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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글은 필자가 지난 11월 11일 안동에서 실시한 월례웰빙교양강의안의 전문입니다./ 최익제(敎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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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행복 메뉴얼; 일곱가지 웰빙 스펙트럼(2)
인류의 기대수명은 19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50세를 넘기지 못했습니다. 당시는 100년 동안 고작 1년이 늘어나는 수준이었습니다. 이후 20세기에 이르러 공중보건과 의학의 발달로 기대수명이 급격하게 늘어나면서 10년마다 3년씩 늘어났고 마침내 금세기에 이르러 인류는 백세시대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미국 일리노이대의 슈트어트 올샨스키(S.Olshasnky) 교수팀의 최근 연구 결과는 이같은 기존의 흐름을 뒤엎는 주장들입니다. 1990년부터 2019년까지 한국을 포함 10여 개 국가를 대상으로 연령, 성별 사망률을 분석한 것입니다. 이 기간 동안 이들 국가의 기대수명은 6,5년 밖에 늘어나지 않아 20세기 초에 비해 30% 수준으로 줄어들었다는 사실입니다. 또 2019년에 태어난 아기가 100세까지 생존할 확률은 여성 5,1%, 남성 1,8%에 그쳤다는 것입니다. 연구팀은 앞으로도 인류의 100세 생존율은 남성 5%, 여성 15%를 넘지 못할 것으로 전망합니다. 더 이상의 백세시대는 한마디로 기대난망이라는 뜻입니다.
연구팀은 이런 현상의 요인을 약물 과다복용, 의료서비스의 불평등, 일빙을 유도하는 현대인의 생활패턴 같은 사실을 들었습니다. 특히 올샨스키 교수는 지금 인류가 전개하는 ‘장수게임’은 영유아, 어린이, 가임여성의 기대수명 늘리는 프레임이 아니라 60~80세 인구를 중심으로 하는 ‘노화와의 전쟁’이라고 정의합니다. 이같은 흐름은 인류의 기대수명을 늘리는 근본적 대안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생물학적 노화를 지연시킬 신약이나 신기술이 등장하지 않는 한 기대수명이 예전처럼 대폭 늘어나지 않을 것은 분명하다는 주장입니다. 물론 지금도 미국 하버드 의대 데이비드 싱클레어(David A. Sinclair)교수 연구팀은 염색체에서 노화를 유발하는 텔로미어(말단소체)의 길이를 길게 유지하기 위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또 일본 교토대 야마나카 신야(山中伸弥) 교수팀은 쥐를 대상으로 유전자 조절 단백질을 삽입해 노화세포를 정상세포로 전환하는 연구로 노벨상을 수상한 바도 있습니다. 하지만 올샨스키 교수의 이번 연구결과는 이같은 노력들의 한계상황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의 주장을 사회 전체적인 구조개혁의 신호로 해석해야 할 것입니다. 즉 큰 폭의 기대수명 증가에 초점을 맞춘 기존 보험정책의 변화, 은퇴계획 수정 등등이 이에 포함될 것입니다.
이처럼 100세 시대 흐름이 이미 둔화하기 시작했다면 각자에게 허용된 기대수명까지 남은 시간 동안 우리가 누려야 할 웰빙의 밀도는 더더욱 소중한 가치를 지닌다고 하겠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지난달 강의에서 다루었던 웰빙 스펙트럼 7가지 모듈, 즉 웰니스의 삶으로 나아가는 길은 여전히 주목할 가치가 충분한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시간은 지난번 ‘수용’에 이어 ‘변화’라는 모듈을 다루어 보겠습니다.
