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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소를 보았다(見牛)
강변 수양버들의 푸르름 속에서 나는 꾀꼬리 우는 소리를 듣는다. 여기에 소가 숨어 있을 리 없다! 어떤 화가가 그 묵직한 머리며, 늠름한 뿔을 그린단 말인가?
주해 : 그 소리를 들을 때 사람들은 그 근원을 느낄 수 있다. 육감에 몰입하자마자 이미 문제 들어섰다. 어디로 들어가더라도 사람들은 소의 머리를 본다! 이 일치는 물속의 소금과 같고 물감 속의 색체와 같다. 어떤 미미한 것이라도 자기와 분리된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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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소를 잡았다(得牛)
격렬한 추격 끝에 간신히 소를 잡았다. 그의 굳센 의지와 힘은 무진장하다. 구름바다 저 멀리 높은 고원으로 돌진하여 도저히 서 있을 수 없는 가파른 골짜기 위에 그는 서 있다.
주해 : 그는 숲에서 오랫동안 살았지만, 나는 오늘에야 소를 잡았다! 풍경에 홀린 것이 그의 방향을 방해한 것이다. 그는 맛 좋은 풀만을 찾아 헤맸던 것이다. 그의 마음은 아직도 고집이 세고 제멋대로이지만, 나를 따르려 하지 않는다면 채찍을 휘두르지 않을 수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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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그 자신의 그림을 그리는 유일한 동물이다. 그 어떤 동물도 그렇게 하지 못한다. 사람은 그 자신을 그릴 뿐만 아니라 그는 거울 앞에 서서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본다. 그리고 반사된 영상 속에서 그 영상을 보고 있는 자신을 보는 그런 일을 끊임없이 거듭한다. 그대는 그것을 알고나 있는가?
이 때문에 자기의식이 일어난다. 에고가 탄생한다. 이것으로 인해 실재보다 반사된 영상에 더 흥미를 느끼게 된다. 그대의 마음을 주시하여 보라. 그대는 실재의 여자보다 외설적인 사진에 더 흥미를 가지고 있다. 사진이 인간의 마음을 교묘히 사로잡고 있다. 이렇게 사람은 허구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를 알면 거짓은 사라진다. 자기 인식은 허구 속에서는 불가능하다. 그대는 거짓보다는 진실에 좀더 흥미를 가져야 한다. 거울은 개어져야 한다. 그대는 집으로 돌아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더욱더 그대 자신과 멀어질 것이다.
영상, 허구, 꿈, 생각, 이미지 같은 것들에 흥미를 갖는 이러한 관심이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을 알 수 없게 하는 근본 원인인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게 관심을 쏟기보다는 다른 사람이 그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가에만 관심을 가진다. 그것 또한 거울이다. 그대는 자신이 누구인가 하는 것에 관해서는 전혀 찾아보지도 않고, 다른 사람들이 그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관해서만 끊임없이 귀를 기울인다. 이리하여 그대는 그대 자신을 장식하는데 열을 올리게 된다. 그대의 도덕과 그대의 선행은 다른 사람들의 눈에 그대가 아름답고 착하고 정직하고 종교적인 사람으로 보이기 위한 장식물에 불과하다. 그러나 여기에는 커다란 손실이 뒤따른다.
그대가 사람들에게 종교적으로 보인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그대가 종교적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그대를 행복하다고 생각하더라도 그것으로 그대가 행복해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한번 이 덫에 걸리게 되면 그대는 모든 삶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 행복하다고 생각되는 것보다는 행복에 주의를 기울이라. 아름답다고 생각되는 것보다는 아름다움에 주의를 기울이라. 왜냐하면 사념은 그대의 갈증을 풀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념은 그대의 굶주림을 해소시켜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이 그대가 잘 먹고 산다고 생각하든 못 먹고 산다고 생각하든 이런 것은 별문제가 아니다. 그대는 그대의 몸을 속일 수는 없다. 진짜 음식이 필요한데 그림의 떡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진짜 물이 필요한데 물에 대한 그림이나 화학방정식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H2O는 그대의 갈증을 풀어줄 수 없다.
그대가 일단 이것을 이해하게 된다면 소를 찾아 떠나게 될 것이다.
그대 자신을 주시하라. 그대는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현실이 아닌 허구에 사로잡힐 것이다. 거울 속의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일은 없다. 거울속의 얼굴은 그대의 모습이 아니다. 그것은 다만 그대의 표면일 뿐이다. 어떤 거울도 그대의 중심을 비춰줄 수는 없다. 그 둘레는 그대가 아니다. 둘레는 매순간마다 변화하고 있다. 그것은 변화무쌍한 것이다.
그대는 왜 그런 형상에 사로잡혀 있는가? 왜 진실에 눈뜨지 않는가? 그 자신을 찾는 사람, 자신을 아는데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사람들의 거울은 모두 깨어져 버리게 된다. 그는 함부로 웃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웃음으로 인해 사람들이 그를 좋은 사람이라고 단정지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는 그가 웃고 싶을 때에만 웃는다. 그의 웃음에는 꾸밈이 없다. 그는 사람들이나 구경꾼에게 잘 보이려고 웃음을 짓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들의 웃음을 꾸민 것이다. 그는 그의 삶을 산다. 그는 언제나 나는 이런 사람이라고 자신을 내세우려 하지 않는다.
기억하라. 다른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애쓰는 사람들의 내부는 공허한 쓰레기로 꽉 차 있다. 그들에게는 무엇 하나 진실된 것이 없다. 그들의 내부는 강한 욕망으로 들끓고 있다. 그대가 행복한 사람이라면 그대는 행복할 뿐이지 다른 사람들에게 행복해 보이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그대를 어떤 눈으로 보든 그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대는 다른 사람의 의견을 수집하러 뛰어다니지 않을 것이다. 그대가 가지고 있는 스스로라고 생각되는 그대의 동일성이 무엇이든 그것을 분석하여 보라. 그러면 수많은 사람들의 그대에 관한 여러 가지 의견을 보게 될 것이며, 그것들을 수집해 왔음을 알게 될 것이다. 어머니의 의견, 아버지의 말씀, 형제, 친구, 나아가서는 사회가 말한 것들… 그대는 이런 것들을 모두 수집해 왔던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이런 것들은 수많은 사람들, 수많은 거울들에 의해 말해지고 비춰진 것인 까닭에 모순된 것들이다.
그대의 동일성은 자기모순적이다. 그대는 이것을 자아라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자아는 그대가 모순 속에 빠져 있을 때에만 있음직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대는 그 모순 속에 빠져 보아야 하다.
이해의 첫걸음은 그대의 자아가 이미 그대 안에서 그대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대는 다른 사람의 눈으로 그대 자신의 내부를 보려고 하는가? 거울을 믿지 말라. 그대 자신의 눈으로 보라.
나는 우스운 이야기를 하나 들었다.
어떤 늙은 목사가 한 정치가에게 비오는 날은 머리를 하늘로 향하는 것이 좋다고 충고하였다. “그렇게 하면 어떤 계시를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다음날 정치가가 늙은 목사를 찾아왔다. “저는 당신의 말씀대로 머리를 하늘로 향하고 비를 흠뻑 맞았습니다. 그런데 저는 어찌 된 일인지 바보가 된 느낌이 들었습니다.” 늙은 목사가 대답했다. “아, 그래요? 당신은 처음치고는 매우 훌륭한 계시를 받았군요.”
그대의 어리석음을 이해할 수 있다면, 그것이 커다란 계시인 것이다. 그렇다. 왜냐하면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 찾는 여행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다른 사람 눈에 비치는 자신의 인상에 관심을 쏟고 자신이 거울을 통해 어떻게 반사되는가에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은 바보이다. 왜냐하면 그는 굉장한 경험을 할 수 있는 귀중한 기회를 낭비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바보처럼 보이는 것이 두렵기 때문에 소를 찾아 한 발자국도 옮겨 보지 못하는 것이다. 어리석어 보이는 것에 대해 두려움을 갖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영원한 바보가 될 것이다.
