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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쿠가와(가문) 요시노부
(1837-1913) 에도 막부 제일오대, 마지막 장군(1866-1867).미토번주제소의 7남.아명 시치로우마·소치.1847년 이치하시가를 잇는다.62년 막부무의 후견직으로서 공무합체책을 추진.장군과는 후, 프랑스의 원조를 받아 막부에 의한 정치 개혁을 도모했지만, 만회는 안되어 타이세이를 봉환해, 에도 개성 후는 미토에서 근신해, 토쿠가와 종가의 상속자를 전안귀지조(도쿠가와 이에사토)에 양도 슨푸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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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토미히데요시(豊臣秀吉1537-1598)가 생을 마치면서 가장 걱정한 것은 6살 난 아들 히데요리(秀賴 1593-1615)의 장래였다. 자신이 쇼군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아들에게 물려줄 형식적인 권력도 없고, 단지 "천하통일한 사람의 아들"이란 명목을 이어받는 어린 아들을, 이제까지 자기를 섬겨왔던 다른 家臣(다이묘)들이 과연 제대로 섬겨줄 것인지... 세상에 믿을 만한 사람이 몇 명이나 있을까...
일단은 고타이로(五大老)라고 해서 아들의 후견인으로 다섯명(德川家康 前田利家 毛利輝元 小早川隆景 宇喜多秀家, 小早川隆景의 사후에 上杉景勝)의 유력한 다이묘를 임명하였고, 이들에게 혈서로써 충성을 맹세하게 하였다.
그러나 토쿠가와이에야스는 토요토미히데요시의 능력을 인정했기 때문에 허리를 굽히고 모셨지만, 아들에게는 그럴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 서서히 제1인자로 나서려는 야망을 드러내었다.
토쿠가와이에야스(德川家康1542-1616)는 미카와노쿠니(三河國, 현재 愛知縣의 東部)의 오자키城(현재 岡崎市)의 성주인 마츠다이라히로타다(松平?忠)의 長男으로 태어났다.
이에야스는 원래 姓을 마츠다이라(松平)라고 했으며, 이 姓의 시조가 되는 마츠다이라치카우지(松平親氏 1298?-1361?)의 9대손이다. 더 계보를 따라 올라가면 세이와텐노(56대 淸和天皇850-880)의 후손이라고 한다. 시조인 치카우지는 武將이었다고 하며 그가 어느 시점에 미카와노쿠니(三河國)에 흘러들어와 세력을 키우며 영토를 넓혀나갔다.
대를 이어 주변의 땅(三河國에는 대략 70여군데가 넘는 城이 있다)을 제압하면서 처음에 치카우지가 세운 마츠다이라城(松平城)에서 이와즈성(巖津城), 안쇼성(安祥城), 그리고 1524년 이에야스의 할아버지 대에 미카와 지역을 통일하면서 오카자키성(岡崎城)으로 본거지를 옮겨갔다. 이때까지만 해도 서쪽으로는 오다씨(織田氏) 가문의 오와리노쿠니(尾張國)가 있고, 동쪽으로는 이마가와씨(今川氏) 가문의 토오토미노쿠니(遠江國, 현재 靜岡縣 서쪽)과 스루가노쿠니(駿河國, 靜岡縣 동쪽)가 있는데 그 사이에서 세력을 다지며 센고쿠다이묘(戰國大名)로 나서려고 하였다.
그러나 1535년 할아버지가 家臣에게 암살당하고 나서 마츠다이라 가문의 세력은 급격히 쇠약해지고, 이에야스의 아버지 대에도 다시 일어서지 못하니, 결국 이 지역을 차지하고 싶은 오다씨(織田氏, 이 입장에서 보면 미카와 지역이 關東지역을 공략할 길목)와 이마가와씨(今川氏, 이 입장에서는 수도인 교토로 진출해 세력을 잡을 수 있는 길목)의 힘겨루기에 영향을 받는 상황이 되었다. 이로 인해 미키와 지역의 평화를 위해 이에야스는 1547년 오다씨 쪽의 인질이 되었고, 1549년에는 이마가와씨 쪽에서 데려가 어린 시절을 대부분 인질로 지내게 되었다.
1560년 오와리노쿠니를 침공한 이마가와씨가 오다노부나가(織田信長)에게 져서 그 세력이 약해지니, 이를 기회로 19세의 이에야스는 드디어 오자키城으로 되돌아 올 수 있었다. 그리고 1562년 정식으로 오다노부나가와 동맹을 맺었다. 1563-64년 사이 미카와 지역에서 지배 세력에 대항하여 불교의 한 종파(一向宗)의 신도들이 일으킨 항쟁을 강하게 진압을 하면서 지역 전체로 세력을 키워나갈 수 있었다.
1566년 25세의 이에야스는 미카와를 통일하고 朝廷에 자신을 從五位下三河守란 관위로 임명해달라고 신청을 하였다. 천황의 인정을 받아 명실공히 미카와 지역의 지배자가 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조정에서 아무에게나 줄 수 없다고 하자, 세이와텐노(56대 淸和天皇850-880)의 후손이라고 강조를 하여 임명장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아예 묘지(苗字, 名字)를 세이와겐지(淸和源氏) 혈통의 선조에게서 빌려와 토쿠가와(德川)로 바꾸는 것을 허락받았다.
(원래 家康라는 이름도 1563년 22세 때 개명한 것이다. 그 전에는 松平竹千代-> 松平次郞三郞元信-> 松平藏人元康이었다. 이 때 松平藏人家康가 되었다)
지금까지는 마츠다이라(松平氏) 가문내에서 상속받은 일인자였지만, 묘지를 바꾸면서 센고쿠다이묘로서 확고하게 쟁취한 자기 지위를 당당히 후세들에게 보여주고, 더 크게는 세이와겐지의 후손임을 내세워 언제고 전국을 지배하는 쇼군(征夷大將軍)의 자리까지 오르겠다는 야망을 품게 되었다.
