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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정치 혹은 현대의 순교/김익균
1. 미적 자율성 너머
해를 넘겨 가며 문단에서 진행된 ‘시와 정치’ 논쟁이 항간에 이색적인 흥미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나 보다. 얼마 전 모 신문의 <유레카>라는 코너에는 <시와 정치>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시인에게 정치를 고민하게 한 것은 누구인가. 문학에 정치를 돌려준 그의 이마에 입이라도 맞춰야 하나.”라는 기자의 결론은 ‘시와 정치’ 논쟁을 다루는 기사의 골계적인 태도를 보여준다.
한편, 1년 여 동안 이어져온 논쟁에 대해 박현수는 ‘랑시에르라는 프랑스제 담론’에 기댄 요즈음의 ‘시와 정치’ 담론은 ‘미적 자율성에 갇혀 있는 공론에 불과하다’고 단언한다. 그러고는 “우리 시의 왜소함은 기표의 차원에 언어를 가두려는 욕심에서, 덜 된 깨달음을 시로 끌어들이려는 유치함에서, 사물의 평면성에 대한 집착에서 생긴다. 우리 시가 큰 시로 태어나려면 숙성된 사유가 탁월한 형상을 통해 새롭게 태어날 수 있도록 시인들이 거듭나야 할 것이다.”라고 대안을 내놓는다. 시와 정치 논쟁이 ‘그’의 덕이라는 듯한 항간의 풍자가 누구를 찌르는 건지 양의적으로 읽힐 수 있는 지점이다. 박현수가 “지금 시점에서 그게 가능할지 모르겠지만”이라는 단서를 단 것은 꽤나 아프게 느껴진다.
“문학과 정치의 문제는 우리가 미적 자율성이라는 패러다임에 갇혀 있는 한 정해진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는 박현수의 ‘예언’과 비슷한 시기에 나온 신형철의 글은 맞세워 이해할 만하다. 신형철이 제기한 “불가능한 가능성”에서 “가능한 불가능성”으로 전환하자는 ‘결론’은 미적 자율성이라는 굴레가 담론상의 쇠우리로서 얼마나 강력한지를 실감하게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에서 “‘직접적으로 정치적이기를’ 원”하는 “시인의 욕망”에 주목하자고 말하는 신형철은 시와 정치를 통합적으로 사유하는 큰 시인을 요청하는 박현수와 멀리 있지 않을 것이다.
이때 “‘직접적으로 정치적이기를’ 원”하는 시인 진은영이 김수영을 호명하는 현상은 우리 시의 담론적 관례에 비추어 볼 때 낯설지 않다. 하지만 “김수영은 미학적 자율성을 지닌 문학을 전위문학으로 여겼다”는 언명은 김수영의 정치성을 충분히 드러내지 못하는 것 같다. 정치의 문제를 환기하는 김수영이 의미심장한 지점은 4.19 혁명 경험을 통해 현대시에 대한 인식을 쇄신해 가는 과정에 있을 것이다. (김수영의 시적 변모 과정 역시 4.19 경험과 밀접하게 연동하고 있다는 점과 혁명의 경험을 적극 수용하게 한 예비적 자기 변모가 56년경에 있었다는 점은 이형권의 「김수영의 시적 자의식 문제」,「김수영 시의 변모 과정」(『한국시의 현대성과 탈식민성』, 푸른사상, 2009 ) 등 참조.) 해방 이후 맥클리시, 블랙머, 앨런 테이트 등의 신비평가들의 글을 번역하며 심미적 인식으로서의 시를 통해 남한 사회의 후진성을 극복하고자 했던 김수영은 4.19 혁명 경험 이후 신비평과 거리를 두면서 정치성과 심미성의 결합에 대한 고민을 시작하지 않던가. 1961년에 김수영은 이렇게 말한다.