가까운 어느 날 아니면 먼 훗날 그대는 자신이 지금까지 깊은 어리석음 속에서 살아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대가 계속하여 이 방법으로—거울과 반사된 영상 그리고 의견들을 통해서—살아간다면 점점 그대의 개성은 사라질 것이다. 그대는 집단의 부분이 될 것이다. 그대는 영혼을 잃게 될 것이다. 그때는 이미 그대는 진정한 개인일 수 없을 것이다.
mass란 말은 라틴어의 massa에서 왔다. massa란 주형(鑄型)되고 반죽되어 만들어질 수 있는 어떤 것을 말한다. 따라서 어느 집단에 속해 있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 의하여 그대가 끊임없이 주형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대는 그렇게 되는 것을 허락한다. 게다가 거기에 협력까지 한다. 그대는 모든 수단을 다하여 집단의 일부가 되고 싶어한다. 왜냐하면 혼자 있게 되면 그대의 동일성을 잃어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그대의 모든 동일성은 집단을 통하여 이루어지고 있다.
바로 이것이 사람들이 은퇴하였을 때 빨리 죽는 이유이다. 정신분석학자들에 의하면 그런 사람들은 적어도 십년 정도의 수명은 감소한다는 것이다. 정치가들은 권력을 잡았을 때에는 매우 건강하다. 그러나 일단 그들이 권력의 자리에서 물러나면 그들은 건강을 잃어버리고 곧 죽는다. 권력을 잃게 되면 그들의 동일성 전체가 꿈처럼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일단 정권을 놓게 되면 돌연 그대는 그 누구도 아닌 존재가 되어버린다. 그렇지만 그대는 전 생애를 통하여 그 누구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대는 자신이 만들어 놓은 허구를 계속 믿고 있는 것이다.
고위 관리들은 자신이 위대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일단 그 자리가 무너져 버리면 모든 위대함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다. 부자들은 그가 쌓아 놓은 물질을 통하여 자신을 부자로 생각한다. 그러나 갑자기 파산을 당하게 되면, 그의 재산뿐만 아니라 그의 영혼까지도 사라져 버린다. 따라서 그가 가지고 있던 모든 동일성도 함께 사라진다. 그것은 종이로 만든 배였다. 트럼프로 쌓은 집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솔솔 부는 산들바람에도 모든 것이 다 무너져 버린다.
자기를 안다는 것은 이것 한 가지를 알게 되었다는 뜻이다. 즉 남을 통해서가 아니라 직접 그대 자신을 통해서 그대 자신을 알아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아무에게도 질문할 필요가 없다. “나는 누구인가?”하고 남에게 묻다니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어떻게 다른 사람이 이 질문에 대답해 줄 수 있겠는가? 그대의 내부로 들어가라. 그것이 소를 찾는 길이다. 그대 자신의 에너지 속으로 들어가라. 거기에 소가 있다. 그저 음미하라. 소와 함께 침잠하라.
그대가 일단 자신의 내면 속에서 전적으로 그대 홀로 그대의 동일성을 찾아야만 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면 그대는 집단으로부터, 군중으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이다. 개성이 탄생할 것이다. 그대는 독특한 개인이 될 것이다. 기억하라. 내가 개인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이기주의자라는 뜻이 아니다. 이기주의자란 언제나 집단의 부분이 된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에고란 그대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주워 모은 그대에 대한 모든 의견들의 총집합을 말한다. 그러므로 에고란 항상 모순되어 있는 것이다. 에고는 그대가 추하다고 말하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매우 아름답고 사랑스럽다고 말하기도 한다. 에고는 어떤 때에는 그대에게 바보라고 말하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현명한 사람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수많은 상황 속에서 수많은 것들이 그대에 관해 말해져 왔으며, 그리고 그대는 그것들을 모두 수집해 왔기 때문이다.
에고는 언제나 골칫거리이다. 그것은 거짓된 존재이다. 그것은 마치 존재하는 것같이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대가 개인이 되었을 때…개인이라는 말은 좋은 말로서 <나누어질 수 없다>는 뜻이다. 어떤 심한 흔들림이 있어도 둘 또는 그 이상으로 분열될 수 없다는 뜻이다. 이제 그대에게는 어떤 분열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때만이 그대는 개인인 것이다. 에고는 아무런 힘도 가지고 있지 않다. 에고는 무너진 장벽일 뿐이다. 사람들이 나에게 찾아오면 나는 묻는다. “그대는 행복한가?” 그러면 그들은 어깨를 으쓱해 보인다. “그대는 불행한가?”라고 물어 보아도 또한 그들은 어깨를 으쓱해 보인다. 그들은 그들 내부에 있는 마음의 상태에 대해 뚜렷한 태도를 보이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내부는 분열된 마음들로 들끓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든 질문에 예와 아니오를 함께 사용하고 싶어한다.
나는 정신분열증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어떤 정치 지도자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정신 분열의 초기 증세로 병원에 입원하고 있었다. 그는 평범한 일에도 매우 우유부단하게 되었다. 그는 화장실에 갈까, 말까? 이것을 먹을까, 저것을 먹을까? 옷을 입을까, 벗을까? 이런 하찮은 일들에도 쩔쩔매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어떤 일을 결정하게 되면 어찌할 바를 모르며 마음을 졸였다. 6개월 동안 그는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어느 날 의사들이 그에게 와넌히 나았다고 말했다. “당신은 이제 정상입니다. 퇴원해도 좋습니다.” 그러나 그의 대답은 <예>와 <아니오> 둘 모두였다.
에고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것은 하나일 수가 없다. 왜냐하면 에고는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수집된 것이기 때문에 하나일 수가 없다. 그대는 하나이다. 그러나 에고는 무수하다. 만약 그대가 그대를 에고라고 생각한다면 그대는 이미 미친 길로 접어들고 있는 것이다. 일단 그대가 이것을 이해한다면 소 발자국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예전에 나는 친구와 함께 인도 전역을 여행한 적이 있다. 그는 언제나 카메라를 들고 있었다. 히말라야에서도 그 친구는 그곳에 대해서는 조금도 흥미가 없었으며 오직 사진기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보름달이 뜬 어느 날 밤 우리는 타지마할 궁전을 구경하고 있었다. 거기에서도 그는 사진만 찍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무엇을 하고 있어? 여기가 타지마할이야. 구경은 하지 않고 그저 사진에만 미쳐 있구나.” 그 친구가 대답하였다. “걱정 마! 나중에 나는 내가 여행하면서 구경한 것 모두를 아름다운 앨범으로 만들 거야. 그러면 집에 편안히 앉아서 히말라야며 타지마할을 구경할 수 있거든.”
이런 사람을 카메라광이라고 한다. 실재보다도 사진에 더욱 관심을 쏟는다. 현실에 더욱 주의를 기울이라. 그대의 마음이 현실로부터 사진, 허구, 꿈으로 이끌려 갈 때마다 주의하여 현실의 순간으로 돌아오라.
뿌나의 한 병원에서 일하고 있던 어떤 의사가 나를 자주 찾아오곤 했다. 내가 이야기하는 동안 그는 공책을 들고 끊임없이 필기를 하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말하였다. “내가 이야기할 때에는 그것을 이해하도록 하라.” 그는 “필기를 해 놓으면 참 좋습니다. 그러면 나중에 집에서 편하게 앉아 이해할 수 있으니까요.”라고 말했다.
이제 그는 내가 말하는 것을 절대로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해는 기록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글을 쓰기에 바빠 나를 한 번도 쳐다볼 수 없었다. 나는 그가 기록하는 일도 잘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가 기록하고 있는 동안 나는 다른 것을 말했을 것이고 그래서 그는 내 말을 허겁지겁 쫓아다니기에 바빴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토막토막 잘려진 이야기들을 한데 묶으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모아진 이야기는 그의 이야기일 뿐이지 내가 말할 것은 아닌 것이다.
그대는 현실 속에서 나와 함께 전체적으로 여기에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때 새로운 이해가 떠오른다. 그리고 그것이 그대의 삶의 길이 되어야 한다. 끊임없이 진실을 추구하라. 진실과 함께 있으라. 방관자가 되지 말라. 사진 같은 것을 너무 좋아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점점 그대는 현실에서 깨어나는 능력을 잃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마음은 오래 되고 깊은 습관에 젖어 있어서 처음에는 끊임없이 노력을 하여야 할 것이다. 마음은 세일즈맨과 같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아동용 백과사전을 손에 든 세일즈맨이 문간에서 다섯 살 된 어린애를 안고 있는 젊은 부인에게 한 권 팔아 보려고 재빠른 어조로 설명하고 있었다. “이 책은 어린이가 물어 보는 어떤 질문에도 척척 대답해 줄 수 있습니다.” 그는 어린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자신있게 말하였다. “자, 꼬마야, 아저씨에게 무엇이든지 물어 보아라. 그러면 아저씨가 이 책을 보고 척척 대답해 줄 테니까.” 아이는 잠시 생각하다가 질문을 하였다. “하느님은 어떤 차를 타고 다녀요?”