이후, 오다노부나가와의 동맹으로 인한 여러 전투를 치루면서 노부나가에게 功을 인정받아 세력을 키우고, 1582년 노부나가의 自害(本能寺の變)가 일어나고 수습 과정을 지나, 미카와(三河)를 비롯하여, 동쪽으로 뻗어가니, 토오토미(遠江, 현재의 靜岡縣西部), 스루가(駿河, 현재의 靜岡縣東部), 카이(甲斐, 현재의 山梨縣), 시나노(信濃, 현재의 長野縣)지역을 지배하는 다이다이묘(大大名)가 되었다.
이 즈음 중앙에서는 노부나가의 사후 그 권력을 이어받으려는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세력이 커지는 상황이었다. 1584년 히데요시가 자신을 키워준 오다(織田氏) 가문을 신하의 위치에 두려고 해서 싸움(小牧長久手の戰い)이 일어나고, 이에야스도 오다씨 편에 서서 히데요시의 군대를 물리쳤다. 그러나 오다씨가 히데요시와 화해를 하면서 이에야스도 물러나, 히데요시에게 만만치 않은 상대라는 것을 보여준 결과가 되었다. 이후 1586년 이에야스도 신하의 위치에서 히데요시와 화해를 하고 전국 통일에 협력하였다.
1590년 히데요시가 서쪽 지방을 평정한 후, 關東지방의 제일 큰 세력인 호죠씨(北條氏)를 공격하는 것을 도와 멸망시키고, 그 功으로 호죠씨의 영토(上野, 下野, 安房, 上總, 下總, 常陸, 武藏, 相模)를 받았다. 그러나 이는 지금까지 이에야스가 다스리던 땅을 내놓고, 이 지역의 본거지로서 미개척지나 마찬가지인 에도(江戶)로 옮기라는 명령이었다. 이에야스의 세력을 더 키워주었다가는 히데요시 자신이 위협당할 것 같았기 때문에 미리 자르기 위한 책략으로, 敵이 다스리던 영토에서 이에야스가 다이묘로서 제대로 지낼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이런 궁지를 더욱 적극적으로 헤치고 나갔다. 히데요시가 城을 세우고 가꾸어 놓은 오사카(大阪)를 모델로 삼아, 에도도 습지와 바다를 흙으로 메우고 수로(水路)를 만들어 사이 사이로 거주 지역을 넓혀나가니, 사람과 물건이 몰려드는 수운(水運)의 도시로 변한 것이다. 또한 敵이었던 호죠씨가 이 지역을 다스리던 방법중에서 좋은 점을 취하여 계속 행하였으며, 그의 家臣들도 받아들여 人和의 경영을 하였다. 히데요시의 생각대로라면 교토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내쫓은 셈이었는데, 이에야스는 도리어 이 지역을 다스리며 250만石의 거대한 富를 거머쥔 최대 유력한 다이묘로 거듭난 것이다.
또한 히데요시의 권력으로부터 받는 견제를 이에야스는 보이지 않게 대항을 하였는데, 농민 출신인 히데요시를 누르기 위해서는 관위를 올리면서 "源氏의 長者"가 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源氏의 長者"는 有力 귀족인 源氏 씨족 중에서, 조정으로부터 받는 관위가 가장 높은 사람이 천황의 임명에 의해 오르는 씨족의 長 자리이다. 源氏 씨족의 대표자로서 그 일원의 관위 승진에 큰 영향을 미치고, 조정 내에서도 강한 발언권을 가지고 있었다.
대부분 쿠게(公家)의 源氏가 오르는 자리였지만, 무로마치(室町) 시대에 3대 쇼군인 아시카가요시미츠(足利義滿)가 武家에서는 처음으로 이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이에야스도 쇼군이 되어 이 자리에 올라, 에도에서 가까운 카마쿠라(鎌倉)에 바쿠후를 세웠던 미나모토노요리토모(源賴朝)를 본받아, 자신도 에도에서 독립된 정치를 펴고자 하는 생각을 더욱 절실히 하게 된 것이다.
이후 1603년에 조정으로부터 右大臣에 임명되면서 征夷大將軍의 직위도 받자, 자신이 德川 姓을 따 온 코오즈케노쿠니(上野國, 현재 群馬縣)에서 뿌리를 내린 닛타겐지토쿠가와(新田源氏得川)의 자손이라고 선언을 하였다.(淸和天皇의 후손이 源氏 씨족인데 이 중에 新田源氏得川가 있고, 그 후손 중에 松平親氏가 있으며, 또 그의 후손 중에 德川家康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源氏의 正統 계보를 지니고 있는 어느 가문의 족보를 사서 끼워 맞추기를 하여, "源氏의 長者" 로 인정을 받았다. 이후 이에야스의 후손들도 쇼군을 물려 받으면서 이 자리도 같이 받았다.
1592년 히데요시가 朝鮮을 침략하기 위해 나고야성(名護屋城, 현재 佐賀縣 東松浦郡)을 본거지로 삼아 가 있는 동안, 여러 다이묘와 함께 이에야스도 出兵은 하지 않았지만 경제력을 바탕으로 정치 군사면으로 히데요시를 보좌하였다. 그리고 1595년 고타이로(五大老)가 되어 히데요시 父子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이후의 政務에 있어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으며, 1596년에는 官位가 正二位 內大臣이 되어 명실공히 히데요시 다음의 실력자로 인정받게 되었다. 1598년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략한 상태에서 생을 마치니, 고타이로의 한 사람인 마에다토시이에(前田利家 1537-1599)와 협력해서 제일 먼저 파병되었던 군사들을 철수하는 데 전력을 기울여 그동안 경제적 부담을 지고 있던 다이묘들로부터 신뢰를 받는 기회를 마련하였다.
