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비평의 현주소
근래 들어 수필계에 작은 변화가 진행되는 것 같다. 수필계 전체가 북적대다 보니 그 작은 조짐이 드러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놀랍게도 변화는 수필비평 쪽에서 일어나고 있다. 수필 문단에서 비평 강좌나 공부 모임이 생겨나고 이를 발판으로 등단 절차를 밟는 사람이 하나둘 등장한다. 수필 전문지도 비평에 지면 할애를 마다하지 않는다. 수필가 중에 비평가로 활동해보겠다는 뜻을 밝히는 이도 있다. 뚜렷한 경향이라고까지 하기는 어려우나 작은 변화인 것은 확실하다. 불모지에 물길이 생기고 초목이 자라기 시작하는 듯해서 반갑기 그지없다. 이 작은 변화가 수필 문단의 폐습이나 적폐를 정화하고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키기를 희망해 본다.
하지만 현재 수필비평의 실상을 들여다보면 희망보다는 우려가 앞선다. 다른 장르의 문인들이 혹시 수필비평의 내막을 들여다볼까 봐 걱정될 때도 있다. 내가 속한 수필비평의 수준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져 숨어버리거나 떠나고 싶을 때도 있다. 하지만 어찌하랴. 속죄하는 마음으로 수필비평이 극복해야 할 몇 가지 문제를 분석해 보고자 한다. 분석 자체도 문제해결의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1. 작품에 종속된 수필비평
문학비평을 포함한 모든 예술비평은 ‘작품에 대한’이란 내재적 형식을 취한다. 1차 텍스트인 문학작품에 관해 말하는 2차 텍스트가 비평이다. 그 언사가 송찬이든 비판이든 간에 모든 예술비평은 태생적으로 구체적인 작품을 향할 수밖에 없다. 이는 숙명적인 것이다. 안톤 체홉은 비평을 두고 ‘소꼬리에 귀찮게 달라붙는 파리와 같이 아주 귀찮은 존재’라고 했는데, 이는 작품 의존적이고 추수적인 비평의 속성을 잘 말해 준다. 물론 작품을 벗어나 문학이론이나 문학사에 집중하는 넓은 의미의 비평도 있지만, 이 또한 바탕에는 작품이 전제되어 있다. 이처럼 모든 비평 행위는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작품과 관련성을 지닌다. 비평은 작품을 떠나 존재할 수 없다. 그런데 문제는 비평이 작품에 전적으로 종속되는 경우다. 비평의 주된 책무가 작품에 대한 해석과 평가이지만, 그것에 종속되어 따라다닐 필요는 없다. 작품은 비평의 대상일 뿐이지 비평의 주인이 아니다.
수필 전문지에 실리는 비평의 평균적인 모습을 보자. 한마디로 작품 추수적인 평문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월평/계간평이다. 지난 호에 발표된 것 중 평자의 기준에서 우수한 작품이나 문제작으로 판단되는 몇 편을 선정하여 작품평을 수행한다. 수필에 관한 보편적인 이론이나 자신의 견해를 제시하면서 출발할 때도 있으나 이것이 선정 작품의 내용이나 실제 작품론과 잘 부합하지 못하고 겉돌기가 일쑤다. 이는 양념처럼 투입된 지적 허영에 그 원인이 있다. 작품 단위로 내용을 정리하고 주관적이고 상식적인 평가를 짧게 내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대부분 평자가 말하려는 바가 잘 드러나는 작품의 한 부분을 직접 인용하고, 인용한 글의 내용을 다시 설명하거나 정리한다. 이런 평문에는 작품의 직접 인용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작품을 주제 중심으로 모아 조망하는 비평다운 면모를 보여주는 것도 있으나 그리 흔치 않다. 어느 경우든 내용 정리 수준에 머문다. 작품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비평이다.
