月刊 海印 2014년 12월호 발췌
나는 시골에서 자랐다. 겨울이 다가오면 찬바람에 늘 코가 시렸다. 그 무렵이면 집 안에서는 메주를 띄우는 냄새가 진동했고, 친척들과 함께 우리 집 마당에 빙 둘러앉아 김장을 했다. 나도 어른들 사이에 앉아 고무장갑을 끼고 배추에 양념을 버무렸다. 손이 너무 작아 장갑 안에서 내 열 손가락들은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그럴 때 마다 엄마는 고무장갑을 낀 내 팔에 고무줄로 고정을 시켜줬다.
우리 집은 김치에 생굴을 넣었는데, 배추 잎 하나씩 양념을 버무리고 세 잎 째에 굴 하나씩 넣는 재미가 좋았다. 옆에서 엄마가 갓 버무린 김치 하나를 똑 떼어내 내 입에 넣어줬는데, 또 그 맛이 재미있어 가장 작은 배추 잎은 몽땅 다 떼어내 먹기도 했었다. 그런데 점점 마당에서 펼쳐놓고 하던 것을 집 안에서 하게 되면서 김장 양을 조금씩 줄이게 되었다. 그러다 고무장갑 크기만큼 내 손이 자랐을 무렵, 더 이상 집에서는 김장을 하지 않았다. 꿉꿉하게 옷에 베었던 메주 냄새도 사라졌다. 우리 집 뿐만 아니라 주변 이웃들에게서도 그런 풍경을 볼 수 없게 되자 이젠 김치도 공장에서 만들어내는 걸로 다들 먹게 되는구나, 싶었다.
요즘 그 옛날의 기억들을 끄집어내어 주는 일이 생겼다. 한국기행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작가 일을 시작하면서 나는 과거로의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그 지역의 역사, 문화, 비경을 담아내면서 만나게 된 지금을 살고 있는 사람들. 그들은 여전히 계절별로 자연이 내어주는 대로 살아가고 있었다. 그들의 삶은 나에게는 과거였지만, 그들은 현재에서 ‘전통’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그 전통이 막바지이든, 대를 이어 새로운 누군가의 삶이 되었든 대한민국 구석구석을 찾으며 그 분들의 삶에 감탄하고, 감사했다.
이번 편(12월 8일~12월 12일 방영 예정)을 준비하면서도 많은 사람을 만났다. 큰 주제인 ‘가야산’을 배경으로 이곳에서 자리를 잡고 살아가시는 분들의 이야기를 담게 되었는데, 그 중 나를 가장 설레게 했던 것은 해인사의 김장 울력이었다. 사실, 가야산을 주제로 5부작 다큐멘터리를 기획하게 된 것도 4일 동안 이뤄지는 해인사의 김장 울력을 꼭 촬영하고 싶어서였다. 그래서 무작정 촬영 공문을 보냈다. 해인사의 김장 울력을 담지 못한다면 당장 큰 주제를 바꿔야하는 상황이기도 했다. 다행히 촬영 허가를 내주셨고, 우리 제작팀은 차근차근 진행할 수 있게 되었다. 매년 평균 7,000포기의 배추를 수확해 김장을 하는데, 해인사의 모든 스님들이 나오셔서 울력을 하신다니. 아마도 역대 한국기행 방송 중 최대 인원이 등장한 사례일 것 같다. 올해는 작년 보다는 양이 좀 적다고 했지만, 카메라에 담긴 배추의 양은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배추 수영장이라 불리는 배추 절임통의 크기만 해도 생전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11월 10일, 해인사에서 재배한 배추를 수확하는 날이었다. 승가대학 1학년생부터 어른 스님까지 총 출동했던 수확 작업이었다. 처음 배추를 수확해보는 분들은 배추 밑 둥을 잘못 잘라버려서 잎들을 버리게 되어 혼나시기도 했는데, 그 과정 또한 수행이고 값진 경험이었으리라. 배추의 양이 워낙 많다보니 화물트럭이 여러 번 배추를 싣고 이동했다. 한창 배추 수확이 이뤄지던 때, 김장을 준비하고 있는 마당에서는 배추를 쌓아 올리면 하나의 큰 배추 산을 만들고 있었다. 다음 날인 11일, 삼등분으로 나뉜 배추절임 통에 물이 조금씩 차기 시작했다. 그 통 안으로 스님들이 들어가시더니 소쿠리에 소금을 넣고는 소금물을 만들고 계셨다.