삶도 이와 같다. 그리고 마음은 세일즈맨이나 브리타니카 백과사전과 같다. 마음은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들의 목록을 만들어 경험을 계속 분류하고 저장한다. 그리하여 미래의 어떤 순간에도 그것을 사용할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삶은 너무 싱싱하여 같은 질문을 되풀이하지 않는다. 만약 그대가 마음에 지나치게 의존한다면 결코 그대의 대답과 삶은 나란히 손잡고 만날 수 없을 것이다. 삶은 매 순간 변화하고 있다. 그것은 “하느님은 어떤 차를 타고 다녀요?”하고 묻는 어린아이의 질문과 같은 것이다.
그대 역시 이에 대해 어떤 답을 찾아 적당히 말해 볼 수 있다. 롤즈로이스, 그렇지 않으면 다른 어떤 차… 그러나 어린아이는 같은 질문을 되풀이하여 묻지 않을 것이다. 다음 순간 그는 또 다른 질문을 할 것이다. 어린아이의 호기심에는 어떤 백과사전도 당해내지 못한다. 그리고 삶이란 언제나 새로워서 어떤 책으로도 참된 상황을 대답하여 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식을 쌓으려 하기보다는 깨어 있으라. 만약 그대가 지식이 풍부한 사람이 된다면 그림이나 기억만을 모을 것이다. 또한 그대는 계속 기록만 할 것이다. 그리고 그 기록들을 비교하여 볼 것이다. 그대에게 아름다운 장미꽃 한 송이를 가져온다면 그대는 과거에 보았던 다른 장미꽃과 비교하여 볼 것이다. 혹은 그대가 미래에 보고자 하는 수많은 장미꽃들과 비교해 볼 것이다. 그러나 그대는 결코 여기에 있는 장미꽃은 보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있는 장미꽃만이 진실인 것이다! 그대의 기억 속에 축적되어진 장미꽃은 진실이 아니다. 그대가 꿈꾸고 있는 장미꽃도 또한 진실이 아니다. 오직 지금 여기에 있는 이 장미꽃만이 진실인 것이다.
이것을 기억하라. 지금 그리고 여기에서.
만약 그대가 그대의 에너지로 하여금 마음으로부터 깨달음을 향하도록 한다면 소 발자국이 무엇이었던가를 곧 느끼게 될 것이다.
보통 그대는 군중을 따를 것이다. 그것은 편리하다. 그리고 편안하다. 그것은 진정제를 먹는 것과 같다. 군중과 함께 있으면 그대의 걱정거리는 사라진다. 그대는 책임을 군중에게 미룰 수 있다. 그대는 모든 문제를 전문가들에게 맡길 수 있다. 그리고 그대는 오랜 전통과 낡은 지혜에 의지할 수 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같은 일을 하고 있을 때, 그대 자신의 방법을 따르는 것보다 다른 사람들을 모방하는 것이 훨씬 쉽다. 왜냐하면 일단 자기 자신의 길을 가려고 하면 의심이 떠올라 자신이 옳았는지 틀렸는지를 모르게 되기 때문이다. 큰 집단에서 수많은 군중 속에 섞여 어떤 일을 하게 되면 그대는 그것의 부분이 된다. 그대가 옳은가 틀린가에 대한 질문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마음은 계속 그대에게 지껄인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틀릴 리 없다. 그들은 틀림없이 옳을 것이다. 그들은 여러 세기 동안 같은 길을 걸어왔다. 거기에는 무엇인가 진리가 있음에 틀림없다. 만약 의심을 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여러 세기 동안 군중은 한 가지 일을 꾸준히 하여 왔다. 사람들은 서로서로를 모방하며 따른다. 그러나 일단 다른 사람을 모방하게 되면 그대 자신이 누구인지 전혀 알 수 없게 된다. 그러면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말레이어에 lattah라는 말이 있다. 매우 아름다운 말이다. 그 말이 뜻하는 것은 “사람들은 공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다른 사람을 모방한다.”라는 것이다. 이런 일을 경험한 적이 있는가? 가령 그대가 극장에서 영화를 보로 있을 때 갑자기 불이 났다면 사람들은 뛰어다니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어디고 뛰어가든지 그대는 군중을 따를 것이다. 이 같은 일은 배가 침몰하고 있을 때도 일어난다. 여기에서는 더욱 큰 문제가 일어난다. 모든 사람들이 배의 한쪽 구석으로 몰리면 배는 더욱 빨리 가라앉게 마련이다.
언제나 공포에 휩싸일 때 그대는 개성을 잃는다. 그때에는 생각하고 명상할 시간이 없다. 그대 스스로 결정할 만한 시간적 여유도 없다. 시간은 짧고 결정은 내려야 한다. 이런 공포의 순간에 사람들은 서로를 모방하게 된다. 그대 역시 일상적으로 lattah 속에서 살고 있다. 그대는 끊임없는 공포 속에서 살고 있다. 그리고 군중들은 그대가 이질적인 존재가 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그들의 마음에도 역시 의심이 일어나게 되기 때문이다.
만약 어느 한 사람이 군중에서 빠져 나간다면 그 사람은 예수이거나 붓다일 것이다. 군중들은 이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군중들은 그를 해칠 것이다. 혹은 그 군중들이 매우 문화적이라면 그를 숭배할 것이다. 그러나 그를 해치든 그를 숭배하든 모두 똑같이 어리석은 짓이다. 군중이 문화적이지 않은 야만인이라면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될 것이다. 군중이 인도 사람들같이 매우 진화된 문화와 비폭력, 그리고 사랑과 정신적인 깊은 전통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그들은 붓다를 숭배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숭배하면서 붓다에게 말할 것이다. “우리는 당신과 다르며 당신 또한 우리와 다릅니다. 당신은 좋습니다. 너무너무 좋지만 너무 진실한 것이 탈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당신을 따를 수 없습니다. 당신과 함께 할 수 없습니다. 당신 또한 우리를 따라오지 않아도 됩니다. 당신은 신입니다. 우리는 당신을 숭배하겠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어떤 잘못도 없습니다. 우리를 혼란시키지 말아 주십시오. 우리의 평화스러운 잠을 방해하지 말아 주십시오.”
예수를 죽이는 것이나 붓다를 숭배하는 것이나 모두 같은 짓이다. 예수를 죽인 것은 그런 사람은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군중들이 그를 잊어버리려고 한 행위였다. 왜냐하면 그는 진실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진실하다는 것은 그의 존재 전체가 축복으로 넘쳐흘러 진리와 하나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리란 볼 수 없는 것이다. 진리란 오직 참된 사람으로부터 나오는 향기만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넘치는 기쁨은 다른 사람에 의해 느껴질 수 있다. 그리고 그것만이 그가 참된 사람이라는 유일한 증거이다. 그러나 만약 이 사람이 옳다면 군중 전체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 된다. 군중은 그 같은 사람에게 너그러워질 수 없으며 그것은 마치 가시에 찔린 것처럼 아픈 일이다. 이 사람은 죽어야만 한다. 혹은 숭배되어야만 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당신은 다른 세계로부터 왔습니다. 당신은 우리에게 속해 있지 않습니다. 당신은 freek(진화된 히피)이며 정상적인 규칙을 벗어난 사람입니다. 당신은 예외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외라는 것은 규칙을 증명하여 주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당신은 당신이고 우리는 우리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갑니다. 당신이 오시게 된 것은 좋은 일입니다. 우리는 당신을 매우 존경합니다. 그러나 우리를 방해하지는 말아 주십시오.”
우리는 붓다를 번쩍 들어서 시장 바닥으로 나오지 못하게 깊은 산 속 절간으로 모신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우리에게 고민거리를 계속해 만들어 낼 것이기 때문이다.
공포는 계속해서 군중을 따르게 만든다. 공포는 계속해서 그대가 혼자 갈 수 없게 그 길을 막는다. 그러므로 그대가 진실로 소를 찾으려 한다면 이 공포를 떨쳐 버려라. 왜냐하면 소를 찾으려면 위험한 곳으로 들어가야 하므로 모험을 하여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와 군중은 별로 달갑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대가 다시 정상적인 사람으로 되돌아올 수 있도록 사회는 온갖 종류의 고통을 그대에게 가할 것이다.
처음에 나는 사람들을 실재보다 그림에서 더 흥미를 가지고 있고 실재보다도 거울에 더 흥미가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 자신보다 자신의 이미지에 더욱 흥미가 있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두 번째로 꼭 기억해 두어야 할 중요한 것이 있다. 즉 사람은 직립하여 두 다리로 걸어다니는 유일한 동물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에게 가장 독특한 상황을 만들어냈다.