비평은 문학작품을 대상으로 삼는 언어 진술이라면, 그 진술은 작품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 두 가지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등위진술’과 ‘메타진술’이 그것이다. “등위진술은 문학언어와 동차원에 놓여 있는 비평적 진술을 말하고, 메타진술은 문학언어를 기술하는 비평적 진술, 메타언어적 진술을 말한다. 대부분의 비평 속에는 등위진술과 메타진술이 혼재해 있다.” 이 같은 등위진술로서 비평과 메타진술로서 비평을 다른 관점에서 보면, 전자는 작품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에 주목한다면, 후자는 그 작품이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에 집중한다. 전자 쪽으로 과도하게 쏠려 있다는 점이 오늘날 수필비평의 심각한 문제점이다. “문학의 고유한 질서를 존중하면서도 그것에 대한 적절한 개념적·논리적 서술을 가능하게 하는” 메타진술로서 비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다.
분석, 해석, 평가가 비평의 기본 기능이다. ‘분석 - 해석 - 평가’는 그 경계가 맞물린 비평의 순차적 행위이다. 평가 쪽으로 갈수록 추상화가 점층적으로 이루어진다. 분석이 작품에 관한 등위진술에 가깝다면, 평가는 메타진술에 가깝다. 분석의 시선이 작품의 표층에 머문다면, 평가의 시선은 작품의 심층으로 향한다. 현재 수필비평은 등위진술 수준에 갇혀 해석과 평가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 텍스트 표면에 드러나는 인상적인 내용을 찾아 정리하는 일이 고작이다. 전체를 조망하고 거기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비평의 기능이다. 비평은 텍스트에서 출발하지만, 가치 기준에 근거하여 텍스트 의미를 재창조하는 메타적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텍스트를 떠나 창조적 질서를 새롭게 구축하는 것이 비평이다. 이런 점에서 텍스트 내용 정리에 골몰하는 수필비평은 엄격히 말해서 비평으로서 자격 미달이다.
2. 기지촌 지식인의 수필비평
20세기에 들어와 새로운 서구문학 개념과 제도를 수용하면서 문학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전통적인 방법과 가치를 버리고 서구의 것을 모범으로 삼아, 거기에 도달하려고 애썼다. 문제는 눈앞에서 전개되는 현실인데, 그 해결은 늘 서구의 방식을 끌어오는 데 익숙했다. 수필문학도 마찬가지다. 수필은 개인의 일상 경험을 구성하는 문학 장르로 1910년대 출발하여 1930년대에 마침내 정착했다. 그런데 서구문학 체계를 적용하는 데 익숙한 문학이론가들이 자생적 측면은 전혀 고려치 않고 수필을 ‘에세이’로 무리하게 환원하는 오류를 범하고 말았다. 한국수필의 출발 지점에는 낯선 몽테뉴와 베이컨이 조상신으로 모셔 있고, 미셀러니와 에세이는 수필 분류의 철칙이 되었다. 서구의 장르 이론인 삼분법은 문학 인식이나 제도 운용에서 ‘수필’을 제외했다. 아직도 그 여파는 영향을 미치고 있다.
문학비평은 비평가의 예리한 감식력을 필요로 하지만, 이론적 근거 없이는 가치판단에 이르기 어렵다. 비평의 종착지는 판단이고, 그 판단은 객관적 근거와 논리의 뒷받침이 있어야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다. 실제비평에서도 이론적 토대는 소용된다. 실제비평에 응용하는 문학이론이나 비평이론을 비평가 자신이 전부 정립할 수 없다. 비평가는 비평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널리 통용되는 보편적인 이론이나 특정 전문가의 관점을 빌려와 자신의 논리를 보강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인용이나 참고는 비평의 논리를 튼실하게 할 뿐만 아니라, 작품을 다양한 시각에서 해석하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 무엇을 어떻게 끌어다 쓰느냐가 문제이다. 전후 맥락은 빼버리고 특정 이론가의 부분적 언설을 가져와서는 마치 전체나 보편을 대변하는 것으로 과장하는 경우, 일반화되지도 않고 본인도 잘 모르는 생소한 관점을 가져오는 경우, 다른 평문에 수록된 것을 재인용하면서 자기 공부의 결과인 체하는 태도, 국내 문학자의 이론은 외면하고 토양도 다르고 낡은 외국 문학이론을 자기 과시용으로 제시하는 경우, 어떤 이론을 출처를 밝히지 않고 자기 것인 양 슬쩍 도용하는 경우 등이 그것이다. 이런 경우 비평가는 자기의 허술함과 미숙함을 자신만 모른다. 문맥에 모든 것이 그대로 드러나는데도 말이다.