우리가 흔히 듣는 인사말 가운데 ‘여전(如前)하시죠?’라는 말이 있습니다. 물론 ‘별 탈 없이 잘 지내느냐?’라는 뜻이지만 엄격하게 말하면 틀린 인사말입니다. 우리 몸은 지금 이 순간에도 1초에 380만 개의 세포를 교체하니까요. 인간은 눈 깜짝할 사이에 수백만 개의 세포가 죽어가고 다시 생겨나기 때문에 도저히 여전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게다가 바람직한 인사말도 아닙니다. ‘더 나빠지진 않았느냐?’라는 뜻이니까요. 여기에서 변화의 개념은 아예 찾아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우리에게 변화는 더 이상 선택사항이 아닙니다. 비유하자면 변화는 삶의 생기를 유지하고 싶은 사람들이 다니는 웰빙학교의 필수과목입니다. 그래서 법정 스님도 ‘매일 조금씩 나아지는 변화가 없으면 우리의 삶은 녹슬어 버린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전(如前)한 삶’은 아무 탈 없는 삶이 아니라 오히려 녹슬어가는 삶이 되는 셈입니다. 녹슬지 않는 삶, 즉 우리가 더 나은 삶을 위해 변화해야 하는 이유는 달리고 있는 기차를 따라잡으려면 그보다 더 빨리 달려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대열에서 밀려나 뒤로 처지고 남겨지기 때문입니다. 그게 바로 녹슬어가는 삶입니다.
돌아보면 변화를 나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변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 뿐입니다. 다시 말해 어떻게 하면 제대로 변화할 수 있는지를 잘 모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1) 우선 여기서 말하는 변화는 거창한 변화가 아닙니다. 다만 주변환경과 삶의 조건에 보폭을 맞추는 변화일 뿐입니다. 말 그대로 step by step입니다. 날마다 조금씩 이루어지는 소소한 생각과 행동의 변화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변화가 소중한 이유는 작은 변화가 모이고 쌓이면 결국 큰 변화가 되고 이것이 마침내 삶의 질을 바꾸어주기 때문입니다. (2) 또 하나, 여기서 말하는 변화는 남과 비교하는 변화가 아닙니다. 오직 나 자신의 변화일 뿐입니다. 이게 중요합니다. 작년보다, 지난달 보다, 어제보다, 더 나은 오늘, 나 스스로 이루어나가는 변화를 말합니다. 이를 위한 가장 중요한 전제조건은 우선 나 자신을 수용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변화에 실패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이같은 수용 없이 무턱대고 무작정 바꾸려고만 하기 때문입니다.
세상만사 재미없는 일, 부정적인 프레임에 갇혀있는 일은 절대로 오래 가지 못합니다. 변화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 ‘재미있다.’, ‘재미없다.’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다른 분야는 잘 몰라도 제가 평생 몸담고 살아 온 지식의 세계에서는 ‘몰랐던 걸 알게 되면’ 그건 바로 재미있는 것이 됩니다. (3-1) 재미와 더불어 변화의 키워드는 긍정입니다. 즉 변화의 담론에서도 이같은 마음의 프레임은 매우 중요합니다. 다시 말해 제대로 된 변화를 위해서 꼭 필요한 기초작업은 내 마음의 프레임을 긍정적으로 전환시키는 일입니다. 예컨대 막 개찰구를 지나는 순간 전철이 도착한다는 알람음이 들린다고 칩시다. 지각하지 않으려고 뛰어가 아슬아슬하게 올라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뛰어봤자 어차피 놓칠 테니 다음 전철 타자고 느릿느릿 걸어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차이가 발생하는 이유는 사람마다 지각했을 때 경험했던 각자 다른 기억이 범주화되어 뇌의 예측 시스템에 저장되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경험이 다르면 기억이 다르고 기억이 다르면 개념이 다르고 개념이 다르면 예측이 다르고 예측이 다르면 행동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나의 판단과 행동은 다 과거의 경험이 축적된 결과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은 경험정보가 생산한 뇌의 예측 시스템에 따라 사물과 세상을 인식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뇌는 생존의 유리함을 따져 혹은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여러 경험 정보들을 선별, 편집한다는 사실입니다. 일부만 선택하고 일부는 무시해 버립니다. 착시현상이나 인지적 편향이 일어나는 이유입니다. 결국 우리의 마음 프레임은 뇌에 의해 재구성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실질적인 변화를 통해 삶의 가치와 의미를 중심으로 내 마음의 프레임을 긍정적으로 바꾸는 의도적 노력이 필요합니다. 여기서 프레임을 바꾼다는 말은 세상을 바라보는 내 생각을 바꾼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변화’란 결국 마음 프레임의 변화인 것입니다. 물론 생각을 바꾼다고 저절로 변화하는 것은 아니지만 생각이 바뀌지 않으면 어쩌다가 행동이 바뀌어도 그건 진정한 변화로 이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전문가들이 제언하는 긍정적 마음 프레임의 전환기법은 의식적인 노력으로 심리적 전환을 이루어낼 수 있다는 전제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1) 주의 돌리기입니다. 부정적인 생각이 떠오르면 의식적으로 주의를 돌려 다른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2) 거리두기입니다. 자신의 부정적인 생각이 사실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의심하며 그런 생각과 거리를 벌리는 것입니다. 3) 반박하기입니다. 자신의 부정적인 생각에 스스로 반론을 제기하고 공격하는 것으로 이를 통해 낙담하거나 포기하는 것을 방지하는 것입니다. 4) 대안찾기입니다.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의 원인이 여러 가지라고 생각할 때 그중 가장 덜 치명적인 것을 선택해 생각을 바꾸는 것입니다.