동물들은 네 발로 걷는다. 그들은 오로지 한쪽 방향밖에 보지 못한다. 그러나 인간은 두 발로 서 있으며 동시에 모든 방향을 볼 수 있다. 인간은 몸 전체를 움직이지 않고 그저 얼굴만 돌리고도 모든 방향을 다 볼 수 있다. 이러한 가능성 때문에 사람은 현실 도피주의자가 되어 버렸다. 위험이 닥치면 위험에 맞닥뜨려 싸우기보다는 피해 버린다. 이와 똑같은 상황에서 동물들은 적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인간은 도망치고자 하면 모든 방향을 쉽게 이용할 수 있다. 사자가 저쪽에 서 있더라도 사람은 어떤 방향으로든지 쉽게 달아날 수 있다.
인간은 현실을 도피하는 유일한 동물이다. 그러나 무서운 동물들과 싸우지 않고 도망치는 것을 잘못이라 말할 수는 없다. 인간은 오랫동안 야생적으로 살아왔다. 아직도 사람은 사자나 호랑이에게 경의를 표하고 있다. 지난날 사람들은 사자와 호랑이에 대한 뼈아픈 경험이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 도피주의는 인간의 의식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린 메커니즘이 되어 버렸다. 지금도 인간의 내부에서는 지난날의 정신적인 어떤 요소가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공포가 있으면 그것에 맞서는 대신 다른 방향으로 도망간다. 신에게 기도한다. 신에게 도움을 청한다. 내적인 빈곤을 느끼면 텅 비어 있기 보다는 재산을 계속 긁어모음으로써 내적인 빈곤을 잊어버리려고 한다. 자신을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무지한 채로 그냥 있기보다는 지식을 계속 긁어모은다. 그리하여 교활하게 되고 앵무새처럼 지식들을 계속해서 기계적으로 되풀이하여 지껄이는 것이다.
이런 것들이 모두 도피이다. 만약 그대가 진정으로 그대 자신과 만나고 싶다면 어떤 방법으로도 도피하면 안 된다는 것을 배워야 한다. 거기에 분노가 있다. 그것으로부터 도피하지 말라. 분노가 치밀어 오를 때마다 분노로 가득 차 있으라. 물론 그대의 에너지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면 그것은 그대의 어떤 에너지와도 융합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그대의 무의식으로 처리되어질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압축된 분노는 소멸되지 않는다. 그것은 다시 의식의 표면으로 튀어올라 올 것이다. 언젠가 그것은 다시 기회를 노려 엉뚱한 띠에 나타날 것이다.
만약 그대에게 성욕이 일어난다면 그대는 무엇인가 다른 것을 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대는 만트라를 암송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런 것은 모두 도피인 것이다. 기억하라. 종교는 도피가 아니다. 그대가 알고 있는 종교는 모두 도피이다. 그러나 내가 말하고 있는 종교는 도피가 아니다. 그것은 만남이다. 삶은 조우(encounter)이다. 그대 앞에 무엇이 나타나더라도 그것을 깊이 주시하라. 깊이 주시하면 하는 만큼 그대 자신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분노의 뒤에 소 발자국이 있다. 성의 뒤에 소 발자국이 있다. 그대가 성으로부터 도피한다면 분노, 탐욕 그리고 이것저것으로부터 도피한다면 그대는 소 발자국으로부터 도피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대가 누구인가를 알 수 없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너무나 허구에 관심을 쏟고 있다. 그대는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있는 사람을 본 적이 있는가? 그들이 보통 때와 어떻게 달라 보이던가? 그들은 운다. 스크린에 어떤 일이 벌어지면 그들의 눈에서는 눈물이 줄줄 흘러나온다. 그들은 실제의 삶에 있어서는 그렇게 친절하지 않았다. 그렇게 많은 자비심으로 넘치지도 않았다. 그들은 실제의 삶에 있어서는 지독한 사람들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영화를 보면서 자비심을 내뿜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스크린에는 아무것도 없다. 단지 빛과 그림자 그리고 단순한 유희와 환상만이 있을 뿐이다. 그들은 울고 웃고 흥분한다. 영화는 보는 것보다도 관객들을 보는 것이 오히려 더 재미있을지도 모른다. 도대체 그 사람들은 왜 그러는 것일까?
인간은 현실보다 환영에 더욱 흥미가 있는 듯하다. 만약 그대가 환상 속에서 꿈꾸는 어떤 사람을 깨우려고 한다면 그는 화를 낼 것이다. 그는 그대를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그대는 그를 괴롭혔으므로 그는 보복할 것이다. 이러한 마음의 허구와 끊임없이 도피하려고 하는 것, 인간은 이 두 가지 문제에 직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아내가 토요일 오후에 시내 중심가로 외출하고 싶어 하여 통계학자인 남편은 마지못해 골프 치는 것을 포기하고 아이들을 돌보기로 하였다. 그녀가 집에 돌아오자 남편은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내밀었다.
“눈물 닦기 아홉 번, 구두끈 매기 열세 번, 풍선 사 준 것 한 아이에게 세 개씩, 풍선의 평균 수명 삼십 초, 건널목에서 주의 준 일 스물 한 번. 이상 보고 끝.”
통계학자는 과연 통계학자이다. 마음이란 이렇게 수학적이다. 마음이 그러게 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마음을 벗어나기 힘든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대는 이미 마음에 막대한 투자를 해 놓고 있다. 그대의 모든 능력, 모든 재능, 모든 경험, 이 모든 것이 마음에 의지하고 있다. 그대는 명상을 통해서 이 모든 것들을 제거해 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 까닭에 몇 번이고 그곳에서 빠져 나오려고 하나 깊은 수렁은 그대를 계속 빨아들인다.
마음은 여러 가지 면에서 대가를 치러 준다. 특히 이 세상에서 그대는 무심으로 살아가면서 경쟁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대는 끊임없이 순환하는 이 생존 경쟁에 끼어들지 못할 것이다. 그대는 이 광적인 군중 속에 참가하지 못할 것이다. 그대는 거리의 주변을 걷게 될 것이고 그러다가 그대 자신의 오솔길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물론 그대는 풍부해질 것이다. 엄청난 부자가 될 것이다. 그러나 사회는 그대를 부자로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대는 아름답게 될 것이나 그대의 아름다움은 사회를 이루고 있는 평범한 마음들에게는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그대는 매우 행복하며 지복(至福)에 차 있고 침묵에 둘러싸여 있을 것이나 사람들은 그대를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불행한 것이 인간 마음의 정상적인 상태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불행한 것이 옳은 것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지복으로 넘쳐흐르는 것은 한낱 광기로 느껴질 것이다. 누구든 미치지 않고 행복해 하는 사람을 본 일이 있는가? 그대는 결코 그런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가 진정으로 소를 찾고자 한다면 그대는 집단으로부터 탈출하는 그런 모험을 해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오로지 마음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을 때에만 그대는 집단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대의 마음은 집단에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마음은 내적인 집단이다. 집단은 그대의 내부에 어떤 메커니즘을 만들어 왔다. 그것에 의해 그대는 조정되고 있는 것이다. 사회는 일정한 것을 믿고 있으며, 그러한 신념을 그대에게 가르치고 있다. 심연의 깊은 곳에서 그대가 거의 잠들어 있을 때 사회는 그대에게 최면을 걸어 일정한 역할 속으로 밀어 넣는다. 만약 그대가 그것에 반대하여 무엇인가를 한다면 곧 그대의 내면으로부터 사회의 속삭임이 들려올 것이다. 양심은 즉시 <아니오>라고 말할 것이다. 그 양심은 참된 양심이 아닌 대용품이며 사회의 술책이고 정책인 것이다. 사회는 그대 마음의 내부에 어떤 법칙을 만들어 왔다. 그리하여 그것에 반대하게 되면 곧 내면으로부터 사회의 속삭임이 들려온다. “그것은 하지 말라! 그것은 나쁘다! 그것은 죄악이다.” 사회는 그대가 내면으로부터 죄의식을 느끼도록 압력을 가할 것이다.
만약 그대가 소위 양심이라는 것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그때에는 대단한 노력이 필요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전체적인 노력은 양심에서 의식으로, 마음에서 무심으로의 전환을 불러일으키게 될 것이다.