한국문학 연구나 비평의 안타까운 부분은 한국문학의 특수성을 설명해 줄 수 있는 고유한 이론을 생산하지 못하고 문학의 보편성을 핑계로 서구 문학이론을 무분별하게 수용한다는 점이다. 철학자 김영민은 일찍이 ‘나의 문제’를 ‘남의 말이나 글’, 특히 영어로 된 것을 끌어와 풀어내려는 지식인을 ‘기지촌의 지식인’이라고 명명했다.
대체로 이들의 문제 의식은 자신이 몸담고 있는 현실 속에서 자생해 올라온 것들이 아니다. 이들에게 문제의식이 생기는 계기는 마치 비밀 구좌로 돈을 챙기듯 생소한 남의 말로 씌어진 책을 읽거나 남의 땅 구석구석을 다녀본 경험이다. 남의 말로 씌어진 책 속의 정보를 먼저 접한 이들 기지촌 지식인들은 ‘아하’ 하고 무릎을 치며 착안하고 반성하며 깨닫고 판단해서 선각적 계몽인으로의 자신의 소명을 더욱 채근하게 된다. 마침내 이들은 자신의 머리가 속한 현실에서 나온 이론들을 더러는 날것으로, 혹은 체면을 위해서는 조금 변형시키거나 짜깁기해서 자신의 몸이 속한 현실에 적용하게 된다.
‘기지촌의 지식인’이란 개념이 모든 것을 말해 준다. 1980년대 이후 한국 문단에 외국 문학이론이 폭발적으로 유입된 배경에는 이 같은 ‘기지촌의 지식인’의 허영과 얄팍한 술수가 내재했다. 이는 “자신을 팔아버림으로써 자신의 자존을 도모”하는 모순이 아닐 수 없다. 물론 문학이나 비평의 설 자리가 축소된 지금의 상황에서는 ‘기지촌의 지식인’조차도 사라지고 만 것 같다. 하지만 그 잔재는 곳곳에서 드러난다. 의외로 확장일로에 있는 수필비평에서는 기지촌 지식인이 보여준 모순되고 허영에 찬 행태가 고개를 내밀고 있다. 그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도 모르고서.
3. 종속 비평에서 창조적 비평으로
디지털 매체가 오늘의 문화를 주도하는 현실에서 문학은 점점 주변화되고 있다. 예전과 비교하여 문학 창작자와 작품집 출간은 그대로라 하더라도 문학을 소비하는 독자는 많이 축소되었다. 지금의 문학 유통 구조는 기형적이다. 생산은 되지만, 소비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수필가이면서 다른 사람의 수필을 읽지 않는다. 독자가 축소되고 작품이 읽히지 않는 마당에 비평은 문학의 사족에 불과할 수도 있다. 문학의 사회적 가치가 땅에 떨어진 지금, 문학의 진정한 가치를 호소하는 비평의 목소리가 들리겠는가. 세간에 떠도는 우스갯소리에 ‘장가간 아들은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라고 한다. 문학이 그렇다. 문학이란 아들이 부모를 떠나 희미한 옛사랑으로 전락하고 있는데 여기에다 문학비평의 존재 의의를 강조하는 것은 세상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일이다. 대다수는 비평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없어도 아쉬울 것 없다. 비평의 언어는 존재 기반을 잃어버렸을 뿐만 아니라 설득력도 잃어간다. 구색 갖추기에서조차 소외될지도 모른다. 이렇게 된 것은 누구의 책임도 아니고, 추락에서 벗어나 재활할 가능성도 없다.
역설적이게도 비평의 유일한 출구는 자기를 버리는 길이다. 비평은 비평을 버림으로써 새롭게 태어날 수 있다. 그러려면 작품 종속성에서 벗어나 비평 스스로가 주체가 되는 창조적 비평을 지향해야 한다. 또한 현학적인 외국이론을 등에 업고 자신을 치장하는 허영을 청산해야 한다. ‘기지촌’을 떠나야 한다. 주위를 둘러보면 오랫동안 축적된 우리의 이론과 방법도 많이 있다. 가까이 있는 그런 것이 소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