히데요시 이후 그 어린 아들을 주축으로 고타이로(五大老), 그 중에서도 이에야스와 마에다토시이에(前田利家)가 힘의 균형을 이루면서 정권을 잡고 있지만, 이전부터 있었던 내부 갈등과 이에야스의 야먕이 얼키면서 1600년, 텐카와케메노타타카이(天下分け目の戰い, 천하를 누가 제압할 지 결정짓는 싸움)라고 불리는 "세키가하라노타타카이(關ヶ原の戰い,현재 岐阜縣 不破郡 關ヶ原町에서 일어난 싸움 )"가 일어났다.
싸움의 한 원인은, 히데요시의 아들인 히데요리를 主君으로 모시지 못하겠다는 이에야스와, 그래도 히데요리가 어느 정도 커서 자기 몫을 제대로 할 수 있을 때까지 家臣(히데요시의 가신이 된 다른 大名)들이 뭉쳐서 토요토미(豊臣) 정권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시다미츠나리(石田三成)를 중심으로 한 家臣들과의 보이지 않는 의견 대립이다.
다른 원인인 내부 갈등은, 히데요시가 朝鮮을 침략하면서 직접 전방에서 싸우는 武將 大名들이 있고 후방에서 이들을 통솔하고 감시하는 역할을 이시다미츠나리(石田三成) 외 몇명에게 맡겼는데, 이 두 파벌이 침략의 상황이나 明과의 강화조약을 맺는 과정에서 의견이 부딪치는 경우가 많았다.
처음에는 그저 뭉쳐지지 않은 세력들의 여러 힘 겨루기 정도였지만, 정권의 중심에서 자신에게 반대하는 세력들을 서서히 배제하고 싶은 이에야스는 이 상황을 잘 이용하게 되었다.
이에야스도 견제하며 파벌간의 암투도 어느 정도 누르고 있던 마에다토시이에(前田利家)의 사후, 石田三成의 반대파들이 미츠나리를 습격하였고, 미츠나리는 이에야스의 보호하에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후 이에야스의 중재로 반대파들은 더 이상 공격을 하지 않았고, 미츠나리는 이 일에 대해 어느 정도 책임을 지고 정권의 중심에서 벗어나 佐和山城(현재 滋賀縣 彦根市)에서 근신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토요토미(豊臣) 정권내에서 私的인 싸움은 금지했음에도 불구하고 먼저 공격을 한 미츠나리의 반대파들을 엄하게 처벌하지 않았는데, 이는 이들이 시대의 변화를 감지하고 이에야스에게 복종했고, 이에야스의 보이지 않는 책략으로 미츠나리를 공격하였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보면, 자신에게 제일 반대하던 미츠나리를 남의 손을 빌려서 일단 배제한 셈이 되었다.
이후, 자신에게 반대하는 중요 가신들을 정치적 책략으로 복종토록 하거나 아니면 스스로 중앙에서 물러나게 하였으나, 확고하게 이에야스가 정권을 잡기에는 무언가가 부족하였다.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가 있어서 "토요토미 정권"이라는 간판이 붙어 있는 이상, 다른 많은 다이묘들과 확실한 관계 정립이 필요했고, 이를 위해서는 무슨 이유를 만들어서라도 싸움을 일으켜 적과 아군을 구분하여 힘을 과시할 필요가 있었다. 물론 이에야스는 대부분의 다이묘들이 자신의 편이 될거라고 예상했고, 出兵의 이유를 만들어야 했다.
구실을 만들어 준 사람이 있으니, 고타이로 중의 한 사람인 우에스기카게카츠(上杉景勝)이다.
카게카츠는 히데요시에 의해 아이즈(會津, 현재 福島縣 西部)의 다이묘로 임명된지 1년밖에 안되어서 중앙의 정치도 중요하지만 자신의 영지를 제대로 다스리는 것에 더 힘을 썼다. 城을 새롭게 세우고 街道를 정비하고 사람들을 모으는 행위가 싸움을 준비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이를 좋은 구실로 잡을 수 있었다.
이에야스는 이를 토요토미 정권에 대한 반역 행위이며, 싸움을 준비하는 것이므로 히데요리를 보호하기 위해 먼저 上杉景勝를 타도해야 한다면서, "公的"인 싸움이므로 전체 다이묘들에게 出兵을 명령하였다. 그리고는 우선 어느 정도 石田三成에게 반대하는 다이묘들을 이끌고, 이제까지 政務를 보던 오사카(大阪, 히데요시의 유언으로 아들 히데요리가 교토의 伏見城에서 大阪城으로 옮겼으므로 家臣들도 따라왔다 )를 출발하여 會津를 향해 東쪽으로 이동하였다.
그런데 이에야스가 오사카를 비운 사실을 안 石田三成가, 이 기회에 이에야스를 공격하여 자신의 뜻대로 토요토미 정권을 유지하고자 하는 생각을 일으켰다. 군사를 모으기 위해, 더 西쪽에서 와서 오사카를 거쳐 東쪽인 會津로 가려는 다이묘들에게 이에야스의 명령을 따르지 말고 도리어 그와 싸워야 하는 이유를 대며 자기 편으로 삼았다. 이렇게 하여 이에야스의 東軍과 미츠나리의 西軍이 성립하였고, 西軍은 이에야스를 따르는 지역을 공격하면서 勢를 넓혀 나갔다.
이에야스는 會津로 가는 도중, 小山(현재의 ?木縣 小山市)에서 미츠나리의 擧兵 소식을 듣고, 도중에 증강된 휘하 다이묘들에게 어느 편에 붙을 것인지 거취를 분명히 하라 하고, 이에야스 편으로 결정되니 군대를 돌려 西쪽을 향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에야스가 오사카로 진군한다는 거짓 정보를 흘려 西軍이 길목을 막고 포진하니, 東軍이 7만4천, 西軍이 8만2천 합쳐서 15만이 넘는 병력이, 좁은 세키가하라(關ヶ原) 盆地에 집결한 것이다.