양심은 사회에 의하여 주어진 것이다. 의식은 그대로부터 솟아오른 것이다. 양심은 빌어 온 것이다. 그것은 곰팡이 쓸고 썩은 것이다. 양심은 먼 과거로부터 와서 더 이상 어쩔 수 없도록 그대의 삶을 완전히 변질시켜 버렸다. 의식은 그대로부터 왔다. 의식은 언제나 현재이다. 그것은 언제나 신선하다. 의식은 그대를 완전하게 할 것이다. 의식은 완전함이다.
integrity란 말은 라틴어이다. 그것은 in과 tangere라는 두 가지 어원에서 왔다. tangere란 순수, 전체, 청렴, 순결을 뜻한다. 완전한 사람은 전체이다. 여럿이 아니고 하나이다. 완전한 사람은 순수하고 과거로부터 구속받지 않으며 청렴하고 순결하다. 그리고 그 순결성에서 우리가 종교라고 부르는 향기가 피어오른다.
도덕은 종교가 아니다. 도덕은 사회가 쳐 놓은 덫이다. 종교는 개인적인 발견이다. 그대는 종교를 발견하여야만 한다. 도덕은 주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종교는 절대로 주어질 수 없는 것이다.
자, 경문을 보자.
세 번째 경문 : 소를 보았다.
햇볕은 따뜻하고,
바람은 부드러운데
강변 수양버들의 푸르름 속에서
나는 꾀꼬리 우는 소리를 듣는다.
여기에 소가 숨어 있을 리 없다!
어떤 화가가
그 묵직한 머리며,
늠름한 뿔을 그린단 말인가?
네 번째 경문 : 소를 잡았다.
격렬한 추격 끝에
간신히 소를 잡았다.
그의 굳센 의지와 힘은
무진장하다.
구름바다 저 멀리
높은 고원으로 돌진하여
도저히 서 있을 수 없는
가파른 골짜기 위에
그는 서 있다.
세 번째 경문은 감수성(感受性)에 대하여 노래한 것이다.
햇볕은 따뜻하고,
바람은 부드러운데
강변 수양버들의 푸르름 속에서
나는 꾀꼬리 우는 소리를 듣는다.
그대가 민감할 때, 그대의 주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 그리고 그대에게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해 민감해질 때 꾀꼬리의 노래 소리가 그대로부터 흘러나오게 된다. “햇볕은 따뜻하고 바람은 부드러우며 강변 수양버들의 푸르름 속에 있게” 되는 것이다.
종교적인 탐구는 과학적인 탐구와는 다르다. 과학적인 탐구에서는 그대는 전 세계를 잊어버릴 정도로 집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에 한 예가 있다. 어떤 과학자가 그의 연구실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집에 불이 났다. 그러나 그는 불이 난 것을 느끼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는 다른 사람에 의해 끌려 나오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는 이처럼 심각하게 집중하고 있었다. 모든 것들이 배제되고 하나로 묶여질 정도로 그의 의식은 좁아져 있었던 것이다. 집중은 그저 하나의 목적, 표적만을 찾아간다.
인도에는 마하바라타라는 위대한 서사시가 있다. 바가바드 기타는 마하바라타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판다바스와 카우라바스, 그 사촌 형제들이 활의 스승인 드로나챠리아에게 가르침을 받게 되었다. 하루는 스승이 표적을 나무 밑에 놓고 나서 모든 제자에게 무엇이 보이느냐고 물었다. 한 제자가 말했다. “저에게는 나무와 하늘 그리고 떠 있는 해가 보입니다.” 또 다른 제자가 말했다. “저에게는 나무와 나뭇가지 사이에 앉아 있는 새가 보입니다.” 이렇게 해서 그의 수제자인 아르쥬나의 차례가 되었다. 스승은 물었다. “무엇이 보이는가?” 그는 말했다. “저는 표적밖에는 아무것도 볼 수 없습니다.” 그러자 스승이 말했다. “너는 위대한 활의 명인이 될 것이다.”
집중은 의식을 제한시킨다. 집중된 마음은 다른 모든 것에 대하여 무감각하여진다. 명상이란 일어나고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 깨어 있는 것이다. 어떠한 선택도 하지 않고 그저 깨더 있는 것이다.
햇볕은 따뜻하고,
바람은 부드러운데
강변 수양버들의 푸르름 속에서
나는 꾀꼬리 우는 소리를 듣는다.
여기에 소가 숨어 있을 리 없다!
이러한 섬세한 감수성 앞에서 어떻게 소가 숨어 있을 수 있겠는가? 만약 소가 숨을 수 있다면 그것은 그대가 한 방향으로 집중하고 있을 때이다. 그렇게 되면 소가 숨을 곳이 많아진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가 어떤 방향으로도 집중하지 않고 그냥 모든 방향으로 열려 있다면, 소가 어떻게 숨을 수 있겠는가? 참으로 아름다운 경문이다. 자, 이제 소는 어느 곳에도 숨어 있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대의 의식 구석구석에 이르기까지 소가 숨어 있을 만한 어떤 틈도 없기 때문이다. 그대는 집중을 통하여 도피할 수 있다. 그대는 수많은 것들을 희생하면서 한 가지 일에만 철저히 집중하게 된다.
명상에서는 무엇 하나 잃지 않고 깨어 있을 수 있다. 그대는 무엇 하나 빠뜨리지 않는다. 그대로 그저 깨어 있기만 하면 된다. 꾀꼬리가 운다면 그대는 그저 듣기만 하면 된다. 햇살이 그대의 몸을 어루만지면 그대는 그저 따뜻함을 느끼기만 하면 된다. 바람이 지나가면 그대는 그저 서늘함을 느끼기만 하면 된다. 어린아이가 운다. 개가 짖는다. 그대는 그저 깨어 있다. 그대에게는 어떤 목적도 없다.
집중에는 목적이 있다. 그러나 명상에는 어떤 목적도 없다. 그리고 이 무선택의 깨어 있음 속에선 아마음도 사라진다. 왜냐하면 마음은 단지 제한된 의식 속에서만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의식이 넓게 열려 있다면 마음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마음은 오직 선택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꾀꼬리의 노랫소리는 아름답다.”라고 그대가 말하는 바로 그 순간 모든 것이 물러가고 마음이 들어온다. 그것을 이렇게 말하여 보자. 마음은 의식의 제한된 상태이다. 의식의 매우 좁은 터널을 따라 통과하고 있는 것이다. 명상은 넓고 넓은 하늘 아래 서 있는 것이다.
여기에 소가 숨어 있을 리 없다!
어떤 화가가
그 묵직한 머리며,
늠름한 뿔을 그린단 말인가?
그리하여 갑자기 소가 발견되었다. 섬세한 감수성 속에서 돌연 그대는 그대의 에너지, 순수한 에너지의 환희로 가득 차 출렁이고 있다.
어떤 화가가
그 묵직한 머리며,
늠름한 뿔을 그린단 말인가?
그렇다. 그 어떤 화가도 그것을 그려 낼 수 없다. 그것은 그림이 아니고 정말 소인 것이다.
산문 주해 :
그 소리를 들을 때 사람들은 그 근원을 느낄 수 있다.
육감에 몰입하자마자 이미 문제 들어섰다.
이것은 모든 감각이 하나의 감수성으로 융합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대의 눈, 코, 귀는 한 번도 융합된 일이 없다. 그대의 눈, 코, 귀는 하나이다. 거기에는 어떤 틈도 없다. 그대는 동시에 보고 듣고 만지고 냄새맡고 맛본다. 특별히 어떤 감각을 선택하지 않는다.
그러나 보통 우리는 선택하고 있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경이 눈으로 몰려 있다. 그들은 보기만 할 뿐 소리는 잘 듣지 못한다. 그들은 귀머거리다. 아름다운 음악이 계속 울려도 그들은 안절부절한다. 사람들은 말한다. “뭐 볼 만한 것이 없을까?”그들은 아마 춤추는 것은 즐길 것이나 노래하는 것은 즐기지 않을 것이다.
귀 쪽으로 신경이 몰려 있는 사람들은 음악을 즐기고 노래하지만, 그들의 시각은 흐려져 있다. 그리고 다른 감각들에서도 같은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사람들은 각각 자기의 에너지를 한쪽 감각으로만 집중시킨다. 이것이 다른 감각들에게는 독재자적인 지배 요인이 된다. 특히 눈이 매우 중요하게 되어 그대가 가지고 있는 에너지의 80%는 거의 눈에 쏠려 있다. 겨우 20%밖에 안 되는 에너지만이 나머지 감각들에 배급되고 있는 실정이다. 눈은 이제 히틀러가 되어 버렸다. 그대의 감각들에 있어서의 민주주의는 사라졌다.
