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 속에 울고 있는 내가 있어요
차 례
과정 1 내적 치유란 무엇인가?
과정 2 지식인가, 관계인가?
과정 3 나는 누구인가?
과정 4 성경적 인간 이해
과정 5 쓴 뿌리와 용서
과정 7 나의 진정한 아버지를 알지 못하게 하는 굴레들
과정 8 내 마음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영적 전쟁
과정 9 나를 위하여 인간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저자 소개>
주서택 목사와 김선화 실장은 대학 때부터 C.C.C.에서 훈련을 받고 70년대, 80년대, 90년대에 걸쳐 C.C.C. 영적 운동과 제자화 사역에 헌신해 왔다. 신학과 간호학을 전공한 두 사람은 1982년 결혼하여 청주 C.C.C.를 중심으로 전인 구원 사역에 힘써 왔으며, C.C.C.아카데미센터를 설립하여 지역 사회에 기독 문화를 확산시키는 등 사회 전 영역에 걸쳐 지대한 영향력을 끼쳐 왔다. 1991년부터는 학원 사역과 함께 내적 치유 사역에 비중을 두고 지금까지 수십 차례에 걸쳐 세미나를 개최해 왔으며, 내적 치유 상담실을 개원하여 실제적인 치유 사역과 치유 사역자 양성에 힘을 기울여 왔다. 이들의 치유 사역을 통하여 지금까지 수천여 명이 실제적인 치유와 마음의 변화를 체험하였다.
내 마음 속에 울고 있는 내가 있어요
시간은 새벽 5시였다.
윤이는 친구 집에서 나와 아직도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싸늘한 새벽거리를 걸었다. 차가운 공기보다 더욱 차가운 것이 가슴 속에서 올라왔다.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굳이 말을 한다면 혼자 울다가 지친 그런 쓸쓸함에 가까웠다.
“너 거기가 어디냐?” 어젯밤 늦게 들어간다는 자신의 말 끝에 던진 엄마의 물음이었다. “여기? 응, 생맥주집이야.” 전화기 저편 엄마의 얼굴 모습, 그 괴로워하는 얼굴을 상상하며 마음에 잔인한 쾌감이 일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몇 배나 더 큰 죄책감과 슬픔이 밑에서부터 올라온다. 항상 그런 식이었다. 친구 집에 있으면서도 맥주집인 것처럼 가장하며 엄마를 괴롭힐 생각만 하게 되는 자신의 마음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는 악으로 가득한 인간인가? 할머니의 말대로 나는 우리집을 망하게 만드는 애물단지여서 그런가?’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 가운데 벌써 발은 집 앞까지 와 있다. 어둑한 마루에 누군가가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엄마였다.
“너 어디서 오는 길이냐?”
“………”
“너 나랑 이야기좀 하자.”
‘아니, 이 여자가 무슨 이야기를 하자는 거야? 지금까지는 악만 쓰고 나를 괴롭히더니 왜 이렇게 갑자기 달라져서 이야기를 하자고 그래? 엄마의 부드럽게 물어보는 말을 듣는 순간 왜 그렇게 화가 나는지 자신도 알 수가 없었다. 눈물이 범벅이 되면서 윤이는 악을 써대기 시작했다. 자신이 부모에게 못할 욕을 하며 짐승 같은 괴성을 질러대는 발작을 하고 난 후 정신이 들었을 때에는 식구들이 자신을 이상하게 보는 염려스러운 눈길, 그리고 자신이 부모에게 그런 행동을 했다는 것에 대한 절망적인 죄책감이 그녀를 괴롭혔다.
‘내가 왜 그런 행동을 했을까? 내가 미쳐가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내 안에 악한 신이 있는 것일까? 아! 하나님 나를 살려주세요. 내가 왜 이럽니까?’ 윤이는 절망적으로 공중을 향해 외쳤다.
윤이의 집은 기독교 집안이 아니고 절을 섬기고 있는 집이었다. 그래서 집에서는 윤이가 귀신이 들렸다고 하면서, 중을 데리고 와 목탁을 두드리며 악한 잡신을 몰아내려고 했다. 그녀의 행동은 식구들이 보기에 악한 잡신이 든 것으로 밖에는 달리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윤이는 정신과 치료를 받기도 했으며, 또 어떤 사람은 기가 약해서 그렇다면서 기공에 탁월하다는 사람을 불러 기를 강하게 해야 한다고 기공사를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도리어 상태는 더욱 악화되어 급기야는 다리가 마비되는 증세까지 나타났는데, 그러자 집에서는 마지막으로 교회로 데리고 갔다. 교회에서는 윤이에게 귀신이 역사하는 것이라면서 3일 동안 교회 안에 재우면서 귀신을 몰아내는 기도를 했다. 그러나 이 모든 방법은 오히려 그녀의 상태만 더욱 악화시킬 뿐이었다.
“무언가 다른 도움이 필요한 것 같아요. 우리 언니를 도와주세요.”
기를 수년간 공부하고 있다는 윤이의 동생이 윤이를 데리고 와서 한 말이다.
내가 윤이를 만난 것은 매서운 바람소리가 문을 흔드는 겨울 밤이었다. 겨울 밤, 우리 집에 와서 윤이는 이렇게 말했다.
“제 마음 속에는 울고 있는 내가 있어요. 오른쪽도 아니고, 이쪽 왼쪽 가슴에요. 이곳, 이 속에 내가 울고 있어요. 밑의 하반신은 보이지 않는데 머리는 길게 늘어뜨리고 검은 옷을 입고 얼굴은 핏기도 없이 창백해져서 울고 있는데, 내가 왜 울고 있는지 나도 모르겠어요. 밖의 내 얼굴은 항상 웃고 있지만 내 왼쪽 가슴에 있는 나는 너무 슬퍼서, 너무 슬퍼서… 한없이 울고 있어요. 이렇게 울다가 결국은 죽을 것 같은데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윤이는 과연 귀신들린 것일까?
아니면 식구들의 말대로 기가 약하고 마음이 약해서 일시적으로 정신이 이상해진 것일까?
성령께서 윤이에게 행하신 마음의 치유
윤이는 그 다음 주간에 열린 내적 치유 세미나에 참석했다.
세미나 동안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나누는 시간에 윤이는 다음과 같은 말을 사람들 앞에서 했다.
“나는 첫날 세미나에 참석하고 난 후 내가 알고 있는 가족, 그리고 친구들 모두에게 전화를 했어요. 왜냐하면 죽으려고 생각했기 때문이예요. 사실 저는 제 인생의 마지막 희망을 이 치유 세미나에 걸었는데, 첫날 강의를 듣고 났는데 어쩐지 나와는 상관없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생각했지요. ‘역시 나는 안돼. 나는 이미 하나님에게 버림받은 몸이야.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 귀신이 들어온 거야. 나의 이 고통은 결코 해결될 수 없어. 이제 내게 남은 한가지 길은 죽는 것 뿐이야.”
이런 결론이 들자 나의 곁에 있었던 사람들이 그리워지더군요. 그들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어요. 모두에게, 한 사람 한 사람 전화를 돌렸지요. 그러면서도 지금 생각해 보니 엄마에게는 전화를 하지 않았었어요. 그런데, 두 번째 날 강의를 듣고 있는데 갑자기 한 가지 사건이 또렷이 생각나는 거였어요. 사실 이 사건은 전에도 가끔 기억 속에 스쳐 간 적은 있었지만 별 의미도 두지 않고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았었고, 또 그 기억이 내게 주는 의미를 알지 못했던 그런 것이었어요. 그런데 어제 어떤 어머니가 자신과 딸과의 관계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을 듣는데 한 가지 장면이 떠오르면서 그 장면과 함께 가슴이 찟어지는 듯한 통증이 올라왔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내가 항상 알고 싶었던 것! 내 마음 속에서 그렇게 오랫동안 울고 있던 나의 실체가 무엇인지 이해가 되는 것이었어요. 너무나 이상하지요? 전에는 한 번도 이렇게 생각해 보질 못했었는데 지금은 다 이해가 돼요. 다르게 생각할 수가 없어요. 너무나 분명해서요.
두 번째 날 강의를 들으면서 나에게 생각난 그 사건을 말하기에 앞서 우리 가족 이야기를 해야겠어요.
강의 시간에 내가 본 사건은 제가 세 살 때의 일이라고 알고 있어요. 나는 두 번째 딸로 태어났어요. 우리 할머니는 너무도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내가 딸로 태어나자 별로 반가워하지 않고 우리 엄마를 아들도 못낳는다고 시집살이 많이 시키셨대요. 그런 와중에 태어난 나는 그렇지 않아도 미운 털이 잔뜩 박혀 있는데 너무도 많이 울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 할머니는 나를 더 미워하셨어요. 그러면서 식구들에게 항상 하시는 말씀이, ‘집마다 그 집을 말아먹는 애물단지가 하나씩 있는데 우리집은 바로 이 애인가보다’하고 자주 말하셨대요. 할머니가 노망이 드신 후에까지도 저를 보고는 애물단지라고 하실 정도였어요. 그래도 나는 그저 그런가보다 했지요.
그런데 내 기억속에 떠오른 그날의 사건도 내가 굉장히 많이 울어서 생긴 일이었어요. 그날은 아버지가 재판을 받는 날이어서 식구들이 모두 걱정을 하고 있는데 제가 계속 울었나봅니다. 아무리 달래도 울음을 멈추지 않자 화가 난 할머니가 나를 데리고 나가서 비가 오는 대문 밖 진흙탕 속에 나를 버리셨다고 해요. 그런데 그 장면을 보면서 나를 항상 슬프고 괴롭게 하는 이유를 알게 되었어요. 할머니는 나에게 그렇게 할 수 있다해도 엄마만큼은 나를 지켜주었어야 하지 않았나 하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그날은 엄마마저도 나를 비 오는 진흙 거리에 놔두고 그대로 집으로 들어가 버리셨어요. 아무도 지켜주는 이없이 비오는 진흙탕 속에 버려져 울고 있었던 그 무섭고 슬픈 마음이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나를 슬프고 괴롭게 하는 마음의 원인이 되었고, 엄마마저도 나를 버린 집은 내가 살 곳이 아닌 것처럼 항상 밖에서 나를 방황하게 했음을 알았어요.
어느 때부터인지 저는 제 왼쪽 가슴에 아이가 울고 있는 것을 느끼곤 해서 내가 아무래도 정신이 이상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는데, 이제 알고 보니 내 마음 속의 그치지 않는 이 울음은 엄마를 부르는 울음이었던 거예요. 울면서 나는 엄마를 미워하게 됐다는 것도 알았어요. 하지만 나는, 정말 너무도 엄마의 사랑을 받고 싶었어요. 자라면서 나는 엄마의 착한 딸이 되려고 많은 노력을 했던 것 같아요. 정말 엄마에게 인정을 받고 사랑을 받고 싶었어요. 하지만 엄마는 나에게 너무도 사랑을 주지 않으셨어요.
그런데 어제 어두운 진흙 속에 울고 있는 어린 내 모습을 보면서 가슴이 너무 아파 소리를 지르는데 주님이 엄마를 용서하라고 하셨어요. 엄마 기도를 하는데 가슴의 통증이 사라지고 처음으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이 느껴지는 거예요. 너무나 따뜻했어요. 그러다 보니 제 왼쪽 가슴 속에 울고 있는 그 울음이 없어진 거예요.”
윤이에게 일어난 일은 무엇이며, 어떻게 그렇게 단시간에 변화될 수 있었을까? 그것은 윤이의 잠재의식 속에 있던 바늘 같은 병의 원인이 드러나고 그것이 치료되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마음의 고통으로 생겨난 병은 반드시 아픔의 원인이 제거되어야만 근본적으로 치료된다.
윤이는 몸이 아픈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아픔을 일으키는 원인은 그의 현실의 삶이 아닌 더 깊은 잠재의식 속으로 들어간 것이기에 그 스스로도 자기 아픔의 원인을 결코 알 수 없었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당신이 겸손한 태도와 하나님에 대해 열린 자세로 이 책을 읽어 간다면,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다른 사람에게 허락하신 치유의 축복에 대해서만 읽고 그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당신 안에 치유의 역사와 은혜를 체험케 하실 것이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람이 두려움을 내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요일4:18).
과정 1 내적 치유란 무엇인가?
첫째 문을 열고 방을 들여다보면 이 방안에는 인간의 기억이라는 신비한 작용과 인간 안에 있는 넓은 바다-잠재의식- 현재의 생활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 숨겨진 마음의 씨앗들, 잠재의식 치유의 필요성, 상처받는 마음의 결과, 그리고 삶에 나타난 증상들, 성경에 대한 이해, 그리고 인간의 잠재의식을 누가 어떻게 치료할 수 있는가? 어떻게 나는 치료받을 수 있는가? 그리고 실제로 치유된 친구의 이야기가 들어 있습니다. 이 방안에 있는 모든 것을 다 만져보고 당신의 것으로 취하십시오.
이 과정의 목적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갖고자 하고 자신을 변화시키려는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개선되지 않는 일부분의 성격의 문제점들에 대해서 근본적인 원인이 있을 수 있음을 이해하게 하고, 또한 이 원인들을 성령이 치유하신다는 사실을 강조하고자 함이다. 또한 자신 안에 이런 원인이 되는 씨앗이 있는지에 대해서도 기도하게 하기 위함이다. 더 나아가 「내적 치유」에 대해서 바른 이해와 지식을 가지고 개인적으로 적용케 하기 위함이다.
1. 내적 치유란 무엇인가?
1) 넓은 의미의 내적 치유
넓은 의미의 내적 치유는 성령의 역사 속에 그리스도인의 삶 전반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아감으로 일어나는 거룩한 성화의 과정이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내적 치유 울타리 안에 이미 들어와 있고,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2) 집중적인 의미, 즉 세미나에서 말하는 내적 치유
인간의 정신적 문제, 내적인 문제를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고 성경적인 방법으로 해결해 나가는 것이다. 전인의 치유를 목적으로 하며, 성령의 능력을 통한 사역이다. 총체적인 인간 구원의 목표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는 것까지다. 이것은 이미 타락해 버린 우리 마음에 전반적인 변화가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마음의 변화에는 두가지가 필요하다. 그것은 치료와 성숙이다. 성숙은 치료가 있어야만 가능하다.
인간의 기억 작용의 특이성과 마음에 끼치는 영향을 조금 더 살펴보도록 하자. 인간의 뇌는 마치 컴퓨터와 같이 입력된 모든 사건들을 보관한다. 시간이 지나면 모든 사건에 대한 기억은 우리의 의식 속에서 망각이란 방법을 통하여 사라져 간다.
