추고, 바르게 길을 걸은 자, 세상의 진리를 아는 자, 비길 바 없는 존재, 길들일 수 있는 사람들을 이끄는 자, 그리고 신들과 인간의 스승이 되기를 바란다.
이미 건넌 이로서 다른 이들도 건너게 하며, 평온을 얻은 이로서 다른 이들도 편안하게 하며, 열반에 든 자가 되어 다른 이들도 열반에 들게 하기를 바란다.
이 모든 바람은 인류의 이익과 안녕을 위해, 세상에 대한 연민에서 비롯된 것이며, 많은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신들과 사람들에게 이로움을 주기 위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마하와스투》는 초기불교의 한 분파에서 유래한 산스크리트어 불교 문헌으로, 석가모니 부처님의 전생 이야기와 보살의 길을 강조하는 특징을 지닌 경전이다. 이 문헌은 대체로 상좌부 불교의 형식을 따르고 있지만, 보살 수행과 장래의 부처가 되겠다는 서원이 상세히 묘사되어 있어, 대승불교로 넘어가는 사상적 전환의 흔적을 잘 보여준다.
위의 《마하와스투》의 서원은 후대 대승불교에서 널리 알려진 사홍서원(四弘誓願)의 원형으로 간주된다. 사홍서원은 대승불교의 근본이 되는 원이며, 모든 보살이 다 함께 일으키는 원이라고 하여 총원이라고도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모든 불교의식 및 법회의 시작에 삼귀의(三歸依:불·법·승 삼보에 돌아가 의지함)를 하고 마지막으로 사홍서원을 외워 끝을 맺게 된다. 사홍서원의 내용은 국가마다 종파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다고 한다.
우리가 스스로를 넘어섰으니, 모든 존재가 건너도록 하소서. 해탈한 우리가 그들을 해탈하게 하소서. 위로받은 우리가 그들을 위로하게 하소서. 열반에 이른 우리가 그들을 열반에 이르게 하소서.
위는 간다라 지방의 산스크리트 버전, 아래는 동북아시아 한중일에서 주로 쓰이는 사홍서원이다.
중생무변서원도(衆生無邊誓願度) 많은 중생들을 맹세코 모두 제도하겠습니다 번뇌무진서원단(煩惱無盡誓願斷) 많은 번뇌를 맹세코 모두 끊겠습니다 법문무량서원학(法門無量誓願學) 많은 법문을 맹세코 모두 배우겠습니다 불도무상서원성(佛道無上誓願成) 위없는 불도를 맹세코 이루겠습니다
이렇듯 보살은 타인을 위해 자신의 열반을 뒤로 미루고, 윤회 속으로 들어가 사람들과 희노애락을 함께하며 불교의 가르침으로 타인의 고통과 슬픔을 덜어주고 더 행복하고 이로운 사회를 만들겠다는 결심을 한다. 이는 자신의 해탈을 우선하는 아라한과는 뚜렷이 구별되는 점으로, 보살의 길은 개인의 구원을 넘어서 모든 생명을 향한 끝없는 연민과 더 나은 사회를 위한 책임을 전제로 한다. 그 중심에는 바로 자리이타(自利利他)의 정신이 자리 잡고 있다.
자리이타와 사무량심 자리이타란 스스로의 수행과 깨달음을 통해 자신을 이롭게 하면서 동시에 타인을 이롭게 한다는 불교용어로, 보살의 실천이 자기 수양에 그치지 않고 타인 구제를 향해 나아가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이는 대승불교가 추구하는 이상적 인간상으로서, 깨달음과 자비를 조화롭게 실현하려는 방향성을 보여준다.
이타행, 타인과 공동체를 위한 실천이 그 중심에 있으며, 자리이타와 같은 보살의 마음은 곧 대승불교에서 매우 중요하게 강조되었던 교설인 사무량심으로 나타난다. 이는 곧 불교 보살 사상의 핵심 정신이기도 하다. 사무량심은 불교에서 수행자의 기본 마음가짐인 네 가지 한량없는 마음을 말하며, 이는 모든 사람을 향한 무한한 사랑, 자비, 기쁨, 평등심을 뜻한다.
자(慈, 사랑 자): 모든 사람에게 친절과 사랑을 베풀고 싶어하는 마음이다. 비(悲, 슬플 비): 모든 사람의 고통을 함께 느끼고 고통에서 벗어나도록 돕고 싶은 마음이다. 희(喜, 기쁠 희): 모든 사람이 행복한 모습을 보고 함께 기뻐하는 마음이다. 사(捨, 버릴 사): 분별을 내려놓고 모든 사람들을 차별 없이 대하는 마음이다.