눈먼 사람을 귀머거리보다 더욱 불쌍하게 여기는 것도 이 때문이다. 사실 귀머거리는 사회로부터 소외당하고 있으므로 귀먹은 사람을 보다 더 불쌍히 여겨야 하다. 맹인은 사회로부터 그렇게 심하게 소외당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 사회는 언어가 그 기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귀먹은 사람은 모든 전달 수단이 끊겨 있다. 귀먹은 사람은 더욱 곤란한 j지에 놓여 있다. 그러나 누구도 귀머거리를 맹인처럼 불쌍히 여기지는 않는다. 왜 그런가? 그것은 우리들 문명의 80%는 눈으로 인하여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진리에 도달하면 그를 위대한 선각자(great seer)라고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왜 seer인가? 진리는 들을 수도 있고 또 볼 수도 있으며 냄새로 맡을 수도 있다. 그런데 왜 진리에 이른 사람을 great seer라고만 하는가? 그것은 눈 때문이다. 우리들은 너무나 눈에 치우쳐 있다. 그리고 이것은 매우 불안정한 상태이다. 감각들에게는 제각기 전면적인 자유가 주어져 있다. 모든 감각이 융합하여 감수성과 각성의 큰 흐름을 형성하도록 되어 있다. 참된 사람은 모든 감각을 통하여 살고 있는 사람이다. 참된 사람이 그대를 만진다면 그대는 곧 그의 에너지가 옮겨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갑자기 어떤 것이 그대의 안으로 들어와 그대를 깨우고 있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의 에너지가 잠자고 있는 그대의 에너지를 감동시킨 것이다. 그리하여 그대의 내부로부터 무엇인가가 솟아오르게 될 것이다. 그대가 참된 사람의 목소리를 듣는다면 그 내용뿐만 아니라 그 목소리조차 의미심장하게 들릴 것이다. 그대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면서 종을 울릴 것이다. 그대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면서 종을 울릴 것이다. 무엇인가 그대 가슴의 소음들을 모아 화음을 이루게 할 것이다. 그의 목소리는 따뜻한 담요처럼 그대를 감싸줄 것이다. 그의 목소리는 차지 않고 따뜻하게 들릴 것이다. 시처럼 운율있게 들릴 것이다.
경문은 말한다.
그 소리를 들을 때 사람들은 그 근원을 느낄 수 있다.
육감에 몰입하자마자 이미 문에 들어섰다.
여기에서 선(禪)은 뛰어나다. 다른 어떤 종교도, 다른 어떤 진화도 이와 같이 깊게 바른 길에 닿아 보지 못하였다. 감각은 살아서 생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 뿐만 아니라 그대의 감각은 깊은 내적인 리듬과 화음 속으로 떨어져야 한다. 그것은 하나의 교향악이 되어야만 한다. 그대는 오직 그때에만 진리와 함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대는 오직 그때에만 소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어디로 들어가더라도 사람들은 소의 머리를 본다!
그대의 감각들이 전체적으로 살아 서로의 내부로 몰입하며 그대가 에너지의 저장소가 될 때, “어디로 들어가더라도 사람들은 소의 머리를 본다.”는 것이다.
이 일치는 물속의 소금과 같고…
그대의 각성은 물속의 소금과 같이 그대의 모든 감각 속에서 굽이쳐 흐르고 있다.
…물감 속의 색체와 같다. 어떤 미미한 것이라도 자기와 분리된 것은 없다.
이 감각성의 전체로부터 떠오르는 것이 자아이다. 아트만(atman)—그대의 참존재이다. 리듬을 창조하라. 화음을 창조하라. 이제 소는 어디에도 숨어 있지 못할 것이다.
격렬한 추격 끝에
간신히 소를 잡았다.
격렬한 추격이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마음은 그렇게 간단히 그 힘을 잃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마음은 오랫동안 독재자로 군림하여 왔다. 이제 그대는 그 독재자를 왕좌로부터 끌어내리려고 하겠지만 그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마음은 그대를 괴롭히고 지배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 마음은 그대에게 끈질기게 도전해 올 것이다. 마음은 그대를 뒤따르면서 그대의 허약한 순간을 노려 다시 그대를 지배하려 할 것이다.
나는 매우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저녁 식사 때 한 가족이 모두 모여 있었는데, 장남이 이웃집 처녀와 결혼하겠다고 발표하였다. “그 처녀는 물려받을 재산이 없어서 안 돼!”하고 아버지가 반대하였다. “그 처녀는 돈 쓰는 게 너무 헤퍼서…”라고 어머니가 한 술 더 떴다. “그 여자 프로 야구에 대해서 뭐 아는 것이 있어?” 막내가 물었다. “어휴, 그러게 죽은깨 많은 사람은 처음 봤어!” 여동생이 빈정거렸다. “그 여자는 하루종일 책만 읽고 있더라.” 아저씨가 투덜거렸다. “그 애는 옷 입는 것이 촌스럽더라.” 아줌마가 쏘아붙였다. “그렇지만 그 애는 얼굴 화장만큼은 잊지 않고 잘 하더구나.”하고 할머니가 맞장구를 쳤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저보다 훨씬 좋은 조건이 하나 있어요.”하고 아들이 말하였다. “그게 뭐지?” 온 가족이 합창을 하였다. “가족이 하나도 없다는 거에요!”하고 아들이 응수하였다.
가족은 항상 거부 반응을 일으킨다. 이제 아들이 결혼하려고 한다. 한 낯선 여자가 그의 생애에 아주 소중한 인물이 되려고 한다. 이에 가족들은 어떤 충격을 느끼게 된다. 어느 집에서나 보통 그런 상황이 벌어진다. 그것은 이제 투쟁이 되어 버린다.
인도에서는 연애가 허용되어 있지 않다. 결혼은 가족에 의해서 결정하도록 되어 있다. 아버지가 결혼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삼촌과 형제들 그리고 어머니가—실제로 결혼하게 되는 당사자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만이 걱정해야만 하는 것이다. 마치 기는 결혼과 관계없는 존재처럼 그에게는 묻지도 않는다. 이제 결혼하여 같이 살 사람은 그인데도 그에게는 어떤 질문도 허용되지 않는다. 그때 가족들은 안도감을 느낀다. 그들이 선택하기 때문이다.
만약 아들이 “나는 사랑을 하고 있습니다.”하고 말한다면 가족들은 적대감을 느낄 것이다. 그것은 이제 한 낯선 여자가 매우 중요한 사람이 되려고 하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며느리를 결코 마음 편하게 느끼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끊임없이 말다툼과 싸움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어머니의 위치는 지금까지 절대적이었는데 갑자기 힘을 잃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자기 아들을 위해 아무것도 한 일이 없는 낯선 여자가 절대적인 존재가 된다. 여기에서 충돌이 일어난다.
이와 똑같은 상황이 내부의 탐구에서도 일어난다. 그대의 마음은 그대의 내적인 가족이다. 그대가 무엇인가 새로운 일을 하려고 할 때마다, 그대가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려 할 때마다 마음은 저항한다. 마음은 말한다. “아니야, 이것은 좋지 않아.” 마음은 수없이 많은 이유를 내뿜으며 그대를 괴롭힐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므로 그런 것에 너무 신경쓰지 말라. 마음은 언제나 그런 것이다. 그러나 그대가 견디어 낸다면, 그대가 주인이 될 것이다. 다만 꾸준한 인내가 필요할 뿐이다.
격렬한 추격 끝에
간신히 소를 잡았다.
그대는 이제 소를 한 번 보았다. 그대 존재의 에너지를 보았다. 그리하여 그대는 소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마음이 그렇게 오랫동안 권력을 휘둘러 왔으므로 그것은 격렬한 추격이 될 것이다.
그의 굳센 의지와 힘은
무진장하다.
구름바다 저 멀리
높은 고원으로 돌진하여
도저히 서 있을 수 없는
가파른 골짜기 위에
그는 서 있다.
이 에너지, 이 소는 지칠 줄 모른다. 어떤 때는 언덕 꼭대기, 경험의 정상 위에 서 있다. 또 어떤 때는 골짜기, 아주 깊은 골짜기에 서 있다.