그 옆에서는 칼로 배추를 반으로 자르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이 작업들에서 재미있는 점을 발견했는데, 김장에서도 위, 아래가 있는 법. 칼로 배추를 자르는 작업을 하시는 스님들도 옛날에 배추절임 통에서 한창 배추를 절이고 있었다고 하셨다. 배추 자르는 작업을 하시는 스님들이면 꽤 오래 계셨던 분들 같은 데도 종현 스님이 10년 째 배추를 자르고 계신다고 하니, 해인사의 김장 역사를 조금 실감할 수 있었다. 우린 이 날 노스님이 안내해 주신 돌수각을 구경했다. 지금은 식수를 받치는 용도로 사용되고 있었는데, 옛날에는 이 돌수각에서 김장 배추를 씻었다고 한다. 여기에다 보관을 하면 시원하기 까지 했다고. 돌수각을 설명해주신 노스님도 전해들은 얘기라고 하셨으니 얼마나 오랫동안 해인사 스님들은 직접 김장을 해 오셨는지 짐작을 할 수 없었다.
다음 날 12일에는 절여 놓은 배추를 헹궈 쌓아 두는 작업을 했다. 마지막 날 양념을 버무릴 때 빼내서 이동하기 쉬우라고 마당에 차곡차곡 쌓아두셨다. 11일과 12일에는 새참을 드시는 모습이 참 정겨웠다. 작년에는 눈이 내릴 정도로 추웠다며, 올해는 덜 추운 거라고 말씀은 하시면서도 장작불 앞에, 새참으로 나온 호빵을 두 손에 불어 드시는 모습을 보면 겨울이긴 겨울인가 보구나, 싶었다.
요즘 날씨가 워낙 변덕스러워 촬영 스케줄을 정하면서 날씨를 확인하는데, 김장 예정일에 비가 온다는 소식이 있어 걱정을 참 많이 했었다. 참 다행히도 비는 내리지 않았고, 화창한 하늘 아래에서 촬영을 할 수 있었다. 스님들이 배추와 씨름을 하는 동안, 후원에서 일하시는 보살님들은 양념을 만들어내느라 바빴다. 찹쌀 풀도 만들어야 하고, 추운 탓에 덩어리가 진 고춧가루를 일일이 다시 빻아 양념에 섞느라 허리를 펼 시간도 없어보였다. 이 분들은 마지막 날 양념을 버무리는 날에도 바빴다. 해인사 신도들, 동네 주민들, 자원봉사자들이 다 모여 양념을 버무리고, 스님들은 잠시 뒤로 빠져계셨다. 양념을 버무리면서 배추를 한 잎씩 떼어내 드시는 모습이 어찌나 정겹던지. 많은 분들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은 분이 있었다. 마지막 날이 수능이었는데, 고3 수험생인 딸은 고사장에 보내놓고 해인사에서 김장을 하며 기도를 하겠다는 아주머니도 계셨다.
해인사에서 김장하는 날이면 해인사의 스님뿐만 아니라 가야산이 들썩이는 큰 행사가 되는 것 같았다. 그동안은 저장할 곳이 마땅치 않아서 김치를 땅에 묻었다는 데 올해부터 저장고가 생겨 많은 김치를 저장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하셨다. 우리는 땅에 김치를 묻는 장면을 볼 수가 없어서 아쉬웠지만, 정말 잘 된 일이었다. 4일간의 긴 여정동안 해인사의 큰 행사이자 의미 있는 울력이었던 김장을 촬영할 수 있어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다. 도움주신 많은 분들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꼭 전해드리고 싶다.
첫댓글 산더미 같이 쌓여진 배추와 소금 포대들
미니 수영장 같은 절임통 속에서 장화를 신은
스님들의 손놀림...
장엄한 광경을 내년에 직접 체험해 보시지요.
내년에는 직접 김장 울력에 동참해서 체험을 하겠습니다~^^
@해후 뜻깊은 시간이 되실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