숫자로도 서군이 많고 포진한 위치로도 서군이 동군을 좌우에서 에워싸는 모양으로 있기 때문에 서군의 승리로 끝날 수 있는 싸움이었다. 그러나 8만2천이라는 병력이 한꺼번에 동군을 공격한 것도 아니었고, 이 중에는 미츠나리를 따라서 서군이 되었지만 이에야스와도 은밀히 내통해 상황만 바라보거나, 지원하러 오는 서군의 다른 편을 길목에서 막고 있는 등, 생각만큼 쉽게 이기지 못하고 있었다.
이 때 코바야카와히데아키(小早川秀秋)라는 다이묘가 우연히 오사카에 있다가 미츠나리에 의해 여기까지 왔는데, 어느 편에 확실하게 붙을 지 이 때까지도 망설이다가 드디어 결정을 내리고 서군을 공격하였으며, 이를 보고 西軍의 일부 다른 다이묘들도 미츠나리를 공격하여 결국 東軍의 승리로 끝났다.
이렇게 싸움을 통해, 그동안 중앙의 권력이 누구에게 집중되고 있는 지, 어느 시점에 어느 편에 붙어야 할 지, 어떻게 해야 자신의 가문과 영토가 보전될 지, 관망만 하고 있던 많은 다이묘들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싸움터에 끌려 나와 자신의 선택을 확실하게 보여준 셈이 되었다.
이에야스 입장에서도, 만약 자신이 성급하게 욕심을 부려 이유없이 다른 쿠니(國)를 침략해서 복종시키면 다이묘들의 불만만 사서 더욱 거센 반항만 받을 텐데, 상황이 이루어질 때까지 기다린 것인지, 아니면 뒤에서 조종한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어찌 되었건 石田三成와 上杉景勝 덕분에 전면에 나서 당당하게 정권을 잡을 수 있었다. (싸움이 끝나고 石田三成는 도망다니다가 붙잡혀 처형되었고, 上杉景勝는 會津보다 더 작은 영지로 쫓겨났다)
이에야스에게 복종한 다이묘들은 더 큰 영지를 받게 되었고, 끝까지 항전한 다이묘들은 영지를 빼앗기거나 축소되고 집안이 몰락하는 경우도 생겼다. 그리고 이 기회에 토요토미(豊臣) 씨족이 다스리던 영지도 몰수해서 히데요시 시절에 222만石이던 영지를 65만石으로 줄여 버렸다. 이에야스 자신의 영지는 반대로 250만石에서 400만石으로 늘어나, 이제까지 천하 통일을 하고 主君처럼 권력을 지니고 있던 토요토미 씨족(결국 아들 히데요리)은 오사카성(大阪城)을 본거지로 한 다이묘 수준으로 몰락하게 되었다.
1603년 62세의 이에야스는 드디어 右大臣에 임명되면서 征夷大將軍 직위도 받아, 여지껏 토요토미 정권하에서의 家臣이던 자신의 위치를 벗어나게 되었다. 당당히 에도(江戶, 현재의 東京)에 바쿠후를 열고 정치적 경제적 권력을 바쿠후, 특히 토쿠가와 가문으로 집중시키니, 교토의 천황이나 조정, 다른 다이묘들이 이를 거역할 수가 없었다. 1605년에는 쇼군직을 아들 히데타다(秀忠 1579-1632)에게 물려주어, 앞으로 쇼군직은 토쿠가와 가문에서 세습한다는 것을 만천하에 공표한 셈이 되었다.
쇼군직은 아들에게 주었지만 중요한 정책 결정은 이에야스가 해 나갔는데, 가장 큰 문제가 남아있었다. 오사카성에 살고 있는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의 존재가 은연중에 토요토미 정권의 부활을 원하는 다이묘들과 합심해서 언제고 토쿠가와 가문에 해를 입히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었다. 그렇다고 이유없이 오사카성을 공격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일단은 히데요리의 경제력을 약하게 하며 때를 기다리기로 했는데, 예전에 히데요시가 교토에 세웠던 호코지(方廣寺)라는 절이 지진으로 무너졌는데 이것을 재건하도록 부추겼다. 그런데 1614년 절이 완성되면서 만든 鐘이 문제가 되어, 이에야스가 오사카성을 공격하는 구실로 삼았다. 종에 쓰여진 문구(?家安康, 君臣豊樂)가 실제로는 그런 의미가 아닌데, "이에야스의 이름을 분할하여 나라를 평안하게 하고, 토요토미를 주군으로 모셔 자손이 번영하게 하자"라는 의미라고 물고 늘어져, 오사카후유노진과 나츠노진(大坂冬の陣과 夏の陣) 두 번의 공격으로 결국 1615년 토요토미 씨족을 멸망시켰다. (히데요시에게 많은 형제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아들도 히데요리 하나 남았는데 여기서 自害를 했으니 더 이상 토요토미 씨족은 뻗어나갈 수가 없었다)
어린 시절부터 수많은 武將들의 영토 싸움을 보아왔고, 자신도 그 틈에서 큰 고비마다 잘 견뎌 멸하지 않고 살아남아 征夷大將軍이 되어 천하를 토쿠가와 가문의 손아귀에 넣었고, 또 그 권력이 방해받지 않도록 길을 다져놓는 것까지 자신의 사명으로 여겼던 이에야스.
1616년 75세에 從一位 太政大臣이 되었고 한달 뒤 생을 마쳤다.
처음에는 유언에 의해 쇼군직에서 물러나 머물던 슨푸(駿府, 현재 靜岡市, 駿河國)의 남동쪽에 있는 쿠노잔(久能山)에 묻혔는데, 1617년 조정으로부터 神格化되어 "토쇼다이곤겐(東照大權現)"이란 神號를 받아 에도성(江戶城)의 북쪽에 있는 닛코잔(日光山, 현재 ?木縣 日光市)으로 이장되었다. 닛코잔에 토쇼샤(東照社)라는 神社를 지어 옮겼고, 이에야스는 에도 바쿠후의 수호신으로 "토쇼신쿤(東照神君)"이라 불리며 숭배를 받았다. 그리고 1645년에는, 天皇家와 관련이 있는 사람이나 神을 모시는 神社는 신구(神宮)라 하는데, 이 곳도 그렇게 인정되어 토쇼구(東照宮)로 명칭이 바뀌었다. 또한 전국적으로 이에야스를 "카미(神)"로 모시는 神社, 즉 토쇼구(東照宮)가 많이 생겼다.