예컨대 비관주의자들은 늘 여러 원인 가운데 가장 나쁜 원인에 주목하는 사람들입니다. 의식적인 선택을 통해 심리적 전환을 이루어 낼 수 있어야 우리의 삶에도 진정한 변화가 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저명한 심리학자이자 <<몰입의 즐거움>>이란 책의 저자인 미하이 칙센트미하이(Mihaly Csikeszentmihaly)는 변화의 가능성에 대해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다행히도 개인이 주도적으로 선택해 현실을 바꿀 수 있는 여지는 얼마든지 있다. 운명의 굴레를 박차고 나올 수 있는 가능성이 가장 높은 사람은 바로 이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이다.’
또 변화에서 중요한 것은 충분한 시간과 제대로 된 방향입니다. 변화는 시간과의 싸움이므로 한 번에 뚝딱 이루어지는 변화란 없습니다. 널리 알려진 말콤 그래드웰(Malcolm Gladwell)의 <<아웃 라이어>>에 이른바 ‘1만 시간의 법칙’이 있습니다. 반복적 경험과 학습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으로 변화의 지속적 속성을 지적한 용어입니다. 즉 무슨 일이든 1만 시간, 즉 하루 8시간씩 5년을 꾸준히 투자하면 전문가의 경지에 오를 수 있고 자신의 몫을 충분히 해 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랜 시간 네비게이션 없이 주소만으로 런던의 길거리를 누비는 ‘블랙캡’ 운전기사들의 해마가 런던의 버스기사 보다 더 크다는 얘기도 마찬가지입니다. 해마는 기억력과 공간지각능력을 관장하는 뇌의 영역인데 이같은 신경계 구조가 변형되는 현상, 즉 이른바 ‘신경가소성’이 일어날 때 비로소 제대로 된 변화가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반복적 경험이 루틴이 되고 습관이 되어야 자기의 것으로 체화됩니다.
큰 사고가 일어나기 전에 반드시 그와 유사한 작은 사고들이 먼저 일어난다는 경험적 논리를 말하는 이른바 ‘하인리히 법칙(Heinrich’s Law)’이란 게 있습니다. 이걸 우리가 긍정적 변화의 수단으로 바꾼다면 앞에서 말한 반복이 가져다주는 지속적 경험과 변화의 상관성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 ‘에빙하우스 곡선(Ebbinghaus curve)’ 이론에 의하면 우리가 한번 배우고 기억한 내용은 한 달이 지나면 20%밖에 남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전문가들은 ‘기억이 빠르게 사라지는 것을 막는 방법은 ’어떤 내용을 학습한 후 바로 복습하고 연이어 복습을 반복하는 것‘ 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라틴어로 ‘교육’이란 말은 ‘반복’이란 말에 어원을 두고 있다고 합니다. 요컨대 변화 역시 꾸준한 반복으로 이루어진 인내의 결실인 셈입니다.