“현대시는 이제 그 <새로움의 모색>에 있어서 역사적인 經間을 고려에 넣지 않으면 아니 될 필연적 단계에 이르렀다. (…)역사적 지주는 이제 개인의 신념이 아니라 인류의 신념을, 관조가 아니라 실천하는 단계를 밟아 올라가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실천은 윤리적인 것 이상의, 作品의 image에까지 강력한 영향을 끼치는, 보다 더 근원적인 것으로 되어 있다. 현대의 순교가 여기서 탄생한다. 죽어가는 자기를 바라볼 수 있는 자기가 아니라, 죽어가는 자기-그 죽음의 실천-이것이 현대의 순교다. 여기에서는 image는 바라볼 것이 아니라, 자기가 바로 image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것은 image의 순교이기도 하다.(…)현대의 의식의 위기를 극복하는 길은 어디까지나 common sense와 normality이기 때문이다. /이 시인들의 새로움들은 새로움 없는 시인들을 지나서/ 역시 새로움의 힘으로 날으고 있다./”
김수영에게서 “실천은 윤리적인 것 이상의, 作品의 image에까지 강력한 영향을 끼치는, 보다 더 근원적인 것”이며, 자기를 비워내고 인류의 ‘공통감각’을 자기 안에 받아들임으로서 인류의 새로움을 낳는 시인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김수영의 실천은 미적 자율성에- 그것이 ‘불가능한 가능성’이든 ‘가능한 불가능성’이든- 갇혀 있지 않다. 김수영이 당대의 ‘포즈’나 ‘획일주의’에 문제제기를 하며 미국 비트세대의 동향에 관심을 보인 것은 이 점에서 시사적이다. 김수영은 비트의 “태도”를 ‘멋을 부리지 않는 멋’이라고 말한다. “현대성과 의식과 겸손이 동의어가 된다는 것을 모르는 시인들이 현대시를 쓴다고 으스대고 있다.”(「멋」)는 김수영의 말은 자기를 비우고 인류의 공통감각을 낳는 실천이라는 문제의식이 비트세대의 미학적 실천을 의식한 것임을 상기하게 한다.
“죽어가는 자기를 바라볼 수 있는 자기가 아니라, 죽어가는 자기-그 죽음의 실천-
이것이 현대의 순교다. 여기에서는 image는 바라볼 것이 아니라, 자기가 바로
image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것은 image의 순교이기도 하다.”는
김수영의 문제의식이야말로 미적 자율성 너머 “숙성된 사유와 탁월한 형상”을
가능하게 하는 초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김봉식, 황성규, 서효인의 신작시를 읽으며 비슷 비슷한 현대 도시의 일상 속에서 “죽어가는 자기”를 실천하고 넘어 가려는 건강한 모색에 입을 맞춘다.
2. 울음을 통과한 시인의 창세기
김봉식의 시는 침상에서 혹은 병상에서 씌어지는 내성적인 인식을 드러낸다.
「식물인간」은 병상에 누워 있는 사람을 ‘동물’인간에서 식물인간으로 진화하는 과정으로 인식한다. 도시라는 사냥터의 숫사자로 살아온 자신의 삶은 도끼로 제 발목을 찍는 일이었다는 옆 침상 대머리 사내의 회한이 발화되는 2연을 중심으로, 1연과 3연의 시적 화자는 그런 삶의 귀결로 병상에 누운 자신을 “발목 없는 완전한 고등생물로 진화”하고 있는 식물인간이라고 말한다.
병상에 누운 내성적 인간이 도시의 건강한 삶과 거리를 두는 자기 이해를 진화라고 우기게 하는, 그것은 존재 변이에 대한 욕망일 것이다. 우리를 “폐활량”의 극한까지 몰아붙이고 있는 이 도시의 일상에 대해 사유하기 위해 시적 화자는 깊이 앓아야 했다.
침상에서도 시적 화자는 내성적 상태에 빠진다. “모로 누워 잠든 아내”(「아내의 창세기」)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아내의 “마른 갈비뼈”를 더듬으며 성경의 비유를 떠올린다. “내 갈비뼈 하나를 뜯어 그녀에게 주었을 때” 그녀는 내 아내가 되어 준다는 시적 화자의 소박한 성경 해석은 신의 역할을 지우고 자신의 증여를 사유한다. 갈빗대 하나를 받은 아내가 능동적으로 열어가는 창세기 속에서 ‘나’의 역할은 수동적으로 물러나 있다. 이제는 아내의 증여를 받는 시적 화자가 열어야 할 창세기가 남겨져 있는 것이다.