이렇게 한 시대의 풍랑에 흔들려가면서도 자신의 뜻을 이룬 토쿠가와 이에야스, 그에게 있어서 "믿고 맡길 사람"은 자식밖에 없던 것 같다. 아니 어쩌면 토요토미히데요시의 경우를 보아서도 자식은 많아야 했다. 꿈을 이루었지만 자기 세대에서 끝나 버린다면, 정말 꿈이 꿈처럼 아스라하게 멀어져 기억도 나지 않을 것이다. 그런 걱정 때문인지 정부인 2명, 측실 15명을 통해 11男5女를 두었는데, 11명의 아들 중 6명은 어린 나이이거나 이에야스가 권력을 잡기 전이나, 잡아도 초창기에 세상을 떴다. 남은 아들 중 한 명은 별다른 권력 없이 "자유인"으로 살다 마쳤고, 결국 세 아들이 이에야스의 꿈을 이어받았다.
세 번째 아들인 히데타다(秀忠, 1579-1632)가 쇼군직을 물려받고, 德川氏의 本家인 토쿠가와쇼군케(德川將軍家)의 당주(當主)가 되었다. 이후 이 계통으로 쇼군직이 이어져 15대까지 내려갔다. 물론 이 계통에서 물려받을 사람이 없을 경우를 생각해서 고산케(御三家, 즉 尾張德川家, 紀州德川家, 水戶德川家)라는 세 군데의 分家가 만들어졌다. 고산케와 이후의 고산쿄(御三鄕)에서 양자를 데려와 혈통을 이어가 15대 쇼군까지 배출하였다. 그 후 바쿠후는 없어져도 이 가문에서 당주의 지위는 계속 이어져 현재 18대 당주 츠네나리(德川恒孝 1940-)가 있으며, 2003년에는 이 가문의 귀중한 유산을 관리하기 위해 財?法人?川記念財?을 설립하였다.
아홉번째 아들인 요시나오(義直, 1600-1650)를 오와리토쿠가와케(尾張德川家)의 첫 당주로 삼아, 에도와 교토를 연결하는 중요 길목(東海道)인 오와리노쿠니(尾張國) 나고야(名古屋)에 城(1612년 완성)을 짓고 이 지역을 다스리게 하였다. 이 자손들 중에서 쇼군이 된 사람은 없지만, 현재까지 이어져 내려오며, 나고야市 東區에 德川美術館을 열어 선조들의 역사와 소장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열번째 아들인 요리노부(賴宣, 1602-1671)는 키이노쿠니(紀伊國, 현재 和歌山縣)를 다스리게 하여 키이토쿠가와케(紀州德川家)의 선조가 되었다. 특히나 이 계통에서는 당주가 先代 쇼군의 養子가 되어 쇼군 자리를 물려 받은 경우가 있는데, 8대 요시무네(德川吉宗 1684-1751)와 14대 이에모치(德川家茂 1846-1866)이다.
요시무네의 경우, 자신의 서자(庶子) 두명을 이에야스처럼 분가시켜 새롭게 가문을 만드니 타야스토쿠가와케(田安德川家)와 히토츠바시토쿠가와케(一橋德川家)라고 하였다.
그리고 요시무네의 아들이며 9대 쇼군이 된 이에시게(德川家重 1712-1761)가 또 자신의 서자를 분가시켜 만든 시미즈토쿠가와케(淸水德川家)를 합쳐서 고산쿄(御三鄕)라고 부른다.
이에야스가 만든 고산케(御三家)는 영지를 받았지만, 고산쿄(御三鄕)는 에도에 거주하며 바쿠후로부터 봉록만 받았다. 그리고 이 가문에서도 쇼군 자리를 잇게 하였다. 실제 11대 쇼군 이에나리(德川家齊 1773-1841)와 15대 마지막 쇼군 요시노부(德川慶喜 1837-1913)가 히토츠바시토쿠가와케(一橋德川家)에서 쇼군케(將軍家)에 양자로 들어와 쇼군이 되었다.
열한번째 아들 요리후사(賴房 1603-1661)는 히타치노쿠니(常陸國, 현재 茨城縣) 미토한(水戶藩, 水戶市)을 다스리며 미토토쿠가와케(水戶德川家)의 선조가 되었다. 이 가문에서는 영지가 있어도 당주가 水戶에 머무르지 않고 에도에 머무르며 쇼군을 보좌하는 역할을 맡았다. 또한 여기서는 다른 고산케와는 달리 쇼군케에 양자를 보내지 않아, 즉 쇼군을 배출하지 않는다는 원칙이 있었는데, 히토츠바시토쿠가와케(一橋德川家)에 양자로 들어간 후손의 아들이 쇼군케에 양자로 갔으니, 15대 마지막 쇼군 요시노부(德川慶喜 1837-1913)이다.
요리후사는 이후 둘째 아들에게 2대 한슈(藩主)의 자리를 물려주었는데, 이 사람이 후세에 미토코몬(水戶黃門)이라 불리는 토쿠가와미츠쿠니(德川光? 1628-1701)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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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藩)은
토쿠가와 바쿠후의 家臣 중, 1만石을 넘는 영지를 가지는 사람을 한슈(藩主) 또는 다이묘(大名)라 불렀으며, 그 영지나 행정 기구를 가리킨다. 지역명인 무슨 무슨 쿠니(* *國)안에는 몇 군데로 나뉘어진 한(藩)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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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즐겨보는 시대극 "미토코몬(水戶黃門)"의 주인공이 도대체 누구인가, 이 궁금증을 풀기 위해 너무나 장황한 역사 이야기를 하였다.