그러나 이것은 그대로 없어져 버리는 것이 아니다. 마치 컴퓨터가 한 번 입력한 내용들을 스스로는 소멸시키지 못하는 것처럼, 인간의 뇌 속에 들어온 경험 기억들을 결코 스스로 없어지지 않는다. 다만 보관의 모습이 달라져 의식에 잡히지 않을 뿐이다. 직․간접적으로 경험된 사건들은 처음에는 의식 속에 자리를 잡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대부분의 기억들은 의식 깊숙이 자리를 잡고 또 한층 더 내려가 잠재의식의 부분에 자리를 잡게 된다. 문제는 이것이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없어지지 않고 활동성 세균처럼 다른 부위에까지 퍼져나가 현재의 의식 안에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형되어 나타나 악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사실이다. 이러할 때 우리의 삶은 비록 의식 안에서 인식은 못할지라도 과거의 사건과 깊이 연관지어져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현재의 상황을 해결한다 할지라도 더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근본 뿌리와 같은 것을 제거하지 않는 한 기대하는 변화는 지속적으로 나타나지 못한다.
“내적 치유는 우리를 과거 속으로 돌아가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과거로부터 건강하게 독립시켜 온전히 그리스도와 연합되도록 만들기 위한 필요 작업인 것이다” (찰스 쉘)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결코 바른 잠재의식의 치유를 기대할 수 없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의 고통스러운 잠재의식의 상처를 해결하는 소극적인 방법을 선택한다. 그것은 그 사건 자체를 부인하거나 계속 억압하는 것이다.
아처 토레이는 이 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는 상처를 잊고자 마음 속에 상처들을 감추지만 결국은 모든 축적된 상한 기억들이 더 이상 눌려 있지 않고 오히려 지배하게 될 때에, 마음은 태풍의 눈 같아 의식까지도 빨려들어가면서 올바른 생각을 못한다. 그때 영은 하늘과도 연락이 안되어 항상 마음이 아픈 상태가 된다. 그러므로 내적 치유는 우리의 잠재 의식의 치료라고 할 수 있다.”
2. 상처받은 마음은 외부적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반드시 삶 속에
그 상처로 인한 결과가 나타난다. 그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대인 관계의 어려움
대인 관계의 어려움이 가장 보편적으로 호소하는 증상이다. 지배하는 사람의 경우, 모든 상황을 자신이 왕처럼 지배하려 하고 자신이 모든 것을 간섭하려고 한다. 자신이 간섭하고 있을 때에만 안정감을 느낀다. 지나친 의존의 모습은, 자신의 뜻과 생각은 아무것도 없고, 어릴 때는 부모의 의견대로 살다가 후에 친구의 의견대로 움직이고, 결혼 후에도 배우자의 의견대로만 움직이는 피동적인 삶을 나타낸다. 이런 사람이 자신이 의존하는 배우자에게서 실망감을 느낀다면 온 천지가 무너지는 절망감 속에 빠지게 되고 새로운 누군가 의지할 대상을 찾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게 된다. 그러면서도 상대에 대해 신뢰하지 못하고 마음 안에 두려움이 가득하다.
둘째, 자신에 대한 자존감 결여
셋째, 삶에 대한 부정적인 말과 태도
누군가에 대해 원망이 끊이지 않는다. 하나님도 그에게는 서운하고 불공평한 분으로 인식된다. 그 안에 잠재되어 있는 분노는 매우 잔인한 성격으로 발전될 수 있다.
넷째, 우울증과 강박적인 사고방식
이유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상태를 느낀다. 하지만 이유없는 우울증은 없다. 원인이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죄책감이다. 성경은 우리 안에 죄책감이 있을 때 그 상태가 얼마나 괴로운지를 설명해 주고 있다(시32:3-4).
다섯째,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 결여
왜곡된 마음으로 하나님을 보기 때문에, 그의 눈이 바로 되기까지는 하나님의 모습이 결코 바르게 이해되지 못한다. 입으로는 하나님에 대해 많은 말을 할 수 있지만, 깊은 마음 속에 하나님에 대해 가지는 인상은 심히 부정적이다. 이렇듯,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서는 부정적인 느낌을 하나님에 대하여 가지고 있으면서 하나님에 대한 좋은 말을 억지로 밀어넣어 자신을 스스로 세뇌시키려는 노력을 신앙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이 있다. 마음의 감정은 정직하다. 절대로 세뇌시키는 것과는 다르다. 사람의 좋은 감정은 좋은 관계의 흐름 속에서 나온다. 하나님에 대한 좋은 감정은 그분과의 관계가 정상적으로 이어질 때 자연히 뒤따라오는 것이다. 마음 깊은 곳에 하나님에 대해 나쁜 느낌을 가진 자에게 아무리 지식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치려고 해봐도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의 심상의 눈이 먼저 바르게 보여야만 한다.
여섯째, 영적 삶의 굴곡과 침체
3. 마음에 상처를 입힌 고통스러운 기억의 축적은 잘못된 성격을 형성시킨다.
현재 우리의 성격이란 그 동안 우리가 경험하고 체험하여 우리에게 끼친 영향들이 모아진 작품이다. 사람들은 “성격이란 고칠 수 없는 것이다”고 하지만, 기질과 성격을 우리는 구별해야 한다.
기질이란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여하신 것이며, 그것이 각 사람마다 틀리기 때문에 오히려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어 가는 것이다. 그러나 성격이란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작품이다. 잘못된 성격은 자신의 책임이다. 우리는 잘못된 성격을 반드시 바르게 고쳐야 한다. 잘못된 성격은 인생의 위기의 순간에 그를 완전히 파괴시키는 주된 요인이 된다.
아모스의 말씀은 어떤 사람의 인생 행로를 보여준다. 이 사람은 매우 지혜로운 사람이었다. 그는 길에서 무서운 맹수인 곰과 사자를 만났는데 어떻게 잘 피하여 집에 들어갔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자기 집의 벽 속에 숨어 살고 있는 독사에게 물려 치명상을 당하게 된다. 우리는 인생의 길을 가면서 여러 가지 곰과 사자 같은 어려운 난관들을 만난다. 이 난관들을 지혜와 능력을 사용하여 잘 피할 때 그는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으로 인정받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유능한 사람도 피하기 어려운 것이 있다. 그것은 벽 속에 숨어 있는 독사이다. 벽 속에 숨어 있는 독사란 무엇일까? 벽은 인간의 마음에 비유할 수 있다. 단단한 벽돌들로 잘 쌓아져야 튼튼할텐데 부실한 부분이 있다면 그 안에 독사가 숨어들게 되는 것이다. 그 독사는 그 곳에 숨어 살다가 가장 방심하는 순간, 혹은 연약해져 있는 순간에 나와서 물어버리기 때문에 절대로 피할 수 없다. 부실한 벽이란 자신의 성격 중에서 잘못된 부분을 말한다. 이 부분은 상처와 죄로 인해 병이 들어 부실해져 있기에, 그곳을 거처로 삼고 귀신은 역사하는 것이다. 우리의 성격이 예수의 진리로 바르게 세워져 나가면 귀신은 발판을 잃어버리게 된다. 하지만 우리 안에 틈이 있다면 아무리 사단을 쫓는다고 해도 언제든지 그곳은 쉽게 귀신의 이용물이 되어 인생을 파괴시킨다.
4. 잘못된 성격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 아니다.
그것은 상처받은 아픔의 결과이며 죄의 결과이다. 이것은 반드시 치료되어야만 한다. 우리의 성격은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님 안에서 새롭게 되고 변화될 수 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도록 해주시겠다고 하신다. 우리의 성품, 즉 personality가 변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것은 인간 구속의 가장 중요한 목표이다.
5. 하나님만이 인간의 마음을 온전히 치료하실 수 있는 이유
1) 인간에게는 네가지 마음의 영역이 있다.
첫째, 내가 알고 남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둘째, 나만이 알고 남은 모르는 부분이다.
셋째, 나는 모르는데 다른 사람에게 보여지는 부분이 있다.
넷째, 나도 모르고 남도 모르는 부분이 있다.
일반적으로 네 영역 중에서 이 부분이 가장 큰 부위를 차지한다. 일반 심리학자들은 인간의 잠재의식적인 영역이 인간의 마음 안에서 70%를 차지한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그만큼 이 부분은 우리 마음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며 끼치는 영향도 크다. 우리의 신앙이 성숙한다는 것은 이 부분이 줄어드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2) 인간에게는 자신도 모르고 타인도 모르는 부분이 있다.
이 부분을 우리는 잠재의식이라고 표현한다. 이 잠재의식 속에는 성격을 형성하게 만든 뿌리가 들어 있다. 그러므로 잘못된 성격과 마음이 온전히 치료되기 위해서는 내면 속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상처들의 치료가 필수적이다.
3) 상처를 온전히 치료하실 분은 하나님밖에 없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우리의 내면 속에 형성된 부정적인 잠재의식의 형성은 어머니 태중에 있을 때부터 시작된다. 그러므로 그 영역은 자신이 인식할 수 없는 수많은 것을 포함한다.
(2) 인간의 잠재의식 속에는 부모의 여러 영역이 유전되기도 한다. 이것은 계속적으로 올라가면 인간의 처음 조상인 아담과 이브의 원죄로까지 연결된다. 이러한 문제의 구체적인 해결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요1:12).
(3) 인간이 가지고 있는 부정적인 잠재의식 속의 문제를 여러 가지 인간적인 방법으로 추론하고 진단을 내렸을지라도, 가장 중요한 것은 실제적인 치료다. 지나간 내 인생의 과거 문제까지 치료하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밖에 없다.
6.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서 하신 가장 중요한 사역은 병든 인간의 마음을 치료하시는 것이었다. 그분은 우리의 내면적인 상처들이 치료되기를 간절히 원하신다.
1) 마태복음 9:12-13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2) 이사야 53:3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3) 이사야 61:1-3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은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도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분은 우리의 마음이 깨어져 있는 것을 아시며 우리의 마음이 옥에 갇혔다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실제로는 옥에 갇히지 않더라도 마음의 분노의 옥에, 두려움의 옥에, 의심의 옥에 갇혀 있을 수 있다. 이것은 육신이 옥에 갇힌 것보다 더욱 실제적인 감옥살이일 수 있다. 주님은 이런 자를 자유케 하기 위해서 오셨다고 말씀하신다.
7. 당신이 이 세미나 기간 동안 성령께 순종한다면
성령께서는 당신의 내면적인 상처들을 치료해 가실 것이다.
당신은 다음과 같은 자세를 가짐으로써 성령께 순종할 수 있다.
1) 세상에서, 교회에서, 사회에서 얻게 된 명함과 위치와 자랑거리를 내려 놓고, 어린아이처럼 신령한 젖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전체 강의 시간에 임하도록 하라.
2) 당신을 위하여 치료받으려고 하지 말고, 당신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당신을 향한 사랑의 눈물을 갖고 계신 주님을 위해서 당신이 변화되고자 하라.
3) 당신 자신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하는 교만을 버리고, 주님을 기다리고 사모하며 그분을 인격적으로 알고자 하라. 그 분을 알 때 자신을 아는 눈이 열리고 은혜가 주어진다.
과정 2 지식인가, 관계인가?
두 번째 방안에 들어서면 어쩌면 조금 어리둥절해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무엇을 손에 잡아야 할지 파악이 안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방안을 자세히, 그리고 천천히 돌아보면 세 가지 나팔 소리를 들으실 수 있습니다. 하나는 지식으로 아는 것과 관계를 통해 아는 전혀 다른 두 개의 삶의 모습을 알리는 나팔 소리, 그 다음은 머리 속에 담긴 하나님에 관한 선한 지식이 가슴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나팔 소리, 또 다른 하나는 마음 속에 자리잡은 악한 개념적 지식을 몰아내는 방법을 알리는 나팔 소리. 이 방의 천정은 매우 낮기 때문에, 머리를 겸손히 숙이지 않으면 머리를 자꾸 부딪히게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럴 때면 정죄받는 듯한 기분이 들 것입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이 방은 당신을 정죄하는 방이 아니라 당신을 돕기 위한 치유의 방임을 기억하십시오. 주 안에서 자신을 겸손히 낮출 때 주께서 당신의 얼굴을 들어주실 것입니다.
이 과정의 목적
내적 치유 세미나의 두 번째 과정은 두 가지의 근본적인 다른 삶의 타입에 대해 깨닫게 해주는 내용이다. 하나의 삶의 태도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나오는 생명의 힘으로 사는 삶이고, 또 다른 하나의 삶의 태도는 창세기 3장에서부터 시작된 하나님과 독립되어 자신의 힘으로 사는 삶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장 중요시하며 그 관계 안에서 생명 나무의 열매를 먹으며 사는 삶의 방식을 원하셨지만, 인간은 이것을 거절하고 그 대신 자신을 지혜롭게 할 것 같은 지식의 나무를 선택하였다. 그 결과 인간은 지금까지도 자신이 원하는 행복을 위해 끊임없이 지식을 쌓아 감으로써 그것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착각에 빠져있고, 그것은 인간을 지식의 노예로 만들었으며, 이런 삶의 태도는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는 교만한 인간의 모습만을 만들 뿐이다. 그리고 불행한 것은, 그런 삶의 방식을 그리스도인이 된 뒤에도 여전히 고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과정은 우리의 그런 태도에 대해 깨닫게 하며 새로운 태도를 구하게 하고자 함이다.
1. 관계로부터 오는 것이 아닌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우리를 이끌어갈 때 나타나는 삶의 특징들
1) 지식이 많아져도 지식이 그 사람 안에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지 못한다. 하나님의 일은 우리의 속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며 그리스도의 형상을 드러내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지식의 증가는 인간의 성품을 변화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지식의 증가는 그를 교만하게 하며 다른 사람에게 배울 수 없는, 항상 가르치는 사람으로 만들어 간다.
2) 말은 많이 할 수 있으나 그 삶 속에 능력은 나타나지 않는다. 능력이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인격과 삶을 통해 나타나는 것이다. 내 중심 속 자아의 변화가 필요하다. 정보적인 지식은 인간의 행동 밑바닥에 숨어 있는 동기를 변화시키지 못한다.
3) 지식으로 자신을 이끌어갈 때 그들의 안정감의 근거는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이므로, 누군가 자기와 다른 의견을 제시하면 그를 자신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 크게 반발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나눈다.
4) 지식의 힘으로는 내면의 벽을 뚫고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기에 하나님에 대한 정보를 아무리 많이 가지고 있어도 그것은 속사람에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에 대해 가르치고 시도 지으며 그를 위해 자신을 불사르게 내어놓는 사역자가 될 수는 있으나, 내면의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시킬 수 없다. 그러기에 그의 감정은 그의 입의 고백을 따르지 못한다.