「식물인간」과「아내의 창세기」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사유의 결은 이처럼 병실에서 혹은 침상에서, 즉 고유하게 물러선 자리에서 나오는 듯하다. 그곳에서 시적 화자는 무엇을 하는가? 진정한 개입을 위해서 자기를 찾는 일 혹은 진화를 준비하고 있는 것일까?
이처럼 평범해 보이는 시에서 진솔한 감동이 느껴지는 것은, 개성적인 시들이 흔히 텍스트 내부에 머물러 있는 것과 달리 이 시가 미학적 자율성 너머를 실천하기 때문이다. 개인의 신념 너머 인류의 신념에 닿는 실천으로서 「아내의 창세기」의 담담한 결구는 곱씹어진다. “변두리 갈비집이라도 찾으리라/거기 가서 돼지갈비라도 뜯으면서/경전 속 비유의 갈비뼈를/곰곰이 되씹어 보리라”
이 두 편의 시적 사유를 「곡비哭婢」(전문)에서는 곡진한 노래로 들을 수 있다.
당신의 눈동자가 반짝, 빛날 때 먼 행성을 건너오는 울음소리를 듣는다
그대라는 지척의 당신이 잠시 내뱉었다 삼킨 곡哭이 수수만년 지나
내게로 오는 사이, 당신은 아주 캄캄해지고 나는 잠시 반짝인다
곡비는 본래 내 울음을 대신 울어 주는 사람이다. 「곡비」는 ‘나’ 대신 반짝이며 울음 우는 것에 대해 운다. 그러한 당신과 나 사이의 ‘대신하는 관계’에 의해 잠시 나는 반짝이고 당신은 캄캄해진다. 시인은 이러한 관계를 울고 있다. 이러한 관계의 울음 속으로 침잠함으로서 새로운 ‘나’가 탄생할 수 있다는 듯이.
3. 이 거리의 보고서
김봉식의 시가 침상에서, 병실에서 쓰여졌다면 황성규의 시는 거리를 헤매며 쓰여졌다.
황성규의 「집으로 가는 길」에는 “카뮈의 태양”이 인유적으로 뜨고 있지만, 실존적 사건의 가능성은 봉쇄된다. 시적 화자는 “문이 잠긴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생각나지 않”아 “메마른” 거리를 “무거운 바람”처럼 걷고 있다. 이 골목에서는 누구도 ‘나’를 불러주지 않는다. “누구를 위한 가로등 하나 없는 새까만 어둠 속”에서 시적 화자는 “쥐 잡는 법을 잊어버린 고양이처럼 서럽게 웃는다”고 말한다.
이 거리는 나를 알아봐 주는 사람도 없고, 누구를 위해 가로등을 켜 주지도 않는 어둠 그자체로 묘사된다. 시적 화자의 헤매임에 대한 건조한 진술들은 시의 전반을 지배한다. 이 시에서 주정적 목소리를 찾는다면 그것은 “서럽게 웃었다”라는 표현일 것이다. 서러운 웃음은 유일하게 이 거리의 문법으로부터 벗어나는 주체의 것이다. 이 거리에 대한 객관적 진술을 지탱하는 힘은 마지막 행의 웃음에서 나오는지도 모른다.