변화에서 무엇을 전제로 하는냐는 매우 중요합니다. 앞에서 말한 말콤 그래드웰의 ‘1만 시간의 법칙’에 대해 세계적 심리학자 안데르스 에릭슨(Andres Ericsson)은 얼마나 오랜 시간하느냐 보다 얼마나 많은 신중한 연습, 즉 올바를 방법을 선택하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에릭슨과 그의 연구팀은 전체 성과에서 노력이 차지하는 비율은 30% 정도인데 음악은 21%, 스포츠는 18%라고 말합니다. ‘타고난 재능이 중요하다.’라는 뜻이라서 좀 실망스럽긴 합니다. 하지만 에릭슨은 재능 못지않게 중요한 게 바로 ‘신중한 연습’, ‘의식적 집중과 몰입’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보다 먼저 내가 도대체 어떤 타고난 잠재력과 자원을 가지고 있는지를 모를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독수리의 날갯짓’처럼 누구든 잠재적 소인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발견하고 개발하려는 시도가 없다면 변화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 잠재력을 발견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어떤 일을 할 때 진심으로 즐거운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정교육, 학교 교육의 가장 큰 과제는 성장기 아이들의 잠재력을 찾아내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좋아하는 일을 꾸준히 하는 것이 변화의 본질임을 강조했습니다. 문제는 방법입니다. 한자로 ‘變化’에서 변할 ‘變’자를 풀어보면 헝클어진 실타래를 막대기를 편다는 뜻입니다. 이를 위한 3가지 막대기, 즉 우리가 찾고자 하는 변화의 방법이 필요한 것입니다. 전문가들은 그게 바로 명상, 운동, 독서라고 말합니다. 꾸준히 할 수 있는 운동은 몸의 움직임을 통해 많은 감각을 경험하고 이를 변화의 에너지로 활용하는 첫 번째 막대기입니다. 또 나만의 변화를 어떻게 이끌어 갈지를 성찰하는데는 독서만한 것이 없습니다. 짝, 홀수 이런 식으로 날을 정해 놓고 하루씩 유튜브를 보는 대신 독서를 하면 일상의 습관으로 자리 잡기가 쉬울 것 같습니다. 명상 역시 긍정적 마음 프레임을 갖추는 것뿐만 아니라 몰입을 위해서도 매우 중요한 변화의 막대기입니다.
특히 몰입은 변화의 가장 중요한 키워드입니다. 주어진 과제를 잘 수행할 때 일어나는 몰입은 만족감을 넘어 행복감을 주고 더 잘하고 싶다는 강력한 동인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래야만 다시 그 일에 내가 힘을 다할 때 비로소 변화가 일어나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몰입은 ‘내가 잘하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주제가 적당히 도전적이어야 하고 ‘상당한 실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예컨대 등산가 엄홍길이 서울 북악산을 오르면서 몰입을 경험할 수 없고 등반경험이 없는 사람이 히말라야 등반 도전에 몰입하기란 불가능한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나의 경우 칼럼쓰기와 영어번역에서 늘 몰입을 경험합니다. 이렇게 하면 잡념 없이 한 가지 주제로 자료를 모아 정리하고 글을 쓰면서 3~4시간 정도의 몰입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아울러 한편의 완성된 글이 주는 성취감, 만족감, 행복감을 동시에 느낍니다. 그리고 그 자체가 바로 내게는 나름 소중한 변화의 과정입니다. 변화한다는 것은 여전히 젊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왜일까요. 변화는 성장을 의미하고 성장은 젊음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문학청년이란 말은 있어도 문학원로라는 말은 없습니다. 다시 말해 마음이 젊지 않으면 글을 쓸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게 시든 수필이든 소설이든 논문이든 제가 즐겨 쓰는 칼럼이든 마찬가지입니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우리가 일상에서 꾸준히 변화를 추구하는 것은 나이와 상관없이 우리 마음에 여전히 젊음의 기상이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꼭 지적인 경우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과제와 실력이라는 두 함수의 조건만 맞다면 그게 어떤 분야든 몰입을 경험할 수 있고 얼마든지 성장과 변화를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운동 해부학에 ‘가동범위(ROM/range of motion)라는 말이 있습니다. 움직일 수 있는 범위를 말하는데 최대한 몸을 움직여 자기 몸의 가동범위를 최대치로 높이는 것이 건강한 삶이라는 것입니다. 요가, 스트레칭 등등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최대 가동범위로 살지 않고 살던 대로만 살면 관절이 굳듯이 인생이 굳고 아픔이 찾아오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일상을 가끔씩 되돌아보고 내가 어떤 일에 최대치로 일하고 있는지를 점검해 보고 부족한 부분을 끌어올리는 것입니다. 변화는 절대로 Best를 지향하는 것이 아닙니다. 날마다 조금씩 성장하는 Better and Better일 뿐입니다. Best가 아니라 Best에 가까워지는 삶이 더 가치있고 행복합니다.