5) 그들은 결국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이 된다.
2.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루어진 삶의 특징
1) 하나님과 가지는 관계는 어느 것으로도 끊어질 수 없다.
2)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한 사람이 전세계를 이길 수도 있는 힘을 갖는다.
3. 어떻게 우리가 지식이 아닌 관계 속의 삶을 계속 살아갈 수 있는가?
첫째는, 내가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위로부터 오는 이런 지식들을 가질 수 없음을 아는 겸손함과 정직함이 필요하다.
둘째는, 우리 안에 오랫동안 존재해 온 악한 지식들을 몰아내야 한다.
4. 내적 치유와 이런 사실들의 관련성
1) 내적 치유 세미나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루어지도록 하는 데 모든 목표가 있다.
2) 이런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속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정확히 전해져야 한다.
3) 우리의 속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면 그 속사람을 묶고 있는 결박과 진들이 부서져야 한다.
4) 내적 치유 세미나는 그런 결박과 진을 부수는 과정이다. 그리고 속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바로 볼 수 있도록 돕는 세미나이다. 이런 일들이 일어날 때 하나님과의 관계가 성장하며 풍성한 삶을 살게 된다.
과정 3 나는 누구인가?
이 방은 당신에게 설명하기 위한 방이 아니고 진리를 선포하고 진리로 당신을 수술하기 위한 방입니다. 성령께서 당신의 가슴을 향하여 진리의 칼을 들이대실 것입니다. 당신은 정말 당신이 누구인지 알고 있습니까? 당신을 바로 안다면 결코 당신은 자신을 거부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에게 잘라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이 방 안에 걸려 있는 거울에 비춰 보십시오. 그리고 자르십시오. 그리하여 당신이 입어야 할 당신 자신의 옷을 입기 시작하십시오.
이 과정의 목적
자신이 누구인지를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게 하고 자신의 관점으로 자신을 보았던 잘못된 태도를 깨닫고 진정한 자신을 취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인생은 어디서 왔으며 무엇을 하다가 어디로 가는 것인가’ 내 삶의 존재 가치와 의미와 목적을 알지 못하고 헛된 사상과 철학을 따라 이리 저리 방황하는 사람들 속에 진정한 진리를 세우기 위함이다. ‘나’를 바로 알지 못함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상처를 입어 왔는지 모른다. 나의 참 아버지를 만나고 나의 자존감을 회복하기 위하여 이 과정이 진행된다.
인간의 마음의 고통은 혼란으로 이어지며, 이 모든 출발은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자신이 누구인지 안다면 하나님을 바로 알게되고, 하나님을 바로 알게 되면 우리 자신을 바로 알게 된다. 그러므로 평안으로 이어지는 하나님께서 주신 질서는 자신을 바로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내가 누구인지 안다는 것은 무엇을 안다는 것일까? 내가 누구인지 안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답을 분명히 가지고 있는 것이다. 즉 나는 어디서 왔으며 나는 무엇을 하기 위해 지금 있는지를 아는 것이 나를 아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세월이나 외부 조건에 따라서 변하는 것이 아닌 영원히 불변하는 나 자신의 진정한 신분에 대해서 바로 알아야만 한다. 자신이 누구인지 안다면 가장 기본적인, 자신의 존재에 관한 질문들의 답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앞에서 말했다. 그러나 인류 역사상 어느 누구도 이 질문에 대해 명확한 답을 제시하지 못했다. 하지만 오직 한 분만은 자신이 누구인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아셨다.
주님의 자신에 대한 앎과 우리 자신의 답변을 생각해 보자.
1. 당신은 어디에서 왔는가?
1) 예수님의 답변
“예수께서 가라사대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 나서 왔음이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라.”(요한복음8:42)
2) 우리 자신의 답변은 무엇인가?
당신을 무시하는 자들이 당신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면 당신은 뭐라고 대답할 수 있는가 생각해 보라
2. 당신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1) 예수님의 답변 “아버지께로 간다.” (요한복음 16:28)
2) 당신의 답변은?
우리의 인생은 쉬임없이 지금도 가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우리가 가는 종착역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자는 운전을 열심히 하되 목적지 없이 달리는 것과 같다. 이런 운전자가 있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자인가? 열심히 달리고 또 기름을 새로 채워 달리지만 목적지를 모르는 채로 달리는 운전자. 하나님은 우리가 이런 운전자가 되기를 결코 바라시지 않는다.
3. 당신은 누구인가?
1) 예수님의 답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다.” (요6:35) “나는 길이요 진리다.” (요14:6)
2) 당신의 답변은?
어떤 사람은 자신을 학생이라고 하고, 어떤 자는 자신을 아주 우수한 사람이라고 대답하며, 또 어떤 자는 자신을 실패자라고 부른다. 어떤 답이든 그 답은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 낸 답이다. 그러기에 그것은 일시적이요, 주관적이며, 상황에 따라 순간적으로 변할 수 있는 답이다. 우리는 우리를 지으신 분으로부터 내가 어떤 가치를 가진 자인지를 들어야만 한다.
4. 당신은 무엇 때문에 사는가?
1) 예수님의 답변 (요한복음 6:39-40)
주님은 자신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고 자신을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기 위해 사는 것이라고, 자신이 사는 이유에 대해 뚜렷히 밝히셨다. 주님은 이런 분명한 이유가 있으셨고, 그리고 그렇게 사셨으며, 항상 자신을 보내신 분이 같이 게심을 느끼셨기에, 어떤 멸시와 오해 그리고 핍박 속에서도 자신의 길을 꾸준히 걸어가실 수 있었다.
2) 당신의 답변은?
어떤 이는 누군가를 이기기 위해 살고, 어떤 이는 무시받지 않고 살아갈 힘을 기르기 위해 살며, 어떤 이는 죽을 수 없으니까 그저 살아가기도 하고, 어떤 이는 쾌락을 즐기기 위해 살기도 한다.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는 것으로 그치지 말고, 정말 무엇 때문에 살고 있는지 내 마음 속의 동기를 깊이 들여다보아야 한다. 주님을 위해 산다고 말하지만 실제 삶은 다른 태도로 사는 경우도 많다. 내가 무엇을 위해 사는지 알아볼 수 있는 쉬운 분별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내가 무엇에 가장 예민하게 반응하는지를 보는 것이다. 내가 가장 예민하게 반응하고 가장 많이 생각하는 것, 그것이 바로 내가 살아가는 이유인 것이다.
5. 인간은 어떻게 해서 자신에 대한 인식을 형성시켜 왔는가?
1) 나는 누구인가를 어떻게 알았나?
당신이 자신에게 대하여 내리고 있는 신분의 정의에 대하여 어떻게, 그리고 언제부터 그런 결론을 내리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라.
2) 인간은 자신 스스로 답을 할 수 없으므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게 된다. 우리 자신에 대한 인식의 대부분의 것들을 갖는 데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사람들은 누구일까? 그들은 우리의 인생에 가장 깊이 관여한 사람들이다. 즉 부모․형제, 그리고 선생님과 친구들, 친척들이다.
3) 우리는 이와 같이 주위 사람들과 유입된 정보에 의거해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대답을 서서히 형성시켜 나간다. 그리고 그 답은 또한 거의 일생 동안 사실이든지 거짓이든지 변하지 않고 우리의 나머지 일생을 결정한다.
4) 심각한 문제는 그 대답의 대부분이 거짓된 것이라는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 스스로는 결코 그것이 거짓된 나의 신분증이라고 알 수 없다.
우리가 가진 대답이 거짓된 것이라고 말하기 어렵게 만드는 세 가지의 이유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
첫째, 그 신분증은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오랜 세월에 걸쳐 실제 삶 속에서 서서히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기에 아니라고 부인할 힘이 없는 것이다.
셋째, 우리 자신은 자신의 진정한 신분을 스스로 알 수 있는 능력이 결여된 채로 이 세상에 태어난다.
6. 대표적인 거짓된 신분증 세 가지와, 이런 인식이
만들어지는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자.
1) 나는 우연히 만들어진 별로 중요하지 않은 존재라고 하는 인식의 신분증
(1) 이런 인식을 갖게 되는 이유는?
많은 어머니들이 어머니로서 성숙되지 못한 상태에서 귀찮은 감정을 가지고 아이를 만나게 된다. 그러기에 그 어머니는 자신의 행동 하나하나가 아이에게 상처받고 그 결과로 얼마나 깊은 영향을 주는지 알지 못한다. 이런 과정 속에서 아이들은 스스로의 존재에 대해 회의를 느끼며 자신이란 존재의 가치를 전혀 알지 못한다. 다만 자신이 남녀의 성관계 속에서 우연히 만들어진 존재 그것일 뿐이라는 대답 외에는…
자신을 우연히 만들어진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는 한 그는 자신의 인생에 대해 깊은 책임감을 갖지 못한다. 다만 다른 사람이 사는 대로 살아갈 뿐이다. 목표 없이 달리기를 하는 사람처럼 모든 것은 우연이요 운명이라 생각한다.
(2) 성경은 이에 대해 무엇이라 말하는가?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세기 1:27)
(3) 우주에 존재하는 어느 한 사람도 하나님께는 우연이 아니다. 설사 부모가 타락한 생활 속에서 당신을 잉태했을지라도, 혹은 당신의 존재와 태어남이 어느 누구에게도, 심지어 당신의 부모에게까지도 기쁨이 되지 못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는 특별한 존재다. 당신은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태어났다.
성경은 주님이 모태에서부터 우리의 장부를 지으셨다고 말한다. 그분은 우리를 지으실 때 아무 이유 없이 즉흥적으로 만드신 것이 아니라 분명한 이유와 계획을 가지고 만드셨다. 나의 존재는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런 사실들은 그분을 알기 전에는 결코 깨닫지 못한다.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아버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시27:10) 이 세상의 부모들이 자식을 버릴 수 있는 것은, 비록 그들이 몸을 빌려주었을지라도 그 생명의 진정한 부모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어떤자는 자식을 종이 봉지에 넣어 쓰레기통에 던져 넣는다. 하지만 진정한 부모인 하나님은 당신을 버리신 적이 없다. 비록 그분과 만나는 것이 쉽지 않을지라도 포기하지 말고 그분을 찾아보라. 언젠가 당신이 그분을 더욱 깊이 알았을 때 하나님은 당신이 그분을 찾으려고 노력한 것보다 수백배의 노력을 기울여 왔음을 알게 될 것이다.
이사야를 통해 그분은 이렇게 말하신다.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나를 찾지 아니하는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으며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에게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하였노라.”(사65:1)
지금도 그분은 당신을 만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계시다.
2) ‘나는 잘못 만들어진 실패작이고 다른 사람보다 잘하는 것이 없다’라는 인식의 신분증
(1) 이런 생각이 드는 이유는?
세상의 가치관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만드실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기신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세상이 당신을 재는 기준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나의 신분은 나 자신이 가진 현재의 사회적 위치, 겉모양, 능력의 정도 등이 아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러한 관점으로 모든 사람을 판단하고 결정하기에 우리의 사고도 그러한 영향을 받고 있다. 세상의 기준은 획일적이다. 그리하여 모든 것에 획일적인 기준을 만들어 놓았다. 사람들은 이 기준에 도달하기 위해 달려가고 경쟁한다. 만일 그 기준에 도달하지 못할 때에는 낙오자가 되고 스스로 실패작이라는 평가를 소리없이, 그러나 확고하게 내려 자신의 마음 속에 붙이고 다닌다. 열등의식, 실패감은 어느 특정한 부류의 전유물이 아니며, 또한 이것은 객관적 사실이라기보다 오히려 내부적인 문제이며, 영적 속임수에 걸린 결과임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이것을 분명히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죽을 때까지 자신이 정해 놓은 기준을 향해 달려가고, 그런 기준에 도달하지 못하면 무엇을 하든 나는 실패작이라는 생각 속에 있게 될 것이다. 이런 생각은 결국 하나님에 대한 원망으로 이어진다.
(2) 성경은 이에 대해 무엇이라 말하는가?
시편기자는 시편 139:14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하심이라 주의 행사가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이 시편 기자는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잘났다는 승리감에 이런 고백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하나님 안에서 자신의 진정한 기준을 재는 자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 자로 재었을 때 자신은 실패작도 열등한 자도 아닌 너무도 놀라운 하나님의 작품이었던 것이다.
(3) 하나님이 당신을 만드실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기신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결코 당신의 외모가 아닌 당신의 중심, 당신의 내면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더 본질적이고 높은 차원의 것이요 영원히 지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4) 하나님이 당신을 만드실 때 실수하거나 다른 사람에 비해 공평치 않게 하셨을까?
내 안에 하나님에 대한 그런 원망이 있다면 그런 마음의 바탕 위에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자라날 수 없다.
(5) 당신의 외모나 신체적 약점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해 본 적이 있는가?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
우리가 마음의 중심보다도 외적인 것을 가지고 인간에 대한 평가를 내리고 거기에 매달려 사는 것은 분명 사단이 만든 세상의 가치관이요 세상의 생각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세상의 이러한 사고 방식을 따르지 말 것을 분명히 명하고 계시다.
3) 나는 모든 자보다 탁월하고 우수한 사람이라는 인식의 신분증
이런 사고 방식을 갖게 되는 이유는 비교 의식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의 나라에서는 어떤 몇몇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탁월한 경우가 없다. 모두 각기 다른 독특성이 있을 뿐이다.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각기 그 사람만이 가지는 향기와 모습을 넣어서 창조하셨다. 사단이 임금되어 있는 이 세상은 비교와 경쟁의 나라이다. 그러나 주님의 나라는 섬기는 나라이다. 주님은 너희가 큰 자가 되고 싶으면 섬기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신다.
4) 우리의 진정한 가치는 어디에 있을까?
진정한 것이란 변하지 않는 것이다. 생명과 진리는 순간적이요, 변하는 것이아니다. 나의 변하지 않는 가치, 나의 변하지 않는 신분은 두 가지다.
첫째는, 나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하나님과 교제를 나눌 수 있는 고귀한 자이다(요3:16)
둘째는, 자신의 아들을 희생시켜 바꾸실 만큼 가치가 있는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자이다.
과정 4 성경적 인간 이해
성경에 근거한 바른 인간관을 점검하십시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가 당신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지 찾아보십시오. 그리하여 아무 힘이 없는 허망한 철학이 아닌 십자가의 확실한 약속이 당신을 치유하는 근거가 되게 하십시오. 이방에서는 당신이 가면을 버리도록 도울 것입니다. 그리고 숨겨진 삶의 구덩이를 어떻게 찾아내고 또한 어떻게 치유받을 수 있는지 가르쳐 주실 것입니다.