일단 그대가 주변의 세계에 대해 민감하게 되면 그 감수성은 그대의 내면의 집으로 향해질 수 있다. 그것은 그대가 꾀꼬리 우는 소리를 듣던 때와 똑같은 감수성이다. 따뜻한 햇볕을 쬐며 꽃향기를 맡던 때와 똑같은 감수성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감수성이 지금 그대의 내면으로 굽이쳐 흘러야 하는 것이다. 그와 같은 감수성으로 인해 그대는 그대 자신을 맛보고 냄새맡고 보고 만지게 될 것이다.
세상을 감수성의 훈련장으로 사용하라. 기억하라. 그대의 주시력이 점점 깊어진다면 모든 것이 도리에 따라 움직일 것이다. 결코 주시력을 잃지 말라. 그대의 모든 감각을 민감하게 곤두세우라. 그대의 의식을 고양시키라. 생동하는 에너지로 충만하라. 그리고 삶을 두려워하지 말라. 만약 그대가 삶을 두려워한다면 어느 누가 그대에게 상처를 입혀도 느끼지 못할 만큼 그대는 무감각해질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와서 말한다. 누군가와 사랑에 빠져 보고 싶었지만, 거절당할지도 몰라 두려워 그러게 하지 못하였다고. 만약 누군가 가까이 접근해 오면 그들은 두려움을 느끼고 자기 자신을 닫아 버린다. “그 사람이 어떤 고통을 만들어 낼지 누가 아는가? 그 사람과 함께 있으면 어떤 문제가 일어날지 누가 아는가? 그러니까 누군가와 어울려 행복해지는 것보다 혼자 슬퍼하는 것이 낫다 어쩌면 그 행복이 위험을 초래할지도 모르니까…”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이야기를 하나 들려주겠다.
여자에게 싫증난 사람이 꾀를 부려 약혼을 취소하려고 하였다. 어느 날 그는 말하였다. “우리는 성격 차이가 너무 커서 결혼하면 다투기만 할 것 같아. 아무래도 잘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 “당신은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어요. 우리는 비둘기처럼 서로 사랑하고 있잖아요.”하고 여자가 말했다. “아닐 거야, 우리는 의견이 맞지 않아. 매일 부부 싸움만 할 거야.” “아니에요. 우리는 로미오와 줄리엣 같을 거에요. 나는 당신의 완벽한 동반자가 될 수 있어요.”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우리는 어떤 문제도 서로 의논할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러는 거야.” “그렇지만 나는 그렇지 않아요…” 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글세, 내가 뭐라고 했어? 우리는 벌써 싸우고 있잖아!”
사람들은 두려워하고 있다. 만약 그들이 어떤 관계 속에 있게 되면 그들은 서로 받아들이지 않게 될지도 모른다. 만약 그들이 어떤 관계 속에 있게 되면 그들은 서로 사랑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게 될지도 모른다. 만약 그들이 어떤 관계 속에 있게 되면 그들의 진실이 표면으로 떠오르면서 그들의 가면은 떨어져 나갈 것이다. 상대방이 언젠가 떠나 버릴지도 모르기 때문에 사람들은 두려워하는 것이다. 상처받기 싫어서 상대방에게 가까이 접근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하여 무감각해진다.
그들은 눈을 가리고 삶 속으로 뛰어든다. 그리고 묻는다. “신은 어디에 있는가?” 시는 어디에나 있다. 그대는 그저 민감해질 필요가 있다. 그렇게 되면 그대는 어디에서라도 소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어떤 하찮은 나무 뒤에도, 어떤 조그만 바위 뒤에도 소는 숨어 있다. 사랑을 가지고 만지면 바위까지도 감응할 것이다. 거기에서 그대는 소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을 가지고 보면 별들도 감응한다. 거기에도 소가 숨어 있었던 것이다.
소는 전체적인 에너지이다. 그대는 그것의 일부이다. 그대가 생기 있고 민감하다면 전체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산문 주해 : 그는 숲에서 오랫동안 살았지만, 나는 오늘에야 소를 잡았다! 풍경에 홀린 것이 그의 방향을 방해한 것이다. 그는 맛 좋은 풀만을 찾아 헤맸던 것이다. 그의 마음은 아직도 고집이 세고 제멋대로이지만, 나를 따르려 하지 않는다면 채찍을 휘두르지 않을 수 없구나.
그런데 이 채찍이라는 말이 좀 애매할 것이다. 보통 채찍을 휘두른다면 마음속으로 폭력이 연상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교에서 말하는 채찍은 억압의 상징이 아니다. 폭력적인 것이다. 아니다. 그 채찍은 그저 깨어난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만약 어떤 사람이 갑자기 칼을 들고 나타나 그대를 죽이려 한다면 어떤 상황이 벌어지겠는가? 바로 그 순간 마음이 정지한다. 칼이 그대의 눈앞에 번뜩이는 순간 마음이 멈춘다. 그 순간은 너무 위험하여 그대의 사념이 생길 여유가 없다. 갑자기 마음이 부서져 나간다. 거기에는 더 이상 마음이 없으며 무심(無心)이 떠오른다.
위헌한 상황에서는 무의식적으로 한순간의 명상이 일어난다. 그러나 곧 사념이 다시 그대에게 들어온다. 지극히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대는 명상 속에 있었다.
차를 타고 가다 갑자기 사고를 당하게 된다. 그 순간, 바로 사고를 당하기 직전에 그대는 사고가 일어나려는 것을 느낀다. 그대가 타고 가던 자동차의 브레이크가 말을 안 듣는다. 혹은 차가 미끄러지고 있다. 바로 그 순간 모든 사념들이 멈춘다. 갑자기 그대는 명상 속에 들어와 있게 된다. 갑자기 깨어나게 된다. 바로 그 순간이 채찍인 것이다.
선(禪)의 스승들은 제자들의 명상을 돕기 위해 지팡이를 짚고 다닌다. 그러다가 코를 골며 잠자고 있는 제자들을 보기만 하면 지팡이로 머리를 힘껏 내리친다. 갑자기 <딱>하는 소리와 함께 에너지의 섬광이 일어난다. 가끔 이렇게 해서 깨닫는 사람이 나타난다. 그대가 깊은 잠 속에 빠져 있기 때문에 스승들은 지팡이로 힘껏 내리치는 것이다. 이것을 이해하도록 하라. 잠들어 있을 때 그대는 문간에 서 있는 것이다. 그 문간에서 두 개의 문이 열린다. 한쪽은 어둠으로 통하는 문이고 다른 한쪽은 삼매(三昧)로 통하는 문이다.
그 순간은 매우 의미심장한 순간이다. 보통 그대는 오랫동안의 습관대로 그냥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이다. 그러나 그대는 지금 문간에 서 있다. 만약 이 순간 그대가 잠들지 않고 깨어 있을 수 있다면 그대는 삼매의 섬광을 얼핏 볼 수 있을 것이다.
파탄잘리(Patyanjali: 정확한 연대 기록은 없으나 기원전 2세기경의 인도 사람이라고 한다. Sankahya 학파의 창시자이며 요가를 집대성하여 Yoga Sutra를 편찬하였다.)는 그의 요가 경전에서 깊은 잠은 삼매와 같다고 말한다. 한 가지 다른 것이 있다면 거기엔 각성이 없다는 것이다. 삼매 속에서도 어둠 속으로 깊이 빨려 들어가는 것 못지 않게 깊이 잠들지만 그대는 새벽과 같이 깨어 있는 것이다. 모든 메커니즘이 잠자고 있다. 몸과 마음이 다 잠자고 있다. 그러나 그대는 새벽과 같이 깨어 있다. 이리하여 가끔 스승에 의해 제자는 머리를 얻어맞고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선(禪)의 채찍이다.
나를 따르려 하지 않는다면
채찍을 휘두르지 않을 수 없구나.
투쟁은 힘들 것이다. 그대가 여행 중에 용기가 꺾여 실망하지 않으려면 맨 처음 떠날 때부터 깨어 있어야 한다. 투쟁은 점점 험해질 것이다. 마음은 그대의 내적 탐구에 매우 부정적인 태도를 취할 것이다. 마음은 그대의 탐구에 반대하고 있다. 그리고 무엇에 대해 찬성하는 것보다 반대하는 것이 훨씬 쉽다. <예>라고 하는 것보다 <아니오>라고 하는 것이 훨씬 편하다. 마음이라는 것은 <아니오>를 좋아하는 입씨름꾼이다.