매일매일 조금씩이라도 최대치의 삶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오늘 했으니까 내일은 안 해도 된다가 아닙니다. 우리의 인생도 돌아가지 않고 멈추면 녹이 슬고 문제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이런 과정에서 제약조건은 누구에게나 다 있기 마련입니다. 하나만 가진 사람은 하나만 가지고 하면 되고 열을 가진 사람은 열을 가지고 하면 됩니다. 몸이 말을 안 듣는다는 것도 솔직히 핑계입니다. 나이 들어 눈이 침침하고 귀가 잘 안 들리고 다리에 힘이 없고 단단한 걸 잘 씹지 못해도 할 수 있는 것은 반드시 있고 그 할 수 있는 것을 하면 됩니다. 심지어 감옥이라는 극단적 여건에서도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은 가능합니다. 삼성 이재용 회장은 감옥에서 주는 밥을 늘 다 비우고 정해진 시간에는 누구보다 열심히 조깅하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조건에 그가 할 수 있는 그 나름의 변화를 위한 삶의 모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경험으로 채워집니다. 느낌, 생각, 행동이 다 경험이고 어떤 경험이냐에 따라 삶의 질이 달라집니다. 앞에서 말한 몰입이나 최대치의 삶도 경험의 방향과 내용을 바꾸는 것입니다. 이때 생각을 바꾸는 것은 경험의 방향을 결정하고 행동은 경험의 내용을 재구성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생각에만 잠겨있고 행동으로 나아가지 못하면 결국엔 다시 부정적인 생각으로 되돌아간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정신과 의사들은 그 대안으로 오감을 충족하는 소소한 기쁨을 통해 생각, 즉 머릿속에 머물던 변화를 현실로 바꾸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를 설명하는 자료가 수용전념치료(Acceptance Commitment Theraphy/ACT)매트릭스입니다.
앞에서 여러번 강조했지만 변화를 위해서는 몰입이 중요한 키워드이긴 합니다. 하지만 몰입도 때로는 시들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몰입을 지속시키려면 계속해서 더 어려운 과제에 도전해 자기 최대치를 발휘하기 위한 마음가짐과 태도가 필요합니다. . 여기서 말하는 몰입은 물론 생각만의 몰입이 아니라 오감과 행동을 통한 경험으로서의 몰입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리고 변화의 키워드로 하나 더 추가한다면 서두르지 말고 그냥하는 것입니다. 외국 사람들이 한국어 가운데 가장 먼저 배우는 말이 ‘빨리빨리’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물론 우리에겐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속담도 있긴 합니다. 사실 말은 쉬워도 사람에겐 관성의 속성이 있어서 관성에 따라 사는 게 익숙하고 그래서 편안함을 느끼고 변화의 필요성을 잊고 삽니다.
물리학자 디르크 헬빙(Dirk Helbing)과 타마스 비첵(Támas Vicsek)이 컴퓨터를 이용한 보행자 모델을 통해 비상구를 빠져나가는 군중들의 행동을 시뮬레이션한 후 그 결과를 <네이처>지에 발표한 바 있습니다. 그 결과 사람들이 빨리 나가겠다고 출구로 모여들수록 빠져나가는 속도는 오히려 더 느려진다는 것입니다. 평상시에는 45초 동안 초속 1미터로 총 90명이 빠져나갑니다. 반면 위기상황을 설정해 놓고 모두가 서둘러 초속 5미터로 나가면 서로 몸이 부딪치면서 오히려 속도가 느려져 총 65명밖에 나가지 못합니다. 또 서로 밀치며 몸싸움하느라 200명 중 5명이 쓰러지고 45초 동안 빠져나오는 사람은 44명으로 줄어들더라는 것입니다. 빠져나오려는 사람이 많을수록 속도는 더욱 줄어듭니다. 만약 400명이 한꺼번에 빠져나오려고 출구로 몰리면 45초간 단 3명 밖에 나오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인간공동체의 수준을 판별하는 척도를 줄서기 능력이라고 말합니다. 줄서기는 언제 어디서나 위대한 질서입니다. (Make a line is the Great Order any where any time.)