이 과정의 목적
마음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바른 진단이 있어야만 하고, 마음에 대한 바른 진단을 내리기 위해서는 먼저 인간에 대한 바른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인간을 가장 바르게 이해시키는 지침서는 무엇인가? 그것은 성경이다. 그러므로 성경적으로 인간을 이해하지 않으면 바른 진단과 바른 치료가 불가능하다. 이 강의는 성경적으로 인간을 바르게 이해하여 치료를 위한 바른 진단을 내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나라는 존재는 과연 무엇인가? 나의 이런 생각을 누가 알고 있는가? 나의 끝은 어디인가?
자신에 대해 알고자 하나 대답은 어디에도 없다. 간절한 물음은 있으나 대답은 전혀 없는 이 무서운 허무 앞에 인간은 망연 자실하게 서 있을 뿐이다. 아무도 없는 빈 방의 거울 앞에서 타인처럼 느껴지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는 인간들! 왜 있는지 모르는 채 존재하는 자신을 위해서 혼자서 보고 있을 뿐인 인간들! 이것이 바로 자신을 지은 창조주를 버린 인간이 당하는 가장 무서운 형벌인 것이다. 하나님을 버린 쪽은 인간이지만, 오히려 버림받은 느낌과 두려움 소에서 찢겨지는 것은 인간이다. 이 버림받은 비참함을 잊기 위해 인간은 필사적으로 누군가에게 받아들여지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어떤 인간의 사랑도 인간 안에 있는 이런 버림받은 느낌을 지워 주지 못한다. 분리되어 영원히 혼자 떠도는 인간, 이것이 인간에게 주어진 천형병인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는 말했다. 인간이 나갈 길은 두 가지라고, 고독 속에서 죽든지 미치든지. 이런 인간의 곁에서 사단은 끊임없이 인간에게 거짓된 메시지를 주입시켜 인간의 마음과 몸을 파괴시키는 데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러면 이런 인간에게 살 길은 없는 것인가?
하나님은 즉흥적으로 일을 처리하시는 분이 아니라, 항상 질서와 계획 속에서 일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시고 그 인간에게 ‘선택’이라는 가장 위험하고도 귀한 능력을 부여하시고자 했을 때 인간의 이러한 반역을 예상하지 못하신 것일까? 아니다. 충분히 예상하셨고, 오히려 그러한 일이 일어날 경우에는 어떻게 할 것인지까지 이미 결정하신 상태였다. 그런데 그 결정은 그분에게 너무도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그것은, 인간이 마땅히 받아야 하는 형벌을 그분 자신이 감당하기로 한 것이다. 성경은 그분이 인간을 만들기 전, 창세 전에 이미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셨다고 기록한다. 인간이 죽음에서 도망칠 수 있는 유일한 길을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다리삼아 만드시고,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다. 사랑의 깊은 계획 속에 진행된 하나님의 희생! 이 안에 인간의 절망에 대한 답이 있다. 하나님의 희생을 보이는 주님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주어진 것처럼 다시 한 번 선택의 기회를 제공한다. 이 기회는 마지막 기회이다.
1. 총체적 인간에 대해 구속의 역사는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1) 영: 거듭남, 성령의 내주와 충만
2) 혼: 마음의 치유, 새로운 건축
인간의 혼, 즉 마음은 부패하고 깨어져 있기 때문에 치료와 성장이 필요하다. 이 치료와 성장은 영의 변화처럼 즉각적이지 않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인간 안에 이 일을 지속적으로 행하심으로써 부패하고 타락한 인간의 마음 안에 아름다운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의 열매가 맺도록 하신다. 아무리 깨어진 인격이라 할지라도 성령은 변화시킨다. 마음의 변화는 인간 안에 영으로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밖으로 나타나게 한다. 세상 사람들은 마음이 예수 그리스도로 변화된 자들을 통해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알게 될 것이다.
3) 육: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신령한 몸
하나님이 말하는 인간의 구원은 전인적인 것이다. 영, 혼, 육의 모든 부분에 대한 치유와 회복을 그분은 계획하셨다. 여기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곳은 인간의 마음이다. 이곳은 구원받기 이전에 나의 자아가 지배해 온 곳이므로, 마음의 새로운 회복을 위해서는 자아가 주님께 순종해야 한다. 성품은 옛 성품을 그대로 지닌 채 말과 은사적인 능력만을 나타내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때 어린 그리스도인들에게 많은 상처를 주게 되며, 결국 그에게 성령의 능력 또한 사라지고,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모든 행복과 풍성한 삶은 다만 약속으로 존재할 뿐 자기의 것이 되어 누리지 못한다. 마음이 깨어지지 않은 사람이 이 세상에 있을까? 모두가 마음이 깨어져 있고 심히 부패하게 되었다고 성경은 말하지만, 모든 사람이 자신의 마음이 치유되어야 하고 고쳐져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필요성을 느끼지 않기 때문에 기도하지 않고 성령의 역사를 제한하는 것이다. 마음의 새로운 건축을 위해 잘못된 것을 바로 고치시는 내적 치유는 십자가 은혜의 결과이다.
2. 마음의 치유를 간과할 때 나타나는 신앙 생활의 굴곡된 모습들
1) 얼굴은 웃고 마음은 우는 가면을 쓰는 신앙 생활
우리 모두는 어디에서나, 누구에게나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보이고 그 모습 그대로 용납받고 싶어한다. 바로 그곳이 교회가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일이 교회에서가 아니라면 어디에서 일어날 수 있을까! 하나님은 교회가 치유의 공동체라고 하신다. 서로 병 낫기를 위해 기도할 수 있는, 그러나 교회에 이런 문제들을 내놓을 수 없을 때 교회 안에서 가면을 쓸 수밖에 없다.
병이 있어도 없는 척 한다. 마음이 괴로워도 즐거운 척 한다. 교회라는 공동체가 가진 치유의 힘은 소멸되어 간다. 교회는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서 어쩔 수 없이 주일날 출석해야 하는 의무 조항 속에 포함된다. 무엇이든지 말하라고 한다고 해서 말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니다. 이해할 수 있는 포용의 분위기가 되어질 때에만 사람들은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다.
어떤 교인이 마음의 고통을 해결할 수 없어서 결국은 정신과를 찾게 되었다. 그는 교회에서 여전도회 회장을 맡고, 그의 시어머니도 남편도 교회에서 중책을 맡아서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다. 그의 문제는 그의 시어머니와 자기 동서와의 관계에 관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 문제를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정신과에서는 그녀에게 취미 생활을 하면서 스트레스를 풀어야 한다고 하면서 운전을 권했다. 그녀는 운전을 하게 되었는데 사람이 죽은 큰 교통 사고가 났다. 그녀는 자신이 시어머니를 미워해서 결국은 이렇게 되었다는 죄책감 속에 이제는 예전의 활기있던 신앙 생활마저 다 포기하고, 괴로움 속에서 몸은 신경성 질병으로 아프지 않은 곳이 없게 되었다.
그 교인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힘들었을 때 한 사람에게라도 속 마음을 전부 털어놓을 수 있었다면 이렇게까지는 되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나는 교회의 누구에게도 이런 말을 할 수 없었어요.”
“교회의 목사님이나 다른 분에게라도 상담을 하지 못하셨습니까?”
“상담을 어떻게 합니까? 집안 일이라 어렵기도 하지만, 사실은 제가 그런 상담을 하면 무슨 대답이 나올지 뻔한데 상담을 해서 무엇합니까?”
인간 안에 있는 마음의 문제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서로를 판단하는 자세만이 더욱 생길 뿐이다. “기도를 안해서 그렇다.” “사랑이 없어서 그렇다.” “능력이 없어서 그렇다.”…… 이런 판단의 분위기 속에서는 아무도 자신을 드러내지 못함이 당연할 것이다. 결국 비그리스도인보다도 더 문제가 많아 보이는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아는 것은 더 많아지고 요구도 늘어나는데 실행할 수 있는 힘은 별로 없는 것이다. 이 안에서 가중되는 죄책감의 무게는 갈수록 무거워지기만 한다. 계속되는 죄책감은 우리의 신경을 힘들게 하고 많은 에너지를 요구한다.
죄책감이 깔려 있는 상태에서는 무엇이든지 자신있는 결정을 하기 어렵다. 인생을 주도하는 자세가 되지 못하고, 나쁜 일이 생기면 그것을 당연한 하나님의 체벌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즉, 하나님의 눈치를 보는 운명론자와 같은 태도가 나타난다. 또한 신경증 증세가 나타나며, 신경의 피곤함과 예민함은 육체의 질병을 가져온다. 해야 하는데 할 수 있는 능력은 없는 자신의 모습 때문에 마음이 쉬지를 못한다. 그래서 아예 생각지 않으려고 한다. 신앙에 대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그리고 쉽고 재미있는 것을 찾는다. 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자신이 잘못되어 가고 있음을 항상 느낀다.
2) 일반 심리학에 의존하는 교인들
“교회는 사람들의 영적인 부분을 도와주는 곳이다. 천국에 대해 말하고 예수님에 대해 말하는 곳이다. 이렇게 정신이 이상하고 약한 자들은 정신과에서 맡아야지 교회의 일이 아니다.” 이런 주장을 하는 영적 지도자들이 많고, 그들은 오히려 이런 내적 치유라는 부분에 대해 거부감까지 일으킨다. 이런 것이 참으로 하나님 앞에서 옳은 태도일까? 물론 정신과를 찾는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다른 문제다. 우리가 일반 병원을 찾는 것처럼 정신과 병원도 우리에게 필요하다. 문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기독교인의 태도이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다고 외치면서 인간의 마음에 대해서만 유독 ‘그것은 정신과 영역’이라고 하는 태도는 참으로 모순이 되는 것이다. 마음을 고치는 성령의 이러한 사역이 교회 안에서 능력있게 일어나지 못할 때 교회는 가면을 쓰는 사람들이 모인, 형식과 의식만 남은 껍데기가 되어버리고, 결국 우리의 교회는 날 때와 죽을 때만 찾는 서구의 교회가 되어버릴 가능성이 높다. 극단적인 눈으로 인간을 판단할 때 교회는 흔히 귀신의 역사와 성령의 역사로 판단하곤 한다. 이런 태도는 영적인 것이 아니고, 오히려 인간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없는 무지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러기에 수많은 자들에게 잘못된 판단의 오류를 범하고 깊은 상처를 줄 수도 있다. 이런 극단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은, 누군가의 행동이 이상한 사람이 있으면 그것을 간단히 귀신의 역사로 보고 계속 귀신을 쫓아내는 행동만을 하게 된다. 내담자가 무슨 말을 해도 그것은 이미 귀신들린 자의 말이 되어 신빙성이 없다고 스스로 판단했기에 귀담아 들으려고 하지도 않고 야단치고 호령하고 판단한다. 문제는, 이런 과정 속에서 내담자가 스스로 귀신이 자기 안에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고 이것은 더 큰 이차적 문제를 그의 마음 안에 던져 놓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때부터 그는 자기 안의 귀신과 싸우는 투쟁의 삶이 된다.
기독교가 교세를 크게 떨쳤던 중세 때에 많은 자들이 마녀라는 이름으로 화형을 당했다. 수많은 정신질환자들이 비인간적인 취급을 받고 버려졌다. 그들에게 마귀들린 자라는 판단을 내린 것은 바로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중세의 암흑 시대는 성경이 일반인들에게 읽혀지지 못했던 시대였다. 결과는 신앙의 무지를 발생시켰다. 성경적인 신앙의 성숙 대신 교회의 권위가 성경을 앞지르고, 하나님의 일을 사람의 일로 바꾸어 신앙이란 이름으로 수많은 전쟁이 치러졌다. 결국 성경의 가르침으로 돌아가 볼 때 중세의 마녀 화형은 가장 미성숙한 신앙의 바탕 안에서 미신과 속임수가 신앙이란 탈을 쓰고 행한 어리석음이었다. 분명히 이 세상에는 마귀가 있고 귀신들린 자들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옷을 이상하게 입은 사람들이 아니라, 누구보다 옷도 멋있게 입고 많은 지혜를 갖춘 점잖은 모습의 사람 속에 더 많을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주님은 그 시대의 뭇 백성에게 존경받는 지도자들에 대하여 너희의 아비는 마귀라고 하지 않으셨는가? 가룟유다가 얼마나 지혜로운 자였는가!
신앙이 어릴수록 흑백 논리로 모든 것을 평가하려는 경향이 짙다. 조금만 미심쩍은 일이 있으면 귀신의 역사라하여 귀신 쫓는 데 힘을 기울인다. 귀신이 들렸다고 판단하는 것, 이것은 가장 조심스럽게 판단되어야 하고, 그렇게 판단되기까지 우리는 그 사람의 말을 주의 깊게 마음으로 들어 보아야 한다.
교회는 심리학자들에게서 배워야 할 중요한 점이 있다. 그들은 마음의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의 말을 들으면서 적어도 어떤 교회들처럼 자신이 가진 짧은 신앙의 상식으로 쉽게 판단해 버리지 않는다. 오히려 내담자의 말을 들어보며, 왜 저런 말을 하게 되었는지를 생각해 보고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그 쌓아진 연구의 결과를 토대로 학설을 정립시키고 인간의 마음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인간의 마음에 대해 놓쳐 버린 교회는 그 심리학자들이 만들어 놓은 인간에 대한 보고서를 인간의 마음에 대해 알고자 할 때 교과서처럼 참고하고 있는 형편이다. 그리하여 정신적 문제는 정신과 의사나 심리학자가 더 잘 안다고 하는 어리석음에 빠져 버렸다. 이제 교회는 인간의 마음에 대해 심리학자보다 더 깊이 이해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성급한 판단을 피해야 한다. 만일 정신병, 즉 인간의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병에 대해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간을 깊이 이해해 보려는 노력 대신에 교회는 단지 영적인 문제만을 다루는 곳처럼 된다면, 결국 영적 해결도 온전히 도와줄 수 없게 될 것이다.인간의 영과 마음이, 그리고 육체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한 덩어리인 것처럼, 인간의 마음에 대한 바른 치유가 없이 영적인 부분만 건강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은 결코 말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3)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않으나 하나님을 모르는 종교인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그러나 사실은 하나님을 몰랐던 종교인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셨다. 그들이 예수님을 그토록 멸시하고 십자가에 내어주기까지 한 것은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몰랐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의원으로 오셨다. 그러나 사람들은 무지하게도 자신이 건강하다고 믿기에 의원에게 가지 않는다. 그래서 자신은 하나님을 모르면서도 다만 그 분에 대한 정보만을 가지고 종교인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3. 우리의 마음은 치유가 필요하다.