또한 보살은 이러한 자비심과 지혜를 균형 있게 갖춘 존재이기도 하다. 자비는 사람들을 돕고자 하는 실천적 동기이며, 지혜는 불법을 통해 모든 현상의 본질을 통찰하는 능력이다. 이 두 요소는 상호보완적이며, 어느 한 쪽에 치우칠 경우 보살행은 성립하지 않는다. 자비만 있고 지혜가 없다면 집착으로 흐를 수 있으며, 지혜만 있고 자비가 없으면 무관심으로 치우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보살행을 위한 수행은 육바라밀이 대표적인 길로 제시된다. 육바라밀은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반야)의 여섯 가지 덕목이다. 육바라밀은 보살의 길이 일상에서 끊임없이 실천하고 실현되어야 할 지속적 수행의 여정임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신앙으로서의 보살 보살은 불자들이 따라야하는 이상적 인간상이자, 또한 신앙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신앙의 대상으로써 보살은 자비와 지혜, 이타와 수행의 조화를 통해 삶 속에서 불도를 구현하려는 실천적 모델이 되었다. 이들은 단순한 신화적 인물이 아니라, 각각의 덕성과 서원, 역할을 통해 보살행의 방향성을 상징적으로 제시하는 존재들이다.
관세음보살: 자비의 화신으로, 중생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고통을 덜어주는 구제의 보살이다. ‘관음’이라 불리며, 중생의 고통을 듣고 언제 어디서든 그들을 구제하는 존재로 여겨진다. 관세음보살은 중생의 괴로움 앞에 망설임 없이 나아가는 보살의 이타적 정신을 상징하는 존재다.
보현보살: 보살행 실천의 대표로, 《화엄경》에서 십대원을 통해 보살이 어떠한 발심과 실천으로 깨달음에 이르는지를 명확히 제시한다. 그는 자비뿐 아니라 행동과 서원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보살도가 단순한 마음가짐이 아니라 삶 전체에 걸친 실천임을 상징한다.
문수보살: 문수보살은 지혜의 구현으로, 모든 부처의 반야지혜를 상징하는 보살이다. 그는 보살 수행이 자비뿐만 아니라 깊은 통찰과 분별력, 즉 반야의 지혜 위에 서야 함을 상징하며, 선종과 유가행파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지장보살: ‘대지의 장엄한 품’을 뜻하는 이름처럼, 무한한 인내와 원력을 상징하는 존재다. 지장보살은 특히 지옥 중생을 먼저 구제하고, 지옥이 텅 비기 전까지는 결코 열반에 들지 않겠다는 서원을 세운 보살이다. 붉은 두건과 지팡이를 든 모습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중생의 마지막 희망으로 여겨진다.
미륵보살: ‘자애로운 자’라는 뜻을 지닌 미래불로서, 도솔천에서 수행 중이며, 장차 이 세상에 내려와 부처가 되어 법을 설할 미래불이다. 미륵보살은 미래의 희망을 상징하는 존재로 먼 미래에 인간 세상에 출현하여 부처가 되어 법을 설하고 새로운 시대로 이끈다고 전해진다.
대세지보살: 지혜와 신통력, 그리고 깨달음에 이르는 강력한 힘을 상징하는 보살이다. 관세음보살과 함께 아미타불의 협시보살로, 서방정토에서 중생을 맞이하고 인도한다. 그의 이름처럼 '큰 힘을 얻은 자'로서, 깨달음으로 이끄는 정신적 에너지를 나타낸다.
약왕보살: 치유와 봉사의 상징적 보살로 병든 중생의 육체적·정신적 고통을 덜어주며, 수행의 치유적 의미를 상징한다.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의 고통을 나누고 또한 신체뿐 아니라 마음의 고통을 돌보는 자비의 손길도 상징한다.
대승불교의 입장에서는 보살의 개념을 달리한다.
대승불교의 보살 개념은 설일체유부 등의 부파불교를 비판하면서 새로이 생겨났다. 북방에서 위빳사나 수행이 사라지고 불교 이론이 전개되면서 기존의 '개인의 해탈 추구'에 대한 일반 신도의 불만이 생겨났으며, 이에 '많은 사람들과 함께 가는' 대승불교가 생겨나면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능력이 있음에도 단순히 깨달음을 얻은 아라한(성자)가 아닌, 만인을 구원하는 부처가 되기 위해 지상에서 윤회를 겪으며 사람들을 구제하며 수행을 하는 이들을 보살이라 부르게 됐다. 보살은 새로이 생겼다기보다는 경전에 많이 등장하는 말이다. 정확하게 보살이란 부처의 앞에 나가서 부처가 되기를 서원을 세우고 부처에게 "언젠가 부처가 될 것이다"라는 말을 들을 사람을 의미한다. 이를 성불 수기라고 한다. 석가모니불도 오랜 윤회를 거쳐 여러 부처 앞에서 부처가 되기를 서원했으나 많이 퇴짜를 맞았다고.