그래서 일상이 바쁘다는 생각이 들면 ‘잠시 멈춤’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우리는 ‘너무 바빠서 정신이 없다.’라는 말을 쉽게 하는데 너무 바쁘면 내적 에너지가 소진되어 실제로 ‘정신없는 상태’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가끔은 뇌의 디폴트모드 네트워크를 활성화해서 ‘마냥하자’, 즉 ‘마냥’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음미하는 삶의 자세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명상, 멍때리기 같은 비슷한 코드가 되는 것입니다. DMN, 즉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는 뇌가 아무런 작동을 하지 않을 때 작동하는 부위인데 아무 생각하지 않고 휴식을 취할 때 활성화됩니다. 이런 기전이 반복적으로 이루어져야만 수면의 질도 높아지고 우울감도 줄일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변화의 또 다른 방법론적 제언은 ‘and’하지 말고 ‘or’하자는 것입니다. ‘and’를 교집합이라 하고 ‘or’를 합집합입니다. 교집합은 복수의 집합들에 공통으로 들어있는 것의 집합이고 합집합은 복수의 집합에 포함된 모든 것을 말합니다. 수학의 연산에서도 A and B and C and D보다 A or B or C or D의 수가 훨씬 더 큽니다. 바쁘게 사는 사람들의 대표적 특징이 가능한 한 많은 일을 다 잘 해내려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삶의 자세는 예외없이 번 아웃으로 나아가는 지름길입니다. 요컨대 진정한 변화를 이루어나가는 행복한 삶은 내가 바라는 삶에 딱 들어맞는 삶이 아닙니다. 완전하지는 않을지라도 비슷하게 좋은 삶, 즉 근사한 변화가 바로 건강한 변화입니다.
이제 메인 주제 강의를 마무리하면서 변화의 가장 중요한 핵심 동력인 ‘호기심’의 본질을 얘기해 보겠습니다. 어쩌면 인류 문명사의 흐름에서 호기심의 흔적을 지우면 아무것도 남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 호기심과 허세, 그 사이 어디쯤을 걸어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아직도 모르는 게 많다는 생각이 들면 호기심이 생길 여지가 충분하지만 호기심이 메말라가면 어김없이 허세가 그 자리를 채우기 시작합니다. 인생 마무리에 이르러 대차대조표를 작성해보면 호기심이 많았던 인생이 늘 성공한 인생, 행복한 인생이었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진짜 과학자들은 죽기 직전까지도 호기심을 버리지 않습니다. 예컨대 위대한 천문학자 칼 세이건(Carl E. Sagan)은 임종 직전에도 ‘나에게 신을 믿으라 하지 마라. 나는 아직도 이 우주에 대해 더 알고 싶을 뿐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번에 노벨 문학상을 받은 한강 작가도 어느 인터뷰에서 ‘저는 언제나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 그리고 산다는 게 도대체 무엇인지에 대해 자꾸 생각하는 사람이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그런 고민을 매번 다른 소설로 다루고 싶어 했고요.’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이같은 유명 지식인들이야 당연히 호기심의 끝판왕이고 평범한 보통 사람들과는 물론 차원이 다릅니다. 하지만 오늘도 우리는 이런저런 이유로 호기심에 민감한 삶의 방식을 스스로 학습하기를 게을리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강의 같은 배움의 공간에서도 늘 질문을 애써 피하거나 무관심이나 나름의 허세로 호기심을 억누릅니다. 