1) 성령은 잘못된 것을 허무는 일을 하신다
(1) 아무리 오래된 과거 속의 숨겨진 일일지라도 직시하여 치료하기 원하신다.
(2) 잘못된 것을 숨기기 위하여 스스로 만든 거짓된 피난처를 파괴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이 진노하신 이스라엘의 거짓된 피난처는 무엇이었는가? 그들의 열심있는 종교 행위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열심히 하나님이 말씀하신 절기를 지키고 십일조를 하고 금식을 했기에, 자신들은 하나님이 가장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에게 에스겔을 통해서 하나님의 성전 가장 은밀한 방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우상 숭배의 현장을 보이셨다.
“내게 이르시되 들어가서 그들이 거기서 행하는 가증하고 악한 일을 보라 하시기로 내가 들어가 보니 각양 곤충과 가증한 짐승과 이스라엘 족속의 모든 우상을 그 사면 벽에 그렸고…”(겔8:10)
이 말씀에 보이는 것처럼, 하나님의 성전 그곳은 겉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성전이었으나, 아무도 안 보는 깊은 밀실에서는 온갖 우상의 그림이 그려지고 영적 지도자들은 그것을 경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마음에 품는다. 그것이 그의 행동의 동기가 된다. 사람들은 오해하기를, 우상 숭배인가 아닌가 하는 판가름이 사마리아에서 예배하느냐 아니면 예루살렘에서 예배하느냐에 따른다고 생각했다.
신령과 진정의 예배란 이 암실, 즉 자기만 아는 마음의 깊은 곳에서부터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마음의 기초를 드러내시겠다고 계속 경고하셨으나, 사람들은 계속 자신들의 우상 숭배의 마음을 회칠하며 평안하다고 말했다. 하나님은 그들을 완전히 멸망시키셨다. 그리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그들이 멸망당한 것은 그들의 마음의 동기 그 속에 숨은 죄악 때문이라고. 우리에게 한 가지 희망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파괴하시기 전에 우리 자신이 우리의 잘못된 삶의 방식을 파괴시키는 것이다. 즉, 내가 예수님의 십자가에 나아가 거짓된 것을 회개하고, 세상 사람들의 기준이 아닌 하나님의 다림줄의 기준으로 살기로 매일 결정하는 것이다.
내적 치유는 삶의 방식의 변화이다. 내가 상처를 받은 이유는 잘못된 삶의 방식을 갖고 권위자가 되어 행하기 때문이다. 방식 이 자체가 변하지 않는 치유는 계속 되지 못한다.
2) 성령은 바르고 새롭게 건축해 가신다.
(1) 새로운 삶의 머릿돌을 놓아 주신다.
주님은 우리 삶의 머릿돌이 되기 위해 우리에게 오셨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주님을 마음에 모시고 있을 뿐 여전히 삶의 기초와 태도는 예전에 행하던 대로 산다. 이것은 주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삶이다. 성령께서는 기초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두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가르쳐 주시고 건축하게 하신다. 우리가 살아온 거짓된 삶의 방식과 기준이 무너질 때 이제 나를 감쌀 모든 것이 없어졌기에 우리의 인간적인 판단은 절망하고 모든 것이 끝장이라고 낙담하지만, 오히려 그때 하나님은 진정 하나님의 법에 맞추어 바르고 새롭게 삶을 건축하도록 도우신다. 성령께서 우리의 잘못된 것들을 파괴하시는 것은 멸망시키려 함이 아니요 새롭게 건축하시기 위한 것이다.
(2) 하나님 아버지에 대해서, 자신에 대해서 알게 하는 지혜를 주신다.
“내가 여호와인 줄 아는 마음을 그들에게 주어서 그들로 진심으로 내게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렘24:7)
“슬기로운 자의 지혜는 자기의 길을 아는 것이라도 미련한 자의 어리석음은 속이는 것이니라”(잠14:8)
(3) 하나님 아버지와의 친밀함의 성장이 이루어진다. 이것이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궁극적인 것이다.
과정 5 쓴뿌리와 용서
어느 누구도 이 문을 통과하지 않고는 치유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이 문의 입구는 심히 좁아서 어떤 자에게는 불가능해 보이겠지만, 성령과 함께 한 발자국씩 이 곳의 징검다리를 따라 걸어보십시오. 어느덧 당신도 이 문을 통과하는 힘을 갖게 될 것입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용서인가? 용서에 있어서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하나님이 도와주셔야 할 것은 무엇인가? 왜 용서는 이토록 어려운가? 그리고 실제로 용서를 통해 치유를 경험한 자들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주님은 당신 혼자 이 문으로 들어가게 하시지 않습니다. 위로의 주님, 그분이 당신의 팔을 붙들고 함께 들어가 주십니다. 입구는 어둡고 좁아 보이나, 나오는 문은 너무도 밝고 넓을 것입니다.
이 과정의 목적
누군가로부터 인격 모독이나 통렬한 실망을 느낄 때 우리의 마음은 깊은 상처를 입게 된다. 이것은 우리 안에 심겨진 사단의 쓴 뿌리가 되어 우리의 성품과 내면에 악영향을 끼친다. 이 쓴 마음에서 벗어나는 길은 용서다. 용서는 내면의 상처를 치유하는 데 있어서 통과해야 하는 근본적인 문이다. 이 과정의 목적은 어떻게 실제적으로 용서할 수 있는지 돕기 위한 것이다.
1. 만일 당신이 누군가를 용서해야 할 필요가 있는 마음이라면
다음과 같은 증상이 있을 것이다.
1) 그 사람에게 관심을 보이려 하지 않는다.
2) 관심을 기대하지만 감사를 나타내지 않는다.
3) 어떤 사람은 지나치게 칭찬하고 어떤 사람은 악의적으로 판단한다.
4) 어떤 사람과 우정 관계를 맺을 때 소유욕이 강하다.
5) 표면적으로만 행복할 뿐 내부적으로는 대단히 예민하고 까다롭다.
6) 다른 사람들을 만나는 데 극히 조심성을 기울인다.
7) 내가 누군가로부터 고통받았던 때는 상세히 기억한다.
8) 그 사건을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에 분노와 고통을 느낀다.
9) 그 사건을 기억하여 그 사람을 나쁘게 생각하는데 사용한다.
10) 상대방이 잘 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2. 왜 용서해야 하는가?
1)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용서가 나 자신에게 체험되지 않는다.
2) 용서하지 않고 내가 누군가로 말미암아 실의에 빠져 있다면 우리의 생각은 주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그들의 불쾌한 행동과 태도가 자꾸 생각나서, 우리의 마음은 점차 나쁘게 굳어져 가고 쓴 뿌리는 더 깊이 뿌리를 내린다.
3) 용서하지 않으면 미워하는 상대방 생각에 사로잡혀 있게 되기 때문에 결국은 그를 닮아가게 되고 미워하는 대상은 결국 둘이 되고 만다.
4) 용서하지 않으면 죄의 파생을 끊을 수 없다.
5) 용서하지 않는 마음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끊게 되어 결국 하나님의 모임이나 교회를 분열시키고 파괴한다.
6) 쓴 뿌리가 자라면 하나님이 주신 은사가 계속 계발되지 못한다.
7)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없으며 풍성한 삶을 살아갈 수 없다(갈5:22).
3.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용서에 대한 바른 이해
1) 용서한 상대방의 잘못을 눈감아주는 것이 아니다.
2) 잘못 행한 자의 심리를 분석하여 이해하는 것은 용서가 아니다.
3) 상대의 잘못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용서가 아니다.
이상의 태도들은 대단히 인격적이고 너그러운 태도 같지만 이것은 용서가 아니다. 이런 사람들의 실생활을 살펴보라. 대개의 경우 그들의 속마음은 사람에 대한 실망감으로 가득 채워져 사람을 싫어하게 되며 마음을 열지 못하고 어느 경계선까지만 사람을 사귄다.
4. 용서란 어떻게 하는 것인가?
1) 상대에 의해 우리 자신에게 가해진 구체적이고 명확한 잘못을 직시한다.
2) 상대에 의해 내 마음에 생긴 상처와 고통을 직시한다.
3) 상처받은 나의 마음의 분노를 직시하고 인정한다.
4) 십자가의 용서와 사랑을 생각하며 그 십자가 앞에서 상대방의 잘못된 행동을 용서하 겠다고 내가 의지적으로 선택하고 고백한다.
5) 심판과 판단을 주님께 맡기고 나는 그를 용서하겠다고 입으로 시인한다.
6) 용서하지 못했던 잘못을 주님께 자백하고 깨끗하게 하신다는 주님의 약속을 믿고 감사하라.
5. 용서에 있어서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과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1)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
(1) 나의 감정의 변화
감정은 생각의 결과일 뿐임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기에 상대방에 대한 생각과 사건이 정리되면 감정은 결국 따라온다. 그리고 때로는 하나님의 은혜로 즉시 감정이 변화되기도 한다. 그런데 이 감정이 결과임을 잊고 감정 자체를 사건보다 먼저 해결하려고 하고 감정이 없어질 때 용서하려고 하는 것은 순서가 틀린 것이다.
(2) 상대방의 감정의 변화
내가 당신을 용서했으니 당신도 나에 대해 좋은 감정으로 변해야 한다는 요구는 억지이다. 상대의 감정은 내 권한 밖임을 기억해야 한다. 상대의 감정은 하나님의 주관하에 있다.
2) 나만이 할 수 있는 일
상대가 잘못을 행한 자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용서하기로 의지적으로 선택하는 일을 나만이 할 수 있다. 인간의 감정이란 결코 나 스스로 조절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많은이들이 자신의 감정을 조절한 다음에 용서를 하려고 한다. 즉 용서하고 싶은 감정이 일어난다거나 좋은 마음이 일어나야만 용서했다고 스스로 확인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분명히 용서해야 한다고 명령하셨다. 명령이란 우리의 의지를 향해 내려지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감정은 비록 따르지 못하더라도 용서하기로 선택한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선택을 도우셔서 결국은 감정까지도 완전히 그 미움과 묶임에서 자유롭게 되도록 하신다.
때로는 우리가 우리의 보복하고자 하는 감정을 부인하고 용서를 선택한다는 것은 우리의 생명을 내려놓는 것 같은 고통이 따르기도 한다. 그러나 용서하지 않기로 선택하고 사는 것은 더욱 고통스러우며 더욱 큰 대가를 치러야 한다.
6. 왜 용서하기 어려운가?
1) 상대에 대하여 시기하고 질투하는 마음이 있을 때 용서하기 어렵다.
2) 내 안에 같은 죄가 있을 때 정죄의식이 강해져 용서하기 어렵다.
3) 하나님의 성품과 약속을 모르기에 내가 하나님 대신 심판하려는 마음이 용서를 막는다.
4) 하나님의 용서를 깊이 인식하지 못할 때 용서하기 어렵다.
5) 용서한 후 결과에 대해 불안하기에 용서하기 어렵다.
용서를 막는 이 두려움에 대해서 로렌 커닝햄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 이 두려움이란 내가 상대방을 용서했을 때 앞으로 더 상처를 받게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다. 그러나 용서는 당신이 장래에 받을 상처로부터 당신을 보호해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열쇠가 된다. 또한 용서의 행위는 정서적인 치유를 가져와 당신으로 하여금 장래에 받게 될 상처들을 견딜 수 있도록 당신을 충분히 강하게 해줄 것이다.”
용서라는 문은 통과하기가 쉽지 않은 어려운 문이다. 하지만 이 문을 통과하지 않고는 결코 치유와 성숙이라는 문으로 들어설 수가 없다.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는 주님께서 우리가 하려고만 한다면 이 문을 통과할 수 있도록 도우실 것이다.
7. 용서의 세 가지 방향
1) 하나님께 당신 자신의 죄에 대해 용서를 구하라.
사람들은 자신의 죄를 그대로 인정하기보다는 합리화 시키거나, 오히려 다른 사람에게 그 죄의 책임을 전가시키려고 하든지, 아니면 감추려고 하는 태도를 취하곤 한다. 이런 태도들은 거의 자동 반사적으로 우리의 깊은 심연에서 빠르게 작용하기 때문에 스스로도 죄가 없다고 속는다. 참으로 성령이 우리의 숨은 마음을 지적해 주시지 않는 한 우리의 마음은 이런 식의 처리 공장을 매일 가동시킨다. 그러나 이런 태도는 결코 죄를 없애지 못한다.
죄와 고통에 대한 성경적 처리는 단 하나다. 십자가의 보혈을 의지해서 죄를 자백하는 것이다(요일1:9).
2) 당신 자신을 용서하라
당신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고 용납하지 못하는 것은 교만과 불신앙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시고 용납하심과 같이 당신 자신을 용납하고 사랑해야 한다. 또 당신 자신을 용서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자신을 학대하고 비하시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람에 대한 무서운 거역이며 당신 자신을 용서하지 못한 결과이다. 하나님도 당신의 죄악을 다 용서하시고 기억지도 아니하신다. 그 모습 그대로 주님은 당신을 용납하고 계신다. 그렇다면 당신도 당신의 그 모습을 그대로 용납하고 용서하며 사랑해야 되지 않겠는가?
계속 죄책감에 머물러서 자신을 비하시키고 학대하는 태도는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불신앙이다. 이것은 자신의 초점이 아직도 자신에게 머물러 있음을 나타낸다.
3) 나에게 상처를 입힌 사람들을 용서하라.
나에게 상처를 입힌 자들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 말씀의 완성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이렇게 큰 용서와 사랑을 입었다면, 이제는 우리가 그 누군가를 용서해 줄 차례다. 누군가가 나에게 미움의 화살을 쏘면 나는 사랑의 대포를 쏘고, 누군가가 나에게 미움의 쓴 잔을 마시게 하면 나는 사랑의 홍수로 쓸어 버린다는 적극적인 용서와 사랑의 역사가 있어야 한다.
8. 지금 용서의 단을 쌓으라.
1) 상대를 용서한다는 것은 그 상대의 행동이 옳다고 인정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상대를 향한 나의 태도를 지금 바꾸는 것이다. 이것은 상대를 나 스스로 재판하고 판결하는 권리를 하나님에게 넘겨드리는 것이다.
2) 내가 누군가를 용서하겠다고 의지적으로 결심하였을지라도 어떤 경우에 감정은 여전히 그에 대한 미움이 씻어지지 않고 있을 수가 있다. 그 감정과 상관없이 바른 선택을 지금하라. 이것은 결코 위선적인 행동이 아니다. 자신을 부인하는 바른 행동이다.
3) 내가 용서해야 할 사람들이 누구인가를 성령께서 생각나게 하시도록 기도하라. 표면적 인 사건보다는, 지나가 버리고 깊이 묻혀버린 사건들이 더욱 당신이 용서함으로 해결해야 할 사건일 수 있다. 이런 결박된 사건들을 가르쳐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지금 기도하라.