토쿠가와미츠쿠니(德川光?)라는 사람이 태어나기까지 일어난 이 모든 일이 필연이까 우연일까... 그러나 필연인지 우연인지 정확히 따지기 이전에 그냥 숙연해지는 기분이다.
얼키고 설킨 수많은 인과(因果)관계 속에 누구든지 처해있고,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그 자리에서 미래를 위해 어떠한 因을 자신이 만들어낼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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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시대(江戶時代)
① 막번체제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약소 다이묘오의 하나였지만, 차츰 세력을 키워, 히데요시의 사후 1600년에 세끼가하라(關ヶ原)의 전투에서 토요토미파를 격파하고, 1603년 정이대장군이 되어, 에도(현재의 토오쿄오)에 막부를 설치했다. 이후 약 260년간을 에도시대라고 한다.
에도막부는 전국의 약 4분의 1에 해당하는 넓은 영지외에도 쿄오토, 오오사카, 나가사끼 등 주요 도시를 막부직할령으로 직접지배했다. 또 토쿠가와씨 일족(親藩大名)이나, 이전부터의 가신(譜代大名)들에게는 에도에 가까운 영지를 나누어 주고, 세끼가하라 전투이후 가신이 된자(外樣大名)들에게는 東北, 四國, 九州등의 외곽지의 영지를 배분했다. 이와같이 막부가 나누어 준 영지를 한(藩)이라 하고, 그 영주를 다이묘오(大名)라 부른다.
막부는 전국의 한을 지배하기 위해서 실제적인 조직(막번체제)를 구성했다. 장군의 밑에 정무를 분담하는 부교오(奉行)를 설치하고 있다. 또 비상시에는 막부 최고의 직책인 다이로오(大老)를 설치하고 있다. 막부는 다이묘오가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규칙(武家諸法度)을 제정하고, 만일 그것을 어기면 영지를 바꾼다든지, 몰수하는 무거운 벌을 주었다. 그러나 막부정책의 범위내에서는 다이묘오는 자기 한에서 독자적인 정치를 할 수가 있었다. 막부는 그밖에 조정의 권한을 제한하고, 사원의 행동에도 간섭을 했다.
3대장군 이에미쯔(家光)는, 다이묘오들의 정실을 에도에 거주하게 하고, 다이묘오들은 격년제로 에도와 자기 영지를 왔다갔다하게 하는 참근교대제를 만들었다. 참근교대에는 막대한 비용이 들었다. 또한 막부는 전국적 규모의 임시공사등도 다이묘오들에게 그 비용을 부담시켰다. 그것은 모두, 다이묘오들에게 경제적으로 고통을 줌으로써 하극상을 방지하는 것이 그 주된 목적이었다.
② 신분제도
막부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총인구의 80%를 차지하는 농민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지배하는가 하는 문제였다. 그것은 농민으로부터 거두어 들이는 세금(年貢)이 막부의 주된 재원이었기 때문이다. 이에야스는 「백성들은 죽지 않게끔, 살지도 못하게끔 잘 생각해서 세금을 거두라」고 말하고 있다. 막부와 각번들은 규칙을 정해서 농민의 일상생활을 세세하게 지시하고, 제한했다. 예를 들면, 「쌀은 세금으로 바치는 것이므로 너무 많이 먹지 않도록, 밥에는 보리나 무우 등을 섞어서 먹을 것, 술이나 차를 사마시지 말것, 의복은 마나 면이외에는 입지 않을 것」따위이다. 또 집 5~6호로 5인조를 구성하여, 납세나 방범의 책임을 공동으로 지게 했다.
소수의 무사계급이, 많은 수의 농민이나 쵸오닝(町人=상인이나 기술자층)을 효율적으로 지배하기 위해서 막부는 사공농상(무사·농민·직인·상인)이라는 신분제도를 만들었다. 최상위 계급인 무사는 무예나 학문을 닦으며 허리에 두 자루의 칼을 차고, 농민이나 쵸오닝 등이 무례를 범하면 그 자리에서 목을 쳐 죽여도 괜찮았다. 농민이나 쵸오닝은 무사들과 달리 성도 없고, 다이묘오 행렬을 만나면 길에 엎드려 머리를 숙여야만 했다. 이와 같이 상·하를 차별하는 사고방식은 무사사회에서는 주군과 부하의 주종관계를, 가정에서는 부모와 자식,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결정하는 근거가 되고 있다. 막부는 이와 같이 하여 막부체제를 견고하게 다져 봉건사회를 유지했다.
③ 쇄국
이에야스는 처음에는 해외도항을 허가하고 주인선(=막부의 허가를 받은 무역선) 무역도 허가했었다. 그래서 많은 일본인들이 필리핀이나 태국, 베트남 등에 일본인 마을을 만들고 생활하고 있었다. 태국에서 활약한 야마다 나가마사(山田長政)가 그 대표적 인물이다. 그러나, 기독교가 맹렬한 기세로 전파되는 것을 보고 위기감을 느낀 이에야스는 기독교 금지령을 내렸고, 이어 3대 장군 이에미쯔는 일본인의 해외도항금지 및 해외도항자의 귀국을 금지시키고, 이 규칙을 어기면 사형에 처했다.
이 무렵 1637년 큐우슈우의 시마바라(島原)에서 농민들이 과중한 세금과 기독교금지 등에 반항하여, 16세의 소년 아마쿠사 시로오(天草四郞)를 대장으로 삼아 잇키를 일으켰다. 막부는 4개월 걸려 이 난을 진압하고, 이후 기독교에 대한 탄압을 더욱 강화했다. 그리고, 예수나 마리아의 그림을 밟게하는 방법(후미에)으로 기독교 신자를 가려내어 처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숨어서 기독교를 믿는 자들이 없어지지 않고 막부의 탄압과 순교가 계속되었다.
막부는 1639년, 쇄국령을 공포하여 기독교와 관계가 없는 네덜란드인과 중국인에게만 나가사끼의 데지마(出島)에서의 무역을 허가했다. 이 쇄국정책에 의해서 일본은 서양문명으로부터 고립되었지만, 일본 독자적인 문화나 산업이 발달했다는 측면도 무시할 수 없다.