「집으로 가는 길」이 거리의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웃는 시인의 이빨을 언뜻 보여준다면, 「눈사람」은 좀 더 격정적인 목소리를 들려준다. 「눈사람」은 이 거리의 “환호와 비명”을 기록한다. 거리를 서성이는 건 이제 ‘나’가 아니라 “이름 모를 사람들”이다. 이들은 하나의 태양과 대비되는 대중/다중을 이룬다. 무엇이 이들을 태양 앞으로, 거리로 내모는가는 묻지 않는다. 이들의 환호와 비명을 정직하게 기록하는 일이 가능한가? “불 타 죽은 검은 구름에겐 사망신고서가/끝내 허락되지 않”듯이 기록에서 배제되는 죽음이 있다. “통계와 확률은 마른 침묵”으로 일관한다. 어쩌면 객관성을 가장하는 통계와 확률은 ‘마른 침’을 삼키며 긴장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비명의 날카로운 얼굴을 줄곧 짓이”기고 “그 자리엔 파랑 노랑 색꽃들을 이식”한다. 결국 거리에는 “박수가 터져 나오고 신나는 음악이 울리고/사람들의 붉은 입술이 끈적하게 들러붙”어 비명을 잊는다.
이러한 흥청거리는 거리의 모습에서 증발해 사라지는 눈사람을 볼 수 있는 시적 화자는 파국을 보는 카산드라처럼 비애를 느끼게 한다.
거리의 끓는점의 기록에서 시작한 시는 종국에는 녹는점이라는 새로운 사태의 예언으로 끝난다. 다가올 녹는점의 시대, 검은 구름은 눈사람이 되어 “사망신고서”조차 요구하지 않는 불길한 시대 앞에 ‘나’는 선다.
“누구를 위한 가로등 하나 없는 새까만 어둠”인 거리, 비명을 짓이기고 환호를 옮겨 심는 거리는 이제 배회자가 아니라 생활의 달인으로 채워진다. 생활의 달인을 요구하는 거리는 ‘생활의 실패’를 의미화하는 데 실패하는 세계다. 따라서 “멈추지 말고 가라”에서 시작해 “생명보험에 가입하라”로 끝나는 「생활의 달인」이 거주하는 세계는 군대를 연상시키는바, 이러한 연상이 그런 듯 하기 위해서는 도시의 게릴라, 일인 군대여야 할 것이다.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이 당신의 등에 꽂히기도 한다/분노하지 말라 치명상이 아니라면 지혈이 우선이다.”라는 조언은 당신이 어떤 아군(공동체)도 없는 혼자만의 전쟁에 참여하고 있다고 전제하기 때문이다.
황성규의 시가 이토록 건조하게 그리는 세계는 사회계약에 의한 사회상태를 이루기 이전, 홉스가 가정하는 자연상태의 세계일 것이다. 하지만 자연상태는 실재했던가? 그것 역시 홉스의 은유에 불과하지 않았던가?
이 불길한 은유의 복귀를 보며 나는 “쥐 잡는 법을 잊어버린 고양이처럼 서럽게 웃”게 된다.
4. 들끓는 마음들
황성규의 시가 비명이 억눌려지는 거리를 불길하게 주시한다면 그리고 김봉식의 시가 울음의 눈으로 도시와 일상의 어둠을 곱씹어보고 있다면, 서효인의 시는 “들끓는 마음”의 역동성을 통해 예속하는 관계들을 변용시키고 있다.
“뜨거운 다짐들”이 폭발하는 괴물을 호명하는「마그마」가 흥미로운 점은 세계의 빈곤과 폭력, 재해 등이 언표되는 ‘형식’을 시적으로 변용하는 데 있다.