4) 떠오르는 사람들의 이름을 적고, 용서해야 할 그 부분을 구체적으로 기록하라.
5) 용서하라 하신 하나님의 명령(마5:43-47)과 그의 뜻대로 구하면 들으신다는 약속(요일5:14-15)에 의지해서 입을 벌려 용서의 기도를 드리라.
6) 믿으라. 행동하라. 그를 위해서 기도해 주라. 주님의 시선으로 그를 보라. 그리고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하기 시작하라. 당신 안에 봉해진 채 썩고 있던 우물이 열려졌다. 어느 우물은 원망과 한이 많아 깊이가 깊어 그 속의 오물이 다 나오기까지 시간이 걸릴 수 있지만 분명히 그 뚜껑이 열린 것을 믿으라. 성령께서 결국은 그 우물 안의 오물을 다 퍼내시고 맑은 평안의 물로 채우실 것이다.
과정 6 성령의 권능을 받으라
이 문 안에는 살아 계신 하나님이 당신에게 주신 최대의 약속이 들어 있습니다. 당신의 성령의 권능을 알기 원하고 필요로 하신다면 이 문 안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찾아내서 잡으십시오. 반드시 체험하도록 하십시오. 하나님은 약속에 따라 움직이십니다. 당신이 성경에 약속된 것을 찾아내어 기도하면 하나님은 주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분이 당신을 축복하시려고 주신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 않겠느냐?” 또한 성령을 체험한 이후에 어떻게 계속해서 충만한 생활을 할 수 있는지 지침을 이 방 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또한 간증자들의 이야기를 통해 당신에게 동일시되는 것을 찾아보십시오. 자! 그러면 마음의 옷을 단정히 하고 여섯 번째 문을 들어서십시오.
이 과정의 목적
이는 힘으로, 능으로 되지 않는다. 오직 성령으로만 된다. 내적 치유는 나의 작은 협조를 가지고 성령께서 처음부터 끝까지 행하시는 것이다. 이 강의는 성령님이 누구신지 알게 하고 바로 이 시간 성령님과 당신이 개인적으로 만나도록 돕기 위함이다. 성령의 권능을 체험하고 그 능력으로 내면적인 상처를 치유하고 모든 악한 죄의 결박을 끊어낼 때 풍성한 삶은 이루어진다.
1.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이유는?
1)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의 가장 중요한 특성은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었다
(창1:26-28).
2) 그러나 이 형상은 깨어지고 말았다(창3:1-6).
3) 인간의 거역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인간 안에 두신 가장 귀한 부분인 영이 하나님과 분리되고 말았다. 인간 안에서 하나님의 신이 떠나감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모든 혼란과 타락에 빠지게 되었다. 이러한 타락은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신 근본적인 이유를 결코 이룰 수 없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엡2:1, 창2:17, 6:3).
4) 그러나 하나님은 스스로 인간을 위해 새로운 회복의 길을 마련하셨다. 성경은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구원의 길을 보이시기 위한 목적으로 기록된 특별한 책이다. 구약은 성부 하나님이 인간에게 인간의 타락의 과정과 그로 인한 결과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야만 하는 이유를 말씀하신다.
5) 신약의 공관복음서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사시면서 인간의 회복을 위해 행하시는 역사를 보여주고 있으며,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난 다음이 성령님이 말씀하시고 활동하는 기록들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2. 주님이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고 한 주님의 약속은 제자들이 모여 기도한 지 10일 후에 이루어졌다. 이 일이 일어난 후 제자들에게 일어난 변화는 무엇이었는가?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면서 가장 중요한 약속을 남기셨다. 그것은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는 약속이었다(행1:4-8). 그들의 변화를 주목해 보라. 특이한 사실은, 그들의 변화가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히 되어진 것이 아닌 너무도 갑작스러운 것이었다는 것이다(행2:1-4, 4:32-34, 5:41-42). 물론 그 이전에도 그들은 예수님을 만나고 많은 부분이 변화되어서 예수님을 따랐으나, 결정적인 순간마다 그들은 예수님의 교훈에 전혀 미치지 못하는 인간적인 모습을 보였었다. 그러나 오순절 날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이후 제자들의 변화는 매우 특별하다. 주님을 부인한 시점에서부터 두달 동안의 베드로의 변화를 보라.
베드로의 변화
베드로는 가정과 가업을 뒤로 하고 주님을 따르며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두려움으로 인해 주님을 저주하며 부인하고 말았다. 그것이 바로 그가 가진 한계이고 인간이 가진 한계일 수 있다. 이런 베드로가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에 모든 사람 앞에서 담대히 예수님을 전하며 매를 맞는 것을 오히려 감사하게 여기는 사람으로까지 변했다. 이 변화는 자신의 인격의 성숙이나 결심이라는 차원과는 다른 폭탄적 변화이다. 그런데 이 기간이 두 달이 못되는 짧은 기간이었다. 그래서, 그의 변화는 오랜 시간에 걸쳐 스스로 이루어진 변화라기보다는 성령의 역사로 인해 두려움 대신 담대함으로 바뀐 순간적인 변화라는 결론이 내려진다.
3. 성령님은 누구신가?
1) 그는 삼위일체의 제 3위로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과 동등하신 분이시다.
2) 그는 하나님의 속성을 모두 가지고 계신다.
3)그는 무한한 지성(고전2:11)과 감정(롬15:30)과 의지(고전12:11)를 소유하고 계시는 인격이시다.
4. 그리스도인은 왜 성령으로 세례를 받고 충만해야 하는가?
1)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신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서 우리는 성령으로 충만해져야 한다(롬7:24-25; 갈5:22).
2) 성령님만이 우리를 영적인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수 있다(요16:13).
3) 성령님만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게 하신다(고전2:11)
4) 주님은 우리에게 성령으로 충만하라고 명령하셨다(엡5:18).
5) 성령님만이 우리로 죄를 깨닫게 하신다(요16:8-9).
6) 성령님만이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하여 성경을 기록케 하시고 또한 성경을 깨닫게 하실 수 있다(딤후3:16).
7) 성령님만이 우리로 하여금 풍성한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할 수 있는 힘과 다른 사람에 게 증거할 수 있는 힘을 주신다(갈5:16; 행1:8).
5. 왜 성령으로 충만을 받지 못하는가?
1) 하나님의 약속을 몰라서 구하지 않기 때문이다(눅11:13; 엘2:28-32; 호4:6).
2) 자신의 연약함을 모르는 교만 때문이다(롬8:7; 고전2:14).
3) 욕심으로 잘못 구하기 때문이다(행8:18-21).
4) 고백하지 않은 죄가 있기 때문이다(시66:18). 5) 하나님을 믿지 않고 의심하기 때문이다.
6. 어떻게 받을 수 있는가?
1) 회개하고 주님을 영접해야 한다(행2:38)
2) 마음을 비우고 용서를 받으라(요일1:9) 3) 구하라(눅11:3)
성령의 충만은 힘을 간구하는 것이 아니며, 인격이신 성령님께 우리 자신의 왕좌를 내어 드리고 위로부터 임하는 신령한 능력을 받는 것이다. 겸손히 요청하라. 구걸하지 말고 담대히 요청하라. 성령님은 예수님의 약속대로 당신에게 임하실 것이다.
4)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하나님을 찬양하라.
하나님의 명령(엡5:18)과 그의 약속을 믿으라(요일5:14-15). 만일 당신의 연약한 것을 인정한다면 바로 당신이 성령의 권능이 필요한 사람인 것이다. 성령이 임하실 때 나타나는 방언이나 외적인 체험으로 증거를 삼으려 하지 말고, 말씀을 잡고 믿음으로 받아들이라. 이것이 성령님을 성령님으로 인정하는 것이요 믿는 것이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의 것을 받을 수 없다. 의심하면 차라리 기도하지 않는 편이 낫다.
7.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1) 당신이 처음으로 성령의 임재를 체험했다면 그것으로 완성이 아니다. 그것은 시작이다.
당신이 성령님께 얼마나 순종하느냐에 따라 당신의 내적 성장, 즉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인격적 성장이 이루어질 것이다.
2) 또한 당신 안에 외적 은사(지혜의 말씀의 은사, 지식의 말씀의 은사, 믿음의 은사, 병 고치는 은사, 능력 행함의 은사, 예언의 은사, 영들 분별함의 은사, 방언의 은사, 통역의 은사, 사랑의 은사(고전12:7-11)를 성령께서 나타내셔서 당신을 증인으로 사용하실 것이다. 그러나 내면적 순종이 계속 이루어지지 않을 때 외적 은사는 점점 그치고 당신의 내면적인 성장은 멈출 것이다.
3) 성령의 임재, 성령 세례, 성령 충만을 지식적으로, 개념적으로 이해하고 알고만 있다면 당신은 불행한 그리스도인이다. 인격이신 성령님을 사도행전의 성도들처럼 체험하고 그분과 계속해서 교제해 나가는 삶을 살아야 한다.
4) 중생과 성령 세례 그리고 성령 충만의 의미를 기억하라. 성령 충만은 내가 성령께 순종하는 삶의 상태이다. 성령의 권능을 받은 자는 반드시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이러한 자세를 가져야 한다. 이러한 자세는 어느 날 하루 기도함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내가 그분께 나의 왕좌를 양도해야만 얻는 것이다.
5) 우리가 성령님께 매일 매일 순종하며 사는 것이 성령으로 권능을 체험하는 첫 발걸음임을 기억하자.
그리스도인의 가장 큰 죄악은 마음에 계신 성령님과 상관없이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이다.
과정 7 나의 진정한 아버지를 바로 알지 못하게 하는 굴레들
인간의 질병을 일으키는 가장 깊은 차원의 근원적 원인 네 가지가 이 문 안에 있습니다. 당신에게 있는 것은 무엇인지 성령께 물어보면서 이 방안을 걸어다니십시오. 그리고 왜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어려운지 그 이유를 찾아내시고, 그리고 해결책이 무엇인지도 찾아내어 당신의 것으로 취하십시오. 왜 이런 문들을 통과해야 하는가? 왜 내적 치유를 생각해야 하는가? 당신을 만나기 원하는 진정한 아버지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도 되시고 아버지도 되신 하나님을 찾아가는 길이 험하고 잘 모를지라도 계속 걸어가십시오. 겨울 폭풍우 속에 작은 병아리가 어미의 속 깃털 안에 깊이 묻혀 잠든 것처럼 당신이 그분의 품에 안기기까지 당신은 방랑자이며 고아일 뿐입니다.
이 과정의 목적
하나님의 모습을 바로 볼 수 없는 왜곡된 안경을 쓰고 있을 때 바르고 친밀한 교제는 이루어지기 어렵고 우리의 상실된 마음은 채워지지 않는다. 이 상실된 마음은 고아의 마음이다. 이 세상은 영적, 감정적인 고아들로 가득한 거대한 고아원과 같다. 육신의 아버지가 있을 수도 있고, 입으로 하나님 아버지를 부를 수도 있지만, 자신의 감정 안에서 아버지의 사랑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들은 고아의 느낌으로 살아간다. 고아가 아닌데도 고아처럼 느끼는 자식을 보는 아버지는 얼마나 마음이 아플까? 이 과정은 하나님을 개인적인 아버지로 체험하기 어려운 이유들을 살펴보고 그 원인들을 치유하기 위한 것이다.
1. 육신의 아버지와의 관계가 하나님과의 관계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1) 육신의 아버지는 인간이 처음 만나는 가장 강한 하나님을 대표하는 존재다. 그런데 그 아버지와 만나는 그 시기는 우리의 자아가 아직 온전히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이기에, 이 시기의 모든 경험과 사건, 느낌은 우리의 성격 형성의 근본을 이루게 되고, 이것은 우리가 평생 쓰고 다니는 마음의 안경이 된다.
2) 하나님의 모습을 바로 볼 수 없을 때 우리에게 일어나는 보편적인 증상들은 어떤 것인가? 막연한 불안감이다. 이 불안감이 늘 마음을 지배하고 있으며, 언젠가는 나에게 나쁜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예감에 사로잡혀 있다. 그러기에 기쁜 일이 있을 때에 마음놓고 기뻐하지 못하고 마음 한구석은 더욱 불안해진다. 이 기쁜 일 뒤에 갑자기 괴로운 일이 닥치면 어떻게 하나 하는 염려 때문이다. 마음 한구석에는 항상 채워지지 않는 공백이 자리잡고 있어서, 아무리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해도 허전함을 느낀다. 무슨 일을 해도 실패할 것 같은 두려움에 가득 차 있으며, 무엇엔가 쫓기고 있는 듯한 조급함과 죄의식 그리고 정죄감으로 항상 기분이 좋지 않다. 그리고 이 위에 덧붙일 공통적인 증상이 있다면 그것은 긴장감이다. 긴장감이란 보호자가 없어 자기가 자신을 보호하고 책임지려고 할 때 나타나는 증상이다.
3) 육신의 아버지의 여러 유형들과 그런 아버지의 모습으로 인하여 아이에게 끼칠 수 있는 영향들을 살펴보자.
(1) 좋은 아버지
아무리 좋은 아버지 밑에서 양육을 받는다 할지라도 아이는 상처받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아이가 상처를 받는 것은 자신이 접하는 사건의 객관적 사실보다는 그 사건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의 주관적인 판단에 의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버지와 대화를 편하게 하고 아버지와 자신의 모든 감정을 깊이 나눌 수 있으며 아버지에게 자신이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자녀라면 그가 하나님을 바로 보는 데 크게 어렵지 않을 것이다.
(2) 화를 잘 내는 아버지
언제 화를 낼지 모르는 시한폭탄과 같은 아버지 밑에서 자란 사람들은 자신도 화를 잘 내는 사람이 되는 것은 물론이고, 하나님 아버지에 대해서 가지는 개념도 무엇을 잘못하기만 하면 때리기를 준비하고 계신 하나님 아버지로 상사하게 된다. 인내나 용서보다는 지적과 질책이 앞서는 짜증스러운 하나님의 인상이 만들어진다. 그러므로 마음 한구석은 언제나 벌벌 떨며 긴장하고 있는 상태이다. 잘하려고 열심을 다하지만, 그럴수록 더욱 실수가 잦아 자신을 용납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실수를 용납하기 어렵다.
(3) 거리감이 있는 아버지
정서적, 감정적으로 자신을 표현하지 않는 아버지다. 슬퍼하지도, 웃지도 않고 언제든지 가족의 통치를 위해 거리를 두고 한 발치 뒤에서 위엄있게 있는 아버지다. 이런자는 자신도 아버지가 되었을 때에 자기의 자녀에게 감정을 나누기 힘들 것이며, 하나님 아버지에게도 자신의 섬세한 감정들을 나눌 수 없고, 친밀함을 기대할 수 없는 분으로 생각한다. 그러기에 항상 하나님을 만나도 사무적으로 만난다.