④ 산업의 발달
에도시대가 되어 전란이 없는 평화가 지속되자, 농업은 더욱 더 발달되었다. 농민은 황무지를 개간하여 전답을 넓히고, 농구를 개량, 재배작물의 종류를 다양화하기도 했다. 쌀이외에 면, 생산, 채종유 등 각지의 특산물을 상인에게 팔아 부농이 되는 자도 있었다. 견직물, 술, 종이 등의 수공업도 발달했다.
산업의 발달이나 참근교대제의 영향으로 도로교통이 발달하여 전국에 5개의 가도가 생기고, 그 가도에는 역참이 생겨났다. 또 쌀 등의 대량의 물자를 수송할 때는 배가 빈번이 이용되게 되어, 항로도 발달했다.
산업과 교통의 발달에 따라, 상업도 융성하게 되었다. 막부나 다이묘오가 거둔 연공미는 오오사카에서 현금과 교환했기 때문에, 오오사카에는 코오노이께, 미쯔이 등과 같은 대상인이 생겨났다.
상업의 발달에 따라 정치의 중심지였던 에도는, 인구 100만에 가까운 대도시가 되고, 오오사카는 상인의 도시, 경제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천하의 부엌」이라고 말해졌다.
⑤ 쵸오닝 문화
평화로운 세상이 되자, 학문과 예술도 융성하게 되었다. 막부는 중국의 유학, 특히 주자학을 보호하고, 막부에 學問所를 설치하고 무사의 자제들을 배우게 하였다. 주자학은 주군과 부하, 부모와 자식 등의 상하질서를 매우 중요시했기 때문에, 막부의 정치에는 매우 바람직한 것이었다. 무사뿐만 아니라, 쵸오닝들도 「읽기, 쓰기, 주산」등의 교육을 중시하게 되었다. 서민의 교육은 처음에 절에서 행해졌으나 나중에는 데라코야(寺子屋)라고 하는 교육기관이 전국적으로 만들어지고, 승려나 신관, 실직무사들이 교육을 담당했다.
5대장군 쯔나요시(網吉)의 시대, 오오사카·쿄오토에서 쵸오닝들의 새로운 문화(겐로꾸 문화=元祿文化)가 생겨났다. 오오사까의 쵸오닝인 이하라 사이카꾸(井原西鶴)는 겐로꾸시대 서민들의 생활을 『好色一代男』이나 『世間胸算用』등의 소설에서 묘사했다. 그의 소설에는, 화폐경제가 발달하여 돈이 인간생활을 지배하게 된 사회에서, 돈에 운명이 좌우되는 서민들의 모습이나, 당시의 개방적인 향락생활이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⑥ 3대개혁
에도시대가 시작되고 100여년이 지난 겐로꾸시대부터, 막부의 재정이 어렵게 되었다. 막부는 질이 나쁜 화폐를 자주 발행했기 때문에, 경제는 큰 혼란을 겪었다. 물가가 오르고 사람들의 생활이 어려워졌다. 특히 하급무사들은 영주로부터 받는 월급으로는 도저히 살 수가 없어서, 상인으로부터 돈을 빌리거나, 무사의 신분을 파는 자조차 생겨나오게 되었다. 18세기 전반, 8대장군 요시무네(吉宗)는 막부의 재정을 재건하기 위해서 여러가지 개혁을 단행했다(亨保의 개혁). 우선 새 논을 개척하여 세수증대를 계획하고, 무사들에게는 사치를 금하고 절약을 명하였다.
경제가 점점 발달하고 화폐가 농촌에서도 사용되게 되자, 농민사이에서 빈부의 차가 커지고 농촌을 떠나 도시로 나가는 빈농들도 많아졌다. 또 냉해나 대기근이 발생하여 굶어죽는 자도 많이 나와 농촌의 비참은 극에 달하였다. 18세기 말, 막부는 재차 정치의 개혁을 단행, 무사에게 검약을 명하고, 무사가 상인들로부터 빌린 돈은 갚지 않아도 좋다는 명을 내려 무사의 생활을 도와 주었지만, 개혁은 실패로 끝났다(實政의 개혁)
막부는 재정의 곤란을 해결하기 위해 농민의 세금을 점점 더 부과하게 되었다. 생활에 곤란을 느낀 농민은 연공을 경감시켜 줄 것을 번주나 중앙정부에 요구하고,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힘으로써 저항했다(百性一撥). 막부는 이를 엄하게 금지했지만, 18세기 중반 이후가 되면 잇키는 자주 발생했다. 또한 가난한 쵸오닝들도 에도나 오오사카에서 미곡상이나 고리대금업자 등의 대상인을 습격하여 가옥파괴, 방화, 약탈 등을 감행하기도 했다. 1837년 전직 관리였던 오오시오 헤에하찌로오는 가난한 자를 위하여 오오사카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곧 진압되고 만다. 이 반란이 진압된 뒤, 막부는 세 번째의 개혁(天保의 개혁)을 단행하여 무사에게는 검약을 명하고, 대상인들에게는 매점매석을 하는 조합을 금지시키는 등 조치를 취했지만, 이것도 성공하지는 못했다.
⑦ 새로운 학문
유학이 여전히 주도적이었지만, 이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는 국학(國學)이나 양학(洋學)등의 새로운 학문이 생겨나왔다. 국학은 일본의 고전을 연구하여 일본고유의 사상을 탐구하는 학문으로, 국학자들은 『万葉集』나 『古事記』등을 실증적인 방법으로 연구했다. 국학자중에서 『古事記傳』이라는 『古事記』의 주석서를 쓴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가 유명하다. 국학은, 후일 천황의 직접 정치를 부활시킬려고 하는 존황사상이나, 외국세력을 배척하는 양이사상을 키워, 막말에 일어난 존황양이운동의 추진력이 되기도 한다.