클라멘스 대로우라는 법률 전문가가 있었다. 그는 세계적인 범죄 전문가였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반대 의견을 가지고 싸움하는 것을 좋아하였다. 이번에는 한 변호사와 논쟁을 하게 되었다. “당신은 그 문제에 대하여 알고나 있습니까?” 변호사가 대로우에게 물었다. “아닙니다.” 대로우는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자인하였다. 변호사가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당신은 나와 논쟁을 하겠다는 겁니까?” “그것은 매우 쉽습니다. 나는 반대 쪽에 서면 됩니다. 나는 무엇이나 반대할 수 있으니까요!”
어떤 것이든지 반대의 의견을 말하는 것은 아주 쉽다. <아니오>라는 말은 마음에서 간단히 일어난다. 한번 그대가 <예>라고 말하게 되면 일이 복잡해진다. <아니오>는 모든 것을 간단히 끝내 버린다. 한번 <아니오>라고 하게 되면 이야기를 더 이상 끌고 갈 필요가 없어진다. 예를 들어 내가 그대에게 “이 나무 아름답지?”라고 말했을 때, 그대가 만약 <예>라고 대답했다면, 나는 또 “왜 이 나무가 아름답다고 생각해?”라고 묻게 된다. 그러면 그것을 증명해 보인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 될 것이다. 수천 년 동안 철학자들은 아름다운 것에 대하여 생각하여 왔지만 아직 아무도 아름다움에 대하여 정의를 내리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내가 <왜?>라고 묻는다면 그대는 곤경에 빠질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대가 <아니오>라고 말한다면 더 이상 문제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 그것이 아름답다고 하는 것을 나에게 증명해 보일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대는 그냥 <아니오>라고 해 버리면 그만이다. <아니오>는 매우 경제적이다. <예>는 위험하다. 그러나 기억하라. 그대가 한번 <아니오>라고 말하게 되면 그대의 삶은 살아서 생동하지 못할 것이다. 어떤 사람이 계속하여 <아니오>만을 말하게 된다면 그는 점점 무감각해질 것이다. <아니오>는 독약과 같다. <예>라고 말하는 것이 힘들다 하더라도 좀더 노력하여 보라. <예>라고 말한다면 그대를 꽉 휘어잡고 있는 마음이 사라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오>라고 말한다면 마음이 그대를 더욱더 강하게 거머쥐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마음은 죽을 때까지 그대를 따라다닐 것이다. 끝내는 그대가 신의 사원에 첫발을 디딜 때에야 마음은 그대로부터 떠날 것이다. 그 이전에는 결코 떠나지 않을 것이다. 마음은 계속 그대를 따라다닐 것이다.
어떤 사업가가 죽었다. 어떤 부드러운 손길이 그의 등을 두드리자 그는 거의 기절할 뻔하였다. 왜냐하면 지상에서 그를 쫓아다니며 괴롭히던 세일즈맨의 목소리가 귀에 울려 왔기 때문이었다. 세일즈맨은 웃으면서 말하였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이곳에 왔습니다.” “무슨 약속?” “사장님께서는 벌써 잊으셨군요. 제가 지상에서 사장님의 회사를 방문할 때마다 당신께서는 늘 이곳에서 만나자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하고 세일즈맨은 말하였다.
그들은 이제 지옥으로 갔다.
마음은 마지막 순간까지 그대를 끊임없이 따라다니며 괴롭힐 것이다. 이렇게 마음은 그대가 죽는 것을 보고 나서야 떠난다. 그러므로 마음과의 싸움은 아주 힘든 것이다. 그러나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어렵지만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한번 무심(無心)의 어디엔가에 도달하게 되면 그대는 지금까지 그대가 어느 곳에 있었던 그 어느 곳도 지금 있는 곳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대는 지금까지 무엇 하나 해보지 못하고 살아온 것처럼 느끼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만큼 그대 자신의 에너지, 그대 생명의 에너지를 발견한다는 것은 귀중하고 깊은 것이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하루는 어떤 물고기가 여왕 물고기에게 찾아와서 물었다. “저는 바다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듣고 바다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렇지만 정말 바다는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여왕 물고기는 웃으며 이렇게 말하였다. “그대는 바다에서 태어났으며 바다 속에서 살고 있다.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그대는 바다 속에 있고, 바다는 그대 속에 있다. 그리고 언제인가 그대는 그 바다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이 질문은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과 똑같다. 바다는 항상 있는데 물고기가 그것을 어떻게 알겠는가? 바다는 한순간도 사라진 일이 없었다. 바다는 지금 여기에 있다. 그러나 바다는 너무나 투명하다. 한 가지 틀림없는 사실은 마음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그 물고기는 바다 속으로 녹아 들어갈 그 마지막 순간까지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할 것이라는 것이다. 너무 가깝다. 그러므로 너무 멀다. 너무나 명백하다. 그러므로 너무 깊이 숨겨져 있다. 너무 쉽게 손이 닿는다. 그러므로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사람 역시 에너지의 바다 속에서 살고 있다. 안도 같은 에너지이며 밖도 같은 에너지이다. 그대는 그곳으로부터 태어나 그 속에서 살고 있다. 그리고 그 속으로 분해되어 갈 것이다. 그대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은 그것이 너무 멀어서가 아니라 너무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그대가 그것을 놓치고 있는 것은 한 번도 그것을 놓쳐 본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언제나 여기에 있었다. 보다 민감해지라.
보다 깊이 꾀꼬리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라. 나무에 귀를 기울여 보라. 그대는 둘러싸고 있는 소리를 들어보라. 모든 것에 귀를 기울여 보라. 모든 것을 눈여겨보라. 모든 것을 만져 보라. 무엇이든 볼 때에는 그대가 눈이 되라. 무엇이든 들을 때에는 그대가 귀가 되라. 무엇이든 만질 때에는 그대가 감촉이 되는 그런 열정과 감수성을 가지고 보고 듣고 만지라. 그러면 어떤 감각만을 분별하지 않고 모든 감각들이 하나로 모아질 것이다. 모든 감각들이 하나의 감수성이 될 것이다. 그리하여 갑자기 그대는 언제나 신 안에서 신과 함께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나에게 있어서는 모든 수련은 어떻게 하면 점점 더 민감하게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지고 있다. 다른 종교들은 그대에게 무감각해지라고 말하여 왔다. 그대의 감수성을 죽여 없애라고 가르쳐 왔다. 그러나 나는 그대에게 가능한 한, 보다 고감도의 감수성을 가지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궁극에 가서는 신은 삶과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삶에 대해 민감한 것이 신에 대해서도 민감한 것이다. 그것이 신을 향한 유일한 기도인 것이다. 다른 모든 기도는 인공적으로 만든 것이다. 감수성이야말로 유일하게신이 내려 준 선물인 것이다.
깨어 있으라! 꾀꼬리 울음소리를 들어 보라. 햇볕이 그대에게 닿는 것을 받아들이라. 그리고 따스함을 느끼라. 바람이 그대를 스칠 뿐만 아니라 그대를 지나가도록 할. 그러면 바람이 그대의 가슴을 순결하게 해줄 것이다. 보라! <강변 수양버들의 푸르름 속에서, 여기에 소가 숨어 있을 리 없다!> 신에게 있어서는 숨는 일이란 불가능한 것이다. 신은 어디에도 숨어 있지 않다. 오직 그대가 눈을 가리고 살고 있을 뿐이다. 그대는 눈이 멀지 않았다! 신은 숨어 있지 않다! 다만 그대의 눈이 가려져 있을 뿐이다. 사념과 욕망, 상상, 꿈, 그리고 허구의 눈가리개들은 모두가 존재하고 있지 않은 것들이다.
그대가 허구를 떨쳐 버릴 수 있다면, 그대가 허구를 끊어버릴 수 있다면, 갑자기 진실이 그대 안으로 들어올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대에게 이 세상을 버릴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나는 그대가 꿈을 버릴 것을 바라고 있다. 그것이내가 바라는 모든 것이다! 오직 그대의 것인 아닌 것만 버려라. 오직 그대가 참으로 손에 들고 있지 않은 것만 버려라. 그대는 그것이 거기에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을 뿐이다. 그대가 꿈을 버릴 때 진실이 그대에게 찾아 온다.
마음은 그렇게 간단히 깨어나지 않기 때문에 투쟁은 더욱 거세어질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마음의 죽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음이 발버둥치면서 저항할 것은 당연한 일이다. 마음의 죽음은 그대의 삶이다. 그리고 마음의 삶은 그대의 죽음이다. 만약 그대가 마음을 선택한다면 그것은 그대 내적 존재의 자살을 뜻한다. 만약 그대가 그대 자신을 따른다면 마음을 떨쳐 버려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명상의 모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