(4) 연약한 아버지
육체적 혹은 성격적으로 약하고 사람을 두려워하는 아버지. 이런 가정은 반대로 어머니가 강하며 어머니가 집안의 권위를 갖고 집안의 모든 대소사를 처리한다. 재정적인 권리를 어머니가 갖고 있으므로 아이들은 모든 필요를 어머니에게 부탁한다. 이러한 아버지를 둔 자녀들은 하나님 아버지께 자신을 전적으로 의뢰할 수 없다. 연약한 아버지 밑의 자녀들은 두려움이 크다. 그러기에 자녀들은 그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 더욱 자신을 강하게 만들어 간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자기의 힘을 길러 자신을 스스로 보호하려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는 사랑이시면서 가장 강하시다. 영원한 힘이 있으시기에 얼마든지 자신을 그분께 맡길 수 있다.
(5) 안 계신 아버지
아버지가 없는 가정에서 자란 자녀들은 아버지에 대해서 경험한 것이 없기에 아버지의 역할에 대한 현실적인 인식이 없다.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가 자신의 삶에 개입해 주시는 것에 대해서도 믿기 어렵고, 관계를 갖는 데 어려움을 느낀다.
(6) 알콜중독에 빠진 아버지
이런 가정은 아버지가 술을 마시고 난 기분에 의해 가정 분위기가 좌우된다. 이런 자녀들에게서 나타나는 가장 보편적인 결과는 정서적인 미성숙이다. 아이들은 자신의 감정이 존중되지 못하므로 자기 스스로 자신의 감정을 존중하지 않는다. 항상 다른 사람의 기분에 맞추어 일을 결정하고 자신의 의견은 없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을 섬길 때에 매우 충성되고 열성적으로 하나님께 자신을 희생하려 한다. 그러나 그 마음 안에 왜곡된 것들을 보면 놀랄 정도이다. 그는 하나님의 로봇처럼 행동하려 한다. 자신의 의견이나 감정을 하나님 앞에서 나타내려고 하지 않는다. 자신의 아버지처럼, 하나님도 자기 같은 사람의 기분 따위는 그다지 중요하다고 생각지 않으실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이들은 오직 하나님을 섬기려고만 할 뿐,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데는 매우 어려움을 느낀다.
(7) 나를 버린 아버지
현재 고아원 시설에 수용된 고아의 70% 이상이 부모가 생존해 있는데도 버려진 아이들이다. 버림받았다는 느낌을 가진 아이들은 자신을 죄에 쉽게 내어준다. ‘부모가 나를 버렸는데 나도 나를 버리지 못할 것이 없다.’ 이런 마음가짐으로 자포자기하는 것이다.
(8) 나를 부끄러워하고, 나를 용납하지 못하는 아버지
가치 기준을 세우고 그 기준에 자녀가 도달하기를 끊임없이 요구한다. 혹은 자신의 죄의 결과로 몰래 낳은 자녀이기 때문에, 부끄러워하고 은밀히는 사랑하지만 사람들 앞에서는 모르는 척하는 아버지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를 아무도 없는 곳에서 은밀히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온 세상뿐만 아니라 우주에 공개적으로 선포하셨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나는 너의 아버지고 너는 나의 자녀다.”라고.
(9) 나에게 해를 끼친 아버지
세상의 죄악이 관영해 감에 따라 가장 놀랍고 무서운 죄악은 가정에서 아버지가 자녀에게 해를 끼치는 경우이다. 성 폭력에서 시작하여 온갖 행할 수 없는 죄악을 자녀에게 행하는 일들이 늘어나고 있다. 아버지에게 이러한 해를 받은 자녀의 마음에 받은 상처는 너무도 치명적이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는 결코 자녀를 이용하는 분이 아니다. 모든 우리의 생명에 속한 것들을 그분이 다 주셨고 지금도 주고 계신다.
2. 인생의 위기 속에서 받은 상처로 하나님에 대한 쓴 뿌리와 원망을
갖게 되어 결국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갖기 어렵게 한다.
우리가 살아가다가 만나게 되는 삶의 고통과 위기를 하나님 책임으로 돌릴 때, 우리의 마음에서는 원망의 쓴 뿌리가 하나님에게 생겨난다. 이 쓴 뿌리는 마음의 눈을 덮어서 하나님의 진정한 모습을 보지 못하게 한다. 이런 쓴 뿌리로부터 우리 마음을 지킬 수 있도록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에 감사하라는 명령을 내리셨다. 또한 그분은 우리의 모든 것을 합하여 선을 이루게 하신다는 말을 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신다. 깊이 있고 민감한 느낌을 가지신 분이다. 완악하고 무감각한 아버지의 모습이 아니며 우리의 고통에 대해서 하늘에서 혼자 냉정하게 바라보시는 분이 결코 아니다.
3. 조상으로부터 내려오는 저주의 끈과 굴레들이 우리를 묶고 있어서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게 한다.
은란함, 사기, 도적질, 저주의 말들, 악독, 알콜, 거짓말, 점치는 것, 저주의 끈은 죄악의 끈이다. 성경은 이 끈이 4대째 이어진다고 했다. 이런 죄악의 끈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바로 볼 수 없는 상태가 된다. 그러나 주님의 십자가는 이 모든 죄악의 끈을 끊으신다. 또한 주님은 우리의 대에서 이런 죄악의 끈이 끊어지기를 원하신다.
4. 이런 문제들을 바르게 해결하지 못하게 하는 거짓된 사고방식들
1) 예수를 믿고 거듭나면 지나간 모든 것들은 현재의 삶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 어떤 삶을 살았건, 이제는 완전한 하나님 아버지를 알았기에 모든 괴로움은 지나갔으며 과거의 일은 현재의 나에게 아무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의 삶을 들여다보면 사실은 그렇지 못함을 금방 발견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을 때에 영적인 새 삶이 시작된 것이지 우리 자신의 모든 것이 완전히 변한 것은 아니다. 이제 변할 수 있는 완전한 가능성의 길 위에 서게 된 것이다. 우리의 마음은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그리하여 과거 일들의 영향에서 완전히 놓임을 받아야 한다.
2) 정서적 장벽과 성격의 장애들이 신앙 생활과 성경적 지식이 쌓여가면 자연히 없어지리라는 생각
3) 부모가 우리의 잘못된 삶에 있어서 영향을 끼친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것은 죄스럽다는 생각
4) 우리의 지난 시절을 생각한다는 것은 부모에게 나의 죄에 대한 책임을 돌리는 행위라는 생각
5) 부모와 나의 어린 시절의 가정 문제를 말하는 것은 나의 체면을 손상시키고 나의 자부심을 손상시킨다는 생각
5. 우리를 자유케 하는 진리의 사고 방식은 무엇인가?
1) 부모를 바르게 판단하는 것은 부모를 배반하는 것이거나 또는 부모에게 욕을 돌리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의 가정을 회복시키기 위해 바른 진단을 내리는 필수적인 과정일 뿐이다.
2) 부모를 사랑한다는 것은 죄악을 용서하는 것이지 은폐하는 것이 아니다.
3) 성령께서 우리의 부모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뒤돌아 보게 하시는 것은 잘못을 캐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알기 위해서이다.
6. 어떻게 이런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을까?
1) 나와 부모와의 관계에 문제가 있음으로 인해 하나님을 경험해 가기 어렵다는 것을 받아들이라.
2) 자신 안에 있는 하나님께 대한 숨겨진 인상이 무엇인지 그리고 왜그런 인상을 갖게 되었는지 하나님께 여쭈라. 깨닫게 된 것을 놓치지 않고 붙잡아 하나님께 말씀드리라.
3) 부모에게 받은 상처와 아픔들이 있다면 부모를 용서하고 사랑한다고 고백하라. 세상에 계시지 않는 부모라도 용서하고 사랑을 고백하라.
4) 조상들로부터 온 굴레들에 대해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끊어서 더 이상 나의 자녀들 에게 이것을 유전시키지 않도록 기도하라. 성령의 능력으로 기도하라. 예수의 이름은 창조와 기적을 일으킨다.
과정 8 내 마음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영적 전쟁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처럼 사단과 마귀, 그리고 귀신은 존재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 악한 영들은 우리의 주위에서 속이고 괴로움을 주려고 합니다. 사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그 순간부터 영적 전쟁터에 들어와 있습니다. 여기에는 아무도 예외가 없습니다. 이 문안에서 당신은 전쟁에 승리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영적 전쟁은 은사자나 능력자가 대신 해주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전쟁은 당신 마음에서 이루어지고 있기에 당신이 해야 합니다. 어떻게 승리할 수 있는지 정리해 보십시오. 가장 평범하면서도 능력 있는 승리의 방법을 주님께서 가르쳐 주실 것입니다.
이 과정의 목적
보이지 않는 세계는 보이는 세계를 다스린다. 그러므로 보이지 않는 세계를 다스리는 자는 보이는 세계를 다스리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군대에 속한 군사이다. 군사는 싸워야 할 적이 있음을 의미한다. 그 적은 세상에 있는 혈과 육에 대한 싸움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공격해 온다. 적이 가장 노리는 부분은 그리스도인의 상처입은 마음이다. 그는 그 마음을 바탕으로 그리스도인을 자신의 노예로 만든다. 그러므로 온전한 마음의 치유와 성장을 위해서 두 가지의 태도가 필요하다. 첫째는 사단이 발판을 삼으려고 하는 상처입은 마음의 치유이며, 둘째는 그러한 사단을 실제적으로 공격하는 것이다. 이 과정은 매일의 삶 속에서 역사하는 사단의 궤계를 어떻게 대적할 수 있는지 알려주고, 대적함으로써 승리하는 그리스도의 군사가 될 수 있도록 돕기 위함이다.
1. 내가 준비가 되어 있든지 않든지, 내가 관심이 있든지 없든지 그리스도인은 영적 전투 가운데 있다.
왜 이러한 전쟁이 그리스도인 안에서 일어나는 것일까?
악의 영은 인간과 멀리 떨어진 존재가 아니라 언제든지 아무런 거리낌이 없이 그리스도를 모르는 자들, 그들의 생각을 속이고 사로잡는다. 사실 비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은 이미 사단이 점령한 곳이므로 오히려 싸움이 없다. 반면, 크리스천들은 그들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순간부터 치열한 싸움이 시작되어 영적 전쟁터 속으로 들어오게 되는 것이다. 이 전쟁과 상관없는 자는 아무도 없다. 내가 마귀에 대해 관심이 없다고 해서 마귀가 나를 비켜 가는 것이 아니다. 내가 그에게 관심을 가진다고 해서 특별히 나를 주목하는 것도 아니다. 그에게는 모든 인간이 공격의 대상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그리스도인들은 매우 위협적인 존재들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존재들에 대해 너무나 잘못 알고 있거나 무지하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이미 주신 우리의 권세를 전혀 사용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의 포로가 되어 있을 수 있다.
2. 영적인 세계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는 극단적인 두 가지의 태도
1) 지나친 부정
이런 자들은 마귀를 쫓아내는 자들에 대해 때로는 혐오감까지 가지고 바라본다. 그들은 마귀에 대해 말하면 오히려 복잡한 문제가 야기된다고 하는 생각을 가지고 아예 그런 문제를 교회 안에서 이야기하는 것조차 꺼린다. 마귀는 결코 우리가 그를 내버려둔다고 해서 결코 우리를 가만히 두지는 않는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바로 알아야 하는 것처럼 우리의 대적 마귀의 속임수와 거짓에 대해서도 바로 알아야만 한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한다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마귀에 대해 바로 안다면 우리는 더 깊은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될 것이다.
2) 지나친 관심
이런 자는 무슨 일이든지 귀신의 영향이고 귀신 때문이라고 한다. 심지어 자신이 선택을 잘못하여 그르친 일이나 고의적으로 이기적이고 악한 행동을 한 것에 대해서도 모두 마귀가 시킨 짓이라고 함으로써 자신이 져야 할 책임을 마귀에게 떠넘긴다. 이들의 삶의 대부분은 귀신과 싸우는 과정 속에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많은 갈등을 갖게 된다. 이들이 혹 어떤 자에게서 귀신을 쫓아냈을 경우,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영적인 능력에 대해서 지나친 과신과 교만에 빠져, 어디서나 이런 초자연적인 역사를 일으키기를 원하고 그런 것을 드러내기를 원한다. 하지만 우리가 귀신을 쫓아내며 악의 영들을 향하여 영적 전쟁을 하는 것 자체가 사역의 유일한 목적이 되어서는 안된다. 귀신을 쫓아내는 것은 다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성숙에 이르는 데 필요한 하나의 과정일 뿐이고, 우리 안에서 잃은 자를 구원하기 위해 쓰여지는 하나의 과정일 뿐이지, 전체가 아님을 잊어서는 안된다.
3. 영적 싸움에 대한 바른 태도는 어떤 것인가?
사람들은 마귀에 대해 두려움을 갖고 있다. 그 두려움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것은 바르게 알지 못했을 때나 충분히 알지 못했을 때 오는 것이다. 자유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적에 대해서 알아야만 한다. 이것을 위해서는 하나님께만 묻고 하나님과 성경에 대해서 더 깊이 알아가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인격적 교제를 의미한다. 또한 우리는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바르게 알아야 한다. 사단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신분에 대해 확신이 없는 자들을 속이고 미혹한다.
4. 사단은 어떤 자인가?
1) 그는 어디서 왔는가?
그는 사실 직접 하나님과 대적할 수도 없다. 그 대신, 하나님이 가장 사랑하시는 인간을 대적한다. 인간을 멸망시키는 일이 하나님에게 얼마나 큰 고통을 주는 일인지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인간을 멸망시키기 위하여 꾸민 모든 전략은 예수님이 이미 깨뜨리셨다(요12:31).
2) 그는 왜 그렇게 되었는가?
천사장이 사단이 된 것은 그의 교만과 이기심 때문이었다(이사야14:12-15).
3) 그는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는가?
교만하여 속이는 거짓의 아비다. 그는 자신의 성품을 인간 안에 집어넣기 위하여 모든 매체를 동원한다. 음악, 영화, 예술, 책 등등 모든 매체 안에 그는 자신의 성품은 반영시키고 인간은 이것들을 접하면서 점점 그의 사고방식을 닮아간다.
4) 인간에 대한 그의 태도는 어떠한가?