서양의 학문이나 지식은, 쇄국동안 막부가 무역을 허락한 네덜란드로부터 전해졌기 때문에, 난학(蘭學)으로서 발달했다. 그중에서 특히 발달한 것이 의학의 연구로, 스기타 겐빠쿠(杉田玄白) 등은 네덜란드의 해부학책을 번역하여 『解體新書』를 출판했다. 또 히라가겐나이(平賀源內)는 새로 배운 학문을 응용하여 일본에서 최초로 발전기를 제작하고, 이노오 타다타까(伊能忠敬)는 서양의 기술을 도입하여 일본 전국의 실측지도를 제작했다. 양학에 의해, 서양의 사정을 알게됨에 따라 막부의 쇄국정책이나 양이사상에 반대하고, 일본의 개국을 주장하는 자들이 늘어났다. 그리고 그런 사고방식이 막부를 무너뜨리는 운동과 연결되어 갔다.
⑧ 개국
일본이 쇄국을 계속하고 있는 동안, 구미제국은 근대국가로서 조직을 정비했다. 18세기 후반, 영국은 산업혁명을 수행하고 세계에 진출하여 해외시장을 손에 넣었고, 미국도 아시아에 진출하는 것을 고려하고 있었다.
18세기 말, 러시아가 일본과의 통상을 요구했지만, 막부는 쇄국을 고집했다. 그 후 영국, 미국의 선박이 일본근해에 와서 물과 식량의 보급을 요구하는 일이 자주 있었지만, 막부는 이를 물리치고, 개국론자들을 처벌했다.
1853년 미국의 페리제독이 군함 네척을 이끌고, 우라가(浦賀)에 왔다. 막부랑 에도 주민들은 대포가 있는 군함에 깜짝 놀라, 그것을 흑선이라고 불렀다. 1854년 막부는 미국의 강화 요구를 받아들여, 일미화친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으로 외국배가 시모다(下田)와 하코다떼(函館) 두 항구를 사용하는 것을 인정했다.
이어 1858년 미국 총영사 해리스가 시모다에 와서, 미국과의 통상을 요구했다. 막부는 조정이나 다이묘오 등과 상담을 했지만 모두 반대했다. 그러자 다이로오인 이이 나오스케(井伊直弼)는 조정의 허가를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일미수호통상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으로 5개의 항구를 무역을 위해 사용할 것을 허가하고 있고, 그밖에도 불평등한 내용이 두 가지 더 있었다. 하나는 수입품에 대해서, 일본이 자유로이 관세를 결정하는 권리(관세자주권)를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외국인이 일본에서 범법을 하더라도 일본의 법률로 재판하지 못한다고 하는 치외법권의 허용이었다. 존황론자나 양이론자들이 이이 나오스케가 조정의 허가없이 조약을 맺은 것을 강력히 비난하자, 이이는 이들 반대파들을 사형에 처하는 등 엄하게 다스렸기 때문에, 결국 에도성의 문앞에서 반대파등에 의해 암살되고 말았다.(櫻田門外의 변:1860)
⑨ 막부말기
개국에 의해 무역이 시작되자, 생사나 차들의 수출이 급증하여, 국내 물자의 부족현상을 보이고, 물가가 앙등하여 경제가 혼란상태에 빠졌다. 그로 인해 하급무사들이나 서민의 생활이 더욱 궁핍하게 되었다. 이같은 상황에서 사쯔마(지금의 가고시마현)와 쵸오슈우(야마구찌현)의 하급무사 사이에서, 존황론과 양이론이 결합된 존황양이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막부는 조정과 협력하여 정치를 행할 것, 즉 공무합체를 고려했지만, 존황양이파들은 더욱 자기들의 생각을 다져나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끝내 사쯔마번은 영국의 함대와 싸우고, 쵸오슈우번은 영국, 프랑스, 미국, 네덜란드의 4국 함대와 교전했다. 그러나 이 싸움을 통하여 사쯔마, 쵸오슈우의 두 번은 외국의 힘을 실감하고, 양이의 불가능함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두 번의 젊은 무사들은 막부를 타도하고 천황중심의 새로운 정치를 실행해야 한다고 생각, 존황도 막운동을 추진했다. 사쯔마번의 사이고오 타까모리, 오오쿠보 도시미찌등은 도사(코오찌현)의 사까모토 류우마의 중재로 쵸오슈우의 키도 타카요시 등과 동맹을 맺고 신정부 수립을 약속했다. 그리고 영국에 접근하여, 서양식 군비를 정비했다. 한편, 막부도 프랑스의 원조를 받아 군함이나 무기를 구입, 두 번에 걸쳐 쵸오슈우번을 정벌하려고 했지만 실패로 끝났다. 이것을 지켜본 사이고오등은, 무력으로 막부를 전복시킨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 무렵, 정치와 경제의 혼란으로 인해 에도와 오오사카에서 대규모의 폭동이 일어나고, 농민봉기도 전국적으로 발생했다. 또, 사회의 불안으로 인해, 구원을 바라는 심리에서 이세신궁에 참배하는 것이 대유행하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 15대 장군 요시노부(慶喜)는,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서, 1867년 정권을 천황에게 반납한다고 선언(大政泰還)하고, 조정은 이를 받아들여, 천황정치가 부활했음을 정식공포했다(왕정복고). 그러나 신정부가 요시노부에게 관위를 주지 않고, 그의 영지를 모두 조정으로 귀속시키기로 결정하자, 막부측의 무사들은 이에 불만을 품고, 쿄오토에서 전쟁을 일으켰다. 신정부군은 도바, 후시미에서 승리하고 요시노부를 토벌하기 위해 에도로 향했다. 그 때, 막부측의 카쯔 카이슈우(勝海舟)와 신정부군 쪽의 사이고오가 회담, 막부측은 신정부군에게 자진 에도성을 건네주는 조건으로 토쿠가와 가문을 존속시킬 것을 결정했다. 이렇게 하여 약 260년간 계속된 에도막부는 끝나게 된다.
첫댓글 좋은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