그 결과 나 자신의 삶을 유익하게 할 변화와 성장을 스스로 주저하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되돌아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린 날, 저는 어머니와 함께 수십 리 떨어진 산길을 걸어 아주 인자한 할머니같은 주지 스님이 늘 반겨주던 조그마한 절에 자주 다녔습니다. 오가는 길 나는 어머니께 끝없이 이런저런 질문을 했고 어머니는 지치지도 않고 대답해 주셨습니다. 예컨대 ‘이 흙은 어떻게 생겼고 돌과 바위는 어떻게 생겼느냐?’같은 질문에 어머니는 ‘흙은 사람과 짐승같은 생명체가 죽은 후 땅에 묻혀 그 살이 변한 것이고 돌과 바위는 그 뼈가 변한 것이다.’라는 식으로 답해주셨습니다. 아마도 어머니는 ‘사람은 죽으면 다 흙으로 돌아간다.’라는 말을 그렇게 표현하신 듯합니다. 사실관계의 정확성 여부를 떠나 어린 아들의 유별난 호기심을 정성으로 상대해 주신 어머니 덕분에 이후에도 나는 건강한 호기심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돌아보면 호기심은 특별한 사람들에게나 있는 역량이 아닙니다. 호모사피엔스 인간은 다른 생명체들과는 달리 모체에서 아주 미숙한 상태로 태어납니다. 고생인류가 직립하면서 태아가 나오는 여성의 산도(産道)가 좁아졌기 때문입니다. 태아를 오랫동안 배 속에서 키울 수 없었던 이유입니다. 그래서 인류는 뇌도 말랑말랑하고 몸도 견고하지 못한 상태의 아기를 빨리 낳아놓고 오랜 기간 양육하는 방식으로 생활사가 전환된 것입니다. 물론 이후 제왕절개가 난산의 대안으로 널리 시행되긴 했지만 임신 10개월 출산의 비밀은 직립보행이 가져다준 고생인류사의 분명한 흔적입니다. 지극히 불완전한 존재로 태어난 인간이 자궁 밖의 험난한 세상을 살아갈 추론능력, 언어능력, 사회적 지능 등을 일찍부터 가동시킬 진화의 필요성이 절실했던 것입니다. 이를 위해 인류가 갖추게 된 스위치가 바로 호기심이라는 사실입니다. 요컨대 호기심은 자궁 밖 세상의 수많은 자극에 대한 궁금증을 본능적으로 유발하게 하는 스위치인 셈입니다. 이 호기심의 스위치는 배운다는 사실을 즐거움으로 바꾸어줍니다. 이를 통해 인류는 성장과 변화를 통해 환경을 극복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만약 인간에게 본능적으로 작동하는 호기심의 메커니즘이 망가져 버렸다면 ‘배움의 지루함’이 결국 인간의 생존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릅니다. 결국 호기심은 호모사피엔스 인간을 만물의 영장이라는 매우 특별한 종(種)으로 만들어 낸 비밀 병기인 것입니다.
예외가 없는 바는 아니지만 ‘너무 많이 배웠다거나, 오래 살았다거나, 많이 겪어봤다.’라는 경험의 누적들은 쉽게 허세로 이어지고 어김없이 자만심을 키울 수 있습니다. 인생의 연륜은 그 크기만큼 허세와 비례하고 호기심과 반비례할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이런 의미에서 호기심과 허세는 공존할 수 없습니다. 전문가들은 요즈음의 우리 사회에 호기심이 점점 메말라 간다고 우려합니다. 인간의 내재적 동기인 호기심이 메말라가는 사회는 직업, 직위, 인맥, 금전적 보상, 외모 같은 외적인 결과값에만 지나치게 의존하는 사회로 변색되기 쉽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이런 사회가 되면 열정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소소한 일상들이 폄하되고 한방을 좇아 남들에게 과시하기 위해 행동하는 사람들의 허세가 가득한 세상으로 변합니다. 한국은 교육열은 세계 최고인 나라인데 성인 10명 중 6명이 1년에 단 한 권의 책도 읽지 않는다고 합니다. 건강한 호기심이 메말라간다는 증거입니다. 허접한 호기심만 자극하는 유튜브, SNS, 입만 둥둥 떠다니는 허장성세의 정치문화가 우리 시대를 허세로 가득차게 만들고 있습니다. 최재영, 명태균 같은 정치 브로커가 세상을 휘저을 수 있는 이유입니다. 우리를 변화와 성장으로 인도하는 건강한 호기심이 참으로 아쉬운 오늘입니다. 이로써 오늘 메인 주제인 마음 이야기를 끝내고 서브 주제로 몸 이야기 몇 꼭지를 전해 드리겠습니다.