「마그마」는 세계의 비참을 제3세계의 독특성으로 환원시키는 매스미디어의 이미지들을 모방한다. 개개의 이미지들은 규율 권력이 우리에게 내면화시키는 “다짐들”과 짝을 이룬다. 우리에게 작동하고 있는 이러한 규율권력은 그들의 비참에 우리가 관계하고 있다는 것을 보기 어렵게 한다. 즉 “진흙 쿠키를 먹는 흑인 아이를 보면서 밥을 굶지 말자, 진흙 같은 마음을 구웠다”는 방식으로 우리 일상의 도덕이 구성될 때, “휴지를” 아끼자거나 꼭꼭 씹어먹고 양치질을 하자 등의 이어지는 자기 다짐들은 자동화되어 세계의 비참과 우리가 맺고 있는 관계를 인식하는 것을 미루게 만든다. 이 시는 인식을 가리는 사회적 가상들 밑에 “마그마”가 들끓고 있고 그것이 폭발할 때 “괴물”이 등장한다고 말하는 듯하다. 이러한 자각은 황성규의 「눈사람」과도 연동한다. 하지만 두 사람이 사뭇 다른 발성을 보여준다는 것은 분명하다. 「눈사람」은 8개의 연이 각각 2행씩 걸쳐지면서 꾹꾹 눌러밟으며 한 걸음씩 녹는점을 향해 나아가는 형식이라면 「마그마」는 한 연으로 길게 이어붙여서 노래하듯이 달음질치고 있다. 그것은 아이들이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로 시작하는 노래를 부를 때처럼 연상되는 것들을 자연스레 이어붙이는 발랄한 발성일 것이다. 그들이 보여주는 이미지와 내면화시키는 규율을 따라하되 그것을 받아치면서 발생하는 어긋남들이 어느 순간 “들끓는 마음”의 괴물로 현현하는 것이다. 이러한 발성은 「탁구장」의 주제와 어우러진다.
먼저 「탁구장」(전문)을 보자.
내게 무엇을 받을 것인가 바라지 말고, 무엇을 줄 것인가에 대해, 공격과 수비에 대해, 낮과 밤에 대해, 파리와 나비에 대해 생각해봐 사각형의 세계에서는 늘, 받은 만큼 돌려준다 독재자의 눈빛을 번득인다 속임수를 쓴다 모든 지나감을 아까워한다 쉽게 탄식한다 공을 주우러 가는 사내들, 화가 난 양처럼 허리를 숙이고 무릎을 굽히며 생각한다 주고받음의 문제에 대해, 작은 공에서 일어나는 회전에 대해, 사이좋게 나눠 갖는 서브의 권리에 대해 종교인처럼 말이 많다 저 너머의 세계로 당신의 공을 떨어뜨릴 수 있겠는지 생각해봐 네트마다 그려진 빨간 해골과 친절한 아침밥에 대해, 협박과 편지에 대해, 망루와 난방에 대해, 녹색의 세계는 반드시, 돌려준다.
탁구공의 무게가 상기시키는 가벼움은 “받은 만큼 돌려” 주는 세계의 무거움과 대비되면서 신선한 인상을 준다. 이 시의 발랄한 형식은 “협박”의 내용을 구성한다. 결국 “녹색의 세계는 반드시, 돌려준다”고 할 때 탁구대 이편과 저편은 ‘함께’ 필연의 세계에 진입한다. 이러한 필연의 세계는 우리가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는 닫힌 세계와는 반대편에 놓인다. 저편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지 결정되고,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저편이 무엇을 할 것인지가 결정되는 인과적인 관계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오, 나의 탐구생활」은 “우리”와 우리를 훈육하는 익명의 목소리로 이루어진다. 익명의 목소리는 “너희에겐 더 이상 탐구할 생활이 없단다”라고 선언한다. 그 목소리는 “우리”를 탐구할 것이 없는 정해져 있는 존재로서 규정하는바 그러한 훈육의 폭력성이 “압정은 충분하다”는 적실한 표현을 얻고 있다. 이러한 압정을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무한히 탐구할 것이 많다고 노래하자고 하는 것이다.
이처럼 서효인의 시는 개인적 체험으로서가 아니라 무수한 타인이 자기와 경험을 같이하는 일들에 대해 자신의 해석을 내리기를 피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직접적으로 정치적이기를’ 원”하는 시인의 욕망을 드러낸다. 그것은 ‘나’가 아닌 “우리”가 함께 발견할 “끝없는 혼선의 말”일 것이다.
우리는 엄살을 부려봅니다. 우리는 소리 지를 수 있어요. 우리는 춤출 수 있어요. 우리는 바둑이처럼 길 한가운데서 사랑을 나누고 싶어요. 뜨거운 방학에는 서로를 탐구하고 싶어져요. 오, 그대여 가지 마세요. 끝없는 혼선의 말을 함께 잡아채요. 메가헤르츠, 메가헤르츠
「오, 나의 탐구생활」(부분)
-김익균/문학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