대승불교에서 보살들은 단순히 부처가 되기 위해 수행하는 자라는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며 부처보다 등급이 낮은 존재도 아니다. 오히려 깨달음을 얻고 열반에든 나한(아라한)보다 보살이 더 대승불교의 이상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맛지마 니까야에 보면 석가모니 부처 역시 인간 세상에 화생하기 직전에는 천상에서 호명보살이라는 이름의 보살로써 존재하고 있었으며, 『관음삼매경』에 따르면 관세음보살은 석가모니보다 먼저 부처가 된 정법명왕여래로 석가모니 전생의 스승이었는데 중생 구제를 위해 스스로 부처에서 보살로 내려왔다. 티베트 불교만 봐도 최고지도자 달라이 라마는 관세음보살의 화신이고 2인자인 판첸 라마는 아미타불의 화신이다. 지장보살의 경우 지옥의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해 부처의 경지에 이르렀음에도 지옥의 중생들이 모두 열반할 때까지 부처가 되는 것을 미루겠다고 하여 보살로 남아 있으며, 문수보살과 보현보살 역시 원래는 부처지만 불법을 통한 중생의 계도를 위해 보살로 내려왔다. 문수보살은 과거 7불의 스승이다. 중국 산시성의 오대산(우타이 산)은 문수보살의 성지이다.
현재 한국 불교에서는 흔히 여자 신도를 높여 이르는 말로 자주 쓰인다. 남자 신도는 거사나 처사라고 한다. 처사는 원래 유교 용어라 불교계 내에서 사용하지 말자는 의견도 있다. 사실 성별에 구애받지 않는 개념임에도 불구하고 오용돼있는 사례지만 이미 관습상 굳어졌다. 여성불자를 보살이라고는 하지만 뒤에 마하살을 붙이지는 않는다. 보살마하살은 보살 중에서도 큰 보살, 대보살을 뜻하는 단어이다.
이렇게 본다면 보살은 사실 모든 불성을 가진 사람을 총칭하여 부
르는 불성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 다음으로 설파하신
["반야(般若)를 배우는 보살(菩薩)이라면 모름지기 중생(衆生)의 병통을 알아야 하며, 반야(般若)를 배우는 보살(菩薩)의 병통을 알아야 한다.]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수행중에 일으나는 많은 환화와 환상에 따라 마구니길을 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제일 많은 것이 불경을 공부하다가 위경을 읽어 잘못된 길을 가는 것을 말하며 이것이 또한 법집(法執)이라하여 법이 마치 그대로 진여인줄 착각하는 경우가 제일 많다. 중생의 병통은 사실 생노병사(生老病死)와 인생팔고(人生八苦)를 깨뚫어 볼 수 있는 안목(眼目)이 있느냐고 묻고 계신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가려낼 수 있는 사람이 있느냐? 나와서 대중(大衆) 앞에서 가려내 보아라.“]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병통에 대하여 먼저번 설한바가 있지만 그 수효가 너무 많아 참고로 찾아 보시길 바랍니다.
그러니 깨달음을 얻으면 그런 병통과 고통에 대하여 다 알아서 처리해 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니 누구든 아는 사람이 있으면 나와서 대중들에 설파해 보아라라고 하십니다.
[대꾸가 없자 "가려내지 못하겠거든 내 길이나 막지 말아 라." 하셨다.] 이렇게 말후구를 날립니다. 깨닫지도 못한 분상에서는 아상에 취해 무엇을 아는척 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법문을 마감하십니다.
성불인연 맺으소서 옴 바아라 믹~~~~~!!!!!!!!!
조사선(祖師禪) 운문록(雲門錄)을 들어시어
인연성불(因緣成佛) 하시어서 붓다(佛陀) 같이 살아가소!
일승법문을 시절인연삼아 인연성불 하옵시고 대원성취 하옵소서 !
원오선원 명상쉼터 천안시 두정동 611_1번지 5층(041)551 8546
무명 납승 원오선사 010 8748 6006 옴~바아라 믹!!!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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