계12:12에 나오는 “크게 분내어”라는 구절은 “he is filled with fury”이다. 여기 사용된 “fury”라는 단어는 일반적인 분노가 아니다. 이것은 분노라는 감정 중에서 가장 극악한 광기와 원한에 사무친 분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마귀는 이런 심정을 가지고 지금 그리스도인의 곁에서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고 있는 것이다.
5) 현재 그의 세상에서의 위치는?
그는 세상의 지배자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하면서 인간은 세상을 다스릴 능력을 잃었다. 결국 인간은 스스로 사단에게 이 세상을 넘겨주고 말았다. 그리하여 이제는 사단이 지배자가 되어 문화, 정치, 종교 모든 분야에 그의 모습을 심고 있다.
5. 우리 안에서 행해지는 세가지 싸움터
그것은 생각의 싸움터, 감정의 싸움터, 입술의 싸움터이다.
1) 생각의 싸움터에서 악한 영이 하는 일은 무엇인가?
그는 하나님처럼 우리의 생각 속에 들어올 수 있다. 악한 인격체인 사단은 우리의 생각 속에 말한다.
저주의 말을 통하여
가족, 친구, 이웃 혹은 무당이나 관상쟁이를 통하여 사단은 우리를 일생 동안 묶는 저주의 말들을 심는다.
제안하는 방법을 통하여
그는 우리의 모든 생각을 하나님처럼 다 알지는 못하지만 그는 우리에게 어떻게 하라는 제안을 해줄 수 있다. 그는 덜미를 잡아 우리에게 무자비하게 정죄감을 넣어주고, 그 정죄감은 우리 자신에 대해 스스로 열등감을 갖게 하며 자신을 싫어하게하여 결국 죄 속으로 깊이 빠져들게 만든다. 자신을 싫어하고 무가치하다고 생각할 때 죄를 쉽게 짓게 되기 때문이다.
잘못된 상상력을 이용하여
무서운 것을 연상하게 하는 것, 생활 속에 비참한 일들이 계속 상상되게 하는 것… 이런 부정적인 상상은 인간의 감정 안에 불안과 두려움, 공포를 만들어 낸다. 두려움과 공포는 잘못된 결정을 하게 만드는 주범이다.
생각의 싸움터에서 역사하는 악한 영을 어떻게 물리칠 수 있는가?
생각은 우리의 입 속으로 들어가는 음식과 같다. 우리 안에 생각이 들어올 때 이것의 맛을 알아서 주님이 주신 맛이 아니면 그 즉시 뱉어낼 줄 알아야 한다. 계속 먹을 때 그것은 우리 마음 속에 들어와 우리로 하여금 그 생각대로 행동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만들며 그 생각은 계속 번져나간다.
2) 감정의 싸움터에서 악한 영이 하는 일은 무엇인가?
악한 영은 감정을 부정적으로 자극한다. 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통해 분노, 고통, 오해가 일어나도록 자극하는 것이다. 마음을 상하게 하는 자극이 올 때 분을 내는 것은 정상적이며 죄가 아닐 수 있으나, 그 분을 마음에 품고 하루 이틀 기한을 넘기면 분노는 우리의 마음에 쓴 뿌리를 만들어 마귀가 사용하는 거처가 되게 할 수 있다. 이 분노는 두려움과 완고함, 교만, 불신, 냉정함 등으로 발전한다.
감정의 싸움터에서 역사하는 악한 영을 어떻게 물리치는가?
겸손과 염려는 맡기는 삶의 태도이다. 이것은 감정을 영적 전쟁의 승리의 비결이다. 우리는 자신을 낮춤으로써 교만을 다스리고, 염려를 하나님께 맡김으로써 불신과 두려움을 다스릴 수 있다. 자신을 낮춘다는 것은 자신을 비하시키는 것과는 다르다.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무엇이 겸손인지를 배울 수 있다.
3) 악한 영은 우리의 입을 통해 어떤 일을 하는가?
자신과 타인을 실제로 공격하는 무기를 만든다. 타인을 공격하는 무기가 되는 말은 비평과 험담이다. 이런 말로 인한 상처는 칼로 받은 상처보다 더욱 오래 가고 아프다. 또한 우리의 마음에서 나오는 말들은 자신과 다른 사람을 더럽히는 힘을 가진다. 또한 자신을 공격하는 말은 부정적인 자신의 영상을 더욱 구체화시킨다.
우리의 입을 통해 역사하는 악한 영을 어떻게 물리칠 수 있는가?
우리는 말을 하기전에 마음의 동기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아무리 아름다운 미사 여구를 가진 말이라도, 걱정하는 빛이 담긴 말이라도 그 마음 속에 시기와 다툼을 숨길 때 그 혀 속에는 날카로운 칼이 숨겨져 있어서 듣는 사람의 마음을 베는 악한 영의 도구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자신의 마음 속에 사랑이 아닌 미움과 판단하는 마음이 있다면 아무리 좋은 교훈이라도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 좋다. 또한 자신을 해치는 부정적인 말을 통해 역사하는 악한 영은 우리의 긍정적인 말의 선포로 이길 수 있다. 매일 매일 진리를 선포하는 것이다.
6. 내가 사단을 물리칠 수 있는 법적 근거는 무엇인가?
1) 나의 권위는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행하신 그 일에 기반을 둔다.
2) 사단을 이기신 분께서 그리스도인인 나에게 그 자신의 권위를 사용할 수 있게 하셨다.
3) 그리스도인이 이러한 권위를 사용하여 사단의 역사를 꾸짖지 않는다면 마귀는 어디서도 꾸짖음을 받지 않으며 공격받지도 않는다.
4) 귀신의 존재는 인정하고 귀신의 능력은 부정하라. 빛이 임하는 곳에 어두움의 세력은 물러간다.
7. 실제로 악한 영을 향해 권위를 사용하여 대적하는 방법
1) 예수의 이름과 보혈
2) 하나님의 말씀
3) 성령의 능력
4) 진리를 말하는 것
이상 우리의 세 영역에서 매일 바른 태도를 배워 나가서 부정적인 말 대신 긍정적인 말을 하는 것으로 내 입의 습관이 바뀌어지는 것처럼 우리는 자연히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세상의 악한 사람을 물리치는 것처럼 악을 쓰고 폭력을 사용하여 악한 영을 대적하는 것이 아니다. ‘사단아 물러가라’ 하며 아무리 악을 써도, 그 사람 안에 불의와 거짓과 음란함 등등의 어두움이 그대로 있다면 사단은 결코 공격받지도 않고 권위에 복종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같은 세계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연약한 아이라 할지라도, 그의 중심에 하나님의 진리가 있고 죄를 미워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의 입에서 나오는 권위 앞에 악한 영은 두려워 떤다. 거짓된 생활로는 결코 사단을 속일 수 없고 대적할 수 없음을 기억해야 한다.
과정 9 나를 위하여 인간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많은 사람들이 이 문을 통과하면서 그들의 가시가 빠지고 아픔의 자리가 아물게 됩니다. 가장 많은 간증들이 이 방 안에서 생겨났습니다. 당신은 이 문을 열고 들어와 오직 당신만을 위해 계신 그분을 만나야 합니다. 당신과 같은 인간으로 계신 그분을 느끼고 만져 보십시오. 그래야만 당신은 당신의 고통을 버릴 수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에 대해 생전 처음 들어본 것처럼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와 그분을 찾아보십시오.
이 과정의 목적
내 아픔과 고통을 과연 예수님이 이해하실 수 있을까? 그분은 내 아픔을 치유하실 수 있을까? 이 과정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나와 개인적으로 무슨 관계가 있는지에 대해 깨닫도록 하기 위함이며, 숨어 있는 부정적인 속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도록 돕기 위함이다. 미천한 계집 종을 통하여 말 구유에 핏덩어리로 오신 예수님, 마른 땅에 돋아난 연한 순 같은 예수님, 사람 같은 하나님, 하나님 같은 예수님이 어떻게 당신의 내면적인 아픔을 치료해 가시는지 그 현장을 체험케 하는 데 이 과정의 목적이 있다.
그 동안 사람들과의 상담을 통해서 그리고 세미나 참석자들의 간증을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 안에 울고 있는 속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면 이 속사람은 어떻게 해서 이렇게 된 것일까? 사람마다 살아온 환경, 고통의 종류가 다 다르겠지만 모든 사람이 당하는 고통의 본질은 비슷하다. 그것은 거절과 멸시에 대한 것이다. 어떤 종류이든 나의 존재가 받아들여지지 않는 거절, 그리고 나의 인격이 무시 당하는 멸시란 마음에 큰 상처를 입힌다. 그리고 그 상대가 나와 가까운 관계일수록 그 상처는 더욱 크고 깊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모습을 주위 사람들이 거절하지 않을 수 있는 모습으로 만들어 가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한다. 모든 인간 안에 사랑 받고 싶은 욕구가 강한 만큼 거절에 대한 두려움과 고통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거절받지 않기 위해서 무언가 그럴 듯한 것으로 포장하는 인생, 그런 인생은 마치 ‘쇼’와 같다. 겉은 웃지만 그의 내면에는 두려워하는 속 사람의 울음이 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는 오랜 기간의 단절된 시간이 있었다. 이러한 단절된 시간 속에서 사단은 마음놓고 인간에게 하나님에 대해 왜곡된 거짓말을 해댔다. 환경, 부모, 사회를 통하여 그는 인간 안에 하나님에 대한 왜곡된 거짓말을 심었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본 모습을 왜곡시키는 사단의 거짓말을 깨뜨리지 못했다. 이런 결과로 인간 안에는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잘못된 두려움이 쌓여 갔다. 이런 원망과 두려움은 인간의 마음을 얼어붙게 하고 마음을 열지 못하게 한다. 우리의 상해 버린 속 마음이 치료되기 전까지 인간은 하나님을 종교적인 경배의 대상으로 섬기며 성전 마당을 뱅뱅거릴 뿐 하나님을 사랑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이 처음 의도하신 우리의 창조와 구원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다만 종교적인 경배의 대상이 아닌 아버지와 사랑하는 자식으로 그리고 남편과 아내가 가지는 그러한 깊은 사랑의 관계를 가지기 원하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간절한 소원이고, 그리고 예수님 또한 십자가를 지시기 전 마지막 기도를 하실 때 우리가 하나님과 이러한 관계 속으로 들어가기를 간절히 기도하셨다.
1. 예수께서 세상에 오셔야만 했던 이유
1) 그는 삼위의 한 분이신 하나님이시며 창조주이시다.
2)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은 피조물이나 죄를 범하여 하나님과의 교통이 단절되고 영원한 사망에 들어가야 했다(엡2:1,5).
3) 구약은 이 죄에 대한 해결로 제사 의식을 설명하고 있다.
4) 히브리서 5:1-6의 제사 의식을 통하여 우리는 두 가지의 중요한 조건을 보게 된다. 그것은 제물과, 제물을 들고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선 제사장이다.
5) 예수님은 제물이시며 제사장이셨다.
6) 히브리서 5:1-6을 통해 나타난, 예수께서 우리의 대제사장이란 사실은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구약의 대제사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예포이다. 그는 자신도 연약한 자였기에 저가 무식하고 죄에 미혹된 자를 능히 용납하고 중보할 수 있었다고 했다(히4:14-15). 구약의 제사 의식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신의 마음을 알려주시기 위한 그림자와 같은 것이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참으로 말씀하시기 원하시는 것은 예수님의 역할이었다. 예수님은 우리의 중보자가 되시기 위해서 구약의 대제사장처럼 인간의 고통과 연약함을 다 체험해 보시고 인간들이 당하는 시험을 당하신 것이다. 이것은 그가 인간의 진정한 모습, 즉 나약하고 상처받을 수 있고, 마음에 위로를 필요로 하는 인성을 가지신 완전한 인간이 되어서 인간과 똑같은 조건으로 인생의 길을 걸으셨다는 뜻이다.
2. 이것을 인정하고 깨닫는 것이 왜 중요한가?
1) 그가 나를 얼마나 깊이 이해하시고 체휼하시며 도우실 수 있는 분인가를 믿을 수 있게 된다.
2) 하나님의 보좌 앞에 예수를 의지하여 담대히 나아가 나의 모든 죄와 허물을 부끄럼 없이 보여드릴 수 있는 믿음이 생기는 것이다. 또한 아무리 용서할 수 없는 자라도 용서할 수 있는 힘을 받는다.
3.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부인하는 자들의 주장
1) 전능하신 창조주가 물질, 시, 공의 제한을 받으실 필요가 있겠는가?
2)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므로 인간의 성품은 없고 오직 거룩한 하나님의 모습, 하나님의 성품만을 가지고 계신다는 주장
3) 이런 의견들의 결과
이러한 사상의 결과를 살펴보면 이 사상이 누구에게로부터 왔는지를 알게 된다. 결국 이것은 인간과 예수님 사이에 거리감을 만들었으며, 나아가 하나님과 성령님 이 모든 분들에 대해서도 거리감을 갖게 하는 결과를 만들어낸다. 즉 예수님을 높이는 것처럼 보이나 결론은 진정한 예수님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지 못하게 했다. 작은 문제들을 그분께 가지고 나아가기는 너무나 부끄럽고 두렵기까지 하다고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결과를 볼 때에 이런 사상의 배후에 사단의 궤계가 있음을 알게된다. 그러기에 예수님을 나와 같은 인간으로 오셨음을 인정하느냐 하는 것은 성령의 사상이냐, 악령의 사상이냐 하는 분별의 기준이 되는 것이다.
4) 그리하여 두려움과 소원한 기분 때문에 별세한 성도를 중보자로 대신 내세워 그들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려는 성도 경배가 생겨나게 되었다.
5)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우리를 형제라 부르시기를 조금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모든 점에서 우리와 같이 되셨다(히2:17).
이러한 비밀을 알았기에 사단은 죽어 가는 그분 곁에서 끝까지 요구하고 유혹했다. 하지만 그분은 철저하게 자신을 우리와 똑같은 처지에 두시기를 원하셨고 결국은 인간처럼 죽으셨다. 누구를 위해 이런 고통의 길을 걷기로 작정하시고 자신의 능력을 스스로 제한하신 것일까? 무엇을 위해서 죽기까지 자신을 버리셨는가? 대답은 오직 한 마디, 연약한 우리 자신, 울고 있는 속 사람을 마음에 감춘 우리 자신들의 충성된 친구, 충성된 중보자가 되시기 위해서이다. 우리가 주님의 이런 태도와 마음을 이해한다면 더 이상 그분에게 우리의 마음을 닫아 두지 못할 것이다. 이것을 이해할 때 우리는 나를 멸시한 자들을 용서하며, 나에게 해를 끼친 자들을 용서하며, 공의롭지 못한 지도자들을 용서할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